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서울특별시

서울(세검정)

케인스 2008. 1. 19. 23:41

                       서울(세검정) 

 

 

서울 종로구 / 세검정(洗劍亭)

 

 

                  

                                             세검정(洗劍亭)

 

1977년 복원되었으며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번지 6호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정자는 원래 연산군 때(1500~1505년경) 탕춘대(蕩春臺)를 마련하고 유흥을 위해 세웠다고도 하며, 일설에는 숙종 때 북한산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병영 총융청(摠戎廳)을 건립하였는데 이곳에 있는 군인들의 휴게시설로 세운 것이라고도 한다. 그 후 영조24년(1748) 중건 하였으며 이 때 세검정 현판을 달았다.

 

인조원년(1623) 인조가 이귀(李貴), 김류(金류) 등과 함께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성공한 후 이 정자 아래로 흐르는 홍제천(모래내) 맑은 물에 칼을 씻었다고 하여 '세검정(洗劍亭)'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세검(洗劍)'이라 함은 칼을 씻어 칼집에 넣고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세검정'은 인조반정을 의거로 평가하여 이를 찬미하는 상징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941년 부근에 있던 종이공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기다란 주춧돌 하나만 남아있던것을 1977년 5월에 복원한 것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세검정도(洗劍亭圖)>를 보면, 정자의 받침 돌기둥이 높직한 누각 형식의 건물로, 도로 쪽을 향하는 면에는 나지막한 담장을 돌리고 입구에 일각문을 두었으며 건물의 측면으로는 편문(便門)을 두어 개울로 내려갈 수 있도록 묘사되어 있으나 현재 이런 시설물은 없다. 그리고 여느 정자와 달리 'ㄱ자' 모양의 6각 정자로 되어있다.  <안내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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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검정 현판

 

                      

 

세검정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세검정을 둘러싼 비봉, 문수봉, 보현봉, 북악산, 구준봉 등 화강암봉과, 거기서 발원하는 맑은 물줄기가 모인 홍제천이 이루어 낸 경치는 빼어난 곳이었다 하겠습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 1676-1759)이 부채에 그린 세검정도(洗劍亭圖)  <자료사진>

 

이 그림은 세검정이 중건된 다음 영조에게 보이기 위해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말합니다. 영조는 겸재의 그림 제자로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지극히 애호했다고 합니다.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 부분 확대  <자료사진>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세검정도(洗劍亭圖)를 보면, 정자의 받침 돌기둥이 높직한 누각 형식의 건물로 도로 쪽을 향하는 면에는 나지막한 담장을 돌리고 입구에 일각문을 두었으며 건물의 측면으로는 편문(便門)을 두어 개울로 내려갈 수 있도록 묘사되어 있습니다. 일각문 밖에는 말 두필이 보입니다. 두 사람이 정자 안에 있다는 얘기이겠지요.

 

                       

 

1977년 복원을 하면서 겸재 정선의 부채 그림을 보고 복원을 했다고 합니다. 이미 길이 있어서 담은 복원하지 못했고, 원래는 40m 안으로 들이지으려 하다가 사다리꼴 모양의 주춧돌을 발견하게 되어 도시계획을 바꿔 그 위치에 정선의 그림을 기초로 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ㄱ자' 모양의 6각 정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계 공포를 가진  겹처마 정자각 건물입니다. 정선의 그림을 보면 건물 지붕위에 절병통이 있는데 복원된 세검정은 절병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른쪽 널직한 바위는 차일암(遮日巖)

 

          

                                        세검정 차일암 (洗劍亭 遮日巖) <자료사진>

 

세검정 차일암은 조선시대 실록 편찬을 완료한 다음 사초(史草)의 유출을 막아 시비의 소지를 예방하기 위하여 사초나 초고들을 물에 씻어 글씨를 지우고 종이는 재생, 활용하도록 하는 세초(洗草)를 하던 장소이다. 세초는 세검정의 차일암에 차일을 치고 행하였는데, 세초가 끝난 다음에는 여기서 세초연이 베풀어졌다. <안내문에서..>

 

 

 

참고자료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의 '유세검정기〈遊洗劍亭記>' 입니다.

 

세검정의 빼어난 풍광은 오직 소낙비에 폭포를 볼 때 그때 뿐이다. 그러나 막 비가 내릴 때는 사람들이 옷을 적셔 가며 말에 안장을 얹고 郊關 밖으로 나서기를 내켜하지 않고, 비가 개고 나면 산골 물도 또한 벌써 조금 수그러들고 만다. 이 때문에 정자가 저편 푸른 숲 사이에 있는데도 城中의 사대부 중에 능히 이 정자의 빼어난 풍광을 다 맛본 자가 드물다.

 

신해년(1791) 여름 일이다. 나는 韓혜甫 등 여러 사람과 함께 明禮坊 집에서 조그만 모임을 가졌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무더위가 찌는 듯 하였다. 먹장 구름이 갑자기 사방에서 일어나더니, 빈 우레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것이었다. 내가 술병을 걷어 치우고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건 폭우가 쏟아질 조짐일세. 자네들 어찌 세검정에 가보지 않으려나? 만약 내켜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벌주 열 병을 한 차례 갖추어 내길세."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여부가 있겠나!"

 

마침내 말을 재촉하여 가서 彰義門을 나서자 비가 몇 방울 하마 떨어지는데 주먹만큼 컸다. 서둘러 내달려 정자 아래 수문에 이르자 양편 산 골짝 사이에서는 이미 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 하였고, 옷자락도 얼룩덜룩하였다. 정자에 올라 자리를 벌여놓고 앉았다. 난간 앞의 나무는 이미 뒤집힐 듯 미친 듯이 흔들렸다. 상쾌한 기운이 뼈에 스미는 것만 같았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산골 물이 사납게 들이 닥치더니 순식간에 골짜기를 메워 버렸다. 물결은 사납게 출렁이며 세차게 흘러갔다. 모래가 일어나고 돌멩이가 구르면서 콸콸 쏟아져 내렸다. 물줄기가 정자의 주추를 할퀴는데 그 기세가 웅장하고 소리는 사납기 그지 없었다. 난간이 온통 진동하며 능히 편안치 못함을 두려워하는 듯 하였다. 내가 말했다. "자! 어떤가." 모두들 말했다. "여부가 있나!" 술과 안주를 내 오라 명하여 돌아가며 웃고 떠들었다.

 

잠시 후 비는 그치고 구름이 걷혔다. 산골 물도 점차 잦아들었다. 석양이 나무 사이에 비치자 물상들이 온통 자줏빛과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서로 더불어 베개 베고 기대 시를 읊조리며 누웠다.

조금 있으려니까 沈華五가 이 소식을 듣고 뒤쫓아 정자에 이르렀는데 물은 이미 잔잔해져 버렸다. 처음에 화오는 청했는데도 오지 않았던 터였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골리며 조롱하다가 더불어 한 순배 더 마시고 돌아왔다. 같이 갔던 친구들은 洪約汝와 李輝祖, 尹无咎 등이다.

 

 

2008.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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