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충청남도

온양온천시티투어/아산(13.05.26)

케인스 2013. 6. 4. 00:31

 

 

                                            온양온천시티투어 / 아산

 

 

 

온양온천시티투어(역사문화코스)

 

 

 

                                                                                                  http://citytour.asan.go.kr 참조

 

온양온천(溫陽溫泉)역출발

 

 

 

온양온천시티투어버스: 온양온천역 10시 40분 출발

 

 

▶ 외암민속마을

 

 

 

 

외암(外岩)민속마을은 국가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설화산(雪華山) 밑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에 500년전에 정착한 예안 이씨 일가가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60여호 남짓 되는 마을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돌 담장에 둘러싸인 느낌을 주는데 그 길이가 무려 5,300미터나 됩니다. 마을의 가옥 전체가 고택의 기와집과 초가로 어우러져 있으며, 우리의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마을입니다. 마을의 주요 특산물로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연엽주(蓮葉酒)와 전통재래식으로 만드는 조청(造淸), 장류(醬類) 등이 있습니다.

 

아산(牙山) 외암마을[外岩村]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36호(지정년월일: 2000.1.7)

위치: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외암마을은 북쪽의 설화산(雪華山)을 최고봉으로 그 남서쪽의 약한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 어귀는 낮고 마을 뒤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지형이다. 이러한 지형 조건에 따라 마을의 집은 대개 남향 또는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일조량이 많으며 겨울에는 서북 계절풍을 막아주는 좋은 기후 환경 때문에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에는 원래 여러 성씨가 살고 있었는데 조선(朝鮮) 명종(明宗: 1545~1567) 때 예안 이씨 이사종(李嗣宗)이 세 딸만 둔 진한평(陳漢平)의 첫째 사위가 되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그의 후손들이 번창하게 되었고, 그 후손 중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자 차츰 예안 이씨를 중심으로 하는 동족(同族)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 경종(景宗)3년(1723)에 이간(李柬)선생이 쓴 "외암기(巍巖記)"에 마을 이름을 '외암(巍巖)'으로 기록한 사실이 있으며 일제 때부터 획수가 적은 '외암(外岩)'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이 마을에는 충청 지방의 양반집과 초가(草家)가 어우러지고 집집마다 돌담으로 둘러져 있으며, 설화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은 인공 수로를 따라 마을 안을 흐르면서 정원(庭園)을 꾸미거나 생활용수로 이용되고, 유실수(有實樹)와 화목군 (花木群) 등 수림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이 마을은 지리적으로 한양과 가까워 왕래가 잦아서 인지 한양 풍속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정월 보름을 전후하여 느티나무제와 장승제를 지내며, 매년 10월에는 전통문화(관,혼,상,제)와 농경문화, 민속놀이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짚풀문화제가 열린다.

 

이 마을은 역사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고 충청 지방의 전통적인 살림집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민족 문화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안내판에서>

 

외암리 마을 입구의 개천

 

 

 

 

외암마을입구

 

 

외암리 마을 남쪽

 

                      인공수로(人工水路)

 

외암마을의 주산(主山)인 설화산(雪火山)의 발음이 불을 상징하는 '화산(火山)'과 같다하여 이 때문에 마을에 그 '화(火)'의 기운이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해, 마을 내부에 '화(火)'와 상극하는 '물(水)'을 끌어들여 '화(火)'의 기를 제압하려고 인공수로를 만들었습니다.

 

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한 주산(主山)인 설화산(雪華山: 441m)

 

교수댁

 

이 집은 이사종(李嗣宗)의 13세손 이용구(1854~?)가 경학으로 성균관 교수를 지냈다 하여 붙은 택호이며, 원래 사랑채, 안채, 행랑채, 별채가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안채와 행랑채, 사당만 남아있습니다.

 

                      교수댁 솟을대문

 

 

교수댁의 사랑채와 대문채 사이 마당에 정원을 꾸며 특색있는 정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산건재고택

 

송화댁

 

 

 

 

설화산 산줄기가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마을 주변을 감싸듯 펼쳐져 있습니다.

 

 

마을 안 경관은 안길을 중심으로 샛길들이 이어지면서 돌담과 집들이 독특한 경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마을의 담장은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을의 지질구조가 땅 밑 일정한 지층에 이르기까지 호박돌로 이루어져 있러, 이 돌을 걷어내 경작지를 만들고 집터를 확보하면서 걷어낸 돌로 담을 쌓은 것입니다.

 

 

 

 

 

 

 

 

 

 

 

 

                     

보호수

 

품 명: 도(道)나무, 수 종: 느티나무, 수 령: 600년
높 이: 21m, 둘 레: 5.5m

 

느티나무 목신제(木神祭)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전통의식으로 매년 음력 1월14일 실시되고 있습니다.

 

 

 

 

 

 

 

 

마을 다리 앞에는 송덕비, 장승, 솟대가 세워져 있으며, 마을 입구를 상징하는 표시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지켜주는 신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외암마을 안내영화

 

마을 앞 민속관[상류층 가옥]

 

상류층 가옥의 사랑채

 

 

 

전통혼례장

 

 

 

 

 

 

현충사(顯忠祠)

 

 

                                                                                                                               <참고사진>

 

                                                                                                                                  <참고사진>

 

 

현충사는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며, 충무공이 성장하여 무과급제할 때까지 사시던 곳입니다. 1966년 현충사를 중건하고 1974년 종합적인 조경공사를 시행하여 오늘의 경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본전내에는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기념관에는 난중일기, 장검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이순신 기념관

 

 

                            위에서보는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위에서 보는 기념관  <참고사진>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입구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은 연면적 3,104㎡(939평)에 지하 1층, 지상 1층의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2008년 착공하여 2011년 4월 준공, 개관하였으며, 충무공관련 유물과 임진왜란 당시 해전 사료를 수집하고, 이를 전시, 교육하기 위한 역사 테마관. 전시관, 교육관, 사무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해전

 

거북선 모형

 

   체험 영상실 <참고사진>

 

이순신장군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의 3D영상을 체험의자에 앉아 관람하며, 상영시간은 약10분입니다.

 

"노량해전" 3D영상의 전투 장면

 

 

현충사(顯忠祠) 둘러보기

 

 

 

충무문(忠武門)

 

1967년 현충사 경내·외를 구분하기 위하여 만든 정문으로, 사당의 외부 경역임을 알리는 외삼문(外三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충무문(忠武門)

 

반송(盤松)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줄기 밑동에서 굵은 가지가 10~30개 정도 갈라져 나와 나무 생김새가 우산 같습니다.

 

본전(本殿) 가는 길

 

  

  정려(旌閭) <참고사진>

 

현충사 정려에는 이충무공 장군과 공의조카 이완, 사대손 이홍무, 오대손 이봉상 등 네 분의 충신과 팔대손 이제빈, 한 분의 효자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정려(旌閭)는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을 표창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 앞에 그 훈공을 액자에 새겨놓고 길이 사표로 삼는 것입니다.

 

 

  

                                                                                                                                                                                                 <참고사진>

 

 

이 정려는 원래 정려는 동남향으로 정위치에 있었으나 현충사 성역화시 참배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서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해체, 복원하였습니다.

 

연못

 

 

 

불두화(佛頭花)

 

불두화(佛頭花)

 

꽃의 모양이 부처의 머리처럼 곱슬곱슬하고 부처가 태어난 4월 초파일을 전후해 꽃이 만발하므로 불두화로 부르고 사찰에서 정원수로 많이 심고 있습니다.

 

 

 

 

 

 

현충사 성역화 사적기

 

여기는 이순신 장군이 자라나신 거룩한 터전이라 1706년 숙종대왕 때 이 고장 선비들의 힘으로 현충사를 세워 수 백년동안 제사를 받들어 왔다.

1931년 일제 때에 빚으로 이땅을 뺏기게 되자 동아일보사가 앞장서서 온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사당을 다시 짓고 공의 유적을 보존하게 되었다.

1962년 박정희대통령이 국가원수가 된 뒤로 충무공의 구국정신으로 민족지도이념을 삼고자 특별한 분부를 내려 경내를 십만 여평으로 넓히고 사당을 새로 세워 나라와 국민들의 갈 길을 밝히니 이 성역화 사업이야말로 만인이 칭송하는 일이요 이로부터 이곳은 우리민족의 복전이 될것이다.    1969년 4월28일

 

 

                      현충사 경내 중앙의 반송(盤松)

 

본전(本殿)으로 오르는 길

 

 

 

홍살문

 

궁전, 관아, 능, 사당 등에 들어오는 길머리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으로 사당의 경내를 표시하며 그 경건성을 유지하기 위한 성역임을 나타낸다. 이곳의 홍살문은1968년 콘크리트로 만들어졌습니다.

 

홍살문 뒷면

 

충의문(忠義門)

 

충의문(忠義門) 뒷면

 

 

본전(本殿)/현충사(顯忠祠)

 

현충사 본전은 1706년 숙종 임금 때 건립되어 이순신 장군을 향한 추모의 향불이 끊이지 않았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어 그 자취가 사라져 버리고 유허비만 남게 되었다, 그후 일제 강점기때 ‘충무공묘소 위토 경매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민이 거국적으로 모은 성금으로 1932년 현충사를 중건(重建)하게 되었다. 이후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지시로 순한국식 콘크리트 구조로 된 현재의 본전이 세워졌고, 기존의 건물은 서편 참배로 옆으로 이전하여 ‘구본전’이라 부른다.

 

 

이곳에서는 매년 4월 28일 이충무공탄신 기념다례행제가 열립니다.

 

 

본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을 기념하여 매년 4월 28일 정부주관으로 제전을 올리고 있습니다.

 

                        본전에 모셔져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 <참고사진>

 

월전 장우성 화백의 1953년도 작품으로 1973년에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영정을 그릴 때 친분이 있었던 유성룡(柳成龍)이 쓴 징비록(懲毖錄)이라는 책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용모에 관한 기록을 참고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과 십경도  <참고사진>

 

건물 안쪽 벽에는 이순신 장군의 일생 중에 특기할 만한 사건 10가지를 묘사한 십경도(十景圖)라는 그림이 있다. 서울대 미대 정창섭, 문학진 교수의 작품입니다.

 

본전(本殿)에서 바라보는 충의문(忠義門)

 

본전(本殿) 옆 대나무 숲

 

 

 

 

 

 

옛집

 

이순신 장군은 21살 때 결혼하였는데 부인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무남독녀였기에 처가집이 자연스럽게 이순신 장군의 본가가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왔습니다. 충무공이 태어난 곳은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입니다.

 

 

현재 건물은 전통적인 한식 목조건물로서 안채만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옛집 뒤편에는 가묘(家廟)가 있는데 이곳에는 현 종손의 4대조까지의 신위(神位)와 함께 이순신 장군의 신위가 중앙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신위는 불천지위(不遷之位)로 매년 음력 11월 19일 이른 새벽에 기제(忌祭)를 지내고 있다.

 

 

은행나무(보호수) 와 오른쪽 활터

 

옛집 옆 은행나무 2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곳으로 충무공이 활을 쏘던 자리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활터를 둘러싼 방화산 능선은 충무공이 말을 타던 곳으로 치마장(馳馬場)이라 불립니다. 은행나무 두 그루는 500여년생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충청남도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활터

 

과녁판은 활터에서 남방으로 145m떨어진 곳에 있으며 이순신 장군이 연습하던 당시에는 200m의 거리였고, 임금님이 북쪽에 계시기 때문에 항상 남쪽을 향해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고 합니다. 매년 4월28일 이순신 장군 탄신일에는 전국 시,도 대항 궁도대회가 이곳에서 열립니다.

 

 

충무정(忠武井)

 

옛집 대문 옆에 있는 정(井)자 모양의 우물로, 후세 사람들이 충무정(忠武井)이라 불렀다.

 

 

 

 

이면(李葂) 공(公) 묘소  <참고사진>

 

무공의 셋째 아들 이면의 묘소입니다. 이면은 어려서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해 충무공이 극진히 사랑하던 아들이었습니다. 21세에 마을에 침입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습니다. 정조(正祖) 때(1796년) 이조참의를 제수 받았습니다.

 

구(舊) 본전(本殿)  <참고사진>

 

 

1932년 중건될 당시의 현충사 사당 본전이었습니다. 현충사 성역화사업으로 새 본전이 지어지면서 1968년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구(舊) 본전(本殿) 의 현판  <참고사진>

 

 

여기에 걸린 현충사 현판은 숙종(肅宗)이 내려준 것입니다.

 

 

충무문(忠武門)으로 나가는 길

 

출구로 가는 길의 이순신 기념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1966년 현충사전경  <참고사진>

 

이동

 

 

▶ 온양민속박물관

 

 

온양민속박물관 안내판  <참고사진>

 

                      온양민속박물관(溫陽民俗博物館)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적으로 변질, 소멸 되어가고 있는 우리의 민속문화유산을 수집, 보존하고 연구, 전시하여 조상의 빛난 얼과 슬기를 오늘에 되살리고,

자라나는 새 세대에게 우리 민족의 유구한 전통문화를 올바르게 인식토록하여 이들이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 고유의 생활양식과 미풍양속을 계승,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산 교육장의 역할을 담당하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문화의 본질과 우수성을 국외에 알려 세계문화 속에 한국문화를 부각, 선양케 할 수 있는 문화창조의 산실이자 민속사료종합전시장으로서의 제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1978년 10월25일 구정(龜亭) 김원대(金源大)선생에 의해 설립된 국내 최대의 민속박물관으로 다음과 같은 시설과 규모의 위용을 갖추고 있다.

 

<시설규모>

유물 보유수: 16,000여점
대지 및 건축면적: 대지 35,000평, 건물 3,000평[본관 및 부속시설 포함]
전시개요:
-제1전시실: 한국인의 일생, 의식주의 생활
-제2전시실: 농업, 길쌈, 사냔과 채집, 고기잡이, 대장간
-제3전시실: 민속공예, 민간신앙과 오락, 학술과 제도
-특별전시실: 기획전시, 불교미술, 시청각교육
-야외전시장: 민속놀이터, 토속가옥, 연자.디딜.물레방앗간, 석조물, 기타 민속물

 

민속박물관 안내도  <참고사진>

 

                                                                                                                               <참고사진>

 

정문[설화문(雪華門)]

 

 

 

 

석양(石羊)/조선시대

 

귀신을 쫓거나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뜻으로 묘 앞에 돌로 제작한 양을 쌍으로 조각하여 세워둔 상징물.

 

                      호석상(虎石像)

 

삼재(三災: 수재, 풍재, 화재)를 막아주고 복을 불러오며 귀신을 쫓는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았다.

 

 

 

본관

 

 

 

 

감실

 

 

▶ 온양온천

 

 

                                                                       

온양온천 역사

 

아산시 온천동을 중심으로 위치한 온양온천은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그 역사가 근 1,300여년이 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시대에 온수군(溫水郡)으로 칭하여졌던 것으로 보아 실제 온천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온 기간은 약600여년이 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임금께서 온궁을 짓고 휴향이나 병의 치료차 머물고 돌아간 사례가 많아 다수의 관련 유적들이 남아있다. 이 온천은 지질이 단상흑운모, 각섬석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용출되는 온천수의 수온이 58도c내외로 고열온천이다. 온천수의 주요성분은 마니타온을 함유한 라듐온천이며 약알칼리성을 가진 수질이 좋고 수량이 풍부해서 신경통, 관절염, 피부병, 위장병, 고혈압 등 각종 성인병과 피부미용에도 효과가 크다. <안내판>

 

 

▶ 전통시장

 

 

               온양온천전통시장  <참고사진>

 

온양온천시장은 아산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으로 500여개의 점포로 구성되어 있으며,1950년대 싸전, 소전, 고추전, 된장골목 등 자연스럽게 5일장이 서며 그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이후 소전과 싸전이 이전하고 새로운 도로가 개설되며 옛 시장터에서 온천동으로 이전, 지금의 온양온천시장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온양온천시티투어 / 아산

                                                                             201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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