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전라남도

해남(녹우당)

케인스 2007. 6. 22. 21:30

                                                       해남(녹우당)

 

 

녹우당(綠雨堂) / 해남윤씨 종가(海南尹氏 宗家)

 

 

         

 

고산윤선도유적지(孤山尹善道遺蹟地) / 소재지: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이 곳은 조선의 문신(文臣)이요, 국문학상 대표적인 시조시인으로 일컫는 윤선도(尹善道:1587~1671)선생의 유적지(遺蹟地)이다. 선생의 자(字)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선생은 광해(光海)4년(1612)에 진사(進士)되고, 4년 후 성균관유생(成均館儒生)으로서 권신(權臣)의 횡포를 지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벽지에 유배되었다. 광해 15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자 석방되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이곳 향리(鄕里)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인조6년(1628)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초시(初試)에 장원한 후 봉림(鳳林)과 인평(麟坪)을 모시는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고 한성서윤(漢城庶尹)과 예조정랑(禮曺正郞)을 역임하는 등 수차에 걸쳐 나라에 중용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후에는 주로 완도(莞島)의 보길도(甫吉島)와 해남(海南)의 수정동(水晶洞) 및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하여 자연에 들어 원림(苑林)을 경영하고 산중신곡(山中新曲)과 어부사시사(漁父四詩詞) 등 불후(不朽)의 명작을 이루어 조경문화(造景文化) 및 국문학(國文學)의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그 사이 효종(孝宗)의 부름으로 벼슬에도 나아갔으나 당쟁으로 다시 유배당하는 등 많은 파란을 겪다가 현종(顯宗)12년에 85세로 졸(卒)하였는데 숙종(肅宗) 원년에 신원되어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추종되고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하였다.

 

이곳 유적지에는 선생이 시문에 열중하던 해남윤씨(海南尹氏) 종가(宗家)의 고택(古宅)과 녹우당(綠雨堂:사적 제167호), 그리고 그의 선조 어초은사당(魚憔隱祠堂) 외에 고산사당(孤山祠堂) 및 추원당(追遠堂)이 있고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에는 윤공재자화상(尹恭齋自畵像:국보 제240호)을 비롯하여 해남윤씨가전고화첩(海南尹氏家傳古畵帖:보물 제481호), 윤고산수적관계문서(尹孤山手蹟關係文書:보물 제482호), 지정(至正)14년노비문서(奴婢文書: 보물 제483호) 등 소중한 유물이 있다.    <안내판에서...>

 

         

                                            연지(蓮池) <사진자료:오마이뉴스>

 

어초은의 성리학적 풍수사상이 반영되어 조성된 연지로 백련동이라는 마을이름이 이곳에서 유래하였는데, 녹우당이 있는 연동마을을 원래는 ‘하얀 연꽃이 피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백련동’ 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 연못은 2002년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이곳 백련지(白蓮池)는 집에 2차례의 화재가 있은 후 어초은의 꿈에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집터는 산강수약(山强水弱)하니 현재의 안채 자리로 옮기고 물을 만들어 흰 연꽃을 심어라" 하기에 방형의 평범한 형태의 연못을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이후에 고산선생의 뛰어난 조경 솜씨로 정자를 짓고 멋진 연못으로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 그 형태는 많이 변형되었고, 옛날에는 연지에 물이 가득 차 물속에 덕음산의 산 그림자가 비추어져야 집안이 잘되고 번성한다고 전해져 오고 있답니다.

 

               

                                            해남군 문화관광 해설가의 설명

 

                                 해남윤씨 종가 녹우당(海南尹氏 宗家 綠雨堂)

 

사적 제167호인 녹우당(綠雨堂)은 해남윤씨(海南尹氏) 종가(宗家)이다. 윤선도(尹善道)의 4대 조부(祖父)의 효정(孝貞: 호/어초은, 1476~1543)이 연동(連洞)에 살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사랑채는 효종(孝宗)이 스승인 윤선도에게 하사했던 경기도 수원집을 현종(顯宗)9년(1668)에 해상 운송하여 이곳에 이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녹우당의 건축은 풍수지리에 따라 덕음산(德陰山)을 진산(鎭山)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ㅁ 자형으로 구성되고 행랑채가 갖추어져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경역에는 가묘(家廟) 어초은사당(漁樵隱祠堂), 고산사당(孤山祠堂) 등이 있으며 입구에는 당시에 심은 은행나무가 녹우당을 상징하고 뒷산에는 오백여년된 비자나무 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우거져 있다.    <안내문에서...>

 

                                                         녹우당 전경

 

녹우당은 전라남도에 남아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집이다. 녹우당은 진산인 덕음산을 뒤로하여 서향하고 있습니다. 

                   

               

                                                     녹우당 앞 은행나무

 

녹우당 앞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500년으로 1982년 12월3일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나무의 높이는 20m, 나무둘레는 4.8m 입니다. 학자를 상징하는 이 은행나무는 자제들의 과거 급제를 기념하기 위해 어초은 윤효정 때 심어진 것이라고 전합니다. 유물관 뒤쪽으로는 세 그루가 더 있습니다.

 

                                                             녹우당

 

강진 일대에서 거주하던 윤씨들이 연동마을 일대에 자리잡은 것은 16세기 초 고산 윤선도의 고조부이신 어초은 윤효정 때부터입니다. 윤효정은 풍족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선덕을 쌓아 나라에서 해남 윤씨라는 본관을 하사받았습니다.                   

 

         

                                                          녹우당 대문

 

                     

                       현재 이 집에는 윤선도의 종손 14대손 윤형식씨가 살고 있습니다.

                                     

                                                        녹우당 사랑채

 

고산은 42세 때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는데, 효종은 즉위 후 고산을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효종이 죽자 1669년 수원 집을 뜯어 배편으로 인천 제물포에서 이곳까지 옮겨와 다시 지은 건물이 현재의 사랑채입니다. 이 사랑채의 이름이 '녹우당'이나 지금은 해남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녹우당'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집은 형식과 규모면에서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집으로 인정되어 사적 제16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녹우당'이 해남 윤씨의 살림집으로 틀을 갖추게 된 것은 고산의 증손자인 화가 공재 윤두서부터 입니다.

'녹우당'이란 이름도 그때에 지어진 것입니다. '녹우당'이라는 이름은 공재의 절친한 친구였던 옥동(玉洞) 이서(李曙)가 녹우당 뒤 산자락에 우거진 비자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 하는 소리가 마치 푸른 비가 내리는 듯 들린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녹우당 현판

 

'녹우당'이라는 현판 또한 옥동(玉洞) 이서(李曙)의 글씨입니다. 일명 동국진체(東國眞體)라고도 불리는 옥동의 필체는 윤두서, 윤순(尹淳), 이광사(李匡師) 등이 추종하고 계승함으로써, 숙종·영조·정조대에 걸쳐 서예계의 주류를 형성하였습니다.  

 

옥동 이서는 해남윤씨와 혼인을 맺었으며 실용 실리주의의 실학자였으며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창시자이자 우리나라 서예의 대가입니다. 그리고 성호사설을 지은 성호 이익의 형이기도 합니다.

 

               

 

해남 지방이 바다에 연해있기에 비바람이 심한 탓에 처마를 더 달아 낸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서향하고 있는 사랑채에 내려 쪼이는 햇�을 피하기위한 방편이기도 했으리라 여깁니다.

 

               환풍구가 지붕 위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다른 양반가에서 볼 수없는 형태입니다.

 

                    

                                          사랑채에서 사당으로 나가는 뒷문

                   

                     

                                                               해송

 

사당으로 가는 뒷문 쪽에 있는 해송은  1982년 12월3일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나무의 높이는 24m, 나무둘레는 3.4m 입니다.

 

                                                          고산 사당 대문

 

이곳은 고산선생의 불천위를 위한 사당입니다. 고산선생은 사후 56년만인 영조3년(1727)에 불천위로 지정되었습니다. 삼문 형식의 좌우 문짝 부분의 처리가 독특합니다.

 

                                                        어초은 사당 대문

 

이곳은 어초은선생을 위한 사당입니다. 어초은선생은 해남 윤씨의 중시조로서 위대함을 기려 문중에서 순조22년(1822)에 사당을 중수하여 따로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초은 사당 <사진자료:오마이뉴스>

     

                

                                               어초은 묘  <사진자료:오마이뉴스>

 

              입향조 어초은의 묘가 녹우당 뒷편 적송으로 둘러쌓인 숲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비자(榧子)나무 숲 / 천연기념물 제241호

 

해남(海南) 연동리(蓮洞里)의 비자(榧子)나무 숲은 해남윤씨의 중시조인 윤효정이 500년 전 심은 것이 자란 것이라고 하는데, 가장 큰 나무는 높이 20m 내외, 가슴높이의 지름이 1m 정도입니다. 위쪽에 커다란 참식나무가 한 그루 서있습니다. 가장 큰 곰솔은 높이가 25m, 지름이 1m 정도입니다.

 

숲 속에는 사스레피, 참식, 개비자, 모새, 자금우, 동백, 마삭덩굴, 남오미자, 송악 및 보리밥나무 등의 상록활엽수종과 더불어 맥문동, 소엽맥문동, 및 춘란 등이 군데군데 자라고, 주변에는 참나무류 및 서어나무류 등의 낙엽활엽수로 싸여있습니다.

 

          

                                    제각(祭閣)인 추원당 전경 <사진자료:오마이뉴스>

 

                                                          추원당 대문

 

         

                                                               추원당

 

                                    어초은을 위한 제각 / 추원당

제각은 보통 무덤 근처에 제청(祭廳)의 용도로 지은 집을 말합니다. 제청은 기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당 옆에 지은 것을 말하는데, 이와 유사한 재실(齋室)도 무덤이나 사당 옆에 있었으며 제사를 지내기 위한 집으로 의례도구의 보관과 문상객의 숙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기후가 좋지 않으면 제청이나 재실에서 묘제를 지내기도 해 이 때문에 제각과 재실, 제청을 혼동하여 부르기도 합니다.

 

                     

 

                        

 

               

                                                      추원당 뒷편의 차밭                                   

 

                                                      고산 유물 전시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9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고산 유물 전시관은 지남 1968년 이곳 녹우당이 사적 제167호로 지정됨에 따라 1979년 42평 규모의 고산유물전시관을 건립하고 유물500여점을 전시하게 되었다. 이후 1991년 114평 규모의 유물전시관이 건립되어 이곳에 유물 4,600여점을 전시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곳 전시관의 이름은  고산선생의 시호를 따 충헌각(忠憲閣)이라 하고 있다.

 
고산 유물전시관에는 종가에서 잘 보존해 온 고산 윤선도 선생과 그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 선생을 비롯하여 해남윤씨가에 전해져 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 이곳에는 국보 240호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보물 481호인 해남윤씨가전고화첩(海南尹氏家傳古畵帖0, 보물 482호인 윤고산 수적관계문서(尹孤山手蹟關係文書), 보물 483호인 지정14년노비문권(至正十四年奴婢文卷) 등을 비롯하여, 해남고산유고목판일괄(海南孤山遺稿木板一括)이 도유형문화재 219호로지정되어 있는 등 수많은 문화재급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위와같은 지정문화재와 함께 천문학, 역학, 수학, 지리, 의약, 음악, 서찰, 서화, 규방가사, 교지류 등 중요한 고문서와 전적 1,512권을 포함 4,600여점의 유물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안내문에서..>                   

 

                    

                                           유물전시관에서 바라본 녹우당

 

                    

               고산유물관의 이름은  고산선생의 시호를 따 충헌각(忠憲閣)이라 하였습니다.

 

고산 윤선도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 선조20년~1671 현종12년) 선생은 한성 동부 연화방(현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유심과 어머니 순흥 안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고산은 8세 때 작은 아버지 유기의 양자로 입양되 해남윤씨의 대종을 잇는다.

  

고산의 생애는 한마디로 유배와 은둔의 생활이 거듭된 굴곡 많은 삶으로 고산은 이러한 자신의 삶을 시문으로 풀어 내었다. 고산의 일생은 당시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이었으며, 이로 인해 관직에 있던 기간은 얼마되지 않고 대부분 중앙정계와 멀리 떨어진 유배와 은둔의 삶으로 궁벽한 곳에서 보내게 된다. 또한 고산은 천성적으로 강직하고 곧은 성격을 지녀 부당함을 보면 자신의 주장을 감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순탄한 일생을 살지 못했다.

 

고산은 26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지만 당시는 광해군이 다스리던 시기로 이이첨 등 북인들이 득세하여 광해군에 아첨하는 권세가들의 횡포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30세에 고산은 이이첨 일파의 불의를 비난한 '병진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 주변 간신들의 모함으로 함경도 경원으로 첫 유배를 당하며, 다음해는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된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유배에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제수 되지만 유배 후의 심정이 정리되지 않아 곧 사직하고 이곳 해남으로 돌아온다. 고산은 42세가 되었을 때 출사의 꿈이 펼쳐진다. 별시 초시에 장원급제하고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거쳐 7년여 요직을 두루 거치며 정치적 경륜을 쌓는다. 그러나 48세에 성산현감으로 좌천되고 경세의 뜻이 좌절되자 다음해 현감직을 사임하고 해남으로 다시 귀향한다.

 

고산은 이와같은 역경 속에서 주로 자연에 귀의해 은둔생활을 하며 문학적 업적을  남기는데 고산의 대표적인 은둔처가 현산면 금쇄동과 완도 보길도이다. 이곳에서 <오우가>로 대표되는 <산중신곡>을  비롯하여 <어부사시사> 등의 대표작을 남기게된다. 고산은 문학뿐만 아니라 학문, 예술 전반에 걸쳐 두루 섭렵하여 의약, 복서, 음양, 지리에도 통달하여 박학다식하였으며, 그가 머문 곳에 이룩한 원림 경영은  조경과 건축문화의 많은 발자취를 남겨놓았다.

 

이러한 고산의 학문과 예술의 기초는 당대 최고의 위치에 이른 것으로 이는 해남윤씨가의 가업으로 이어지며 후일 실학을 완성한 외손 정다산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게된다. 고산 선생은 은둔지인 보길도에서 여생을 보내다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며 현산면 금쇄산성 아래 문소도에 묻힌다. <안내문에서...>

  

                      

                                           산중신곡(山中新曲) / 보물 제482호

 

고산선생이 인조20년(1642) 56세에 지은 친필가첩(親筆歌帖)으로 그의 시가문학 중 가장 대표작으로 알려진 오우가(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 등 시조 19수가 실려있습니다.

 

                        고산 윤선도 산중신곡 中.  [오우가(五友歌)]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빛이 맑다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때가 많은도다          맑고도 그칠 때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른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음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이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소나무야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지하의 뿌리 곧은 줄은 그것으로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치니
   밤중에 광명이 너만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고산 선생이 효종2년(1651) 65세에 지은 시조 작품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10수 씩 전체 40수로 되어 있으며, 완도 보길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 4계절 中 각 첫수

 

   <봄노래>                                                           <여름노래>

   앞개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비친다                           궂은 비 멈춰 가고 시냇물이 맑아온다
   배 띄워라 배 띄어라                                              배 띄워라 배 띄어라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낚시대를 둘러 메니 깊은 흥이 절로 난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강촌의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산수의 경개를 그 누가 그려 낸고

 

   <가을노래>                                                         <겨울노래>

   물외에 맑은 일이 어부생애 아니던가                        구름 걷은 후에 햇볕이 두터웠다
   배 띄워라 배 띄어라                                              배 띄워라 배 띄어라
   어옹을 웃지 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라                        천지가 막혔으니 바다만은 여전하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사철 흥취 한가지나 가을 강이 제일 좋아                   한 없는 물결이 깁을 편 듯 고요하다

 

         

                                 교지(敎旨)  고산선생 66세 때 예조참의 임명장

 

                     

                                   고산 양자 예조입안문서 / 보물 제482호

 

고산선생이 해남윤씨의 대종을 잇기 위해 8세 때 큰 집의 양자로 입계된 후 1602년 6월2일 16세 때 예조에서 입안을 해준 문서로 지금의 공증(公證)과 같습니다. 이 문서에는 예조판서를 비롯 관련 보직자의 수결(手決)이 되어 있어, 그 당시 모든 문서에 수결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숙종5년(1679) 8월 충헌(忠憲)의 시호교지(諡號敎旨)

 

               

                           노비문권(奴婢文券) / 보물 제483호 <사진자료:오마이뉴스>

 

고산선생의 8대조 광전(光琠)이 고려공민왕3년(1354) 아들에게 노비를 허여하는 문서로서 고려 때 개인의 노비문서로는 우리나라에 단 하나 남아있는 문서입니다.  

 

              

                                          방성도(方星圖) <사진자료:오마이뉴스>

 

                                    공재 윤두서 선생이 사용한 천문에 관한 도서

 

          

                            고산유고목판(孤山遺槁木板) / 유형문화재 제219호

 

고산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원본의 유실에 대비하여 정조임금이 정조20년(1796) 전라감사에게 명하여 시문집을 새긴 목판입니다.

 

                                   화첩(畵帖) / 해남 윤씨 가보 (海南尹氏家寶)

 

해남 윤씨 선조가 후손들에게 그림을 모아 전해준 화첩으로 1968년 12월19일 보물 제48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화첩은 공재 윤두서를 비롯 아들 낙서 윤덕희, 손자 청고 윤용 등 3대가 그린 작품 70여점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작품이 많으며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를 비롯해서 격룡도(激龍圖), 사자나한도(獅子羅漢圖), 나물캐는 여인 등의 그림은 자화상(국보240호) 다음가는 작품으로 당시 화술의 높은 수준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나물캐는 두여인'(採艾圖:채애도) / 보물 제481호 <사진자료>

 

이 그림은 민속화로서 봄나물을 캐는 두 여인의 모습, 서민 아낙들의 의생활을 짐작하게 합니다. 두 사람 중 한 여인은  쑥을 찾느라고 고개를 사방으로 돌아보고 있고, 한 여인은 허리를 구부리고 방금 찾아낸 쑥을 캐려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백마도(白馬圖) / 보물 제 481호

 

공재의 대표적 작품으로 말이 비대하면서도 단단하게 묘사되고 정지된 상태에서 뒷다리를 살짝 들어올리는 조그만 변화를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인도(美人圖)

 

청고(靑皐) 윤용(尹鎔)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미인도는 큰 트레머리관을 양손으로 매만지는 입상으로 간송미술관 소장 지본담채(指本談彩)의 혜원(惠園)의 미인도와 아주 닮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산의 유품

 

                     

                                    동국여지지도(東國與地之圖) / 보물 제481호

 

공재 윤두서 선생이 그린 조선 후기(1710)의 우리나라 지도입니다. 훗날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대동여지지도 보다 151년이나 앞선 지도입니다. (후손들이 잦은 국난으로부터 지도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항아리에 넣어 보관하다가 뒤늦게 세상에 알렸다고 합니다)

 

                     

                                    공재자화상(恭齋自畵像) / 국보 제240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으로 선생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한국 미술 오천년 전 및 국제적인 미술 전시회 출품된바 있습니다. 1968년 12월 19일 선생의 작품을 모은 화첩을 보물 제481호 1987년 12월 22일 선생의 자화상을 국보 제 240호로 지정하여 이곳에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 자화상은 그의 나이 45세 때 한양 생활을 청산하고 해남으로 낙향한 해에 녹우당에서 그린 작품입니다.

  

공재 윤두서

 

공재 윤두서(尹斗緖: 1668~1715)선생은 우리 회화사상 조선 중기와 후기를 잇는 화가로 겸재 정선(鄭敾), 현재 심사정(沈師正)과 함께 조산시대 삼재(三齋)로 일컫고 있다.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로 고산 윤선도 선생의 증손이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이기도 하다. 공재는 숙종19년(1693) 26세 때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서인이 세력을 잡고있던 시절이어서 벼슬을 하거나 정치적으로 출세하기가 어려웠다. 당쟁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으며, 1712년 45세 때에는 해남의 연동(連洞) 종가로 낙향하여 그립과 글씨를 벗하며 보냈다. 1774년(영조50)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곳 유물관에는 공재의 대표작인 <자화상> 외에도 공재의 학문적인 경향을 알려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자화상)은 국보 2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백마도>, <채애도> 등 60여 점의 소품으로 꾸며진 해남 윤씨가전고화첩(海南尹氏家傳古畵帖)은 보물 481호이다. 저서로 <기졸(記拙)>이 있다. 공재는 인물이나 동식물을 그릴 때 반드시 종일 관찰하여 그 참모습을 그리려고 애썼다. 이는 <자화상>에서 느껴지듯이 사실주의적인 화풍을 통해 새로운 회화의 세계를 열었다. 또한 목기 깍는 장면을 그린 선차도(旋車圖)와 나물 캐는 여인을 그린 <채애도(採艾圖) 등 풍속화를 선보여 풍속화의 선구자로서 18세기 중, 후반의 김홍도, 신윤복으로 이어지는 풍속화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공재가 남긴 작품 중에는 <동국여지지도>, <일본여도>가 있는데, <일본여도>는 숙종대왕의 밀명으로 사재를 들여 48인을 일본에 보내 수집한 자료를 모아 그린 지도로 전해져 오고있다.

 

공재의 화업은 장남 낙서 윤덕희(1685년~1766년)와 손자 청고 윤용(1708년~1740년)에 까지 3대에 이어져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가 서화가문을 이루었다. 그는 남인 실학자들과의 많은 교유를 통해 실학적인 경향을 보이는데, 서예, 회화, 전각에 능통하였고, 천문, 지리, 금석학, 병서 등에도 식견이 탁월하였다. 공재의 이러한 실학적인 경향은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안내문에서...>

 

                

                                      보길도윤선도유적(甫吉島尹善道遺蹟)

 

사적 제368호(1992.4.23지정)인 보길도윤선도유적(甫吉島尹善道遺蹟)은 전남 완도군 부황리에 위치합니다. 고산 선생 51세 병자호란 당시 고산 선생은 원손대군을 구출하려고, 해남에서 자제와 가복 백수의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에 닿았으나, 이미 함락 당한 뒤였다. 사세가 이미 그릇되었음을 통영 중군(中軍) 황익 등과 통곡하였다. 귀향하는 뱃길에서 인조대왕이 항복하고 환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선생은 치욕적인 세상에 나오지 않고 제주도로 들어가 은둔하려고 항해 중에 경관이 수려한 보길도를 발견하였다. 이 섬은 산과 내로 둘러 있어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아늑한 분위기는 전에 못보던 절승이요 가경이었다. 선생은 제주행을 포기하고, 이곳에서 터를 닦아 부용동이라 하고, 집을 지어 낙서제라 명명하였다.

그러나 대궐로 돌아온 임금을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번 째 유배를 당하였다가 다음 해 풀려난다.

 

이곳 보길도에는 낙서재(樂書齋)와 세연정(洗然亭)을 비롯 세연지, 회수담, 판석보, 옥소대, 동대, 서대, 무민당, 곡수당, 동천석실, 소은병,  등 많은 유적이 있다. 이들을 부용동 원림 또는 부용동 정원이라 하여 경영하였고, 특히 세연정에서 어부사시사 40수를 창작하여 금쇄동에서 지은 산중신곡 등과 더불어 국문학에 빛나는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아름다운 보길도를 가꾸며 주옥같은 문학작품과 부용동 정원을 남겨주고, 85세로 영욕의 세월을 마감하셨다. <안내문에서...>

 

               

                                          세연정(洗然亭) <사진자료; 오마이뉴스>

 

세연정은 보길도 고산 유적의 중심이다. 이곳에 원림을 조영하고, 고산문학 창작의 산실로 자신의 작품을 직접 기획 연출하던 종합예술공연장이었다.

 

세연정은 세연지와 회수담 가운데 높게 축대를 쌓고 그 축대 위에 세웠다. 낙서재, 무민당, 세연정에는 모두 널판으로 문을 만들어, 문을 열면 윗짝은 처마에 걸리고 아래짝은 땅에 드리우게 된다. 위 아래짝을 합하여 닫으면 판옥이 되어 비와 바람을 막아준다. 비흥교 남쪽에는 일곱 암석이 있어 정자 서쪽의 편액을 칠암헌이라 하고, 중앙은 세연정, 남쪽은 낙기란, 서쪽은 동하각, 동쪽은 호각루라는 편액을 하였다. 공은 늘 무민당에 거처하면서 첫닭이 울면 일어나 경옥주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자제들에게 각기 배운 글을 읽고 토론하게 했다. 아침식사 후에는 사륜거에 풍악을 대동하고 곡수에서 놀기도 하고 석실에 오르기도 했다. 일기가 청화하면 반드시 세여정으로 향하되, 곡수 뒷산 기슭을 거쳐 정성암에서 쉬곤 했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하고 모시는 가운데, 연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었다. 그리고 남자 아이들에게 채색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하고,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 등을 천천히 노래를 부르게 했다. 당 위엣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했으며, 여러명에게 동대와 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혹은 긴 소매 차림으로 옥소암에서 춤을 추게도 했다. 이렇게 너울너울 춤추는 것을 연못 속에 비췬 그림자를 통해서도 볼 수 있었다. 또 낚시를 드리우기도 하고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무민당에 돌아왔다. 이는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며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 것이다. [이정섭 국역 보길도지에서 발췌]    <안내문에서...>

 

 

 

2007.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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