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충청남도

갑사(甲寺)/공주(14.03.30)

케인스 2014. 6. 26. 18:15

 

 

갑사(甲寺) / 계룡산(鷄龍山)

 

 

 

☞ 충청남도(忠淸南道) 공주시(公州市) 갑사(甲寺)

 

 

                 갑사(甲寺) 위치 <참고사진>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계룡산 연천봉 아래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산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입니다. 계룡갑사(鷄龍甲寺), 갑사(岬寺), 갑사사(甲士寺), 계룡사(鷄龍寺)라고도 합니다.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백제 구이신왕1년(420) 고구려에서 온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는 설, 백제 위덕왕3년(556) 혜명대사(惠明大師)가 창건했다는 설,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혜명대사가 중창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백과사전>

 

            갑사(甲寺) 전경 <참고사진>

 

문무왕19년(679)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건물 1,000여 칸을 더 짓고 절 이름을 계룡갑사에서 갑사로 바꾸어 화엄대학지소(華嚴大學之所)로 삼았으며, 이때부터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선조30년(1579)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모두 불타버리고, 효종5년(1654) 사정(思淨), 신휘(愼徽) 등이 관청의 도움을 받아 중수했습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강당, 대적전, 천불전, 응향각, 진해당, 적묵당, 팔상전, 표충원, 삼성각, 종각, 요사채 등이 있습니다. 중요문화재로는 공주 갑사 철당간(보물 제256호), 공주 갑사 승탑(보물 제257호), 갑사동종(보물 제478호), 월인석보목판(보물 제582호) 등이 있습니다. <백과사전>

 

                 

   

 <참고사진>

 

전각(殿閣)

 

 

         갑사(甲寺) 가람배치 <참고사진>

 

                         

갑사(甲寺) 가람배치 <참고사진>

 

        <google참고사진>

 

 

일주문(一柱門)

 

 

계룡산 갑사(鷄龍山 甲寺) 일주문(一柱門)

 

사찰에 들어갈 때 처음 만나는 문으로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부릅니다. 일주문에 들어설 때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불법(佛法)에 귀의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세속의 잡다한 번뇌를 떨치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주문 현판

 

일주문에는 『계룡산 갑사(鷄龍山 甲寺)』라는사찰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갑사(甲寺)의 갑(甲)은 첫번째, 1번 등의 뜻이 있어서 갑사는 수행하기 가장 좋은 도량이라는 뜻이라 하겠습니다.

 

일주문 뒷면: [일주문 사이로 매표소도 보입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사천왕문(四天王門): 사찰 입구에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수호신으로 삼아 좌우에 세운 문.

 

                      사천왕문(四天王門) 현판

 

북쪽 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좌측, 동쪽 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우측

 

남쪽 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좌측, 서쪽 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우측

 

                      

 

사천왕문(四天王門) 후면

 

 

부도군(浮屠群)

 

 

부도군(浮屠群)

 

부도군(浮屠群)에 있는 대부분의 부도(浮屠)는 단순한 석종형(石鐘形)이지만 옥개(屋蓋)를 올린 것도 몇 기(基기)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모두 18기의 부도가 있는데 현은당부도(1657년)와 낙서당부도(1815) 정도가 건립시기를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참고사진>

 

부도군(浮屠群)

 

부도군(浮屠群)

 

 

사적비(事蹟碑)

 

 

갑사 사적비(甲寺 事蹟碑)

 

                    

                     갑사 사적비(甲寺 事蹟碑): 도 유형문화재 제52호

 

 

갑사 사적비(甲寺 事蹟碑): 도 유형문화재 제52호

 

갑사사적비(甲寺事蹟碑)는 조선 효종10년(1659)에 세웠으며, 갑사(甲寺)의 창건과정과 역사를 적은 비(碑)로, 자연의 암반에 장방형의 비받침돌[碑座]을 마련하고 그 앞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습니다. 비몸[碑身]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비신 위에는 사모지붕형식의 머리를 올리고 꼭대기에 보주(寶珠)를 얹었습니다. 

 

                    

보장각(寶藏閣)

 

 

보장각(寶藏閣): 사찰 내의 문화재를 보관 관리하는 곳입니다. 

 

보장각(寶藏閣) 현판

 

 

범종루(梵鐘樓)

 

 

범종루(梵鐘樓)

 

불전사물(佛前四物)인 범종(梵鐘), 운판(雲板), 목어(木魚), 법고(法鼓)를 비치하는 사찰당우 중의 하나이며, 2층의 누각(樓閣)으로 되어 있을 때 범종루(梵鐘樓)라 부릅니다. 이곳에 비치되는 사물은 모두 부처님에게 예배드릴 때 사용되는 불구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새벽예불과 사시공양(巳時供養), 저녁예불 때에 사용됩니다.

 

 

   

불전사물(佛前四物) <참고사진>

 

불전사물(佛前四物)은 소리로써 불음(佛音)을 전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이지만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하고, 법고는 축생의 무리를 향하여, 운판은 허공을 나는 생명을 향하여, 목어는 수중의 어류를 향하여 소리를 내보낸다는 상징적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종(銅鐘)

 

                  

                                   동종보호각(銅鐘保護閣) <참고사진>

 

이 보호각은 보물 제478호로 지정된 동종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진 동종보호각입니다. 이 보호각은 갑사 경내 강당의 우측에 있던 것을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습니다.

 

                     동종(銅鐘): 보물 제478호 <참고사진>

 

                                   <참고사진>

 

                                                 동종(銅鐘): 보물 제478호 <참고사진>

 

조선 초기의 종으로 국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갑사에 봉안하기 위하여 선조17년(1584)에 만들어졌으며 높이 131㎝, 입지름 91㎝로 종 꼭대기에는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종은 일제시대 때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공출해 갔다가, 광복 후 반출대기중이던 것을 찾아 갑사로 옮겨온 것으로 민족과 수난을 같이 한 동종(銅鐘)입니다.

 

 

대적선원(大寂禪院)

 

 

대적선원(大寂禪院)

 

대적선원(大寂禪院)은 최근에 지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스님들의 수행공간입니다.

 

대적선원(大寂禪院)

 

대적(大寂)은 열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열반을 향한 스님들의 용맹정진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간성장(艮成莊)

 

 

간성장(艮成莊)

 

간성장(艮成莊)은 순종황제의 두번째 정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숙부인 친일 매국노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이 일제강점기 때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갑사계곡에 제멋대로 별장을 짓고 붙인 이름입니다. 윤덕영은 이 별장에 머물며 갑사계곡을 오르내리며 9군데의 절승(絶勝)을 이룬 곳마다 그 의미를 담은 이름을, 자연을 훼손하며 큰바위돌을 깍아 글자를 새겼는데 이를 갑사구곡(甲寺九曲)이라 부릅니다.

 

경술국적(庚戌國賊) 윤덕영(尹德榮)과  갑사구곡(甲寺九曲)


윤덕영(尹德榮)은 경기도, 황해도 관찰사와 철도원 부총재 등을 지냈다. 조카인 순정황후가 황후에 책봉된 다음해인 1908년 시종원경에 임명되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장충단에서 이토 추도회를 열었다. 1910년 8월 윤택영, 민병석과 함께 고종황제를 협박하는 등 경술늑약 늑결에 공을 세워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와 은사금 5만엔을 받았다. 1917년 일본에서 관심을 가지던 중대사였던 순종황제의 일본 황실 참배를 성사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1919년 영친왕(英親王)의 정략혼인을 4일 앞두고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崩御)했는데, 윤덕영은 고종황제를 독살한 인물로 의심받고 있다.1925년에는 총독부 중추원 고문, 1940년 사망 직전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오르는 등 말년까지 영화를 누리며 친일에 앞장서 민족에 해악을 끼친 매국노였다.

 

 

 

구곡(九曲)은 중국 복건성(福建省)의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나온 말인데 주자(朱子)가 무이산(武夷山)을 사랑하여 그곳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은둔하며 아름다운 아홉 곳을 정하여 유자(儒者)들의 이상형으로 삼았는데, 주자학(朱子學)을 신봉하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에 의해 이 땅에도 여러 곳에 구곡(九曲)이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갑사구곡은 그중 하나로 친일 매국노인 윤덕영이 갑사계곡의 명소에 이름을 짓고 글을 새겨 넣은 치욕적인 역사의 흔적입니다.

 

자연 훼손의 현장, 구곡(九曲) 중 오곡(五曲)인 금계암(金鷄嵒)

 

 

공우탑(功牛塔)

 

 

대적교(大寂橋) 지나 공우탑(功牛塔)

 

                      공우탑(功牛塔)

 

공우탑(功牛塔)은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과 기단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에는 탑의 건립내용이 음각되어 있고, 2층의 탑신에는 『우탑(牛塔)』이란 이름이, 3층 탑신에는『공(功)』이란 명문이 각각 음각되어 있습니다. 이 탑의 탑신에 새겨진 명문(銘文)으로 보아 갑사 중창시에 큰 공을 세운 소가 늙어 죽으니 그 은공을 기려 세운 것이라고 보입니다.

 

공우탑(功牛塔)

 

                                                

                                 

                   3층 탑신의 『功』(공)                                     2 탑신의 『牛塔』(우탑)

 

                        1층 탑신의臥塔起立 人道偶合 三兮乙乙 厥功届甲(와탑기립 인도우합 삼혜을을 궐공계갑)

 

                 "누운탑을 일으켜 세우니 사람들 방책에 우연히도 부합된다네, 세번씩이나 힘들었으니 그 공덕이 으뜸이라네"

                                

 

대적전(大寂殿)

 

 

대적전(大寂殿): 도 유형문화재 제106호

 

대적전(大寂殿)은 정면에 걸린 현판에『도광6년4월목암서』(道光6年4月牧岩書)라는 기록으로 보아 도광 6년(순조26년, 1826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면3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 대웅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대적전(大寂殿) 불단(佛壇): 문수보살(좌), 석가모니불(중앙), 보현보살(우)

 

내부에는 불단을 설치하고 위에 천장을 한단 올림으로써 닫집의 효과를 나타내었으며 내부 단청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대적전(大寂殿)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요사(寮舍), 앞에는 승탑(僧塔) 그리고 앞 뜰의 배롱나무

 

갑사 대적전은 현 갑사 경내 앞으로 흐르는 계곡 건너편의 원금당지(原金堂址)로 추정되는 곳에 요사채 1동과 일곽을 이루면서 서향하여 위치하고 있는데, 대적전 우측으로 원금당지에는 원형 초석이 현재도 제위치에 남아 있습니다.

 

 <참고사진>

 

요사채(寮舍寨) 1

 

 

대적전(大寂殿) 옆 요사채(寮舍寨)

 

 

승탑(僧塔)

 

 

               

               대적전(大寂殿) 앞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僧塔)

 

 

 

              

               승탑(僧塔): 보물 제257호

 

갑사 승탑(僧塔)은 전체 높이가 205cm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전하며 통일신라시대의 부도양식을 겸비하고 있는데 본래의 위치는 갑사의 중사자암에 위치했던 것을 현 대적전 앞으로 이전하였다고 전합니다. 대석(臺石), 탑신(塔身), 옥개(屋蓋)와 상륜부(上輪部)를 갖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입니다.

                   

                                          

 

지붕돌의 처마가 깊지않아 전체적으로 심약한 느낌을 주나 상륜부의 연봉오리가 어느정도 이를 보완해 주고 있습니다.

 

 

아래받침돌[下臺石]에는 사자, 구름, 용(龍)이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가운데받침돌[中臺石]은 8각형이며 각 귀퉁이마다 꽃 봉우리가 솟아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윗받침돌[上臺石]에는 32엽의 연꽃 연화문(蓮花紋)을 둘러 새겼습니다.

 

 

철당간(鐵幢竿)

 

 

                      철당간(鐵幢竿) 및 지주(支柱): 보물 제256호

 

사찰에 행사가 있을 때 사찰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합니다.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으로는 유일한 이 철당간은 높이 15m이며 지름 50cm의 철통 28개를 연결하였던 것이나, 고종 35년(1899) 폭풍우에 벼락을 맞아 4절이 부러져 현재는 24절만 남아 있습니다.

 

                

                  <참고사진>

 

                      철당간(鐵幢竿)과 지주(支柱)


통일신라 전기인 문무왕 20년(680)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양식(樣式상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의 양식을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을 지탱하는 두 개의 지주는 동, 서로 마주 서 있으며 기둥머리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안쪽에 구멍을 뚫어서 단단하게 고정시켰으며 기둥머리의 곡선과 기단부의 단순한 조각이 잘 어우러져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줍니다.

 

 당간기단부(幢竿基壇部)

 

사방에 구름무늬를 새긴 기단(基壇) 위로 철당간을 높게 세우고 양 옆에 당간지주를 세워 지탱하였습니다.

 

 

강당(講堂)

 

 

갑사(甲寺) 강당(講堂): 도 유형문화재 제95호

 

갑사(甲寺) 강당(講堂)은 정면3칸, 측면3칸의 배흘림 기둥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계룡갑사(鷄龍甲寺), 닭[鷄]은 알에서 깨어나기 때문에 깨달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계룡갑사(鷄龍甲寺) 현판

 

강당에「계룡갑사(鷄龍甲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백판(白板)에 양각(陽角) 청서(靑書)로 쓰인 이 글씨는 말미에 정해국추절도사홍재희(丁亥菊秋節度使洪在羲)라고 되어 있어 고종24년(1887) 충청 절도사 홍재희(洪在羲)가 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갑사 강당 보수공사 때 나온 상량문에는 정문(正門)이라고 되어 있으며, 만력(萬曆)42년(광해군6년, 1614년)에 창건하였고, 그 후 가경(嘉慶)2년(정조22년, 1798년)에 중수하고, 광서(廣西)16년(고종27년, 1890년)에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강당은 스님들이 법문을 강론하던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후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갑사(甲寺) 강당(講堂) 뒷면

 

갑사(甲寺) 강당(講堂) 내부의 윤장대(輪藏臺)

 

윤장대(輪藏臺)는 경전을 넣어둔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수 있게 만든 것으로, 이것을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합니다.

 

 

팔상전(八相殿)

 

 

팔상전(八相殿): 도 문화재자료 제54호

 

 

팔상탱화(八相幀畵)


팔상탱화는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8부분으로 나누어 그린 불화이며, 이 팔상도(八相圖)는 1.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마야부인의 태중으로 내려오는 장면,  2.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는 장면, 3.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싯달타 태자가 동서남북 각각의 성문 밖으로 나가서 세상을 두루 살펴 보는 장면,  4. 유성출가상(逾城出家相) : 태자의 신분을 버리고 성을 뛰어 넘어 출가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장면,  5.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 고행 정진하는 장면,  6.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나무 아래서 선정을 닦으며 마왕을 굴복시키는 장면,  7.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 깨달음을 성취한 뒤 녹야원에서 설법을 펴는 장면,  8.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사라 쌍수 아래서 입적하는 장면으로 나뉘어 집니다.

 

                팔상탱화(八相幀畵) <참고사진>

 

 

요사채(寮舍寨) 2

 

 

팔상전(八相殿) 경내의 서쪽에 위치하는 요사채(寮舍寨)

 

팔상전(八相殿) 경내의 남쪽에 위치하는 요사채(寮舍寨) : 「도솔실」이란 문패가 붙어 있습니다.

 

 

표충원(表忠院)

 

 

표충원(表忠院): 도 문화재자료 제52호

 

표충원(表忠院)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활약한 승병장(僧兵將)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 유정(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 기허당(騎虛堂)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곳입니다.

 

 

표충원(表忠院)


정면3칸 측면2칸으로 자연석 기단 위에 세운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정면 3칸에는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았으며 동, 서 양옆에는 판벽을 설치하였습니다. 표충원은 자연석 답장으로 둘러져 1973년에 세운 의승장(義僧將) 영규대사기적비(靈圭大師 紀蹟碑)와 일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승병장(僧兵將)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 유정(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 기허당(騎虛堂)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영정

 

영규대사 기적비(靈圭大師 紀蹟碑)

 

경내 우측에 정인보(鄭寅普)가 지은 글을 바탕으로 1973년에 세운 의승장 영규대사기적비(義僧將 靈圭大師紀跡碑)가 있습니다.

 

                                 <참고사진>

 

대웅전(大雄殿)

 

 

대웅전(大雄殿): 도 유형문화재 제105호


대웅전(大雄殿)은 절의 중심에 있는 법당으로 갑사의 대웅전은 원래 현재의 대적전(大寂殿)이 있는 근처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다시 지을 때 이곳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웅전(大雄殿)

 

대웅전(大雄殿)은 정면5칸, 측면4칸으로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시대 중기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되어있고, 불단을 만들어 석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으며 그 위에는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였습니다.

 

                                             대웅전 주련 <참고사진>

 

 소조(塑造) 삼세불(三世佛): 도 유형문화재 제165호

 

갑사 소조삼세불은 대웅전에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중앙에 봉안하고 우측에 아미타불, 좌측에 약사불을 봉안하여 삼세불의 봉안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협시불(脇侍佛)로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의 4대보살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4대보살상도 모두 소조(塑造)의 입상(立像)입니다.

 

                                   석가여래 삼세불도(釋迦如來 三世佛圖): 보물 제1651호 <참고사진>

 

석가여래 삼세불도(釋迦如來 三世佛圖)는 석가여래의 후불탱화로서의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와 아미타여래의 후불탱화로서의 아미타회상도(阿彌陀會上圖) 2폭이며 18세기 초, 중반 당대 대표적 화사승(畫師僧). 의겸 (義謙)이 1730년에 제작한 불화입니다.

 

                                    대웅전 삼장(三藏)탱화 <참고사진>

 

삼장탱화의 중앙 주존(主尊)은 천장보살(天藏菩薩)과 지지보살(地持菩薩),지장보살(地藏菩薩)로 삼장(三藏)보살이라고 하며 다른 나라에서는 보지 못하는 우리나라 만의 독특한 불화입니다. 삼장보살은 각자의 권속을 거느리고 있는데 천장보살은 진주보살과 대진주보살, 지지보살은 용수보살과 다라니보살, 지장보살은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를 이루고 있으며 그 외에 여러 성중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대웅전 신중탱화 <참고사진>

 

신중(神衆)이란 재래적 토속신앙의 대상이었으나 대승불교가 발달함에 따라 이들을 모두 불교가 수용하여 그 신앙적 기능을 불교를 보호하는 선신(善神)으로 한 것을 말합니다. 많은 신들을 배치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구도를 보이는 신중탱화는 일반적으로 제석(帝釋)과 하늘의 군사인 천룡(天龍)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무장을 한 신중들을 배치합니다.

 

                                    금고(金鼓) 및 금고거(金鼓虡) <참고사진>

 

대웅전에는 금고(金鼓)와 그것을 매달고 있는 목조 금고거(金鼓虡)가 있으며 그 제작연대는 18세기 중반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검은 빛이 감도는 금고(金鼓)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금고와는 다르게 서수(瑞獸)와 용(龍)을 화려하게 조각한 거(虡)에 연결된 형태입니다. 금고거는 금고를 걸 수 있는 몸체부분과 그것을 지지하는 대좌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몸체부분은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위로 날아 올라서 붉은 색 여의주를 앞발로 부여잡는 형상입니다. 대좌부분은 서수의 형상을 하였고, 등에는 앙련과 복련의 연잎을 사용하여 몸체부분과 결구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금고거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거(虡)’ 가운데 조형적으로 가장 우수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향적당(香積堂)

 

 

향적당(香積堂):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스님들의 요사채(寮舍寨)

 

                                        중사자암지 3층석탑(中獅子庵址 三層石塔): 문화재자료 제55호 <참고사진>

 

향적당(香積堂) 경내에 자리잡고 있는 중사자암지 3층석탑(中獅子庵址 三層石塔)은 고려시대의 탑으로 원래는 갑사(甲寺)에 딸린 암자인 사자암(獅子庵)에 있던 것을 대적전 뒷쪽에 옮겨 세웠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입니다. 탑은 옆면에 안상(眼象)을 새겨 놓은 바닥돌 위로 기단(基壇)의 일부분이 놓여 있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이 쌓여 있습니다. 기단은 맨 윗돌을 제외하고는 모두 없어졌고, 탑신은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얕게 새겼습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 갔으며,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습니다. 꼭대기에는 본래의 머리장식이 없어진 채, 돌의 질이 다른 연꽃봉오리 모양의 새로운 머리장식이 놓여 있습니다.

 

 

월인석보판목보장각(月印釋譜板木寶藏閣)

 

 

                월인석보판목보장각(月印釋譜板木寶藏閣) <참고사진>

  

                                    선조2년간 월인석보 판목(宣祖 二年刊 月印釋譜 板木) <참고사진>

 

이 판목은『월인석보』(月印釋譜)를 새겨 책으로 찍어내던 판각으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 중 유일한 판목입니다. 『월인석보』는『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본문으로 하고『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설명으로 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입니다. 석보(釋譜)는 석가모니불의 연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입니다.

 

                     월인석보 목판(月印釋譜木板) <참고사진>

 

『석보상절』은 조선 세종28년(1446)에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후의 세조)이 불경을 참고하여 지은 것이고, 『월인천강지곡』은 세종29년(1447)에 세종이『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은 것입니다. 석보상절은 석가모니의 생애를 기록한 석가의 전기이지만 그를 골자로 하여 불교와 제경전을 종횡으로 인용하면서 조직화한 것이며, 월인석보는 여기에 월인천강지곡이라는 한글 찬송까지 덧붙인 종합적인 찬술입니다.

 

                      월인석보 목판(月印釋譜木板) <참고사진>


『월인석보』는 본래 57매 233장으로 모두 24권이었는데, 현재 21권 46매가 전해 지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것이 31판이고 비지정이 15판입니다. 이 판목은 선조2년(1569) 충청도 한산에 사는 백개만(白介萬)이 시주하여 활자를 새기고, 충남 논산 불명산 쌍계사에 보관하였다가 현재는 갑사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계수나무에 돋을새김 하였고, 판목의 오른쪽 아래에 시주자의 이름과 새긴 이의 이름이 있습니다.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보호 시설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은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으며 원래 갑사 중사자암에 있었던 것을 현재 위치로 옮겼다고 전해지며, 자연암석으로 이루어진 석벽 동굴에 남향으로 모셔져 있습니다.

                                             

                                     <참고사진>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손모양을 살펴보면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왼손에는 약합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적묵당(寂默堂)

 

 

적묵당(寂默堂)

 

대웅전(大雄殿) 전면의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적묵당(寂默堂)은 조선 광무3년(1899년)에 다시 중수된 건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규모는 서측으로 8칸, 북측으로 6칸이며 동측과 남측으로 각각 3칸, 2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ㄴ'자형 건물로 현재 종무소(宗務所)와 승방(僧房)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적묵당(寂默堂) 현판 <참고사진>

 

 

진해당(振海堂)

 

 

진해당(振海堂)

 

대웅전(大雄殿) 전면의 좌측에 위치하고 있는 진해당(振海堂)은 조선 고종12년(1875년)에 대웅전과 함께 중건되었습니다. 건물의 규모는 남측으로 7칸, 서측으로 10칸이며 북측과 동측으로 각각 4칸씩의 주간(柱間)을 형성한 비교적 큰 'ㄴ'자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올렸습니다. 진해당(振海堂)은 요사채(寮舍寨)겸 선방(禪房)으로 내부에 약사불(藥師佛)을 모신 불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진해당(振海堂) 현판 <참고사진>

 

                       진해당(振海堂) 주련과 해설 <참고사진>

 

 

삼성각(三聖閣)

 

 

삼성각(三聖閣): 도 문화재자료 제53호

 

               

 

    삼성각(三聖閣) 불단 및 탱화 <참고사진>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며 외부는 정면 여닫이문으로 처리하고 내부는 우물마루 바닥 위에 불단을 설치하여 칠성 탱화 좌우로 산신 탱화와 독성 탱화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칠성(七星)탱화 <참고사진>

 

칠성탱화는 중앙에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그 협시로서의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그리고 상방에 7여래(七如來), 그 향좌(向左)에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하방에는 향좌(向左)에 삼태육(三太六)의 육성(六星), 중앙에 삼태성(三太星), 향우(向右)에 칠성(七星)등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는 도교신앙의 불교적 전개로 형성된 신앙형태라고 볼 수 있는데 치성광여래는 북극성의 불교화, 칠여래는 북두칠성의 불교화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신(山神)탱화 <참고사진>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호랑이를 탄 산신(山神)에게 시동(侍童) 2명이 다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산신(山神)은 한국의 토속신으로 그 원래의 기능인 만사형통이 강조되어 삼성각[산신각]을 건립하여 산신단을 조성하여 모십니다.   

 

                                    독성(獨聖)탱화 <참고사진>

 

독성탱화도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독각성인(獨覺聖人)과 시동(侍童)이 있어 산신탱화와 비슷하나 산신탱화에는 반드시 호랑이가 있으나 독성탱화는 호랑이가 없음이 다릅니다. 독성(獨聖)은 불교에서는 독각(獨覺)이라고도 하며 아무 스승없이 깨달은 성인(聖人)을 말하며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이 독각성인은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수도하면서 부처님이 열반한 이후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아라한으로 나반존자(那畔尊者)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관음전(觀音殿)

 

 

관음전(觀音殿)

 

관음전(觀音殿)은 최근에 새로 지어졌으며 정면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불단에 모시고 있으며 그 뒤로 천불(千佛)을 조성하였습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상과 천불(千佛)

 

 

부속암자

 

부속암자로 1808년 청담(淸潭)이 세운 내원암(內院庵), 수정봉 아래의 신흥암(新興庵), 대성암(大聖庵), 대적암(大寂庵), 대자암(大慈庵) 등이 있습니다.

 

 

내원암(內院庵)

 

 

                      내원암(內院庵) <참고사진>

 

내원암은 갑사 동북쪽 구릉을 대지로 조성한 후 동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조선후기에 건축된 건물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정면 7칸, 측면 5.5칸의 丁자형 건물로 一자형 평면에 서쪽 전면으로는 2칸X2칸 규모의 누마루를 달아내고 후면으로 1칸X2칸의 방을 덧붙였으며 중앙의 3칸을 주불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내원암(內院庵) 현판 <참고사진>

 

 

신흥암(新興庵)

 

 

신흥암(新興庵)

 

계룡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신흥암은 한반도에 불교가 전해지기 이전 창건된 사찰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는 천진보탑이 있습니다. 천진보탑은 국가 문화재자료 제 6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기회 있을때 마다 방광하여 한 밤중에도 빛을 낸다고 합니다. 신흥암은 소실되었다 현재 복원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대웅전과 산신각 등은 중창이되었습니다.

 

                  신흥암(新興庵): 뒤에는 천진보탑(天眞寶塔)이 보입니다. <참고사진>

 

 

대성암(大聖庵)

 

 

 

 대성암(大聖庵)

 

대성암(大聖庵)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순절한 영규대사의 넋을 기리고 있는 곳입니다.

 

대자암(大庵)

 

 

              대자암(大慈庵) <참고사진>

 

대자암(大慈庵)은 갑사로부터 약 30분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이곳에는 무문관(無門關)이 유명한데 부처의 설산 6년 고행을 본받아 한번 들어가면 3년 또는 6년동안 면벽수행하는 곳입니다. 그외 시방당, 삼매당 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유물 및 문화재

 

 

 

 

갑사삼신불괘불탱화: 국보 제298호

 

 

                             갑사삼신불괘불탱화: 국보 제298호 <참고사진>

 

 

삼신불 괘불탱화는 길이 12.47m, 폭 9.48m에 이르는 초대형 괘불화로 조선시대 효종 원년(1650년)에 완성된 17세기를 대표할 만한 수작(秀作)입니다. 이 탱화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 등 삼신불이 진리를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괘불로서 비로자나삼신불화(毘盧舍那三身佛畵)라고도 합니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던 대형 불교그림을 말합니다.

 

 

석조보살입상(石造菩薩立像) : 도 유형문화재 제51호  

 

 

                              석조보살입상(石造菩薩立像) <참고사진>

 

갑사 뒷산 중사자암에 약사여래입상, 갑사 부도와 같이 있던 것을 갑사에 옮겨 보관하고 있습니다. 화강암 석재로 만들었으며 목부분이 깨졌고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부분을 마애불처럼 붙여서 조각하였습니다. 조각수법이 세련된 감을 주고 있으며 백제시대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계룡산 천진보탑(鷄龍山 天眞寶塔) : 도 문화재자료 제68호

 

 

                                   계룡산 천진보탑(鷄龍山 天眞寶塔) : 도 문화재자료 제68호 <참고사진>

 

계룡산 신흥암 위에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있는 자연바위로,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탑으로 이 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인도의 아육왕은 구시나가라국에 있는 사리탑에서 많은 양의 사리를 발견하여 이를 시방세계(十方世界:열곳의 방향에 있는 중생의 세계로, 동·서·남·북·동북·동남·서남·서북·상(上)·하(下)에 있는 무한한 세계를 가리킴)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때 4천왕(四天王 : 불교의 법을 지키는 무리로, 동·서·남·북 네곳을 지키고 있음) 가운데 북쪽을 담당하던 비사문천왕을 이곳 계룡산에 보내어 이 바위안에 담아 두도록 하였고, 뒷날 아도화상이 이를 발견하여 ‘천진보탑(天眞寶塔)’ 이라 이름붙여 놓았다고 전합니다.

 

 

 

 

                          갑사(甲寺) / 계룡산(鷄龍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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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03.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