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서울특별시

서울(정의공주묘)

케인스 2008. 2. 2. 19:25

 

                      서울(정의공주묘) 

 

 

서울 도봉구 / 정의공주묘(貞懿公主墓), 양효안공묘(良孝安公墓)와 신도비(神道碑)

 

 

                          양효안공 신도비부묘소(良孝安公 神道碑附墓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0호이며 도봉구 방학동 도봉산 연봉 남쪽의 시루봉 기슭에 위치하는 이 신도비는 세종(世宗)의 부마인 양효(良孝) 안맹담(安孟聃)의 신도비로서 세조11년(1466)에 건립되었으며, 묘소는 그와 그의 부인 정의공주((貞懿公主)의 묘소이다.     

 

양효공은 본관이 죽산(竹山)으로 함길도 도관찰출척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다. 세종10년(1428) 14세에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와 결혼하여 금실이 매우 좋았다. 그는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활도 잘 쏘고, 음악과 의학에도 통달하였다.  <안내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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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공주(貞懿公主)와 양효안공(良孝安公) 묘소(墓所) 및 양효안공(良孝安公) 신도비(神道碑)가 있는 곳의 철문. 들어가지 못하게 자물쇠가 잠겨있습니다.

 

                 정의공주묘(貞懿公主墓), 양효안공묘(良孝安公墓)와 신도비(神道碑)

 

멀리 상단에 정의공주(貞懿公主)와 양효안공(良孝安公) 묘(墓)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아래 쪽으로는 양효안공의 후손인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낸 안종해(安宗海)와 그의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합장묘가 있습니다. 철문 앞쪽 오른편으로는 양효안공(良孝安公)의 신도비(神道碑)가 있습니다.

 

                            윗쪽으로 정의공주(貞懿公主)와 양효안공(良孝安公) 묘(墓)

 

                        정의공주(貞懿公主)와 양효안공(良孝安公)의 묘(墓)

 

오른쪽은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둘째딸 정의공주(貞懿公主)의 무덤이며, 왼쪽의 것은 부군 양효공(良孝公) 안맹담(安孟聃)의 무덤입니다.


안맹담(安孟聃, 1415~1462)의 자는 덕수(德壽)로 가선대부 함길도 관찰출척사 함흥부윤(咸興府尹) 안망지 (安望之)의 아들로 태어나 세종10년(1428)에 부마(駙馬)가 되어 죽성군(竹城君)에 책봉되었습니다.

세종14년(1432)에는 연창군에 봉해졌고 세조3년(1457)에는 원종공신에 책록되었습니다. 공은 세조8년(1462) 인왕산 남쪽 기슭 집에서 48세로 병사하였습니다. 정의공주는 안맹담이 죽은지 15년이 지난 성종8년(1477)에 세상을 떠나 안맹담 옆에 묻혔습니다.

 

          

                             정의공주(貞懿公主)와 양효안공(良孝安公)의 묘(墓)

 

묘역에는 각각 묘갈과 혼유석이 갖추어져있고 묘 앞에는 석등과 문인석 4구가 있습니다.

 

          

                                       안맹담(安孟聃: 1415~1462)의 묘(墓)

 

태종15년(1415)에 태어나 세조8년(1462)에 사망하였으며,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덕수(德壽), 시호는 양효(良孝), 함길도 관찰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입니다. 1428년 13살의 나이로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결혼하여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고 1432년 다시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습니다. 뒤에 연창위(延昌尉)에 개봉(改封)되었으며, 세조 원년(1445)에는 원종 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수록대부(綏祿大夫)에 올랐습니다.

  

글씨에 뛰어나 초서를 잘 썼고, 말타기, 활쏘기, 음악도 잘 했으며, 약물(藥物)에 통달하여 세인들의 치료에 공헌하였습니다. 정의공주와는 부부 금슬이 아주 좋았고 자식도 많이 나았습니다.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1477)의 묘(墓)

 

정의공주(貞懿公主)는 세종대왕의 둘째 딸이며, 문종(文宗)의 여동생이자 세조(世祖)의 누이입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에 왕세자였던 문종과 함께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하며,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들 때 정의공주 집으로 자주 이어하면서 지냈다고도 합니다. 남편인 안맹담과의 사이에서 4남2녀를 얻었으며, 아들의 이름은 여달(如獺), 온천(溫泉), 상계(桑鷄), 빈세(貧世)로 세종대왕께서 친히 지어주셨다고 합니다.

 

태종(太宗)이 사용하던 정자인 낙천정을 세종4년(1422) 5월, 상왕이 승하한 후 그의 둘째딸인 정의공주에게 하사하였고, 정의공주는 이를 네째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주었습니다. 또한 한강 가운데 있는 두뭇개(옥수동)의 저자도(楮子島)라는 섬을 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종이 정의공주에 대한 총애가 남달랐음을 짐작케 합니다.

 

정의공주의 시댁 죽산안씨(竹山安氏) 족보에 의하면 "한글의 변음과 토착을 세종임금이 대군들에게 풀라고 하니 대군들이 풀지 못하자 세종이 정의공주에게 하명하였는데 정의공주가 변음과 토착(사투리로 추측)을 풀어 올려 세종이 극찬하시고 상으로 노비 수백 구를 하사하셨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훈민정음 창제에는 여성인 정의공주가 다른 왕자들보다 더 큰 몫을 해냈다고 합니다. 

 

          

                                     양효안공(良孝安公) 묘(墓)의 문인석(文人石)

 

                      

                                        양효안공 신도비(良孝安公 神道碑)

 

신도비(神道碑)란 왕이나 관직이 높은 관리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들의 무덤 근처 길 가에 세우는 비석(碑石)을 의미합니다. 양효안공 신도비(良孝安公 神道碑)의 형태는 거대한 화강석 거북받침대 위에 대리석으로 된 용머리장식을 갖춘 통비(通碑)입니다. 비문은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鄭隣趾)가 지었고, 글씨는 안맹담의 4남 안빈세(安貧世)가 썼다고 합니다.  

 

          

                                                           거북받침대

 

신도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받침대는 목둘레 주름이 사실적이고 콧구멍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용머리 장식

 

여의주 구슬을 놓고 두 마리의 용이 몸을 틀고있는 용머리장식 부분의 조각이 정교하고 화려하다.

 

           

 

상단의 정의공주(貞懿公主)와 양효안공(良孝安公) 묘(墓), 그 아래는 양효안공의 후손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낸 안종해(安宗海)와 그의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합장묘입니다.            

 

          

 

앞쪽의 묘는 통훈대부청주목사죽산안공종해(通訓大夫淸州牧使竹山安公宗海)와 그의 부인 숙인파평윤씨(淑人坡平尹氏)의 묘(墓)입니다.

 

안종해(安宗海)는 숙종7년(1681)에 태어나 영조30년(1745)에 사망하였으며,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조경(朝卿). 세자익위사 부수(副率) 상억(相億)의 아들입니다.


숙종41년(171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영조2년(1726) 천거로 광릉참봉(光陵參奉)에 보임된 뒤 여러 직을 거쳐 공산현감(公山縣監)으로 나갔다. 그뒤 공조좌랑에 이어 사도시첨정(司도寺僉正) 등을 지내고, 면천군수로 복임하였습니다. 1741년 승진하여 청주목사를 지냈습니다.

 

 

2008.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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