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대흥사)-5
대광명전(大光明殿)
표충사 뒤편으로 약 300m가량 들어간 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정면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의 대광명전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헌종7년(1841)에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며 전라 우수사로 해남에 내려와 있던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 1810~1884)와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9~1892)이 합심하여 김정희의 유배가 풀리기를 축수하며 지었다고 건물 수리 때에 발견된 <해남현두륜산대둔사비로전상량문(海南縣頭輪山大芚寺毘盧殿上樑文)>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대광명전(大光明殿) <사진자료>
대광명전(大光明殿) <사진자료>
대광명전의 현판 글씨는 정중한 해서체로 신관호님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단청과 벽화는 초의선사의 작품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에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의 삼신불을 모셨는데 가운데 불상이 훨씬 크고 좌우 협시불은 작습니다. 후불탱화는 법신삼십칠존도(法身三十七尊圖)인데 1845년에 초의선사와 신관호님이 힘을 합쳐 조성한 것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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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암(一枝庵)
대흥사 대웅전에서 700m가량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선승 가운데 한 사람이며 또한 우리 나라의 다성(茶聖)으로 추앙 받는 초의선사(草衣禪師)가 그의 ‘다선일여(茶禪一如)’ 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茶苑)인 일지암(一枝庵)이 나옵니다. 초의 선사는 일지암을 39세 때인 1824년(순조 24)에 중건하였는데, 1866년(고종 3) 81세로 입적할 때까지 40여년간 이곳에서 독처지관(獨處止觀)을 한 유서 깊은 암자이며 이곳에서 그 유명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습니다.
화재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곳에 1979년 초당과 자우홍연사(紫芋紅蓮社)를 복원하였습니다. 옛 모습을 살리려고 여수 율촌공단 공사로 허물게 된 고가의 100년 묵은 춘양목을 썼습니다. 초의스님의 시와 편지, 소치의 몽연록 등을 참고하여 조자룡이 설계한 것입니다. 초당 옆 계곡에 연못을 만들고 장주석이 아닌 단주석 여러 개를 포개 쌓은 위에 올린 누대 건물이 특이합니다.
대흥사 일지암은 우리 나라 다도의 요람으로 불리고 있으며, 매년 음력 8월 1일 초의의 열반일을 기해 추모 행사인 초의제(草衣祭)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일지암(一枝庵) <사진자료>
이 초정(草亭)은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두른 4평 규모의 띠집입니다.
일지암 전경 <사진자료>
일지암(一枝庵)
여기는 일지암(一枝庵))과 자우홍련사(紫芋紅蓮社)가 있던곳이디. 이곳 일지암은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로 차(茶)를 중흥시킨 초의(草衣)대선사(1786~1866) 장의순(張意恂) 스님께서 만년(晩年)40년(1826~1866)동안 계셨던 곳이고 자우산방(紫芋山房)은 초의스님이 삶을 꾸렸던 살림채이다. 스님께서는 일지암에서 차와 선, 시와 그림, 예술과 문화를 하나로 생활하하며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조의 장구한 역사의 큰 줄기에서 유일무일한 차의 교과서인 동다송(東茶訟)과 다신전(茶神傳), 그밖의 많은 책(禪門四辨漫語, 二禪來儀, 震默祖師遺巧 등)을 저술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의 거두이자 당대의 명사인 다산 정약용, 금석학과 추사체로 유명한 완당 김정희, 정조임금의 사위인 홍현주, 병조판서였던 권돈인, 조선 최고의 시인이라 일컫는 자하 신위 등 많은 대 석학들과 차(茶)를 매개체로 교파를 초월한 방외청교(方外淸交)를 맺었던 곳으로 다문화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특히 남종화(南宗畵)의 산실이기도 한 이곳은 소치 허련을 배출했던 곳이기도 하다. 진도 운림산방의 주인이었던 소치 허련은 초의와 추사의 두 스승을 인연으로 맺어 미산, 의재, 남농으로 이어지는 남화(南畵)의 화풍을 이루었다.
초의선사께서 입적하시고난 후 화재로 소실되어 그동안 폐허로 방치되었던 곳을 차를 아끼고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뜻울 모아 1979년에 복원하였다. 옛모습을 살리고자 여수에 있던 고가(古家)의 목재를 쓰고 초의스님의 시와 간찰(簡札, 소치가 저술한 몽연록(蒙緣錄)을 참고로하여 근대 3대 건축가의 한 분인 조자룡 박사의 설계로 복원되었다.
한국 선차실(禪茶室)의 전형(典型)인 일지암(一枝庵)은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아름다운 문화유산이다. <안내판에서...>
일지암(一枝庵) 현판 <사진자료>
일지암(一枝庵) 현판이 붙어 있는 정자는 1980년 한국다인회 회원들이 다도의 중흥조 초의가 기거했던 일지암을 기념하기 위해 복원하여 놓은 것입니다. 일지암(一枝庵)이란 뜻은 '크고 넓은 세상에서 가지하나[一枝]면 자신의 몸이 편안히 깃들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다감(茶龕) <사진자료>
초정과 연못 사이에 축조된 석축에는 ‘다감(茶龕)’이라 새겨진 평평한 면이 끼여 있습니다.
유천(乳泉) <사진자료:데일리안>
유천은 뒷숲 바위 틈새에서 나와 대나무 대롱을 타고 3개의 돌그릇에 차례로 담겨져 흐르는데 젖같이 달고 찻물 끓이기에 더없는 물이라하여 유천(乳泉)이라 부릅니다. 다인들은 품천에 따라 물을 여덟 종류로 나누었는데, 유천은 옛부터 다인들이 칭송해 마지 않았던 물이라 합니다.
자우홍연사(紫芋紅蓮社) <사진자료>
일지암의 본당인 초의다합(草衣茶盒)은 윗쪽의 연못에 평석을 쌓아올린 4개의 돌기둥이 누마루를 받게 하여 독특한 운치를 자아내는 부속채 건물로서, 규모는 누마루 포함해서 3칸이며 형태는 방과 부엌을 "ㄱ"자로 꺾어 세운 기와집이다.
앞 연못에는 잉어가 한가로이 노닐고 누마루에서 구름 낀 산경을 멀리 내려다보는 운치는 시(詩), 선(禪), 다(茶)의 경지가 한데 어우러진 차 문화의 산실이 됐음을 짐작케 합니다.
"연하(烟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연의 터에
중 살림 할 만큼 몇 칸 집을 지었네
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白雲泉)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캐었나니,
때로 원기(圓機)로써 묘련(妙蓮)을 펴며,
눈 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초의 스님이 일지암을 짓고 위의 시 한수를 읊으셨다고 합니다. 지금 일지암에는 여연스님이 계시는데 초의스님의 정신을 쫓아 30년 넘게 차를 연구한 차 전문가라 하십니다. 차를 모르면 일지암의 암주가 될 수 없다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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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암지 오층석탑(晩日庵址 五層石塔)
만일암지 오층석탑(晩日庵址 五層石塔) <사진자료>
두륜산 정상부인 가련봉아래 만일암터에 조성된 석탑이다. 전체높이 5.4m, 조성연대는 고려시대 중반기(12-13세기)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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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北彌勒庵磨崖如來坐像)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北彌勒庵磨崖如來坐像) <사진자료>
높이 4.2m의 고려시대 불상으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에서 고려시대 불상으로 옮겨오는 시대상을 엿볼수 있다. 두륜산 노승봉 아래에 마애미륵불이 조성되어 있는 북미륵암 있습니다.
북미륵암 용화전 <사진자료>
북미륵암은 용화전·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용화전은 마애여래좌상을 봉안하기 위한 것으로, 그 밖에 신중탱화와 산신탱화가 있습니다.
<사진자료>
북미륵암 삼층석탑(大興寺 北彌勒庵 三層石塔) : 보물 제301호
대흥사 북미륵암 오른쪽 약 30m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이다. 높이는 4m로 2중기단 위의 3층의 옥개석을 지닌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의 형식을 따랐다. 기단은 지대석(地臺石) 위의 하대석과 중석(中石)을 1석(石)으로 하여 4장의 긴 돌로 짰고, 그 중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하나씩 있다. 갑석(甲石)은 여러매의 두꺼운 석재로 구성하여 상면에 호형 괴임을 새겨 상층기단을 받쳤다. 상층기단 중석은 1장의 돌이고, 상층기단갑석은 1석으로 밑에는 부연이 있으며, 중앙에 괴임의 1단이 있어 탑신을 받게 하였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장인데, 탑신부의 1∼3층은 위로 갈수록 체감되어 있고, 각기 4개의 우주를 갖추고 있다. 다소 넓은 옥개석은 받침이 1 ·2층은 4단, 3층은 3단이 변화를 주고 있다. 추녀 밑은 직선이며 얇은 편으로 옥개의 사방 전각에 다소 경미한 반전을 나타내 매우 느린 곡선을 유지해 주고 있다. 옥개 상부의 경사는 완만하며 낙수면 역시 직선에 가깝게 처리되었다가 우동(隅棟)부분에서 느리게 반전을 나타내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이 남아 있고 다시 노반형과 앙화형(仰花形)의 석재가 놓여 있으며 나머지는 결실되었다. 석탑의 각부 양식 및 석재의 결구 역시 시대적 차이를 나타내고 있으나 신라석탑 양식을 착실히 따르고 있다.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된 3구의 금동불상이 1970년경 이 탑의 보수과정중에 발견되어 보관하고 있다. <해남군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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