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강원도

강릉(江陵) / 오죽헌(烏竹軒)

케인스 2013. 7. 16. 01:17

 

 

                                                  강릉(江陵) / 오죽헌(烏竹軒)

 

 

 

오죽헌(烏竹軒) 가는 길

 

 

                                                                                                                     <google자료사진>

강릉 시내에서 200~205번 버스를 이용 [요금 \1,200. 수시 운행]

  

 

오죽헌(烏竹軒)

  

 

 오죽헌(烏竹軒) 경내배치도 <자료사진>

 

오죽헌(烏竹軒)은 율곡 이이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경포호의 서쪽 들녘 너머로 보이는 죽헌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릉시내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3km 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오죽헌(烏竹軒) 전경  <참고사진>

 

1975년에 대대적인 오죽헌 정화사업이 있었는데, 이 때 율곡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를 비롯해 자경문, 율곡기념관 등이 신축되었습니다.

 

오죽헌(烏竹軒) 입구

 

율곡 이이 동상

   

                                                                                                   <참고사진>

 

                                                                                                                                <참고사진>

1. 자경문(自警門)   2. 유적정화기념비(遺蹟淨化記念碑)   3. 문성사(文成祠)  

4. 오죽헌(烏竹軒)[몽룡실(夢龍室)]   5.사랑채(舍廳)   6. 안채(內房)  

7. 어제각(御製閣)   8.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   9. 입지문(立志門)   

 

강릉 오죽헌

 

오죽헌은 우리나라 어머니의 사표가 되는 신사임당이 태어나고 또한 위대한 경세가(經世家)요 철인(哲人)이며 정치가로서 구국애족의 대선각자인 율곡 이이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사임당 신씨(1504~1551)는 성품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文章), 침공(針工), 자수(刺繡) 뿐만 아니라 시문(詩文), 그림에도 뛰어나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 예술가라 할 수 있으며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고있다.

율곡 이이(1536~1584)선생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명종19년(1564) 생원시(生員試),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모두 장원급제 한 후 황해도 관찰사, 대사헌 등과 이조(吏曺), 형조(刑曺), 병조(兵曺)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조선 유학계(儒學界)에 퇴계 이황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로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당쟁(黨爭)의 조정, 10만 군대의 양병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大同法), 사창(社倉)의 실시에 노력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문묘(文廟)에 종사되었고 선조(宣祖)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등 20여개 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오죽헌은 강릉 유현(儒賢)인 최치운(崔致雲:1390~1440)의 창건으로 아들 웅현은 사위 이사온에게 물려주고, 이사온은 다시 그의 사위 신명화(사임당의 부친)에게, 신명화는 또 그의 사위 권화에게 물려주면서 그 후손들이 관리하여 오던 중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문성사(文成祠), 기념관 등이 건립되어 현재와 같은 면모를 갖추고 선생의 위업과 교훈을 길이 추앙하게 된 것이다. 

 

자경문(自警門)

 

입구로부터 율곡 이이 동상을 지나 자경문(自警門)으로 들어섭니다. 정화사업으로 자경문(自警門)이 새롭게 건립되었는데, 오죽헌의 외삼문(外三門)입니다.

 

                                                                                                      <참고사진>

 

율곡선생이 20세 때 지은 자경문(自警文)의 뜻을 기리고자 이름한 문으로  자경(自警)이란 "스스로를 경계함"이란 의미입니다.

 

 

 

 율곡선생유적정화기념비(栗谷先生遺蹟淨化記念碑)

 

 

오죽헌(烏竹軒) 주위 위성사진 <google자료사진>

 

오죽헌 경내

 

 

 

오죽헌(烏竹軒)

 

 

오죽헌(烏竹軒)

 

우리 나라 주거 건축으로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인 오죽헌은 조선 중종(中宗) 31년(1536)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탄생한 곳이며, 이율곡 선생의 외가로서 곧 신사임당의 친정집입니다.

 

오죽헌(烏竹軒) 뒷면

 

오죽헌(烏竹軒)은 강릉 선비인 최치운(崔致雲:1390∼1440)이 처음 지었으며, 최지운의 아들로 단종때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집이었습니다.

 

           

            오죽헌(烏竹軒) 현판

 

최응현은 사위인 이사온(李思溫)에게 이 집을 물려주었고, 이사온은 다시 사위인 신명화(申命和:신사임당의 아버지이며, 율곡의 외할아버지)에게, 신명화는 또 사위인 권화(權和)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후손이 1975년 오죽헌정화사업이 시작될 때까지 소유하였습니다.

 

 오죽헌(烏竹軒) 내부 <참고사진>

 

이사온(李思溫)의 딸 용인 이씨는 딸을 다섯 두었는데, 재산을 물려줄 때 외손 이이(李珥)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이종동생 권처균(權處均)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오죽헌 기와집과 전답을 물려 주었습니다.

 

오죽헌 옆 문성사 주위의 오죽(烏竹)

 

외할머니로부터 집을 물려받은 권처균은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烏竹軒)이라 했는데, 이것이 후에 집 이름이 되었습니다.            

 

 

 오죽헌(烏竹軒) 내부 대청마루[벽 안쪽은 몽룡실] <참고사진>

                     

오죽헌은 조선전기 민가의 별당 사랑채에 해당하는 건축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순한 일(一)자형 건물이며,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우물마루를 깔아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습니다. 대청과 방[몽룡실] 사이에는 외짝여닫이 세살문이 있습니다.

 

율곡 선생이 태어나신 몽룡실(夢龍室)

 

지붕은 양측면에 합각을 한 팔작 지붕으로 내부는 연등천장이나 합각부분만 우물천장으로 구성했다. 대청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온돌방의 전면 창호는 두짝 여닫이 세살문으로 되어있습니다.

                

몽룡실(夢龍室) 내부 <참고사진>

 

이곳이 바로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으로 신사임당이 율곡 선생을 낳기 전에 용꿈을 꾸었다는 데서 몽룡실(夢龍室)이라 이름 붙여졌다는데, 몽룡실의 온돌방은 벽과 천장을 모두 종이로 발랐습니다.

 

                     

                                                                                                   <참고사진>

 

커다란 장대석을 한 층으로 쌓아 기단을 만들고 막돌 초석 위에 사각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는 익공으로 처리하였다. 주심포 양식에서 익공 양식으로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오죽헌 옛그림 <참고사진>

 

조선전기 주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구조적 가치 외에도, 이 곳 몽룡실에서 이율곡 선생이 태어남으로써 더욱 유서 깊은 곳이 되었습니다.

 

                      

  

현재 오죽헌은 외부인에게 개방되어 건물 전면에 문을 열어놓고『격몽요결』,『자경문』 등의 명문장의 일부를 액자로 만들어 세워 두었습니다.

 

 

 

 

 

신사임당(申師任堂 : 1504~1551)

 

 

                                                              

                                                                                  <참고사진>

 

조선조의 여류서화가, 호는 사임당 또는 사임당(思任堂)ㆍ師姙堂ㆍ사임재(任師齋)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진사 신명화(申命和)의 딸이며, 어머니는 이사온(李思溫)의 무남독녀이다. 남편은 감찰(監察) 이원수(李元秀)이며, 이이의 어머니이다. 그의 품성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지조가 높아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혔으며, 문장ㆍ침공(針工)ㆍ자수(刺繡)에도 능통했다.

 

특히 시문으로는〈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사친(思親)〉등의 한시가 전해지고 있으며, 그림으로는 산수ㆍ포도ㆍ풀ㆍ벌레 등을 그려 여성의 섬세함을 잘 표현하였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자리도(紫鯉圖)〉〈산수도(山水圖)〉〈초충도(草蟲圖)〉〈리안도(蘆雁圖)〉〈연로도(蓮鷺圖)〉등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애정을 베풀어 율곡 이이와 같은 성현(聖賢)을 배출하였다.

 

 

이 이(李 珥 : 1536~1584)   

 

                                      

                                                                                   <참고사진>

 

호는 율곡(栗谷), 이름은 이(珥),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시호(諡號)는 문성(文成)이다. 어버지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율곡은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明宗3년(1548) 13세때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하였고,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23세때에는 영남사림의 거두인 퇴계 이황을 방문하여 학문적인 교류를 하였다. 명종19년(1564)에는 생원시(生員試)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左郞)에 임명되었고, 예조좌랑(禮曹左郞), 정언(正言), 이조좌랑(吏曹左郞),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1년(1568)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571년 청주목사, 1573년 직제학(直提學), 다음해 우부승지(右副承旨), 병조참지(兵曹參知),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후 병으로 사퇴하였다. 그후 황해도 관찰사, 1581년 대사헌예문관제학(大司憲藝文館提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거쳐 양관(兩館:예문관과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이듬해 이ㆍ형ㆍ조판서(吏ㆍ刑ㆍ兵曹判書)와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얻어 선조17년(1584) 정월 16일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이조판서에 재직하면서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조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민생문제에 대해서는 대동법과 사창제의 시행을 주장하였으며, 성리학적 향촌통치질서의 확립을 위한 해주향약의 실시에 깊이 관여하였다. 한편 글씨와 그림에도 재주가 뛰어 났다.


사망 후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선조(宣曺)의 묘정에도 배향되었다. 그리고 강릉 송담서원(松潭書院)을 비롯하여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풍덕의 귀암서원(龜巖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비롯하여《성학집요(聖學輯要)》, 《율곡전서(栗谷全書)》 등 38권이 전해지고 있다.

 

 

 

 

●  사임당 배롱나무

 

 

                          600여년된 배롱나무(목백일홍)

  

 

●  율곡매(栗谷梅)

 

 

                          천연기념물 율곡매(栗谷梅)

 

 

 

주목(朱木)

 

 

문성사(文成祠)

 

 

문성사(文成祠)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율곡 이이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입니다. '문성(文成)'은 1624년 인조 임금이 율곡 선생에게 내린 시호(諡號)로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道德博聞 安民立政)"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기 위해 건축된 어제각이 있었으나 1975년 오죽헌정화사업으로 오죽헌 안에 있던 어제각(御製閣)을 사랑채 북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문성사(文成祠)를 건립하여 율곡 선생의 영정(影幀)을 모셨습니다.

 

                     

 

                                                                                                                          <참고사진>

 

이 사당에 봉안된 율곡선생 영정은 1968년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린 것으로 1975년에 표준영정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선비들의 평상복인 심의를 입고 검은색 복건을 쓰고 있습니다. 이전의 것은 1926년 조선총독부에서 교육용으로 제작되었던 것입니다.

 

 

 

현판 글씨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썼습니다.

 

 

 

●  문성사(文成祠) 주위 오죽(烏竹)

 

 

 오죽(烏竹)

 

오죽(烏竹)은 줄기의 빛깔이 까마귀처럼 검은색이어서 오죽 또는 검죽이라 하였는데, 담배대와 지팡이 가구장식으로 쓰였습니다.

 

 

오죽(烏竹)화분과에 속하는 다년생 풀로 죽순(5~6월)은 첫해에는 초록색이었다가 한 해를 넘겨야만 완전히 오죽(烏竹)이 된다고 합니다.

 

 

●  율곡송(栗谷松)

 

 

                           율곡송(栗谷松)

                         

                          

    문성사(文成祠) 오른쪽으로는 두 그루의 율곡송(栗谷松)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서 있습니다      

                

 

 

 

안채, 바깥채

 

        

     

오죽헌 뒷뜰에서 본 바깥채[사랑채] <참고사진>

 

이곳에는 원래 고택(古宅)이 있었습니다. 정화사업시 모두 헐어내고 사랑채 일부만 남아 있었으나 1997년 복원되었습니다.

 

                                                

                                                협문 옆 야외 난로(?)

 

바깥채[사랑채]

 

바깥채[사랑채]는 5칸의 팔작지붕이며, 행랑과 부엌을 3개의 기둥으로 맞배지붕형식으로 이어 붙였습니다.

 

 

왼쪽의 부엌과 행랑칸 쪽으로 외짝 세살여닫이문이 있습니다.

 

 

 바깥채[사랑채] 방루(房樓)

 

자연석 네모난 초석위에 방루를 세우고 전면에 퇴간마루가 있고 난간(H=26㎝)을 두른 정면 3칸 측면 2칸의 가옥입니다. 우측에는 우물마루의 대청이 있고 전면은 4쪽 분합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방의 전면 창호는 두짝 여닫이 세살문이며 띠방이 있고 안방에서 부엌쪽으로 수납장이 있습니다. 

 

                           바깥채[사랑채] 내부

 

                        대청 측면에서 방의 전면까지 벽하부에 머름이 이어져 있습니다.

 

주련(柱聯)  <참고사진>                                                               

 

오죽헌 바깥채[사랑채] 건물 기둥의 주련 글씨는 서예가 추사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글씨입니다.

 

안채[1997년 복원된 건물]

 

안채 <참고사진>

 

  바깥채[사랑채]와 운한문(雲漢門) <참고사진>

 

 

어제각(御製閣)

 

 

 운한문(雲漢門)으로 들어서면 어제각(御製閣)

 

                           운한문(雲漢門) 현판 <참고사진>

 

운한문(雲漢門) 안에서 돌아본 오죽헌 <참고사진>

 

 어제각(御製閣)

 

정조의 어명에 의해 율곡선생이 손수 쓴 격몽요결(擊蒙要訣) 원본과 선생이 쓰던 벼루를 소장하는 집을 지어 어제각이라 하였습니다. 원래는 지금의 문성사(文成祠) 자리에 있었으나 1976년 정화사업 당시 헐렸다가 1987년에 이곳에 복원되었습니다.

 

 

     어제각(御製閣)  <참고사진>

 

어제각(御製閣) 상량문은 당시 강원감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쓰고, 강릉부사 맹지대(孟至大)는 기문을 썼습니다. 건축당시 건물 규모는 2평 정도의 목조팔각지붕의 전각형(殿閣形) 건물로 주위는 돌담을 둘렀고, 정문은 운한문(雲漢門)이라 하였습니다.

 

                     

                         

 

 

 어제각(御製閣) 내부 <참고사진>

 

 어제각 용벼루(龍硯)

 

율곡 선생이 어려서부터 쓰던 벼루로, 안동 고산석(安東 高山石)으로 만들어 졌으며, 매화무늬의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벼루(앞면)                     벼루(뒷면)  <참고사진>
 
      1788년 정조임금이 율곡 선생이 쓰던 벼루를 직접보고 뒷면에 다음과 같이 글을 썼습니다.

 

                                                     御製(어제) 御筆(어필)
                          涵婺池 象孔石 普厥施     龍歸洞 雲潑墨 文在玆

                               함무지 상공석 보궐시     용귀동 운발묵 문재자

 

        무원 주자의 못에 적셔내어, 공자의 도를 본받아 널리 베품이여!

        용[율곡]은 동천(洞天)으로 돌아갔건만,구름[명성]은 먹에 뿌려 학문은 여기에 남았구나!

 

 

 

 

  격몽요결(擊蒙要訣)

 

지폐속의 오죽헌, 벼루 그리고 이율곡선생 <참고사진>

 

 

기타 부속 건축물

 

 

● 율곡기념관

 

 

 율곡기념관 <참고사진>

 

                           

   율곡전서(栗谷全書) <참고사진>

 

율곡기념관에는 사임당과 그 자녀들이 남긴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율곡 이이의 유품으로는 이이의 저작을 집대성해 놓은 책으로 전체 23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율곡전서와 본인이 직접 쓴 것으로 본인 생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간찰이 있습니다. 

 

                           

                                                                                                 <참고사진>

 

사임당의 유품으로는 습작매화도, 초서병풍, 초충도병풍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초충도는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과 벌레를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 사소한 사물을 섬세하게 조형화한 사임당의 재능을 살필 수 있는 대표적인 유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입지문(立志門)

 

 

입지문(立志門) 정면

 

입지문(立志門) 뒷면

 

 

● 오죽헌 촬영지점(오천원권)

 

 

 오천원권의 오죽헌 촬영지점에서 본 오죽헌 <참고사진>

 

                                                       오천원권의 오죽헌 촬영지점 <참고사진>

 

 

● 야외전시장

 

 

         장독대 <참고사진>

                                                                                                                                              <참고사진>

 

                                      

                                                                                                                                 <참고사진>

 

향토민속관 옆에 있는 야외전시장에는 강릉지방에서 수집된 불교관련 석조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강릉석불입상(江陵石佛立像)  <참고사진>

 

 

 

 

● 향토민속관(鄕土民俗館)

                          

 

   향토민속관(鄕土民俗館) <참고사진>

                                  

                                        

                                                                                       <참고사진>

 

향토민속관(鄕土民俗館)에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각종 생활용품과 생업도구, 그리고 김영숙선생의 기증유물이 있습니다.

                                      

 연상, 붓 등 <참고사진>

 

한약방용구와 각종 생업도구인 직조기기ㆍ도량기구ㆍ어업용구ㆍ목공구ㆍ산간지방에서 사용하던 사냥용구 등이 차례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참고사진>

 

     쌍토끼 오복문양 별전패 <참고사진>

 

기증유물실에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제작된 유아복, 젊은 남녀가 하나로 합쳐 위로는 조상의 제사를 모시고 아래로는 자손을 후세에 존속시키기 위해서 치르는 혼인의 예에 사용되었던 혼례복, 천연염직물, 조형미가 돋보이는 노리개를 비롯한 장신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 고분전시실

 

 

   고분, 집자리 전경 <참고사진>

 

고분전시실에는 선사시대 집자리와 묘제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강릉 병산동 주거지 <참고사진>

 

철기시대 유물로는 대규모 취락 유적지로서 주거양식뿐만 아니라 생활양식을 잘 보여주는 유적 출토물과 집자리가 복원, 전시되어 있습니다.

 

                                                                                                                         <참고사진>

 

강릉에서 출토된 철기시대, 신라시대 고분들 <참고사진>


 

● 선정비군(善政碑群)

 

                                                                                                               <참고사진>

 

                                                                                                                     <참고사진>

 

시립박물관 옆에는 조선시대 강릉부사 및 관찰사의 선정송덕비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 강릉시립박물관

 

 

 강릉시립박물관

 

강릉시립박물관에는 영동지방에서 출토된 각종 선사, 역사유물과 도자기, 고문서, 전적, 서화류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점뼈(卜骨) <참고사진>

 

구석기시대 유물로는 발한동 유적, 신석기시대의 유물로는 지경리 유적, 청동기시대 유물로는 방내리.포남동 유적, 초기철기시대의 유물로는 강문동. 병산동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송사지석불좌상 <참고사진>

 

굴산사지와 신복사지 출토유물 <참고사진>

 

                      도자기를 제작하는 과정을 재현한 모형 <참고사진>

 

객사문과 임영관지 모형 <참고사진>

 

홍길동전  <참고사진>

 

임영지ㆍ계첩ㆍ교지ㆍ상서ㆍ난설헌시집목판초간본ㆍ홍길동전 등 강릉지역과 관련된 역사서와 문집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신사임당 동상

 

 

 

사임당(師任堂) 신(申)씨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난을 면한 아버지 신명화(申命和)와 어머니 용인(龍仁) 이(李)씨의 다섯 딸 가운데 둘째 딸로 1504년 음력10월29일에 이곳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나 1551년 5월17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48세이다. 덕수(德水) 이씨 원수(元秀)에게 출가하여 일곱 남매를 두었고 우리나라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이르는 율곡은 셋째 아들이다.

사임당은 우리역사에서는 다시 찾을 수 없는 여성으로 부덕(婦德)은 만인의 사표(師表)가 되었고 천부(天賦)의 자질이 남달리 비범하여 여공(女功)은 말할 것도 없고 글씨, 그림, 학문, 예술에 이르기까지 천재가 발휘된 작품과 업적이 오늘까지 남아 전하여 뒷세상 사람의 우러름을 받고 있다.

사임당은 율곡과 같은 거벽(巨擘)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매창(梅窓)과 옥산(玉山)과 같은 자녀를 두었으니 이들은 다 어머니의 자질과 훈도(薰陶)에 연유(緣由)하여 서예나 그림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남성은 서로 견주어지는 인물이 있으나 여성으로서는 사임당과 견줄 인물을 찾기 어려우니 사임당은 우리 민족의 만세(萬世)의 여성상이라 이를 것이다.

                                                                             2008년 12월 30일

 

신사임당 향수시(申師任堂 鄕愁時)

 

향수시(鄕愁時)는 친정에 갔다 오다 산 위에 올라서서 고향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시입니다.

 

 

● 구용정(九容亭)

 

 

구용정(九容亭)과 연못 <참고사진>

 

   구용정(九容亭) <참고사진>

 

오죽헌 입구에서 율곡이이 동상의 우측으로 들어가면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지신장(持身章) 내용에서 따온 구용(九容)이란 이름을 붙인 소박한 정자와 자그마한 연못이 나옵니다.

 

                                                                                                             <참고사진>

 

구용(九容 : 아홉 가지 예절)이란 군자가 항상 명심해야 할 아홉 가지 일로,

 

① 족용중(足容重)
발은 경솔하지 않게 무겁게 놀려야 한다.

② 수용공(手容恭)
손은 쓸데없이 움직이지 말고 단정히 놀려야 한다.

③ 목용단(目容端)
눈은 옆으로 흘겨보거나 곁눈질하지 말고 단정하게 떠야 한다.

④ 구용지(口容止)
입은 말을 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 외에는 항상 꼭 다물고 있어야 한다.

⑤ 성용정(聲容靜)
말소리는 항상 나직하고 조용하여 시끄럽거나 수선거리지 않는다.

⑥ 두용직(頭容直)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이거나 돌리지 말고 곧게 가져야 한다.

⑦ 기용숙(氣容肅)
호흡을 조용히 하여 기상(氣像)을 엄숙히 한다.

⑧ 입용덕(立容德)
서 있을 때는 덕이 있어 보이도록 반듯한 자세로 서 있어야 한다.

⑨ 색용장(色容莊)
얼굴은 생기 있고 씩씩하게 가져야 한다.

 

 

● 구사정(九思亭)

 

 

 

 

구사정(九思亭) <참고사진>

구용정(九容亭)을 지나 조금 오르면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지신장(持身章) 내용에서 따온 구사(九思)란 이름을 붙인 초가지붕의 정자가 나옵니다.

 

 

                                                                                                   <참고사진>

 

구사(九思 : 아홉 가지 마음 가짐)란 군자가 항상 명심해야 할 아홉 가지 일로,

 

① 시사명(視思明)
눈으로 볼때는 밝게 바르게 옳게 보아야 되겠다는 마음가짐을 해야 한다.

② 청사총(聽思聰)
귀로 들을 때에는 무엇이든지 밝게 지혜를 기울여 진정한 것을 들어야 한다.

③ 색사온(色思溫)
표정 즉, 낯빛(안색)은 항상 온화하게 가져야 한다.

④ 모사공(貌思恭)
몸 가짐이나 옷차림 등은 공손하게 해야 한다.

⑤ 언사충(言思忠)
말을 할 때에는 충실하게 해야 한다.

⑥ 사사경(事思敬)
일을 처리할 때는 공경스럽게 해야 한다.

⑦ 의사문(疑思問)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물어서 깨달아야 한다.

⑧ 분사난(忿思難)
분하고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참고 삭여야 한다

⑨ 견득사의(見得思義)
재물이나 명예나 무엇이든 자기에게 보탬이 되는  경우에는 그것이 옳은 것인가 생각하라.

 

 

 

 

 

                    강릉(江陵) / 오죽헌(烏竹軒)

                                                      2013. 06. 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