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서울특별시

서울(살곶이다리)

케인스 2008. 2. 7. 22:16

 

                      서울(살곶이다리) 

 

 

서울 성동구 / 살곶이다리

 

 

                                                           살곶이다리

 

살곶이다리는 서울의 중랑천(中浪川=漢川)과 청계천(淸溪川)이 만나는 하류 지점에 놓여 있으니, 성동구(城東區)의 행당동(杏堂洞)에 위치하며 1967년 12월15일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다리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긴 다리로 한자명으로 전관교(箭串橋)라 부르지만 원래 성종 때 다리 길이가 300여보가 되며 옥우(屋宇)와 같이 평평하여  '행인이 마치 평지를 밟는것과 같다' 또는 '반석처럼 튼튼하다' 하여 제반교(濟盤橋)로도 불리었던 다리입니다.  

 

세종2년(1420년)에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다리 기초만 다지고  장마를 대비해 중지하였다가 이로부터 55년 후인 성종6년(1475)에 한양과 지방을 오가는 많은 백성들의 필요에 따라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14년(1483)에 완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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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곶이다리[전곶교/箭串橋(전관교)] 명칭의 유래

 

'살곶이'란 다리명칭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이 여러 의견들이 있으나, 어떤 얘기가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1) 조선시대 살곶이다리가 있던 뚝섬일대는 군사훈련의 일종인 활쏘기 장소로 사용되어 화살곶이 들[전관평(箭串坪)]이라 불리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초부터 나라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했다. 

 

2) '살곶이’라는 이름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 이곳에서 매 사냥을 하는 중 새를 향해 활을 쏘자 살을 맞은 새가 중랑천 도요연에 떨어졌는데, 이 후로 새가 떨어진 곳을 ‘살곶이’ 그리고 주변 벌판(뚝섬일대)을 ‘살곶이벌[전관평(箭串坪)]’이라 부르게 되었고, 다리 이름도 거기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뚝섬일대는 옛부터 살곶이벌 이외에 관중, 관교, 동교 등으로 불리어져 왔습니다.     

 

3) 조선 태조7년(1398) 왕자의 난을 일으켜 계비의 두 아들과 정도전을 제거하고 새 왕이 된 태종에 대해 노여워한 태조는 함경도에 있는 별궁에 칩거하다 결국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에 전관평(箭串坪)에 나와 장막을 설치하고 환영 준비를 하였습니다. 태종이 태조를 뵈려할 때 태조는 노기 띤 얼굴로 태종에게 활을 쏘았는데 태종은 나무 기둥에 몸을 숨겨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이후 이 사건이 일어난 전관평(箭串坪)을 가리켜 '화살이 꽂힌 자리'라는「살곶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4) 한강물과 중랑천이 어우러지는 아우라지[합수(合水)]에 살곶이다리가 있다. 이 다리의 이름은 '물살이 세다'하여 물살의 '살'과 아우라지가의 흙이 쌓인 턱이 뾰족이 나왔으므로, 그 흙의 턱을 '곶(串)'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까 '살곶이'는 '물살이 센 곳의 뾰족한 땅'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전관평(箭串坪)이라 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살곶이다리의 상판석 및 귀틀석 원형

 

이 석재는 조선시대 가장 진 돌다리인 살곶이다리의 상판석 및 귀틀석 원형으로서 2002년 5월 파손된 부분을 교체하고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이곳에 전시하였습니다. 상판석과 귀틀석의 모양은 종량과 횡량으로 걸 수 있도록 다듬어져 있으며 각 부의 석재가 장대하고 질박하여 600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까지 호쾌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안내판에서..>

 

                                         한양(漢陽)에 오가는 중요한 관문

 

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에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도성인 한양(漢陽)으로 들어오는 아주 중요한 관문이었으며, 또한 동대문과 광희문(일명 수구문)을 나와 이 다리를 건너면 광나루로 빠져 강원도로, 송파로 건너가 충주로 나가는 통로였습니다. 주변의 기름진 벌판인 뚝섬[둑섬/둑도(纛島)]은 조선 초기부터 나라의 말을 기르는 목장과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이 있어 임금이 때때로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넜다고 합니다.

 

또한 태종과 순조의 능인 헌릉(獻陵), 인릉(仁陵)으로 가는 길이고, 성종과 중종이 모셔진 선릉(宣陵), 정릉(靖陵)에 이르게 되어 국왕이 수시로 참배(參拜)하는 길이며, 또 봉은사로도 통하게 되어있어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통로로 사용되던 다리입니다. 그리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순종황제(純宗皇帝)의 국장(國葬) 행렬이 금곡 유릉(裕陵)으로 향할 때에 이 다리를 건너기도 하였습니다.

 

          

                                                    다리의 보수 및 복원

 

1913년 일본인들은 다리 윗면을 콘크리트로 보수 하였으며, 1926년 을축년 대홍수때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간 채 방치되었습니다. 그 후 1938년 5월에 이 다리 옆에 성동교가 가설되자 이 다리는 방치된 채 최근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1972년에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하천의 폭이 원래보다 넓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리 동쪽에 27m 정도의 콘크리트 교량을 잇대어 증설함으로써 원래의 모양과는 다소 차이가 나게 되었습니다.

 

                                                          다리의 규모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다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다리입니다. 대청마루를 깔듯 세 줄의 판석을 빈틈없이 깔았으며, 실측한 결과 폭이 6m, 길이는 76m의 다리였습니다.

 

 

 

          

                                                           상판의 석재  

 

조선조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하면서 살곶이다리의 일부를 가져다가 석재로 썼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다리의 구성

 

살곶이다리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장석판교(長石板橋) 중 가장 큰 규모의 다리로서, 가로로 놓인 기둥이 4열, 세로로 16열에 모두 64개의 돌기둥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다리 높이는 강 표면으로부터 3m 내외이며, 기둥의 높이는 1.2m 가량입니다. 좌우의 다리 끝은 장대석(長臺石)으로 쌓고 네모난 돌기둥 교각 16개소를 세웠습니다.

            

  

                                                            다리 상판

 

좌우의 다리 끝에 돌난간은 없습니다.

 

          

                                                            하부 교각

 

모두 64개의 돌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다리 하부의 교각은 높이 약1.2m의 기둥을 네 줄로 세운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마루처럼 판석을 세 줄로 덮어 깔았습니다.

 

          

                                                    살곶이다리의 이야기

 

50여년 전만 해도 날이 어두어지면 이 다리 밑에서 노상강도가 나타났으므로 행인들이 무서워 밤을 지낸 후에야 건너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다리의 주초(柱礎)

 

기둥돌 아래는 네모난 주초(柱礎)가 있고 그것은 물밑 받침돌에 의하여 지탱되도록 하였습니다. 다리 형태가 가로, 세로로 곡면을 이루어 잘 조화되어 있고 면밀하게 구축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각의 구조

 

교각의 간격은 대략 3~4m 정도이며, 돌기둥 위를 3장의 장대석을 건너지른 다음 그 위에 다시 귀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한 구조입니다. 각 부의 석재가 장대하고 수수하여 호쾌한 느낌을 줍니다. 다리 아래에서 보면 돌기둥과 장대석, 귀틀돌들이 마치 씨름꾼의 몸과같이 힘이 넘치는 느낌을 줍니다. 

 

          

                                                        교각의 특이점

 

다리의 안정을 위해 교각 중에서 가운데 두 줄의 교각을 바깥보다 15∼40cm 가량 낮게 하여 다리의 중량을 안쪽으로 모이게 하였습니다. 또한 돌기둥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만들어졌으며, 돌 기둥에 무수한 흠집을 새겨놓아 물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였습니다.  

 

          

                                                      다리 하부의 형태

 

기둥돌 아래에는 받침돌이 네모난 주춧돌을 지탱하고 있으며, 주춧돌 사이에는 포석을 깔아 기초를 단단히 하였습니다. 따라서 물이 줄 때는 이 포석 면이 드러나 마치 지금의 잠수교와 같아 ‘이층다리’ 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참고자료

 

 

▶ 살곶이다리 옛사진 <자료사진>

 

      

 

                       

                                                  예전 다리와 주변의 모습

 

        

 

        

 

                              

                                            다리를 지나는 순종황제 국장행렬

 

                      

                                                    살곶이다리 주위 공사

 

 

▶ 살곶이다리 위치도 <자료사진>

       

 

 

현대시: 살곶이다리 위에서 <시인 윤여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퇴역한 폐선 보다 더 초라한 모습으로 퇴역해 있다. 가끔 아이들만 발로 툭툭 차며 놀 뿐. 괴나리봇짐을 맨 백성들이 가득 지나간다. 양반들이 조랑말 방울을 울리며 도성에 간다. 꽤 경치가 좋다. 남서쪽 반 마장 앞에 처녀 가슴 솟듯한 응봉산이 한강과 어울린 밀애를 보고 그냥 지나치는 객은 없었다. 묵객들은 교판석(轎版石)에 앉아 시 한 수를 읊조리고 있다. 낙방한 과객이 튀어오르는 피라미를 보며 배경 없는 한탄만 하고 있다. 율곡의 가마가 지나간다. 급히 말렸으나 막무가내, 종한테 핀잔만 들었다. 장원급제한 이도령이 마패를 숨기고 급히 건너기에 얘기했더니 역시 알아듣고 성동교로 건너갔다. 한 시간쯤 후 돌아온 율곡의 가마는 광나루가 막혔단다. 건너려던 백성들은 뚝섬역과 한양대역으로 되돌려 보냈다.

 

석각(石脚)보다 몇 곱절 장신인 지하철 교각이 비웃듯이 내려다본다. 성동교의 행렬은 아는 척도 않는다. 아파트에 포위당한 응봉산은 겨우 팔각정만 서럽게 얼굴을 내밀고 눈물을 흘린다. 폐수장이 된 구린내 나는 중량천에 가끔 마장동 축산시장에 떠내려오는 기름덩이를 노린 갈매기만 길손되어 쉬고 간다. 한 때의 과객들이 한양대에서 글 잃는 소리가 위안을 줄 뿐이다. 

 

 

 

2008.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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