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서울특별시

서울(독립공원)

케인스 2008. 3. 12. 18:02

 

                       서울(독립공원) 

 

 

서울 서대문구 / 독립공원(獨立公園)  

 

 

                                                    독립공원(獨立公園)

 

위 치 :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

면 적 : 109,193㎡ 

 

이곳은 과거 일제시대에 서대문형무소가 있던 자리이다. 해방 후에는 우리 정부가 교도소나 구치소로 사용하였다. 1987년 정부는 이곳에 있던 서울구치소를 경기도 의왕시로 옮기고, 과거 서대문형무소 자리를 사적으로 지정하여 그 자리에 독립공원을 조성하였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가 국권을 침탈했을 때 3.1독립만세운동, 독립군 무장투쟁, 의열 투쟁, 항일 노동운동, 항일 농민운동, 항일 문화운동, 한글 보급운동, 등 나라의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운동에 몸 바친 애국선열들이 일제로부터 모진 고문과 박해를 받있던 곳이며, 이들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던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곳이 애국 선열들의 피로 얼룩져있는 역사적인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조국광복 반세기에 이르는 동안 이를 제대로 기념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정부는 선열들의 애국 충정을 기리고, 후손들에게는 우리 민족의 수낭의 역사와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생생히 보여주고자 "독립공원"을 조성하기로 하였고 이에 서울시는 각계 전문가와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1988년부터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인 이곳에 공원을 조성, 1992년 8월15일 제47주년 광복절을 맞아 개원하였다.

 

독립공원은 전체 규모가 3만여평에 이르며, 사적 제32호 독립문, 제33호 영은문 주초와 아울러, 사적 제 324호로 지정된 제10~12옥사, 사형장, 그 밖에 역사성과 보존 가치가 있는 옥사, 보안과 청사, 담장, 망루 등을 보존하고 있다. 또한 유관순 열사 순국 장소와 3.1독립선언 기념탑을 복원하고, 전시관과 순국선열추념탑을 설치하여 애국선열들의 높은 뜻을 추모하도록 하였다.

 

독립공원은 이와같이 사적 공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시민 편의 시설도 아울러 갖추어 교양, 문화, 휴식 공간이 조화된 근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안내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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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공원종합안내도

 

①독립문      ②서재필선생동상      ③독립관      ④3.1독립선언기념탑      ⑤순국선열추념탑

 

                                             독립문(獨立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하는 사적 제32호인 독립문은 독립협회가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기 위하여 중국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기념 석조물이다. 이 문을 세우기 위해 주춧돌을 놓던 정초식(定礎式)은 1896년 11월 서대문 밖 영은문 터에서 5천명 내외의 관민과 학생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히 행해졌다. 이 문은 원래 현재의 위치에서 남동쪽으로 70m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979년 금화터널 공사 때문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화강석으로 쌓은 이 문은 높이가 14.28m, 너비가 11.48m로 중앙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가문이 있다. 내부 왼쪽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문의 뒷부분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이 문은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형으로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하였다. 공역은 한국인 기사 심의석(沈宜碩)이 담당하고 노역은 중국인 노무자들이 주로 담당하였다.  <안내판에서..>

 

 

                    프랑스 파리, 개선문 <자료사진>                                                독립문(獨立門)    

 

                                

                                                       독립문(獨立門)

 

고종32년(1895) 2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박사가 조직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우리나라가 중국.일본.러시아와 그밖의 서구열강과 같은 자주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선포하기 위해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하고, 1896년 7월부터 최초로 전 국민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한 성금으로 공사를 시작하였다. 독립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45㎝×30㎝규격의 화강암 1,850여개로 세워졌다.  <서울시 홈>     

 

                       

 

1896년 11월 21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하였으며 총 공사비는 그때 화폐로 3,265원이 들었다고 합니다.

 

                       

 

사 적 : 제 32호지정(1963. 1.21)

위 치 : 서대문구 현저동 945번지

 

                        

 

중앙에는 아치형의 홍예문 모양으로 되어 있고,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이화(李花)무늬가 방패모양을 한 문양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상단에는 '독립문'이 한글로 새겨져 있고 반대편에는 '獨立門'이란 한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글씨는 '매국노' 이완용이 쓴 것이라는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도리아식 기둥

                        

 

                                                           독립문이전비

 

독립문은 1898년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독립협회에서 세운 것으로 이 곳에서 동남측 70m 지점에 있던것을 성산대로 건설에 따라 이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이전 공사는 1979년 12월31일 완공하였으며 본래의 석재를 사용 옛모양 그대로 옮기고 독립문이 있던 옛 자리에는 독립문지 라고 새겨진 표지판을 매설 그 위치가 길이 보존 되도록 하였다.  1980년 1월1일 서울특별시장

 

 

                                                

                                                            <자료사진:80보도사진연감>

 

원래 독립문의 위치는 현재의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70m 떨어진 독립문 네거리 중간지점에 있었는데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1979년 12월 31일에 현재 위치로 옮겨 복원하고 옛자리에는 1979년 8월16일 '독립문지'라고 새긴 표지동판을 묻어놓았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독립문 우표  <자료사진>

 

              

                                                                 독립문(1897년) <자료사진>

 

앞에 보이는 건물은 조선시대 중국사신들을 영접하고 전송하던 영빈관의 하나인 모화관 건물입니다. 1894년(갑오경장) 이후 독립협회에서 주도하여 개수한 후 독립관으로 개칭하고 이곳에서 애국토론회를 개최하여 자주, 민권, 자강 사상을 고취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나 후에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습니다.

 

                                         

                                          옛 독립문(獨立門) 사진  <자료사진>

 

               

                                                독립문과 영은문주초(1910년)  <자료사진>

 

                               

                                            독립문과 영은문주초(1900년대 초)  <자료사진>

 

                                     

                       1928년 10월20일자 동아일보에 수록된 독립문 수선공사의 모습 

 

                       

                                      영은문주초(迎恩門柱礎)

 

조선왕조 태종7년(1407) 서대문밖에 모화루(慕華樓)를 세워 명(明)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으로 세종12년(1430)에 모화관(慕華館)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으나, 중종31년(1536)에 김안로(金安老)의 건의로 홍살문을 대신해 청기와를 입혀 연조문(延照門)이라고 하였다. 중종34년(1539)에 명나라 사신 설정총이 '영은문(迎恩門)'으로 고쳐 사용하였으며 그 뒤 360년 동안 사대주의의 상징물로 남아있다가 고종32년(1895) 2월 김홍집내각때 주춧돌 2기를 남기고 철거하였다.  <서울시 홈>

 

                       

                                               영은문주초(迎恩門柱礎)

 

주춧돌은 4각의 민흘림 장초석의 화강석으로 4변에 모서리를 깍아 8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영은문주초는 1934년에 원래의 위치에서 남쪽으로 옮겨져 독립문 앞에 세워졌으며,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 때문에 독립문과 함께 현재 위치로 다시 옮겼다.  <서울시 홈>

  

                       

                                                영은문주초(迎恩門柱礎)

 

지정번호  사 적 : 제33호지정(1963. 1.21)

소재지  서대문구 현저동 104번지 

 

                        

 

                       

                                    주춧돌 하단 부분에 조각된 안상(眼象) 문양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Villetard de Laguerie, (1898)에 수록된 옛 영은문 일대의 풍경이다. 아직 독립문은 들어서지 않았고 영은문 주초만 황량하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청일전쟁의 여파로 영은문이 철거된 것이 1895년 2월이고, 그 전면에 독립협회의 주도로 독립문의 설치가 계획되어 그 기공식이 열린 것이 이듬해인 1896년 11월 21일이었으므로, 이론적으로 보자면 위의 삽화는 그 기간 사이에 포착된 사진을 바탕으로 하여 그려진 것이 확실하다. <자료:이순우님>

 

                 

 

                 

                                                   일제강점기 때의 엽서

  

          

                                                          영은문(1895년)

 

 

                                                   영은문(1895년 이전)

                       

                        

                                                    송재 서재필선생 상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구 조: 좌대 : 화강석, 동상 : 청동

규 격: 가로1.5m×세로1.5m×높이6.3m

건립자: 송재 서재필선생 동상건립추진위원회

 

독립신문 창간 아흔 네돌 및 신문의날 서른 네돌을 맞이하여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 그리고 한국신문편집인협회와 한국기자협회, 대한언론인회 등 언론인들이 한결같은 뜻을 모아 언론인의 삼십년 숙원인 송재 서재필선생 동상을 1990년 4월7일 건립하였다. <서대문구청 홈>

                        

                                                                 

                                   송재 서재필선생(1866~1951)  <자료:두산백과>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서재필 선생은 개화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고종21년(1884)에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에 귀화했다. 선생은 1896년에 귀국하여 1896년 4월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이승만, 윤치호, 이상재 등의 협력을 얻어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였으며,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국민의 성금을 모아 한국독립의 상징으로서 독립문(獨立門)을 세웠으며 종래의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하여 독립관(獨立館)으로 고치고 독립협회의 집회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또한 토론회(討論會)를 통해 시민들을 모아 나라의 독립과 개혁에 대한 토론을 시키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조직하여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絶影島) 조차(組借) 요구를 반대하는 등 국민의 독립사상과 민권사상을 크게 신장시켰다.

 

보수파의 강요로 미국으로 되돌아가 병원을 차리고 있다가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한국 문제를 세계에 호소하는 한편,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을 모아 독립후원회를 만들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워싱턴에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를 설치하자 그 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의 경비에 바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 하였다. 1925년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을 폭로규탄하였다. 해방후, 1947년 귀국하여 미군정 최고정무관이 되었다가 미국으로 되돌아가 생애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으며 1994년 미국에서 선생의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하였다.  <안내판에서..>

 

                                  

 

                                             독립관(獨立館)

 

독립관은 조선시대 중국사신들의 영접연과 전송연을 베풀던 영빈관의 하나인 모화관 건물을 1894년(갑오경장) 이후 서재필이 발의하고 독립협회에서 주도하여 개수한 후 독립관으로 개칭하고 이곳에서 애국토론회를 개최하여 자주, 민권, 자강 사상을 고취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독립문과 함께 독립사상을 표현하였으나 일제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독립관은 지상1층 한싣 목조건물로서 정면6칸, 측면4칸 팔작지붕 구조였으며, 원래 위치는 동남쪽으로 약350m 지점이었다. 서대문독립공원조성사업계획에 의거 전문가의 고증 자문에 따라, 지상층은 당초대로 한식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위패봉안 및 전시실로 사용하고, 지하층은 행사 및 유물보관을 위해 1995년 12월28일부터 1996년 12월31일까지 서울특별시에서 건립하였다.  <안내판에서..> 

 

          

                                             독립관(獨立館)

 

조선왕조 황태자(순종)는 '독립관'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하였으며, 독립협회의 사무실 겸 집회소로 사용하다가 강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다. 독립관의 원래 위치는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3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으나, 현재의 위치(독립문공원내 현저동 101번지)에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위패 봉안과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서대문구청>

 

                                         

                                    독립문 너머 멀리 독립관의 모습 <자료사진> 

 

                       

                                             독립관(獨立館) 복원 때 쓴 현판

 

          

                                            독립관(獨立館)

 

서울 서대문구 의주로에 위치하는 독립관은 원래 조선왕조 태종7년(1407)에 중국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지어진 영빈관으로서 초기의 이름은 모화루(慕華樓)였으나, 세종11년(1429) 확장 개축되면서  모화관(慕華館)이라 개칭되었다.

 

세워질 당시의 위치는 현재의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350M 떨어진 영천동이었다. 이 건물은 정면6칸, 측면4칸의 팔작지붕 구조로 되어있는 조선시대 한식 목조건축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한말에 이르자 국제관계의 변화로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던 모화관을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세우면서 독립관이라 개칭하고, 애국토론회를 개최하여 자주, 민권, 자강사상을 고취시키는 독립운동의 기지로써 사용하였다. 그러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독립운동 탄압의 일환으로써 이 건물을 철거해 버렸다.

 

서울특별시는 1989년 독립공원 조성계획에 의해 서대문형무소를 의왕시로 이전하고, 일제거 수많은 애국선열들을 참형시켰던 서대문 형무소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상징성을 애국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역사박물관으로써 기능하게 하는 한편, 그 일부 자리애 지상1층(555M2), 지하1층(377M2)의 구조로 독립관을 복원하였다. 그리하여 지상1층에는 국권 회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신 순국선열의 위패 3,000여 위를 봉안하여 고혼을 위령하는 추모의 장으로써 이용토록했고, 지하1층은  순국선열 후손들이 모여 위훈을 기리고,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며 또한 이를 선양하기 위한 학술 및 기념행사장으로써 활용토록 하였다.  <안내판에서..>

 

           

                                                    독립관(獨立館) 뒷면

 

                                          3.1독립선언기념탑

 

1919년 3월1일 오후2시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함으로서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3.1독립선언기념탑은 이날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8월15일에 당시 재건국민운동본부 주관으로 온 국민의 성금을 모금하여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탑골공원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1979년에 탑골공원 정비사업으로 철거되어 12년간 방치되었다가 각계에서 복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1992년에 항일 독립운동의 터전인 이곳 서대문구 독립공원으로 옮겨 세우게 되었다.

  <안내판에서..>

 

                                          3.1독립선언기념탑

 

탑의 높이는 4.2m이며, 탑 뒤에는 3.1독립선언문과 손병희 등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판각되어 있습니다.

    

                       

                                          3.1독립선언기념탑

 

구 조 [좌대 : 화강석, 동상 : 청동]  

규 격 [가로1.8m×세로1.8m×높이4.2m]  

 

                       

 

                       

 

          

 

탑 뒤에는 3.1독립선언문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판각되어 있습니다.

 

                        

                                                   3.1독립선언문  <자료사진>

 

          

                                 순국선열추념탑(殉國先裂追念塔)

 

순국선열추념탑은 애국지사들과 항일투사들이 가장 많은 옥고를 치른 조국 수난의 현장이었던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우리산하와 해외 각처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 장렬히 순국하신 선열들의 얼을 되새기며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1992년 8월15일에 건립하였다.

 

추념탑의 중앙에는 전국 14개도 전역에서 나타난 우리 민족의 드높은 독립 의지와 기상을 상징하고 있는 태극기를 음양각한 조각상이 높이 22.3m로 축조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길이 40m로 독립투쟁의 역사적 활동상을 형상화한 모습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즉 좌측에는 항일의병무장상, 윤봉길.이봉창열시 상징상, 독립군의병 순국선열처형상, 유관순열사 만세운동상이, 우측에는 3.1독립만세상, 안중근의사 이토히로부미저격상, 순국선영의병 체포처형상, 청산리전투상이 새겨져 있다.

 

또한 바로 아래의 순국선열추념탑기(殉國先裂追念塔記)에는  일제의 침략부터 조국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우리 선열들의 자주독립 의지와 끊임없이 계속된 항일투쟁사가 기록되어 있다.  <안내판에서..>

 

                       

                                                       순국선열추념탑

 

순국선열추념탑기(殉國先裂追念塔記)는 국사편찬위원장 박영석 위원장이 찬한 것으로 우리 민족문화의 선진성과 민족자존을 지켜온 유구한 역사성이 일제의 침략 앞에서 어떻게 독립의지로 나타났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선열들의 투쟁과 이로 인해 이곳 형무소를 비롯한 우리 산하와 해외 각처에서 고난당하시고 순국하신 것을 추념하고 있다. 

 

일제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1895년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국내외 의병, 독립군, 광복군으로 이어진 무장투쟁과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정치, 외교, 군사, 의열항쟁, 민족계몽운동과 언론, 문예투쟁, 종교계 및 학생운동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전사, 옥사, 옥병하신 순국선열은 수십만이며 정부로부터 이미 서훈된 순국선열도 일천이백위가 넘는다.  <서울시 홈>

 

                       

 

구 조 [화강석]

규 격 [가로40m×세로8.7m×높이22.3m]

 

                       

 

 

 

참고자료

 

己未 獨立 宣言書(기미독립선언서)

 

宣 言 書( 선 언 서 )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半萬年(반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 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ㅣ 天 (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 ㅣ 며, 全人類(전인류) 共存同生權(공존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억제)치 못할지니라.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 (유사이래) 累千年(누천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 지 今(금)에 十年 (십 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 전)의 障碍(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ㅣ 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할 機緣(기연) 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ㅣ뇨.

 

(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 소잔)을 興奮伸張(흥분 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 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 (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 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 급무)가 民族的(민족 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 하고, 人類通性(인류 통성)과 時代良心(시대 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 (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 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수호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 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 (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 서,我(아) 世宗世業(세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 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 (탁락) 한 民族心理(민족 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자 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 무) 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辨(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 (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 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 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 (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 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 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 광정)하야, 自然(자연), 又(우) 合理(합리) 한 正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 한 兩國倂合(양국 병합)의 結果(결과)가, 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 과 統計數字上(통계 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 원)히 和同(화동)할 수 업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 심조)하는 今來實績(금래 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 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 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 지)할 것 안인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 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 (동양 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 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 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 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正當 (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 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 하는 不安(불안), 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 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 를 삼는 世界平和(세계 평화), 人類幸福(인류 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 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 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 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 일시)의 勢(세)ㅣ라 하면 和風暖陽(화풍 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 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 (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 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吾等(오등)이 玆(자)에 奮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 (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군象 (만휘 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부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 백세) 祖靈(조령)이 吾等 (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着手(착수)가 곳 成功(성 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

 

公約三章(공약삼장)

 

.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 (민족적) 要求(요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 히 發表(발표)하라.

 

.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 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朝鮮建國四千二百五十二年三月日朝鮮民族代表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이종일(李鍾一)·최린(崔麟) 이승훈(李承薰)·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오화영(吳華英)·최성모(崔聖模)·이필주(李弼柱) 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양전백(梁甸伯)·이명룡(李明龍)·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한용운(韓龍雲) 백용성(白龍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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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 독립 선언문(번역문)

 

우리 조선은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똑똑히 밝히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반 만 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 만 민중의 충성을 모아 이를 두루 펴 밝히며,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 박은 세계 개조의 큰 움직임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움이니, 이는 하늘의 분명한 명령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니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 있은 지 몇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 지 이제 십 년이 지났는지라, 우리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무릇 얼마이며, 겨레의 존엄과 영예가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력으로써 세계 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것이 무릇 얼마인가!

 

오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떨쳐 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으로의 위협을 없이 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체모가 도리어 짓눌려 시든 것을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올바르게 가꾸어 나가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괴롭고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 자자손손이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길이 누리도록 이끌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겨레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고,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와 인도의 무기로써 지켜 도와주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얻고자 하매 어떤 힘인들 꺾지 못하랴?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병자 수호 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저버렸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죄주려 하지 아니 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물려 온 터전을 식민지로 보고, 우리 문화 민족을 마치 미개한 사람들처럼 대우하여, 한갓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겨레의 마음가짐을 무시한다 하여, 일본의 의리 적음을 꾸짖으려 하지 아니하노라. 우리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을 갖지 못하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바쁜 우리는 묵은 옛일을 응징하고 가릴 겨를도 없노라.

 

오늘 우리의 할 일은 다만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로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한 때의 감정으로써 남을 시기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심에 희생된,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그릇된 상태를 고쳐서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바른 길, 큰 으뜸으로 돌아오게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의 요구로서 나온 것이 아닌 두 나라의 병합의 결과가 마침내 한때의 위압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지금까지의 실적을 보라! 용감하고 밝고 과감한 결단으로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잡고, 참된 이해와 한 뜻에 바탕한 우호적인 새 판국을 열어 나가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가까운 길임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울분과 원한이 쌓인 2천만 국민을 위력으로써 구속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동양의 안전과 위태를 좌우하는 굴대인 4억 중국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새암을 갈수록 짙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쓰러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 우리 조선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의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지지하는 자의 무거운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면하지 못하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리요?

 

아아! 새 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도다. 힘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도다. 지난 온 세기에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의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도다. 새 봄이 온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도다. 얼어붙은 얼음과 찬 눈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이 저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때를 맞고, 세계 변화의 물결을 탄 우리는 아무 머뭇거릴 것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온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온누리에 민족의 정화를 맺게할 것이로다.

 

우리가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천만세 조상들의 넋이 은밀히 우리를 지키며, 전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나니, 시작이 곧 성공이라, 다만 저 앞의 빛으로 힘차게 나아갈 따름이로다.

 

공약 3장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하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 나라를 세운 지 사천이백오십이년 되는 해 삼월 초하루

 

 

2008.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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