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경상북도

문경새재(聞慶鳥嶺)/문경

케인스 2014. 6. 10. 00:29

 

 

                                           문경새재(聞慶鳥嶺)/문경

 

 

 

경상북도(慶尙北道) 문경시(聞慶市) 문경새재(聞慶鳥嶺)

 

 

    문경새재 위치도  <google참고사진>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14년(1414년)에 만든 고갯길로,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 중 하나이며 예전에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갈 때 가장 빠른 길이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초점(草岾)’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시대 영남도로에서 충청도(한강유역권)와 경상도(낙동강유역권)를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의 역할을 했습니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도로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등 3개의 관문과 원(院)터 등 선현들의 발자취가 뚜렷히 남아 있으며 정자와 주막 터, 성황당과 각종 비석 등도 옛길을 따라 잘 남아 있고, 경상도 선비들의 과거길로서 수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등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큰 옛길입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장렬히 순국한 신길원현감의 충절과 이곳 천연의 요새를 이용하지 못하고 달래강에 배수진을 친 신립장군의 애환이 함께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 문경새재 탐방로

 

 

    

 

                                     명             소                                     설             명
 1. 선비상  전통사회의 구심점이었던 선비의 의식과 정신을 상징
 2. 신길원 현감비  지방유형문화재 제145호: 임진왜란때 순직하신 신길원 현감의 비
 3. 문경새재박물관  이 고장 선조들의 문화유산을 전시
 4. 자연생태공원  생물의 다양성확보와 자연환경보전의식 고취를 위한 자연체험장
 6. 영남제1관  주흘관(사적 제147호) : 숙종 34년(1708)설관
 7. 성황당  병자호란 당시 지천 최명길과 여신과의 전설이 있는 곳
 8. 신길원 현감 충렬사  신길원 현감의 위패를 모신 사당
 9. 여궁폭포(파랑소)  20m의 장대한 폭포, 일명 여심폭포(女心瀑布)
 10. 혜국사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한 곳으로 전해지는 사찰
 11. 대궐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행재소(대궐)를 세운 터
 12. 경북 개도100주년 타임캡슐  경북도민의 생활상등 자료매설
 13. 선정비군  관찰사나 현감등 관리들의 선정을 기념하는 비(碑)
 14. 산신굴  주홀산의 산신인 호랑이가 살던 곳으로 전하는 바위굴
 15. 망치등  봉수대와 망루가 있던 능선으로 전하며 포루라는 기록도 보임
 16. 문경새재오픈세트장  세계 최대규모의 사극촬영세트
 17. 조산  마을의 안녕과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돌무덤
 18. 혈지른자리  임진왜란시 큰 인물이 날 자리라고 하여 혈을 질렀다고 하는 곳
 19. 등룡정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무예를 익히던 활터를 재현한 촬영세트
 20. 마당바위  가로 5m,세로 4m정도로 마당같이 평평한 타원형의 바위
 21. 지름털바우(기름틀바위)  기름을 짜던 틀처럼 생긴 바위
 22. 조령원터  조선시대 길손들의 숙박과 물물교환장소로 사용
 23. 무주암  무인주점이 있던 장소로 전하며 조령산 능선의 경관이 잘 조망됨
 24. 상처난소나무  일제말기 한국인을 동원하여 송진을 채취한 자국이 남은 소나무
 25. 주막  새재길을 넘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잔 술로 여독을 풀던 곳
 26. 팔왕폭포(용추)  시인,묵객이 즐겨 찾았던 경승지(궁예 최후의 장면 촬영지)
 27. 꾸구리바위  계곡 바위속에 꾸구리가 있어 여인이 지나가면 희롱하였다고 함
 28. 소원성취탑  장원급제, 부자, 출생, 쾌유 등을 기원한 돌탑
 29. 교귀정  체임하던 신,구관찰사가 관인을 인수인계하던 곳
 30. 기도굴  조선시대말 기독교인들의 비밀 예배장소로 추정되는 바위굴
 31. 산불됴심비  조선시대 설치된 한글로 된 산림보호비(문화재자료 제226호)
 32. 조곡폭포  주흘산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는 45m의 3단 폭포
 33. 주흘산  해발1,106m로 조선시대 문경현의 진산
 34. 영남 제2관  조곡관(사적 제147호)선조 27년(1594)에 설관
 35. 조곡약수  길손의 갈증을 풀어주는 명약수
 36. 시가 있는 옛길  조선시대 새재를 넘던 선비들의한시를 감상할 수 있는곳
 37. 문경새재아리랑비  문경새재 물박달나무에 얽힌 민요를 새긴 비
 38. 바위굴  새재길을 지나는 길손들이 비를 피하던장소 (새재우의 전설)
 39. 귀틀집  산악지대에서 사용되던 한국식 통나무집
 40. 조령산  해발1,026m로 백두대간에 위치한 명산
 41. 이진터  임진왜란때 신립장군이 진을 쳤다고 전해지는곳
 42. 동화원  조령원과 같이 길손들의 숙식을 제공하던곳
 43. 책바위  각종 시험들에 합격을 기원하는 돌탑
 44. 장원급제길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던 청운의 길
 45. 조령약수  새재정상에서 솟아나는 百壽靈泉,낙동강 3대 발원지의 하나
 46. 군막터  조선시대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들의 대기소
 47. 마패봉  해발925m의 백두대간으로 일명 마역봉이라고도함
 48. 부봉  해발917m의 바위산으로 노송이 유명함
 49. 영남 제3관  조령관(사적 제147호) 숙종 34년(1708)에 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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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새재 관리사무소 앞 차량통행금지선 안쪽부터 문경새재 탐방로가 펼쳐집니다.

 

 

[1] 선비상

                    

 선비상: 선비상은 전통사회의 구심점이었던 선비의 의식과 정신을 상징 

                   

                        

 

 

[2] 신길원현감충렬비(申吉元縣監忠烈碑)

                       

신길원 현감비(지방유형문화재 제145호): 임진왜란 때 순직한 신길원 현감의 비(碑)

 

신길원(申吉元)은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낸 신국량의 아들로 1548(명종 3)에 출생하여 1576년(선조 9)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하였습니다. 45세에 벼슬길에 올라 선조23년(1590) 문경현감으로 도임하였으며, 임진년(1592) 4월27일 문경(聞慶)을 사수하다가 순국하였습니다. 나라에서는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하여 그의 충렬을 기렸으며, 숙종 32년(1706) 비(碑)를 세워 충절(忠節)을 표창하였습니다. 신길원(申吉元) 현감은 임란 당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상주를 거쳐 문경을 침공하자 피신하지 않고 문경을 지켰으나 중과부적으로 왜적에게 잡혔지만 현감은 항복을 거절하고 관인도 주지 않았습니다. 왜적이 현감의 몸을 수색하자 관인을 오른손에 쥐고 주지 않으므로 적의 장검에 순국하였습니다. 신길원(申吉元)은 달성군(達城郡) 공산면의 표충사(表忠寺)에 배향(配享)되었으며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에도 실려 있습니다.

                                                                                

                                                           신길원현감충렬비(申吉元縣監忠烈碑) <참고사진>

 

비문(碑文)은 전 사간원 정언(前 司諫院 正言)인 채팽윤(蔡彭胤)이 지었으며, 전 성균관 전적(前 成均館 典籍)인 남도익(南圖翼)이 글씨를 썼습니다. 이 비는 화강석으로 지대석(地臺石)과 비신(碑身), 비개(碑蓋)를 만들었으며, 비신은 높이 190㎝, 폭 89㎝, 두께 27㎝로서1981년 4월25일 지방유형문화재 제14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비는 원래 문경시 상리 문경초등학교 옆에 있던 것을 1976년에 문경 제일관문 안의 비석군에 옮겼다가 1981년 문경 유림의 진정에 의해 다시 현재의 위치에 비각을 건립하고 이건하였습니다.

 

                 

                                               신길원현감충렬비(申吉元縣監忠烈碑)

 

                                                                                     지정번호: 유형문화재 제145호
                                                                                     지정일자: 1981. 4. 25
                                                                                     소재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340-1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문경현감(聞慶縣監) 신길원(申吉元)의 충절을 기릭 위해 세운 것이다. 화강암으로 된 가첨석, 비신, 방형대좌로 구성되어 있다. 대좌는 높이가 23cm이고 폭이 148cm이다. 비신은 높이 191cm이고 너비 89cm이며 두께 28cm, 가첨석은 높이 46cm, 너비 123cm이다.

문경향회(聞慶鄕會)가 편찬한 기록에 의하면 신길원은 조선 명종(明宗)3년(1548)에 출생하여 선조(宣祖)9년(157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선조23년(1592)에 문경 현감으로 부임했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의 대군이 공격해 오자 그는 현(縣)의 군사 수십인과 더불어 왜적에 대한하다가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고 한다. 왜장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그에 굴복하지 않고 꾸짖으며 항거하다 사지를 절단당하여 장렬히 순국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그를 좌승지로 추증하고 그 충절을 전하고자 숙종(肅宗)32년(1706)에 이 비를 세웠다. 원래 이 비는 문경읍 문경초등학교 옆에 있던 것을 1976년 문경새재 제1관문 안의 비석군에 옮겼다가 1998년 현 위치에 비각을 세워 새롭게 단장했다.

 

                    

                                                현감 신 길원 충렬비

 

 충신은 반드시 효자 집안에서 구한다더니 신길원(申吉元) 현감의 경우가 바로 그 좋은 예이다. 공은 어려서 이미 효성이 지극하여 자기 손가락을 자른 피를 약에 섞어 어머니를 연명케 하였고 열네살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슬피울며 삼년상을 마치니 보는 이가 눈물을 흘리었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선조(宣祖)가 효자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병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태학의 추천으로 참봉 벼슬 등을 거쳐 문경 현감이 되어 백성을 정성으로 다스리고 항상 성리학의 책을 읽어 규범으로 삼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문경으로 왜적이 다가오자 모두 형세 불리함을 들어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공은 소리높여 말하되 내가 맡은 고을이 곧 내가 죽을 곳인데 어찌 피하리오 하고 적은 군사를 독려하더니 적병이 이르자 달아나지 않은 이가 없고 홀로 종 하나만이가지않고 있거늘 의관을 바로하고 관인을 차고 앉으니 적병이 칼을 빼어 들고 속히 항복하여 길을 가르키라고 협박하였다. 공은 손을 들어 목을 가르키며 내가 너를 동강내어 죽이지 못함을 한탄하니 빨리 죽여서 나를 더럽히지 말라 하니 적병이 성내어 먼저 한 팔을 자르고 계속 위협을 마지 않으니 마침내 살을 발라내는 모진 죽음을 당하였다. 때는 사월 이십칠일이오 나이는 마흔 다섯이었다. 사람이란 조그마한 이해가 있어도 지킬바를 바꾸지 않는 이가 드물거늘 하물며 시퍼런 칼말 밑에서이랴. 공이야 말로 충렬의 선비이다.

 좌승지로 추증된공의 자는 경초(慶初)요 본관은 평산(平山)인데 장절공 숭겸(壯節公 崇謙)의 후예이며 아버지는 사헌부 지평 국량(國樑)이다.

 

              원비       조선 숙종 삼십이년(一七○六)
              글          전 사간언정언  채 팽윤(蔡 彭胤)
              글씨       전 성균관전적  남 도익(南 圖翼)

 

                     一九八二년  三월   일.      김 영하 (金 英夏) 요역.     이 상복 (李 相馥) 씀.

 

 

[3] 옛길박물관(문경새재박물관)

                     

  옛길박물관[문경새재박물관]: 이 고장 선조들의 문화유산을 전시

 

                      옛길박물관[문경새재박물관]

 

문경새재 도립공원 내에 설립된 옛길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길을 주제로 한 전문 박물관입니다. 옛길과 백두대간의 중심으로서 영남대로의 역사성과 정체성의 상징인 문경새재의 위상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옛길 문화를 통합 조명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전시물: http://www.oldroad.go.kr/ 참고

 

 

[4] 자연생태공원 

 

문경새재 자연생태공원: 생물의 다양성확보와 자연환경보전의식 고취를 위한 자연체험장 

 

                    문경새재 자연생태공원 전경 <참고사진>

 

문경새재 자연생태공원은 문경새재도립공원내 옛길박물관과 마주보고 있고 39,452m² 부지에 습생초지원, 생태습지, 생태연못, 야생화원, 건생초지원 등을 테마로 자연생태를 집약적으로 조성해 놓았으며 교목, 관목, 초화류 등 175종 20만본의 식물이 식재되어 있어, 문경새재의 주요식물자원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자연생태공원 <참고사진>

 

문경새재 자연생태공원에는 문경새재의 생물자원을 연구, 보존하여 전시한 자연생태전시관과 야외생태학습 및 체험을 할 수 있는 자연생태공원, 문경새재 옛길 주변으로 25개소에 생태학습을 할 수 있는 해설판을 설치한 자연생태관찰지구와 야생화단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새재비(- 碑)

 

                                          

                                            새재비(- 碑)

 

 

 

 

문경새재 과거 길

 

문경새재 과거 길

 

옛날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갈 때 애용하던 길이라고 하여, 「문경새재 과거 길」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한편 추풍령도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관문이었지만, 추풍령을 지나 한양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과거에 낙방을 한다고 하여 많은 선비들이 이곳 문경새재를 넘어서 한양으로 갔다고 전합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표지판

 

2006년 정부에서는 우리 나라 도로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을 선정, 발표하였습니다.  이중에 문경새재 과거 길이 선정되었는데 한국의 아름다운 길은 3개월간 인터넷 공모를 통해 신청받아 도로, 예술, 사진 분야 등 각계 전문가와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가 미관, 역사성, 기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선정하였습니다.

                   

                 옛 과거길

 

   옛 과거길은 옛날 선비나 상인들이 한양을 오르내리던 좁은 길(小路)로서 현재 3개소 850m가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어있습니다.

 

 

 

 

새재계곡

                     

새재계곡[문경8경 중 하나]

 

새재계곡은 울창한 숲과 완경사의 산길이 마치 산책로와 같은 옛길과 나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새재계곡 <참고사진>

 

새재계곡은 계곡을 감싸고 이어지는 오래된 나무들이 만들어낸 숲과  아기자기하고 멋스러운 주위 풍경을 간직하고 있으며, 계곡으로 스며드는 지류가 많아 갈수기에도 늘 수량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령산성(鳥嶺山城)과 문경관문(聞慶)

                

조령산성(鳥嶺山城) <참고사진>

 

조령산성은 문경새재 일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곽은 3곳에 위치한 관문을 중심으로 그 좌, 우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성곽은 크게 문루와 이와 연결되는 평지성, 평지성과 연결되어 좌·우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문루의 명칭은 1, 2, 3관문에 따라 각각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이라 하고, 산성의 명칭은 초곡성(草谷城), 중성(中城), 조령성(鳥嶺城)이라 합니다. 산성의 규모는 초곡성 2,270m, 중성 40m, 조령성 899m 정도입니다.

 

                      초곡성(草谷城)

 

문경새재 일대는 문경(聞慶) 조령천(鳥嶺川) 양안에 우뚝 솟은 주흘산, 부봉, 깃대봉, 조령산 등이 이루는 8㎞ 정도의 험준한 계곡으로 천혜의 요충지입니다. 문경새재 제1관문 주변의 성벽을 초곡성(草谷城)이라 부르는데 동측벽 500m, 서측벽 400m, 높이 1~3m, 폭 2~4m 입니다.

 

                 

 

 

이 관문은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경주(慶州)를 순행차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을 지날 때 성주(城主) 흥달(興達)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지방과 서울간의 관문이며 또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계立嶺)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초부터는 이곳 초참(草站)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鳥嶺)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조선(朝鮮) 선조25년(1592) 임진왜란(任辰倭亂)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키요마사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申砬) 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辛忠元)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 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을 조동문(鳥東門) 혹은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을 조령관(鳥嶺關)이라 이름한다.

 

                 제1관문 주흘관(主屹關)

 

천연 지형을 이용하여 구축한 요새의 관문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선조26년(1593) 6월에 설치할 논의가 있었으나, 전란중의 경제사정 등으로 지연되다가 그 이듬해에 비로소 중성(中城)과 제 2관문인 조곡관의 개설을 보았습니다. 그 후 숙종34년(1708)에 중성(中城)을 크게 중창하고, 이보다 남쪽에 있는 주흘관과 초곡성을, 또 북쪽에 위치한 조령관과 조령성을 축조하였습니다.

 

 

[6] 영남제1관, 주흘관(嶺南第一關, 主屹關)

                      

영남제1관(嶺南第一關), 주흘관(主屹關): 사적 제147호

 

문경새재에 있는 3관문 중 하나인 주흘관(主屹關)은 영남제1관(嶺南第一關)으로도 불리는 성문(城門)으로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문은 숙종34년(1708)에 축조되었으며 구한말 항일의병 전쟁 때 일본군이 불태웠던 문루를 1922년 다시지었습니다. 

 

                       주흘관(主屹關) 현판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주흘관은 문경에서 가깝고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는데 첫번째 관문으로 정면3칸, 측면2칸, 협문이 2개, 팔작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 3.6m, 폭 3.4m, 길이 5.4m이고,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가 11cm입니다.

 

                     

                     

                     제1관문(第一關門) 주흘관(主屹關)의 안쪽에는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초곡성(草谷城)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이고, 부속 산성은 높이가 1~3m, 폭 2~4m, 길이는 동쪽이 500m, 서쪽이 400m입니다. 특이한 점은 개울물을 흘려보내는 수구문이 아직도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습니다.

 

 

[7] 성황당(城隍堂)

 

                 성황당(城隍堂) <참고사진>

 

문경새재 성황당(城隍堂)은 성황사(城隍祠)라고도 하며 제1관문 성벽에 가까이 접해있습니다. 성황당 뒤로는 산신각(山神閣)이 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최명길(崔鳴吉)과 여신(女神)과의 전설이 있는 성황당(城隍堂) <참고사진>

                     

성황당(城隍堂)에는 조선 인조(仁祖) 때 정객(政客) 최명길(崔鳴吉)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명길이 어렸을 때 고향인 청주에서 안동부사인 외숙을 찾아가다 새재에 이르자 아리따운 젊은 여인이 험한 산길이 무서워 동행을 원하는지라 쾌히 승낙하고 그 여인의 정체가 궁금하여 살피고 있는데, 그 여인이 말하기를 "나는 사람이 아니고 새재 성황신인데 안동사는 모 좌수(左首) 가 성황당 앞을 지나면서 성황당에 걸려 있는 치마를 훔쳐 제 딸년에게 주었기에 지금 좌수 딸을 죽이러 가는 길이다"라 하였다. 이에 최명길은 "인명은 재천인데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소" 하며 용서하라 하니, 그 여자는 한참 후 "공은 후에 영의정에 오를 몸이요,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 공은 큰공을 세울 것입니다. 앞으로 명(明)나라는 망하고 청(淸)나라는 흥할 것이니 부디 청과 화친하여 이 나라 사직(社稷)을 보전해야 합니다. 오늘 좌수의 딸을 죽일 것이되 공의 체면을 봐서 징벌(懲罰)을 할 것입니다"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최명길은 즉시 안동 모 좌수 집을 찾아 딸의 죽음을 보고는 "성황당에서 가져온 치마를 빨리 불사르고 깨끗한 음식을 장만하여 치제하면 딸이 회생할 것이오"라고 말하자 좌수는 백배사례(百拜謝禮)하고 최명길의 말대로 치성하니 딸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 후 최명길은 벼슬이 올라 영상이 되고 병자호란때 정세를 잘 파악하여 치욕을 참고 화청정책을 채택하여 국난을 수습한 사실은 새재의 성황신과 관련된 인연이었다는 이야기가 구전(口傳)되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성황당(城隍堂)에는 여신(女神)을 모시는데 마을 사람들은 서낭당 또는 여신각(女神閣)이라 부릅니다. 성황당(城隍堂)은 정면3칸, 측면1칸의 건물로 왼쪽칸은 비어있고 가운데 칸은 서낭아가씨의 그림이, 오른쪽 칸은 시녀의 그림이 모셔져 있습니다. 원래있던 그림들은 분실하여 새로이 그린 그림들입니다. 

 

                       서낭아가씨 화상 <참고사진>

 

                                     시녀의 화상 <참고사진>

 

                     상량문(上樑文) <참고사진>

 

1975년 12월 중수 해체 작업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1700년경에 세웠고 1844년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5명의 목수가 지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참고사진>

 

성황당(城隍堂)의 영험성은 널리 알려져 마을 사람들 뿐만 아니라 무속인들이 신(神)을 받고 기도하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산신각(山神閣) <참고사진>

 

화재로 인해 최근 다시 지었으며 내부에는 사찰과 같이 산신(山神)의 그림을 모셔두었습니다. 몇년 전 일어난 화재는 한 무속인이 산신각에 촛불을 켜놓고 성황당에서 기도를 드리던 중 고양이가 촛불을 넘어뜨려 불이 났다고 합니다.

 

                    산신상(山神像) <참고사진>

 

 

[8] 신길원 현감 충렬사(申吉元縣監忠烈祠)

 

신길원현감 충렬사(申吉元縣監忠烈祠): 신길원 현감의 위패를 모신 사당

             

충렬사는 순조26년(1826)에 현감 홍노영(洪魯榮)과 유림(儒林)이 문경읍 교촌리 문경향교 앞에 건립하여 나라를 위해 순직한 신길원 현감의 신위를 모셔둔 곳입니다. 지금의 건물은 철종8년(1857)과 1981년 두차례의 중수(重修)를 거쳐 1999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고 신길원 현감의 살신호국(殺身護國)의 고귀한 넋을 기리기 위해 지역 유림(儒林)에서 매년 제사(祭祀)를 지내고 있습니다. <안내판>

 

 

[9] 여궁폭포(女宮瀑布)

                                         

               여궁폭포(女宮瀑布), 일명 여심폭포(女心瀑布)

 

높이 20m의 이 장엄한 폭포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 노송의 멋, 기암절벽의 풍치 등과 조화를 이루어 그 경관이 수려하다. 옛날 7선녀가 구름을 타고와 여기서 목욕을 했다는 곳으로 밑에서 쳐다보면 마치 형상이 여인의 하반신과 같다하여 여궁(女宮) 또는 여심(女心)폭포라 불려지고 있습니다.

 

 

[10] 혜국사(惠國寺)  

                      

혜국사(惠國寺):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한 곳으로 전해지는 사찰

 

혜국사(惠國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의 말사(末寺)로 신라 문성왕8년(846) 보조국사 체징선사(體澄禪師)가 창건하였으며, 창건시 법흥사(法興寺)라고 하였으나 고려 말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공민왕이 난(亂)을 피해 이 사찰에 머물렀습니다. 공민왕이 개성으로 돌아가고 왕은 절에 재물을 내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혜국사(惠國寺)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1] 대궐터(大闕址) 

                   

대궐터(大闕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행재소[대궐]를 세운 터

 

혜국사에서 1.5㎞쯤 올라가면 등산로 바로 앞에 대궐터와 대궐샘이 있습니다. 조릿대밭에 둘러싸인 대궐터는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서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대궐터라 이름 붙여졌다고 전합니다.

 

 

[12] 경북 개도 100주년 타임캡슐

 

         경상북도 100주년 타임캡슐광장: 경북도민의 생활상 등의 자료를 매설 <참고사진>

 

경상북도는 개도100주년(1996년)을 기념하여 도민의 생활과 의지를 400년뒤 개도500년(2396년)후 후손에게 전승하기 위하여 경상북도의 관문역활을 하고 있는 문경새재 제1관문에 조성하였습니다.

 

               

                 경상북도 100주년 타임캡슐 <참고사진>

 

지하6m에 매설되어있는 타임캡슐은 직경1m, 높이1.5m의 경주 첨성대모양으로 경북을 대표하는 100품목 475종의 물품을 담아 보존 하고 있으며, 지상에 설치된 조형물은 23개시군의 화합을 상징하는 23면의 받침틀과 개도100주년을 의미하는 10개의 옥모양이 감싸고 있고 상륜부는 신라의 다보탑을 모형으로 제작하여 경상북도의 무한한 잠재력과 발전 가능성을 상징하였습니다.

 

                               <참고사진>

 

                                                        <참고사진>

 

 

[13] 선정비군(善政碑群)

                                       

선정비군(善政碑群): 관찰사나 현감 등 관리들의 선정(善政)을 기념하는 비(碑)

 

비(碑)는 왕이 승하하면 장사 지내고 신하들이 임금의 덕과 공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후세에 이르러 군수나 현감에 대하여도 그들의 선정에 대한 공덕을 잊지않기위하여  비를 세웠습니다.

 

                 

 

선정비(善政碑)의 글은 대개 일치하여 전 군수 누구의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니 송덕이니 하는 문자를 새겼습니다. 그 중 크고 글도 많이 새겨져 있는 것이 어쩌면 백성을 많이 울린 표본이 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어느 곳을 막론하고 예전 읍자리에 아직 십여개 혹은 수십개의 비석이 서 있어 선정의 허욕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1관문 뒤에도 당초 있던 비석과 관내에서 발견된 몇 기의 비석을 옮겨 20여기의 선정비가 있습니다.

 

                                           

                                   

                                                     聞慶善政碑群

 

碑石을 세우는 본래 의미는 忠孝 등의 德行을 후세에 전하여 귀감으로 삼고자 하는데 있다. 이곳의 선정비군은 흔히 善政碑, 不忘碑, 頌德碑 등으로 불려지는 것으로 대개 觀察使, 縣監 등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주로 1,700~1,900년대 세워졌으며 觀察使 7기, 郡守 및 縣監 7기, 기타 2기가 있다. 이 비석군은 당초 문경읍 관내에 산재해 있던 것을 옮겨 주흘관(1관문) 뒤에 있었으나 慶北開道 100주년 기념사업인 타임캡슐 매설로 인하여 현재 자리로 이전 하였다.          1997年 10月 23日          聞慶市長

 

                         

[14] 산신굴(山神窟)

 

주흘산의 바위굴 <참고사진>

 

산신굴(山神窟)은 주흘산의 산신인 호랑이가 살던 곳으로 전하는 바위굴을 일컫습니다.

              

                                   

                                    주흘산의 산신인 호랑이가 살았음직한 주흘산의 바위굴 <참고사진>

 

                            

               <참고사진>

 

 

[15] 망치등

 

                      망치등 능선: 봉수대와 망루가 있던 능선으로 전하며 포루라는 기록도 있음. <참고사진>

                                                           

             <참고사진>

 

 

[16] 문경새재 오픈 세트장

 

문경새재오픈세트장: 세계 최대 규모의 사극 촬영세트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은 한국방송공사가 2000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제작을 위해 설치한 것으로 문경새재 제1관문 뒤 용사골에 위치해 있습니다. 19,891평의 부지에 궁 2동(고려, 백제), 기와 41동, 초가 40동이 들어서 국내 최초의「고려촌」야외 촬영장입니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촬영장을 문경새재에 설치하게 된 동기는 후백제의 왕 견훤의 출생이 문경 가은이며, 무엇보다 촬영장 뒤편의 병풍처럼 둘러선 조령산이 고려의 수도 개성의 송악산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등을 촬영하였습니다.

 

 

[17] 조산(造山)

 

조산(造山): 마을의 안녕과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돌무덤

 

                      조산(造山)

 

                     

 

 

[18] 혈지른 자리

                                            

                       (穴) 지른 자리  <참고사진>

 

                    <참고사진>

 

혈(穴) 지른 자리는 조선중기(현종~영조연간) 시가문학의 대가인 옥서(玉所) 권섭(權燮)선생이 조령산 줄기가 흘러내린 반룡명혈(盤龍名穴)이라 지칭한 곳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큰 인물이 날 자리라 하여 왜병들(일설에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혈을 질렀다고 하며(암벽을 절개하고 말목을 박았다고 함) 좌측암벽(장수방위)이 주변의 다른 암벽과 달리 붉게 보이는 것은 당시 바위에서 피를 흘린 흔적이라 한다. 왜란 후 암벽 위의 쇠 말목은 제거하였으나 나라의 큰 인물은 결국 태어나지 못하였다고 하는 민족의 애환이 서린 장소이다.

 

 

[19] 등룡정(登龍亭)

 

 등룡정(登龍亭):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무예를 익히던 활터를 재현한 촬영세트 <참고사진>

 

 

                                         

[20] 마당바위

                                   

마당바위: 가로 5m, 세로 4m 정도로 마당같이 평평한 타원형의 바위

 

             

 

              

[21] 지름틀바우(기름틀바위)

 

지름틀바우: 기름을 짜던 누름틀처럼 생긴 바위

 

                     

 

 

[22] 조령원터(鳥嶺院址)

                  

조령원터(鳥嶺院址): 조선시대 길손들의 숙박과 물물교환 장소로 사용

               

 

           

                 조령원터 출토 각종유물 <참고사진>

 

                      

                       조령원터(鳥嶺院址)

                   

원(院)이란 고려와 조선시대 주요도로상에 여행자를 위해 나라에서 설치한 여관과 같은 곳입니다. 원(院)들은 주로 교통상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어 교역의 중심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원의 관리는 각 지방에서 맡았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개경과 가까운 곳에 도적이 자주 출몰하자 인명과 통과물품을 보호하기 위해 원을 세운 듯하며, 조선시대에는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원이 수리, 건설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라에서 원(院)을 두어 상인과 여행자에게 숙식소로 혜택을 주었지만 공과 사의 구별, 상과 하의 구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는 곳은 원(院)이 없어도 숙박할 곳이 있겠지만, 산골짜기 외딴 곳에서 해는 저물어 갈 길은 멀고 사람과 말은 지치고 범이나 표범의 두려움, 도둑의 염려 등 길손의 걱정은 컸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조령산성 안에도 조령원(鳥嶺院)과 동화원(桐華院)이 있고, 현의 서쪽 15리인 이화령 아래 요광원(要光院), 하늘재 밑에 관음원(觀音院), 현의 북쪽 4리에는 화봉원(華封院)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조령원터(鳥嶺院址) 내의 초가

 

                  조령원터를 감싸는 돌담

 

                       무엇을 담아 어떻게 사용했는지 안내판이 필요합니다.

 

 

[23] 무주암(無主岩)

 

 무주암(無主岩): 무인 주점이 있던 장소로 전하며 조령산 능선의 경관이 잘 조망됨

                   

                     

   

                     

                       무주암(無主岩)

 

 

[24] 상처난 소나무

 

상처난 소나무: 일제강점기 우리민족을 강제 동원하여 송진을 채취한 자국이 남은 소나무.

 

 

 

[25] 주막(酒幕)

                                           

주막(酒幕): 새재길을 넘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잔 술로 여독을 풀던 곳

 

 

 

[26] 팔왕폭포(용추)

      

                                           

                                             팔왕폭포 <참고사진>

 

       팔왕폭포로 이름난 용추는 예부터 선비들이 즐겨 찾던 경승지로 퇴계 이황을 비롯해 수많은 선비의 발길을 붙들었습니다.

 

           용추(龍湫) <참고사진>

 

퇴계가 극찬한 용추의 큰 바위는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왕건과 술잔을 나눈 직후 측근인 은부의 칼을 받는 장면을 촬영한 곳. 궁예는 이 너럭바위에 무릎을 꿇은 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어. 인생이 찰나와 같은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욕심을 부렸을꼬? 허허허. 이렇게 덧없이 가는 것을…”이라며 마지막 독백을 남깁니다.

 

                                    궁예의 최후 장면 <참고사진>

                                   

                             KBS-TV의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의 최후 장면을 이곳 용추(龍湫)에서 찍었습니다.

                           

               

 

                     

                        <참고사진>

 

 

 

 

[27] 꾸구리바위

 

꾸구리 바위: 계곡 바위 속에 꾸구리가 있어 여인이 지나가면 희롱하였다고 함. 

  

 

 

                           꾸구리 <참고사진>

 

잉어과(―科)에 속하는 소형 어종(魚種)인 꾸구리는 금강, 한강, 임진강에서만 발견되는 한반도 고유종이다. 몸은 약간 길며 전반부는 굵고 후반부는 가늘다. 머리는 뾰족하고 납작하며 입수염은 4쌍이다. 머리의 옆면 중앙 위쪽에는 눈이 있는데, 피막이 있어 광선량에 따라 여닫음을 조절한다. 체색은 붉은색을 띤 황갈색으로, 등에서 몸 옆면에 걸쳐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암색 가로띠가 5~8개 있으며 가슴지느러미·등지느러미·꼬리지느러미에는 매우 작은 흑점이 있다. 하천 상류의 수량이 풍부하고 바닥에 자갈이 깔린 여울에 살며, 돌 밑에 잘 숨는다. 수서곤충류를 주로 먹는 것으로 짐작되며, 산란기는 5~6월이다. 최대길이로 12㎝ 정도까지 자라지만 10㎝ 이상인 개체는 드물다. <브리태니커>

 

 

[28] 소원성취탑

 

 소원성취탑: 장원급제, 부자, 출생, 쾌유 등을 기원하던 돌탑 

 

 

 

[29] 교귀정(交龜亭)

                                 

교귀정(交龜亭): 조선시대 체임하던 신,구 관찰사가 관인을 인수, 인계 하던 곳.

 

교귀정(交龜亭)은 조선시대 새로 부임하는 경상도관찰사[경상감사]가 전임관찰사로부터 업무와 관인(官印)을 인수인계 받던 교인처(交印處)입니다. 조선시대 신임 관찰사의 인수인계는 도 경계지점에서 실시하였으며 이 지점을 교귀(交龜)라고 합니다.

 

                     

 

교귀정(交龜亭)은 주흘관(主屹關)과 조곡관(鳥谷關)의 중간지점인 용추(龍湫) 윗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성종조 초기(1470년경) 신승명에 의해 건립되어 사용되어오다가 1896년 의병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어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9년 문경시가 복원하였습니다.

 

                    

 

                     

                       교귀정(交龜亭)

 

교귀정(交龜亭)은 정면3칸, 측면 1칸, 팔작지붕의 정자(亭子) 건물로 비록 복원된 것이지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교인처(交印處)입니다.

 

                              

                              교귀정(交龜亭) 현판

 

                      교귀정(交龜亭)과 소나무

 

                     교귀정(交龜亭) 건물 앞 우측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한 그루 서있어 교귀정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조선초기 사림파의 사조(師祖)였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한양을 오르내릴 때 교귀정의 경관을 읊은 칠언율시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交龜亭上倣乾坤(교귀정상방건곤)- 교귀정에 올라앉아 하늘땅을 즐기는데

     不覺霜華點鬢根(불각상화점빈근)- 문득 깨달으니 귀밑머리 흰빛이로다.

     一水宮商風自激(일수궁상풍자격)- 한 가닥 흐르는 물은 바람과 더불어 노래부르고

     千巖圖畵日將昏(천암도화일장혼)- 수천 바위는 그림 같건만 어느덧 날은 점점 저물어만 가누나.

     詩因寫景窮飛鳥(시인사경궁비조)- 내가 시로써 경치를 읆으매 날새는 보금자리 찾아 헤매고

     淚爲傷懷讓斷猿(누위상회양단원)- 눈물로 회포를 되씹으매 원숭이마저 그 울음을 멈추도다.

     南地已銷雙隻堠(남지이소쌍척후)- 남쪽길 두 이정표는 이미 어두워 그모양 사라져만 가는데

     月明今夜宿何村(월명금야숙하촌)- 아- 달 밝은 오늘밤은 어디에서 머물 것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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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추약수(龍湫藥水)

 

    용추약수(龍湫藥水) <참고사진>

 

 

 

[30] 기도굴

         

         기도굴: 조선시대 말 기독교인들의 비밀 예배장소로 추정되는 바위굴 <참고사진>

 

                          <참고사진>

 

 

 

[31] 산불됴심비

                                      

산불됴심비: 지방문화재 제226호

 

                      

 

                                             산불됴심 표석(標石)

 

산불됴심비는 다듬지 않은 돌(높이 183㎝, 폭 75㎝ 정도)에 "산불됴심"이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조 후기의 것으로 추측됩니다. 정조 때 별장이 잡인의 통행을 단속할 때 역시 관방(關防)유지를 위해서는 산불조심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기에 일반서민이 잘 알도록 한글 비를 세우지 않았나 추측합니다. 자연보호의 시금석(始金石)이고 「조심」을 고어(古語)인 「됴심」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기 드문 한글 비이며 지방문화재 자료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32] 조곡폭포(鳥谷瀑布)

                                          

                      조곡폭포[인공폭포]: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는 45m의 3단폭포

 

 

[33] 주흘산(主屹山: 1.106m)

 

주흘산(主屹山)의 마루금 <참고사진>

 

주흘산(主屹山)이란 우뚝 솓은 우두머리산이라는 의미로 예로부터 나라의 기둥이 되는 큰 산인 중악(中岳)으로 받들어 매년 조정에서 향(香)과 축(祝文)을 내려 제사를 올렸던 신령스러운 산입니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북에 두고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로 솟아오른 경상북도 문경(聞慶)의 진산(鎭山) 주흘산(主屹山: 영봉/1,106m. 주봉/1,075m)은 우리나라 역사의 길목을 지켜온 유명한 도립공원 문경새재가 있는 산으로 산세가 아름답고, 정상의 남사면이 수백길 높이의 절벽을 이루고 있어 문경읍에서 보면 철옹성처럼 느껴집니다.

 

 

[34] 영남제2관, 조곡관(嶺南第二關, 鳥谷關)

                     

                  제2관문[조곡관(鳥谷關)]

 

영남 제2관문 조곡관(嶺南 第二關門 鳥谷關): 사적 제147호

 

이 관문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문경(聞慶) 조령(鳥嶺)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으로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 선조25년(1592) 왜란(倭亂)이 일어난 후에 충주사람 신충원(辛忠元)이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숙종34년(1708) 조령산성(鳥嶺山城)을 쌓으 때 매바위(鷹岩) 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쌓고, 중성(中城)을 삼아 관문을 조동문(鳥東門)이라 이름하였다. 현재의 시설은 그후 폐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안내판>

 

                     

 

                      조곡교(鳥谷橋)와 조곡관(鳥谷關)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은 동쪽 성벽은 400m, 서쪽 성벽 100m가 남아있으며 높이 2m, 폭 2~3m 입니다.

 

                     

                      조곡관(鳥谷關)의 동쪽 성벽

 

                       영남제2관(嶺南第二關)

 

                       영남제2관(嶺南第二關) 현판

 

 

[35] 조곡약수(鳥谷藥水)

 

조곡약수(鳥谷藥水): 길손의 갈증을 풀어주는 약수 <참고사진>

    

                 <참고사진>

 

이 약수는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청산계곡 사이로 흐르는 용천수로서 물이 맑으며 맛이 좋아 길손들의 갈증과 피로를 풀어주는 영약수(靈藥水)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36] 시가 있는 옛길

                      

조선시대 새재를 넘던 선비들의 한시를 감상할 수 있는 곳 <참고사진>

 

       <참고사진>

 

        <참고사진>

 

      <참고사진>

 

 

[37] 문경새재 아리랑비

 

                    문경새재 아리랑비: 문경새재 물박달나무에 얽힌 민요를 새긴 비 <참고사진>

                  

일부 학자들은 아리랑의 근대 민요적 성격을 형성하는 시점을 경복궁 중건(1865∼1872) 때라고 설명합니다. 경복궁 중수 당시 문경새재는 인적 물적 관문이었고, 3남 지방에서 올라온 부역자의 수는 한양거주 남성의 4배에 달했습니다. 여기서 불렸던 아리랑이 문경새재아리랑이었다고 합니다.

 

                <참고사진>

 

        <참고사진>

 

 

●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문경새재에는 박달나무가 군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달나무는 낙엽교목으로 높이 30m 지름 80㎝에 이르고 수피는 암회색이며 벗겨지지 않습니다. 잎은 난형(卵形)이며 길이 4~8㎝로서 끝부분은 점차 뾰족하고 잎의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습니다. 열매는 타원형으로서 좁은 날개가 있으며, 꽃은 5~6월에 피며 9월에 익습니다. 목재는 매우 굳고 연한 홍색으로서 빨래방망이, 다듬이방망이, 홍두깨 등으로 이용됩니다.

 

 

[38] 바위굴

                     

  바위굴: 새재길을 지나는 길손들이 비를 피하던 장소 <참고사진> 

 

          바위굴 <참고사진>

 

                            

                              [새재우의 전설]

 

 

[39] 귀틀집

 

귀틀집: 산악지대에서 사용되던 한국식 통나무 집 <참고사진>

 

                        <참고사진>

 

 

 

[40] 조령산(鳥嶺山: 1,026m)

  

조령산(鳥嶺山: 1,026m): 백두대간에 위치한 명산  <참고사진>

 

조령산은 경북 문경시와 충북 괴산군을 나누는 백두대간 마루능선을 이루는 산으로 조령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영남대로상의 큰 고개인 조령이 있고 남쪽으로 3번 국도인 이화령이 자리잡고 있는 산입니다.

 

      조령산 위치도  <google참고사진>

 

 

[41] 이진터(二陳址)

 

            이진터(二陳址):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진을 쳤다고 전해지는 곳 <참고사진>

 

                                             d이진터(二陳址) <참고사진>

 

                       <참고사진>

 

 

[42] 동화원(桐華院)

 

동화원(桐華院): 조령원과 같이 길손들의 숙식을 제공하던 곳 <참고사진>

 

                        <참고사진>

 

16세기로 추정되는 필사본 지리지에는 조령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와 같이 조령의 동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동화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이 서북쪽 15리에 있으며 동화원과 함께 석담을 쌓았으나 지금은 폐지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당시에 조령원, 불정원, 화봉원은 사용되고 있었고 관음원, 회연원, 동화원, 견탄원은 폐지됐다는 기록을 남긴 점으로 보아 일부 원(院)만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후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는 화전민이 많아서 조령초등학교 분교가 운영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70년대 이후 화전민 이주정책에 따라 거의 모두가 떠났고, 지금은 한 가구가 남아 여행객들을 상대로 먹거리를 파는 산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43] 책바위

 

책바위: 각종 시험들의 합격을 기원하는 돌탑 <참고사진>

 

                      

                       <참고사진>

 

 

[44] 장원급제 길

 

장원급제 길: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던 청운의 길 <참고사진>

 

               마패

               <참고사진>

 

                                                   

                                              <참고사진>

 

문경 땅 바로 이 길은 조선조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과거차 한양으로 넘나 들던 옛적 그대로의 길입니다.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는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聞喜)'에서 드러나듯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하여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택리지에 "조선 선비의 반이 영남에서 배출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음을 볼 때 참으로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이 곳을 왕래 하였음을 헤아릴 수 있고, 아울러 장원급제한 선비들도 상당하였음에 연유하여 이 길을 "장원급제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45] 조령약수(鳥嶺藥水)

 

  조령약수(鳥嶺藥水): 새재 정상에서 솟아나는 백수영천(百壽靈泉), 낙동강 3대 발원지의 하나 <참고사진>

 

                              

                               <참고사진>

 

                       조령약수(鳥嶺藥水) <참고사진>

 

 

[46] 군막터(軍幕址)

 

                군막터(軍幕址): 조선시대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들의 대기소 <참고사진>

 

                          군막터(軍幕址) <참고사진>

 

        이곳은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軍士)들의 대기소(待機所)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제3관문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47] 마패봉(馬牌峰: 920m)

 

마패봉(馬牌峰): 해발 920m의 백두대간으로 일명 마역봉이라고도 함 <참고사진>

 

                                                                  <참고사진>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산으로 문경새재를 사이에 두고 깃대봉과 마주하는 마패봉은 마역봉이라고도 부르는데 마패봉이란 이름은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산을 넘으면서 조령3관문에서 마패를 관문 위의 봉우리에 걸어놓고 쉬어 갔다는 데서 유래 되었으며, 임진왜란때 신립장군의 한이서린 조령삼관문을 안고 있는 산입니다.

 

          마패봉 위치도<참고사진>

 

 

[48] 부봉(釜峰: 916.2m)

 

             부봉(釜峰): 해발 916.2m의 바위산으로 노송이 유명함 <참고사진>

 

               <참고사진>

 

                 <참고사진>

 

조곡관(제2관문) 주위에서 보이는 우뚝 솟은 바위산이 부봉이라고 부르는 산입니다. 백두대간이 하늘재를 지나며 조령까지 주능선을 이어 놓으면서 한가지를 뻗어 주흘산(1,106m)을 또 부봉에 와서 다시 한가지를 뻗어 6개의 봉우리를 만들어 놓았으니 새재길에서 보이는 부봉이 6번째 봉우리라 합니다. 부봉의 제1봉이 917m, 제2봉이 933.5m, 제3봉이 911m, 제4봉이 923.9m, 제5봉으로 사자바위가 있는 곳이 916m이고 새재길에서 보이는 것이 제6봉으로 우리들이 흔히 부르는 부봉이며 916.2m입니다.

 

 

[49] 영남 제3관, 조령관(嶺南第三關, 鳥嶺關)

 

조령관(鳥嶺關): 사적 제147호, 숙종 34년(1708)에 설관 <참고사진>

 

새재 정상에 북적을 막기 위해 선조 때 쌓고 숙종조(숙종 34년 : 1708)에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 홍예문과 석성 그리고 누각을 복원했습니다. 조령관을 기준으로 남쪽은 경북 문경 땅이고 북쪽은 충북 충주 땅입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마패봉을 지나 북암, 동암문, 부봉, 주흘산으로 가고 남쪽으로는 깃대봉, 조령산, 공산진, 이화령으로 이어집니다.

 

                                             조령관(鳥嶺關) 현판 <참고사진>

영남 제3관(嶺南第三關) <참고사진>

 

                                             영남 제3관(嶺南第三關) 현판 <참고사진>

 

                       조령관(鳥嶺關) 측면 <참고사진>

 

 

[50] 기타

 

 

● 야외공연장

 

야외공연장

 

문경새재도립공원에서는 보다 다양한 문화생활을 위해 야외공연장을 마련하여 사용허가를 받아 대관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 안동부사 김수근 추사 타루비(安東府使 金洙根 追思 墮淚碑)

 

                             

                             안동부사 김수근 추사 타루비(安東府使 金洙根 追思 墮淚碑)

 

타루비(墮淚碑)란 옛날 진나라 때 양양 사람들이 양고(羊枯)를 생각하고 그 비를 보기만 하면 눈물을 흘렸으므로 고사(故事)에서 타루비라 하였습니다. 이 양고야 말로 양양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원근 사람들에게 선정(善政)한 인물입니다. 그가 오(吳)나라를 치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양양 사람들은 저자를 파하고 길거리에서 울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모방하여 선조 36년에 영(營)의 수졸(水卒)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여수에 타루비를 세우고 이순신 장군을 사모한 것이 처음입니다. 문경읍 상초리 초점(草岾) 교귀정(交龜亭) 부근에 세워진 김수근(金洙根)의 타루비는 비신(碑身) 높이 143㎝, 길이 55㎝, 두께 30㎝이고 비부(碑趺)는 높이 48㎝, 가로 108㎝, 세로 84㎝이다. 팔작형이며 비개(碑蓋)는 비신과 함께 6.25의 총흔이 남아 비문도 일부가 훼손되어 있으나 이 비는 1855년(철종6) 9월에 안동부사로 재직 시 주휼(周恤) 선정(善政)한 공로로 안동의 38방(坊)의 소민(小民)들이 세운 비(碑)입니다.

 

                

 

김수근(金洙根)은 1798년(정조22)에 태어나서 1854년(철종5)까지 생존했던 현종 때의 중신으로 자(字)는 회부(晦夫) 호(號)는 계산노초(溪山老樵) 시호는 문정, 본관은 안동입니다. 목사 인순의 아들, 철종의 장인 문근의 형으로 진사가 되어 문벌로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고 1834년(순조34) 문과에 장원급제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습니다. 죽은 뒤 철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아들 병국, 병학은 재상이 되고 동생 문근은 영은(永恩) 부원군에 봉군되었습니다. 저서로는 삼연연보(三淵年譜)가 있습니다.

 

 

● 꽃밭서들

 

 

                     

 

                       '서덜'은 '너덜'의 사투리인데 돌이 많이 흩어져 깔려 있는 비탈을 일컫습니다.

 

 

전좌문(殿座門) 및 전좌(殿座) 바위

                 

전좌문(澱座門)과 전좌바위

 

주흘산 주봉 정상 바로 아래 문경읍 지곡리로 통하는 입구에 있는 바위로 옛날 임금이 파발(擺撥)을 기다리기 위하여 앉아 기다렸다는 곳이라 전합니다. 바위가 마치 문을 이루는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전좌문(澱座門)이고, 그 바로 옆으로 두개의 바위가 병풍으로 세워진 곳처럼 되어있는 곳을 전좌바위라고 합니다.

 

 

 

 

 

               문경(聞慶)새재 / 문경(聞慶)

                       (2014. 0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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