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서울특별시

서울(오간수문)

케인스 2008. 2. 7. 22:21

 

                      서울(오간수문) 

 

 

서울 중구 / 오간수문(五間水門)

 

 

                                                     오간수문(五間水門)

 

오간수문은 한양 성곽을 따라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과 광희문(光熙門) 사이를 연결하는 성(城)이 청계천(淸溪川)을 지나는 위치에 세워졌으며, 개천(開川 = 청계천) 물이 도성(都城) 밖으로 나가는 수문(水門)으로서 아치형 홍예문(紅霓門) 다섯칸으로 이루어져 있다하여 '오간수문(五間水門)' 이라 하였습니다. 오간수문 위로는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성벽을 따라 조그만 길을 만들어 수문을 관리하고 경비하는 군졸들의 순라길로 이용하였습니다.

 

이 오간수문은 개천의 물길이 잘 빠져가기 위해 가설한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 달아나든가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예로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1900년대 초의 오간수문 사진으로 현재는 흥인지문(동대문) 옆의 오간수다리(오간수교) 밑에 타일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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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간수문지(五間水門址)에 만들어놓은 오간수문 조형물

오간수문은 1907년 중추원(中樞院)에서 하천수의 원활한 소통과 토사가 쉽게 흘러 가도록 하기 위해 수문을 뜯어버린 후, 1908년(융희 2) 3월에 훼손되어 방치된 성벽을 처리하고, 교통을 원할히 한다는 명목하에 동대문 북측 성벽과 함께 동대문 남쪽 오간수문의 성벽을 헐어버리고, 다리를 설치하여 오간수교(五間水橋)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오간수교는 1921년 6월 동대문에서 광희문간 전차노선이 신설되면서 다리 옆으로 전차선로가 놓이게 되었고, 또 1926년 6월 순종의 장례행렬이 장지인 유릉(裕陵: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갈 때 오간수교를 건너게 됨으로써 인부 2,500명을 동원하고, 침목(枕木) 800개, 궤도(軌道) 180개를 지원 받아 약4.5m이던 다리를 약 8.2m로 확장하였습니다. 그 후 청계천 복개공사와 함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간수문(五間水門) <자료사진>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자료사진>

 

수문상친림관역도 (水門上親臨觀役圖)는 1760년(경진년) 4월9일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영조대왕이 친림(親臨)하여 오간수문을 직접 시찰하고 공사에 참여한 관원과 백성들을 치하했습니다. 그 당시를 묘사한 그림이 ‘준첩도(濬帖圖)’에 나와 있는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입니다.

 

창덕궁에 앉아 보고만 받은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에 나가 공사를 독려하였을 정도로 준설공사는 왕에게도 커다란 관심사항이었습니다. 막차(幕次) 중앙에는 임금의 어좌(御座)가 그려져 있으나 임금의 모습은 없습니다. (옛날에는 임금이 존귀의 대상이므로 그림에 그려 넣지 않았습니다)

 

굳게 닫힌 오간수문의 철문 5개가 보입니다. 영조 경진년 준천(濬川) 전에는 이 수문이 토사로 매몰되어 문을 열지 못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자유롭게 흐르던 물에 수문을 설치하고 그 수문에 경비 목적으로 쇠창살을 박아놓으니 부유물이 끼고 토사가 쌓여 조금만 비가와도 청계천이 범람하여 도성(都城)은 물에 잠기고 홍수 피해가 컸습니다. 세종 이후 준설은 하지 않은 채 300여년을 방치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요.

 

수문옆 교각 밑에 거북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개천바닥에는  일꾼들이 소를 부려 흙을 퍼내고 있고 조를 짜서 가래질을 합니다. 개천 둔덕 좌우에는 물에 강한 수종(樹種)인 버들이 심어져 있고 언덕위에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으며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 좌상단(左上端)에는 흥인문 (興仁門:동대문) 의 지붕이 일부가 보입니다.

 

영조임금은 부실공사를 방지하고 후대의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공사를 위하여 공사에 실명제를 도입하고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도록 어명을 내렸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준천사실’과 ‘준첩도’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준첩도’와 ‘준천사실’은 ‘조선왕조실록’ ‘지봉유설’ ‘열하일기’ ‘성호사설’ 등과 함께 조선시대 명저로 손꼽힙니다.

 

                   다리 아래 타일로 재현한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청계천 6가 오간수교 부근에 ‘준첩도(濬帖圖)’의 한 부분이 도자 타일로 재현되어있습니다. 부산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어전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에 있는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를 현대적인 기법으로 재현한 도자 그림입니다.

 

영조 때 장마가 시작되기 전인 봄철에 개천 바닥을 파냈다고 하는데 토사와 쓰레기가 쌓여 비가 많이 오면 그대로 물난리가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종 때 제대로 강우량을 측정해서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지만, 후대에 걸쳐 관리 부실로 또다시 개천이 범람하자 영조가 재착공을 명했던 것입니다.

 

영조임금은 흥인문(동대문) 남쪽에 있는 오간수문 지역 준천 현장에 나서서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신하들이 궁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을 거절하고 준설공사를 지켜봤다고 전합니다.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의 모형도 <사진자료:청계천전시관>

  

영조36년(1760) 영조대왕은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공사를 펼칩니다.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준비기간만 8년이 걸렸습니다.  준설을 목적으로 한 임시관청인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총책임자에 호조판서 홍봉한을 임명했습니다. 홍봉한은 혜경궁홍씨의 아버지이며 사도세자(장조)의 장인입니다. 이처럼 막중한 자리에 세자의 장인을 앉힌 것은 영조대왕이 청계천 준설을 얼마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영조 때의 준설공사에는 군인과 일반 백성 등 총 21만5382명이 동원돼 57일간(영조36년 2월 18일부터 4월 15일까지)의 대역사 끝에 완공된 조선 최대 토목공사였습니다. 장비라곤 삽과 소달구지 밖에 없던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을 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팔도에서 징발하듯이 인력을 동원하였고 예산도 막대하였습니다. 궁에서 내려 보낸 35,000냥의 현금과 2,300석의 쌀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오간수문지 1호 홍예기초석 <자료:문화재청>

 

2003년 발굴조사 때 오간수문의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무지개 모양의 구조물) 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됨에 따라 그 터를 사적 제461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아래쪽 역삼각형 돌 위에 돌거북이 놓여있는 것이 위의 그림에 나타나있습니다.

 

오간수문이 위치한 지역의 구조물 조사결과 북쪽트렌치 서쪽에서는 직경 30cm 내외의 목주가 120cm 정도의 간격으로 8매가 확인되었으며, 그 동편에서 수문과 관련된 석재가 산재되어 노출되었습니다. 남쪽 트렌치에서도 북편에서와 마찬가지로 목주와 석재가 노출되어 오간수문의 방향과 그 후의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있었습니다.

 

          

                                    1920년대의 오간수교(五間水橋 /  표시)

  

      

                                         현재의 오간수교  <자료사진:오마이뉴스>

 

수문(水門)은 없고 성벽 모형의 난간석만 있습니다.

 

        

                             현재의 오간수교 성벽 모형의 난간석 <자료사진:오마이뉴스>

 

           

                                                       오간수교 위치도

    

                      

                                                         가산터 표지석

 

오간수교 옆에는 조선시대 때 청계천의 하상을 준설하고 여기에서 나온 흙들을 쌓아 인공적으로 만든 산인 가산(假山)이 있었습니다. 

 

영조36년(1760) 2월 8일부터 4월 15일까지 57일간 벌어진 공사 현장에서 퍼 올린 토사가 산을 이루었다 합니다. 그 때 만들어진 산이 가산(假山)이라는 이름으로 조선말엽까지 청계천주변 여러군데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 쓰레기 매립장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둔덕과 같은 인공 산입니다.

    

          

                                                   영조대왕 어필(御筆)   

 

오간수교(五間水橋) 아래에는 1760년 영조가 청계천(개천) 준설에 힘쓴 신하들에게 내린 어필(御筆)을 새겨 놓았습니다.

 

                          준천공흘 경등갈성 (濬川功訖 卿等竭誠)

                          여문광무 유지경성 (予聞光武 有志竟成)

  

준천 (濬川)의 공역을 마침은 경 등이 정성을 다함이었다. 내 듣건대 광무제(光武帝:후한,後漢을 세운 황제)도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고 하였도다.  

 

          

            청계천 오간수교 아래 북벽에 대리석 각자로 설치된 <준천가(濬川歌)>

 

준천가(濬川歌)의 濬은 팔 준, 川은 내 천, 歌는 노래 가로 모래와 흙으로 매꾸어진 청계천을 파서 치워내는 과정과 모습을 역사의 고사와 곁들여 지은 번암 蔡濟恭의 문집《樊巖先生集ㆍ詩ㆍ伊州錄ㆍ濬川歌》에 기록된 내용으로 조선조 영조임금 년간에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느낀 감회를 적은 시문입니다. 청계천이 복원 되면서 이 <준천가>를 오간수교 즉, 청계6가의 다리 아래 북벽에 검정 대리석 위에 각자하여 설치하여 놓았습니다.

 

          

                                                       준천가(濬川歌)

 

그 원문과 해석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天有銀河水,                    하늘에 은하수 있어

文采昭回九萬里。            아름다운 문채가 구만리를 돌며  비추고

地有淸渭水,                    땅에 맑은 위수가 있어

貫穿長安流不已。            장안을 가로질러 쉼없이 흐르네

 

漢陽包絡大山川,              한양은 품에 큰산 큰내를 안았고

左祖右社萬年址。            좌로 종묘 우로 사직 만년의 터전

衆水發源西北隅,              여러 물줄기 서북쪽으로  발원하여

一道鋪練王城裏。            왕성 안에 한가닥 비단길 펼쳤네

 

五間鐵鎖束其東,              다섯간 쇠고리로 동쪽을 단속하고

開閉惟視衰盛水。            물 높낮이 보아 열고 닫았네

國初陶勻大費力,              개국초에 나라의 틀 잡힘에 크게 힘 기울여 

虹橋十二晴空起。            무지개다리 열두개를 하늘에 솟구치듯 세웠네

邇來定鼎四百載,              나라세워 사백년 내려 오는 동안 

崩沙塌下無時止。            모래더미 흙더미가 끊임없이 무너져 내렸네

一經潦過增一閼,              큰물 한번 쓸고 가면 한층 더 막히고

厥坎往往平地似。            개천이 때로는 평지처럼 되었네

 

有時莊嶽六七月,              육칠월 도성에 장마라도 들면

地上水高深沒膝。            땅 위의 물이 무릎까지 차올랐네 

廟議紛紛苦不齊,              조정 대신들 의론이 분분할 제

聖斷揮霍無遺失。            성군의 결단은 명쾌하고 빠트림이 없었네

 

府庫金帛散不計,              국고 재정 아낌없이 쏟아 붓고

萬夫勇趨如箭疾。            장정들 쏜살처럼 떨쳐 나섰네

畚鍤騰騰直到底,              삼태기와 삽으로 곧장 바닥까지 파내려

標刻重出舊年月。            새긴 눈금 옛 모습 다시 드러났네

 

移沙作阜高萬丈,              파올린 모래는 만길 높이로 언덕을 이루고

大車小舟相磨戛。            큰 수레 작은 배들이 연이어 오가네

鸞輿臨視不知疲,              임금님 납시어 살피심에 피로를 모르시고

水順舊軌何秩秩?             물은 옛길따라 참으로 편하게만 흐르네

 

兩岸十里如弦直,              양쪽언덕 십리 길 시위처럼 곧바르고

三營築石無虧缺。            삼영의 석축 공사 이지러지고 빠진 곳 없네

澄波演漾蔭楊柳,              맑은 물결 찰랑찰랑 수양버들 그늘지고

灝氣虛明照城闕。            물기운 훤히 트여 성궐이 비치네

 

豈徒邦人免墊溺?             백성들 물난리로 고생하는 일 없게 되고

惟應地氣善疏洩。            땅 기운도 막힘없이 소통이 잘 되네

夏禹鑿之我后濬,              하나라 우임금 물길 뚫으시고 우리임금 물줄기 준설하시니

事有大小功則一。            하신 일은 크고 작아도 이루신 공은 한결같네

 

聖世爲政可反三,             성군의 세상 다스림 모범 삼을만 하나니

隨處疏通兼導達。           곳곳을 소통하고 다다르게 하셨다네

美哉洋洋若不斷,             찬란하도다! 넓고넓어 그 흐름 끊기지만 않는다면

磐泰宗祊寧且謐。           반석 위의 종묘사직 영원토록 평안하리라

 

        [옮긴이 이 병 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참고자료

 

 

 오간수문에서 나온 상평통보 600닢

 

  

                          2004년 청계천 발굴 때 오간수문에서 나온 상평통보 600닢.

 

중앙문화재연구원도 지난 2004년 3월, 청계천 오간수문(五間水門·청계천 물길이 도성 밖으로 빠질 수 있도록 서울성곽 아래에 다섯 개의 물길을 낸 수문)에서 19세기 초에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600닢(개)이 넘는 상평통보 꾸러미를 발굴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발굴을 맡았던 중앙문화재연구원은 “상평통보는 수문을 통해 몰래 도성을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쇠창살 아래 흙더미에서 한 꾸러미에 묶인 것처럼 나왔다”며 “출토 상태를 볼 때 물에 쓸려온 것 같지는 않고 누군가 오간수문의 ‘개구멍’으로 도성을 드나들다가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됐다”고 했습니다.

 

박기주 교수는 19세기 초, 상평통보 600닢으로 80kg 쌀 한 가마니나 닭 20마리, 혹은 청어 200마리를 각각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왕릉을 지키는 종9품 능참봉이 월급으로 쌀 10말과 황두 5말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상평통보 600닢은 능참봉 월급의 절반을 훨씬 넘는 액수였던 셈입니다.  

 

겸재의 동문조도(東門祖道)

 

                                           

                                        겸재의 동문조도(東門祖道) <자료사진>
 
영조22년 (1746) 경에 그린 겸재의 동문조도(東門祖道)에는 오간수문의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그림 맨아래 가까이에 동대문과 한양성곽이 있으며, 동대문 오른쪽 옆 아치가 다섯개 보이는 것[방향]이 오간수문 (五間水門)입니다. 동대문 왼쪽 위가 현재 이대병원 있는 자리인데 소나무 숲이 낙산이고 낙산 소나무숲 바로 위 검은 바위가 창신동 동망봉 입니다. 동망봉 조금 위로 올라가 소나무숲 보이는 곳이 안암산입니다. 그림 중앙에 있는 기와집은 동묘(東關羽廟)이며, 동묘에서 2시 방향으로 보이는 곳이 차현(車峴)이며, 멀리 우뚝 솟은 산은 용마산이요, 오른쪽으로 아른아른 하게 보이는 것은 남한산 입니다. <자료:학여울님>

 

 

2008.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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