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서울특별시

서울(석촌동 고분군)

케인스 2008. 1. 27. 00:41

 

                   서울(석촌동 백제고분군) 

 

 

서울 송파구 / 석촌동 백제고분군(石村洞 百濟古墳群)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石村洞百濟初期積石塚)

 

사적 제243호인 백제초기 돌무지무덤[적석총]은 백제가 서기 475년 웅진(熊津, 공주)으로 도읍지르르 옮기기 전까지 도읍지였던 이곳 한강 유역에 만든 백제초기 고분군이다. 백제 초기의 매장 풍습과 함께 당시의 문화, 정치, 사회 등에 관한 흔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곳 석촌동 일대의 낮은 대지 위에는 1916년 당시 돌무지무덤 23기, 흙무덤 66기 등 모두 89기의 고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무덤은 개발로 인하여 거의 다 없어지고 1987년 복원할 당시에는 석촌동 적석총 제3호분과 제4호분의 2기 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발굴 결과 내원외방형적석총(內圓外方形積石塚) 흔적이 확인 되었다. 이곳 고분군에는 제3호분과 같이 왕릉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 반면, 소형 움무덤[토광묘]과 같이 일반관리나 서민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섞여있어, 시기를 달리하며 많은 무덤들이 만들어 진것으로 보인다.  <안내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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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촌동 백제고분군 입구

 

이곳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고분군은 면적 56,100m2이며 석촌동 248번지에 위치하며 제3호분(第3號墳)과 제4호분(第4號墳)은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석촌동 백제고분군 발굴  <자료사진>

 

이곳의 적석총은 잠실지구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발굴 조사되었는데 파괴가 심하여 전체적인 규모는 확인할 수 없었으며, 석촌동 백제고분군 복원공사는 고분복원 6기, 자연석 담장축조 1,062m, 산책로 포장공사와 부대시설공사 등을 1983년 12월30일부터 1991년 5월20일에 걸쳐 시행된바 있습니다.

 

                      

                              석촌동백제고분군(石村洞百濟古墳群) 위성사진

                                        1~5호분(第1~5號墳) 위치 <자료:구글>

 

고분(古墳)이 자리잡은 석촌동(石村洞)의 표고(標高) 20m정도의 남북방향(南北方向)의 얕은 뚝 모양의 대지(臺地)위에는 1917년 당시만해도 60기(基) 이상의 적석총(積石塚)이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지상(地上)에 분형(墳形)을 유지(維持)하고 있는 것은 여기 지정(指定)된 2기(基)(3호(號), 4호(號))뿐입니다. 그러나 4호분(號墳)에서 남(南)쪽으로 240m 위치(位置)에 있는 5호분(號墳) 봉토분(封土墳)과 사이에도 1987년도 발굴(發掘)에 의하면 10여기(十餘基)의 적석총(積石塚), 석곽묘(石槨墓)등 백제초기고분(百濟初期古墳)의 잔구(構)가 남아 있습니다.

이 강동구(江東區) 석촌동(石村洞) 방이동(芳荑洞) 일대(一帶)에는 여러가지 형식(形式)의 고분(古墳)들이 있으나 그중 적석총(積石塚)과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왕족(王族)·귀족(貴族)들의 묘제(墓制)였다고 생각되며 4세기(世紀)에는 고구려식(高句麗式)의 적석총(積石塚)을 짓다가 점차(漸次) 백제식(百濟式)이라고 할 수 있는 변화형(變化形)으로 발전(發展)하여 갔으며 5세기(世紀)에 들어가면서 석실분(石室墳)으로 유행(流行)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자료참조>

 

 

                                         내원외방형적석총(內圓外方形積石塚)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오래 전에 분구, 내부구조, 기단부 등이 파괴되어 흙이 덮이고 그 위에 민가가 들어서 고분의 원형을 밝힐 수 없으나 발굴 조사에 의하여 고분 기단 부의 서남 모서리와 서,북쪽의 석축 기단 일부를 찾아냈다. 찾아낸 고분 기단부의 석축부분을 바탕으로 하여 복원 정비하니 안쪽은 지름 11.40m의 원형을 이루고 바깥쪽은 변 길이 16m의 방형이 되었다.

 

이로서 이 적석총의 기단부 모양은 내원외방형이라고 보게된다. 그리고 안쪽 원형 석축 바닥에서는 적석 토광묘 2기와 석관묘 3기가 드러났는데, 이러한 적석 토광묘와 석관묘 위에 이 적석총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고분에는 상부가 평면 원형이고 하부가 평면 방형인 상원하방분(上圓下方墳)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평면의 모양은 이 적석총의 기단 평면 모양과 흡사하다.  <안내판에서..>

 

           

                                           내원외방형적석총(內圓外方形積石塚)

          

           

                                        내원외방형적석총(內圓外方形積石塚)

 

가로, 세로 16m 안팎의 석축 안쪽에 두 줄로 쌓은 타원형의 석렬이 배열돼 있는 돌무지무덤입니다.

 

                                   석촌동 제1호분(石村洞 第1號墳)

 

일찌기 파괴된 고분 위에 흙이 덮이고 민가가 들어서 상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발굴 조사에서 드러난 적석 상태에 의하여 2기의 고분이 합쳐져 이루어진 쌍분(雙墳)으로 보인다.

 

즉 동서 9.9m, 남북 8.9m 크기의 북분(北墳)과 동서 9.6m, 남북 9.8m 크기의 남분(南墳)이 합쳐진 것인데 합침에 있어 남,북분 사이가 3.7m 떨어지고 그 사이는 진흙으로 메워졌으며 남,북분 서쪽 기단부는 너비 3.2m의 적석단으로 이어졌다.

 

내부 구조는 남분에서만 확인 되었는데 길이 20cm~30cm 크기의 포갠돌로 네 벽을 쌓고 바닥에 10cm 안팍의 포갠 돌 조각, 자갈 등을 깐 석곽 4개가 이었다. 4개의 석곽 중 중앙에 가장 큰 것이 장축을 동서 방향으로 1열을 이루고 놓여있었다. 가장 큰 중앙의 석곽은 길이 약 2.5m, 너비 2.3m이고 1호 소형 석곽은 길이 약 1.8m, 너비 1.2m, 2호 소형 석곽은 길이 1.6m, 너비 1.4m, 3호 소형 석곽은 길이 1.2m, 너비 1.0m이다.

 

그리고 평면 모양이 이 적석총과 거의 같은 것으로는 고구려의 적석총인 중국 길림성 환인현(桓仁縣),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제15호분, 평안북도 송암리(松岩里) 제45호분 등이 있다.  <안내판에서..>

 

          

                                            석촌동 제1호분(石村洞 第1號墳)

 

쌍분이지만 내부 구조는 서로 달라 북분은 석축 내부가 점토로 채워진 백제식 돌무지무덤이지만 남분은 내부에 돌덧널을 가진 전형적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입니다. 학자들은 제1호분을 부부 합장묘로서 북분은 토착계 부인의 무덤이고 남분은 고구려계 남편의 무덤으로 보고 있습니다. 먼저 죽은 부인의 무덤을 만들면서 내부는 부인의 출신에 따라 전통적인 널무덤계로 하되 외부는 나중에 고구려계 남편의 무덤과 쌍분을 만들 계획 아래 돌무지무덤으로 만들어, 뒷날 축조한 남편의 고구려식 돌무지무덤과 합친 것이 아닌가 여기고 있습니다.  <문화유산답사회 자료>

 

          

                                             석촌동 제1호분(石村洞 第1號墳)

 

왼쪽의 적석부분은 남분(南墳), 오른쪽의 적석부분은 북분(北墳)입니다. 북분이 먼저 만들어진 다음 그에 덧붙여 남분이 나중에 축조된 것입니다. 남,북분 사이가 3.7m 떨어지고 그 사이는 진흙으로 메워져 있으며 남,북분의 동,서쪽 기단부는 너비 3.2m의 적석단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석촌동 제2호분(石村洞 第2號墳)

 

제2호분은 복원 정비하기 이전에는 길이 약 25m, 너비 약 20m, 높이 3~4m 크기의 봉우리 모양을 이루고 남아있던 것으로서 봉우리 모양의 분구 기저부 주위에는 민가가 들어서고 돌담이 둘러 있었으며 파괴된 분구 위에는 약 10~30cm 두께로 흙이 덮여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제2호분의 분구 축성은 제1단의 바깥둘레에 1m 정도 높이로 포갠 돌을 쌓고 그 내부에 진흙을 다져 채웠으며 제2단은 제1단의 적석 가장자리에서 얼마쯤 안쪽으로 들어가서 포갠 돌을 쌓은 다음에 그 내부에 진흙을 다시 채우고 제3단은 제1,2단과 같은 방법으로 축성하고서 정상부에서는 둥그렇게 흙을 덮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1단의 동,서,남쪽 면에는 지탱석이 각각 1개씩 남아 있었다. 내부구조의 확인에 있어 동북 1/4구역과 서북 1/4구역 일부만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전모는 알 수가 없고 다만 동북 1/4구역의 바닥에 자갈과 막돌쪼각이 섞어 깔려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깔린 돌 사이에는 붉은 갈색 연질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다.

 

복원 정비된 제2호분의 크기는 제1단은 길이 16.40m, 남북 16.50m, 높이 90cm, 단의 너비 2m이며, 제2단은 길이 동서 12.50m, 남북 12.60m, 높이 90cm, 단의 너비 2m이며, 제3단은 길이 동서8.50m, 남북 8.60m, 높이 70cm, 단의 너비는 정상부에 흙이 덮여 있어 확실하지 않으며 전체 높이는 3.50m이다. 그리고 제1단 바닥 서북쪽에는 장축을 동북~서남 방향으로 둔 목관토광묘 1기가 드러났는데 크기는 길이 2.50cm, 북쪽너비 60cm, 중앙너비 40cm, 남쪽너비 65cm, 깊이 10~15cm이다.

 

이러한 구조 형식의 적석총은 분구. 내부 구조 등 고분 전체를 돌을 쌓아 축조한 고구려 식의 전형적 적석총이 변하여 백제화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판에서..>

 

          

                                              석촌동 제2호분(石村洞 第2號墳)

 

          

                                              석촌동 제2호분(石村洞 第2號墳)

 

          

                                              석촌동 제2호분(石村洞 第2號墳)

 

                                            석촌동 제3호분(石村洞 第3號墳)

 

제3호분은 기원전 후 부터 나타나는 고구려 무덤형식인 기단식 적석총이다. 이 무덤은 약간 높은 지형을 평탄하게 정지작업을 하고 밑테두리에는 매우 크고 긴 돌을 두르고 자연석으로 층단을 이루면서 쌓아올려 3단으로 되었는데, 옛 고구려지역이었던 만주 통구에 있는 장군총에 버금가는 큰것으로, 크기는 동서길이 49.6m, 남북길이 43.7m, 높이 4m 이다. 따라서, 이 무덤은 고구려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유역에 백제를 세웠을 때의 절대권력자의 무덤인 것으로 보인다. <송파구 홈에서..>

 

          

                                            석촌동 제3호분(石村洞 第3號墳)

 

3호분(號墳)은 고구려적석총(高句麗積石塚)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을 뿐 아니라 제1단(第一段)의 크기가 동서(東西) 50.8m, 남북(南北) 48.4m, 현고(現高) 4.5m로서 집안(集安)의 최대적석총(最大積石塚)인 태왕릉(太王陵)(1변 길이 60m) 보다는 작으나 장군총(將軍塚)(1변 길이 30m)보다 큰 초대형급(超大型級) 적석총(積石塚)으로서 왕릉(王陵)임이 분명하며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4)의 릉(陵)일 가능성(可能性)이 큽니다.

이 무덤은 석산(石山)에서 까낸 편마암계(片麻岩系)막돌로 쌓아 올려 현재(現在) 삼단(三段)까지 남아 있으며 제1단(第一段)은 바깥면에는 고구려성벽(高句麗城壁)에서 보는 바와같은 장방상자형(長方箱子形)으로 다듬은 돌을 써서 정면(整面)하였고 제1단(第一段)의 땅에 닿는 부분(部分)에는 넓고 큰 석판(石板)을 한줄 돌려 깔아 북한(北韓)에서 부르는 기단식적석총(基壇式積石塚)의 수법(手法)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이 고분(古墳)은 1974, 1983, 1984년의 3차례에 걸쳐 서울대박물관(大博物館)에 의해 복원(復元) 계획목적(計劃目的)으로 발굴조사(發掘調査)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서남(西南)쪽 부분(部分)에 2m×1.5×0.8m((길이)의 석곽(石廓)이 확인되었고 제1단(第一段)의 동벽부분(東壁部分)에서는 장군총(長軍塚)에서 보는 바와 같은 지탱석(支撑石)이 넘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또 적석(積石) 사이에서 4세기경의 중국동진(中國東晉)의 황연유반구병구부(黃緣釉盤口甁口部)가 발견(發見)되었습니다. <자료참조>

 

          

                                              석촌동 제3호분(石村洞 第3號墳)    

 

          

                                              석촌동 제3호분(石村洞 第3號墳)

 

           

                                            석촌동 제3호분(石村洞 第3號墳)

  

석촌동 제3호분(石村洞 第3號墳)과 제4호분(第4號墳)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백제시대 초기 무덤으로 추정되는 이 적석총은 백제가 가장 왕성했던 4세기경의 대외관계라든가 삼국시대의 문화연구에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고분입니다.

 

                                            석촌동 제4호분(石村洞 第4號墳)

 

한강변에 쌓은 백제 때의 돌무지무덤[積石塚]이다. 평면은 정사각형이며, 가장 바깥쪽 제1단의 한변의 길이는 17m이다. 전체 높이는 약 3m로 추정 복원하였다. 겉모양은 깬돌을 가지런히 3단으로 쌓아올린 돌무덤이지만, 안쪽은 흙으로 채워져있다. 그래서 원래는 흙무덤이던 것을 나중에 겉모양만 돌무지무덤으로 바꾸었다고 보기도 한다. 제2단의 동쪽 측면에는 5개의 큰 자연석이 비스듬히 기대어 세워져 있으며, 북쪽 측면에도 1개가 남아있다. 이러한 형식은 고구려의 장군총, 태왕릉과 닮은 꼴이다.

 

발굴조사 이전에 이미 파괴된 탁인지 무덤 내부에서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각 단의 적석 사이에서 각종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대체로 4~5세기에 만든 무덤으로 추정한다. <자료: 몽촌역사관>

 

          

                                            석촌동 제4호분(石村洞 第4號墳)

 

석촌동 제4호분(石村洞 第4號墳)은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석촌동 제4호분(石村洞 第4號墳) <자료:역사박물관>

 

           

                                            석촌동 제4호분(石村洞 第4號墳)

 

제4호고분에서는 백제 초기의 연질토기 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었으며, 이 고분 주위에서는 금으로 만든 세환식 귀고리도 한점 발견되었습니다.

 

 

 

    

                                              석촌동 제2,3,4호분 전경 <자료사진>

 

                

                                                                석촌동 제2,4호분  <자료사진>

 

                                   석촌동 제5호분(石村洞 第5號墳)

 

분구(墳丘)를 흙으로 쌓은 봉토분(封土墳)으로서 유존 상태가 양호하고 또 이 일대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봉토분이므로 보존하기 위하여 분구 일부만 발굴 조사하고 내부 구조는 확인하지 않았다. 분구는 내부 구조위에 흙을 다져 쌓아 덮고 그 위에 강돌과 막돌을 섞어 한벌 깐 다음에 다시 그 위에 흙을 엷게 덮은 즙석분구(葺石墳丘)이다. 분구의 현재 크기는 지름 17m, 높이 3m인 원형봉토분이다.

 

이와 흡사한 즙석 분구의 봉토 분인 가락동(可樂洞) 제 1,2호분이 이 고분에서 동북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2기의 고분은 1969년의 발굴 조사에서 그 내부 구조가 화긴 되었는데 가락동 제1호분은 토광(土壙) 안에 목관(木棺)을 안치한 목관토광묘(木棺土壙墓) 형식의 것과 옹관묘(甕棺墓) 형식의 것이 함께 묻힌 구조형식의 고분이었다. 가까이에 있고 거의 같은 시기인 백제 전기 2기의 고분으로 미루어 석촌동 제5호분도 그 내부 구조는 목관토광묘 형식의 것으로 추측케 된다.  <안내판에서..>

 

          

                                           석촌동 제5호분(石村洞 第5號墳)

 

    

                                           석촌동 제5호분(石村洞 第5號墳)

 

제5호고분은 완전하게 발굴, 조사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묘곽의 구조와 유물에 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즙석봉토분안내 <자료:역사박물관>

  

                                     석촌동 제2호 토광묘(土壙墓)

 

이 모형 토광묘는 이곳에서 북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제2호 토광묘의 모형이다. 석촌동 제2호 토광묘는 생토층을 파서 묘광을 만들었는데 평면은 장방형이고 장축은 동남쪽에서 서북서로 두었다. 벽면은 바닥에서 위로 향하여 약간 경사졌고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바닥의 동쪽에는 회백색 목짧은 단지 1개가 놓여 있었으며 묘광 바닥에서 약간 위인 흙속에서 지름 1.6~1.7cm 크기의 민 금귀고리 1개가 드러났다.

 

토광묘의 크기는 길이 223cm, 너비 76cm, 깊이 21cm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형식의 토광묘는 제3호분과 근접한 동쪽 지점에서 10여기가 드러났는데 적석총 바닥보다 아래층에 위치한 점으로 미루어 토광묘는 적석총보다 앞선 시기의 묘제였음을 짐작케 한다. <안내판에서..>

 

                      

                                                 석촌동 제2호 토광묘(土壙墓)

 

                                              석촌동 제2호 토광묘(土壙墓)

 

토광묘(土壙墓)를 움무덤 또는 널무덤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석촌동 제3호 토광묘(土壙墓)

 

제3호 토광묘는 표토밑 70cm에서 드러났고 평면은 네모서리가 둥그스럼한 장방형이며 장축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두었다. 벽면은 수직이고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바닥의 북서쪽 모서리에 회청색 목짧은 단지 1개가 놓여 있었다. 묘광의 크기는 208cm. 너비 58cm. 길이 26cm이다.

 

이 모형 토광묘는 원형 토광묘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원형 토광묘에 방수시설을 하고 그 바로 위 50cm 되는 곳에 원형 그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형식의 토광묘는 이 지역에서 3기가 드러났다. <안내판에서..>

 

                       

                                                석촌동 제3호 토광묘(土壙墓)

 

                       

                                                      회화나무(보호수)

 

석촌동 백제고분군 경내에 있는 수령 235년, 높이 12m, 둘레 2.3m인 이 회화나무는 1989년 10월24일 보호수로 지정되었습니다. 사슴 머리에 달린 뿔같은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석촌동(石村洞)의 유래


이곳에 돌이 많으므로 돌이 많은 마을 곧 [돌마리]라고 하던 것이 한자음으로 석촌동(石忖洞)이 되었다. 현재도 송파동, 삼전동, 방이동, 가락동 일대의 주민들은 석촌동을 [돌마리]라고 흔히 부른다. 돌이 많은 이유는 병자호란때 조선을 침입한 청군이 이곳에 돌을 옮겨다 진터를 만들었기 때문에 돌이 많게 되었다고 전한다.

 

진텃벌(陣攄坪)
     현재 석촌동 고분이 있는 일대를 말하며 병자호란때 청군이 남한산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을

     치면서 붙여진 이름이며 남한산성 밑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백제고분
 
백제의 역사는 한강 주변인 석촌동 일대, 서울 한성시기, 공주 웅진시기, 부여 사비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에 따라 고분의 유형도 서울 일대의 전기고분, 공주일대의 중기고분, 부여일대의 후기고분으로 나눠 본다. 백제고분은 적석총과 봉토분으로 크게 나누어지고 봉토분은 다시 석실분, 토광묘, 옹관묘, 그외 전축분(塼築墳)이 있다.


     묘(墓) : 흙을 성토(盛土)하지 않는 무덤으로 서민들이 사용했다. 분(墳)은 없고 壙穴의 형태로 조영

               (造營)된 것이다. 
     분(墳) : 흙을 높이 쌓아 올려 지상에 봉분을 조성한 형식, 대릉(大陵)이다. 
     총(塚) : 고대(高大)한 묘(墓), 분(墳)과 같다.
 

고분의 유형과 형태

 

     돌무지 무덤(積石塚): 시체를 땅위에 놓고 돌로 덮어 버리는 것.
     구덩무덤(土葬墓): 구덩이를 파고 흙으로 덮는 것. 무덤위에 둥글게 흙을 쌓은 것을 封土라 한다. 
     나무곽무덤(木槨墓): 구덩이 안에 기둥을 세우고 나무 네벽과 천장을 짠 무덤. 이 곽은 바깥널이라

            는 뜻이며 곽이 커져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정도이고 출입구가 생기면 방이라고 부르게 된다. 
     돌널무덤(石箱墓): 구덩이의 네 군데를 넉장의 돌널로 짠 무덤.
     돌무덤(石槨墓): 돌널 대신 막돌로 쌓은 무덤.
     구덩식 돌곽무덤(竪穴式 石槨墓): 시체를 위에서 넣는 무덤.
     앞트기식 돌곽무덤(橫口式 石槨墓): 돌덧널의 세 벽만을 쌓아 시체나 널을 옆으로 넣은 다음 마지

            막 벽을 쌓는 식.
     앞트기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 돌곽의 너비와 높이가 모두 커져서 사람이 드나들 수 있고 인구

            와 널길( 挻道)가 있는 무덤. 널이 들어가는 널방(현실, 주실)에는 껴묻거리를 넣기위해 딸린

            방[副室] 또는 딸린곽[副槨]이 있고 중국에서는 피장자의 일흠을 돌에 새긴 지석을 넣는 것이

            전통이다.

 

 

 

           

  

          

 

초기백제 석촌동유물

 

 짧은목항아리 (短頸壺)
 
바탕흙은 비교적 잘 정선되어 있으며 약간 낮은 온도에서 구어져서 바닥쪽으로 갈수록 질이 무르다. 목은 안으로 약간 기울면서 짧게 곧추서서 끝나고, 어깨는 매우 벌어져 있다. 바닥은 아가리 보다 약간 넓은데 점토판을 안쪽에서 붙여 만든 것으로 편평하다. 이 토기는 회색계통이지만 약간 검은색을 띠는데, 이와 비슷한 모양의 토기가 가락동 2호 무덤에서 출토된 예가 있으며, 가락동2호 무덤의 것은 반들거리며 흑색으로 되어있다.
- 입지름9.9cm, - 밑지름13.2cm, - 높이16.5cm
 
 
 긴목항아리 (廣口長頸口形壺)
 
고운 점토질의 바탕흙에는 가는 모래가 약간 섞여 있어서 매우 단단하게 구워져 있으며, 표면은 회청색을 띤다. 몸체는 약간 긴 공모양을 하고 있으며, 나팔처럼 널게 벌어진 아가리가 이러한 토기의 특징이다. 목의 가운데에 한줄의 돋을띠(突帶)가 돌려져 있다. 이 토기 역시 초기백제지역에서 흔히 출토되는 전형적인 백제토기로 목에 돋을 무늬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약간 늦게 출현한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 입지름18.1cm, - 최대폭24.1cm, - 높이28.2cm
 
 
 작은바리 (小刑鉢)
 
붉은색 계통의 토기이나 회흑색을 띠는 부분도 있는데, 바탕흙에는 가는 모래가 많이 섞여 있어서 그릇의 표면은 거친 느낌을 준다.
편평한 바닥에서 몸체는 조금씩 벌어지며서 위로 이어져서 그대로 아가리를 이룬다.
표면에는 전혀 아무런 무늬도 없다.
 
 
 깊은바리 (深鉢刑土器)
 
적갈색 연질로서 바탕흙에는 모래가 많이 섞여 있어서 그릇의 표면은 매우 거칠다.
목은 짧게 벌어지며 발달된 입술로 마무리되며, 점차 벌어지는 어깨는 입지름에 비해 비교적 길쭉한 몸체외 연결되고 바닥은 편평하다.
몸체에는 돗자리무늬(繩席文)가 베풀어져 있는데, 이러한 토기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에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비교적 오랜 기간동안을 같은 전통을 가지고 존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입지름15.0cm, - 밑지름11.5cm, - 높이15.4cm
 
 
 병 (甁)
 
편평한 바닥에 양파모양의 몸체를 하고 있으며, 짧고 목은 밖으로 벌어지면서 둥글게 말려서 끝난다.
바탕흙은 잘 정선되어 있고 표면색은 짙은 회청색을 띠나 바닥의 일부는 구워질때 불을 덜받아서 적갈색을 띠고 있다.
- 입지름15.0cm
- 밑지름11.5cm
- 높이15.4cm
 
 
 
 금제달개 (金製瓔各)
 
제3호 돌무지무덤 주변에서 출토된 것으로, 얇은 원형 금판에 지름1mm가량의 작은 구명을 뚫고 금실을 꿴 것이다.
금관 등에 달았던 장식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금장식의 출토로 인하여 이 무덤에 묻혔던 인물의 신분을 왕이나 왕족 중의 하나로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 지름0.8cm, - 두께0.2cm
 
 
 옥을 갈던 돌 (玉刑石)
 
각섬암(角閃岩)제의 네모난 석판으로 윗면 7개의 홈이 파여져 있다.
현재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파손되지 않은 곳은 잘 갈아져 있으며 있는 홈에 옥 등을 갈아서 가공하던 돌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러한 옥을 갈던 돌이 발견된 예가 없으나 일본의 경우 굽은옥(曲玉)을 갈았던 돌이 발견되고 있다.
- 지름22.5cm, - 폭23.2cm, - 두께6.5cm
 
 
 
 금제고리 (金製環)
 
원형 또는 타원형의 고리들인데, 전체가 다 금이 아니고 껍질만 금으로 된 것이다.
심의 재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청동으로 추정되며, 귀걸이의 한 부분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 지름1.6~3.2cm, - 굵기0.3~0.5cm
 
 철제낫 (鐵鎌)
 
철판을 두드려서 만든 것으로 끝은 약간 구부려서 뾰족하게 하였으며, 자루가 부착되는 곳은 철판을 구부려 말아서 자루를 묶을 수 있게 하였다.
자루는 날과 직각이 되게 묶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이것이 이른 시기에 출토되는 낫의 특징이다.
자루가 있던 부분에 부식된 목질이 붙어 있는 것도 있다.
- 길이22.9~25.4cm, - 폭2.9~3.8cm, - 두께0.5~0.8cm
 
 
 투겁도끼 (鐵斧)
 
철판을 두드려서 날을 만들고 자루를 꽂는 곳은 이것보다 더 얇게 두드려펴서 둥글게 말았다.
날은 부채꼴로 되어 있으며, 자루를 끼웠던 투겁은 단면이 약간 찌그러진 원형인데, 내부에 자루가 부식된 채로 약간 남아 있다.
- 길이10.5cm, 13.6cm, - 날폭3.6cm, 6.4cm, - 두께3.5cm, 4.8cm
 
 
 돌추 (石錘)
 
조그만 종모양의 돌로 된 추모양의 석기이다.
석재는 현무암제로 매우 가벼우며 표면은 매우 거친데, 용도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위쪽에 구명이 뚫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무엇엔가 매달아 사용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 높이7.7cm, - 단면5.3×3.9cm, - 무게160g                           <자료:송파구청>


 

2008.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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