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백련사)
만덕산(萬德山) / 백련사(白蓮寺)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 표지석
백련사에 가려면 강진읍을 벗어나 구강포를 끼고 남서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강진읍에서 2번 도로를 따라 영암쪽으로 가다 만나는 만덕산 백련사 입구의 표지석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약 1.4km 정도 포장 도로를 따라 올라가야 백련사 입구의 주차장이 나옵니다.
멀리 만덕산의 풍경과 산 속의 백련사
만덕산을 뒤로 하고 병풍처럼 늘어 서 있는 동백 숲은 한 낮에도 어두컴컴할 정도로 울창합니다.
백련사 오르는 길의 연못과 동백나무 숲길
백련사의 동백림(白蓮寺 冬柏林)
천연기념물 제151호, 전라남도 강진군 모암면 만덕리.
백련사 동백림은 백련사의 남쪽과 서쪽 구간의 3.12ha에 달하는 면적에 수 천 여그루의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뤄 집단으로 자생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고, 밑에서는 차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가장자리에 왕대의 숲이 있다. 차나무는 정다산(丁多山/1762~1836)선생이 차에 대하여 연구하던 유물의 하나라고 보기도 한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의 상록교목으로 우리나라의 난온대지방을 대표하는 수종이며 남쪽 해안이나 섬에 주로 분포한다. 꽃은 이른봄에 피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柏), 추백(秋柏), 동백(冬柏)으로 불리기도 한다.
백련사의 동백림은 동백나무가 집단적으로 자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선생과 관련된 문화적 장소로서의 가치도 높아 1962년부터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안내판에서..>
만덕산 깃대봉에서 바라본 백련사 <자료사진:감래킹님>
저쪽에 강진만의 상류쪽이 보입니다. 바닷가 옆 바둑판의 들녁에는 보리가 자랍니다.
백련사 전경 <자료사진:감래킹님>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이란 산 이름을 따서 만덕사라 하였으나 현재는 백련사라 부르고 있다. 이 사찰은 신라 말에 창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고려 명종 때인 1170년에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한다.
특히, 요세는 귀족불교에 대한 반발로 서민 불교운동이 한창이던 고종19년(1232)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고종23년(1236) 백련결사문을 발표하여 '백련결사운동'을 주창 함으로써 백련사가 전국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왜구의 잦은 노략질로 폐사가 되다시피 하였으나, 조선초기 세종 때 행호주지가 대규모 중창불사를 하여 옛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후기에는 8대사를 배출하여 전국에서 명실 공히 으뜸가는 명찰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후기에도 몇 차례의 중수가 이루어 졌으며, 현재는 대웅전, 응진당, 명부전, 삼성각, 요사채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강진군>
백련사와 동백나무 숲 <자료사진>
<동국여지승람>에서 이 절을 가리켜 "남쪽 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며 동백 또한 곁들여서 창취(蒼翠)가 사계절을 통해 한결 같은 절경"이라고 할 만큼 주위의 경관이 훌륭합니다.
동백 숲속의 원구형 부도 <자료 사진>
강진 백련사 원구형 부도(康津 白蓮寺 圓球形 浮屠),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3호
부도는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이 부도는 이 곳에서 가장 크고 만들어진 시기가 빠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부도의 탑신이나 기단부에 당호 또는 명문이 없어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 부도가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고려시대인 1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탑신은 원구형이며 탑신 당산쪽 사방으로 연꽃 무늬의 연주문 띠를 장식하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특이한 기법이다. 옥개석(지붕돌)은 팔각인데 낙수면이 경사가 급하고 우동마루가 뚜렷하나 귀꽃이 없이 밋밋하게 처리되었다.
이 부도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팔각원당형에서 몇 가지 변형된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기단부는 사각형에 가깝고 탑신은 거의 원형에 가까운 원구형인데 이러한 형태로는 국보 제102호로 지정되어있는 정토사흥법국사실상탑(1017년, 현 경복궁 내)이 있다. <안내판에서..>
절 입구의 부도 (누구의 부도인지 설명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부도와 강진만(구강포)
구강포는 탐진강을 비롯한 아홉 골의 물길이 모여 만들어진 강진만의 다른 이름입니다. 구강포는 거듭된 간척사업과 제방이 건설되면서 예전의 번성했던 영화는 사라지고 맛조개, 꼬막 등을 줍는 주민들과 겨울철새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는 소박한 곳으로 변했습니다.
만경루 앞의 노거수(老巨樹), 느티나무
만경루 앞의 오래된 배롱나무
만경루 앞에 조성된 정원
배롱나무와 강진만
강진만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일출과 일몰 무렵으로, 멀리 바다 위에 떠 있는 수 많은 섬들은 뜨고 지는 햇살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저마다 뽐낸다고 합니다.
동백 군락지로 이름난 백련사 <사진=강진군청 제공> |
만경루(萬景樓)와 범종각(凡鐘閣)
만경루(萬景樓)
가람 배치상 현재는 백련사에서 만경루가 가장 앞에 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예전에는 그 앞에 해탈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규모가 큰 사찰에는 보제루(普濟樓)라는 건물이 따로 있는데, 누각 형식의 이 건물은 보통 법당과 불이문[해탈문] 사이에 위치합니다. 따라서 만경루는 백련사의 보제루였던 셈입니다.
만경루 누각 밑 계단
원래는 막혀 있어 만경루를 빙 돌아 대웅전에 갈 수 있었으나, 다른 사찰과 같이 만경루 밑을 통하게하여 쉽게 대웅전에 오를 수 있도록 고쳤나 봅니다.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에는 "만경루 아래층 벽면은 무슨 창고나 되는 양 널판지로 굳게 막혀있다." 고 가람배치의 불친절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대웅보전 뜰에서 본 만경루
백련사 입구를 막아선 만경루는 대웅전에 맞먹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크다. 만경루에서 내려다 보면 탐진강이 강진평야를 가로 질러 남해바다와 만나는 강진만이 멀리 한눈에 들어온다.
만경루(萬景樓) 현판
현판의 글씨는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당대의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입니다.
대웅전 뜰에서 보는 만경루 밑 계단
육화당(六和堂)
육화당은 'ㄱ'자의 전각으로 본래 있던 요사를 1995년 확장 중수한 것으로서 1층은 식당이고 2층은 객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육화(六和)란 부처님께서 교단의 화합을 위하고 대중이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세를 일깨우고자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을 말씀하셨는데, 그 여섯 가지 발원을 말한다고 합니다.
입구에서 바라본 육화당(六和堂)
백련사 대웅보전(白蓮寺 大雄寶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
대웅전(大雄殿)은 석가모니를 주존불로 모시는 건물이다.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내부에는 목조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삼존불은 중앙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협시보살상이 배치되어야 하는데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고려 명종 때인 1170년 경에 중수된 후 조선 세종 때 2차 중수를 하였으며,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정면3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옆에서 볼때 '八'자 모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있는 형식)이다. 추녀마다 활주를 세워 4개의 활주가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앞면 2개의 주두에 용두를 장식하여 단청과 함께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을 준다. <안내판에서..>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 안에는 전각의 중수사실을 알려주는 중수기 현판2매가 걸려 있는데, 하나는 <백련사대법당중수기>로서, 대웅보전의 중건 배경과 연도및 불사에 참여한 스님들의 이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1760년(영조36)2월에 큰불이 일어나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왈찰(日制) ·지정(智正) 혜철(惠哲) · 태화(太和) · 신징(愼證) · 규연(圭演) · 찰연(奈演) · 윤철(閨哲) ·연징(蓮潑) ·붕관(鵬寬) 스님 등이 중건을 서원하고는 각자 분담해서 여러 곳에서 시주를 모아 이듬해 4월 8일 불사를 시작,1762년 4월 13일 대법당 등의 중건을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이 중수기는 동강(桐問) 이의경(李載敬,1704~1778)이 지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설 지일(晶雪智逸) 스님이 지은 <해탈문중수기>인데, 1836년(헌종 2) 해탈문을 중수한 사실이 적혀 있습니다. 해탈문은 지금은 없지만 당시에는 만경루 아래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밖에 안에는 사자(飾子)를 조각해 법고를 받치도록 고안한 법고대(法鼓臺)와 반자(飯子)가 하나 있습니다. 법고대는 법고보다 오래된 것인데, 연잎 형태를 한 받침 부분의 지름으로 보아 본래의 법고는 현재 것보다 더 컸던듯합니다. <참고자료>
대웅보전(大雄寶殿)의 현판과 용두(龍頭)
대웅보전(大雄寶殿)의 현판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의 글씨 역시 당대의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입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정면의 용두(龍頭)
부처님과 불국토를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으로서 사찰 도처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단청
대웅보전 수미단(須彌壇) <자료사진>
대웅보전에는 석가·약사·아미타불의 삼세불좌상이 있습니다. 석가불은 현재불, 약사불은 과거불, 아미타불은 미래불을 상징합니다. 높이가150cm인 본존불은 머리가 나발이며 머리 위에는 조그만 보주형 육계가 솟아있고 그 아래에 계주를 표시하였습니다. 두꺼운 느낌을 주는 옷자락이 양어깨를 감싸고 가슴에는 내의 자락이 표현된 항마촉지인을 한 오른손을 가부좌한 무릎 위에 놓았습니다. 양협시불은 본존불과 유사한 모습이지만 중품하생인을 하고 있습니다.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
백련결사는 염불수행을 강조한 결사로서, 1216년 원묘요세(圓妙了世)의 주도하에 강진 만덕산 백련사(白蓮寺)에서 이루어졌다. 강진은 배가 드나드는 물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상인을 비롯한 많은 재가자들도 참여했던 불교결사였다. <조용헌 살롱 발췌>
대웅보전(大雄寶殿)의 활주(活柱)
팔작지붕의 추녀 밑을 받치는 기둥을 활주(活柱)라 하며, 대개 매우 가늘고 원형 또는 팔각형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자연석기단(自然石基壇)과 활주초석(活柱礎石)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서로 이를 맞춰가며 쌓은 기단과 활주를 지지하는 활주초석이 멋스럽습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초석
대웅보전(大雄寶殿) 뜰의 괘불석주(掛佛石柱)
괘불석주는 괘불대를 끼워 괘불을 세우는 기둥으로 대웅전이나 법당 앞에 2개가 한조를 이루어 양쪽에 서있는 작은 돌기둥입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측면
명부전과 대웅보전
명부전(冥府殿)
저승의 명부를 상징하는 불전을 이르며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모시고 있다고 해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고 해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부릅니다.
명부전 입구의 금강역사(金剛力士)
명부전(冥府殿) 현판
명부전(冥府殿) 내부
이곳에는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무독귀왕, 도명존자 및 시왕 10체와 판관, 녹사, 인왕상 각2체 그리고 사자상 1체는 지장보살의 권속으로 봉안되어 있습니다. 또한 영조51년(1775)에 정암 즉원(晶巖卽圓, 1738~1794) 스님이 지은 '시왕전중수기' 현판이 있어 연혁을 아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명(冥)이란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하기에 명부란 저승세계를 뜻하며, 지옥 중생들을 구제하는 지장보살과 십대왕들을 모시게 됩니다.
범종각(梵鐘閣)
만경루 옆에 있으며 새로 지은 종각입니다. 본래의 종각은 칠성각과 대웅보전 사이에 있었으나 1991년 현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응진당(應眞堂)
부처는 아니지만 부처님의 제자나 고된 수행을 거쳐 진리를 깨달은 역대의 고매한 존재를 모신 집이 응진전 또는 나한전으로도 불립니다.
응진당(應眞堂)
백련사 응진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아난, 가섭이 협시를 이루고, 16 나한상 및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응진(應眞)이란 '존경 받을만 하다', '공양 받을만 하다'라는 의미라 합니다.
응진당(應眞堂) 현판
삼성각(三聖閣)
백련사 삼성각에는 좌측에 칠성탱화, 우측에 산신탱화, 그리고 중앙에 독성탱화가 있습니다. 산신탱화는 가로 83cm, 세로 104cn로서 1931년에 봉안되었는데 본래는 대웅보전에 있었다고 합니다. 소나무 아래 부채를 들고 있는 산신령과 항상 따라다니는 호랑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동자가 그려져 있는데, 호랑이의 표현이 민화적이며 재미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중앙에는 치성광여래를 협시하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있고, 상단에 일곱부처님이 모셔져 있으며, 하단에는 도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성군(星君)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동백(冬白)
현판 없는 건물 앞의 부도
부도
백련사에서 본 강진만
강진만을 건너 바라다 보이는 곳이 고려청자의 생산지로 유명한 강진 사당리입니다. 백련결사 운동이 절정에 이르는 13세기 후반에 사당리의 사기장(砂器匠)들도 결사에 참여하여 그릇을 시주했는지, 아니면 어떤 사람이 백련사에 시주할 그릇을 사당리의 사기장에게 주문하였는지 그릇 바닥 안에 '만덕(万德)'이란 글씨가 상감된 13세기 후반의 청자조각이 사당리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참고자료>
감로수와 기와불사
백련사 사적비(白蓮寺 史蹟碑)
보물 1396호,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
이 비는 대웅전의 북서쪽으로 약 50m 떨어진 빈터에 자리잡고 있다. 백련사에는 고려 명종 때의 문신 최자(1188~1260)가 지은 원묘국사의 비 등 여러 개의 석비가 있었으나, 현재는 이 비만 남아있다.
비문은 홍문관 수찬을 지낸 조종저(趙宗著/1631~1690)가 짓고, 낭선군 이우(1637~1693)가 글씨를 쓰고 동생인 낭원군 이간(1640~1699)이 전서를 써서 조선 숙종7년(1681) 5월에 세운 것이다. 비문에는 모두 19행으로 1행은 45자인데 백련사의 중수, 원묘국사의 행적과 백련결사에 관한 내용 등이며 뒷면에는 이 비의 건립에 참여한 72명의 승려명과 인명이 음각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고려시대 최자(1188~1210)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비가 있었으나 유실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을 보면 비신은 유실되고 귀부(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만 남았었는데, 숙종 신유년(1681)에 다른 돌로 비를 세우면서 귀부는 옛것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안내판에서..>
귀부(龜趺)
고려 돌거북은 점잖게 수염을 늘어뜨리고 두 눈을 씩씩하게 부릅뜨고 아래윗니를 맞물고 있으며, 여의주를 물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이수
높이 4m에 달하는 백련사 사적비는 귀부와 탑신, 그리고 용이 반결하는 방형의 옥개석인 이수를 갖추고 있습니다. 비의 크기는 구부 높이가 110cm이며 비신 높이는 233cm, 비폭은 118cm입니다. 이 사적비는 그 건립 연대가 비록 조선시대이지만, 귀부를 안치하고 이수에 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등 전통기법을 잘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대종사비명(大宗師碑銘)
명부전과 대웅보전
선방(禪房)
육화당 뜰에서
백련사 가는 길에 새로 조성되고 있는 넓은 연못(?)
되돌아본 만덕산
백련사의 아랫 마을
백련사 입구 버스 정류소
버스정류소 창 밖의 풍경
2007.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