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서울특별시

서울(낙성대)

케인스 2008. 2. 24. 23:12

 

                              서울(낙성대) 

 

 

관악구(冠岳區) /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 - 낙성대 유지(落星垈 遺址)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하며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호인 이곳은 고려시대 명장으로 거란의 40만 대군을 무찔렀던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이곳에는 '강감찬 낙성대'라고 새겨진 3층 석탑이 있었다. 이 석탑을 1974년 낙성대의 안국사(安國祠)로 옮겨 보관하고, 이곳에는 2m높이의 낙성대 유허비(落星垈遺墟碑)를 만들어 놓았다.

 

낙성대란 별이 떨어진 자리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고려초 정종3년(948) 어느날 밤 중국사신이 지나가다가 이곳을 보니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져 어느 집으로 들어가지 않는가. 사신이 이를 하도 신기하게 여겨 '거 참 이상하다'고 속으로 중얼거린 후 "여봐라 저기 별이 떨어진 곳을 빨리 찾아보고 오너라"하고 명하였다. 그러자 부하 관원들이 말을 달려 별이 떨어진 곳을 찾아가니 마침 그집에서 부인이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다. 바로 이 아이가 강감찬 장군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사람들이 이곳을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뜻으로 낙성대(落星垈)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당시 이 마을 사람들은 강감찬 장군의 옛 집터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3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안내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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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헌공 강감찬(仁憲公 姜邯瓚) 장군 영정  <자료사진>

 

고려의 명장 강감찬(948∼1031) 장군은 정종3년에 금주(錦州) 즉 현재의 봉천동(218-14)에서 삼한벽상공신 궁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장군의 처음 이름은 은천이다. 학문을 좋아하며 983년(성종 2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고 저서로 "낙도 교거집"과 "구현집"이 있다.

 

고려 현종 원년(1010년)에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고려에서는 강조가 30만대군을 이끌고 나가 싸우다 패하여 많은 신하가 왕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으나 예부시랑으로 있던 강감찬 장군이 항복을 반대하여 위난을 면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018년 거란의 성종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다시 소배압을 시켜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케했으나 고려는 강감찬 장군을 상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대적케하니 장군은 홍화진의 물을 막아 적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퇴각하는 적에 귀주에서 대첩을 거두니 이 귀주 대첩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충무공의 한산대첩과 함께 청사에 길이 남는 승전으로 손꼽힌다.

 

이 공으로 장군은 "추충협모안구공신"의 호를 받았다. 장군은 그 이듬해에 벼슬을 그만 두었다가 1030년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검교태사시중천수군 개국후에 봉해졌다. 현종 조정에 배향되었고 수태사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으로 숭의전 사당에 배향되어 있으며, 1974년에 낙성대 성역화 작업을 마무리 하면서 장군의 일대기를 적은 "강감찬 장군 사적비"를 세워 장군의 애국충정과 호국의 얼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관악문화원>

                

          

                                 낙성대 유지(落星垈遺址)와 유허비(遺墟碑)

 

고려의 명장 인헌공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집터입니다. 태어난 날 하늘에서 큰별이 떨어졌다 하여 그 생가의 터를 '낙성대'라 했습니다. 그곳에는 고려시대의 3층석탑이 있어 낙성대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지만, 1973년 낙성대를 정화하면서 이 석탑을 안국사(安國祠) 경내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1974년에 따로 높이 2m의 유허비를 세워 사적지임을 표시하였습니다. 따라서 강감찬 장군의 탄생지를 성역화한 곳은 낙성대공원이지만 장군이 태어난 곳은 낙성대공원의 동북쪽에 위치하는 유허비가 있는 이곳입니다. 유허비(遺墟碑)란 선인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를 말합니다.

 

                      

                           강감찬장군낙성대유허비(姜邯瓚將軍落星垈遺墟碑)

  

원래 이곳에 세워졌던 유허비가 낙성대 경내에 있는 장군의 사적비와 달리 높이가 너무낮고 유허비 사각 기단과 비개석이 격에 맞지 않고 초라하다 하여 사각 기단을 거북상으로 하고, 비개석 대신 용두석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에 따라 1997년 10월 낙성대 경내에 있는 장군의 사적비와 동일한 형상과 비슷한 규모로 새로이 제작하였습니다. 새 유허비(遺墟碑)는 龜趺(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으나 비신(碑身)이 귀부와 이수에 비해 지나치게 짧아서 균형미가 부족한 듯 합니다. 

 

                  

                                        낙성대 유허비문(落星垈遺墟碑文)

 

이곳 봉천동은 고려 때 금주고을로서 민족의 영웅 강감찬 장군이 탄생하신 곳이다. 장군은 신라로부터 이곳에 옮겨와서 새 터전을 잡았던 오대조 여청의 후손이요 고려 태조의 건국공신 궁진의 아들로 태어났건만 그에게 이 같은 전설이 있다. 어느날 사신이 시흥고을을 지나다가 큰 별이 어느집에 떨어지기로 찾아갔더니 그 집 부인이 아들을 낳았으므로 이상히 여겨 거두어 기른 이가 바로 장군이요 그날 밤 별이 떨어진 데가 이곳이라 뒷사람이 여기를 일러 낙성대라 이름했으며 장군이 탄생한 터를 영세에 전하여 잊어버리지 않게 하려고 3층석탑을 세웠다. 뒷날 재상이 되었을적에 송나라 사신이 와서 그를 만나보고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내가 문곡성을 못본지 오래더니 그 별이 여기에 있구나 하고 경탄했었다고 한다. 그의 체구는 작고 초라했으며 문무를 겸전하여 나라의 튼튼한 초석이 되었고 거란군의 침입을 무찔러 나라의 위급함을 막고 겨레를 살려낸 위대한 영웅이었다. 그러나 장군께서 세상을 여의신지도 어느덧 900여 년이라 이 터에 잡초만이 우거져 여기가 장군의 유적지인것을 알지 못하므로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한 분부를 내려 유적지 곁에 새로이 광대한 터전을 잡고 석탑을 옮기며 사당과 온갖 시설을 갖추어 민족의 영웅이 끼친 거룩한 터를 깨끗이 함으로써 겨레의 영광된 도장을 삼는 한편 이로 낙성대 옛터에 유허비를 세워 본시 이 자리였음을 표하여 둔다.  서기1974년 6월10일


                                           노산 이 은 상 글,   일중 김 충 현 씀

 

                      

                                               향나무 유래

 

이곳 낙성대유지에는 강감찬장군과 더불어 자랐다고 전하여지는 향나무(일명 "강감찬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이 향나무는 1968년 2월26일 서울특별시 보호수(제1-23호)로 지정, 관리되어 오다가 1987년 고사(枯死)되어 서울특별시 고시 제801호(87.11.13)로 지정보호수에서 해제되었다.

관악구에서는 1996년 4월 낙성대유지 확장 조경공사를 하면서 고사된 향나무를 대체하는 나무를 심기로하고 같은해 11월 경기도 고양시에서 수령 150년된 나무를 구입, 이자리에 이식하였다.

이 향나무를 대체 식재한 이유는 고사된 향나무(일명 '강감찬나무')의 영속성을 이어받아 강감찬장군낙성대유허비와 함께 장군이 태어나신 성역임을 표시하여 이 분의 높은 우국충절을 널리 후손들에게 기리기 위함이다.           1997년 12월  일,     관악구청장

 

                                                      낙성대공원 안내도

 

1973년 11월 서울시에서는 이곳 일대 약 1만여평의 땅에 공원 조성작업을 착수하여 1974년에 준공하였습니다. 공원에는 자그마한 연못과 분수가 있으며, 동쪽에는 강감찬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祠堂)을 짓고 안국사(安國祠)라 이름지었습니다. 정면에는 외삼문인 안국문과 내삼문을 세웠으며 문안에 낙성대유허지의 삼층석탑을 옮겨와 안치하였습니다. 또 탑 맞은편에는 사적비를 세워놓았습니다.  

 

                                            낙성대(落星垈)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인 낙성대는 고려시대 명장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이 태어난 장소이다. 장군이 태어날 때 이곳에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낙성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장군은 거란의 침략을 막아낸 것을 비롯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고려 백성은 장군의 이러한 공적을 찬양하여 장군이 태어난 집터에 삼층석탑(三層石塔)을 세웠는데, 이 석탑은 서울특별시에서 1964년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였으며, 1974년 이곳에 사당을 건립하고 영정을 모시면서 봉천동 218번지에 있던 이 탑도 봉천동 228번지인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세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에는 강감찬 설화(姜邯贊說話)가 수록되어 있다. 즉 어느날 밤 중국의 사신이 길을 가다가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별이 떨어진 집을 찾아갔더니, 마침 그 의 부인이 아기를 낳았다. 그 아기가 곧 강감찬이며, 뒤에 송나라 사신이 와서 만나 보고는 문곡성(文曲星)의 화신(化身)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장군과 관련된 많은 설화들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오고 있다. 장군의 아버지가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본 부인에게로 돌아오던 길에 만난 여우여인과 관계를 맺게 되어 낳게 된 것이 장군이라느 것이다. 그의 출생담은 흔히 시조(始祖)나 위인 등에서 나타나는 출생 설화와 일치한다.

 

또한 장군이 소년 원님으로 부임하였을 때 그가 너무 어리다고 앝보는 관속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 넣어보라고 하였다. 그들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그는 "겨우 일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 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원님을 아전이 소매속에 집어 넣으려 하느냐!"라고 호통을 쳐서 기를 꺾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리고 어느 고을에서 여름날 개구리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관속에게 부적을 써주고 연못에 던지게 했더니, 그곳의 개구리가 다시는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여러지역에서 전승된다. 또 그가 한성판윤으로 부임했을 때, 남산(또는 삼각산)에 사는 수백 년된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하여 길을 지나는 사람을  수 없이 헤친다는 민원(民怨)을 듣고,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와 크게 꾸짖어 앞으로 새끼도 평생에 한번만 낳고, 몇몇 산에만 살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낙성대 안내판에서..>

 

                       

                                            강감찬 장군 기마동상 건립 경위

 

우리 고장 관악이 낳은 역사적 안물은 단연 인헌공 강감찬 장군이시다. 구국의 명장 강감찬장군의 나라사랑 정신을 널리 전파하고 선양하기 위하여 이 곳에 장군의 동상을 세우기로 초대 관악구의회에서 처음 제기되었으나 재원 마련이 어려워 민선 구청장 취임후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추진을 유보하여 왔다. 초대 민선구청장 취임후 처음 맞은 제8회 인헌제(1995년 10월)에서 강감찬 장군 동상 건립을 민간주도로 추진하기로 하고 관악문화원 내에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나, 정부의 기부금품모집규제법의 발효로 다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어 구의회와 협의한 후 서울특별시장에게 건의하여 사업비 전액을 지원받아 세계적인 규모의 기마동상을 이 곳에 건립하게 되었다. 호국정신의 상징인 이 동상이 60만 관악구민은 물론 우리 민족의 존경과 긍지로 후데에 길이 보존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이 동상은 조각가 김영중 선생이 제작하고 비명은 한글학자인 문학박사 한갑수 선생이 찬하였으며 글씨는 서예가인 문학박사 송하경 선생이 수고하셨다.   

                                       서기 1997년 10월18일    관악구청장

 

                                       인헌공 강감찬 장군 약전

 

인헌공, 강감찬(서기 1948년-1031) 장군은 우리 오천년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장군 중의 한 분이다. 장군은 고려 정종3년 봉천동에서 삼한박상공신 궁진(弓珍)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군은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까지 지냈으나 학자로서보다는 무인으로서 재량을 발휘하였고, 저서로는 '구선집(求善集)'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당시 고려는 친송배요(親宋排遼) 정책 때문에 요나라(거란)의 침입이 잦았는데 특히 현종원년(1010)에 거란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그 때 조정에서는 굴복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장군은 홀로 항전을 주장하면서 전략상 일시적인 후퇴와 설득을 통하여 적을 물러나게 하여 크게 국위를 떨쳤다. 다시 현종9년, 거란 10만 대군이 침입하자 장군은 상원수가 되어 흥화진(興化鎭)에서 정예기병 1만2천명을 산 기슭에 잠복시킨 뒤 적을 앞뒤로 공격하여 도망가는 적을 귀주에서 섬멸함으로써 살아간 자가 수천에 불과하였다. 이 싸움이 유명한 귀주대첩(龜州大捷)이다. 이 승리는 거란의 야먕을 꺽어버리고 동북아시아 3국의 평화적인 관계를 정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장군의 업적은 당시부터 추앙받아 왔으며, 민족의 영웅으로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기마상 설명판에서..>

                                                        

                                                   강감찬(姜邯瓚) 장군

 

인헌공 강감찬 장군은 경주로부터 금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여청(餘淸)의 5대손이며, 왕건을 도운 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된 궁진(弓珍)의 아들입니다. 공의 처음 이름은 은천(殷川)인데, 훗날 감찬으로 고쳤으며, 호는 울정이고 본관은 금천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자료사진>


귀주대첩이란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군대를 이끌고 우봉 영파역에 이르자 왕은 비단장막을 치고 풍악을 잡히며 개선장군을 환영하면서 72세 노장군의 백발에 금꽃 여덟가지를 꽂아주며 왼손으로 손목을 잡고 바른손으로는 축배를 권하였다 합니다. 이윽고 개선군이 개성으로 들어오자 국민이 환호성은 천지를 진동하였습니다.

 

문종 즉위년(1031) 8월20일 84세로 돌아가시니 인헌이라 시호하고, 현종묘정에 배향하였습니다. 공의 빛나는 업적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비롯하여 동국통감 등 역사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낙성대 초입의 강감찬 장군이 말타고 칼을 휘두르는 모습의 동상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 '落星垈'

 

박정희대통령께서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장군의 나라를 위한 슬기와 용맹을 이 나라 안보의 의표로 삼게 하시고자 장군이 출생하신 이곳 관악산 기슭에 새로 유적지를 조성토록 분부하고 '落星垈'라는 휘호를 하사 하시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그 뜻을 받들어 1974년 6월10일 이곳에 안국사, 안국문, 사적비 등을 건립하고 박대통령께서 하사하신 휘호를 이 자연석에 각자하여 오늘의 낙성대를 조성하였다. <설명문에서..>

 

 

              

                                                          안국사(安國祠) 전경  <자료사진>

 

정면에는 외삼문(外三門)인 안국문(安國門)을 세웠으며, 안국문을 지나면 내삼문(內三門)을 만나게 됩니다. 안국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낙성대유허지의 삼층석탑을 옮겨와 안치해 놓았으며, 그 맞은편에 강감찬 장군 사적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제일 안쪽으로 안국사(安國祠)를 마련하여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셨으며, 사괴석으로 담장을 쌓았습니다.

           

                                                         안국문(安國門)

 

                       

                                                       안에서 본 안국문

 

                       

                                            내삼문과 뒤로 안국사 지붕 모습

 

                       

                                          낙성대 삼층석탑(落星垈三層石塔) 
 
낙성대 공원 안국사 경내에 있는『강감찬 낙성대』라 새겨져 있는 사리탑식의 3층 석탑으로 1972년 5월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원래 이 탑은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봉천동 218번지 집터에 있었으나, 낙성대 공원 조성시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이 석탑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13세기경)로 추정하고 있으며, 자재는 화강암이고, 탑의 높이는 4.48m입니다. 

이 석탑은 1964년에 파손된 부분을 보수한 바 있습니다.   

 

                       

 

석탑은 일반형으로 넓직하고 두툼한 지대석 위에 기단을 받고 그 위에 탑신부를 형성하였다. 기단부는 단층으로서 각 면에 1매씩의 판석을 세워 도합 4매로 조립하였는데 각 면에 탱주는 없으나 양쪽 귀퉁이의 우주(隅柱)는 정연하게 마련되어 있다. 기단갑석은 두툼한데 하면에 낮은 부연(附椽)이 있고 상면에는 높직한 괴임대를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을 각기 1석으로 조성하여 중적(重積)하였는데 각층의 탑신석에는 양쪽 우주가 정연하다.

 

옥개석은 하면에 큼직한 받침을 2단씩 마련하였으며 상면에는 낮은 괴임을 1단씩 각출하였다. 낙수면은 다소 급경사이고 추녀에 약간의 반곡(反曲)이 있어 보이나 전체적으로 직선에 가까우며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에는 반전(反轉)이 현저하다. 상륜부는 노반석(露盤石)부터 전체가 결실되었다. 이 석탑의 초층 탑신 전면에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라는 명문(銘文)이 해서(楷書)로 각자되어 있어 탑명을 ‘강감찬탑’ 혹은 ‘강감찬 낙성대탑’이라 칭하고 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가 단층으로 구성된 점이나 특히 탑신부에서의 둔중한 느낌은 고려시대 석탑에서도 후기에 속하는 건립으로 추정케 하는 것이다.  <자료:서울600년사>

 

                       

                                               ‘姜邯贊 落星垈’라는 명문(銘文)

 

                       

 

임진왜란 때는 왜군들이 석탑의 대석을 비틀어 탑의 위층을 빼어 한 층을 낮추어 정기를 줄이고 탑 안에 있던 보물을 훔쳐 갔으며, 탑 주위에 있던 병풍바위와 선돌바위도 모두 부수고, 탑의 동쪽 구릉을 파내어 땅의 혈맥을 끊기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넓직하고 두툼한 지대석 위의 기단

 

                       

                               고려강감찬장군사적비(高麗姜邯瓚將軍事蹟碑)

 

강감찬장군낙성대유허비(姜邯瓚將軍落星垈遺墟碑)와 마찬가지로 비신(碑身)이 짧아 균형미가 없어 보입니다.

 

                       

 

        서기 1974년 6월10일, 노산 이 은 상 짓고, 일중 김 충 현 쓰고, 서울특별시장 세움

 

                      

                                                   고려강감찬장군사적비

 

한국 민족의 역사상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도 고려 일대를 통하여 가장 뛰어난 이는 실로 강감찬 장군이시다. 그는 일찍 고려 정종3년 서기 948년에 금주 지금 봉천동에서 건국공신 궁진의 아들로 태어나니 해는 바야흐로 중원대륙 동 몽고지대에서 사나운 유목민들인 거란이 일어나 고려와 맞선 어려운 시대이었다. 거란군이 성종12년 서기 993년에 처음 침구 해 왔을 때에는 재상 서희의 능란한 외교로써 물리쳤었고 그로부터 17년 뒤 현종1년 서기 1010년 겨울에 그들이 4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함으로 고려에서도 강조장군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패전하자 조정에서는 항복할 것을 의논했을 때 오직 예부시랑 강감찬이 왕을 피난케 하고 항전할 것을 역설하여 적을 물리치니 이때 그의 나이 64세였다. 그는 본시 문과출신으로 학문과 지략이 탁월한 위에 문무를 겸비한 이라 왕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오다가 현종 9년 서기 1018년 그의 나이 71세 되던 해 재상을 겸한 채 서경 유수가 되어 평안도로 내려가니 압록강 동쪽 의주, 선천, 용천, 철산, 곽산, 귀성 등 여러 고을의 성을 지키며 거란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거란 장수 소배압이 1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므로 강감찬이 상원수 강민첨이 부원수가 되어 안주로부터 의주까지에 20만 명을 풀어 진을 치고 또 기병 1만2천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을 시킨 다음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동쪽 냇물을 가로막았다가 적이 오자 물을 터서 적군을 패했더니 이듬해 정월 적들은 또다시 다른 길로 송경 가까이 쳐들어 왔다가 쫓겨가며 귀성고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때는 삼월 곳은 귀성의 동쪽 들판 그날 따라 풍우는 남쪽에서 몰아오고 깃발은 바람결에 북쪽을 향하는 지라. 장군은 기세를 타고 적군을 여지없이 무찌르니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는 사이 적들의 시체는 들을 덮었고 말과 낙타와 갑주와 온갖 병기들조차 수없이 노획하니 그야말로 고려 일대를 통해 가장 이름난 승첩이었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우봉 영파역에 이르자 왕은 비단장막을 치고 풍악을 잡히며 개선장군을 환영하면서 72세 노장군의 백발에 금꽃 여덟 가지를 꽂아주며 왼손으로 손목을 잡고 바른손으로는 술잔을 권했으며 함께 도성으로 들어오자 국민의 환호성은 천지를 진동했었고 왕은 그에게 영광스러운 공신 호를 내려 주었다. 73세에 조정에서 물러나 성밖 동쪽 마을에 조용히 여의니 84세요 인헌이라 시호(諡號)하고 현종 묘정에 배향했었다. 그로부터 구백년이 지나는 동안 역사는 흘러갔건만 민족의 영웅이 끼친 큰 공적이야 잊을 길이 없으므로 여기 장군의 유적지에 사적비를 세워 자손만대에 전하여 우리 민족의 영광과 긍지를 삼으려 한다.

 

                         1974년 6월 10일, 노산 이 은 상 짓고, 일중 김 충 현 쓰고

 

          

                                                      사적비와 삼층석탑

 

                                                         내삼문(內三門)

 

                                                        안국사(安國祠) 

 

안국사(安國祠)는 고려시대 목조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을 본따 세웠으며, 정면 5간, 측면 2간의 팔각 청기와 지붕이 올려져 있어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관악구청>

 

     

                                  안국사 현판                                                       안국문 현판

 

같은 분이 쓴 글씨 같습니다.  누구??

 

          

                                      강감찬 장군 영정을 모신 안국사 내부

 

사당 안의 정면에는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사방의 벽면에는 강감찬 장군의 활약상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강감찬 장군 영정 (부분도)

   

          

 

          

                                     장군의 활약상을 그린 사방 벽면의 그림

 

                       

                                                            내삼문 안쪽

 

          

 

안국사 사괴석 담 바깥 쪽으로 세워져 있는 집 한채는 마치 장군이 타고 다니는 말을 위한 축사인 듯 보이지만 설명이 없어 무슨 용도의 건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운데 칸의 큰 구유

   

          

                                               호수 건너편에서 본 안국문

 

 

 

참고자료

 

전통야외소극장

 

          

                                                        전통야외소극장

 

낙성대 공원 바로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전통야외소극장

 

전통혼례와 국악놀이마당이 펼쳐지는 전통야외소극장은 소규모 공연과 동아리 모임 등을 통하여 서로 마음의 정을 나누고 새 문화를 창조하는 문화공간으로서 조상의 얼과 예와 멋을 느끼고 배우는 곳이기도 합니다.   

 

 

2008.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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