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서울특별시

서울(삼전도비)

케인스 2008. 1. 27. 00:39

 

                       서울(삼전도비) 

 

 

서울 송파구 / 삼전도비(三田渡碑)

 

                                             

                   

                                                     삼전도비(三田渡碑)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인 인조 17년(1639)에 청(淸) 태종의 군영이 있던 한강변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한 사실을 기록한 유적비입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는 1963년 1월21일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으며, 전체높이 5.7m, 비신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으로 비신은 대리석, 귀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곳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三田渡碑)라 불리고 있으며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 또는 한의비[汗之碑]라고도 하는 이 비(碑)의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입니다.

 

비의 앞면 오른쪽은 만주문자 20행, 왼쪽은 몽고문자 20행이 있고, 뒷면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하나의 비 안에 세 나라 문자가 들어 있는 국내 유일한 비로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유물입니다.

 

이 비는 병자호란 3년 뒤인 인조 17년(1639) 12월에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이 글을 짓고, 글씨는 오준(吳竣),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고 전해집니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한 사실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조선에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등의 정치적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

 

 

 

            

                                                   삼전도비 소공원 전경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원래 한강변 삼밭나루터 항복 당했던 자리에 세웠으나 청일전쟁후 고종32년(1895)에 이 비를 강물속에 쓰러뜨렸으나 그후(1913) 일제가 우리민족이 다른민족에게 예속되어 왔던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다시 세워 놓았습니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이 비를 지역주민들이 땅속에 매몰하였다가 ,1963년 홍수로 그 모습이 드러나자 문교부에서 원위치보다 조금 동남쪽인 석촌동으로 옮겼다가 송파대로 확장으로 현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서울시는 후세들에게 패배와 치욕의 사실(史實)을 그대로 보여 교훈이 되도록 비 일대에 500평 규모의 소공원을 조성, 여기에 당시의 모습을 그린 부조비(浮彫碑)를 세워 1983년 5월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송파구청 홈에서..>         

 

                                        삼전도비(三田渡碑)와 부조비(浮彫碑)

 

오른쪽의 석비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내세우기 위해 세운 전승비(戰勝碑)인 삼전도비(三田渡碑)이며, 왼쪽은 당시 치욕의 현장을 새겨놓은 모습을 그린 부조비(浮彫碑)입니다.

 

          

                                   인조의 항복 장면의 부조비(浮彫碑)

 

임금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 마련된 수항단(受降檀)에 올라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를 올렸습니다. 아프지만 엄연한 우리의 역사입니다. 부조비(浮彫碑)에는 당시 치욕의 현장을 새겨놓아 후세들에게 역사적인 교훈을 주고있습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인조의 항복

 

청나라는 만주지역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이다. 여진족은 원래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작은 부족이었으나 명나라 국운이 쇠퇴하는 틈을 타 누르하치는 여러부족의 세력을 통합하여 후금(後金)을 세운다. 이에 명나라는 팽창하는 후금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조선은 임진왜란을 치른 뒤의 피폐한 상황 속에서도 고민 끝에 광해군11년(1619) 만주 지역으로 군사를 파병해 후금과 대치하기에 이른다. 이를 빌미로 후금은 인조5년(1627)에 쳐들어와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이르킨다. 전후 처리로 두 나라는 화약(和約)을 맺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어서 양국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한다. 그러다가 인조14년(1636) 병자년 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연호도 숭덕(崇德)이라 정하면서 조선에 신하의 예를 갖추도록 강요하기에 이른다. 두 나라의 관계가  더욱 불편해졌음은 물론이다.

 

그런 와중에 그해 3월 승하한 인조의 비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의 조문을 위해 청의 용골대(龍骨大), 마보대(馬保大) 등이 조선에 파견되면서 역사는 한차례 광풍을 몰고 오게 된다. 이들은 쥐환 길에 조선 조정에서 변장(邊將)들에게 내린 청을 배척하라는 유문(諭文)을 입수했으며, 그 사실을 알게된 청 태종은  같은 해 12월 직접 1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청군의 선발대가 한양으로 입성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항쟁을 꾀하였다. 그러나 청군이 산성을 포위하고 군량의 보급로와 지원병을 차단하자 무력해진 왕은 이른바 척화삼사(斥和三士)인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을 적진으로 보냈으며, 이듬해 1월30일에는 결국 청군이 머물고 있던 한강 남쪽의 삼전도로 나와 수항단에서 무릎을 꿇고 치욕의 강화를 맺는다. <자료:문화유산답사회>

 

                       

                                                三田渡碑(삼전도비) 전면

 

인조 14년(1636) 12월9일 청 태종은 청군 7만, 몽고군 3만, 漢軍 2만 등 1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인조는 15일 새벽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으나 실록에서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 산길이 얼고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했으므로 상이 말에서 내려 걸었으나 끝내 도착할 수 없을 것을 헤아리고 마침내 성으로 되돌아왔다,라고 적은 대로 남한산성으로 되돌아갔다. 한 겨울의 남한산성은 농성 장소로 적당치 않았다. ‘연려실기술’에서 ‘장수와 군사가 모두 비를 맞아 젖은 가운데 심하게 얼었다’라고 쓴 것처럼 동사자 잇따랐다. 기다리던 구원군은 오지 않았고 인조는 이듬해 1월 30일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三田渡(지금의 송파구)로 나가 황옥을 펼치고 앉은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청나라는 ‘대청황제공덕비’ 건립을 요구했고, 인조는 비변사의 추천을 받아 장유.이경전.조희일.이경석에게 비문을 짓게 했으나 모두 사양했다. ‘인조실록’은 국왕이 강권하자 “세 신하가 마지못해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거칠게 지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했다(15년 11월 25일)”라고 전한다. 청나라는 장유와 이경석의 글 중에서 이경석의 글을 고쳐 사용하라고 명했다.

 

인조는 이경석에게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를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의해서 판가름 난다” 라며 고칠 것을 명했다. 이경석은 일부를 고치고는 공부를 가르쳐 준 형 이경직에게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경석은 나라의 보존이란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명예란 小節을 버린 것이다.  <자료: 이덕일 舍廊>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09년 가을에 동경제국대학의 세키노 타다시 교수가 보았던 삼전도비의 모습이 <한홍엽>에 수록되어 있다. 이 비석은 그저 넘어져 있었을 뿐 흔히 잘못 알려진 것처럼 매몰된 상태는 아니었다. <자료: 이순우님>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유리원판자료에 포함되어 있는 '삼전도비(도괴상태)'의 모습이다. 사진촬영시점은 분명하지 않으나 <한홍엽>에 수록된 때 보다는 후대인 것은 분명하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삼전도비가 복구재건된 것은 1917년 9월이었으므로, 아마도 그 직전 무렵의 모습을 담은 것이 아닌가 한다.  <자료: 이순우님>

 

                            

 

조선총독부는 청일전쟁 이후 조선정부가 일부러 넘어트린 삼전도비를 구태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이러한 보호정책은 이 비석을 조선의 보물로 지정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자료: 이순우>

 

                                                    이수(首, 지붕돌)

 

비석은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조각한 용머리 장식과 비문을 새긴 비문을 새긴 비몸이 하나로 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귀부(龜趺, 거북받침)

 

거북받침대는 네모난 받침대 위에 놓여 있습니다. 비 머리의 이수(首), 받침돌의 귀부(龜趺) 조각도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가장 우수한 조각의 하나로 꼽힙니다.

 

                                                          비석의 뒷면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라는 글씨가 또렷한데 여이징(呂爾徵)이 썼다고 전해집니다.   

 

   

                                                   귀부(龜趺)의 뒷모습

 

                      

                                         삼전도비 옆에 있는 또 다른 돌거북   

 

     

                                        

삼전도비 옆에 있는 또 다른 돌거북의 정체는 무엇일까?  
 

송파 석촌동의 역사공원 구역에 옮겨진 삼전도 비석의 바로 옆에는 비록 비신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약간 작은 크기의 돌거북 하나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원래의 삼전도비와 무관하다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적어놓은 기록도 있다. 하지만 한눈에 보더라도 그 크기만 약간 다를 뿐 세부적인 표현양식이나 조각수법이 거의 흡사하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연관성을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렵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삼전도비의 조성과 관련된 문헌상의 기록에 비춰 보더라도 여러 차례 석물(石物)이 준비되었다던가 조성계획이 때때로 변경된 흔적이 확연하다는 점에서 그 당시에 만들어진 잔여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더 큰 규모로 비석이 조성되기를 바라는 청나라 측의 변덕으로 원래에 만들어진 귀부(龜趺)가 용도 폐기되면서 남겨진 것이 아닌가도 싶다.

 

실제로 이 돌거북의 존재에 대해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제출한 <대정5년도 고적조사보고>에서는 위와 같은 취지의 설명문을 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경성전기에서 발행한 '경성하이킹 코스 제3집' <풍납리토성> (1937년)에도 작은 귀부가 삼전도비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적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다만 여기에는 "부락민의 말로는 1925년 홍수에, 혹은 그 이전에 작은 귀부에 있던 비신이 행방불명된 바 있다"는 증언을 덧붙이고 있으나, 그다지 신빙성 있는 얘기로 들리지는 않는다. 하나 덧붙이자면 이 책에는 '삼전도비와 10여 발짝 떨어진 곳에 놓여진 작은 돌거북'의 사진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것을 참고할 만하다고 하겠다. <자료: 이순우>

 

 

참고자료

 

 

▶ 송파진(松坡津) 그림

          

           

                               송파진(松坡津), 영조17년(1741) 겸재 정선작품

 

송파진은 지금 송파대로가 석촌호수를 가르고 지나서 생긴 동쪽 호숫가에 있던 나루터입니다. 그런데 1970년 송파나루 앞으로 흐르던 한강 본줄기를 매립하고 성동구 신양동 앞의 샛강을 넓혀 한강 본류를 삼으니 이 일대의 모습은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지금 송파나루의 흔적은 메우다 남긴 석촌호숫가에서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림의 오른쪽에 붉은 기둥에 청기와를 올린 비각[화살표]이 있는데, 이 비각 안에 바로 삼전도비가 처음 세워져 있었습니다.

      

                                   

 

          

▶ 삼전도비 훼손 사건

   


                                   훼손된 삼전도비  <사진자료: 동아일보>

 

2007년 2월 3일 오후 9시40분 경 백모 씨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 삼전도비 공원을 찾아 붉은색 스프레이를 이용해 비 몸체인 비신(碑身)의 앞뒷면에 '철', '거', '병자', '370(인조가 항복한 지 370년이 지났다는 의미)' 등의 글씨를 써 놓았습니다. 안내판에도 청녹색 스프레이를 이용해 'X'라고 낙서를 했습니다. 그러나 치욕의 역사를 지운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치욕의 역사에서 역사의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삼전도비 위치

 

                                     

 

 

삼전동(三田洞)의 유래


삼전동 동명 유래는 이 마을에 유일하게 밭이 셋 있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 이곳은 포구로서 서울근교의 5진(津)중의 하나였는데 다른곳에는 조수가 올라왔으나, 이 세 곳에는 물이 밀리지 않아 밭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자연부락 이름은 「삼밭게」또는 「三田渡」라 불렸고, 삼(麻)을 심었기 때문에 마전포(麻田浦)라고도 하였으며 또, 벌판에 옛날 장승을 세웠던 곳이라 하여 장승골 또는 장승벌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 삼전도는 세종 21년에 신설되었는데 한강나루, 노들나루와 함께 경강삼진(京江三津)의 하나로 진부(津夫)10인이 배속되었으며 이후 삼전도(三田渡) 의 기능이 커지면서 삼전도승이 광진의 나루도 관장하였다. <송파구 홈에서..>

   

삼전도비 비문 내용

 

                                                   대 청 황 제  공 덕 비

 

대청국의 숭(고귀함) 덕(유덕함)의 원년 겨울 12월에 어질고 너그럽고 온화한 성 황제 화평을 깬 것이 우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크게 성내고 군사의 위력 來臨하여 동녁 향해 불붙듯이 확하고 달려와도 모두 두려워 대항하지 못하였다. 그 때에 우리의 과군(寡君) 남한에 자리를 정하고 두려워하며 저어하며 봄 여름에 밟고 날 밝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오십 째 날 동 남 제 도로의 군사 속속 격파되었다. 서 북 장군들 산 골짜기에 피해서 후퇴하기 멀리한 뒤 한 번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성의 안, 곡식 또한 다 떨어졌다. 그 때문에 대 군사 성을 쟁취하기는 찬 바람 가을 철의 나무의 잎을 떨어뜨리는 것같고 불의 화염에 새의 깃털 을 태우는 것 같은 것이었다.

 

성 황제 죽이지 않은 것을, 상(上) 덕(德) 전유하는 것을 긴요한 일 삼고, 황지 내려 깨우쳐 가로되 항복해 올 경우에는 너를 온전케 하리라. 항복해오지 않을 경우에는 몰살시키겠다고 말하였다. 그로부터 영아개대 마복탑 제 장군들이 성 황제의 황지를 받고 뒤로 앞으로 전하여 말하러 다니는 고로 우리의 과군 문무의 제 대신들을 모이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대국을 향하여 화친하고서 10년 되었다. 나의 어두움 어둑함 때문에 하늘의 정벌을 서둘게 하여서 만 성의 백성이 우환에 봉착했다. 이 죄 나의 한 몸에 있다.

 

성 황제 도리어 죽이지를 차마 못하고 이와같이 깨닫게하는 마당에 내 어찌 두려움 없이 나의 상 중조의 사직을 온전케 하며 나의 아래 백성을 보호하기위해 황지를 받아 가지지 않겠는가?  말하고 나니 제 대신들 칭양하며 복종하여 즉시 한 몇 십 기를 이끌고 군사의 앞에 와서 죄 를 받으려할 적에 성 황제 예를 갖추어 인애하며 은혜로써 애무하며 만나면서 즉시 심복(심장)을 털어내놓고 이야기했다.

 

상내려 준 은혜 수행하는 대신들에게 두루 미치었다. 예행 마친 뒤 즉시 우리들의 과군을 뒤로 도 성에 돌아가게하고 일어서면서 순 식간에 남으로 간 군사를 거두고 서로 물러가며 백성을 무양하고 전지(田地)의 일을 권장하는 고로 먼 곳 가까운 곳 흩어진 백성 모두 다시 와서 산 것 큰 은혜 아닌가?

 

소국 상국에 죄진지 오래되었다. 기미년 도원수 강홍립을 파견하여 명국에 군사 구조하러 간 것 격파되어 나포된 뒤 태조 무 황제 다만 강홍립 등 몇 사람을 유치시키고 다른 사람을 모두 뒤로 돌려보냈다. 은혜 이 보다 더 큰것이 없다. 그러함에도 소국 다시 혼미하여 깨닫지 못하는 고로 정묘년 성 황제 장군을 차견하여 동쪽 땅을 토벌하러 왔을 때에 우리의 군주 대신 모두 바다 섬에 피하여 들어가서 사신을 차견하여 화친하자고 청했다.

 

성 황제 말을 취하여 형제의 나라 되게 하고 땅 강토를 온전케 하였다. 강홍립을 도리어 뒤로 되돌려보냈다. 이로부터 뒤로 행례(行禮) 소홀함이 없었다. 사신 보내는 일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은혜 없이 경솔한 의론 떠올라서 분규의 계제가 이루어져 소국 변방 강역의 대신들에게 겸손하지 못한 말로 글 써서 보냈다. 그 글을 사신으로 온 대신들이 입수하여 가지고 갔다. 성 황제 오히려 관대히 가지고 가면서 먼저 밝은 요지(明旨)를 내려 출병할 때를 미리 약정하여 거듭 거듭하여 깨우쳐 준것 귀를 잡고 교훈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한 것이다. 그러함에도 또 기꺼이 복족하지 않은 것 소 국의 제 대신들의 죄 더욱 면치 못하게 되었다.

 

성 황제의 대군 남한을 포위하고 또 황지 내려 먼저 한 갈래(一支) 군사 보내어 강(江) 도(都)를 취하고 왕의 제자(諸子), 비(처) 대신들의 부인, 자식들 모두 나포케한 뒤 성 황제 제 장군을 향해 범하지 말라, 침해하지 말라고 계고하고 우리의 관원들 대감들을 간수(看守)시켰다. 그런 대 은혜를 미치게 하는고로 소국의 군주 대신, 나포된 아들, 부인 모두 옛 상례대로 되니 서리, 눈 변하여 봄이 되고 건조한 가뭄 굴러 때 맞는 비 된 것같았다.

 

소국의 멸망했던 것을 개수하여 존속케했다. 衆祖 사직 절단된 것을 다시 승계하였다. 동쪽 땅의 주위 수천리의 사람 모두 살게하고 잘되게 한 은혜에 둘러쌓였다. 이것은 진실로 옛날의 법례에서 보지못했던 것이다. 한수 물의 위쪽 삼전도 땅의 남쪽 곧 성 황제의 도래한 땅이다. 壇,位가 있다. 우리의 寡君 部員의 사람에게 말하여 단, 위를 증첨하여 높이 크게 확장시키고 또 돌을 가져와서 비 세워서 영원히 존속케 하며 聖 皇帝의 공덕을 하늘 땅 과 함께 하고싶노라 하고 旌表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소국의 만대 바꾸며 영구히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 뿐만 아니라 대국의 어진 명성 武威의 行止에 먼곳으로부터 밀어 모두 복종하는 것 또한 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비록 천지의 큼을 글짓고 일월의 밝음을 그렸다 해도 그것의 만에 일도 비교되지 못하리라. 조금 조잡하게 지어 새겨 정표(旌表)하는 것이다. 하늘은 서리 이슬을 내리어 만물을 황량하게 하기도 하고, 살아나게 하기도 한다. 성 황제 이에 맞추어 무와 덕을 함께 傳命한다. 성 황제의 동쪽 땅을 정벌한 십만 군사 우루루 하니 많았고, 호비수(虎비獸)와 같았다. 서,북국 모두 표미창(豹尾槍/표범 꼬리창)을 잡고 앞장 될 것을 다투는 것 그 무위 매우 두려웠다.

 

칙 언 十行의 下書 위엄 있으며 부드러웠다. 본시 혼미하여 알지못해 스스로 화를 구했다. 성 황제 의 明旨 도래하는 고로 자고서 방금 깨어난 것 같았다. 우리의 왕 취하여 강복한 것 위세에 두려워한 것 만이 아니다. 덕에 따라간 것 이다/  성스러운 거, 황제 어엿비여겨 은혜 미치게 하며 예를 갖추어 좋은 얼굴 웃는 모습으로 표미창을 거두고 좋은 말, 가벼운 피단조(皮端조) 상내릴 적에 城의 남 녀 노래하며 칭양한 거 우리의 왕의 얻어 돌아온 것 성 황제의 준 것이다. 성 황제 우리의 백성을 살리자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우리의 문란하게 되고, 流散된 것을 가련히 여겨 우리의 田地의 일을 권장했다.

 

패괴된 나라 옛 그대로 된 것이 이 새 壇의 연고이다. 마른 뼈에 다시 살이 소생케하고 겨울 풀의 뿌리 다시 봄 철을 만난 것 같이 되었다. 큰 강의 머리 곁에 높고 큰 돌 세워서 삼한의 땅 만세되는 것 성 황제의 어짐에 있다.     숭 덕 의 제4 년 十二月 초 8일에 세웠다.   <자료: naver.com>

 

 

 

2008.01.26

'답사와 여행(국내) > 서울특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방이동 고분군)  (0) 2008.01.27
서울(석촌동 고분군)  (0) 2008.01.27
서울(보도각 백불)  (0) 2008.01.19
서울(홍지문)  (0) 2008.01.19
서울(세검정)  (0) 2008.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