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강원도

강릉(江陵) / 선교장(船橋莊)

케인스 2013. 7. 11. 01:16

 

 

                              강릉(江陵) / 선교장(船橋莊)

 

 

 

선교장(船橋莊) 가는 길

 

 

                                                                                                                        <google자료사진>

   강릉 시내에서 202번 버스를 이용 [요금 \1,200. 약 20분 간격 운행]

 

 

선교장(船橋莊)

 

 

                     선교장(船橋莊) 위성사진 <google자료사진>

 

선교장(船橋莊)은 강원도 지역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사대부 가옥으로 강릉시에서 경포호쪽으로 약 4km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합니다. 

 

선교장(船橋莊)  <참고사진>


선교장(船橋莊)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가옥을 대표하는 곳으로, 중요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있습다. 지금은 논으로 변하였지만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 '배타고 건넌다'고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 불렀는데,  선교장 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합니다. 

 

                                                                                                                                                                          <참고사진>

 

선교장은 조선 영조때(1703년)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李乃蕃)이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한 명당 자리에 집을 지은 후, 그 후손이 지금도 살고있습니다. 총건평 318평으로, 긴행랑에 둘러싸인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 등이 정연하게 남아있고, 문 밖에는 수백평의 연못 위에 세워진 활래정(活來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구조를 보여 줍니다.

 

                                                                                                                              <참고사진>

 

선교장은 건물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주거생활과 생활용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주변경관과 어우러진 풍치가 아름답습니다. 선교장의 사랑은 열화당(悅話堂)이라 하며, 여기에는 용비어천가, 고려사 등 수천 권의 책, 글, 그림 등이 소장되어있습니다.   

 

 마을형국 <참고사진>

 

선교장영역의 국면은 북서측 시루봉(甑峰 72m)에서 떨어내린 그리 높지않은 산줄기가 가옥을 평온하게 둘러싸고 있으며남측면에 호수로 향하는 터진 형상을 하고 있다. 노서하전형국(老鼠下田形局)으로 풍수지리상으로도 길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선교장(船橋莊) 안내도 <참고사진>

 

1. 활래정     2. 선교장본채     3. 사당     4. 초정(녹야원)     5.곳간채(동진학교)    

6. 전통문화체험관     7. 초가1     8. 초가2     9.홍예헌     10. 교육관    

11. 유품전시관     12. 가승음식체험관

 

 선교장(船橋莊) 항공사진 <참고사진>

 

선교장(船橋莊) 건물 배치 <참고사진>

 

후손들이 정착하여 살면서 지속적으로 살림채를 짓고, 보수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선교장은 남동 - 북서축으로 긴 대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북서쪽에 사랑채인 열화당과, 중사랑채, 서별당과 연지당을 배치하고 그 사이에 협문을 두고 담을 막았습니다. 남동측면에는 안채와 동별당이 자리하며, 주건물의 앞쪽으로는 긴 행랑채가 있어서 바깥마당과 본채와 사랑채마당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선교장(船橋莊) 배치도 <참고사진>

 

 

 

선교장(船橋莊) 입구

 

 

길건너 선교장(船橋莊)

 

 선교장 입구[배다리마을]

 

 

 

 

 

왼쪽은 1983년 영화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를 촬영한 곳을 기념하는 표지석입니다.

 

 

활래정(活來亭)과 연지(蓮池)

 

 

활래정 위치 <참고사진>

 

활래정(活來亭) 전경

 

입구에 들어서면 우측에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 안에는 가운데 아담한 소나무가 서있는 둥근 섬이 있으며, 그 건너편으로 울창한 소나무를 배경으로 연못 가장자리에 활래정(活來亭)이 위치합니다.

 

 활래정(活來亭) 서쪽면

 

활래정(活來亭)은 열화당(悅話堂)을 세운 다음 해인 순조16년(1816)에 이후(李厚, 1773~1832)가 건립하였는데, 현재 건물은 이후의 증손 이근우(李根宇)가 고종43년(1906)에 중건하였습니다.

 

               

                활래정 안내판

 

 

활래정 평면도 <참고사진>

 

활래정(活來亭) 서쪽면

 

"ㄱ" 자형의 활래정은 온돌방과 마루로 만들어진 몸채와 연못 속에 돌기둥을 세우고 연못쪽으로 돌출시킨 마루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연못 속의 둥근 섬과 연결된 교각

 

 

활래정(活來亭)은 선교장에 딸린 외별당입니다. 선교장 내 본채에는 서별당과 동별당이 있지만 가장 자연에 가까운 휴식처라고 할 수 있는 곳은 활래정입니다.

 

 

안채와 떨어진 옥외공간에 조성된 건물인 활래정은 전면에 돌출된 누마루 부분이 연못 안에 설치된 돌기둥으로 받쳐 놓은 루(樓)형식의 건물입니다.

 

 활래정(活來亭)의 돌기둥

 

활래정에는 모두 14개의 기둥이 사용되었는데 이 중 4개 기둥은 연못의 물속에 설치되고 나머지는 지면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활래정(活來亭) 현판 <참고사진>

 

활래정(活來亭)이란 이름은 주자(朱子)의 시(詩) 관서유감(觀西有感) 중 '爲有頭源活水來'(위유두원활수래: 맑은 물은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중에서 '活來'라는 글을 따왔다고 합니다. 현판은 이진화, 임준상님 등의 글씨입니다.

 

활래정(活來亭) 북서쪽면

 

활래정(活來亭) 북쪽면

 

별당으로 쓰이는 곳이기에 가족들이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기거할 수 있는 곳입니다.

 

 활래정(活來亭) 남동쪽면

  

활래정(活來亭) 동쪽면

 

동측면에 달려있는 활래정의 현판에는 네 귀에 박쥐모양의 금속판이 달려있습니다.

  

 활래정(活來亭) 남쪽면

 

달려있는 주련(柱聯)은 이병희씨의 글씨입니다.

 

  

  활래정(活來亭) 편액 <참고사진>

 

활래정에는 여러개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는 김돈희, 김규진, 정병조씨 등이 썼습니다.

 

활래정(活來亭) 대청마루 <참고사진>

 

활래정(活來亭) 온돌방 <참고사진>

  

활래정(活來亭)과 월하문(月下門)

 

월하문(月下門)은 협문(夾門)으로 활래정의 남쪽에 자리합니다. 

 

활래정(活來亭) 동쪽 뒤 낮은 구릉으로 오르는 길에서 만난 거대한 수목들

 

 

선교장(船橋莊) 본채 입구

 

 

 

● 선교장 본채 입구 <참고사진>

 

선교장(船橋莊) 전경

 

나지막한 구릉을 배후지에 두고 앞쪽으로 주출입문인 솟을대문이 있습니다.

 

 

선교장(船橋莊) 전경

 

선교장(船橋莊)이 있는 동네를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 불렀는데, 선교(船橋)는 여기에서 따왔고, “장(莊)”자는 장원(莊園)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선교유거(船橋幽居)

 

선교유거(仙嶠幽居) 현판은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으로, 대원군이 천재라고 불렀던 조선 말기 서예가인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1836~1909) 선생 글씨입니다. 선교유거(仙嶠幽居)의 선교(仙嶠)는 발음이 같은 선교(船橋)에서 따온 것으로, 발음은 같으나 “선교(船橋)” 는 배다리고 “선교(仙嶠)” 는 신선이기에, 배다리를 신선(神仙)으로 바꾸어 묘사하였습니다.

 

 솟을대문과 행랑채 외벽

 

사랑채로 통하는 문이기에 대문 기단 상부까지 경사로를 만들어 수레가 올라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외별당(外別堂)

 

 

● 외별당 위치 <참고사진>

 

 

                                                                                                                            <참고사진>

 

외별당(外別堂)

 

원래의 외별당(外別堂)은 이근우 때 건립된 것으로 소실(小室)이 거처하던 집이기에 소실집(小室宅)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런 이유로 대문을 작게 만들었고 선교장 본 건물보다 낮은 곳에 위치하도록 하였습니다.

 

외별당(外別堂) 입구 <참고사진>

 

외별당(外別堂)의 일부를 분가시켰던 맏아들의 신혼 살림이나 작은아들의 분가 이전에 사용하기도 하였던 건물이며, 손자들도 사용하였습니다. 최근에 새롭게 복원하였습니다.

 

현재는 후손이 사용하고 있는 개인 공간입니다.

 

 

외별당(外別堂) 본채 북서쪽 <참고사진>

 

외별당(外別堂) 본채 서쪽 <참고사진>

 

외별당(外別堂)은 ㄱ 자형 평면의 안채와 밖으로 광과 행랑으로 에워싸이는 배치입니다.

 

장독대

 

 

 

외별당(外別堂) 앞 우물

 

 

외별당(外別堂) 서남쪽 담

 

 

솟을대문

 

 

● 솟을대문 위치 <참고사진>

 

선교장(船橋莊) 본채 입구에 있는 솟을대문 출입구

 

        솟을대문 위치도 <참고사진>

          

 

     

 

 

 

 

행랑채(行廊棟)

 

 

행랑채 위치 <참고사진>

 

행랑채(行廊棟)

 

선교장 본채 입구의 좌측 행랑이 있는 곳이 행랑채이며, 솟을대문에서 우측으로 2칸이 되는 지점이 문간채와의 구분 지점이 됩니다. 출입문인 솟을대문과 안채로 직접 출입하는 평대문이 나 있으며, 행랑채는 집 둘레를 돌아가며 담장의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을 바깥 행랑채라고도 합니다.

 

행랑채(行廊棟)

 

행랑방에는 안쪽으로 툇마루가 놓여있습니다. 곳간, 마구간도 있었고, 하인들이 살림할 수 있는 부엌도 있었으며, 특히 대문옆 방은 하인들이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서당을 비롯하여 일상용품인 약재(藥材), 공구(工具)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모든 일들이 행랑채에 공간을 두고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행랑채 내부

 

 

행랑채 창호 및 방 <참고사진>

 

 

 

 

 

중사랑채

 

 

● 중사랑채 위치 <참고사진>

  

 중사랑채(中舍廊棟)

 

선교장 손님맞이에 주로 사용된 건물이며, 전국의 학자, 풍류객들과 교분을 나누던 공간입니다. 중사랑은 장차 이 집안을 이끌 맏아들(長子)의 거처이며 수련처이기에 이곳에서 장래 주인으로서의 기량과 수양을 함양하게 됩니다.

 

      중사랑채 위치도 <참고사진>

 

중사랑채(中舍廊棟) <참고사진>

 

사랑채인 열화당의 전면마당을 중심으로 좌측인 북서측에 면해서 중사랑채가 세워져 있는데,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一자형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중사랑 내부 

 

 

 

중사랑채 뒷면 <참고사진>

 

 

열화당(悅話堂)

 

 

 

● 열화당 위치 <참고사진>

 

열화당(悅話堂)

 

사랑채인 열화당은 1815년(순조15)에 오은거사(鰲隱居士) 이후(李厚)가 세웠으며, 남자 주인의 주된 거처인 사랑채로 선교장의 여러 건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건물입니다

 

     

     열화당 위치도 <참고사진>

 

열화당은 선교장 주인 남자의 거처인 큰사랑채로서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서별당 왼쪽에 사랑마당을 두고 뒤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열화당(悅話堂)

 

건물이름은 도연명(脚烈明)의「귀거래사(野去來離)」의 "世興我而相遺 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다시 벼슬을 어찌 구할 것인가.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憂憩)를 쓸어 버리리라) 라는 구절에서 연유했다고 합니다.

 

열화당(悅話堂)

 

정면 4칸, 측면 3칸의 크기로 거의 一자형 평면으로 팔작지붕에 홑처마 겹집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열화당 평면도 <참고사진>

 

누마루대청(큰대청) 4칸, 사랑방 2칸, 침방 1칸, 누(樓)마루 2칸(작은대청)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구성으로 되어 있고, 대청과 사랑방 앞에 반칸 너비의 툇마루가 붙어 있습니다.

 

열화당 안내판

 

 열화당 앞 사랑마당

 

기단은 세벌대 높은 기단위에 다시 장주형 돌주초를 놓았고. 높은 기단 때문에 대청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층층계단을 설치하였습니다.

 

 

열화당(悅話堂) 현판

 

 

                 차양(遮陽)시설 <참고사진>

 

열화당은 건물 앞 동판(銅板)을 너와처럼 이은 차양(遮陽)시설을 두어 햇빛을 막을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 시설은 조선말기 러시아식의 건축물로 러시아공사관에서 선물로 지어 준 것입니다.

 

 

차양(遮陽)

 

열화당 전면 차양(遮陽)시설의 초석

 

대청마루                                                  툇마루

 

                        

 

열화당에서 서별당과 연지당으로 가는 협문

 

      

  열화당 온돌 아궁이

 

 열화당 뒷면(1)

 

열화당 뒷면(2)

 

 

 

 

초정(녹야원)

 

 

● 조청(녹야원) 위치 <참고사진>

  

초정(草亭)[녹야원(鹿野苑)]

 

       초정(녹야원) 위치도 <참고사진>

 

 

 

 초정(녹야원) 뒷면

 

 초정(녹야원) 마루와 방

 

 초정(녹야원) 뒷동산 오르는 길

 

 

서별당(西別堂)

  

 

● 서별당 위치 <참고사진>

 

서별당, 연지당 협문

 

     

                      

                       안에서 본 협문

 

     

 

서별당(西別堂)

 

서별당은 1996년에 건축되었는데, 원래의 것은 무경의 증손인 이용구(雲業 李流九)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선교장에서 가장 높은 지대인 안채와 열화당 사이의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별당 위치도 <참고사진>

 

서별당(西別堂)

 

서별당(西別堂)은 석축위 조금 높직한 기단상부 평탄지에 안채와 같은 높이로 연결되어 있고, 서고는 누마루형식으로 되어 문을 열면 통풍이 잘되고, 마루는 여름철, 방은 겨울철의 독서실로 이용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던 것을 1996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서별당 아궁이

 

 

연지당(蓮池堂)

 

 

● 연지당 위치 <참고사진>

 

연지당(蓮池堂) <참고사진>

 

집안 살림을 돕던 여인들의 거처로 사용한 곳입니다. 마루는 창고로 쓰이고, 마당은 받재마당이라 하여 안채로 들이는 곡식이나 금전을 받을 때 사용하였습니다.

 

       연지당 위치도 <참고사진>

 

 

 

연지당(蓮池堂)

 

서별당 앞의 ㄴ자형 건물인 연지당은 지금은 방과 마루로 되어 있지만, 최근까지도 열화당으로 통하는 통로와 곳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연지당(蓮池堂) 남서측 <참고사진>

 

전면 남서측에 안채와 사랑채 사이를 구획하는 벽돌담장과 출입문이 있어서 당시의 철저한 남녀유별 풍속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연지당(蓮池堂)

 

 

안채

 

 

● 안채 출입구 위치 <참고사진>

 

안채 출입구 <참고사진>

 

사랑채로 출입하는 솟을대문과 별도로 안채로 출입하는 대문이 있기는 하나 행랑채의 벽체의 입면과 처마선에 변화가 없이 반복되어서 멀리서 보면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행랑 동쪽의 출입문 <참고사진>

 

출입문(평대문)

 

집안에서 가장 어른이 되는 부인이 살고있는 안채는 행랑의 동쪽에 있는 평대문으로 들어갑니다.

 

    

출입문(평대문)

 

 

● 안채 위치 <참고사진>

 

안채[주옥(住屋)]

 

안채는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내번이 터를 잡던 시기[영조,1724~76 재위]의 건물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방은 전주이씨가의 큰 살림을 맡은 주인의 부인[정실(正室)]이 사용하는 곳이며, 그 건넌방은 맏며느리의 방입니다.

 

      안채 위치도 <참고사진>

 

 

 

안채 평면도 <참고사진>

 

평면구성을 보면 안채(主屋)는 전체적으로 ㄷ자형의 구성을 하고 있으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양측은 온돌방과 고방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가족을 거느린 부농의 장원답게 부엌의 규모도 클뿐 아니라 방과 마루, 수납공간인 고방과 다락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안내설명판에 의하면 1703년 선교장 건물중 최초로 건립한 건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중수기록과 배다리에서 전주이씨가 개기한 시기를 종합 검토하면 1748년으로 1703년은 오기로 판단됩니다.

 

 

안채의 서쪽에는 안살림을 도우는 사람을 위한 온돌방과 마루가 조성되어 서별당과의 공간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부엌

 

 

 안채의 서측면 툇마루

 

2칸의 건넌방 뒷켠으로 난간을 붙인 툇마루가 있어, 서별당으로 난간과 연결되는 통로를 이루고 있습니다.

 

 

안채 서측면 툇마루

 

 

 

 아궁이

 

안채에는 우측부에 3칸 규모의 부엌이 있고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안채 후면의 굴뚝

 

 

 

 

동별당(東別堂)

 

 

● 동별당 위치 <참고사진>

 

동별당(東別堂)

 

동별당(東別堂)경농 이근우가 1920년에 건립한 건물로서, 안채와 연결된 별당으로서 주로 건물 주인이 휴식하며 거처하던 곳입니다. 외부 내객들에 시달리다 가족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이며, 또 여기서는 외빈이 아닌 친척이나, 외척의 내빈 등을 접할 수도 있고 잔치를 치루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동별당 위치도 <참고사진>

 

 

                          동별당 온돌방

 

 '오은고택(鰲隱古宅)' 현판

 

동별당에는 오은고택(鰲隱古宅)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오은(鰲隱)이란 이곳에 정착한 이내번의 손자 이후(李厚)의 호입니다.

 

 

 

 협문(夾門) 너머 외별당(外別堂)

 

 

 

문간채

 

 

 

● 문간채 위치 <참고사진>

 

문간채

 

3칸의 문간채는 모두 창고로 사용되었습니다.

 

      

      문간채 위치도 <참고사진>

 

 

 

 

 

 

사당(祠堂)

 

 

 

● 사당 위치 <참고사진>

 

사당(祠堂) <참고사진>

 

사당(祠堂) 입구

 

사당(祠堂)

 

사당은 선교장의 집안 선조들의 신위를 모시고 있으며,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 곳입니다.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전면에 툇마루를 두었으며, 단층 맞배지붕 목조건물입니다. 중앙부 어칸은 협칸보다 큽니다.

 

      사당 위치도 <참고사진>

 

 

                     

                      사당 내부 <참고사진>

 

내부는 간막이가 없이 개방된 공간으로 초상화와 위패를 설치하였고, 4면중 3면은 벽체이며, 전면부 모든 부위에는 창호를 설치하였습니다.

 

 

기타 부속건물

 

 

  간채(동진학교)

 

 

● 간채 위치

 

              곡간채(穀間棟) <참고사진>

 

              선교장 본채 건물의 서측에 최근 복원된 곡간채[창고]와 동진학교가 있습니다.

 

곡간채(穀間棟) <참고사진>

 

거대한 창고건물로 강릉일대에서 수확하는 곡물을 보관하는 곳이며, 전주이씨가의 번영을 상징해 왔습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 중앙칸에 이웃해서 양측 차 협칸에 출입문을 두고 있습니다.

 

       동진학교(東進學校) <참고사진>

 

동진학교는 원래 광으로 사용된 건물이나 현재는 선교장 일원의 관리실의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창고 건물로 단층 맞배지붕이며 우측 2칸은 마루를 두어 접객실과 창고로, 반대쳔 2칸은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원래 곡간채(穀間棟)의 평면도 <참고사진>

 

 

한국전통문화체험관

 

 

● 한국전통문화체험관 위치 <참고사진>

 

한국전통문화체험관

 

전통문화체험관은 선교장 본채의 북서측 상단부에 자리하고 있는데 ㄷ자형 평면의 기와집 1동과 격리되어진 초가 2동의 건물입니다.

 

 

 맷돌 ?

 

 

초가(草家)1

 

 

초가 위치 <참고사진>

 

 

 

 

 초가 2

 

 

● 초가 위치 <참고사진>

 

 

 

 

 

홍예헌(泓藝軒)

 

 

● 홍예헌 위치 <참고사진>  

 

홍예헌(泓藝軒)

 

 

 홍예헌(泓藝軒)

 

 홍예헌(泓藝軒) 현판

 

 

풍경

 

 

 

 

 

 

 

 

참고사항

 

 

백호상과 선교장 <참고사진>

 

이 마을의 족제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안산의 끝자락에 백호상(白虎像)을 설치하여 비보(裨補) 행위를 하고있는데, 호랑이의 바라보는 곳이 선교장 방향입니다.

 

 1940년경의 선교장 <참고사진>

 

1940년경의 선교장 <참고사진>

 

 

 

                                               강릉(江陵) / 선교장(船橋莊)

                                                                  201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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