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종주 (08.08.30)
▶ 등산코스 : 불광동대호아파트 - 족두리봉 - 향로봉 - 비봉 - 사모바위 - 문수봉 -
대남문- 대성문 - 보국문 - 대동문 - 동장대 - 용암사지 - 용암문- 노적
봉- 위문- 백운대- 백운대피소- 인수대피소- 하루재- 백운대2공원지킴터
(약13km)
▶ 실제 산행 시간: (8시간15분 소요)
불광동대호아파트---(38분)--- 족두리봉---(56분)--- 향로봉 ---(9분)--- 비봉 ---(13분)--- 사모바위 ---(1시간1분)--- 문수봉 ---(8분)--- 대남문 ---(16분)--- 대성문---(31분)--- 보국문 ---(17분)
--- 대동문 ---(18분)--- 동장대---(32분:점심)---용암사지 ---(9분)--- 용암문 ---(17분)--- 노적봉
---(27분)--- 위문 ---(23분)--- 백운대 ---(32분)--- 백운대피소 ---(22분)--- 인수대피소---(10분)
--- 하루재 ---(56분)--- 백운대2공원지킴터
▶ 산행 참고사진:
불광동 대호아파트입구 / 07:25
등산로 입구 / 07:28
지하철 불광역 9번출구에서 500m가량 직진하여 불광동 대호 아파트 옆 오른쪽 언덕길로 약 150m 가면 남해아파트가 나오고 건너편 삼환그린파크아파트 주차장 옆 골목길로 들어가 계단으로 오르면 등산로가 나타납니다.
본격적인 등산로 / 07:33
조망(眺望) / 07:51
은평구 시가지 / 07:51
산불감시초소 / 08:01
향로봉 1.0km, 불광공원지킴터 1.1km / 08:02
족두리봉(370m) / 08:03
족두리봉(370m)
족두리봉은 북한산 능선 서쪽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멀리서 보면 족두리를 쓴모습과 같아 족두리봉으로 부릅니다. 족두리봉은 수리봉, 시루봉, 독바위 등으로 불리는데 쳐다보는 방향에 따라 각기 그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향로봉 0.76km, 비봉 1.88km, 불광공원지킴터 1.5km / 08:12
족두리봉 0.7km, 탕춘대 0.5km, 구기터널공원지킴터 1.3km, 불광공원지킴터 1.3km / 08:23
족두리봉 0.9km, 비봉 1.12km, 탕춘공원지킴터 1.6km / 08:37
08:39
족두리봉 0.91km, 비봉탐방지원센타 1.2km, 사모바위 1.57km / 08:40
조망(眺望) / 08:49
08:55
향로봉 (535m) / 08:59
향로봉(일명 향림봉, 삼지봉)
향로봉 이름의 유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향림사의 이름과 연관되어지리라 추측해 봅니다. 영조21년(1745)에 승려 성능(聖能)이 간행한 책인 북한지(北漢誌) 사찰(寺刹)편에 향림사는 비봉 남쪽에 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현재의 향로봉에 향림사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향로봉을 향림봉이라고도 합니다.
비봉 0.4km, 청수동암문 2.3km, 불광공원지킴터 2.1km / 08:59
관봉(冠峯) / 09:21
'동국여지비고'의 봉우리 표기에 따르면 불암(佛岩)이라고 기록된 봉우리가 현재의 관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향로봉 0.3km, 사모바위 0.95km, 진관공원지킴터 2.3km, 비봉탐방지원센타 1.3km / 09:05
비봉(560m) / 09:08
비봉(碑峯/560m)
탕춘대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산줄기 중앙에 비봉이 우뚝 솟아 있으며, 정상에는 "사적 제228호 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新羅眞興王巡狩碑遺趾(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 <참고사진>
이 비석은 국보 제3호 신라 진흥왕 북한산순수비가 있던 곳임을 알려주는 것으로, 뒷면에는 "이곳에 세워졌던 진흥왕순수비가 1,400여 년의 오랜 풍우로 그 비신 보존이 어려워 이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하여 1972년 8월 16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고 그 유지를 사적으로 지정한다."고 새겨져 있다.
훌륭한 지리적 조건으로 삼국통일 전쟁과정에서 이곳에 진흥왕의 순행이 있었고 그를 기념하기 위한 순수비를 세우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산순수비는 비석이 세워진 이래 1,200여 년 동안 잊혀져 오다가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에 의해 발견되었다. 비석 형태는 장방형으로 가공된 석재를 사용하여 자연 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글씨는 모두 12행인데 1행 32자이다. 비문에는 승가굴에 승려가 있다는 내용과 순행한 신하 명단·소속부명·관계명·관직명을 기록하고 있어 신라 6부제와 17관등제의 구조를 확인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순수비의 원 비석은 1972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졌으며, 1986년 다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로 옮겨 보호하고 있다. 따라서 그 유지를 사적으로 정하고 그 사실을 알리는 비석을 세운 것이다. 당시 원 비석 아랫부분에 길이 7cm 두께 3cm의 철심이 암반에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자료:서울시>
비봉 꼭대기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국보 3호)는 2006년 10월 원형을 본 떠 복제된 것입니다. 비에 새겨진 글자 모양이나 돌 표면까지 진품과 똑같이 제작되었으며, 비바람에 마모된 흔적과 한국전쟁 때 총탄을 맞은 자국까지 그대로 살렸다고 합니다.
비봉(碑峯)
조망(眺望) / 09:14
헬기장 / 09:14
조망(眺望) / 09:18
조망(眺望) / 09:19
대남문 1.85km, 비봉 0.37km / 09:20
사모바위 / 09:21
매봉능선의 갈림길에 있는 사모바위는 사모관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기도 하며 또한 사랑하는 여인을 애틋하게 기다리다 바위가된 남자라는 전설이 있기도 합니다.
사모바위의 전설
조선 인조 임금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자가 전쟁터로 갔다가 다행히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고향에 돌아오니 사랑하는 여인이 청나라로 갔다. 남자는 여인이 풀려나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여인들은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풀려났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북한산 자락 지금의 홍은동 지역에 모여 살았다. 남자는 여인을 찾으려고 그 지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결국 그는 북한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언제고 돌아올 그녀를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구기동 쪽에서 사모바위를 보면 북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자료:한국의 산하>
사모바위는 ‘김신조 바위’라고도 불리는데, 1968년의 북한특수부대원들이 이곳에 집결하여 청와대를 넘봤던 곳입니다. 1992년까지 이곳에는 군부대가 주둔했으며 지금도 헬기착륙장 주변에는 예전의 군부대 막사터가 남아 있습니다.
대남문 1.6km, 향로봉 1.25km / 09:24
조망(眺望) / 09:24
문수봉 1.8km, 비봉 0.4km, 삼천탐방지원센타 4.0km / 09:26
조망(眺望) / 09:32
보현봉(普賢峯/700m)
보현봉은 세종대왕의 명으로 수양대군(세조)와 안평대군 그리고 다른 유신들이 올라가 그곳에서 천문 관측을 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승가봉(僧迦峯/575m)
승가봉(僧迦峯)은 승가사(僧迦寺)에서 유래한 봉우리 명칭으로, 승가봉 바로 아래 '승가사'라는 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승가사는 756년(신라 경덕왕 15)에 승려 수태(秀台)가 창건하고 당나라 고종 때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가르쳤던 승가(僧伽)대사를 기리는 뜻에서 승가사라고 이름지었다고 전합니다. 이곳 승가봉에 오르면 북한산 능선 중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는 의상능선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석문(石門) 가는 길 / 09:34
석문(石門) / 09:38
승가봉과 문수봉 사이에 작은 석문(石門)이 있는데 혹자는 '통천문(通天門)' 또는 '불로문(不老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석문(石門)
09:41
문수봉 가는 길 / 09:42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 09:46
09:48
문수봉 구간 / 09:57
문수봉 구간 / 09:59
비봉능선 / 10:03
비봉능선은 문수봉 서쪽 가지의 칠성봉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향로봉까지 이어지는 능선입니다. 능선에는 칠성봉, 석문바위봉, 승가봉,비봉, 관봉, 향로봉 등 모두 6개의 봉우리가 있습니다.
문수봉 정상과 국기봉(깃대봉) / 10:12
문수봉(文殊峯/727m) / 10:12
문수봉이란 이름은 이 봉우리 밑에 있는 고려예종(高麗睿宗)4년(1109)에 대감탄연국사(大鑑坦然國師)가 세운 문수사(文殊寺)란 사찰 이름으로부터 연유되었다고 보여집니다.
문수봉-국기봉(깃대봉) / 10:13
북한산성 성벽 일부 / 10:20
비봉능선의 기암 / 10:20
비봉능선 기암(두꺼비바위, 일명 아이스크림바위-오른쪽) / 10:20
문수봉-국기봉(727m) / 10:22
문수봉-국기봉의 태극기 / 10:22
되돌아 본 문수봉 / 10:22
문수봉(국기봉)에 있는 고양시와 종로구 경계점 표시석 / 10:24
대남문과 북한산성 / 10:27
북한산성 / 10:28
북한산성(北漢山城)
사적 제162호, 경기도 고양시 신도동 북한리
이 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리면서 뺏고 빼앗기던 쟁탈 대상지로 백제시대에 쌓은 토축산성(土築山城)이었다.
고려 고종19년(1232)에는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거란이 침입했을 때에는 이곳에 고려 태조의 재궁(관)을 옮겨 온 일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을 당하여 도성 외곽의 축성론이 일어나 숙종37년(1711)에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하여 석성으로 완성되었다.
조선 영조21년(1745) 승(僧) 성능(聖能)이 지은 북한지(北漢誌)라는 문헌에 북한산성의 축조 과정이 기록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성의 길이는 21리 60보이며 시설로는 14개의 성문과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와 행궁 군창이 있었으며, 성내에는 승군이 주둔했던 중흥사(重興寺) 등 12개 사찰, 99개소의 우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7km이며 성안의 면적은 2백여만평으로 옛 한성의 방어 역할을 했던 이 산성은 1990년부터 훼손된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보국문과 성곽들을 일부 보수, 복원하였다. <안내판에서..>
대남문(大南門/683m) / 10:30
비봉 2.2km, 대성문 0.3km, 구기분소 2.5km
대남문(大南門)
북한산성의 4개 방위중 남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처음 축조 당시는 문수봉암문(文殊峯暗門)으로 불리웠던 성문입니다. 보현봉(普賢峯:715m)과 문수봉(文殊峯:727m)을 잇는 해발 663m 능선 상의 안부(鞍部)에 위치 해 있습니다. 서울시가 북한산성 복원계획을 세워 1991년에 첫 번째로 문루(門樓)등 성문을 복원했습니다.
대남문
대남문
대남문
10:33
대남문에서의 조망(眺望)
대남문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안내판 사진>
고려시대부터 불려 내려온 삼각산이라 함은 백운대(白雲臺), 만경대(萬景臺), 인수봉(仁壽峰) 세개의 봉우리를 말하며, 백운대(836m)는 북한산 제일봉이다. 또한 만경대(799m)는 조선조 태조가 왕사(王師) 무학대사와 올라 도읍을 정했다하여 국망봉(國望峰)이란 별명이 있다. 인수봉(810m)은 암벽등반장비를 갖추어야만 오를 수 있는 국내 제일의 암봉이며 "등에 어린아이를 업은 형상" 이라 하여 삼국시대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 칭하였다. 노적봉(716m)은 높고 웅장한 바위산으로 노적가리 모양과 같다하여 노적봉으로 불린다. 그리고 북한산(北漢山)의 명칭은 조선조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조한 이후부터로 추정되며, 한강 이남에는 남한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안내판에서..>
대남문에 위치한 북한산성복원공사 표지석
북한산성복원공사
· 공사연혁
북한산성은 사적 제162호로 성문 14개소, 성곽둘레 12.7km로 옛 한성의 방어 역할을 했던곳으로서, 성문 및 성곽이 일부 훼손되어 년차적으로 복원하였음.
1990년 : 대남문(37.6m2), 성곽 12.6m.
1991년 : 대성문(34.7m2), 석측 18m.
1992년 : 대동문(32m2), 성곽 83.4m(대남문구간), 54.3m(대성문구간), 48.3m(대동문구간)
1993년 : 보국문(암문), 성곽 4.8m.
1994년 : 대남문 육축보수, 성곽 256.6m(대남문에서 대성문구간)
석재 및 목재 등의 자재운반은 헬리콥터를 이용 운반을 하였음.
· 공사기간 : 1990. 12 ~ 1995. 8
· 공사금액 : 33.6억원
· 공사시행기관 : 서울특별시 종합건설본부
· 관리청 : 서울특별시 문화재과
대남문 앞에 있는 문수사(文殊寺) 연혁 안내판
대남문 밑에 자리잡고 있는 문수사는 고려 예종 4년(1109)에 탄연이 창건한 절인데 영험한 명찰로 알려져 왕들의 거둥도 잦았다 전합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유북한기>를 보면 이 절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문수굴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나오는데 그 규모와 화려함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입니다. “…끝까지 가자 돌샘이 있는데 물빛이 검푸르고 차갑다. 좌우로 돌로 만든 5백 나한불을 나란하게 첩첩이 앉혀놓았다. 석굴의 이름은 보현굴이라고도 하고 문수굴이라고도 한다. 삼불(三佛)이 있는데 돌로 만든 것은 문수보살이고, 옥으로 만든 것은 지장보살이며, 금으로 도금한 것은 관음보살이다. 이 때문에 삼성굴(三聖窟)이라고도 한다.”
문수사 연혁
10:45
대성문(大城門) / 10:46
산성 능선 해발 625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서 가장 큰 문입니다. 원래는 소동문(小東門)으로 불리우는 작은 암문(暗門)이었으나 성문 위치가 문 북쪽 기슭의 행궁(行宮)으로부터 이곳을 통과하여 형제봉과 보토현(輔土峴-현재 북악터널 위쪽)을 경유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임금의 출입을 위해 후에 성문을 크게 개축하여 그 위용을 갖추고 이름도 대성문(大城門)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하고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 행궁(行宮)이란 임금이 왕궁 밖에서 머물던 별궁(別宮)으로 북한산성 내 행궁은 산성을 축조하던 조선 숙종37년(1711년)에 세워졌습니다.
대성문은 대남문에 이어 1992년에 복원되었으며, 현판은 북한산성을 축조한 숙종임금의 친필 글씨를 집자해서 걸었습니다.
대성문은 높이 13척(4m)에 폭 14척(4.5m)으로 대남문(11척/11척)과 대서문(11척/13척)에 비해 월등히 규모가 큰 성문입니다.
대성문
대성문
대남문 0.3km, 비봉 2.5km, 대동문 1.2km, 보국문 0.6km, 형제봉 1.8km / 10:49
북한산성 / 11:00
11:01
11:01
11:02
11:07
조망(眺望) / 11:08
조망(眺望) 도봉산 / 11:08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 11:10
뒤로는 수락산(水落山) / 11:12
조망(眺望) 동장대 / 11:13
대성문 0.6km, 대동문 0.6km / 11:17
보국문(輔國門) / 11:17
보국문의 원래 이름은 동암문(東暗門)으로 대동문과 대성문 사이 해발 567m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아래에 보국사(輔國寺)가 있었다고 하여 보국문(輔國門)이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보국문은 1993년 완전 해체된 후 복원 되었으며, 성문 안쪽 성돌에는 북한산성을 축조 할 당시인 1711년에 공사책임자와 기간 그리고 구간을 표시한 글이 새겨져 있기도 합니다.
보국문
11:19
헬기장 / 11:22
칼바위 / 11:24
치(雉) / 11:25
적의 동태를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는 최고의 조망처에 반드시 치(雉)를 설치하게 됩니다.
칼바위탐방로 표시목 / 11:25
은점표범나비 / 11:27
헬기장 / 11:32
대남문 1.6km, 대성문 1.2km, 보국문 0.6km, 백운대 3.1km, 용암문 1.5km, 북한산대피소 1.3km /11:34
대동문(大東門) / 11:34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동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우이동 진달래능선이 끝나는 해발 54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문은 1993년에 문루(門樓)를 갖추는 등 화려하게 복원되었습니다.
대성문과 마찬가지로 1993년에 복원 당시 현판의 글씨도 북한산성을 축조한 숙종임금의 어필을 집자해서 걸었답니다. 보국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안쪽 성돌에 축조 당시인 1711년에 공사 책임기관과 구간을 기록한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옛날에는 대동문 안에 많은 가옥이 있었다 하며, 또한 그 명칭이 소동문이라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붉은 물봉선 / 11:38
11:38
조망(眺望) 동장대 / 11:43
조망(眺望) / 11:43
강북구 수유동 아파트군 / 11:44
덕장봉(德蔣峯) 정상의 제단(祭壇) / 11:45
대동문 위의 성벽을 따라 계단길을 오르면 제단이 설치된 전망이 좋고 공터가 널찍한 덕장봉 정상에 다다릅니다. 연초에 산악회 시산제를 지내는 장소로 인기가 높은 곳이기도 합니다.
11:50
기암 / 11:50
시단봉(柴丹峯)에 우뚝 선 동장대(東將臺) / 11:52
동장대는 북한산성 3대 장대 중 외부를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장대로 그 장대가 위치한 시단봉(柴丹峯)은 산성의 중심축에 해당하는 중요한 봉우리입니다.
북한산성이 완공된 후 숙종은 친히 동장대에 올라 산성을 시찰하며 지은 어제시를 남겼습니다.
間關十里到行宮 崒崒柴丹卽在東 간관십리도행궁 줄줄시단즉재동
露積峯頭雲未捲 白雲臺上霧猶朦 노적봉두운미권 백운대상무유몽
登彼東臺若上天 千峯削立接雲烟 등피동대약상천 천봉삭립접운연
寇賦非徒不敢近 猿猱亦必愁攀緣 구부비도불감근 원노역필수반연
험한 길 10리를 걸어 행궁에 이르니 험한 시단봉(동장대가 있는 봉우리)이 동쪽 가까이 있네
노적봉 머리위의 구름은 아직 걷히지 아니하고 백운대 위에는 아직도 안개가 자욱하네.
저 동대(동장대)에 오르니 하늘 위에 오른 듯 일천 봉우리 깍아지른 듯 서서 구름에 접해있네.
도둑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긴 팔 원숭이도 기어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
동장대(610m)
대동문 0.5km, 백운대 2.5km
동장대(東將臺)
이곳 동장대는 북한산성 내의 3기 장대 중의 하나이다. 장대는 장수의 지휘소로 성안의 지형이 높은 곳에 설치한 건물이다. 성안에는 각 국문별로 적정 장소를 선정하여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를 두었는데 그 중 동장대의 규모가 제일 크며 행궁을 비롯한 성의 안팎을 모두 살필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동장대의 기단은 정사각형의 이중 구조로 외부 기단은 장주형 초석 12개를 내부 기단은 원형 초석 4개를 세웠던 중층 건물 구조였으며, 또한 외부 기단 사방에는 장대를 드나들 수 있도록 계단이 각각 설치되어 있었다.
이 장대는 1915년 8월 집중 호우 때 무너진 것으로 추정되며, 복원되기 전까지는 장주형 초석 12개와 중앙에 원형 초석 4개, 대다수 박석 및 돌게단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 전문가의 고증에 의거, 본래의 위치에 다시 사용하여,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 1995년 11월부터 1996년 11월까지 서울특별시에서 복원하였다. <안내판에서..>
동장대의 지붕 처마와 장주초석
11:54
접시꽃 / 11:54
동장대에서 바라보는 산성 주능선 <안내판 사진>
조망(眺望) 의상능선 / 11:53
조망(眺望) / 11:54
조망(眺望) / 11:55
조망(眺望) / 11:55
동장대를 뒤로하고.. / 11:56
위문 1.5km / 12:22
보국문 1.9km, 대동문 1.3km, 백운대 1.7km, 용암문 0.2km / 12:23
용암사지(龍岩寺址) / 12:24
북한산 일출봉(日出峰) 아래 경기도 고양시 �양구 북한동에 자리한 용암사지는 조선 숙종37년(1711) 북한산성 축성 이후에 건립한 용암사가 있던 절터이다. 용암사는 승병(僧兵)을 유치하기 위하여 산성내에 건립한 13개 사찰 가운데 하나로서 당초 87칸 규모로 창건된 후 용암암문(龍岩暗門) 일대의 산성 수비와 승병들의 훈련장으로 일익을 담당하였다. 용암사는 갑오개혁시의 승병 강제 해산 이후 혼돈기인 19세기 말에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판에서..>
용암사지의 허물어져 내린 석탑 돌무더기
무너진 탑돌 옆에 나동그라져 있는 석탑의 귀기둥(우주석)
탑신부와 기단부의 석재들
석탑의 옥개석과 옥개석 받침으로 보이는 석탑의 파편들이 돌무더기 속에 여러 장 겹쳐 누워있습니다. 복원이 되는 그날을 지켜보겠습니다.
북한산대피소(북한산장)
용암사지에 들어선 북한산대피소(북한산장)는 무인대피소입니다. 예전에는 간이매점이 있었지만 지금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용암사지 안내판
용암사지 주변안내도
탐방로 안내 / 12:25
용암사지의 북한산장 옹달샘 / 12;25
대동문 1.4km, 백운대 1.6km / 12:30
대동문 1.5km, 백운대 1.5km / 12:33
용암문(龍岩門/580m) / 12:33
본래 이름은 용암봉암문(龍巖峰暗門)으로 무인대피소인 지금의 북한산장 부근 용암봉 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과거 이 일대의 수비를 담당하던 용암사(龍巖寺)가 부근에 있어 용암문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1998년 보수가 완료되어 복원 되었습니다.
용암문(龍岩門)
도선사, 북한산장, 노적봉을 연결하며, 옛날에는 중흥사,태고사로 통한는 길목이라 합니다. 북한산장에서 도선사로 바로 내려가는 길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문입니다.
용암문(龍岩門)
대동문 1.6km, 백운대 1.4km /12:38
대남문 3.35km, 위문 1.0km / 12:38
12:47
노적봉(露積峰/716m) / 12:50
대동문 2.1km, 백운대 0.9km
노적봉(露積峰)
노적봉은 동봉과 서봉으로 된 쌍봉으로 동봉은 걸어서 오를 수 있고 서봉은 암벽등반으로만 오를 수 있습니다. 노적봉 정상은 주능선으로 둘러쳐진 북한산의 심장부에 우뚝 솟아 있는 독립봉이기 때문에 북한산 전체를 360도로 둘러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위문 0.5km / 12:52
12:56
12:56
노적봉 그리고 뒤로 의상능선 / 13:02
조망(眺望) / 13:03
조망(眺望) 백운대(白雲臺/836m) / 13:03
백운대 옆 릿지(ridge)등반 / 13:09
13:12
13:12
백운대 0.4km / 13:14
대동문 2.6km, 북한산대피소 1.3km, 북한산탐방지원센타 3.7km / 13:15
위문(衛門/725m) / 13:17
북한산성의 13개 성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문입니다. 이 문의 본래 이름은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으로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의 안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위문(衛門)이라 일컫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지어 그렇게 불리어 왔다고 합니다.
이 성의 축조 과정을 기록한 조선시대 스님 성능의 <북한지> 를 보면 이 문의 이름이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으로 명백히 기록돼있다. 이제는 이름을 바꾸어 달아야 합니다.
문루는 당초부터 없었으나 문짝을 달았던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출입문 주위는 여장을 비롯한 상단의 성돌이 무너져 내려 높이가 상당히 낮아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위문(725m)
백운대탐방지원센타 1.8km, 북한산대피소 1.4km, 북한산탐방지원센타 3.8km
보통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836m)를 오르기 위해서는 꼭 이 위문을 거쳐서 올라야 합니다.
백운대로 오르는 복원된 성벽 / 13:22
멀리 강북구 일대 / 13:29
백운대(白雲臺/836m) / 13:37
서울의 북부와 경기도 고양시 사이에 있는 북한산의 최고봉으로 화강암의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울 근교의 산 가운데 가장 높고 산세가 웅장합니다. 백운대에 오르면 서울 시내와 근교가 한눈에 들어오고, 도봉산·북악산·남산·관악산은 물론, 맑은 날에는 강화도·영종도 등 황해의 섬도 보입니다.
백운대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가 이 산에 올라 읊은 시귀 중의 백운(白雲)을 따서 백운대라고 붙였다고 합니다.
손으로 넝쿨 휘어잡으며 푸른 봉우리로 올라가니
백운 가운데 암자 하나 높이도 자리잡고 있네
눈에 보이는 곳 다 가져다 우리 땅 삼는다면
오월(吳越)의 강남땅 어찌 받아들이지 못하리
백운대 정상의 태극기
백운대암각(白雲臺岩刻)
북한산성의 최고지에 해당하는 백운대 정상 태극기 아래 바위에는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경기도 고양시에서는 1993년 4월 이 암각문을 향토유적 제32호로 지정하였는데, 비바람과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닳아 요즘엔 글씨마저 쉽게 읽을 수 없을 정도이다. 이 각자 기록은 독립운동가 정재용이 3·1운동과 관련된 사실을 후세에 길이 알리기 위해 새겨 놓은 것이다. 평평한 바위 바닥 네 귀퉁이에는 "敬天愛人"(하늘을 우러르고 사람을 사랑한다)이란 네 글씨를 새겼다. 그리고 가운데에 "독립선언문은 기미년 2월 10일 최남선이 짓고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정재용이 독립선언 만세를 이끌었다."는 내용의 한자 69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글씨는 광복 이전에 새겼으며, 2월 5일설과 2월 8일설로 논란이 있던 독립선언문 기초날짜가 이 글자를 통해 2월 10일로 명확해졌다. 2·8독립선언 이틀 뒤 3·1독립선언문을 기초한 것으로 밝혀져 3·1운동이 2·8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해졌다. <자료:서울시>
백운대 정상의 통일서원비
통일서원 (이은상 글, 김충현 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조국강산
겨레도 나라도 하나 이기에
피와 사랑으로 한 덩이 되어
우리 손으로 통일을 이루오리다.
1975. 8.15 한국산악회에서 세움
조망(眺望) 인수봉(仁壽峰/810m)
인수봉은 인자요산,인자수(仁者樂山,仁者壽)의 뜻을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이곳은 전문산악인들의 암벽등반 훈련장으로 인기가 많습니다.
인수봉 릿지등반
조망(眺望) 불암산(佛岩山)
조망(眺望) 수락산(水落山)
조망(眺望) 만경대(萬景臺)
백운대 동남쪽 만경대(萬景臺)는 무학대사가 한양을 도읍지로 정한 장소라고 전해지는데, 무학대사가 한양 도읍을 정하기 전 만경대에서 내려보았다 하여 국망봉(國望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만경대 정상에는 쪽두리같은 형태의 둘로 갈라진 바위가 있는데 이를 '족두리봉' 이란 애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온갖 경치가 펼쳐져 있는 곳이라하여 만경대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조망(眺望) 노적봉과 의상능선
백운대 0.2 km, 북한산장대피소 1.7km, 백운대탐방지원센타 1.6km / 14:12
백운산장(백운대피소) / 14:12
백운산장은 개인이 4대째 이어 운영하는 곳으로 국수, 라면, 막걸리, 손두부 등을 팔고 있으며, 많은 등산객들이 쉬어가는 곳입니다.
'백운산장(白雲山莊)' 현판
백운산장 현판의 글씨는 일제 강점기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생이 친히 쓴 것으로, 당시의 울분을 삭이기 위해 인수봉 암벽을 자주 오르내렸던 연유로 이 산장을 즐겨 찾던 손 옹이 지난 90년대 중반 직접 '백운산장(白雲山莊)' 현판을 써 제자들에게 전달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白雲의 魂' 추모비 / 14:14
백운산장 마당에는 6.25때 조국을 지키다가 장렬히 산화한 두 용사의 넋을 기리는 ‘백운의 혼’이란 추모비가 있습니다.
14:24
인수봉(仁壽峰) / 14:31
백제(百濟)의 시조(始祖)인 온조왕이 형(兄) 비류와 함께 올라 도읍(都邑)을 정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이곳은 산 전체의 형상(形象)이 마치 어린아이를 업은 듯하다 하여 부아산(負兒山) 또는 부아악(負兒岳)이라 불리운다. 특히 대포알을 바로 세워 놓은 듯한 약 200여m의 화강암(花崗岩) 봉우리는 전문 산악인들의 암벽 등반 훈련장으로 인기가 많다. <안내판에서..>
인수암 / 14:33
인수대피소 / 14:34
인수대피소
백운대탐방지원센타 0.9km / 14:49
하루재 / 14:44
백운대 1.4km, 백운대탐방지원센타 0.7km
하루재는 옛날 산 아래 마을에서 나무하러 갔다 오면 하루가 걸린다 하여 '하루재'라 불리었다 합니다.
백운대 1.8km, 하루재 0.4km, 백운대탐방지원센타 0.3km /15:05
백운대2공원지킴터 / 15:38
하산지점 / 15:44
소귀천계곡입구 / 15:45
15:46
우이계곡 / 15:48
우이계곡 / 15:51
▶ 참고자료 : 북한도(北漢圖)
-북한산성의 윤곽, 봉우리의 위치, 성문 및 장대 등 각종 시설물의 위치, 계곡 표시, 길 표시 등을 세 방향으로 표시한 3장의 지도이다.
2008.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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