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무위사)
월출산(月出山) / 무위사(無爲寺)
월출산(月出山)
월출산 정상 천황봉은 해발 809m로 비교적 낮으나 사방에 큰 산이 없는 들판에서 갑자기 솟구쳐 올라 거대한 암봉과 장쾌한 암릉을 형성하고, 화강암 바위들이 오랜 세월동안 풍화와 절리작용을 통해 깍여나가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을 이루고 있어 그 절경을 "남도의 금강산"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월출산은 "달 뜨는 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유수한 문화자원, 그리고 남도의 향토적 정서가 골고루 조화를 이루고 있는 한반도 최남단의 산악형 국립공원입니다.
무위사(無爲寺) 전경 <참고사진>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 성전면(城田面) 월하리(月下里)에 위치하고 있는 무위사(無爲寺)는 월출산(月出山)의 천황봉과 구정봉을 좌,우로 두고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천년고찰입니다.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9년(617)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라 하였고, 헌강왕 원년(875)에는 도선국사가 중창하여「갈옥사」라 한 후, 고려 정종원년(946)에 선각대사가 삼창하고「모옥사」라 개칭하였으며, 그 후 조선 명종10년(1555) 태감선사에 의해 현재와 같이「무위사」로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극락보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임진왜란때 소실 되었으며, 극락보전은 조선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해방 이후 1956년에 극락전을 수리 보수하고 보존각을 새로 세워 그 안에 벽화를 봉안하였으며, 그 후 1975년에는 봉향각 해탈문·명부전·천불전을 다시 지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선각대사 편광탑비 (보물제507호)와 삼층석탑(도지정 문화재자료76호)이 경내에 남아 있습니다.
해탈문(解脫門)
무위사(無爲寺)를 들어서기 위해 처음 만나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중앙 칸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통로로 하고, 좌우 각 1칸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봉안하였습니다.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어 천왕문(天王門)이라고도 불리우고 있습니다.
월출산무위사 현판
무위(無爲)란 뜻은 불교의 기본양식인 무소유와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뜻으로서 인위나 조작이 닿지않는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해탈문의 가운데 문을 통하여 극락보전이 시야에 들어오도록 앉힌 옛 선인들의 미적 감각이 돋보입니다.
천왕문에 모셔진 사천왕상은 모두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좌우에 2구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예로부터 한국의 사찰에서는 일주문(一柱門)과 본당 사이에 천왕문을 세워, 그림으로 또는 나무로 깍아 만든 사천왕의 조상(彫像)을 모셨습니다. 사천왕(四天王)을 사대천왕(四大天王), 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라고도 합니다.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입니다. 사천왕(四天王)이란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 毘沙門天王)을 일컫습니다.
해탈문의 용
부처님과 불국토를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으로서 사찰 도처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해탈문의 용(龍)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천왕문 사천왕상(天王門 四天王像)
비파를 든 지국천왕(持國天王)이 수미산의 동방을 수호하며 백성을 편안케 하고, 칼을 잡고 있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수미산의 남방을 수호하여 길고 넓게 중생의 이익을 돕는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천왕문 사천왕상(天王門 四天王像)
왼쪽에는 용을 쥐고 서쪽을 수호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악인(惡人)에게 고통을 줘 구도심을 일으키게 하며,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북쪽을 수호하며 어둠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답니다.
경내에서 본 해탈문(解脫門)
극락보전(極樂寶殿)
국보 제13호,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극락보전은 불교의 이상향인 서벙극락정토를 묘사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조선 세종12년(1430)에 지어진 우리나라 대표적인 목조건축의 하나이다. 건물 자체가 국보이지만 내부에는 조선 성종7년(1476)에 그림을 끝맺었다는 화기가 적혀있는 아미타후불(보물 제1313호)와 백의관음도(보물 제1314호)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그림은 토벽에 그려진 가장 오래된 후불벽화로 화려하고 섬세했던 고려불화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명작이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극락보전만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세종12년(1430)에 건립했다. 규모는 정면3칸, 측면3칸이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직선재료를 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균형을 잘 이루고 있는 조선초기의 건물로 뛰어나다. <안내판에서..>
극락보전 앞마당
석탑도 석등도 없이 덩그러니 비워둔 절마당입니다. 인위를 더하지도 않고 자연 그대로 내버려두어, 절 이름 ‘무위’(無爲)를 말없이 웅변하고 있는 공간이 이 마당 같습니다. 이 소박한 공간과 함께 맞배지붕의 단아한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은 서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배례석(拜禮石)
그 마당 가운데 돌 위에 백제 양식의 연꽃이 피어있습니다. 시들지 않는 꽃인 연꽃같이 청정함을 스스로 다짐하라는 뜻이 스며있는 배례석(拜禮席)입니다. 주지스님이 극락보전에 들기전 마음 가다듬어 부처님께 큰절을 올리는 장소로 절의 큰 행사가 열릴때 이용된다고 합니다.
직사각형의 대석(臺石)인 배레석은 길이 130cm, 너비 98cm, 높이 9cm 이며, 윗면에는 커다란 단판8엽(單瓣八葉)의 연화문이 새겨져 있고, 그 중앙의 원좌(圓座)에 8개의 씨방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위에는 방형 1단의 괴임을 나타내었으며, 조성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배례석은 법당 안 아미타불을 마주하는 자리로서 극락보전 안 아미타불의 자리에서 보면 이 마당은 ‘극락’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구현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광주시 문화재전문위원 강현구씨는 이 빈 마당을 두고 “무변대야(無邊大野)의 상징적 구현”이라며 “욕심도 걸림도 내려놓으라는 가르침을 이미 말없이 설법하고 있는 것이 이 마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용적인 이유를 찾자면 “야단법석(野檀法席)을 위해 비워둔 마당”이라고도 말합니다. 많은 불자들이 모이려면 걸치적거림이 없어야 할 것. 오로지 ‘말씀’으로 채워져야 할 것. 그러니 너무 커서 휑하거나 위압적이지도 않고, 작아서 오종종하지도 않고, 부처님의 말씀을 육성으로 전하기에 마치 좋을 크기를 취한 마당입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그 크기에서 편안함이 우러나오며 그 크기마저도 완전히 ‘비움’으로써 ‘채움의 부질없음’을, ‘다욕(多慾)은 괴로움’임을 일러주는 마당. 마음속 헛것이나 삿된 것을 잠시 내려놓는 마당. 무위사 마당입니다. <일부 전라도닷컴에서 인용>
극락보전현판
괘불석주(掛佛石柱)
극락보전 앞에 서 있는 한 쌍의 괘불석주는 높이가 각각 114cm와 109cm입니다. 모두 위, 아래에 17cm의 구멍이 있고 극락보전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에 있는 석주에는 옆면에다 조성연대를 새겼습니다. 명문은 세로 2줄로 ‘강희십칠년무오일○자조성야(康熙十七年戊午日○字造成也)'라 새겨, 숙종4년(1678)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여기에 내어 걸었을 괘불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괘불석주는 괘불대를 끼워 괘불을 세우는 기둥으로 크기는 작게는 약60cm, 크게는 2m 정도입니다. 흔히 괘불석주와 당간지주를 혼동하기 쉬운데 당간지주는 절입구에 서있는 큰 돌기둥이고 괘불석주는 대웅전이나 법당 앞에 2개가 한조를 이루어 양쪽에 서있는 작은 돌기둥입니다.
극락보전의 배흘림기둥
극락보전 안에는 벽에 29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本尊佛) 뒤의 탱화(幀畵)만 남아 있고, 28점은 벽화보존각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극락보전 측면
주심포식 맞배지붕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구성에 배흘림기둥을 세우고 간결하고 아름다운 조각의 공포를 얹어 세련미가 넘치는 이건물은 곡선재를 많이 쓴 고려말기 건축에 비해 직선재를 써서 측면이 간결하고 짜임새가 있어 조선초기 양식의 주목 받는 건물입니다.
극락보전 후면
극락보전의 아름다움
무위사 극락보전은 고려 시대 맞배지붕 주심포집의 엄숙함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종묘나 명륜당 대성전에서 보이는 단아함이 그대로 살아 있으며, 극락보전 측면의 노출되어있는 기둥과 들보가 잘 어울려 단정한 멋을 은근히 풍기고 있다고 사학자들은 지적한다.
무위사(無爲寺)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木造阿彌陀三尊佛坐像) <사진자료>
무위사(無爲寺)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木造阿彌陀三尊佛坐像) / 보물 제1312호
무위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시대 초기 목조불상으로서 가운데 아미타불이 있고 그 오른쪽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있으며 왼쪽에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있는 아미타삼존상이다.
아미타불상은 착의법이 통견으로 두터운 옷인데, 왼쪽 어깨의 옷깃이 N자식으로 되었고, 군의(裙衣)의 넓은 상단이 평행이며 띠매듭이 규격화된 점 등은 조선초기 불화의 불의형식(佛衣形式)을 잘 나타내고 있다.
꽃 장식을 오려 덧붙인 묵중한 보관을 쓴 관음보살상은 왼쪽 다리를 내린 반가좌(半跏坐)의 자세로, 내린 다리가 유난히 크고 퉁퉁하다.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은 관음보살상과는 반대로 오른쪽 다리를 내려 반가좌하고 있다.
1476년(성종7)에 제작된 후불벽화의 삼존상과 양식적 특징이 흡사하고 전체적으로 둥글면서 약간 풍만하고 단정하며 엄숙한 얼굴, 처진 젖가슴, 넓은 무릎폭, 두툼한 불의, 독특한 옷주름 등의 특징으로 볼 때 고려후기 불상의 영향을 받은 조선초기의 양식이다. <안내판에서..>
극락보전의 좌측에 마련한 단에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중앙에는 삼존이 봉안되었고 그 측면과 후면에 2단으로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좌ㆍ우측에 각 1구의 사자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중앙의 삼존불좌상은 수기삼존으로, 본존불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맺고 있는 석가여래이며, 좌우협시는 보관을 쓰고 있는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로 불상의 재질은 모두 석조입니다.
16나한상 또한 석조로 중앙의 삼존불과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불상의 양식적 특징 등으로 보아 제작시기는 19세기 후반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위사(無爲寺) 극락전(極樂殿) 아미타후불벽화 (阿彌陀後佛壁畵)
보물 제1313호),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극락전내의 목조삼존불 뒤 독립된 벽면 토벽(土壁)에 그려진 이 그림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아미타불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호화롭고 섬세한 고려불화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전체구도와, 광배, 부처의 머리 모양 등에서 조선초기의 특색을 보이는 걸작이다.
두 협시 보살의 키가 부처의 어깨쯤까지 올라와 있고 또 화면 뒤쪽에 여섯 나한의 얼굴이 그려지는 점은 모든 보살이 부처의 무릎 아래에 배치되는 엄격한 상하구도의 고려불화와 보살과 나한 등이 부처를 빙 둘러 화면 가득히 배치되는 16세기 이후의 불화와도 다른 조선초기 불화의 특징이다.
화기에 의하면 이 그림은 대선사 해련(海連) 등이 그려 성종7년(1476)에 완성되었다. <안내문에서..>
●상하구도와 원형구도의 차이
극락보전 안에는 성종 7년(1476)에 그림을 끝맺었다는 화기(畵記)가 적혀 있는 아미타 삼존벽화와 수월관음도가 원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것은 두루마리 탱화각 아닌 토벽의 붙박이 벽화로 그려진 가장 오래된 후불 벽화로 화려하고 섬세했던 고려불화의 전통을 유감없이 이어받은 명작 중의 명작이다. 무위사 벽화 이래로 고려불화의 전통은 맥을 잃게 되고 우리가 대부분의 절집에서 볼 수 있는 후불탱화들은 모두 임란 이후 18, 19세기의 것이니 그 기법과 분위기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극락보전의 벽화는 고려불화의 화려하고 섬세한 기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조선초 벽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무위사 벽화는 역시 조선시대 불화답게 고려불화의 엄격한 상하2단구도를 포기하고 화면을 꽉 채우는 원형구도로 바뀌었다. 고려불화라면 협시보살로 설정한 관음과 지장보살을 아미타여래 무릎 아래로 그려 위계질서를 강조하면서 부처의 권위를 극대화시켰겠지만, 무위사 벽화에서는 협시보살이 양옆에 서고 그 위로는 6인의 나한상이 구름 속에 싸이면서 부처님을 중심으로 행복한 친화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같은 불화라도 상하2단구도와 원형구도는 이처럼 신앙형태상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니 미술이 그 시대를 드러내는 것은 꼭 내용만이 아니라 이처럼 형식에서도 구해진다.
극락보전 안벽에는 이외에도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곧 허물어질 지경에 이르게 되어 1974년부터 해체보수를 시도하였고 지금은 그 벽화들을 통째로 드러내어 한쪽에 벽화본족각을 지어놓고 일반에게 관람케 하고 있다.
●아미타 후불벽화의 전설
무위사에 형색이 초라한 노스님이 찾아와 법당 벽화를 그리겠다고 주지스님께 청하였다. 49일 동안 법당 안을 보지 말라는 당부를 남겼으나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스님은 결국 하루를 남기고 문틈 사이로 엿 보고 말았다. 문틈 사이로 엿본 법당 안에는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후불벽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인기척에 놀란 파랑새는 부처님의 홍채(눈)를 그리지 못하고 날아가서 현재까지 홍채가 그려지지 못한 체 보존되고 있다. <이상 발췌 참고자료>
무위사(無爲寺) 극락전(極樂殿)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보물 제1314호,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극락전 후불벽화 뒷면에 그려진 백의관음도는 화면 전체에 관음보살이 둥그스럼한 두광과 신광을 지고 서서 아래쪽에서 관음을 예배하는 노비구를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이다.
바람에 날리는 천의의 모습을 표현한 강약의 변화는 긴장감과 유려함을 주며, 흩날리는 옷자락의 모습은 화면전체에 표현된 파도의 곡선과 더불어 강한 율동감과 생동감을 묘사하고 있다.
관음을 예배하며 구원을 바라는 노비구의 모습이 매우 절실하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안내문에서..>
후불벽화 뒤편 보물 1314호 무위사 백의관음도의 관음보살은 넓은 어깨에서 남성적인 체구를 보여주며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의 모습은 그림전체에 표시된 파도와 더불어 강한 생동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극락보전에서 만날 수 있는 독특한 것으로 사자의 등 위에 올려놓은 법고(法鼓)가 있는데, 사자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극락보전 신중탱은 적갈색 바탕에 황색선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부분적으로 채색을 하였으며, 화면 중앙에 위태천을, 상단 좌우에 범천과 제석천을 배치한 구도입니다. 화면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범천과 제석천 사이에 5명의 주악동자(奏樂童子)와 주악동녀(奏樂童女)를 배치하여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26위(位)의 신중을 배치하였습니다. 화면 하단 중앙에 기록한 화기에 의하면 이 신중탱은 1995년 당시 주지인 진원스님의 발원과 이영희(사리자) 보살이 화주가 되어 조성한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극락보전 칠성탱 역시 적갈색 바탕에 황색선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부분적으로 채색을 하였습니다. 사각의 좌대 위 연화좌에 앉아 있는 치성광여래를 크게 그리고, 그 좌우에 일광ㆍ월광보살과 칠여래ㆍ칠원성군ㆍ태상노군ㆍ육성군을 배치한 화면구도이다. 신중탱과 마찬가지로 1995년에 당시 주지인 진원스님의 발원과 이영희(사리자) 보살이 화주가 되어 조성한 것이라 합니다.
아미타내영도 |
관세음보살도
오불도
연화당초향로도
주악비천도
무위사 극락전 내벽 사면벽화 (보물 제1315호)
우리가 볼 수 있는 보존각내 벽화들은 1974년 극락보전을 보수하면서 벽면의 벽화들을 통째로 뜯어내어 벽화보존각에 별도로 모신 것입니다. 벽화보존각 안에는 아미타내영도, 석가여래설법도, 휙휙 그려낸 너울과 옷자락이 멋있는 해수관음좌상도, 보살좌상도, 오불도,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의 비천선인도 등 총 29점이 유리장안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중 아미타내영도는 흙벽에 채색된 것으로 사람이 죽을때나 수행이 성숙해지면 이미타불이 마중와서 서방극락으로 맞이해 간다는 내용을 도상화한 것으로 아미타불과 8보살 8비구가 구름위에서 좌우로 길게 늘어서서 왕생자를 맞이하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8보살 뒷편 상체만 그려져 있는 8비구는 다양한 얼굴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뭉게구름과 함께 생동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과감할 정도로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 등 고려불화의 양식이 짙게 나타나 있는 반면, 화면에 나한(羅漢)이 등장하는등 세부묘사에서 조선초의 새로운 양식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현재 극락전 좌우 벽면에 그려진 아미타내영도와 설법도 등 2점은 모사본이며 원본은 보존각안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무위사(無爲寺) 삼층석탑(三層石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탑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불교의 상징적인 예배의 대상이다.
이 석탑은 현재 극락전 우측인 선각대사편강탑비 바로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 탑의 구조는 전형적인 2층 기단을 갖춘 3층 석탑으로서 각 부재가 잘 조화되고 균형이 잡힌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석탑이다.
이 석탑의 조성 연대는 선각대사편강탑비의 연대와 동시대이거나 그 연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려시대 초반기로 추정된다.
지대석은 몇개의 넓은 돌로 짜여져 있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대기단 중석이 연결되고 있는데, 각 구를 2구로 나누고 중앙에는 탱주(가운데기둥) 1주와 양면에는 우주(모서리기둥)를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지붕돌)이 각 1석씩으로 탑신부의 양면에 우주가 모각되고 2~3층에서는 그 높이와 폭을 줄여 알맞은 체감을 보였다. 상륜부(탑의 꼭대기 부분)는 완전하게 남아있다. 이 탑은 비교적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충실히 고수하고 있다.
삼층석탑(도지정 문화재자료 76호)
삼층석탑
무위사 3층석탑은 전형적인 2층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되어 있습니다. 지대석은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이 연결되고 있으며, 각면에는 면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 조식이 정교하여 세련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탑은 3층 옥개석과 1층 옥개석 일부에서 약간의 훼손을 입었으나 그외의 부재에서는 완전한 상태로서 비교적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데, 탑의 조성 연대는 선각대사편광탑비의 조성 연대(946년)와 동시대이거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은 고려초기로 보고 있습니다.
막힘도 걸림도 없는 무변대야(無邊大野) 구현
무위사 보각스님은 “월출산 양쪽 산자락이 좌청룡 우백호 형상으로 절을 감싸안고 있는 자리다. 그런데 극락보전 쪽에서 보자면 오른쪽에 내가 있어 산 기운을 차단하기 때문에 그쪽이 왼쪽보다 가벼워서 석탑과 선각대사 탑비를 오른쪽에 치우쳐서 세웠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석탑이 마당을 비껴나 세워진 이유를 ‘비보풍수’적 측면에서 풀이하고도 있습니다.
선각대사 편광탑비(보물 제507호)
무위사(無爲寺) 선각대사(先覺大師) 편광탑비(偏光塔碑)
보물 제507호,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비(碑)는 어떤 일의 자취를 후세에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 나무, 돌, 쇠붙이 등에 글을 새겨 놓은 것이다.
이 비는 선각대사(864~918)를 기리기 위해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세운 것이다. 대사는 통일신라 말의 명승으로 법명은 형미, 속세의 성은 최씨다.
형미는 무위갑사(현재의 무위사)의 주지로 8년간 머물렀으며 어려울 때 왕건을 도와준 바 있다.
비는 받침돌과 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받침돌의 몸은 거북이나 몸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실성 있게 표현되었다. 몸돌에는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내용과 선각대사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겼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사실적인 뛰어난 작품이다. 비의 높이는 2,35m, 폭은 1.12m이다. <안내문에서..>
비의 주인공 선각대사 형미(864~917)는 광주 출신으로 속성은 최씨였습니다. 15세에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에서 출가하여 보조체징(普照體澄)의 제자가 되었으며, 28세 되던 해 사신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가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받고 905년(효공왕 5)에 귀국하였습니다. 무위사에서 머물던 형미는 이후 철원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입적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선각 대사 형미(泂微)의 부도비는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946년에 건립된 부도비는 비신과 비신을 받친 거북, 비신머리가 모두 온전하며, 거북의 머리는 용의 모습인데 정수리에 뿔이 있고 귀 뒤에 작은 깃이 달려 있습니다. 코가 벌름하고 윗입술은 조금 말려 올라갔으며, 여의주를 문 입에 가지런한 이빨과 혀가 보이는 것이 특이합니다.
왼쪽부터 산신각, 미륵전 그리고 극락보전
미륵전(彌勒殿)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재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으며, 내부에는 성전면 수양리 수암마을에 방치되어 있던 석불입상을 옮겨와 봉안하고 있습니다. 미륵전은 미륵불이 계신 정토세계를 상징합니다.
미륵전 석불입상(彌勒殿 石佛立像)
미륵전에 봉안되어 있는 이 석불은 자연석에 부조(浮彫)로 새겨 모셨으며, 이마 위의 육계와 머리형태가 마치 여성의 올림머리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일반적인 불상의 형식에서 많이 벗어난 형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佛身) 주변에 화염문 광배를 선각한 점이나 목의 삼도와 수인 등에서 여래(如來)임을 알 수 있고, 부은듯한 눈두덩에 입술이 두껍고 인중이 짧으며 왼쪽 어깨는 움츠린 듯 좁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원래 이 석불은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수암마을에 방치된 채 있었는데 마을 독지가들에 의해 무위사로 옮겨온 것이라 하는데, 현재 하단부가 마루바닥 밑으로 들어가 있어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으나 마루까지 218cm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신각(山神閣)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막돌과 흙으로 다진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고, 내부에는 1991년에 조성한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편액에는 '월출산 산신각(月出山 山神閣)'이라 적혀 있고 '법철(法哲)'이 썼다고 씌어 있습니다. 산신각은 칠성각과 함께 토속신앙을 불교에 흡수시킨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위산과 그 사이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를 의지한 채 호랑이에 걸터앉아 있는 산신을 그린 것으로, 산신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 손에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이며, 동자는 허리춤에 호리병을 찬 채 커다란 불자(拂子)를 들고 있습니다.
구름에 부분적으로 가려진 소나무는 가지가 위로 뻗지 않고 잘린 듯하며, 달인지 해인지 분간되지 않는 일월(日月)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단에 기록된 화기에 의하면 이 산신탱은 1991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서 조성하여 강진 무위사로 옮겨 봉안한 것으로, 화원은 김소영(金昭映)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벽화보존각 (壁畵保存閣)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장방형의 다듬은 돌로 쌓은 기단 위에 원형의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으며, 문은 가운데 어칸 부분에만 내었습니다. 이 건물은 1975년 극락보전에서 떼어낸 벽화들을 보존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현재 내부에는 28점의 벽화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멀리 천불전(千佛殿)
미륵전에서 건너편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동백숲 사이로 천불전으로 가는길이 있습니다. 천불전에는 천분의 부처님을 봉안해 놓았습니다.
천불전 가는 길의 동백
천불전(千佛殿)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974년 중수하였으며, 석재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천불전 불단(千佛殿 佛壇)
천불전에는 중앙에 삼존불과 그 뒤로 천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조성연대는 건물의 건립시기와 같이 하는 1970년대 후반입니다.
삼존불상은 동제(銅製)로 중앙의 본존은 좌상에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좌, 우 협시는 보관을 쓰고 있는 보살로, 좌협시는 보관에 화불이 있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지만 우협시 보살은 정확한 명호를 알 수 없습니다. 천불상 역시 삼존불상과 마찬가지로 재질은 동제이며, 한 틀에서 주조하여 불상의 상호가 모두 동일합니다.
천불전 옆에서..
극락보전과 멀리 천불전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막돌로 기단을 형성하고 자연석 초석을 놓은 다음 원형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명부전 불단(冥府殿 佛壇)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그 주위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판관, 사자, 귀왕, 장군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지장보살상은 목조로 되어 있으며 민머리형에 원만한 상호를 띄고 있습니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후기의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절마당 입구의 석재 유구
요사(寮舍)
무위사에는 3채의 요사가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요사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요사는 모두 1995년에 신축한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그 외에 종무소와 공양간으로 사용하는 요사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이며 팔작지붕 건물로 되어 있습니다.
대형 맷돌
종무소 건물 옆에 커다란 고목과 함께 연륜과 크기를 자랑하는 대형의 맷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상층부는 없고 하층부만 남아 있는 이 맷돌은 지름이 180cm나 되는 대형으로, 길쭉한 바가지모양으로 생겼습니다. 중앙의 넓게 파진 홈에 곡식을 넣고 분쇄한 후 그대로 아래쪽에 그릇을 대고 받을 수 있도록 한 쪽이 길게 돌출된 채 트여 있다. 중앙에 놓인 둥근 돌에는 10cm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삼층석탑, 선각대사 편광탑비, 미륵전 그리고 멀리 천불전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사모지붕 겹처마 건물로 막돌과 흙으로 다져진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내부에는 1996년에 조성한 범종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
범종각과 범종
해탈문을 향하여..
해탈문 옆의 동백
해탈문 입구
주차장너머로 바라본 무위사 경내
무위사 중수 공적비 부도(浮屠)
무위사 주차장에서 좌측 방향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고, 개울 건너편에는 산과 맞닿아 논밭이 이어져 있는데, 이곳에 이름모를 고승의 부도 1기가 서 있습니다. 부도는 정방형의 지대석 위에 팔각 앙련의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타원형의 탑신을 올렸습니다. 탑신에는 명문이 있었던 흔적이 보이나 마모되어 판독되지 않으며, 옥개석은 처마를 들어올린 듯한 모습의 팔작지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
유홍준님의'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변함없는 것은 오직 무위사의 늙은 개뿐이었다. 진돗개, 셰퍼드, 도사견, 누렁이의 잡종인 이 송아지만한 무위사 개는 아마도 천수를 다했을 나이이다. 내가 이 정치 큰 무위사 개를 본 지도 10년이 되었다. 이 늙은 개는 능구렁이가 다 되어 답사객이 들어오건 불자가 들어오건 불자가 들어오건 꿈쩍도 않는다. 양지바른 벽쪽에 길게 엎드려 고개를 앞발에 푹 묻고는 다만 눈꺼풀만 잠시 들었다가 2, 3초 이내에 감아버린다. "응, 너 또 왔냐"는 식이다. 저것은 능청일까, 달관일까, 체념일까? 정답은 음흉이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대를 잇는(?) 무위사지킴이 누렁이
그 개는 아니지만 손자벌인 개일까? 아침의 불청객 뒤로 소리없이 와서는 '킁' 소리를 내며 겁을 주며 여기서 함부로 하지말라는 듯 눈을 부라리고는 주차장 쪽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위의 늙은개와는 성질이 약간 다른듯 하군요.
무위사 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서..
설록차(태평양) 장원다원 [9만9천평] 1980년 개간
차는 주위 환경과 끓여내는 사람에 따라 그 맛이 다르다고 합니다. 소나무 숲에서 딴 차는 솔 향을 내고, 대나무 숲에서 딴 차는 댓잎 향을 가지며, 어진이가 만든 차는 달고 어질지 못한이가 만든차는 쓰다고 합니. 월출산 자락에서 딴 차는 월출산의 안개처럼 부드럽고 남도 사람의 성정처럼 진하다는데....
200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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