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서울특별시

서울(몽촌토성)

케인스 2008. 1. 27. 00:44

 

                       서울(몽촌토성) 

 

 

서울 송파구 / 몽촌토성(夢村土城)

 

 

                                                      몽촌토성(夢村土城)

 

지금은 올림픽공원으로 조성돼 시민의 휴식공간이 되어 있는 몽촌토성은 야산의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만든 한성백제시대의 중요한 성곽 가운데 하나이다.

 

사적 제 297호인 몽촌토성은 일반적으로 토성이라 부르지만 순수한 토성은 아니다. 남한산에서 뻗어내린 최고 높이 44.8m인 타원형의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구릉이 낮거나 끊긴 부분에만 판축기법을 이용하여 입자가 곱고 잘 들러붙는 점토를 5~10cm 두께로 차곡차곡 올려쌓은 산성이자 토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2.3km, 높이는 지표면 기준으로 약10~13m이다. 성을 방비하기 위해 성벽 위에는 목책을 세우고 아래에는 해자(垓子)를 설치하여 다른 성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하면 흙을 다져서 만든 움집과 지하저장구덩이, 철재화살촉, 독무덤, 원통형토기조각, 갈색회유전문도기조각 등 중요한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 중 특히 백제 초기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원통형토기조각과 몽촌토성이 만들어진 시기를 3세기까지 올려 추정할 수 있게한, 중국의 서진(西晉: A.D 265~316)시대의 동전 무늬가 찍힌 자기 조각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되고 확인된 유물이나 유적이 초기백제사를 규명하는데 소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없지만,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유물이나 유적이 없어 몽촌토성을 왕성으로 보는 것은 무리인듯하며,지금으로서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어서나 그 규모와 축조 방법, 내부 시설물, 출토 유물 등 여러 면에서 백제 초기 한성시대를 대표하는 중심적인 성곽" 정도로 이해하여야 할 것같다.
  <자료: 문화유산답사회와 안내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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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촌토성(夢村土城) 전경 <자료사진>

 

사적 제297호인 몽촌토성은 고려시대에 고원성(古垣城)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부터 몽촌(夢村)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 토성 북쪽에는 풍납토성(風納土城)과 아차산성(峨嵯山城)이 있고, 동쪽으로는 이성산성(二聖山城)과 남한산성, 서남쪽에는 삼성동토성(三成洞土城)이 있어서 외적을 방어하기에 유리합니다. 또한 토성 주변에는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등의 고분군들이 남아 있습니다.

 

   

                                    몽촌토성(夢村土城)과 해자(垓字)  <자료사진>

 

몽촌토성의 전체 면적은 753,729m2, 토성만의 면적은 441,765m2입니다. 몽촌토성의 지형을 살펴보면 북으로 한강이 감싸고 남으로는 남한산이 솟아있으며 그사이는 비교적 완만한 구릉과 평야가 펼쳐져 있고 이 지역 일대에는 수많은 백제고분과 고성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축조 연대는 대체로 3세기경부터 5세기말 까지로 북쪽으로부터의 침공을 대비한 방어용 성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곳의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자연구릉상에 축성하여 성벽을 만들었기 때문에 일정한 정형을 띠고 있지는 않습니다.

   

                       

                                                 곰말다리

 

몽촌토성의 북·서쪽 해자를 지나 성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작은 돌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이 다리를 ‘곰말다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곰말다리  <자료사진>

 

이 다리는 원래 몽촌교(夢村橋)로 불리웠으며 몽촌(夢村)은 우리말로 '꿈마을'이라는 의미입니다. '곰말'은 꿈마을의 옛말로 1986년 3월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교각 명칭 제정시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복구하기 위하여 '곰말다리'라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해자(垓字)

 

한강지류에 해당하는 이곳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진흙을 쌓아 성벽을 만들었고, 그 외곽에는 해자가 돌려져 있고, 해자는 성의 밖으로 물길을 내어 방어선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해자(垓字) 

 

원래 해자(垓字)의 자취는 없어지고 지금은 커다란 호수로 변하여 남아 있습니다.

 

  

 

          

                                                         해자(垓字) 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해자(垓字), 성내천(城內川)

 

토성의 서쪽과 북쪽, 동북쪽 일대는 인근의 성내천과 연결되는 해자(垓字: 성밖으로 땅을 둘러 파고 물을 채운 일종의 방어시설)를 만들어 외부로부터 접근하기 어렵게 하였습니다.

 

                      

                                                      몽촌토성(夢村土城)

 

몽촌토성은 해발 30~40m 가량의 나지막한 구릉들을 연결한 총 둘레 2,285m의 타원형의 큰 성으로  남북으로 가장 긴 곳이 730m, 동서로 가장 긴 곳이 540m이며, 그 평균은 남북이 540m에 동서가 약 400m입니다. 또한 성의 동북쪽 밖으로는 270m가량 이어지는 외성이 있습니다.

 

 

성벽은 자연구릉을 이용해 축조하였는데 경사가 완만한 지점은 흙을 깎아내 경사를 급하게 만들고, 자연구릉이 이어지는 낮은 지점은 점토를 판축하여 성벽을 높게 만들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지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현재의 지표면을 기준으로 할 때 10~13m 정도입니다. 그러나 성벽의 바닥이 지금의 지면보다 2~4m쯤 밑에 있고, 그동안 풍화에 의해 깍여 나간 것까지 감안한다면 원래 높이는13~18m 정도 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성벽의 안쪽 정상부 네 지점에는 주위보다 3~5m 가량 높게 쌓아올린 토단(土壇)이 있는데, 평상시나 전쟁 등 유사시에 성 내외를 관할하고 전투를 지휘하는 망루 역할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몽촌토성 안에서는 온돌건물지(溫突建物址), 판축대지(版築臺址), 장방형건물지(長方形建物址), 적심건물지(積心建物址) 등의 지상건물지가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건물지 주변과 남문지 부근의 저지대에서 커다란 연못이 확인되었습니다.

 

           

 

몽촌토성의 성벽 정상부에서는 직경 0.2m 내외의 냇돌(川石)을 모아 놓은 적석유구들이 7개소에서 확인된 바 있는데, 이 유구들은 수성(守城)시에 투석에 쓰기 위한 일종의 준비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몽촌토성(夢村土城)의 경치

 

            

                                                 몽촌토성(夢村土城)의 경치

 

           

                                                       몽촌토성의 내부

 

잔디와 나무가 있는 것이 여느 골프장 같아 보입니다. 멀리 남쪽으로 남한산(南漢山)이 보입니다. 토성의 출입구로 이용된 문지(門止)는 토성의 북·동·남쪽 3곳에서 확인되었으며, 토성의 서벽 중간지점에서는 암문(暗門)이 1개소가 확인되었습니다. 북문지 동쪽에는 남북으로 길쭉한 외성(外城)이 본성에 붙어 있습니다.

 

                                               몽촌토성목책(夢村土城木柵)

 

우리나라의 목책(木柵)은 초기 철기시대(鐵器時代)부터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르기까지 오랜기간에 걸쳐 적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쓰여졌다. 목책은 단순히 목책 만으로 설치한 목책성(木柵城)이 있고, 몽촌토성(夢村土城)과 같이 토성벽 위에 목책을 설치한 성(城)이 있다.

 

몽촌토성의 목책은 1983~1988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목책의 자리가 확인되었는데 생토 암반층에 1.8m 간격으로 직경 30~40cm, 깊이 30~90cm의 구멍을 파고 큰 나무를 막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사이에 보조기둥을 세웠던 것이다. 목책의 높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m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 목책은 발굴 조사된 원래의 목책기둥 자리를 따라 그 위에 추정복원 한 것이다. <안내판에서..>

 

 

                                               몽촌토성목책(夢村土城木柵)


우리 나라의 목책은 초기 철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적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쓰여졌습니다. 단순히 목책만 설치한 목책성이 있고 몽촌토성과 같이 토성벽 위에 목책을 설치한 성이 있습니다.

  

          

                                         토성 서북쪽의 성벽 보강용 목책(木柵)

  

          

 

  

                                                            목책(木柵)

 

촌토성의 목책은 1983~1988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목책의 자리가 확인되었는데 생토 암반층에 1.8m간격으로 직경 30~40cm, 길이 30~90cm의 구멍을 파고 큰나무를 막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사이에 보조기둥을 세웠던 것입니다. 목책의 높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m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이 목책은 발굴 조사된 원래의 목책기둥 자리를 따라 그 위에 추정 복원한 것입니다.

 

          

 

                      

                                                  움집터 전시관 <자료사진>

 

옛 백제의 움집터 전시관에는 1988년에 발견된 움집터와 저장구덩이를 발굴당시의 모습 그대로 전시해 놓았다.

  

                                  움집터[竪穴住居址(수혈주거지)]

 

몽촌토성은 백제 초기의 토성인데 백제가 고대국가로서 기틀을 마련한 한성백제시대[B.C.18~A.D.475]의 중요 유적의 하나로 추정되어 오던 곳이다. 1983년부터 1989년까지 모두 여섯차례에 걸친 정밀한 학술 발굴조사 결과, 토성내에서 네곳의 지상 건물터와 함께 열두 곳의 움집터가 조사 되었으며, 30여개소에 달하는 저장공(貯藏孔)이 확인되었다. 이들 중 움집과 저장공의 대다수는 해발 25m이상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내부에서 원통형 그릇받침, 굽접시, 세발토기 등의 토기류와 칼, 창 등의 철제무기류 그리고 뼈로 만든 갑옷이 출토되었다.  <안내판에서..>

 

          

                                                        움집터 설명도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정밀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몽촌토성에서 4채의 지상 건물터 및 12기의 움집터가 드러났다. 움집들은 대부분 해발 25m가 넘는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움집터 모형

 

움집터들은 평면 형태와 깊이에 따라 3가지 형식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구릉상의 경사면을 L자 형태로 파내어 만든 것이고, 이러한 형태가 가장 많다. 두 번째는, 수혈의 형태가 장방형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며, 당시의 지면으로부터는 1m 정도 파서 만든 것인데, 이런 형태의 움집 내에서는 주로 말뼈나 철제 무기류가 출토되어, 일반 살림집이 아니라 군사와 관련된 특수한 용도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 번째 형태의 움집은 평면 육각형의 건물지로, 육각형의 짧은 변이 만나는 지점(주로 동남쪽)에 출입시설을 만들고 있다.  <자료: 몽촌역사관>

 

 

                                  

                                          몽촌토성 움집 조사 광경 <자료사진>

 

6차에 걸친 조사를 통하여 움집, 저장구덩이를 비롯하여 대규모의 지상건물지와 연못 등이 확인 되었고,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은 실로 어마어마한 양으로 백제토기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토기류 외에도 서진전문도기편, 청자벼루 등을 비롯한 각종 중국자기편이 확인되어 몽촌토성의 상한년대를 3세기 중엽경까지 끌어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외에도 연화문막새기와 등을 비롯한 각종의 백제기와가 출토되어, 이러한 기와를 올린 기와집이 축조되었으며 여기에 중요 인물이 거처했음을 간접적으로 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자료: 몽촌역사관>

 

                       

                                       토성 내부 저장공(貯藏孔: 저장구덩이)

 

저장 방법은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큰 항아리를 여러 개 세워놓고 그 안에 내용물을 저장하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저장공 바닥의 벽면에 구멍을 뚫고 여러개의 나무막대기를 가로질러 꽂아서 일종의 마루 같이 바닥을 만든 후 그 위에 내용물을 저장하는 방식이다.

 

전자의 경우는 음료나 발효식품 등을 저장하였으며, 후자의 경우는 습도가 유지될 필요가 있는 구근작물 등을 저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저장공 중 많은 수가 성벽의 정상부 근처에 있으며, 그 규모나 출토 유물로 보아 일상생활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도 상당수 이르고 있어서 성의 수비와 관련된 장비 등을 보관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85-3호 저장공에서 철제 발걸이와 뼈로 만든 갑옷이 출토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안내판에서..>

 

                      

 

저장공의 내부에서는 대형호(大形壺) 등의 저장용기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움집터

 

이곳에는 모두 네곳의 움집터가 전시되고 있는데, 시기적으로 앞서 만든 움집터 위에 나중에 만든 움집이 위아래로 겹쳐진 상태로 보이고 있다. 움집은 평면육각형의 모양인데, 동남쪽에 출입구 시설이 있다.

움집의 규모를 보면 긴 벽의 길이는 6m, 짧은 벽은 4m 가량된다. 움집의 내부에는 특별한 시설은 없으나, 주거지 한쪽 벽을 따라 밖으로 돌출된 형태의 화덕이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벽채 안쪽 바닥에는 기둥 구멍이 남아있는데, 긴 벽에는 10개가 그리고 짧은 벽에는 4~5개가 남아 있어 이곳에 기둥을 세워 벽체 및 지붕 시설을 하였다. <안내판에서..>

 

                

                                                               몽촌역사관  <자료사진>

 

몽촌토성 안에 있는 몽촌역사관은 한강유역을 포함한 서울의 고대역사와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 및 유물을 한 곳에 모아 전시함으로써 서울이 2천년 고도(古都) "역사적 중심지"였음을 조명하고자 1992년 1월 개관하였습니다. 

 

                    

                          충헌 김공 신도비(忠憲金公神道碑)와 그의 무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9호로서 몽촌토성 내에 있는 이 비는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역임한 김구(金構)의 신도비로서, 영조19년(1743)에 건립되었다.

 

김구의 자는 사긍(士肯), 호는 관복재(觀復齋)이며, 시호는 충헌이다. 숙종8년(1682)에 춘당대(春塘臺)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사헌부와 사간원에 출입하면서 시무(時務)에 대한 진언으로 일반의 찬탄을 받았다. 그리고 노산군의 단종복위(復位)와 장릉(莊陵)의 능호(陵號)를 추복(追復)하였으며,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의 묘를 온릉(溫陵)으로 추복(追復)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안내판에서..>

 

                       

 

이 비의 주인공 김구(金構)는 청품 김씨로 박세채의 문하생으로 조선후기(1649-1704)의 문신입니다.

 

                       

                                 충헌 김공 신도비(忠憲金公神道碑)

 

이 비는 총 높이 4.06m, 비신(碑身)의 높이 2.74m, 폭 1.02m로서 화강암의 사각형 받침돌 위에 대리석으로 된 비신이 있으며, 그 위에 화강암 지붕돌이 얹혀져 있습니다.

 

  

 

지붕돌인 옥개석에 용, 봉황, 암막새, 수막새, 불로초(不老草), 박쥐, 그림무늬 등의 문양이 다채롭게 조각되어 있는 것은 여느 신도비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것입니다.

 

          

 

비문은 영의정을 지낸 이의현(李宜顯)이 지었고, 글씨는 김구의 둘째 사위인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썼습니다. 비의 제목글씨인 전액(篆額)은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兪拓基)의 필적으로 미술적으로 수법이 뛰어나서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충헌 김공 묘(忠憲金公墓)

 

                       

                                       충헌 김공 묘(忠憲金公墓)에서 만난 토끼

 

 

                                                 충헌 김공 묘(忠憲金公墓)

 

이 비의 북쪽에 있는 그의 무덤 앞에는 돌비석과 돌기둥, 석양(石羊) 두 마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것들도 19세기 전반기의 무덤 석조물로서 묘제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 입니다. 묘에서 만난 토끼도 김공의 묘를 지키려는듯 석양(石羊) 마냥 버티고 있습니다.

  

          

                                                      은행나무[보호수]

 

이 나무는 몽촌토성 안에있는 은행나무로 수령이 약530년으로서 높이는 17.5m, 나무둘레는 6m이며, 1968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단풍이 들게되면 아름다우리라 생각해 봅니다.

 

 

 참고사진         

 

 

  

                                            몽촌토성의 위치와 주변도 <자료사진>

 

                                        몽촌토성, 올림픽공원 안내도 <자료사진>


1986년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를 대비해서 1986년 5월 올림픽공원을 만듬었는데 몽촌토성지역을 중심으로 한 6개의 경기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몽촌토성과 주위 녹지를 조성하고, 1986년에 올림픽 회관과 5개의 경기장(체조.역도.펜싱.테니스.벨로드롬)을 건립한 후, 1988년 수영경기장·조각공원을 확충하여 서울 올림픽 대회를 개최했다. 체조.펜싱 경기장은 태양광선을 10%까지 투과할 수 있는 특수 패브릭 천장과 채광 정도에 따라 조명을 자동 조절할 수 있고, 관람석의 규모도 조절할 수 있도록 특수설계가 되어 있다. 역도경기장 외벽은 반투명 파이버 글라스 패널을 사용하는 등 현대적 건축미가 돋보인다.  <자료:송파구청>

 

 

                                                            평화의 문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 조형물인 평화의 문을 거쳐 곰말다리를 건너 몽촌토성으로 들어섰습니다.

 

           

                                             올림픽 기념 조형물인 평화의 문

 

                       

                                                           평화의 성화

 

평화의 문 아래 놓여있는 '평화의 성화'는 1988년부터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평화의 광장

 

평화의 문을 지나면 평화의 광장이 나옵니다. 이곳을 오른쪽으로 끼고 조금가면 곰말다리가 나옵니다.

 

 

 참고자료

 

 

몽촌(夢村)의 지명 유래 

 

고대 삼한때부터 이곳을 [곰말]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한자음으로 고쳐져 몽촌이 되었다는 것이다. 몽촌의 전이름은 고원강촌(古垣江村)이나 고원성의 고원, 옛날 흙으로 쌓은 담장이나 성루의 의미를 넘어서 「곰말」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곰말」의 곰은 고어로 큰 것을 뜻하므로 큰마을이란 뜻이 되고, 또 큰마을이란 으뜸되는 마을이란 뜻도 되므로 고원(古垣)이란 한자이름도 뜻으로 새기면 「옛 울」이란 뜻이다. 참고로 백제 때의 위례성(慰禮城) 역시 울을 두른 성, 곧 서울이란 뜻으로 고원, 즉 옛 울, 옛 서울로도 풀이될 수 있어서 몽촌, 꿈말이나 곰말, 큰말, 고원, 고울, 옛 울 등의 이름을 「옛 위례」 곧 옛 서울로 풀이해 볼 수 있다. <자료:송파구>

 

한성백제 개요  
 
백제 한성도읍기는 백제가 한강유역에서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진 시기로서,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에서 제21대 개로왕(蓋鹵王)까지의 약 500년 동안을 가리킨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건국시조인 온조는 본래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朱蒙)의 아들로서 남쪽으로 내려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정착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가 나중에 백제로 고쳤다고 한다.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그 동안의 조사·연구 결과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일대가 가장 유력하다.


한강유역에서 성장한 백제는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마한(馬韓)지역에서 패권을 쥐고 있던 목지국(目支國)을 누르게 되었다. 그리고 3세기말~4세기초에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 345~375) 때 전성기를 맞았다. 근초고왕은 서기 371년에 3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키는 등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쳤다.


이 무렵 백제 영토는 북으로는 패하(浿河), 동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는데, 패하는 지금의 대동강이거나 예성강이며, 주양은 지금의 춘천으로 추정된다. 대외적으로는 바다건너 왜(倭) 및 중국의 동진(東晋)과도 활발히 교류하였다. 그러나 융성하던 백제도 고구려 장수왕의 강력한 남진정책에 밀려 서기 475년 수도 한성을 잃고 개로왕마저 죽임을 당하자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기고 말았다.  <자료>

 

성곽의 구조와 형식

 

• 성벽(城壁) - 성곽의 성격을 구분짓는 것은 성벽이다. 일정지역을 성벽으로 둘린 위곽(圍郭) 자체는 가장 큰 방어력을 제공하는 주요 시설이다. 특히 우리 나라 성곽은 성벽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크다.

 

• 목책성(木柵城) -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 진한,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시대 초기에는 주로 목책성을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목책은 내구성이 부족한 반면 단기간에 설치할 수 있는 좋은 방어 시설물로 후 대에도 사용된 방법이다. 특히 토성벽에 함께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 토성(土城) - 목책성과 더불어 흙으로 성벽을 조성하는 옛 형식이다. 토성은 목책보다는 공력이 많이 들지만 삼국시대는 물론 조선의 도성이었던 한성도 처음에는 토성으로 축조하는 등 상당히 오랜 기간 널리 사용된 재료였다. 산지 토성의 경우 기존 지세를 잘 이용하였는데 특히 급경사 지역은 기존 지형을 깍아 경사에 대비하는 삭토법(削土法)으로 성벽을 만들고 완경사에는 주변의 흙을 쌓아 토단(土壇)을 만들어 둔덕을 조성하는 성토법(盛土法)을 이용하였다. 주요한 성벽에는 토성벽을 조성하기 위해 한켜 한켜씩 얇게 깔아 다져 올리는 판축법(版築法)이 적용되었다

 

• 석성(石城) - 일반적으로 성벽 하면 석성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내구성이 부족한 나무나 흙을 차츰 돌로 개축하여 쌓아 현재 전하는 성은 대부분 석성이기 때문이다. 석성은 산지에서 경사면을 이용하여 성을 쌓고자 하는 곳에 일부 흙 을 파고 성 외벽만 석재로 쌓고 내부는 흙을 단단히 다져 채우는 방법을 주로 이용했는데 이를 내탁법(內托法) 또는 편축법(片築法)이라 한다. 다른 방법으로 주로 평지에서 사용된 경우로 성벽의 안팎면을 나란히 석재를 쌓아 올리고 내부는 석재로 채우는 방식이다. 이는 재료와 공력이 많이 들어가 기 때문에 평지 일부와 성문의 육축부분에 적용된 예가 많다. 이런 방식을 협축법(夾築法)이라 한다.

 

• 테뫼식 산성- 마치 머리에 띠를 두른 것처럼 산 정상부를 둘러 쌓은 산성

 

• 포곡식 산성- 산 정상부와 계곡을 아우르는 형태로 쌓은 산성으로 우리나라 산성의 대표적 형태이다. 남한산성·북한산성 등이 그것으로 물을 얻을 수 있는 관계로 장기항전이 가능하다.  <자료>

 

김구[金構: 인조27(1649)~숙종30(1704)]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풍, 호는 관복제이며 시호는 충헌이다. 아버지는 관찰사였다.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춘당대문과에 장원하여, 전적과 각 조의 낭관을 거쳐, 사헌부와 사간원에 있을 때, 노론·소론의 격렬한 대립을 완화하기 위한 만언에 가까운 시무소를 올려 일반의 찬탄을 받았으며,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는 데 힘썼다.

 

경연관·수찬·승지 등을 거쳐 황해도·충청도·전라도·평안도의 4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대사간을 거쳐 1697년 강화유수로서 장녕전을 경영한 공으로 가자되었으나, 오도일·이광좌등으로부터 흉년으로 모든 역사를 정지시켰는데도 내전을 통해 나온 명을 받들어 집을 지었다 하여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어 판결사에 있으면서 노산군(단종)의 복위를 극력 주장하여 숙종으로 하여금 단종의 위를 추복하게 하였고, 아울러 단종비 신씨의 묘를 능으로 추봉하고 능역을 감독하여 그 공으로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어 육조의 판서를 거쳐, 1703년 우의정이 되었다.

 

임금의 위엄에 굽히지 않았고, 의리에 따라 처신하였으므로 임금의 총애와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병서와 도가류에 정통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가 힘찼다. 글씨로는 고성에 있는 <백천교중병비>와 선사에 있는 <김수신도비>가 있다.

 

만년에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 안에 거주하였는데, 광주유수도 이곳까지 찾아와 인사드리고, 비록 죄를 지은 자라도 이곳에 들어오면 그의 허락을 얻은 뒤에야 체포할 수 있는 등 이 일대에 큰 세력을 갖고 있었다 한다. 묘와 신도비도 몽촌토성내에 있다.  <자료>

 

초기백제의 몽촌토성유물

 

 유물 굽접시(高杯)
크기 입지름 11.4, 밑지름 8.8, 높이7.2
시대 초기백제
설명 짙은 회청색을 띠는 매우 단단한 토기로 나팔모량의 낮으막한 굽다리를 가지고 있다. 낮고 넓은 몸체는 갑자기 꺾이면서 뚜껑받이 턱을 이루고, 여기에서 다시 꺾여서 곧추선 아가리를 만들고 있다. 몽촌토성에서 많이 출토되는 토기의 한 종류로 원래는 뚜껑이 덮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물 세발토기 (三足器)
크기 입지름 11.7, 높이 4.2
시대 초기백제
설명 고운 바탕흘긍로 빚은 회색연질토기로 질은 상당히 무르고, 표면에는 부분적으로 검은색을 띠는 곳이 있다. 아가리는 곧게 위로 뻗어 있고 뚜껑받이는 약간 들려서 밖으로 튀어 나와 있으나 날카롭지는 않다. 몸체는 비교적 깊고 짧은 다리는 그릇의 중심쪽으로 몰려 있다.

 

 

 유물 계란모양토기 (卯形土器)
크기 입지름 24.5, 높이 39.5
시대 초기백제
설명 점토에 굵은 사람이 많이 섞인 바탕흙으로 빚은 길쭉한 토기로 표면은 적갈색을 띠며 거친 감을 준다. 길쭉한 계란 모양의 몸체는 아가리 바로 밑에서 약간 좁아져서 목을 이루다가 다시 넓어져서 밖으로 벌어지면서 끝난다. 몸체의 윗부분에는 두드린 꼰무늬가 베풀어져 있고 그 아래에는 문살무늬(格子文)가 찍혀 있으며, 바닥에는 그을음이 조금 묻어 있다. 이러한 형태의 토기 역시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이래로 한강유역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백제의 특징적은 토기의 하나이다. 이러한 토기는 주로 액체를 끓이는데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때로는 독널로 이요되기도 하였으며, 이 토기는 독널로 이용된 것이다.

 

 

 유물 계란모양큰항아리 (圓卯形甕)
크기 입지름 23.2, 목지름 19.2, 높이 47.4
시대 초기백제
설명 역시 짙은 회청색의 항아리로 점토질의 바탕흙에 모래가루가 약간 섞여 있어 매우 단단하며, 표면에는 구울 때 재가 녹아서 생긴 자연유(自然釉)가 곳곳에 묻어 있다. 몸체는 앞의 것 보다 훨씬 더 긴데, 전형적인 계란모양의 항아리이다. 목은 점차 벌어지면서 아가리와 연결되는데, 입술 끝부분은 역시 한 줄의 홈이 파여 있다.

 

 유물 원통형그릇받침 (圓筒形器臺)
크기 지름 18.9, 현재높이 54.0
시대 초기백제
설명 잘 정선된 고운 점토질의 바탕흙으로 빚은 회색연질토기 이다. 바닥은 깨어져서 정확한 형태를 알 수는 없지만 나팔모양의 굽받침이 달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가리는 나팔모양으로 벌어져 있어 여기에 항아리 등의 그릇을 올려 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몸체는 좁은 띠에 의하여 네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띠와 띠 사이에는 지름 1cm내외의 구멍이 6줄 뚫려 있다. 이러한 토기는 몽춘토성을 제외하고는 출토례가 거의 없는데, 위에 항아리 등을 올려 놓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제사 등과 같은 특수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소장-


 유물 굽단지 (臺附小壺)
크기 입지름 7.0, 밑지름 8.4, 높이 10.5
시대 초기백제
설명 몽촌토성에서는 2점 밖에 출토되지않은 드문 토기로 짧은 목이 달린 구형의 몸체에 나팔모양의 낮은 굽다리가 달려 있다. 몸체의 가운데에 3줄의 선이 돌아 가며 토기 안밖에 물레질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뚜껑도 함께 출토되었는데 뚜껑의 가운데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으며 이것은 구운 후에 뚫은 것이다.

 

 

유물  뼈로 만든 비늘갑옷 (骨製甲)
크기 가로 44.8, 세로 22.2
시대 초기백제
설명 우리나라에서는 몸촌토성에서 유일하게 출토된 뻐로만든 비늘갑옷이다. 돼지나 사슴뼈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비늘(小札)에 구멍을 뚫어서 서로 엮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비늘갑옷(札甲)은 판갑옷(短甲)에 비해 가볍고 활동성이 컴서, 기마용으로 생각되고 있는데, 쇠로 만든것은 많이 출토되나, 뼈로된 것은 이것이 유일한 예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유물 중국청자 (中國靑磁)접시
크기 입지름 13.6, 밑지름 5.3, 높이 3.3
시대 초기백제
설명 매우 정선된 바탕흙으로 구운 중국계청자접시이다. 굽은 이른바 가권족(假圈足)으로 되어 있으며, 굽바닥을 제외한 전면에 담녹색 또는 연한 쑥색의 유약이 발라져 있는데, 빙렬이 있다. 중국 육조(六朝)시대의 청자로 생각된다.

 

 

 유물

중국서진회유전문도기조각

(中國西晋灰釉錢文陶器片)

크기 가로 3.8, 세로 5.2, 두께 0.6
시대 초기백제
설명 조그마한 조각으로 1989년에 출토된 것이다. 흑갈색의 유(釉)가 발라져 있으며 동전무늬가 찍혀 있다. 또 1985년의 조사에서는 이러한 동전무늬가 찍힌 도기(陶器)조각이 6점이 발견되었는데, 중국西晋에서 제작된 것으로 이것들의 출토로 인하여 몽촌토성의 상한연대(上限年代)가 3세기 중엽 이전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자료:몽촌역사관>

 

 

2008.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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