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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산군묘)

케인스 2008. 2. 2. 19:26

 

                      서울(연산군묘) 

 

 

서울 도봉구 / 연산군묘(燕山君墓) 

 

 

                                       연산군묘(燕山君墓) / 사적 제362호 
 

이곳은 조선왕조 제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燕山君, 1476∼1506)과 왕비인 거창군부인 신씨(1472~1537) 등이 안장된 묘역이다.

 

연산군은 성종의 큰 아들로 태어나 19세에 임금이 되었다. 젊은 임금이었지만 붓글씨를 잘쓰고 시를 잘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사화(士禍)를 일으켜 조정을 어지럽히자 신하들은 왕위를 박탈하여 연산군으로 강등시키고 강화도로 추방하였으며, 1506년 중종(中宗) 임금을 새로 추대하였다. 그 해에 연산군은 병이들어 강화도에서 31세로 일생을 마쳤는데, 7년 후(1513)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묘의 시설은 왕자의 묘제에 따라 담장,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재실(齋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조선시대 전기 능묘 석물의 조형이 잘 남아 있다. 묘역 아래쪽에는 궁인 조씨 및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다.  <안내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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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묘 표지석

  

          

                                                      연산군 묘소 전경

 

묘역에 들어서면 앞에서부터 연산군의 사위 구문경(具文璟)과 공주[壽億]의 묘가 있고, 그 뒤로 연산군의 후궁인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趙氏)의 묘가 자리하고, 맨 뒤로 연산군(燕山君)과 부인(夫人) 거창신씨(居昌愼氏)의 묘가 있습니다. 

 

 

연산군 슬하의 딸이 능성 구씨(綾城具氏) 집안으로 시집갔는데 사위가 구문경(具文景)입니다. 그래서 연산군이 누워있는 이 묘역(墓域)은 원래 능성 구씨(綾城具氏)의 선영(先塋)이었습니다. 연산군은 사돈네 선영에 묻혀있는 셈입니다.

         

          

                                                      연산군 묘소 안내도

 

                     연산군(燕山君)과 부인(夫人) 거창신씨(居昌愼氏)의 묘소(墓所)
 

연산군(燕山君)은 성종(成宗)의 원자(元子)이며 부인(夫人)은 영의정(領議政)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 신승선(愼承善)의 여(女)이다. 연산군의 휘(諱)는 융이며 성종(成宗)7년 11월6일에 탄생하여 성종14년(1483) 2월6일에 세자(世子)로 책봉되었고 성종25년(1494) 12월29일 성종(成宗)이 창덕궁(昌德宮)에서 승하하자 즉위(卽位)하였다.

 

연산군은 그의 실정(失政)으로 인하여 중종반정(中宗反政)이 일어나 재위12년(1506) 9월에 폐왕(廢王)이 되고 연산군(燕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화(江華) 교동(喬洞)에 추방되었다가 그해 11월 중종원년(1506)에 31세(歲)로 병사(病死)하였다.

 

중종7년(1512) 12월에 폐비(廢妃)된 부인(夫人) 신씨(愼氏)가 상언(上言)하여 묘(墓)를 강화(江華)에서 양주군(楊州郡) 해등면 원당리[현(現) 도봉구(道峰區) 방학동(放鶴洞)]으로 이장(移葬)하기를 청하여 중종8년(1513) 2월20일 왕자군(王子君)의 예(禮)로 이장(移葬)하고, 양주군(楊州郡) 관원(官員)으로 하여금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자료:문화재청>

 

          

                                연산군(燕山君)과 거창신씨(居昌愼氏)의 묘(墓)

 

묘를 마주보고 서면 연산군의 묘는 왼쪽에, 부인 신씨의 묘는 오른쪽에 각각 모셔져 있습니다. 상설(像設)로는 곡장(曲墻)이 3면에 둘러져 있으며, 혼유석(魂遊石) 2, 장명등(長明燈), 2, 향로석(香爐石) 1, 망주석(望柱石) 1쌍, 문인석(文人石) 2쌍, 비석(碑石) 2기가 무덤 앞에 설치되어 있고, 뒤에는 석물(石物)이 없습니다. 그 형식은 대군(大君)의 예우로 하였으며, 무인석(武人石)과 양, 호랑이, 말 등 돌짐승은 생략되었습니다.    

 

봉분 바로 앞에 있는 비석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비석의 머리 부분의 문양은 소용돌이 모양(渦形)으로 되어 있는데, 신씨의 비석은 심하게 마멸되어 있습니다. 또 향로석, 혼유석, 망주석 등도 마멸이 심하여 문양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연산군(燕山君)과 거창신씨(居昌愼氏)의 묘(墓)

 

연산군에게는 2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슬하에 각각 2남 1녀씩 총 4남 2녀를 두었습니다. 정부인 거창 신씨에서 큰아들 이황(폐세자)과 둘째아들 창녕대군을 두었으며, 둘째부인 의정궁주에게서 양평군 이인과 돈수를 낳았습니다. 아들 네 명 모두 연산군 폐위 후 중종1년(1506년) 9월 24일 사사(賜死)되었습니다.

 

                       

                                          연산군묘(燕山君墓)의 석물(石物)

 

묘(墓)의 시설은 대군(大君)의 예우(禮遇)로 봉분(封墳), 곡장(曲墻),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 향로석(香爐石), 비석(碑石),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이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屛風石) 석양(石羊) 석마(石馬) 등은 세우지 아니하였습니다.

 

          

                 연산군묘(燕山君墓)의 봉분(封墳),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 비석(碑石)

 

          

       연산군묘(燕山君墓)의 봉분(封墳),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 비석(碑石), 향로석(香爐石)

 

                       

                                           연산군묘(燕山君墓)의 비석(碑石)

 

묘비석 앞면에는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 라 새겨 있고, 뒷면에는 ‘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 이라 새겨 있습니다.

 

           

              거창신씨묘(居昌愼氏墓)의 봉분(封墳),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 비석(碑石)

 

                       

                                        거창신씨묘(居昌愼氏墓)의 비석(碑石)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는 영의정(領議政)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 신승선(愼承善)의 딸로, 1494년 연산군의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다가, 1506년에 연산군과 함께 폐출(廢出)되어 거창군부인으로 강봉되었습니다. 정청궁(貞淸宮)에서 거처하다가 별세하여 1537년에 연산군 옆에 모셔졌습니다.

 

부인신씨(夫人愼氏)의 묘비(墓碑)는 전면(前面)에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 라 새겨 있고, 후면(後面)에는 '??유월이십륙일장' 이라 새겨져 있습니다만 연도 부분은 마멸되었습니다.

 

                        

                         장명등(長明燈)과 거창신씨묘(居昌愼氏墓) 앞의 문인석(文人石)

 

          

                                          연산군묘(燕山君墓)의 문인석(文人石)

 

                                    거창신씨묘(居昌愼氏墓) 앞의 문인석(文人石)

 

                       

                                        거창신씨묘(居昌愼氏墓) 뒤의 곡장(曲墻)

 

          

                                   연산군(燕山君)과 거창신씨묘(居昌愼氏墓)의 뒤쪽

 

          

                                        거창신씨묘(居昌愼氏墓) 뒤에서 본 앞쪽

 

          

       연산군(燕山君)과 거창신씨묘(居昌愼氏墓) 그리고 앞쪽에 의정궁주조씨묘(義貞宮主趙氏墓)

 

                                             의정궁주조씨묘(義貞宮主趙氏墓)

 

의정궁주 조씨묘(義貞宮主趙氏墓)는 사각(四角)의 호석(護石)으로 둘러져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의정궁주조씨묘(義貞宮主趙氏墓) 앞의 비석(碑石)과 상석(床石)

 

                       

                              의정궁주조씨묘(義貞宮主趙氏墓) 왼편의 문인석(文人石)

 

                       

                             의정궁주조씨묘(義貞宮主趙氏墓) 오른편의 문인석(文人石)

 

          

                       왼쪽의 연산군 사위 구문경묘(具文景墓)와 오른쪽 연산군 딸의 묘

 

           

                                               연산군 사위 구문경묘(具文景墓)

  

                      

                       연산군 사위 구문경(具文景)과 연산군 딸 묘 앞의 향로석(香爐石)

 

                      

                                           연산군 딸 봉분 쪽의 문인석(文人石)

 

                      

                               연산군 사위 구문경(具文景) 봉분 쪽의 문인석(文人石)

 

 

 

참고자료

 

▶ 연산군 (燕山君)

 

조선 제10대 왕(1494∼1506). 이름은 이륭(李隆). 성종의 장남. 어머니는 지평 윤기묘의 딸 폐비 윤씨이다. 성종14년(1483) 세자에 책봉되었고, 즉위 후 녹도(鹿島)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고 건주야인(建州野人)들을 회유, 토벌하는 등 국방에 주력하였다. 또한 사창(社倉)·상평창(常平倉)·진제장(賑濟場)의 설치, 빈민의 구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부활, 《경상우도지도(慶尙右道地圖)》 《국조보감(國朝寶鑑)》《동국명가집(東國名歌集)》의 간행과 《속국조보감》 《역대제왕시문잡저(歷代帝王詩文雜著)》 《여지승람(輿地勝覽)》의 완성 등 즉위 초에는 다소 치적을 쌓았으나, 어머니 윤씨가 사사(賜死)된 뒤 세자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탓으로 이상성격(異常性格)이 형성되어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고 많은 실정(失政)을 저질렀다. 1498년 학문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을 이용하여 훈구파(勳舊派)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이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구실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사림파(士林派)를 대량으로 숙청하였다. 1504년에는 생모 윤씨 사사사건의 전말을 듣고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 이에 관련된 후궁들과 김굉필(金宏弼) 등 제신들을 학살하였다. 또한,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삼고 사간원의 기능을 마비시켰으며 경연(經筵)을 폐지하는 등 방탕한 생활로 민생을 혼란에 빠뜨렸다. 1506년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종의 2남 진성대군(晉城大君;중종)을 옹립하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군(君)으로 강봉되어 강화(江華) 교동(喬桐)에 유배되어 죽었다.

 

연산군부인신씨지석(燕山君夫人愼氏誌石)  

  

연산군부인(燕山君夫人) 신씨묘지명(愼氏墓誌銘)

 

가선대부 한성부윤 겸동지성균관사 오위총 부부총관(嘉善大夫 漢城府右尹 兼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 정사룡(鄭士龍)은 찬(撰)하노라.

 

신씨(愼氏)의 선계(先系)는 거창(居昌)에서 나와 세상에 드러난 것은 신라(新羅)때 부터이다.휘(諱) 이충(以衷)은 판이천현사(判利川縣事)를 지냈고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증직이 되고 휘(諱) 전(詮)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고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증직이 되었다. 부(父) 휘(諱) 승선(承善)은 괴과(魁科)에 급제하였고 또 발영시(拔英試)에서 발탁이 되어 참익재좌리공신(參翼載佐理功臣)이 되었다.

 

벼슬은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에 이러렀고, 시호를 내리고 글을 지어 귀하게 여겨 삼대(三代)를 미루어 증직이 되었다.

 

중모현주(中牟縣主)는 진실로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딸이다. 덕(德) 아름답고 능히 태어나 부인(夫人)의 총명하고 지혜로움을 남달라 태어난 지 여섯 해가 되어 현주(縣主)가 되어 ~ 결 ~ 를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다. 부인은 성화(成化) 무신년(戊申年)에 동궁(東宮)으로 선발이 되어 들어가 사전(四殿)을 받들어 모시기를 정성을 다하고 삼가 소학(小學)과 내훈(內訓) 등 여러 편(篇)을 수업 받으면서 끝까지 이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갑자년(甲子年)이후로 연산(燕山)이 황패해지자 부인(夫人)이 일마다 바로잡아 준 것이 자못 많았다. 병인년(丙寅年) 연산(燕山)이 폐위가 되어 사저(私邸)로 쫓겨나자 지금의 왕께서 왕이 되시어 민망하게 여겨 빈(嬪)의 예를 더하여 주었다. 또 서울에 집을 내리고 정현왕후(貞顯王后)께서 특별히 종을 내리셨다. 가정(嘉靖) 정유년(丁酉年) 부인이 병으로 죽자 왕께서 다시 부의(賻儀)를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고 왕후고▨(王后考▨)의 예로 장사를 지내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 남다른 대우였다. 부인(夫人)은 조용하면서도 정중하고 말이 적어 연산군(燕山君)이 죽기 30여 년 동안 친척들이 ▨를 우러러 보았다. 종들이 어루만지고 사랑해주심을 받들어 대대로 이로써 종질하는 자들이 많았다. 부인(夫人) 성화(成化) 병신년(丙申年) 11월 29일에 태어나 가정(嘉靖) 정유년(丁酉年) 4월 8일죽으니 향년 61세였다. 그해 6월 26일에 양주(楊州) 도봉산(道峯山) 해촌리(海村里)의 언덕에 장사를 지내니 연산(燕山)과는 같은 지역이면서 다른 봉분이다. 부인(夫人)은 4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고 딸 하나 만이 능천군(綾川君) 구수영(具壽永)의 아들 문경(文璟)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하나를 낳으니 ?였다. 지금 활인서 별제(活人署 別提)가 되었다. 처음엔 첨정(僉正) 심사공(沈思恭)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가 후사가 없어 참판(參判) 황헌지(黃孝獻)의 딸에게 다시 장가를 가 딸 하나를 두니 아직 어리다. 자신이 부인(夫人)의 행장(行狀)을 찬술하여 와서 명(銘)을 청하였다. 명(銘)하기를,

 

         살아서 영광 지극하니                   죽어서도 없어지지 않네.

         자식에게 맡기니                           세상에 능하다고 하네.

         삼종(三從)의 의리가 있지만          쫓아서 떨친 것이 가장 귀하다네.

         무덤을 새겨 들이니                       자손들 ▨하리.

 

   <자료: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 서울시지정보호수 제1호, 은행나무

 

                      

                                서울시지정보호수 제1호, 은행나무

 

연산군(燕山君) 묘소(墓所) 바로 앞에 있는 이 은행나무의 수령은 830년이며 높이 25m, 나무둘레 10.7m로서 1968년 보호수로 지정된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다. 이 은행나무는 그 모습이 매우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하였고, 이 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고 하는 일화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일년 전에도 불이 나서 소방차가 동원되어 진화했다고 전해진다.


은행나무에 대한 구민의 애착이 각별하여 부근 아파트 단지가 조성될 때에도 뜻있는 지역 주민들에 의해 나무의 생육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아파트의 구조가 변경되는 일도 겪었으며, 최근에는 은행나무 인근에 다세대주택으로 인해 나무가 가지를 뻗지 못하는 등 생육환경이 문제가 되자 이에 도봉구에서는 생육환경 조성을 위한 공원조성사업을 추진하여 녹지공간 및 주민쉼터를 확보할 예정에 있다. <도봉문화원>


                                 

                                                         나무둘레 10.7m

 

▶ 원당천(元堂泉)

 

                                        원당천(元堂泉) 표지석과 원당샘 안내판

 

                   

                                                              원당샘

 

도봉구 방학동 547번지에 위치하는 원당샘은 600여년전 파평윤씨 일가가 자연부락인 원당마을에 정착하면서 이 마을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었으며, 마을의 우물로서 수백년동안 생활용수를 공급하였고 일명 '피양우물' 이라고 불렀다 한다.

 

면적 26m2, 우물바닥면적 0.64m2인 이 우물은 1979년 마을 주민들에 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면서 원래 마을 이름을 본따 '원당천'으로 명명되었다.

 

풍부한 수량으로 심한 가뭄에 마른적이 없고 일정한 수온을 유지하고 있어 혹한에도 얼어붙는 일이 없으며 부근의 수령이 1,000년된 방학동 은행나무도 이 우물의 수맥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산세가 수려하고 풍수가 좋아 부근에 조선조 10대 연산군 묘소 세종대왕부마인 양효안공(맹담) 묘소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원당샘이 복구됨으로 옛날의 지명과 지세를 짐작케 해주는 지역이다. <안내판에서..>

 

 

 

2008.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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