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전라남도

해남(대흥사)-4

케인스 2007. 6. 14. 19:49

                                          해남(대흥사)-4

 

 

두륜산(頭輪山) / 대흥사(大興寺) 

 

                                                       무염지(無染池)

 

'무염지(無染池)'라는 이름의 연못은 참선문구인 처염상정(處染常淨)에서 나온 것으로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한국 차(茶)의 중흥조로 손꼽히는 초의선사(草衣禪師)가 화재로 소실된 남원 지역의 건물을 중창하면서 만들었는데 후에 응송(應松)스님이 현재의 모양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향로봉의 화기를 막는다’는 풍수의 비보로서의 역할도 한다고 합니다.

            

           

                                           동국선원?   비어있는 듯 합니다.

 

            

                                                            승방(僧房)

 

                                                        호국문(護國門)

 

표충사의 바깥 대문입니다. 사당의 대문에 태극 문양을 그리는 것은 성리학을 숭상했던 조선시대의 관례라고 합니다. 

 

                      

                                                  호국문(護國門) 현판

 

                                                          의중당(義重堂) 

 

       의중당의 뒷면 쪽으로 제사 때는 판문을 모두 열고 제사 준비를 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담 너머 본 의중당. 종묘의 신실 판문을 보는 듯 합니다.

 

                      

                                                 의중당 처마 밑의 큰 벌집

 

           

                              의중당 옆을 끼고 계단을 올라 표충사로 나아갑니다.

 

                                                             의중당(義重堂) 

 

표충사 정면에 위치한 의중당은 정면5칸, 측면3칸의 맞배지붕 형식으로 제사 때 제수를 준비하던 곳입니다.

 

 

                                                           예제문(禮齊門)

 

                                   표충사의 정문인 예제문으로 신문(神門)인 셈입니다.

 

                       

                                                         예제문(禮齊門)

 

                                              표충사(表忠祠)/어서각(御書閣)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인 이곳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왜적 격퇴에 앞장선 서산대사를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 현종10년(1669)에 건립되었다. 서산대사는 어려서 고아로 자란 후, 출가하여 선가의 법을 체득하였다. 조선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도 16종 도총섭이 되어 유정, 처영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이 건물은 조선 정조12년(1788)에 대사의 높은 공을 기리기 위해 왕이 친히 사액을 내리고, 직접 정조 대왕이 표충사라는 현판 글씨까지 썼으며, 나라에서 세금을 면해주는 특혜를 받았다. 이후 관아의 보호를 받으면서 인근의 선암사나 송광사와 견줄만한 지위로 향상되었다.  <안내판에서...>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祠)는 대둔사의 사격(寺格)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대표적 전각으로서, 절과는 별도의 구역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일대는 표충사 외에 조사전, 의중당, 요사, 표충비각, 호국문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금물로 쓴 ‘표충사’라는 편액 글씨는 정조대왕의 친필이라고 전해지며 함께 걸려 있는 ‘어서각(御書閣)’이라는 현판 글씨는 추사의 제자 신관호(申觀浩, 1811∼1884)님이 쓴 것이라고 합니다.

건물을 지은지 불과 48년만인 1836년(헌종 2)에 당시의 주지 설순(雪順)·승환(勝煥) 스님 등이 기둥이 부러지고 들보가 썩었다고 대웅보전 뒤로 옮겨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새로 지은 건물이 대웅보전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흠이 있어 1861년(철종 12)에 지봉(智峯)대사가 다시 본래 자리로 옮겨지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표충사는 사당(祠堂)으로 지은 건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되어 있고, 안에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뇌묵 처영대사 세 스님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고,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교지현판(敎旨懸板)과 <서산대사화상당명병서(西山大師畵像堂銘幷序)>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표충사와 조사전   <사진자료:최예숙>

 

표충사 건물 좌우에는 표충비각(表忠碑閣)과 조사전이 있습니다.  조사전에는 6대조사 진영 1폭과 5대조사 진영 2폭이 모셔져 있습니다.

 

            

                                             청허당 서산대사의 영정과 위패

 

서산대사라면 흔히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서 활약한 것만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禪)과 교(敎), 더 나아가서는 좌선, 진언, 염불, 간경 등 여러 경향으로 나뉘어 저마다 자기들의 수행만을 최고로 치던 당시 불교계에서 "선은 부처의 마음이며,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라고 갈파하며 선과 교가 서로 다른 둘이 아님을 주장, 선교 양종을 통합하는데 큰 역할을 한 분입니다.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로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활약했던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 스님의 화상을 함께 봉안하고 있습니다.

 

           

                                               뇌묵당 처영스님의 영정과 위패

 

            

                                                 사명당 유정의 영정과 위패

 

                

                                                    표충비각(表忠碑閣)

 

표충비각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안에는 홍문관 제학 서유린(徐有麟, 1738∼1802)이 지은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와 <건사사적비>, 또 1979년에 세운 한글판 기적비(紀積碑)가 있습니다.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 - 한글판 

 

서산대사의 이름은 휴정 속성은 최씨 호를 청허자(淸虛子)라 하며 묘향산에 있었으므로 또 서산이라 하였다. 1520년에 출생하여 어려서 양친을 여의었다. 이때 불교의 경전을 읽고 삶과 죽음에 대한 학설에 감동되어 머리를 깍고 불문에 들어가서 1540년에 일선화상(一禪和尙)에게서 계(戒)를 받았고 뒤에 영관(靈觀)대사의 문하에 들어갔다. 30세에 선과(禪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에서 양종판사(兩宗判事)까지의승직을 받았으나 곧 이를 사임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정여립(鄭汝立)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어떤자가 "대사가 이들과 관련이 있다"고 무고하였으나 선조(宣祖)는 그의 억울함을 알고 풀어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시고를 보고 크게 감탄하여 임금이 대를 그리고 거기에 시까지 지어서 써주는 영광을 얻었다. 임진왜란에 선조가 의주에 피란했다함을 듣고 대사는 칼을 집고 왕을 가서 뵈옵고 승려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자청하여 왕은 곧 대사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에 임명하였다. 대사는 곧 제자인 유정(惟政), 처영(處英)과 승병을 모집하여 오천여명을 얻고 순안 법흥사에서 첫모임을 갖고 중국군대를 도와 싸워서 모란봉에서 승리를 거두고 평양과 개성을 수복하고 용사 700명을 뽑아서 왕을 호위하여 서울에 환도하였다. 이때에 대사는 왕에게 "이제는 늙어서 더이상 힘을 낼 수 없사오니 이 군사사무를 유정과 처영에게 넘겨주고 자기는 묘향산으로 돌아가게 하여달라"고 청하였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總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의 칭호를 내렸다. 대사는 한국의 불교를 중흥시킨 고승으로 제자가 천여명이며 그 가운데는 불교의 영수급에 해당되는 인물이 4~5명에 달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鑒) 외에 몇가지 단행본과 청허집(淸虛集)이 있다. 그는 죽기에 앞서 유어으로 그외 유물을 해남 대둔사에 보관하라 하며 "이곳은 남에 달마산, 북에 월출산, 서에 선은산이 있어 자기가 마음으로 즐기던 곳이기 때문이라"하였다. 대사가 세상을 떠난 후 185년인 1788년에 그의 7세손 천점(天點) 등이 대둔사 남쪽에 사당을 짓고 대사의 화상을 모시기 위하여 임금에게 진정을 올렸고 호조판서 서유린이 왕에게 적극적으로 진언하여 나라에서 사당의 칭호를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정조는 대사가 임진란에 세운 공적을 생각하여 특별히 표충(表忠)이라는 명칭을 내리고 대사의 직계를 더 높이 추증하고 이듬해 4월에는 예조의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이에 앞서 경상도 밀양에 유정(惟政)을 모신 사당으로 표충사(表忠祠)가 있었는데 이제 대사의 사당도 같은 이름을 붙인 것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나라에 충성을 바친것을 나타내는 명예로운 특전이었다. 서유린(徐有隣)이 지어 1791년에 세운 비는 한문으로 되어 있으므로 박정희 대통령각하의 분부를 받들어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글로 요약 편술한 이 비를 따로 세워 후세에 전한다.

 

1979년 12월  일
임창순 짓고,   김병남 쓰고,   전라남도 세움.

 

                      

                                                 표충비각(表忠碑閣) 기단부

 

                      

                                                           표충사 담장        <사진자료:최예숙>

 

          

                                                            성보박물관

 

표충사 구역 앞에 있는  성보박물관에는 서산대사의 유품인 금란가사, 발우(밥그릇)와  정조 임금이 하사한 금병풍, 친필 선시, 신발, 선조 임금이 내린 교지 등이 보관되어 있으며, 고려시대 종인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도 볼 수 있습니다.

 

              

                                                  서산대사의 금란가사 <사진자료>

 

                      

                                             발우 등 서산대사의 유품 <사진자료>

 

                                                          초의선사 동상


성보박물관 앞의 초의선사 동상입니다. 초의선사는 조선 후기에 대흥사의 주지를 지내신 분으로 우리나라 차 문화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분입니다. 조선대 김인경 교수가 제작한 초의선사 동상은 높이 180㎝(좌대 포함 260㎝)로초의선사가 찻잔을 앞에 놓은 채 주장자를 어깨에 걸치고 앉아있는 모습을 형상화했습니다.

 

        

                                                          초의선사 동상

 

초의선사는 정조10년(1786)에 나서 고종3년(1866)에 입적했습니다. 대흥사에서 13대 대종사로 꼽히는 대선사이며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나라 다도(茶道)를 중흥시켜서 다성(茶聖)으로 불립니다. 속가의 성은 장씨였고 법명은 의순(意恂)아며 호는 초의(草衣)입니다.

 

그가 지은 '동다송(東茶頌)은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며 동다(東茶), 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습니다. 초의선사는 차와 선이 한가지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바탕으로 다도의 이론을 정리하고 차를 만들어 널리 폄으로써 전래의 차문화를 중흥시켰습니다.

 

초의선사는 중년 이후 큰 절의 번거로움을 피해 일지암을 짓고 40여년간 은거하며 차와 더불어 지관(止觀)에 전념하다가 81세로 입적하였습니다. 

 

                    

                             추사의 글씨와 초의선사 동상 <사진자료>

 

추사가 초의선사가 보내준 차를 받고 그 보답으로 써 보낸 작품 "차를 마시며 삼매에 든다"는 의미의 "명선(茗禪)" <간송미술관 소장> 은 추사의 말년 걸작으로 병거사(病居士)라 낙관이 찍혀있다. 옆의 동상은 한국제다(製茶)가 대흥사에 기증한 초의 선사 동상.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그린 초의선사 영정 <태평양박물관 소장>

 

              

                                                              금당천

 

                     

                                                  "꽃과 나무를 꺽지 맙시다" 

 

 

 

2007.04.16

 

 

 

         

'답사와 여행(국내) > 전라남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남(녹우당)  (0) 2007.06.22
해남(대흥사)-5  (0) 2007.06.15
해남(대흥사)-3  (0) 2007.06.14
해남(대흥사)-2  (0) 2007.06.14
해남(대흥사)-1  (0) 2007.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