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서울특별시

서울(아차산성)

케인스 2008. 1. 5. 22:41

 

                             서울(아차산성) 

 

 

서울 광진구 / 아차산성(阿且山城)

           

                                          아차산성(阿且山城)  <자료사진>

 

서울시 광진구 아차산(해발 285m)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다. 백제 초기의 한성시대에 이 성은 고구려를 맞아 수도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산성을 '삼국사기'에 기록된 아단성지(阿旦城址)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백제의 수도 한성이 고구려군에 함락되었을 때 개로왕이 아단성 아래에서 피살되었다고 하며,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로 용맹을 날리던 온달장군이 죽령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하여 이 아단성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아 전사했다고 한다. 이 산성은 조선 태조가 아단(阿旦)을 아차(阿且)오 고쳐 아차성(阿且城)이라 불렀으며, 따로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산성은 해발 200m의 산 정상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축조하여 이른바 테메식에 속하지만 규모가 커서 성안에 작은 계곡도 있어 포곡식(包谷式)으로도 보인다. 성벽의 높이는 외부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이며, 내부에서 보면 1~2m이다. 성 전체 길이는 1,125m이며, 동·서·남쪽에 문이 있던 흔적과 물길이 남아있고, 문 앞을 가려 보호하는 곡성이 남아있다.

 

1998년과 1999년에 실시된 1차 발굴에서는 구리시 지역의 아차산 보루성(堡壘城) 유적이 발굴되었고, 2차 발굴에서는 광진구 지역의 아차선성이 발굴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의 성벽, 건물터, 온돌자리, 연못터와 집수장 그리고 100여점의 토기류와 30여점의 철기류, 100여점의 철제 무기류를 비롯한 수 많은 유물들이 나왔는데, 주로 고구려 계통의 토기들이 보이고 있어 고구려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백제의 옛 도읍지에 있는 아차산성은 누가 쌓았는지에 대해 아직 논란이 있지만 삼국이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으로 그 의의가 있다. <안내판 및 문화재청 홈에서..>

            

                             

                                                        아차산(阿且山)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치열한 다툼이 있던 장소로서, 아차산성이 있었고, 고려때에는 강호의 이상향으로서 멋진 강변의 풍경을 가져 여기에 쌍수정(雙樹 亭)을 세워 광나루 강촌을 오르내리며 농로.어옹들과 인사를 나누고 시심(詩心)을 돋울 수 있어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던 곳이다.

 

또한 불도를 닦기 위한 도량(道場)으로 은석사(銀石寺). 범굴사(梵窟寺) . 영화사(永華寺)가 있었으며 강나루 쪽으로는 백중사(伯仲 寺)가 있기도 하였다. 아차산 자락 인 용당산에는 양진사(楊津祠)가 있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 뱃길과 어촌의 안녕을 빌기도 하였다.

 

지금은 많은 이들이 산책과 운동을 겸해 찾는 시민공원으로서 이용되고 있다. 특히 조선 중기까지도 이 일대는 목장으로만 개발되었을 뿐 인가가 드물고 수풀이 무성 하였다. 이 시절에는 아차산, 용마산 일대에 호랑이, 늑대 같은 많은 야생동물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사냥을 할 때 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 아차산 앞쪽으로 자리잡고 있던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 을 건너면서 아차산을 바라보던 광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아서 많은 이들이 그 광경을 시로 읊기도 하였 다. 그러던 것이 근현대 이후에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이곳까지 그 영향이 확대되자 아차산 기슭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아차산 자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기도 하였다. 이렇게 아차산이 갖고 있는 매력과 쉐 라톤 워커힐호텔이 지어지면서 점차 이 일대에는 고급주택가가 형성되어 주거환경이 각 시기마다 나름대로 변해왔던 것이다. <광진구 홈에서..>

 

       

                               아차산성(阿且山城) / 사적 제234호 <자료사진>

 

                      

 

 

      

                                                                                                  <자료사진>

 

아차산성 보존사업 안내

 

광진구에서는 국가사적 제234호인 아차산성의 훼손방지 및 원형보존(복원)을 위해 1996년부터 문화재청과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이 성의 정확한 역사적 규명을 위하여 학술조사(명지대, 서울대 발굴조사단)를 2회 실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차산성은 둘레 전체가 흙으로 덮여 있으며 산성내부에는 그 옛날 병영으로 사용하던 건물터와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축성시기 및 축성방법 등에 대한 학계의 이견이 있어 이에대한 명확한 규명이 이루어 질 때까지 아차산성을 현상보존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에따라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고자 손상된 일부 구간의 복원공사와 아울러 울타리 교체공사 등 주변정리를 우선 실시 하였습니다. 아차산성을 이해하시는데 많은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본 시설물이 훼손되지 않도록 주민 여러분의 많은 사랑과 협조를 당부드립니다.

 

2001. 6.    광진구청장   <안내판에서..>

 

      

                                                     출토된 유물  <자료사진>

 

                                                    아차산 보루군  <자료사진>

 

아차산 주변 일대는 아차산성과 20여개의 보루기를 축조하여 삼국이 영토확장의 각축을 벌였던 군사적 요충지이다. 아차산 일대의 보루군은 남한에서 처음으로 찾아낸 고구려의 군사시설로서 3천점이 넘는 많은 양의 고구려 토기와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특히 홍련봉 제1보루에서는 연화문 와당이 출토되어, 고구려 역사의 최초 유적지로 보존 중요성이 대두되었으며, 2004년 10월 사적 제455호로 지정되었다.  <안내판에서..>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차산 보루 발굴현장 <자료사진>

 

                                    

                                                   보루군 분포도 <자료사진> 

 

                

                                                     아차산 보루  <자료사진>

 

                       

                                          아차산 제4보루 복원조감도1 <자료사진>

 

                       

                                        아차산 제4보루 복원조감도2 <자료사진>

 

아차산 고구려 유적지로 보루를 빼놓을 수 없다. 보루는 적이 침공하면 저지하면서 봉화대를 이용, 상부에 연락을 취하는 곳으로 요즘의 군초소와 같은 곳인데 성보다는 그 규모가 작다. 아차산과 지척의 용마산 일대에는 15개의 고구려 보루가 발굴됐다. 이 중 아차산의 4개 보루는 한강 너머 백제를 조망할 수 있는 방어기지 역할을 했다. 이 보루는 각 보루와 연결돼 말이 다닐 수 있도록 했으며 고구려 군대의 이동 교통로로 이용됐다.

 

 아차산 능선을 잇는 봉우리마다 보루가 설치되었는데 등산로를 따라 제 1보루에서 정상의 제 4보루가 있지만 1~3보루는 흔적만 있을 뿐 제대로 발굴되지 않았다. 제 4보루는 용마산(348m)이 보이는 곳의 지척에 있다. 아차산에서 한강변으로 길게 뻗은 능선 봉우리가 시루봉인데 이곳과 함께 제 4보루는 조사가 완료돼 안내판에 의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제 4보루는 헬기장 크기의 평탄한 지형에 형성됐는데 남북으로 길쭉하며 둘레 약 300m로 일반 산성처럼 석축으로 높이 2~4m의 성벽을 쌓았다. 내부에는 모두 7채의 장방형 건물이 들어섰는데 돌과 흙으로 벽채를 마감하고 맞배식 지붕을 이었다. 큰 건물은 동서 10m, 남북 45m 규모이며 군사용 막사로 쓰였는데 100여 명의 병사가 거주했다. 남쪽 막사는 지휘관용으로 꽤 신분이 높은 장수가 생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성벽은 자연지형의 경사도를 따라 높이에 차이를 두었으며 규모가 남북 77m 동서 25m 정도다. 이 성벽은 대부분 무너져 복토를 해 자세히 관찰하기는 어렵다. 성벽 모서리가 튀어나오게 만든 치(雉)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보루와 보루 사이의 간격은 약 500m로 고구려 시대의 군사요새를 잘 보여준다. 아차산에는 약 150기 이상의 고분이 있는데 우미내 계곡 바위산에 있는 횡혈식 석곽분은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고구려는 4세기 중반 만주 라오뚱 반도와 한반도의 서북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고구려 군사들은 적 방어와 함께 적의 본거지를 치는 기동타격전의 명수들이다. 이 전술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보루와 성의 축조가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아차산은 바로 그 고구려 군사들의 생존전략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다. 성과 보루는 오랜 역사의 풍상으로 허물어졌지만 우리가 발굴과 보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도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보하자는 의도일 것이다.

 

글·사진|박정민(여행작가)  <광진구 홈에서..>

 

 


                                                     아차산 고분1 <자료사진>


아차산 주능선의 동쪽 작은 봉우리 정상부에 있다. 고구려유적으로 보이지만 신라가 이곳을 파괴하고 고분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구리시 홈에서>

 


                                                    아차산 고분2 <자료사진>

우미내 마을 서편의 바위산 정상부 해발 125m 지점에 있는 횡혈식 석관분이다.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형태의 무덤이다. <구리시 홈에서>

 

                                                          아차산 1보루

 

                                                           산성의 흔적

 

                                                           아차산 5보루

 

                                                          아차산 3보루

 

                                                        아차산 3보루에서

 

                                

                                                     서쪽성벽 / 돌확,볼씨

 

                                                           멀리 북한산

 

                                                             한강 일대

 

           

 

 

아차산 망대에 올라서면 한강 너머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북으로는 의정부를 조망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남산으로 통하는 봉화대가 있던 곳인 만큼 군사 요충지로서 중요한 곳입니다.

 

                                                           아차산 4보루

 

                                          아차산 제4보루(堡壘)

 

아차산 제4보루는 남북으로 길쭉한 말안장 모양의 지형에 축조되었는데, 보루의 둘레는 약 300m 가량으로 일반 산성과 같이 서축(石築), 성벽(城壁)을 쌓았으며, 성벽의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의 경우 4m에 달한다.

 

성벽 내부에는 모두 7채의 건물을 설치하였다. 건물은 모두 장방형의 평면을 하고 있으나 상부는 기둥을 세우고 흙으로 벽채를 마감하였으나, 대부분의 건물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담장식 벽채로 되어있다. 건물 지붕은 오늘날 축사(畜舍)와 같은 맞배식 지붕으로추정된다.

 

건물의 내부에는 1기 이상의 온돌(溫突)과 집수유구(集水遺構), 배수로(排水路) 등을 설치하였다. 가장 규모가 큰 3호 건물의 경우 동서10m, 남북 45m의 규모인데, 건물 내부에 3칸의 온돌방과 2기의 집수유구, 그리고 2기의 배수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건물은 대부분 군사용 막사로 사용되었으며, 이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건물은 지휘관 숙소로 추정된다.

 

아차산 제4보루를 포함한 아차산 일대의 보루는 왕숙천변과 중랑천변의 평지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교두보(橋頭堡)의 기능을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아차산 제4보루는 6세기 중엽 백제(白濟)와 신라(新羅)의 연합군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高句麗)와 대치하던 당시의 것이다. 아차산 제4보루에 주둔하였던 군사는 모두 100여명으로 추정되며 토기에 쓰여진 명문(銘文)의 내용으로 보아 상당한 신분의 소유자가 파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판에서..>

            

         

 

                                                         아차산 4보루

 

                                               아차산 4보루 <자료:역사박물관>

 

                                             용마산 5보루의 표지판과 헬기장

  

     

 

        

 

          

                                                           멀리 북한산

 

          

                                                              중랑천

 

 

 2008.01.05 

'답사와 여행(국내) > 서울특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보도각 백불)  (0) 2008.01.19
서울(홍지문)  (0) 2008.01.19
서울(세검정)  (0) 2008.01.19
서울(대원군별장)  (0) 2008.01.19
서울(백사실 터)  (0) 2008.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