답사와 여행(국내)/충청남도

관촉사/논산(15.01.17)

케인스 2015. 2. 19. 23:11

 

 

관촉사(灌燭寺) / 반야산(盤若山)

 

 

 

충청남도(忠淸南道) 논산시(論山市) 관촉사(灌燭寺)

 

 

 

관촉사(灌燭寺) 위치 <참고자료>

 

관촉사(灌燭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반야산(盤若山) 기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관촉사(灌燭寺) <참고사진>

 

관촉사(灌燭寺)고려 광종19년(968)착공하여 목종9년(1006) 승려 혜명(慧明)에 의해 완공되었으며, 유적으로는 보물 제218호인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인 일명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 유명한 사찰입니다.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고 전하는 목조 건축물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혜명(慧明)에 의해 조성된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백호 수정(水晶)에서 발한 빛이 세상을 비추고 중국 송(宋)나라의 명승 지안(智眼)대사가 그 빛을 찾아와 예불하면서 그 빛이 마치 촛불과 같다고 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灌燭寺)라 하였다고 전합니다. 『사적기』에 따르면 고려 우왕12년(1386) 법당과 정문이 중건되었으며, 조선 선조14년(1581)에는 백지가, 현종15년(1674)에는 지능이, 그리고 영조11년(1735)에는 성능이 각각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관촉사(灌燭寺) 가람배치도 <google참고사진>

 

현존하는 당우로는 일주문(一柱門),을 비롯해 천왕문(天王門), 반야루(盤若樓), 대광명전(大光明殿), 명부전(冥府殿), 미륵전(彌勒殿), 종루(鐘樓), 삼성각(三聖閣), 요사(寮舍) 등의 전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18호로 지정된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과 보물 제232호인 석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인 배례석(拜禮石),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인 석문(石門) 그리고 오층석탑(五層石塔)과 사적비(寺跡碑) 등이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 충청도(忠淸道) / 은진현(恩津縣)편 “불우(佛宇)”조, 관촉사(灌燭寺) <참고자료>

 

"관촉사(灌燭寺)는 반야산(般若山)에 있고, 돌미륵[石彌勒]이 있는데 높이가 54척이나 된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 고려 광종(光宗) 때에 반야산 기슭에 큰 돌이 솟아 오른 것을 중 혜명(慧明)이 쪼아서 불상을 조성하였다."

 

관촉사(灌燭寺) 전경 <참고사진>

 

관촉사의 건립 배경에 대해서는 이 곳에 사는 마을 노인이 반야산에 고사리를 캐러 올라갔다가 갑자기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커다란 바위가 솟아올라 이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절을 짓고 불상을 세웠다고 전해져 옵니다.

 

관촉사(灌燭寺)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 일명 '은진미륵(恩津彌勒)' <참고사진>

 

                     馬邑之東百餘里(마읍지동백여리), 市津縣中灌燭寺(시진현중관촉사)

                     有大石像彌勒尊(유대석상미륵존), 我出我出湧從地(아출아출용종지)
                     巍然雪色臨大野(외연설색임대야), 農夫刈稻充檀施(단농부예도충시)

                     時時流汗警君臣(시시유한경군신), 不獨口傳藏國史(불독구전장국사)

 

                                                <고려말 학자 목은 이색(牧隱 李穡:1628~1396)의 시(詩)>

 

마읍(馬邑) 동쪽 백여 리, 시진(市津) 고을 관촉사.

큰 돌부처 미륵불은 ‘내 온다. 내 나온다.’ 하고 땅에서 솟아났네.

눈같이 흰 빛으로 우뚝이 큰 들을 굽어보니, 농부들 벼를 베어 능히 보시(布施)하네.

돌부처 때때로 땀 흘려 군신(君臣)을 놀라게 했다 함이, 어찌 구전(口傳)만이랴, 국사(國史)에 실려 있다오.

 

 

● 일주문(一柱門)

 

 

일주문(一柱門)

 

관촉사(灌燭寺) 일주문은 관촉사 입구인 동네에 세워져 있습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사실상 사찰 경내에 들어서는 것이고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주문(一柱門)이란 사찰에 들어가는 산문(山門) 중 첫 번째 문이며,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일주문 현판: 盤若山灌燭寺(반야산관촉사) <참고사진>

 

 

● 천왕문(天王門)

 

 

천왕문(天王門)

 

천왕문(天王門) 은 매표소와 인접해 자리잡고 있는데 사천왕을 모시고 동서남북 네 지역의 하늘과 땅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고, 밖에서 오는 사마(邪魔)를 방어하는 뜻으로 세웠습니다.

 

                 

                  천왕문(天王門) 현판 <참고사진>

 

 천왕문(天王門) <참고사진>

 

천왕문(天王門) 안쪽 좌우로는 나무로 만든 네 명의 험상궂은 천왕상을 배치하였습니다. 중앙 통로를 통과하는 동안 좌우에서 무서운 수호신이 눈을 부릅뜨고 위협적인 자세로 지켜보고 있으니,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자연히 옷깃을 여미지 않 수 없게 됩니다. 네 명의 천왕상은 동쪽의 持國天王(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입니다.

 

 

서쪽을 관장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과 여의주를 들고있고,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보탑을 들고 있는 모습니다.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비파를, 남쪽을 관장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보검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남(雩南) 이승만 박사(李承晩 博士) 추모비(追慕碑)

 

 

             

              반야루(盤若樓) 오르는 길의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박사(博士) 추모비(追慕碑) <참고사진>

 

반야루(盤若樓) 아래엔 이승만 전 대통령 추모비가 있습니다. 논산 연무대에 포로수용소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반공포로 석방으로 자유를 찾은 반공 청년들이 이 전 대통령이 전쟁 포로들을 남한에 정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여, 이들이 그 고마움을 추모비에 담아 이 전 대통령의 서거 후 세운 추모비입니다. 

 

                                             雩南李承晩博士追慕碑(우남 이승만 박사 추모비)

 

                                              추모비(追慕碑) 뒷면 <참고사진>

 

추모비(追慕碑)에는 1965년 '대한반공청년회 논산군지부' 명의로 이승만 전 대통령의 포로 석방을 칭송하는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반공포로 석방은 1953년 이 전 대통령이 내린 결단으로 북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전국 7개 수용소 내 2만7022명의 반공포로를 감시하는 미군을 따돌리고 일거에 탈출시킨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 반야루(盤若樓)

 

 

반야루(盤若樓) <참고사진>

 

반야루(盤若樓)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현재 '마곡불교대학 논산캠퍼스'강의실 및 각종 사중 행사 및 법회 장소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반야루(盤若樓) 뒷면

 

반야루(盤若樓) 뒷면에는 '불광보조(佛光普照)'라고 쓰여있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온누리에 비추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반야루(盤若樓) 현판, 불광보조(佛光普照) <참고사진>

 

 

대광명전(大光明殿)

 

 

대광명전(大光明殿)

 

대광명전(大光明殿)은 1층이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안에서는 통층(通層)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대광명전(大光明殿) 현판


대광명전(大光明殿)은 대광보전(大光寶殿),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맑고 깨끗한 법신(法身)인 비로자나 부처님이 두루 비치는 빛, 즉 광명(光明)이니 적광(寂光)이니 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데서 유래한 것으로 비로자나 부처님이 봉안된 집이라는 뜻입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화엄경의 주불로 화엄종 사찰의 주불전일 경우 이 이름을 붙이고 있으며, 주불전이 아닐 경우에는 비로전(毘盧殿)이라고 합니다.

 

                      대광명전(大光明殿) 삼신불(三身佛) <참고사진>

 

대광명전(大光明殿)에는 법신불인 비로자나 부처님, 보신불인 아미타 부처님, 화신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봉안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관촉사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많은 수의 선종사찰에서는 선종의 삼신설에 따라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 원만보신 노사나 부처님, 천백억화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십니다.

 

            삼신불(三身佛)인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참고사진>

 

               대광명전의 탱화 <참고사진>

 

 

● 명부전(冥府殿)

 

 

                 명부전(冥府殿) <참고사진>

 

명부전(冥府殿)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하는 전각입니다.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곳이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지옥의 심판관 시왕을 모시 곳이므로 시왕전(十王殿),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전각이므로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합니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冥府殿) 현판 <참고사진>

 

 <참고사진>

 

명부전(冥府殿)에는 주불(主佛)인 지장(地藏)보살을 중심으로 협시로 봉안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그리고 좌우에 명부시왕상(冥府十王像)이 모셔져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불교의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보살님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겠다는 대원을 세웠고,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六道)의 중생을 낱낱이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명부전은 조상의 천도를 기원하는 법당이기도 합니다.

 

지장(地藏)보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참고사진>

 

명부시왕상(冥府十王像) <참고사진>

 

명부시왕상(冥府十王像) <참고사진>

 

                   명부전(冥府殿)에 모셔져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영정  <참고사진>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기 하루 전 관촉사 총무로 있던 우성스님의 꿈에서 영부인의 모습을 보았는데, 큰 바다에서 같이 고기를 잡고 있었고, 고기가 안 잡혀 그물을 끌어 올렸는데 그물에 구멍이 나 있는 꿈을 꾸게되었는데 영부인이 사망하자 남몰래 영정을 모셔놓고 49재를 지냈던 인연으로 관촉사에는 30년 넘게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영정을 명부전 한 켠에 모셔놓고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관촉사와 함께 박 대통령 내외가 자주 찾았다고 전해지는 서울 도선사와 박 대통령 친필 현판이 있는 경북 직지사가 박 대통령 내외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찰입니다.

 

 

● 미륵전(彌勒殿)

 

 

      미륵전(彌勒殿) <참고사진>

 

미래의 부처님이신 미륵부처님을 모신 전각이 미륵전입니다. 미래에 미륵부처님이 제도하는 세계를 '용화세계'라고 하여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하고, '미륵'의 한문의역인 '자씨'를 붙여 자씨전(慈氏殿) 이라고도 부릅니다. 관촉사에서는 은진미륵, 석등, 석탑, 미륵전을 일렬로 배열하여, 은진미륵부처님 바로 앞에서 미륵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는 법당을 세워 '미륵전'이라고 칭하였습니다.

 

미륵전(彌勒殿)

 

미륵전(彌勒殿)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내부에 들어서면  유리로 처리되어있는 북쪽면 전체를 통하여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이 보이고 우측에는 신중탱화(神衆幀畵)가 모셔져 있습니다.        

 

                   미륵전(彌勒殿) 현판 <참고사진>

 

미륵전(彌勒殿) 내부 <참고사진>

 

미륵전(彌勒殿)엔 불상이 없고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인 은진미륵(恩津彌勒)이 불상을 대신합니다. 미륵전 북쪽 벽이 유리로 돼 있어 은진미륵을 보면서 예불을 올릴 수 있습니다.

 

                미륵전(彌勒殿)에 모셔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영정 <참고사진>

 

                미륵전(彌勒殿)의 신중탱화 <참고사진>

 

 

● 석문(石門)

 

 

석문(石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

 

관촉사 경내에 들어서는 또하나의 길은 이 석문을 통과하는 길입니다.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석문(石門)은 일명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부릅니다. 문은 네모난 돌기둥을 양쪽에 세우고, 양 기둥 뒤쪽으로 길쭉한 돌을 5개씩 쌓아 옆면을 이루게 하였다. 기둥 위로는 네모지고 넓적한 돌을 얹어 놓아 전체적으로 4각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관촉사가 건립된 후 참배객이 몰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동·서·남·북 4곳에 이러한 문을 두었는데, 그중 동쪽에 세운 이 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문화재청자료>

 

경내에서 보는 석문(石門)

 

 

               석문(石門)의 정면 <참고사진>

 

  <참고사진>

 

 석문(石門) 기둥 왼쪽에 '解脫門(해탈문)', 오른쪽에 '관촉사'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윤장대(輪藏臺)

 

 

윤장대(輪藏臺)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회전식 불경보관대입니다.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전합니다.

 

 

                            

                              <참고사진>

 

 

종루(鐘樓)

 

 

                                            

                                             종루(鐘樓) <참고사진>

 

                     <참고사진>

 

 

●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 / 은진미륵(恩津彌勒)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 / 은진미륵(恩津彌勒): 보물 제218호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으로 흔히 ‘은진미륵(恩津彌勒)’이라고 불리며 높이가 18m에 이르는데, 당시 충청도에서 유행하던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冠)을 쓰고 있고, 그 위에는 이중의 네모난 갓 모양으로 보개(寶蓋)가 표현되었는데, 모서리에 청동으로 만든 풍경이 달려 있습니다. 체구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옷주름선이 간략화되어 단조롭습니다. 불상의 몸이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느낌을 주며, 대형화된 신체에 비해 조각수법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968)에 만든 관음보살상이라 전해지는데, 이 보살상은 경기, 충청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조성되었던 토착성이 강한 불상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어 크게 주목됩니다.   <문화재청자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미륵불(은진미륵)이라는 이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은 온몸의 길이가 19m, 둘레 9.2m, 귀 길이 2.7m, 눈썹 사이 1.8m, 큰 갓의 가로 3.3m의 크기입니다. 전체적으로 얼굴과 보관이 하나인 머리 부분이 한 돌, 가슴께가 한 돌, 허리 아래의 몸 해서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머리 위에 올려진 2층의 대형 고관(高冠)은 신라시대에는 유래가 없었던 새로운 것으로 고려불상에 보이는 특이한 형태 중의 하나입니다. 길게 표현된 관 부분은 그 자리에 청동제 관이 씌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보관(寶冠)을 고정하느라 뚫었을 구멍이 몇 개 보이며, 보관에 감싸였던 부분은 조각이 매끈하지 않고 조금 더 거친 채로 남아 있습니다. 보관위 보개(寶蓋) 모서리엔 청동제 풍경이 달려 있습니다.

 

 

손가락 모양이 마치 아미타불의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오른손에는 연화(蓮花) 가지를 들고 있고 이마 위에 있는 머리카락의 곡선적인 표현이나 세 줄로 늘어진 머리갈래가 귀 위를 덮은 것을 보면 원래부터 보살형(菩薩形)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인(手印) <참고자료>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은 관음보살상인데도 사람들은 흔히 미륵불이라고 부릅니다. 미륵이 대개 상을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있기보다는 조성된 내력에 따라, 또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 불리기에 그 두 이름이 다 통용되고 있습니다. 이 관촉사의 미륵은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관제미륵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관촉사 사적비에 따르면 고려 4대 광종 19년(968)에 왕명을 받은 혜명대사가 조성하기 시작하여 37년 만인 7대 목종 9년(1006)에 완성되었는데 찬란한 서기가 삼칠일 동안 천지에 가득하여 찾아오는 사람으로 저잣거리를 이룰 만큼 북적댔다고 합니다. 또한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에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로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부처님이 땀을 흘린다고 하며, 임진왜란, 한일병합, 6,25 동란 때도 며칠씩 땀을 흘렸다고 전합니다.

 

석조불단(石造佛壇) <참고사진>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 정면의 석조불단(石造佛壇)은 길이 730cm, 높이 94cm, 폭이 100cm로 공양을 올릴 때 사용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관촉사 은진미륵불의 유래

 

 

                    

                                         <참고그림>


고려 4대 광종 19년(968년)에 사제촌의 한 노파가 고사리를 뜯으러 반야산에 갔는데, 어디서인지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리므로 그곳에 가보니 큰 돌이 땅에서 솟아올라 있었다. 노파는 자신의 사위에게 이 사실을 알리어 관가에까지 보고되었고, 왕에게까지 상주하였던 바 신하들과 의견을 나누니 이는 석불이 될 조짐이라는 의견이 일치되어 혜명대사에게 명해 불상을 세우게 하였다.

 

                                    

                                                                         <참고그림>

 

혜명대사는 이에 100여 명의 석공들을 이끌고 내려와 대역사를 시작하였다. 우선 솟아오른 바위에 부처님의 아랫부분을 조각하고 다시 1,000여 명의 장사로 하여금 큰 돌을 운반케 하니 그 선두가 연산땅 남쪽 20리에 이르렀으므로 그 마을을 쇠머리라 하였다. 이 돌에다 부처님의 윗부분을 조각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가 너무나 거대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세울 수 없어 고심하던 차, 하루는 혜명대사가 사제촌을 거닐고 있을 때 두 동자가 강가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큰 돌 하나를 세우고 모래로 덮은 뒤 굴려 올려서 가운데 것을 세우고 또 모래로 덮은 뒤 굴려 올려서 맨 윗부분을 세운 뒤 둘레의 모래를 파내니, 부처 모형만 남는 것이었다.

 

                                        

                                                                                 <참고그림>

 

이에 스님은 크게 깨달아 불상 아랫부분을 흙으로 덮고 윗부분을 차례로 올려세워 무사히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불상을 완성하자 큰 비가 내려 존상을 씻어내었으므로 존상은 맑고 고왔으며, 상서로운 기운이 삼칠일 동안이나 주위에 서리고 눈썹 사이의 옥호에서 빛이 발산되어 온 누리에 비추었다. 이로부터 사방에 소문이 나서 여러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경배하는 자가 시장거리와 같아 그 앞 냇물을 시진이라 하였다. 중국의 지안이란 스님이 이 빛을 따라 찾아와 이르기를, 중국 가주 땅에도 큰 불상이 동쪽을 향하여 서 있는데 그 광채가 때를 같이하여 서로 응하였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관촉이라 이름하였다.

 

                         

                                                 <참고그림>


 

 

 

 

● 석등(石燈)

 

 

석등(石燈): 보물 제232호

 

관촉사 앞뜰의 큰 석불 앞에 놓여있는 4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식으로,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 새겨진 굵직한 연꽃무늬가 두터움을 드러내고 있다. 가운데 받침은 각이없는 굵고 둥그런 기둥으로 세웠는데, 위아래 양끝에는 두줄기의 띠를 두르고, 중간에는 세줄기의 띠를 둘렀다. 특히 중간의 세 줄기 중에서 가장 굵게 두른 가운데 띠에는 8송이의 꽃을 조각하여 곱게 장식하였다. 2층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1층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기둥이 빈약한 반면 창은 터무니없이 널찍하다. 각 층의 지붕들은 처마가 가볍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큼직한 꽃 조각이 서 있어 부드러운 조화를 이룬다. 꼭대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큼직한 꽃봉오리모양의 장식을 두었는데, 조각이 두터워서 인지 무거워 보인다. 전체적으로 뒤에 서 있는 석불 못지않게 힘차 보이나, 화사석의 네 기둥이 가늘어 균형이 깨지고, 받침의 가운데기둥이 너무 굵고 각이 없어 그 효과가 줄어든 감이 있다. 뒤의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과 함께 고려 광종 19년(968)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남한에서는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다음으로 거대한 규모를 보여준다. <문화재청자료>

 

 

1884~5년도 미국 대리공사를 지낸 폴크(George C. Foulk)씨가 찍은 관촉사 <참고사진>

 

석등(石燈)

 

석등은 어두운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깨달은 진리로 비추어 불성(佛性)을 밝혀 주는 등인데 처음에는 실용적 성격이 강했으나 후대에는 불전(佛殿)이나 탑 앞에 설치하는 장식적인 건조물로 변했습니다. 안정감이 약간 부족하나 전체적으로 크고 장중한 감을 주고있습니다.

 

                            불을 피우는 공간인 화사석(火舍石) 아래에는 여덟송이의 연꽃 문양으로 고운 띠를 둘렀습니다.

 

                                    원형 간주의 장식과 연화 하대의 복련문(覆蓮紋) <참고사진>

 

 

● 오층석탑(五層石塔)

 

 

오층석탑(五層石塔)

 

오층석탑(五層石塔)은 석등과 배례석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4층이나 체감률로 보아 5층으로 판단합니다. 이중기단이나 하층기단의 지대석, 하대갑석, 하대중석, 하대저석 등은 지하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상층기단은 하대갑석 상면에 올려 있으며, 상대중석의 각 모서리에는 우주가 조출되어 있고, 우주와 우주 사이에는 하나의 탱주가 모각되어 있습니다. 상대갑석과 초층옥신 사이에는 별석 1매가 놓여 있는데 별석의 상면에는 뚜렷하지 않지만 연화문이 복엽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탑신부의 옥개석에는 3단의 층급받침이 조출되어 있고, 상륜부는 특별한 조각이 없이 보주만 올려 있습니다. 석탑의 전체 높이는 343㎝이며, 옥개석의 조각 솜씨로 보아 고려 때에 지방마다 독특하게 정립해 가는 탑으로서 토속적인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층석탑(五層石塔)은 높이 4.5m, 둘레 3.6m의 꽤 다부진 몸매를 하고 있습니다.

 

 

석등 앞엔 5층 석탑이 있고 그 앞에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배례석(도지정유형문화재 제53호)이 놓여있습니다.

 

 

● 배례석(拜禮石)

 

 

배례석(拜禮石):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

 

관촉사 석등에서 약 10m 동쪽으로 떨어진 화단안에 있는 것으로,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됩니다. 직사각형의 받침돌 형태로,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옅게 새긴 후 그 안에 고사리 무늬 같은 버섯구름 모양을 새겨 넣었습니다. 윗면에는 가운데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좌우에 그보다 약간 작은 연꽃 두 송이와 2개의 연줄기를 조각하였습니다. 조각이 정교하고 장중한 맛이 풍기며,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화재청자료>

 

 

배례석(拜禮石)

 

배례석은 너비 40㎝, 길이 150㎝의 장방형 화강암 위에 팔엽(八葉)연화 3개가 연지(蓮枝)에 달려 있는 듯 실감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관촉사(灌燭寺) 사적비(寺跡碑)

 

 

관촉사(灌燭寺) 사적비(寺跡碑)

 

관촉사(灌燭寺) 사적비(寺跡碑)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옆에 위치해 있습니다. 1743년(영조 19) 조성한 것으로 비신에는 석조보살좌상을 만들 바위의 융기, 혜명에 의한 불상 조성, 관촉사란 사명의 유래, 보살상의 보수, 보살상의 찬미, 오랑캐가 쳐들어 왔을 때 나라를 구한 일과 후일 석불과 절 주변을 보수 정비한 내용 등이 빽빽하게 적혀 있습니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크기는 60×30×133㎝이며 귀부와 비좌 사이에는 연꽃 문양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귀부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아래에 80×57㎝ 크기의 지대석이 놓여 있습니다.

 

왼쪽의 비가 원래 관촉사(灌燭寺) 사적비(寺跡碑)이며, 오른쪽 것은 최근 새롭게 새긴 사적비입니다.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三聖閣)

 

삼성각(三聖閣)은 산신각으로도 불리워져 왔습니다. 곧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모신 경우를 삼성각이라 하며, 각각 별도로 모셨을 때는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이라 불리워집니다.

 

                  

                   삼성각(三聖閣) 현판

 

                삼성각(三聖閣)의 칠성탱화  <참고사진>

 

 

● 기타

 

 

 

            요사(寮舍) <참고사진>

 

 

 

 

 

 

관촉사(灌燭寺) / 반야산(盤若山)

(2015.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