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대흥사)-1
두륜산(頭輪山) / 대흥사(大興寺)
두륜산과 대흥사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
"두륜산의 원래 이름은 '한듬' 이었는데, 국토 남단에 불쑥 솟은 그 형상에서 나온 말이라 여깁니다. 이것을 한자어와 섞어서 '대듬'이라 부르더니 나중엔 대둔산(大芚山)이라 불리게 됐고, '한듬절'은 '대듬절'에서 '대둔사'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 중 대둔산은 중국 곤륜산(崑崙山) 줄기가 동쪽으로 흘러 백두산을 이루고 여기서 다시 뻗은 태백산 줄기의 끝이라는 뜻에서 백두산과 곤륜산에서 한자씩 따서, 두륜산(頭崙山)이라 이름 지었는데, 일제 때 전국 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륜'자를 바꾸어 두륜산(頭輪山)이라 하고 대둔사는 대흥사로 바꾸어 놓았으니 이제와서 두륜산 대흥사라는 명칭 속에서 '한듬절'의 이미지는 되살릴 길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
"이 글을 다 쓰고 난 다음 나는 두륜산 대흥사가 두륜산(頭崙山) 대둔사(大芚寺)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는 현판식이 있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유홍준 교수의 '남도답사 일번지'에서...>
한편,
알려드립니다
두륜산 대흥사
혼선을 빚은 일이라 여기지만 대흥사라는 이름이 일제의 잔재가 아니고 초의스님의 '대둔사지'에도 대흥사라고도 한다 하여 다시 대흥사로 일원화 하였기에, 여기에서는 '대흥사'로 통일하여 표기하겠습니다.
대흥사 전각 배치도
대흥사 산문(山門)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九林里)에 위치한 대흥사(大興寺)의 매표소 입구에 있는 산문(山門)에는 "두륜산대둔사(頭崙山大芚寺)"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현판의 글씨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서예가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님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문은 일주문 같은데 대흥사 바로 앞에 일주문이 또 있기에 산문이라 표기 하였습니다.
연하문(煙霞門)
산문 뒷편에는 "연하문(煙霞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보얗게 피어 오르는 안개"의 뜻을 가지고 있군요.
구림리(九林里) 장춘동(長春洞)에 위치한 대흥사의 매표소 입구에 있는 산문(왼쪽 빨간 표시)을 지나 대흥사 경내(오른쪽 빨간 표시)로 이어지는 장춘골(長春) 개울을 따라 뻗어있는 3.5 km 울창한 숲길은 계절에 따라 저마다의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데, 아름드리 벚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동백, 적송, 단풍나무, 편백나무, 삼나무 등이 장엄한 터널을 이루고 있습니다. 중간 지점의 연두색 표시는 유선여관의 위치입니다.
피안교(彼岸橋)
숲길 곁의 유선여관을 지나 바로 피안교(彼岸橋)를 건너 일주문으로 향하게 됩니다.
'장춘(長春)골' 일명 '너부내'
두륜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장춘골은 구림리를 벗어나면서 삼산천이라는 이름으로 서해바다로 흘러드는데, 길이는 짧지만 오염원이 없어서 갈겨니, 검정망둑, 꺽지, 돌고기, 점줄종개, 자가사리 등등 다양한 어종들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 석비 너머 일주문이 보입니다.
대흥사 창건 연기
우리 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다양한 창건연기(創建緣起)가 전하고 있으며, 대흥사에도 몇 가지 창건 연기가 전하고 있다. 대흥사의 내력을 전하고 있는 자료로는 『죽미기(竹迷記)』,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북암기(北菴記)』 등이 있으며, 순조23년(1823)에 초의(草衣)선사와 수룡(袖龍)선사가 편집하여 간행한 『대둔사지(大芚寺志)』는 이들 자료를 종합한 내용과 함께 이때까지의 사찰 역사를 총 정리해 놓은 중요 자료이다.
먼저, 『만일암고기』에 전하는 창건 연기는 426년(백제 구이신왕 7)의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 창건설이다. 신라의 정관 스님이 426년 대흥사 산내 암자의 하나인 만일암을 창건, 이후 508년(무녕왕 8)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선행(善行) 비구가 중건하였다고하나 안타깝게도 이 자료에서 창건주로 소개한 정관존자는 생애나 활동 내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죽미기』는 544년(신라 진흥왕 5) 아도화상(阿度和尙)의 창건설을 전하며, 자장(慈藏) 스님과 도선(道詵) 스님이 계속해서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현재 사찰 내에서는 대체로 아도화상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대흥사 홈페이지>
대흥사 일주문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大興寺)의 일주문으로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라고 적혀있습니다. 현판의 글씨는 국전 심사� 운영위원을 역임한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1913~1999)님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흥사의 일주문 뒤편에는 "선림교해만화도장(禪林敎海滿華道場)" 이라는 현판이 있어 이곳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양종(兩宗)의 불도량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부도전(浮屠殿)
일주문을 지나면 곧 부도밭을 만나게되는데 이곳에는 서산대사의 부도를 비롯하여 대흥사에서 배출된 역대 종사와 강사 스님들의 부도와 부도비 등 모두 50여기의 부도와 14기의 부도비가 있습니다. 이는 대흥사가 수많은 고승 대덕들을 배출한 굴지의 사찰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진화문(眞化門)/부도전의 대문
대흥사 부도전에는 호국의병대사(護國義兵大師)인 서산대사(西山大師)를 비롯하여 그의 문도들 중 초의(草衣), 호암(虎巖), 상월(霜月) 등 13분의 대종사(大宗師)와 만화(萬化), 원오(圓梧), 연해(燕海), 광열(廣悅) 등 13분의 대강사(大講師) 및 그 외 고승들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부도전 전경
부도전의 나지막한 돌담장 위에 기와를 얹고 벽면에 무뉘를 장식하고 주위를 빙 둘러 멋을 내었습니다. 부도 (浮屠)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遺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입니다.
부도군(浮屠群)
서산대사(西山大師) 부도(浮屠) <사진자료:최예숙씨>
탑신부의 상, 중, 하대석 <사진자료:최예숙씨>
옥개석과 상륜부 <사진자료:최예숙씨>
임진왜란 당시에 승병을 이끌고 왜군을 무찌르는데 앞장 선 서산대사(西山大師) 부도(浮屠)는 보물 제1347호로 현재 대흥사 부도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탑에는 '청허당(淸虛堂)'이라는 당호가 있어 이 부도의 주인공이 서산대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매우 세련된 형태로서 정성을 다하여 만들어져 있습니다. 인근에는 이 부도와 함께 서산대사 청허당의 비가 있는데, 이 비를 세운 것이 인조25년(1647)이었으므로 부도가 세워진 것도 그 때 쯤이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전체의 높이는 2.6m로 1974년 12월26일에 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서산대사의 부도는 팔각의 지대석 위에 3단으로 된 기단부와 팔각 탑신부 및 옥개석과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탑신부의 하대석에는 당초무늬와 연꽃잎이 새겨져 있으며, 중대석은 작고 좁은데 4면의 귀퉁이에 사자와 코끼리로 보이는 동물이 앞다리와 머리로 상대석을 받치고 있고, 뒷다리는 하대석을 딛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어 매우 특이합니다. 상대석에도 연꽃 무뉘가 새겨져 있으며 사이사이에 거북이, 게, 개구리 등의 동물을 조각한 것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팔각의 길다란 모양의 탑신부 앞면에는 서산대사의 부도임을 나타내는 '청허당(淸虛堂)'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옥개석 역시 팔각 지붕 모양인데 위로 치솟은 형태의 처마와 기왓골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돌을 나무 다루듯한 옛 석공의 솜씨가 놀라울 뿐 입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부도비(浮屠碑) <사진자료:최예숙씨>
대흥사와 서산대사
선조37년(1604) 1월 어느날,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마지막 설법을 한 청허당 서산대사는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 스님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부탁했다. 불가에서 가사와 발우를 전한다는 것은 자신의 법을 전하는 거을 듯한다. 왜 그런 외진곳을 택했는지를 궁금해하는 제자들에게 서산대사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면서 그곳은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며 종통(宗通)이 돌아갈 곳"이라고 말했다.
서산대사가 입적하자 제자들은 시신을 다비한 후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영골(靈骨)은 금강산 유점사 북쪽 바위에 봉안했으며 금란가사(金爛袈裟)와 발우는 유언대로 대둔사에 모셨다. 이리하여 서산대사의 법맥은 대둔사에서 이어지게 되었다.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초의(草衣)선사 부도 <사진자료:최예숙씨>
초의(草衣)선사 부도비 <사진자료:최예숙씨>
추사 김정희님의 수제자로서 전라 우수사를 지냈던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님이 비문을 썼다고 합니다.
대흥사사적비
조선 후기의 문신 희암(希菴) 채팽윤(蔡彭胤:1669∼1731)님이 대흥사사적비(大興寺事蹟碑)의 비문을 찬하고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흥사사적비의 귀부(龜趺)
귀부의 머리부분
운학교(雲鶴橋)
부도전을 지나면 곧 나타나는 운학교의 나무 난간이 멋스럽습니다. 다리 저편은 부도전입니다.
십삼대종사도장(十三大宗師道場) 석비(石碑)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진 후부터 사세가 크게 일어나게 되었는데, 근세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와 13분의 대강사를 배출하며 선교 양종의 대도량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해탈문(解脫門)
천왕문(天王門)의 형태를 닮았지만 이곳은 해탈문(解脫門)입니다. 대흥사는 큰 사찰임에도 사천왕상이 없습니다. 터의 기가 세기(?)때문에 사천왕상을 세울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4방위의 산인 영암의 월출산, 장흥의 천관산, 송지면의 달마산, 화산면의 선운산 등이 사천왕을 대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해탈문을 지나실 때는 고개를 조아려야 한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님들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는데, 그 이유는 해탈문 오른편으로 현재의 종무소 자리에 세칸 짜리 집이 있었으며 그 곳에는 고종황제의 초상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해탈문 내부 왼편에는 청색사자를 타고있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상이 있습니다.
해탈문 내부 오른편에는 흰코끼리를 타고 있는 실천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상이 있습니다.
해탈문 현판
이렇게 지혜를 지니고 실천을 통해 수행하면 해탈을 이룰 수 있음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해탈문을 지나면 멀리 가허루(駕虛樓)와 뒤에 병풍을 둘러친듯 두륜산 자락이 아름다움을 뽐내며 펼쳐져 있습니다. 뒤쪽 두륜산의 왼쪽부터 노승봉,가련봉,두륜봉입니다.
해탈문과 두륜산 향로봉의 초록숲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습니다.
침계루(枕溪樓)와 금당천(金堂川)의 심진교(尋眞橋)
금당천을 경계로 침계루 안쪽을 북원이라 하며 그 반대편은 남원으로 구분합니다. 침계루는 맞배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식 건물입니다. 안에는 법고,운판,목어가 있습니다.
침계루와 심진교(尋眞橋)
연등에 가려 침계루 현판의 글씨를 잘 감상할 수 없었습니다. 현판을 보이게 하면서 연등을 걸 수는 없는것인지.... 답답합니다. 금당천에 가로 놓여있는 심진교를 건너면 침계루입니다. 그 밑을 지나면 대웅보전을 만나게 됩니다.
‘침계루’(枕溪樓) 현판 <사진자료:신라문화진흥원>
침계루 현판의 용틀임을 하고있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동국진체(東國眞體) 글씨입니다. 동국진체라... 동쪽나라의 자주적인 진짜 글씨라는 의미라고 여깁니다.
침계루(枕溪樓) 뒷면
심진교(尋眞橋)와 금당천(金堂川)
심진교는 원래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현재의 다리는 일제강점기 때 세운것으로 전해집니다.
금당천(金堂川) 계곡
2007.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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