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영랑생가)
강진(康津) / 영랑생가(永郞生家)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
강진 영랑생가(康津 永郞生家) <자료사진>
영랑의 발자취
►1903년 영랑(永郞) 김윤식(1903-1950) 시인의 본명은 윤식(允植)으로 강진읍 출생. 강진의
오백석지기 부유한 김종호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강진 보통학교(현 강진 중앙
초등학교)와 휘문의숙을 거쳐 동경 청산학원 영문과 중퇴.
►1919년 휘문의숙 재학 당시 독립선언문을 구두 안창에 숨겨 고향에 내려와 강진의 독립운동을
주도 하다가 검거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
►1920년 동경 유학시절 박열(혁명가이자 무정부주의자)과 같은 방에서 하숙.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1919년 3.1운동 직후 김현구, 차부자, 김길수등과 강진에서 「청구」라는 문학 동인지를 발간.
►1933년 동경유학 때 사귄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 동인지 창간을 주도.
►1945년 해방 후 대한독립 촉성회 강진군 단장으로 활약.
►1948년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1949년 8월부터 약 7개월간 공보처 출판국장을 역임.
►1950년 6.25전쟁시 복부에 파편을 맞고 쓰러져 9월 29일 48세로 사망. <참고자료>
생가 입구의 향토문화관
건물 안에는 영랑의 시를 유명 서예가의 작품을 통해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림이나 기타 영랑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마을 공동 우물
생가로 들어 가는 길 돌담 밑의 시비(詩碑)에 새겨진 시(詩)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풀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오날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십다
새악시볼에 떠오는 붓그럼가치
詩의가슴을 살프시젓는 물결가치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십다
영랑생가 전경 (완쪽은 문간채, 멀리 중앙은 안채, 바로 앞 오른쪽은 사랑채)
생가 사립문 <자료사진>
영랑생가(永郞生家)
전라남도 기념뭉 제89호,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1
이 집은 한국 초창기 문단의 거성 모란의 시인 영랑의 생가이다. 선생은 1903년 1월16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랑은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적을 두었으며 용아 박용철 선생과 친교를 맺었다. 1921년 일시 귀국하고 192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시문학 창작활동을 하였다.
1931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선생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시작활도에 참여하여 같은 해 3월 창간호에 모란이 피기까지 등 4행소곡 6편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 '영랑시집'을 발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은신하였으며 9.28 수복 작전 때 복부에 포탄 파편을 맞아 9월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영랑 생가는 그 후 몇 차례 전폐되어 일부 원형이 변경되었으나 1985년 12월에 강진군에서 이를 매입하여 원형을복원하고 이의 유지관리를 맡고 있다. <안내문에서..>
문간채
입구의 넓은 뜰에 서 있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의 시비(詩碑)를 지나 문간채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나온다. 문간채는 당초 건물은 철거되었으나, 영랑선생의 5남 김현태씨의 고증을 얻어 1993년 강진군에서 복원한 건물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의 시비(詩碑)
당초 사랑채 우측 공터에 사회봉사단체인 강진군 번영회에서 대리석으로 만들어 세웠으나, 위치가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아 강진군에서 문간채 앞에 설치하였다. 영랑의 대표적인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새겨져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잇슬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五月 어느날 그하로 무덥든 날
떠러져 누은 꼿닙마저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
뻐쳐오르든 내 보람 서운케 문허졌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잇슬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영랑 김윤식 동상
장흥에서 강진읍으로 들어오는 <영랑 로터리>에 우리나라 서정시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히는 영랑 김윤식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영랑의 작품세계
영랑의 작품세계를 음미해 보면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시기에 쓰인 시가 대부분으로 그의 작품세계는 순수한 남도 우리말을 슬프도록 아름답게 표현해 내었다. 시문학사상 순수 서정시인으로 분류되는 김영랑은 나라와 언어·종교와 신체적 자유를 잃은 고통과 슬픔의 절규를 우회적으로 아름다운 우리의 말과 서정적인 글로 그려내, 빼앗긴 조국과 민족의 희망을 노래한 민족주의 애국시인이다.
평생 한복을 즐겨 입고 스포츠를 즐기며 시를 좋아한 영랑은 또한 동서양의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아악에 정통하고 북(鼓)으로 이름이 알려지는 등 이러한 음악에 심취했던 것이 뒷날 그의 독특한 시 언어에 표현되어 나타나있다.
소월이 북도(北道)의 투박한 사투리로 독특한 가락을 표현했다면, 영랑은 남도의 정감어린 방언과 맛깔스런 가사를 그의 시에 담았다. 그의 시 가운데는 4행시가 많다. 이 역시 우리 민요의 형식에 가깝게 표현하려고 한 의도로 볼 수 있다. 섬세한 정서, 언어의 조탁, 미묘한 음악성은 영랑시의 위치가 더욱 민족시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그의 일제에 대한 뿌리 깊은 저항의지는 삭발과 창씨개명·신사참배를 거부해, 이를 종용하는 일본 경찰을 피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나중에는 읍내 뜻이 있는 동지들과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한 야학을 열기도 한다. 학업과 여행, 음악감상회 외에는 강진을 벗어나지 못한 그에게 8·15 광복은 큰 감동을 준다. 장롱 깊숙이 간직한 태극기를 꺼내 독립만세를 부르며, <바다로 가자> 등 광복의 기쁨을 시로 쓰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그가 민족주의 시인으로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민족정기를 지켜낸 애국지사로, 한민족 해방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민족시인으로 각인된다.
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영랑시인의 문학적 세계는 일제치하에서 설움 받는 민족의 한(恨)을 시로 표현하고 민족의 기상을 은연중 문학을 통해서 불살랐던 한국 현대문학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안채와 모란꽃 <자료사진>
안채
안채는 일부 구조가 변형되고 시멘트 기와로 변형되어 있던 것을 지남 1992년 군에서 초가로 복원하였다. 큰방은 선생의 부친이 거처하였던 방이고, 좌측의 중마루가 있는 작은방은 영랑선생이 결혼 후 거처 하였던 방이다. <참고자료에서..>
안채의 들마루와 누마루
새암(샘, 우물)과 문간채 곳간
안채 왼쪽으로 영랑선생과 가족이 사용하던 우물로 훼손되었던 것을 1993년 옛모습대로 복원하였으며, 1935년에 지은 '마당앞 맑은 새암을' 이라는 시(詩)가 있습니다.
새암(샘, 우물)
'마당앞 맑은 새암을' 의 시비(詩碑)
"마당앞 맑은 새암을"
마당앞
맑은새암을 드려다본다
저 깁흔 땅밑에
사로잡힌 넉 잇서
언제나 머ㄴ 하날만
내여다보고 게심 가터
별이 총총한
맑은새암을 드려다본다
저깁흔 땅속에
편히누은 넉 잇서
이밤 그눈 반작이고
그의것몸 부르심 가터
마당앞
맑은새암은 내령혼의얼골
영랑선생의 초상화
안채 부엌
안채에서 보는 사랑채와 문간채
안채 오른쪽으로 장광(장독대),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의 시비(詩碑)와 모란꽃밭
간장, 된장, 김치, 젓갈 등을 담아두거나 담그는 독을 놓아 두었던 곳으로 1930년 어느날 누나가 장독을 열때 단풍진 감나무잎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오매 단풍들것네'라고 속삭이자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라는 시를 지었다. <안내판에서..>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안채 뒷편 언덕엔 대나무숲과 동백나무들이 있는데 영랑의 데뷔작 「동백닙에 빗나는 마음」의 모태이라고 합니다.
대나무숲과 동백나무 그리고 모란꽃밭
'동백닙에 빗나는 마음' 시비(詩碑)
"동백닙에 빗나는 마음"
내마음의 어�듯 한편에 끗업는
강물이 흐르네
도처오르는 아츰날빗이 빠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듯 눈엔듯 또 피ㅅ줄엔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잇는곳
내마음의 어�듯 한편에 끗업는
강물이 흐르네
모란꽃밭과 사랑채
한국문인협회에서 영랑선생을 기린 동판
영랑생가(永郞生家)
이곳은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하여<모란이 피기까지는>, <가늘한 내음> 등 남도의 정서를 전통적 운율로 읊어 낸 주옥같은 서정시를 남김으로서 한국 시문학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영랑 김윤식(永郞 金允植, 1903~1950)시인이 태어나 성장하고 그의 예술혼이 감돌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문학의 해를 맞아 선생의 높은 열정을기리고자 한국문인협회가 현대문학 표창사업의 일환으로 이글을 새긴다.
1996년 6월14일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사랑채
사랑채는 본래부터 초가지붕 이었으며 기둥과 석가래 등의 구조는 원형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고가(古家)로서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하겠다.
사랑채를 보면 전체의 모습이 조금 비뚤어져 있는데 ‘사개틀닌 고풍의 툇마루에서’라는 시를 연상해 볼 때 아마 이것은 선생께서 살아 계실 때부터 비뚤어졌다고 추측된다. <참고자료에서..>
'사개틀닌 古風의 퇴마루에서'의 시비(詩碑)
"사개틀닌 古風의 퇴마루에서"
사개틀닌 古風의퇴마루에 업는듯이안져
아즉떠오를긔척도 업는달을 기둘린다
아모런 생각업시
아모런 뜻업시
이제 저 감나무그림자가
삿분 한치식 올마오고
이 마루우에 빛갈의방석이
보시시 깔니우면
나는 내하나인 외론벗
간열푼 내그림자와
말업시 몸짓업시 서로맛대고 잇스려니
이밤 옴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북을 두들기며 시를 읊고 쓰던 영랑선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랑채 뒷편의 대나무숲
사랑채 앞 뜰과 저쪽에 안채
영랑선생이 19살에 심었다는 사랑채 앞의 은행나무
'아파 누워 혼자 비노라'
아파 누워 혼자 비노라
이대로 가진 못하느냐
비는마음 그래도 거짓잇나
사잔욕심 차저도 보나
새삼스레 잇슬리 업다
힘업고 느릿한 피ㅅ줄하나
오! 그져 이슬가치
예사 고요히 지렴으나
저긔 은행닙은 떠나른다
은행(銀杏)나무
9월에 감이나 동백만이 열매이오니까. 오곡백과지요. 뜰 앞에 은행나무는 우리 부자가 땅을 파고 심은지 17,8년인데 한 아름이나 되어야만 은행을 볼줄 알고 기다리지도 않고 있었더니 천만의외 이 여름에 열매를 맺었소이다. 몸피야뼘으로 셋하고 반, 그리 크잖은 나무요, 열매라야 은행 세 알인데 전 가족이 이렇게 기쁠때가 없소이다. 의논성이 그리 자자하지 못한 아버지와 아들이라 서로 맞대고 기쁜체는 않지만 아버지도 기뻐합니다. 아들도 기뻐합니다. 엄마가 계시더면 고놈 세알을 큰 섬에 넣어 가지고 머슴들을 불러대어 가장 무거운 듯이 왼 마당을 끌고 다니시는 것을, 봄에 은행잎은 송아지 첫 뿔 나듯이 뾰족하니 돋기 시작하여 차차 나팔같이 벌어지고, 한여름은 동백잎이 못지않게 강렬히도 태양에게 도전하고, 이 가을 들어선 바람 한번에 푸름이 가시고 바람 한번에 온통 노래지고 바람 한번에 아주 흩어지는데 다른 단풍 같지 않고 순전히 노란빛이 한잎, 두잎 맑은 허공을 나는 것은 어떻다 말씀할 수 없습니다. 노령이신 아버지라 말씀이 없고 괴벽인 아들이라 말이 없고 50생남쯤 되는 이 열매를 처음 보고도 서로가 은연히 기뻐할 뿐이외다. 어린 놈이 "그 은행 익으면 조부님 제상에 놀래요" 하는 데는 파흥(破興) 아니할 수 없나이다.
<朝光 > 1938년 9월 <안내판에서..>
영랑공원 비(碑)
영랑공원
이 공원은 남도답사 1번지 우리고장 강진의 문화유산 계승과 보존을 위하여 강진군상록회가 조성한 것입니다.
1996. 5. 3 강진군상록회
문간채에 딸린 곳간
곳간과 문간채 아궁이
담 밖에서 보는 은행나무
밖에서 본 영랑생가 전경
금서당(琴書堂) 가는 길 푯말
금서당(琴書堂) 옛 터
보은산(寶恩山) 선인봉(善人峰)의 중턱에 자리한 금서당(琴書堂)의 옛 터로서 신교육의 발상지(發祥地)이며, 이 곳의 학생들이 강진 3.1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금서당(琴書堂)은 1905년 사립금릉학교(私立金陵學校)로 개칭되었고, 1909년 8월 강진공립보통학교(康津公立普通學校)로 개설되었으며, 1914년 현 세무지소인 객사(客舍)로 확장되었고, 1926년 다시 평동으로 이전 된 강진중앙초등학교(康津中央初等學校)의 전신(前身)이다.
1919년 3월과 4월의 강진 독립만세 운동때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구두에 감추어온 서정시인 영랑 김윤식은 5세되던 1906년 이곳에서 한문공부를 시작하여 1911년 입학 1915년에 4년제이던 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9년 4월4일에는 200여명의 전교생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1950년 이후 완향 김영렬 화백이 반파된 건물을 직접 보수하여 작품활동을 해왔던 곳으로 찾는 이에게 강진의 항일정신(抗日精神)을 전해주고 있다. <안내판에서..>
금서당(琴書堂)의 옛 터
반파된 건물을 보수한 흔적을 한 눈에 알 수 있는데, 지붕도 다르고 가옥의 형태도 서로 다릅니다.
영랑선생의 고향 강진은 온통 모란꽃에 파묻혀 있다
영랑선생의 작품
•동백닙에 빛나는 마음(데뷔작)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시문학 창간호.1930.3 , 영랑시선. 1949)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시문학3호. 1931) •내 마음을 아실 이(시문학3호. 1931) •모란이 피기 까지는(문학3호.1935 , 영랑시집. 1935) •북 (영랑시집. 1935) •두견 (영랑시집. 1935) •오월/五月(문장6호. 1937) •독을 차고 (문장10호. 1939) •거문고 (조광. 1939) •춘향 (문장18호. 1940,7)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오메 단풍 들것네) •가늘한 내음 •마당앞 맑은 새암은 •아파 누워 혼자 |
2007.04.17
'답사와 여행(국내) > 전라남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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