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사(寶石寺) / 진악산(進樂山)
☞ 충청남도(忠淸南道) 금산군(錦山郡) 보석사(寶石寺)
보석사(寶石寺) 위치 <참고사진>
보석사(寶石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입니다. 885년(신라 헌강왕 11)에 조구(祖丘)대사가 창건했으며, 보석사라는 이름은 절 근처에서 캔 금으로 불상을 주조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합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고종 때 중창했으며, 1912년에는 전라북도 일원에 있는 33개의 말사를 관장했습니다. 석동리 마을 사람들 말에 의하면 현재 보석사가 있는 곳으로부터 200m 위에 있는 영천암(靈泉庵) 자리가 원래 보석사의 절터였다고 합니다.
보석사(寶石寺) 전경 <참고사진>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大雄殿: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등운선원(騰雲禪院), 기허당(騎虛堂),의선각(毅禪閣: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호), 산신각(山神閣), 범종루(梵鐘樓), 요사채 등이 있습니다. 절 입구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승장이었던 영규(靈圭)대사의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가 있으며 그 옆에는 1980년에 설치된 의선각비(毅禪閣碑)가 있습니다. 이밖에 충청남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것은 창건주인 조구대사가 제자 5명과 함께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상징하는 뜻에서 6그루를 심은 것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라고 하며,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길 때는 나무가 울음을 운다고 전합니다.
▶ 전각(殿閣)
보석사(寶石寺) 가람배치 <참고사진>
● 일주문(一柱門)
보석사(寶石寺)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의 정면에는 보석사의 정문임을 알리는 '진악산보석사(進樂山寶石寺)'라고 적힌 사액이 걸려있습니다.
일주문(一柱門) 뒷면
● 영규대사(靈圭大師)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영규대사(靈圭大師)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승장(義兵僧將)으로 승병을 조직하여 맞서 싸우다가 금산전투에서 중봉 조헌(重峰 趙憲)과 함께 순절한 기허당(騎虛堂)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순절사적비(殉節史蹟碑)로서 1840년(헌종 6년)에 보석사(寶石寺) 입구에 건립되었습니다.
1839년 금산군수 조취영에 의해 세워진 비석은 1940년 일본 경찰이 비각을 헐고 자획을 훼손하여 땅에 묻혔던 것을 광복 후에 다시 세웠습니다. 비문(碑文)을 지은 이는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이며, 금산군수 조취영이 글씨를 썼습니다.
의병승장(義兵僧將) <참고사진>
비의 규모는 비신 높이 243cm, 폭 84cm, 두께 42cm이며, 앞면에는 큰 글자로 ‘의병승장(義兵僧將)’이 새겨져 있으나 자획(字劃)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입니다. 뒷면에는 비의 건립연대와 영규대사의 생애와 활동상을 알려주는 내용의 비문이 적혀 있습니다.왼쪽 면에는 창건화주(創建化主) 낙봉대인(樂峯大仁) 등 건립당시의 관계 인물의 이름을, 오른쪽 면에는 앞면의 ‘의병승장’을 창녕위 김병주(昌寧尉 金炳疇)가 썼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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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뒷면 <참고사진> |
우측면 |
좌측면 |
● 영규대사(靈圭大師) 의선각비(毅禪閣碑)
영규대사(靈圭大師) 의선각비(毅禪閣碑)
1980년에 임창순이 역술하고 이곤손이 쓴 영규대사 의선각비(毅禪閣碑)가 입니다.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에 적힌 내용을 국역하였으며 동시에 의선각에 관한 내용도 이 비문(碑文)에 담아 놓았습니다. 보석사(寶石寺)에는 영규대사가 기거하였던 의선각(毅禪閣)이 있습니다.
영규대사(靈圭大師)
영규대사(靈圭大師. ? ~1592) <참고사진>
속성은 박(朴)씨이고 호(號)는 기허당(騎虛堂)입니다. 그는 계룡산 갑사에서 출가하여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제자가 됩니다. 갑사 청련암에서 수도하면서 틈틈히 무예를 수련하며 수행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일을 통곡한 후, 승병(僧兵) 800명을 모아 왜군에게 빼앗겼던 청주성을 되 찾고, 700명의 의병(義兵)을 이끌던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금산(錦山)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 불망비(不忘碑)
금산(錦山) 군수(郡守)들의 불망비(不忘碑)
● 부도(浮屠)
보석사(寶石寺)의 부도(浮屠) <참고사진>
보석사(寶石寺) 동남쪽 어귀에는 5기의 부도가 있습니다.
5기의 부도 <참고사진>
5기의 부도는 모두 조선시대 이후에 건립된 부도(浮屠)로 탑신에 주인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맨 좌측으로부터 팔각원당형 적조당(寂照堂) 부도, 석종형 채도당(採道堂) 부도, 석종형 전춘당(栓椿堂) 부도, 석종형 송월당(松月堂) 부도 그리고 맨 우측의 1990년에 조성된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는 동암당(東岩堂) 부도가 줄지어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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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조당(寂照堂) 부도 |
채도당(採道堂) 부도 |
<참고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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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춘당(栓椿堂) 부도 |
송월당(松月堂) 부도 |
동암당(東岩堂) 부도 |
● 가람 입구
진악산(進樂山) 줄기 밑의 보석사(寶石寺)
보석사(寶石寺) 동쪽 연못
보석사(寶石寺) 입구
보석사(寶石寺)는 885년(신라 헌강왕 11)에 조구(祖丘)대사가 창건하였는데 이능화씨가 쓴 <조선불교통사>에 따르면 조구대사는 전남 담양 사람으로 원각, 원순 스님과 중국유학을 떠나 중국 종남산의 지공화상에게 수학한 후 귀국해서 보석사(寶石寺)를 창건했다고 합니다. 조구대사는 보석사뿐 아니라 금산 지방 사찰 건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입니다.
보석사(寶石寺) 입구 2층 누각 : 2층은 범종루(梵鐘樓)
보석사(寶石寺) 현판 <참고사진>
보석사(寶石寺) 현판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인데, 죽농(竹儂) 안순환(安淳煥)이 그린 죽난도(竹蘭圖) 바탕 위에 글씨를 쓴 현판입니다.
보석사 안내판
누각 지나 경내로 진입
누각 밑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절 마당 건너편에 등운선원(騰雲禪院)이라는 현판을 달고있는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선원(禪院) 건물이 나타납니다.
● 등운선원(騰雲禪院)
등운선원(騰雲禪院)
사찰 경내로 진입해 제일 먼저 보이는 건물인 등운선원(騰雲禪院)은 스님들이 참선하는 곳으로 일명 심검당(尋劍堂)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의 1칸은 툇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참고사진>
종무소(宗務所)를 겸하고 있는 등운선원(騰雲禪院)
● 의선각(毅禪閣)
의선각(毅禪閣)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호
현재는 요사채로 이용하고 있는 의선각(毅禪閣)은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승장 영규(靈圭)대사가 머물며 수도 정진했던 곳입니다. 영규대사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승병을 모집하고 조헌선생의 의병과 함께 금산의 왜적을 격퇴하였으며 700의사와 함께 1592년8월 금산벌싸움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영규대사는 용맹과 담력이 출중하였으며 싸움마다 크게 공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의선각(毅禪閣)
의선각은 본래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한 칸 크기의 「ㅡ」자형 건물이었지만 언제인지 옆으로 3칸 정도를 더 달아내 지금은 'ㄴ' 자형 건물이 되어 있습니다.
의선각(毅禪閣) 편액 <참고사진>
제 부석사
소나무 전나무 녹음속에 법당이 서늘한데
흰 머리 야윈채로 앉아 향을 사르노라
강산에 아직도 있는 마고석은
몇번이나 인간세상의 변화를 겪었던가
1928년 단오절, 운포 김찬식
의선각(毅禪閣) 현판 <참고사진>
뒷면에 걸려있는 현판은 순조의 부마(駙馬)인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의 글씨입니다.
● 대웅전(大雄殿)
대웅전(大雄殿)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보석사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붕의 양측면 끝에는 풍판이 달려있습니다.
대웅전 분합문 <참고사진>
전면의 창호는 띠분합문인데 중앙의 어칸은 사분합문으로, 양측칸은 삼분합문으로 달았습니다.
대웅전 현판 <참고사진>
대웅전 현판은 조선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이 쓴 것입니다.
석가여래삼존좌상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참고사진>
대웅전 내부 불단 중앙에 석가여래좌상을 봉안했으며 좌우협시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두었습니다. 삼존불은 좌고가 100cm가 넘는 대형 목조삼존불상으로 전체적으로 모두 원만한 상호를 지녔습니다. 대웅전의 삼존불은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석가여래좌상 <참고사진>
석가여래좌상은 목재로서 머리는 나발이며 결가부좌를 하고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습니다.
문수보살좌상 <참고사진> 보현보살좌상
좌협시보살인 문수보살좌상과 우협시 보살은 보현보살좌상의 머리에는 금속제로 만들어진 화염문의 높은 보관을 쓰여 있습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마주하여 대칭적으로 수인을 취하고 있으며 모두 한쪽 팔을 들어 길게 구부러진 연봉을 잡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영산회상 후불탱(後佛幀) <참고사진>
삼존불 뒤의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가 걸려있습니다. 사천왕이 4면의 끝에 배치되어 있고 석가모니 좌우 상단에 8대보살이 4명씩 마주하고 있으며, 10대 제자가 하단에 그려져 있습니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여러 불보살과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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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탱 <참고사진> |
지장탱 <참고사진> |
좌우벽면에는 신중탱화와 지장탱화가 걸려있습니다. 신중탱에는 45년 임자(壬子)2월이라는 화기(畵記)가 있어 1912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웅전 상량문(上樑文)
대웅전 상량문에 보석사는 천계 7년(1627년 인조 5년)에 중창하였고, 다시 건륭 31년(1766년 영조 42년)에, 그리고 광서 8년(1882년 고종 19년)에 각각 중창한 기록이 있습니다.
풍판(風板)과 벽화
대웅전의 전각 측면의 중인방과 상인방 사이의 벽에는 고승(高僧)이야기 등 불도(佛道)를 닦은 선승(禪僧)들의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 기허당(騎虛堂)
진영각 기허당(眞影閣 騎虛堂)
대웅전 좌측에 있는 건물인 진영각(眞影閣) 기허당(騎虛堂)은 영규대사의 진영을 봉안해 두었다고 하여 기허당(騎虛堂)으로 불립니다. 기허당(騎虛堂)은 의병장 영규대사의 호(號)입니다.
기허당(騎虛堂)
기허당(騎虛堂)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기허당(騎虛堂) <참고사진>
지붕의 양측면 끝에는 풍판이 달려있고, 측면의 벽은 판벽처리 되었으며 바깥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기허당(騎虛堂) 현판 <참고사진>
초서로 쓴 현판은 조선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이 쓴 것입니다.
기허당(騎虛堂) 내부의 영규(靈圭)대사의 진영(眞影)
전각 안에는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스님의 진영(眞影)을 중앙에 모셔놓았으며, 보석사에서 수도 정진했던 허주당 덕진, 응허당 포문 등10명의 선사들의 위패가 봉안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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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眞影) 우측에 봉안된 선사들의 위패 |
좌측에 봉안된 선사들의 위패 <참고사진> |
● 산신각(山神閣)
산신각(山神閣)
보석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각인 산신각(山神閣)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산신각(山神閣)
건물 전면은 모두 판벽과 이분합창호로 마감했는데, 채광과 통풍을 고려해 전면 1/3 판벽 높이에는 동그랗게 구멍을 뚫고 창호지를 발라놓았습니다.
산신각(山神閣) <참고사진>
산신각 건물 측면도 판벽으로 마감처리 했습니다. 측면과 정면의 너비가 같은 규모이며, 맞배지붕의 넓은 풍판으로 인해 측면이 더 넓어 보입니다.
현판 <참고사진>
산신각 현판은 중창 시 시주를 하였던 민씨 세도의 중추이며 순종의 장인인 민태호(閔台鎬: 민영익의 생부)의 글씨입니다.
산신탱 <참고사진>
산신각 안에는 소나무 아래 두 마리의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이 앉아 있는 산신탱화가 걸려 있습니다.
칠성탱과 벽화 <참고사진>
산신각 측면 벽에는 북극성의 일곱명의 여래가 그려진 칠성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 요사(寮舍)
요사(寮舍)
의선각(毅禪閣) 서쪽 바로 옆에 있는 건물로 주지실(住持室)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건물의 구조가 유별납니다.
● 범종루(梵鐘樓)
범종루(梵鐘樓)
범종루(梵鐘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형태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누각 중앙에 범종이 걸려 있습니다.
범종루(梵鐘樓) 현판 <참고사진>
● 기타
대웅전 앞 석등(石燈)
석등(石燈)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봉황문(鳳凰門)
봉황문과 무지개다리
감로수
전각의 뒷쪽에는 산과 경계를 두어 담장을 두르고 있습니다.
장독대
보석교(寶石橋)
보석교 다리를 건너면 보석사(寶石寺) 경내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보석교(寶石橋)에서 본 무지개다리
목재(木材)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봉황문을 지나 경내로 갈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문을 닫아두어 이용할 수 없습니다.
전나무 숲길
● 보석사 은행나무
보석사 은행나무 (寶石寺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365호
보석사(寶石寺) 은행나무 표지석
은행나무 표지석 옆의 기린암(麒麟巖) <참고사진>
절을 창건한 조구대사가 제자 6명과 함께 각각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이제는 6그루의 나무가 하나로 묶여서 아름드리 한 그루의 은행나무로 자랐다고 전해집니다. 매년 음력 5월 5일[단오]이면 보석사 신도들이 은행나무 앞에서 대신제(大神祭)를 지냅니다.
대신제(大神祭) <참고사진>
▶ 부속암자
영천암(靈泉菴) <참고사진>
보석사의 부속암자로는 영천암이 있습니다. 영천암은 가뭄에 시달려온 인근의 마을주민들에게 물을 공급해주는 샘천으로 유명합니다.
<참고사진>
<참고사진>
영천암(靈泉菴) 무량수각(無量壽閣) <참고사진>
▶ 유물 및 문화재
● 영규대사(靈圭大師)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영규대사(靈圭大師)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
● 의선각(毅禪閣)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호
의선각(毅禪閣)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호 <참고사진>
● 대웅전(大雄殿)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대웅전(大雄殿)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 석가여래삼존좌상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석가여래삼존좌상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4호<참고사진>
● 동종(銅鐘) : 더 이상 보석사 보관 유물이 아닙니다.
안심사(安心寺) 동종(銅鐘)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5호<참고사진>
<참고사진>
보석사((寶石寺)에는 안심사(安心寺)종으로 명문이 있는 동종이 있었습니다. 안심사 동종은 일제강점기 전쟁무기용으로 공출되어 전국에서 수집된 고철들과 함께 대전역부근에 있다가 일제의 패망으로 화를 면하여 그동안 안심사의 본사인 보석사에 안치하고 있었는데 2007년 60여년 만에 제자리인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왕창리 대둔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안심사(安心寺)로 돌아갔습니다. 현재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보석사(寶石寺) / 진악산(進樂山)
(2014.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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