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경기도

양주(楊州)/관아지(官衙址)

케인스 2012. 6. 6. 00:07

 

 

양주(楊州) / 관아지(官衙址)

 

 

 

☞  양주(楊州)관아지(官衙址)

                

 

양주(楊州)의 관아지(官衙址) 위치도 <다음지도참고사진>

 

양주(楊州)의 관아지(官衙址)는 불곡산(佛谷山) 남쪽 유양리의 유양초등학교와 양주별산대 놀이마당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양주관아지(楊州官衙址) <참고사진> 

 

양주(楊州)의 치소(治所)는 한양(漢陽)의 중심부에 있었으나 조선 태조3년 도읍을 송도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지금의 서울 광진구 일대인 대동촌으로 옮겼다가 다시 견주[見州, 현 양주읍 고읍리]의 옛터인 지금의 양주시 고읍동으로 옮긴 후, 중종1년(1506) 지금의 유양리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양주관아지(楊州官衙址) <다음지도참고사진>

 

양주(楊州) 관아(官衙)는 현재 위치에 설치되어 1922년 시둔면[현 의정부시 의정부동]으로 이전될 때까지 417년간 양주목(楊州牧)을 관할한 행정관청으로, 경기읍지[1871년] 등에는 동헌(東軒), 객사(客舍), 사창(司倉), 군사시설 등 양 30여개의 시설을 갖추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주관아지(楊州官衙址) 추정도 <참고사진>

 

관아(官衙) 건물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었는데, 1995년 원골 문화마을 종합계획을 수립하여 1996년 금화정(金華亭), 1997년 동헌(東軒)을 복원하였습니다.

 

 

 

                                                     양주관아지(楊州官衙址)

 

현재 복원한 관아가 위치한 유양리 507번지는 양주목사가 정무를 보는 관아의 중심건물인 동헌[東軒. 매학당(梅鶴堂)]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헌(東軒) 

 

 

동헌(東軒) 전경

 

관아(官衙)는 중앙 대청이라고 할 수 있는 정청(正廳)이 중앙에 자리잡고 그 앞쪽 좌우에 향청(鄕廳), 중영(中營) 등 각종 부속건물이 위치하였으며, 객사(客舍)는 관아 서북쪽 약간 떨어진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헌(東軒)은 한식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의 정면 7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입니다. 계단을 올라 화강석 기단위에 주초를 두고 방형기둥을 세웠습니다.

 

                                               동헌(東軒) 현판

 

                             기둥 위 두공은 간결한 모양을 두 겹으로 얹인 건물입니다.

 

                                                       동헌(東軒)  안내판

 

동헌(東軒) 정면과 서쪽 측면

 

동헌(東軒) 서쪽 측면

 

동헌(東軒) 후면과 서쪽 측면

 

동헌(東軒)의 후면 

                                              동헌(東軒)의 정면과 동쪽 측면

 

 

2000년부터 2006년까지 3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관아의 부속 건물로 추정되는 다수의 건물지와 담장시설 등이 확인되었으며, 보다 자세한 고증을 위해 지속적인 학술 조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송덕비(頌德碑) 

 

 

송덕비(頌德碑) 

 

동헌의 앞마당 동쪽에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전임 양주목사들의 송덕비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모두 18기인데 이중 17기는 송덕비이고, 나머지 1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유허비입니다. 이 비들의 비좌는 화강암으로 새로 만든 것들입니다.

 

 

 

 

 

 

 

어사대 비(御射臺碑) 

 

 


                                  어사대 비는 동헌(東軒)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어사대 비(御射臺碑)

 

어사대 비(御射臺碑)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2호로 옛 양주관아가 있던 터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조선 정조가 이곳에 들러 활을 쏘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둔 비입니다.

 

                                              복원한 사대(射臺)

 

조선 정조 16년(1792) 왕은 광릉[光陵:조선 7대 임금 세조와 부인 정희왕후의 능]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관아 소재지인 양주읍 유양리에서 3일간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민정을 살핀 후 근처의 사대(射臺:활을 쏘는 위치의 발사대)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을 쏜 뒤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후에 양주목사 이민채(李敏采)가 그때의 상황을 비석에 기록하였는데, 임금이 활을 쏘았던 곳이라 하여 어사대(御射臺)라 하고 이 비석을 세워 기념하였습니다.

 

                     

                                                        어사대 비(御射臺碑)

 

                         어사대 비(御射臺碑)는 높이 140cm, 너비 55cm, 두께 23cm입니다.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비신(碑身)은 간략한 조각의 귀부(龜趺) 위에 세워져 있고 앞면에는 큰 글씨로 '어사대(御射臺)'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뒷면에는 정조가 활을 쏜 내용에 이어 활을 쏜 뒤 지은 시와 환궁 후 내린 말씀을 관아 우측 벽에 게시하여 성덕을 찬양하며, 아울러 그 사실을 석비에 새기고 읍지에 기록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또한 뒷면의 비문 끝부분에 ‘숭정삼임자 십이월 일립(崇禎三壬子 十二月日立)’이라는 연기(年記)가 있어 비의 건립연대를 알 수 있습니다.

 

어사대 비(御射臺碑) 옛 사진

 

비의 여러 곳에는 6·25전쟁 당시의 탄흔이 뚜렷하게 남아 있으며, 1991년 11월27일 비각(碑閣)을 만들어 비를 보호하게 되었습니다.

 

 

금화정(金華亭)과 유양폭포(維楊瀑布) 

 

 

                                     양주(楊州) 관아(官衙)의 휴식처 금화정(金華亭) <참고사진> 

 

                                                                                                                                   <참고사진> 

금화정(金華亭) 뒤 유양폭포(維楊瀑布)로 부터의 물길 <참고사진> 

 

유양폭포(維楊瀑布) <참고사진> 

 

두꺼비 상(像) <참고사진> 

 

 

기타 유구(遺構)

 

 

 

 

 

 

 

 

 

 

 

양주(楊州) / 관아지(官衙址)

2012.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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