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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江陵) / 임영관지(臨瀛館址), 칠사당(七事堂)

케인스 2013. 7. 29. 22:48

 

 

 강릉(江陵) / 임영관지(臨瀛館址), 칠사당(七事堂)

 

 

 

임영관지(臨瀛館), 칠사당(七事堂) 가는 길

 

 

                                                                                                             <google자료사진>

 

강릉 임영관지(臨瀛館址)는 사적 388호로 고려시대부터 강릉부의 관아건물이 있던 터이며, 칠사당(七事堂)은 지방유형문화재 7호로 조선시대의 관공서 건물로서,  현재 강릉우체국 인근의 강릉시 용강동과 명주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복원 중인 임영관지(臨瀛館址) / 2010.5 현재 모습 <자료사진> 

 

강릉시는 지난 2000년부터 모두 120여억원을 들여 사적 제388호인 임영관지(臨瀛館址) 복원사업에 착수, 2013년 7월 현재 2단계 사업까지 마쳤습니다. 3단계인 사적공원 조성사업은 부지 인근의 건물들이 모두 이전해야 하기에 좀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됩니다.

 

 

임영관지(臨瀛館)

 

 

임영관지(臨瀛館址) 복원 조감도  <자료사진>

 

                           

 

                임영관지(臨瀛館址) 옛모습 <자료사진>

 

원래 강릉 관아는 내아(內衙)와 외아(外衙)로 구분되며, 내아(內衙)에는 내아(內衙) 및 익랑(翼廊), 행랑(行廊) 등이 있었고, 외아(外衙)에는 외아(外衙), 별당(別堂), 전랑(前廊), 공수(公須), 관청(官廳) 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청(正廳)의 명칭이 임영관(臨瀛館)인 객사(客舍)가 있었으며, 임영관 앞의 의운루(倚雲樓), 도시(都試) 때 무사들의 시험보던 장소로 사대(射臺), 군기청(軍器廳), 부사(府司), 작청(作廳), 군관청(軍官廳), 부창(府倉), 노방(奴房), 사령청 등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1912년 임영관지 전경 <자료사진>

 

임영관(臨瀛館)은 강릉부의 관아 건물로써 주로 강릉을 방문하는 내빈들을 접객하고 그들이 유숙하였던 곳으로 고려 태조19년(936) 83칸 건물의 강릉부 객사(客舍 - 중앙의 관리들이 지방에 내려오면 유숙하던 곳)로 임영관을 창건하였으며, 그 후 여러차례 중수를 하였으나 1929년 완전히 철거되었습니다.

 

                                                                                                    <참고사진>

 

현재는 한동안 임영관 정문인 객사문(客舍門 - 국보 제51호)만이 남아 있던 텅 빈 임영관터에 임영관지(臨瀛館址)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료사진>

 

                                                                                                   <자료사진>

 

1993년 강릉대학교 발굴조사를 하여 고려전기에서 조선후기에 이르는 시기의 전대청(殿大廳), 중대청(中大廳), 동대청(東大廳), 낭청방(郎廳旁), 서헌(西軒), 월랑(月廊), 삼문(三門) 등 많은 수의 건물터를 찾았습니다.

 

  임영지(臨瀛誌) <자료사진>

 

그리고 이 시기의 청자와 분청사기(粉靑沙器), 백자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암·수막새, 기와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기록인 임영지(臨瀛誌)의 내용과도 같습니다.

 

               임영관지(臨瀛館址) 안내판 <참고사진>

 

 

● 아문(衙門)

 

           

                      아문(衙門) 위치도

 

 

 

                                                                                                                       <참고사진>

 

 

● 중문(中)

 

 

                          

                            중문(中門) 위치도

 

 

 

● 동헌(東軒)   

 

 

                  동헌(東軒)  위치도

 

동헌(東軒)

 

동헌(東軒) 앞 마당의 곤장과 곤장틀 
 

                                                                                                 <참고사진>

 

                                                                                                <참고사진>

 

곤장은 조선시대 장형에 속하는 죄인을 다스리는데 쓴 형구이다. 곤장은 주로 볼기를 치는데 사용하였는데 모양과 쓰는 방법 및 규격에 따라 곤형과 장형으로 구분된다.

곤형은 죄의 크기에 따라 중곤(重棍), 대곤(대棍), 중곤(中棍), 소곤(小棍)과 치도곤(治盜棍)을 사용하였는데, 치도곤은 주로 도적을 다스리는데, 중곤, 대곤, 중곤, 소곤 등은 일반 범죄인을 처벌하는데 사용하는 형구이며, 이중  중곤(重棍)은 군중(軍中)의 곤장으로 사죄(死罪)를 범한 자를 다르리는 데만 사용하였으며, 가장 잔혹한 형구중의 하나였다.

장형은 가시나무로 만든 형구를 사용하였는데, 폐단이 가장 심한 형벌의 하나였으며, 옷감[布]이나 돈으로 환산 집행되기도 하였다. 이들 형벌은 대한제국 성립 이후 폐지되어 점차 없어졌다.   
 
                   

 

 

● 별당(別堂)

                           

     

                  별당(別堂) 위치도 

 

별당(別堂)

 

 

● 임영관 삼문(臨瀛館 三門) / 객사문(客舍門) 

 

               

                 

                  임영관 삼문(臨瀛館 三門) 위치도

 

 

 

임영관 삼문(臨瀛館 三門)/객사문(客舍門)

 

 

국보 제51호인 객사문(客舍門) 즉 임영관 삼문(臨瀛館 三門)은 고려(高麗) 태조19년(936)에 창건된 강릉부 객사(客舍 : 중앙의 관리나 손님들이 오면 묵게 하던 곳)의 정문(正門)으로 강한 배흘림 형식의기둥은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의 양식과 흡사합니다.

 

 

강릉 임영관 삼문(江陵 臨瀛館 三門)은 객사문(客舍門)으로 국보 제51호로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건물로 약간 솟음을 하고 있는 맞배지붕, 주심포양식의 삼문(三門) 형식의 건물로 객사(客舍)의 정문에 해당합니다. 정면 3칸에 커다란 판장문을 달았고, 기단의 앞면은 돌계단으로 설치하였고 옆과 뒷면은 잡석으로 쌓았습니다. 초석은 일률적이지 않고 각각 다른 모양의 것을 이용하였습니다.

 

 

이 문의 이름은 원래 사문(沙門), 삼문(三門), 당문(唐門) 등으로 불리어 왔는데, 사문은 이곳이 신라 범일국사가 세운 절터에 남은 문이라 함이고, 삼문은 조선 세조때 폐사되었다는 염양사(艶陽寺)의 삼문을 옮겨온 것이라는 것이고, 당문은 천축(天竺;인도)의 양식을 받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참고사진>

 

앞뒷줄 기둥은 배흘림[기둥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고 위쪽과 아래쪽이 중간 부분 보다 가는 기둥형태]이 뚜렷한 원주(圓柱 - 둥근 기둥) 를 사용하였고, 판장문이 달려있는 중간 줄의 기둥은 방주(方柱 - 네모난 기둥)를 사용하였습니다. 기초석(基礎石)은 같은 형태를 가지지 않고 몇 가지 다른 모양의 둥근 자연석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기둥의 배흘림은 그 어느 건물보다 심하며 전체적으로 볼 때 현재 남아있는 목조건축 문화재 중 가장 크고 장식화 경향이 심하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강원도내 건축물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

 

기둥 위의 공포(拱包) <참고사진>

 

공포(拱包) <참고사진>

 

신방목(信防木)

 

문설주 밑 기둥 옆에는 초석(礎石)을 받치듯이 앞뒤로 짧은 각목을 받치는데 이것을 신방목(信防木)이라 합니다.

 

앞쪽이 비교적 높은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강릉 객사문(江陵客舍門)

 

 

● 집경전(集慶殿) 터 

 

 

                      집경전(集慶殿) 터 위치도

 

 집경전(集慶殿) 터

 

 

 

● 중대청(中大廳)  

 

 

                      중대청(中大廳)  위치도

 

 중대청(中大廳) <참고사진>

 

 

                중대청(中大廳) <참고사진>

 

            중대청(中大廳) 옛사진 <자료사진>

 

 

● 전대청(殿大廳) / 임영관(臨瀛館)  

 

 

                    

                  전대청(殿大廳) / 임영관(臨瀛館) 위치도

 

 

강릉부 객사(客舍)인 임영관(臨瀛館)은 전대청(殿大廳)이라고도 불리며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두었던 관청건물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가 오면 여기서 묵게 하였습니다.

 

                  임영관(臨瀛館)/전대청(殿大廳) <참고사진>

 

 

                                                                                                                              <참고사진>

 

망궐례(望闕禮) 의식 <참고사진>

 

망궐례(望闕禮)는 지방에 근무하는 관찰사, 목·부사, 절도사 등이 국왕이나 왕후의 탄일(誕日), 매월 초하루, 매월 보름의 삭망(朔望), 정조(正朝), 동지(冬至)에 국왕과 왕후, 세자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면서 객사(客舍)의 전패(殿牌)에 행하는 의식입니다. 직접 궁궐에 나아가서 국왕을 배알하지 못하기에 임금이 있는 궁궐의 상징인 나무에 '전(殿)’자를 새긴 패(牌)를 만들어 각 고을 관아의 객사에 봉안하고 예를 올렸습니다.

 

  

 전패(殿牌)와 궐패(闕牌) <참고사진>


전패(殿牌)는 조선시대 지방의 객사(客舍)에 봉안된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전(殿)자가 새겨진 나무 패(牌)로 지방의 객사(客舍)에 국왕을 상징하여 봉안하였습니다. 한편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궐(闕)자를 새기고 금박(金箔)을 한 궐패(闕牌)를
대궐에 두고  정조(正朝), 동지(冬至), 성절(聖節), 천추절(千秋節), 황제의 칙사 등을 맞이할 때에 예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임영관(臨瀛館)' 현판 <참고사진>

 

임영관 현판의 글씨는 공민왕(恭愍王)5년(1366)에 왕이 낙산사(洛山寺)로 행차하는 도중에 쓴 친필(親筆)로 전해지고 있으며, 글자는 피나무로 만든 4개의 판위에 양각(陽刻)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임영관(臨瀛館) 전면 툇칸 <참고사진>

 

               임영관(臨瀛館)과 동대청(東大廳)의 옛모습  <자료사진>

 

 

● 동대청(東大廳)  

 

 

                       동대청(東大廳) 위치도

 

 

동대청(東大廳)

 

  동대청(東大廳) <참고사진>

 

 

 

● 서헌(西軒)  

 

 

                      서헌(西軒) 위치도

 서헌(西軒)

 

서헌(西軒)  <참고사진>

 

 서헌(西軒) <참고사진>

 

 

 

● 의운루(倚雲樓)   

 

 

                      의운루(倚雲樓) 위치도

 

 의운루(倚雲樓)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의운루(倚雲樓)는 강릉 관아내 임영관 남쪽에 위치했다고 합니다.

 

의운루(倚雲樓)

 

박시형의 운금루기문(雲錦樓記文)에 의하면 경포대를 포함한 의운루, 운금루를 강릉의 절경으로 표현하고 있어, 호수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경포대 뿐만 아니라 관아 내에 조성된 의운루에서 바라보는 경치 또한 대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기타

 

                  기타 건물 위치도

 

뭘까요?  창고? 

 

 

 

칠사당(七事堂)

 

 

                       칠사당(七事堂) 위치도

 

칠사당(七事堂) 정문 <참고사진>

 

칠사당(七事堂)은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의 관공서 건물로 구 강릉시청 본관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인조10년(1632)에 고쳐지었고, 영조2년(1726)에 크게 수리하였으며, 고종3년(1866)에는 진위병(鎭衛兵)의 군영으로 쓰이다가 이듬해에 화재로 타 버린 것을 강릉 부사 조명하(趙命夏)가 다시 지었습니다.

 

칠사당(七事堂)


부사(府使)가 업무를 보던 칠사당(七事堂)은 지금의 강릉시 청사와 같은 용도의 건물로, 칠사(七事)란 조선시대 지방장관이 해야 할
일곱 가지 중요한 일(호구,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비리 단속에 관한 일)을 맡아 하는 곳이라 하여 칠사당(七事堂) 이라 불리었습니다.

 

칠사당(七事堂) 정문의 뒷면

 

칠사당(七事堂)

 

칠사당(七事堂)은 일제강점기 일본수비대 본부 건물로 사용하였고, 이후 강릉군수의 관사로 이용되었습니다. 한국전쟁때에는 미국민사원조단 사무실로 이용하였으며, 1958년부터는 강릉시장 관사로 사용하다가 1980년에 주거용 시설을 제거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참고사진>

 

  

 

정면 좌측에 누마루(다락같이 한층 높게 만든 마루)를 별도로 달아 낸 'ㄱ'자형 평면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측면 1칸은 툇간(건물의 덧달아 낸 칸, 물림칸)으로 되어 있습니다.

 

                                                                                                                                  <참고사진>

 

기둥의 둥근 주초석은 전면(63cm)의 것이 제일 높고 그 외 부분(33cm)은 건축물로 높이의 차를 두고 있습니다. 누마루 부분의 네기둥과 튀주는 원주로 되어있고 누마루의 연결부분에는 다락방을 두고 있습니다.

 

 

본체의 좌측은 온돌방이고, 중앙에는 대청마루, 우측에는 온돌방과 방앞의 툇마루를 놓아 대청마루와 연결시켰습니다. 대청의 천정은 우물과 연등 모양으로 되어있고 벽체는 회벽마감을 하였습니다.

 

 

 

누마루 부분의 4개 기둥과 전면의 툇기둥은 둥근 기둥으로 둥근형 초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누마루의 초석

 

칠사당 측면

 

이익공 양식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 이 건물은 조금씩 변형되어 조화를 잃은 면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관청으로서의 위용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른쪽 측면 뒤편에도 방 2칸과 툇마루(방이나 마루 바깥에 붙여 꾸민 좁은 마루)를 툇간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칠사당 정문 안쪽의 수령 560년 은행나무(보호수)

 

 

 

 

 

  강릉(江陵) / 임영관지(臨瀛館址), 칠사당(七事堂)

                                   2013.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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