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서울특별시

서울(서대문형무소)

케인스 2008. 3. 12. 18:07

 

                  서울(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울 서대문구 / 서대문형무소역사관(西大門形務所歷史館)  

 

 

                           서대문형무소역사관(西大門形務所歷史館)

 

이곳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는 대한제국 말기에 일제의 강압으로 악명 높은 감옥이 지어져 80여년 동안 우리 근현대사의 고난과 아픔을 간직해 온 역사의 현장이다.

 

일제는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기 위해 1907년부터 감옥을 짓기 시작하여 1908년 10월21일에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그 후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이에 항거하는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거세게 일어났고, 이에 당황한 일제는 수많은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체포, 투옥하기 위해 마포구 공덕동에 새로운 감옥을 지었으며, 이 때문에 1912년 9월에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고쳤다. 1923년 5월5일에 '서대문형무소'로 다시 바뀌어 1945년 8월15일에 광복을 맞기까지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체포 구금되어 모진 고문과 박해를 받으며 처형되거나 옥사 당했던 항일투쟁의 1번지였다.

 

그 뒤 몇 차례 이름이 바뀌어 1987년 11월15일에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가게 되자 1988년부터 공원조성공사를 시작하여 1992년 제47주년 광복절을 맞아 '서대문독립공원'으로개원하였다. 현재는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하여 옥사 7개동만을 원형대로 보존하였고, 그 중 옥사 3개동(제10,11,12옥사)과 사형장은 1988년 2월20일에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그 밖에도 제9,13옥사, 중앙사, 나병사, 보안과청사, 담장, 망루 등을 보존하였다.

 

1995년부터 서대문독립공원 사적지에 대한 성역화사업을 시작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일제의 침략과 잔혹한 만행에 맞서 싸우다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의연히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기 위한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새롭게 단장하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안내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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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관 건물 안내[현재]

 

①입구, 출구  ②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  ③중앙사  ④제12옥사  ⑤공작사  ⑥한센병사 

⑦추모비  ⑧사형장  ⑨시구문  ⑩유관순지하감옥  ⑪제9옥사  ⑫제10옥사  ⑬제11옥사 

~ 부속건물(화장실, 주차장, 매점, 공원관리사무소)

 

                                       '서대문형무소'의 원래 건물들[과거]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의해 지어질 당시 일본인의 설계로 당시 화폐 약5만원을 들여 처음 총 480평 규모의 감방과 80평의 부속시설로 수감인원이 500명 정도 였으나, 그 후 점차 확장하여 1934년에는 대지 약 30,000평, 12개동의 옥사로 3,000명 이상이 수감되었다. <안내판에서..>

 

                                              서대문형무소 옥사 배치도

 

시설구분 시설명 용도 층수 비고
수형시설 1~6옥사
9옥사
10~12옥사
13옥사
지하옥사
미결수 수용
수형자(남)수용
수형자(남)수용
공작사
수형자(여)수용
취조, 고문
2층
2층
2층
2층
1층
철거
보존
보존
보존
복원
관리시설 나병사
보안과청사
중앙사
환자 격리수용
고문 및 취조
수감자 감시
1층
지하1, 지상2
2층
보존
보존
보존
기타시설 사형장
담장, 망루
사형집행
경계시설
1층 보존
일부보존

 

 

(舊) '서울구치소'인 서대문형무소는 일본강점기때의 민족독립운동역사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 정치적 격변 등 우리나라 광복 40여년의 사회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한 일본 제국주의는 침략을 본격화 하기 위하여 융희원년(1907), 인왕산 기슭 이곳에 근대적 감옥을 건축하여 '경성감옥'이라 칭했고 1912년에는 '서대문 감옥'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일제때 이곳은 여느 감옥과는 달리 18세 미만의 소녀수가 모두 수감되어 있었으므로 3.1운동때 유관순열사도 갇혀 있다가 고문끝에 숨을 거두었고, 특히 1919년 3.1운동 때에는 33인의 민족대표를 위시하여 수많은 애국시민, 학생들이 투옥됨에 따라 수용시설을 초과해서 수감하기도 했다.

 

                                           

 

광복직후 1946년에는 서대문형무소가 경성형무소, 서울형무소로 바뀌었고 이 시기에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들이 대거 갇혀 있었다.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1967년 7월 서울구치소로 되었다. 4·19 , 5·16등 정치적 변동을 겪으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어있던 이곳은 도시발달로 인해 서울구치소 위치로는 부적합하여 1987년 11월15일에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갔다. 김구선생, 강우규, 유관순열사 등이 옥고를 치른 제 10, 11, 12사의 감옥건물과 사형장등을 사적 324호로 지정,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민족의 자존과 자주정신을 일깨워주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서대문구청홈>

 

                                           담장과 망루(望樓)

 

수감자들의 탈옥을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했던 담장과 망루의 일부를 원형대로 보존하였다. 담장은 1907년에 경성감옥으로 새로 지을 때 나무기둥에 함석을 붙여 사용하였으나, 1923년에 붉은 벽돌담을 설치하였다. 담장의 높이는 4.5m이며, 길이는 1,161m였으나 현재는 앞면에 79m, 뒷면에 208m만 보존되어 있다.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홈>

 

          

                                              밖에서 본 앞면의 담장과 망루

 

           

                                             밖에서 본 뒷면의 담장과 망루

 

 

                                                   밖에서 본 뒷면의 담장

 

                       

                                                         면의 망루

 

망루는 6개소 중 2개소만 원형대로 보존하였는데, 8면에 감시창이 설치되어 있고 높이는 10m이다. 정문의 망루는 1923년에 설치하였으며, 뒷쪽의 망루는 1930년에 설치한 것이다.

 

                       

                                                  안에서 본 정문쪽의 망루

 

                       

                                                  정문의 망루와 감시창

 

                      

                                                           뒷쪽의 망루

 

                      

                                                     뒷쪽 망루의 감시창

 

 

                    밖에서 본 동쪽의 문                                             안에서 본 동쪽의 문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展示館)

 

옛 보안과 청사인 이곳에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展示館)이라 이름하여 1층에는 ‘추모의 장’을 마련하여 영상실, 기획전시실, 자료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2층에서는 ‘역사의 장’이라 하여 민족저항실, 형무소역사실, 옥중생활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하1층에는 ‘체험의 장’을 마련하여 임시구금실과 고문실을 재현하여 놓았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展示館)

 

1층 [추모의 장]

 

영상실 :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다 투옥되었던 서대문형무소의 설립배경과 그 역사적 변천과정을 입체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획전시실 : 순국하신 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한 다양한 기획전과 서대문형무소와 관련된 자료를 전시한 공간입니다.

                                     

 

 

 

자료실 : 한국사 관련도서를 소장한 역사 전문 자료실이며, 독립운동사와 관련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2층 [역사의 장]

 

민족저항실 : 서대문형무소가 설립된 역사적 배경과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사를 시대적 사건별로 전시하고 있으며, 강우규(姜宇奎)의사가 남대문역(서울역의 옛이름)에서 폭탄을 투척한 의거장면을 매직비젼을 통해 재현하였습니다.

 

형무소역사실 : 서대문형무소의 변천 과정과 전국 형무소 현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고, 1934년 서대문형무소 배치 모형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옥중생활실 : 일제의 고문과 탄압에 관한 옥중생활의 실상을 전시하고 있으며,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벽관(壁棺), 독방(獨房)을 재현하였고, 사형장의 절개모형을 입체적으로 전시하였다.

 

                                 

 

지하1층 [체험의 장]

 

임시구금실(臨時拘禁室)과 고문실(拷問室) : 보안과 지하 감방으로 애국지사들을 신문(訊問)하고 고문하는 곳이었으며, 지금은 잔혹한 각종 고문 모습들을 문헌(文獻)과 고증을 통해 재현하였습니다.


                                                                           <자료 및 자료사진: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중앙사(中央舍)

 

선열들의 자주독립정신의 발자취를 직접 느껴보고 조국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 역사교육장입니다.

 

          

                                                       중앙사 동쪽 벽면

 

          

                                             서대문형무소체험실(중앙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투옥되어 갖은 악형을 당하고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선열들의 아픔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조국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과 선열들의 자주독립정신을 깨닫는 역사의 산 체험장입니다.

내용) 역사바로 알기 퀴즈/유관순열사 매직비젼/ 김구 여운형 옥중생활기/ 선열들의 육성증언/순국선열의 독립운동 모습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서대문형무소 취사장에서 사용하였던 밥짓는 무쇠솥과 국솥

 

일제강점시대에 감옥에서 격는 가장 큰 고통은 굶주림이었다. 급식의 혼합비율은 쌀 10%. 보리(또는 조) 50%, 콩 40%로 정해졌는데, 일제말기에는 전쟁때문에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콩 대신 콩깨묵을 지급하였고 그나마 대폭 줄이게 되자 많은 수감자가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다.  <안내판에서..>

                          

                       

                                                               무쇠솥

 

          

                         12옥사(第12獄舍)/왼쪽,  제11옥사(第11獄舍)/오른쪽

 

옥사(獄舍)

 

1987년에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갈 때 옥사는 15개동이었으나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하여 제 9·10·11·12·13옥사·중앙사·나병사(癩病舍)를 보존하였고, 그중 옥사 3개동(제10·11·12옥사)과 사형장은 1988년 2월 20일에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제10·11·12옥사 건물을 지은 연도는 알 수 없으나 1923년 이전에 지었고, 제13옥사·중앙사·보안과 청사·사형장은 1923년에, 제9옥사는 1929년에 지었다. 제13사(공작사)는 애국지사와 수감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일을 시켰던 곳으로 형무소·군부대·관공서에서 사용하는 관용물품을 만들었다.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12옥사 내부    

 

일제는 그들에게 항거하는 우리의 애국지사들이 늘어날 것을 예상하고, 1907년에 일본에서 전옥(지금의 교도소장)을 지낸 일본인의 설계로 탁지부 건축소에서 감옥을 신축하였다. 옥사는 목조건물로 ‘T자형’으로 지었으며 옥사 중앙에서 사방 전체를 감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곳은 낮에도 햇빛이 차단되어 매우 어둡고 침침했으며, 감방은 가운데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게 하였다.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왼쪽 제10옥사, 오른쪽 제11옥사        

 

     

                                                           독방(獨房)

 

이곳은 한평도 안되는 좁은 공간으로 일제가 애국지사들에게 육체적인 고문과 심리적, 정신적 고통을 주기 위해 설치한 독방이다. 일제는 항일독립운동을 탄압하고자 애국지사들을 악랄한 고문과 혹독한 수형생활로 억압하였다. 특히 애국지사들을 특수범죄자로 분류하여 전기와 변기도 없고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이러한 독방에 투옥시킨 후 고문과 폭행 등 갖은 악형을 일삼았다. <안내판에서..>

 

  

                                                              감방문        

 

                       

                                                      감방 1층과 2층 바닥

 

감옥의 수용실태

 

일제는 감옥을 한민족 탄압의 중요한 수단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감옥의 계속적인 증설에도 불구하고 수용할 수 있는 면적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1908년 전국에 8개의 감옥을 설치했을 때 제대로 감옥시설을 갖춘곳은 경성감옥 뿐이었고 그 외의 감옥은 불완전한 온돌 감방이 2~3개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1908년 말에 수감인원은 이미 2,000명을 넘고 있었으므로 평당 7.9명이 수용되고 있었으며, 감옥의 위생, 급식상태는 마치 짐승우리와도 같았다. 대부분의 감방은 햇빛과 통풍이 잘 되지 않아 어둡고 습기가 찾고, 용변시설을 갖추지 않아 방안에서 변통을 사용해야만 했다.

 

또한 옥사는 가득 찾으나 수감인원이 날로 증가하여 감방은 제대로 앉지도 못할만큼 비좁았다. 재감자는 누워서 잘 수가 없어 1/2씩 또는 1/3씩 교대로 자게하였으므로 전염병 등 질병이 유행하고 사망자가 속출하였다.  <안내판에서..>

 

                       

                                                             감방 2층                         

 

          

                                                     제10옥사(第10獄舍)

  

        

                                                제10옥사

 

          

                                               제11옥사(第11獄舍) /오른쪽

 

                       

                                                              제11옥사

 

          

                           13옥사(공작사)/第13獄舍(工作舍) - 오른쪽건물

 

이 건물은 1923년에 지은 옥사로 투옥자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일을 시켰던 작업장이다. 이 곳에서는 형무소, 군부대, 관공서 등에서 필요한 관용물품(官用物品)을 만들어 공급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뒤에는 군수용품울 생산하여 조달하는데 강제 동원한 곳이기도 하다. <안내판에서..> 

 

                       

 

지금은 순국선열들의 자주독립을 위한 의지와 아픔, 고통을 좀더 가까이 느껴볼 수 있도록 고문, 재판, 수감, 사형 등을 직, 간접 체험해 보는 체험장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고문실(拷問室)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조선인은 일본법규에 복종하든지 죽든지, 그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고 공갈협박하면서 잔혹한 고문과 구타를 했고 인간으로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온갖 형태의 잔혹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알제는 투옥된 애국지사들을 특별범죄자로 분류하여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지하 감방인 먹방에 수용하였고, 비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잔혹하게 탄압했다. 일제가 우리의 남녀 애국지사들을 끌어다가 몽둥이로 구타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거꾸로 매달아 코와 입에  고춧가루 물을 넣었으며, 손과 발을 묶고 불에 달군 인두로 온 몸을 지졌고, 전기고문과 표현할 수 없는 잔혹한 방법으로 성 고문을 하였다.  <안내판에서..>

  

  

                            재판체험                                                      사형체험

 

재판장(裁判場)

 

의병전쟁의 초기에 일제는 생포된 의병들을 현장에서 즉결처형 하는 등 온갖 학살을 일삼다가 국제적인 비난 여론과 한국민 들의 고조되는 반일감정을 고려하여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처벌하게 되었다. 1908~1910년에 수감자가 급증한 것은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는 의병전쟁의 고조와 이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안내판에서..>

 

    

                                                    중앙사 옆면의 포토존

 

왼쪽의 사진은 백범 김구선생의 사진이며, 가운데 태극기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1941년 3월 중국 충칭에서 도산 안창호의 부인(안혜련)에게 친필로 서명해서 보낸 태극기 사진이며, 오른쪽은 윤봉길의사의 사진입니다. 

 

           

                        왼쪽건물부터 제9옥사, 제10옥사 그리고 중앙사 앞은 건물터

  

          

                                               왼쪽부터 제9옥사, 제10옥사

 

                       

                                             왼쪽 제11옥사, 오른쪽 제10옥사

 

          

                                            왼쪽 제11옥사, 오른쪽 제10옥사

 

          

                                                              제9옥사

 

          

                                    앞에서부터 제9옥사, 제10옥사, 제11옥사

 

          

                                     앞에서부터 제9옥사, 제10옥사, 제11옥사

 

                       

                                                        11옥사 지붕

 

          

                                              나병사(癩病舍) / 한센병사

 

이 건물은 1923년에 지은 독립옥사로 투옥자 중 나병(癩病)환자나 다른 전염병자와 불치환자들을 격리하여 수용하던 곳이다. 면적은 총 23m2이며, 3개의 감방이 설치되었다.  <안내판에서..>

 

                      

                                                나병사(癩病舍) / 한센병사

 

           

                                                        추모비(追慕碑)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 침략에 항거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옥중 순국하신 애국선열들과 사형집행으로 순국하신 선열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만행에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으나, 광복 후 일제가 물러가면서 그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증거가 될 만한 수형 기록 자료들을 모두 태워버렸다. 현재는 발굴된 자료에 의해 고증된 순국선열만을 기록하였다. 앞으로 발굴작업을 계속하여 추가로 기재할 예정이다.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사형장(死刑場)  <자료사진>

 

이 건물은 일제가 1923년에 지은 목조 건물로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된 애국지사들의 사형이 집행된 장소이다. 일제의 침략과 만행에 항거하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조국 자주독립의 한을 품은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애국선열들의 넋이 서려 있는 이곳은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사형장의 둘레는 높이 5m의 붉은 돌담이 쌓여 있고, 면적은 50㎡이다.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사형장(死刑場) 외부 담

 

          

                                                 사형장(死刑場) 돌담 입구

 

                               

                                          사형장(死刑場)과 통곡의 미루나무

 

사형장 입구의 삼거리에 하늘 높이 외롭게 자라고 있는 한 그루의 미루나무는 처형장으로 들어가는 사형수들이 이 나무를 붙들고 잠시 통곡했다는 곳으로 유명하며, 사형장 안에 있는 또 한그루의 미루나무는 사형수들의 한이 서려 잘 자라지 않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미루나무

 

많은 애국선열 사형수들이 여기의 이 미루나무를 잡고 버텼으리라 여겨지는 나무의 한 부분에 그들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사형 집행 시설

 

내부에는 개폐식 마루판 위에 사형수가 앉는 의자가 있으며, 그때에 사용한 굵은 동아줄이 내려져 있으며, 앞쪽에는 사형을 집행할 때 배석자들이 사용한 긴 의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형장 담과 시구문(屍軀門 - 왼쪽 끝 부분)

  

          

                                                        시구문(屍軀門)

 

사형장의 바로 옆에는 사형을 집행한 뒤 시신을 형무소 밖의 공동묘지까지 몰래 버리기 위해 일제가 뚫어 놓은 비밀통로가 있다. 일제가 그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폐쇄했으나 1992년 독립공원을 조성할 때 입구에서 40m를 복원하였다.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시구문(屍軀門) 비밀통로 

 

                         지하감옥(옛 여성옥사)/地下監獄(舊女性獄寺)

 

이곳은 일제가 1916년에 항일투쟁을 하던 여성만을 수감하기 위하여 지었다. 지하에는 애국지사들을 격리수용하기 위한 독감방(獨監房)을 설치하여  신문(訊問)과 고문의 장소로 사용했다. 1934년 옥사를 고쳐지으면서 지하감옥을 매립하였으나 1992년 독립공원을 조성할 때 발굴 복원하였다.  <안내판에서..>                                    

 

                

                                   유관순지하감옥(柳寬順地下監獄)  <자료사진>

 

복원된 지하감옥의 면적은 190㎡이며, 사방 1m도 안되는 독감방 4개가 있다. 특히 이곳은 유관순열사가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신 곳으로 일명 유관순굴 이라고 한다.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자료사진>

 

유관순열사는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으로 이화학당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으로 가서 4월 1일에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 뒤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19년 8월 1일에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경성 복심법원에서 법정모독죄가 가중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유관순열사는 감옥 안에서도 매일 독립만세를 외쳤고, 그때마다 일제는 잔혹한 고문을 하였으나, 조국 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은 채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1일에 이신애 등 동료 수감자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시위를 벌였다. 그뒤 일제는 유관순열사를 지하독방으로 격리 수감하여 더욱더 잔혹한 고문을 하였고, 그 고문과 영양실조 때문에 1920년 10월12일에 장렬히 옥중 순국하였다.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유관순지하감옥과 정문 망루 및 담장

 

 

 

기타자료

 

 

          

                                           옥사(獄舍) 빈 터와 붉은 벽돌

 

이 길의 양쪽에 위치한 부분이 미보존 옥사의 빈 터이며,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붉은 벽돌은 일제가 수감 중에 있던 애국지사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구워낸 역사의 산물이다. <안내판에서..>

 

                       

 

           

                                                          옥사의 빈 터

 

          

 

                       

                                                            붉은 벽돌

 

벽돌 한 쪽에는 일제강점시대에 '경성감옥'에서 제작된 것임을 입증하는 '京' 자가 새겨져 있다.  <안내판에서..> 

 

                        

                                         지하감옥(地下監獄) 옆의 포토존

 

배경의 사진은 1907년 군대해산 이후 경기도 양평에서 활동하던 의병 부대원들의 사진입니다.

 

 

           

                          안산(鞍山)에서 내려다 본 서대문형무소와 독립공원 일대

 

 

 

2008.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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