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경상북도

소수서원(紹修書院),선비촌/영주(榮州)

케인스 2019. 9. 30. 23:12



       소수서원(紹修書院), 선비촌 / 영주(榮州)-1

 


☞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주시(榮州市) 소수서원(紹修書院)

         


영주시 부석사, 소수서원 위치 <참고사진>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적 제55호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 경북 영주 소수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 경북 영주)은 2019년 7월6일  대한민국의 서원(書院) 9곳과 함께 ‘한국의 서원(韓國의 書院)’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되었습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서원(書院)은 경북 영주 소수서원, 경북 안동 도산서원, 경북 안동 병산서원, 경북 경주 옥산서원, 대구 달성 도동서원, 경남 함양 남계서원, 전남 장성 필암서원, 전북 정읍 무성서원, 충남 논산 돈암서원 등 9곳입니다.


                          <참고사진>

                      


                 

● 교통편: 고속버스 이용


서울경부↔영주 왕복 고속버스


                 - 서울경부터미널 출발시간: 07:10 AM,   영주터미널 도착시간: 09:30 AM [경유지: 풍기]

                 - 영주터미널 출발시간: 17:20 PM,   서울경부터미널 도착시간: 20:45 PM [경유지: 풍기]



 영주종합터미널 위성사진 <google 참고사진>


09:30 / 영주종합버미널 도착



● 영주시내버스[27번: 영주여객차고지↔부석사]



- 버스시간표:


      영주여객차고지출발: 06:10 / 06:50 / 07:50 / 09:00 / 10:00 / 11:30 ~~~19:20

      부석사출발: 07:10 ~~~13:30 / 14:30 / 15:30 / 16:10 / 17:30 / 18:10 / 19:20 / 20:20


- 주요정류장 및 대략적인 예상소요시간:


영주여객--(약10분소요)--영주종합터미널--(약15~20분소요)--풍기역--(약15~20분소요)--소수서원--(약15~20분)--부석사





영주종합터미널 앞 27번 버스정류장에서 10:14분경 부석사행 27번버스를 이곳에서 탑승하여 10:40분 소수서원에 하차하였습니다.



● '선비의 고장' 영주(榮州)


       <참고사진>


선비의 고장으로 불리는 영주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아픔을 지닌 곳입니다. 조선 초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불렸던 이곳은 한수 이남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457년 순흥에 유배된 금성대군(錦城大君: 세종의 6남)과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이 이웃 영월에 유배된 단종(端宗)의 복위운동을 꾀하다 발각되면서 세조에 의해 이들은 물론 순흥 안씨가 멸문지화(滅門之禍) 수준의 참화(慘禍)를 입었으며 순흥 인근 30리 지역 주민들까지 학살되었습니다. 이를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 하며 이때 화를 입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竹溪川)을 붉게 물들였으며 10여리 가까이 흐르던 피가 멈췄다하여 '피끝마을'로 불리던 곳이 지금의 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입니다. 순흥도호부는 이후 '역적의 고을'이라는 이유로 220년동안 폐부(閉府)가 되었다가 1683년에야 다시 도호부(都護府)가 됐습니다만, 1907년에 경북지역에서 맹활약한 의병 신돌석(申乭石), 이강년(李康秊)을 소탕한다는 미명하에 일본이 본국에서 군대를 끌고와 또 다시 영주를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다행히 소수서원은 참화를 피했습니다. 


        소수서원 일대 <참고사진>


소수서원 경내에는 강학당, 일신재·직방재, 학구재, 지락재, 장서각, 문성공묘 등이 있고,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58호)등 중요한 유물과 각종 전적이소장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곳이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숙주사지(宿水寺址) 당간지주(보물 제59호)등의 불적(佛跡)이 남아 있습니다. 소수서원에서는 350여년간 4000여명의 유생들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냅니다.



   


10:40 / 소수서원버스정류장 하차 <google참고사진>


10:42 / 소수서원(紹修書院) 입구


소수서원 안내판


                 세계유산 기념비







     


 소수서원 출입문 옆 사적지 표지판과 소수서원장 전 국무총리 이한동 씨의 기념식수


                                                     


조선시대 서원의 효시(嚆矢)이자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내린 사액서원(賜額書院)이자 사학(私學)기관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은 풍기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고려 말 최초의 주자학자인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선생의 연고지에다가 조선 중종 37년(1542년) 사묘(祠廟)를 세우고 안향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을 봉인하고 학사(學舍)를 세워 주자의 백록동 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사액서원(賜額書院)이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합니다.    


출입문에 붙어있는 소수서원 전경사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이름은 1550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며 건의해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면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부터 바뀐 것이며, 소수서원의 소수(紹修)는 이을 소(紹), 닦을 수(修)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 라는 뜻으로 즉,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에서 따왔습니다. 명종(明宗)의 명에 따라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지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백운동소수서원기’에서 ‘소수’라고 한 연유를 “학문을 하며 그 뜻을 밝히지 못하면 자신을 닦는 것이 어떤 일인지 모르며, 자신을 바로 닦지 못하면 행동을 바르게 가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소수(紹修)’에 단순히 무너진 학풍을 다시 세운다는 의미를 넘어 학문과 수양을 통해 바른 행동을 실천하는 인간의 참된 본성을 회복하자는 큰 뜻이 담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진입영역(進入領域)






영귀봉(靈龜峰)



                           영귀봉(靈龜峰) <참고사진>


서원 왼쪽에 평지돌출형으로 봉긋하게 솟아있는 둔덕은 흡사 신령한 거북이가 알을 품고 엎드려있는 모습처럼 보여 영귀봉(靈龜峰)이라고 합니다. 이곳에는 통일신라시대의 고분군과 이곳 주민들의 신앙대상체인 성황단(城隍壇)이 이었던 곳입니다. 


서원 남쪽의 영귀봉(靈龜峰) <참고사진>



학자수(學者樹)



학자수(學者樹)


예로부터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지조를 잃지않고 학문에 정진하는 참선비가 되라는 뜻에서 소나무를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부릅니다. 한편 풍수지리적으로 죽계천(竹溪川)과 면하고있는 소수서원의 허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서원 주변에 울창한 송림을 조성하였다고도 합니다.



소혼대(消魂臺)



영귀봉(靈龜峰) 남쪽에 있는 소혼대(消魂臺) <참고사진>


 소혼대(消魂臺) <참고사진>


소혼대(消魂臺) <참고사진>


소혼대는 죽계천(竹溪川)이 내려다 보이는 서원의 정문 밖 영귀봉(靈龜峰) 남쪽의 둔덕에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숙수사(宿水寺)의 건물터로 쓰였던 주초(柱礎)자리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서원이 들어선 후 이자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휴식을 취하던 곳이며 소혼대가 서원 입구에 자리잡고 있어 서원을 방문하였다가 떠나는 사람과 작별의 정을 나누던 장소로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숙수사지(宿水寺址) 당간지주(幢竿支柱)



숙수사지(宿水寺址)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59호


숙수사지(宿水寺址)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소수서원(紹修書院) 입구의 소나무 숲에 남아 있는 것으로, 통일신라 전기에 창건된 사찰인 숙수사(宿水寺)의 당간지주(幢竿支柱)입니다. 서원내에 아직도 당시 숙수사의 여러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숙수사(宿水寺)는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다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불교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숙수사 역시 쇠락(衰落)의 길을 걸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종국에는 정축지변(1457) 때 절은 완전히 불타 폐사(廢寺)되었을 것이며, 그로부터 80여년 뒤 조선 중종(中宗)

37년(1542) 소수서원을 건립할 때 숙수사의 건물배치와 터를 최대한 활용하였고 건축부재도 일부 재활용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은 마주보는 면의 바깥면 중앙에 세로띠를 새기고, 꼭대기에서 1.17m 밑에서 부터 2.34m 까지 사이가 면이 쑥 들어가 있어서 마치 넓은 홈을 마련한 것처럼 보입니다. 네모난 기둥 끝으로 올라가면 약간 가늘어지고, 맨끝은 둥글게 경사지도록 하였습니다. 꼭대기 끝 안쪽 면에는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습니다.


당간지주 복원모형도


                        당간지주(幢竿支柱) <참고사진>


지주의 하단에서 30cm쯤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가 노출되어 있으며 이 지주의 총높이는 3.65m입니다. 원래는 지주와 당간을 받치던 바닥돌이 있었을 듯하나, 현재는 지주 양쪽으로 길고 큰 돌 1장씩이 놓여있을 뿐입니다. 전체적으로 소박하며 돌을 다듬은 솜씨도 세련되어 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입니다.


 죽계천(竹溪川)과  징검다리


죽계천은 소백산 국망봉에서 발원하여 소수서원과 영주선비촌을 가로지르며 낙동강까지 이어지는 하천입니다.


                                      지도문(志道門) 앞 수령 500년 은행나무 <참고사진>


                                                    <참고사진>



'경(敬)'자 바위와 취한대(翠寒臺) 




                                          '경(敬)'자 바위와 취한대(翠寒臺) 위치 <참고자료>


'경(敬)'자 바위와 취한대(翠寒臺)  <참고사진>



  죽계천(竹溪川)과 취한대(翠寒臺)


취한대(翠寒臺)  <참고사진>


                                  


취한대(翠寒臺)는 퇴계 이황선생이 '경(敬)'자 바위 위쪽에 터를 닦아 대(臺)를 쌓고 손수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심고 취한대(翠寒臺)라 이름 한 옛 건물의 자리에 1986년 신축한 건물입니다. 취한(翠寒)이란 뜻은 "푸른 연화산(蓮花山)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천(竹溪川)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詩)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옛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비취 '취'(翠)자와 차가울 '한'(寒)자를 따왔다고 합니다.


                                                   취한대(翠寒臺) 현판  <참고사진>


‘경(敬)’자 바위


소수서원 쪽에서 바라보면 ‘백운동(白雲洞’)이란 흰 글씨와 붉은 칠을 한 ‘경(敬)’자 글씨가 음각된 바위가 보입니다. 이는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선생이 백운동서원을 세운 뒤 죽계천 바위에 손수 써서 남긴 것입니다.



(敬)은 오경(五經)의 하나인 '서경(書經)'을 한마디로 표현한 유학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공자는 주역 <문언전>에서 육이효에 대해 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군자 경이직내 의이방외) 즉, “군자는 공경함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리로써 밖을 방정하게 해서 경(敬)과 의(義)가 섬에 덕(德)이 외롭지 않다”며 를 강조했으니, 그 글자를 보며 행동을 바로잡으라는 의미입니다.



성생단(省牲壇)



     지도문(志道門) 앞 성생단(省牲壇) 위치


성생단(省牲壇) <참고사진>


봄, 가을 제사를 모실 때 올릴 제물(祭物)인 희생(犧牲: 소, 돼지, 양 등의 짐승)의 적합여부를 심사하던 곳입니다.


                 



경렴정(景濂亭)



 경렴정(景濂亭)


경렴정(景濂亭)은 소수서원의 정문(正門)인 지도문(志道門)밖 동쪽 죽계천(竹溪川) 언덕 절벽 위에 있으며, 죽계천(竹溪川)을 사이로 연화봉(蓮花峰)을 마주하고, 취한대(翠寒臺)를 굽어보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자(亭子)는 서원의 안쪽에 위치하는데 이곳 정자는 밖에있는 것으로 보아 일정한 규칙이 없는 초기 서원배치 형식을 나타낸것으로 보입니다.



                       수령 500년의 보호수 은행나무가 드리워진 경렴정(景濂亭)

경렴정(景濂亭)은 유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공간으로 주세붕(周世鵬)선생이 조선 중종38년(1543) 백운동서원을 건립하면서 지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중의 하나입니다. 경렴정(景濂亭)이란 이름은 중국 북송의 철학자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선생을 존경하고 우러르다는 뜻에서 '경(景)'자를 취하였으며, 그분의 호에서 '염(濂)'자를 취해 조합하였습니다.


                                  <참고사진>


위의 보호수 안내석에 보면 품격 항목에 면(面) 나무로 새겨져 있는데 아마도 면(面)에서 관리하는 나무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바로 건너편 지도문(志道門) 앞쪽에 있는 보호수는 시(市)나무로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옆의 두 나무를 하나는 시(市)에서, 하나는 면(面)에서 관리를 한단 말입니까.




 경렴정(景濂亭)


경렴정(景濂亭)은 정면3칸, 측면1칸의 팔작지붕건물로 원기둥꼴로 다듬어 만든  주춧돌에 두리기둥을 앉혔으며, 4면이 개방된 우물마루 바닥에 소박한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습니다.


 경렴정(景濂亭) 내부

                                                        경렴정(景濂亭) 초서현판


건물 남쪽 내부에 있는 경렴정(景濂亭)이란 초서현판은 조선 중기 퇴계의 제자인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선생의 글씨입니다.


 정자 내부에는 주세붕(周世鵬), 이황(李滉), 황준량(黃俊良), 이준(李埈) 등 명사(名士)들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습니다.


                            경렴정(景濂亭) 시판(詩板)



지도문(志道門)



지도문(志道門): 소수서원의 정문


지도문(志道門)


지도문(志道門)은 '표적을 향해 활을 쏘듯 도(道)를 향해 뜻[志]을 세우고 나아감' 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배우는 것은 과녁을 향해 활쏘는 것과 같아 선비가 도(道)를 이루고자 하는 입지(立志)와 지향(志向)하는 바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 강학영역(講學領域)



                      

                               


소수서원 전경


성언근(成彦根,1740-1818)이 쓴 일신재중건기(日新齋重建記)에 「대개 학자의 공부는 마땅히 독서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지락재(至樂齋)가 맨 아래에 있고, 성현과 같이 되기 위해 학문을 구하기 때문에 학구재(學求齋)가 그 오른쪽에 있다. 다음 단계로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기 때문에 일신재(日新齋)가 또 그 오른쪽에 있고,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고서 경(敬)으로 내면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 외면을 방정하게 하기 때문에 직방재(直方齋)가 또 그 오른쪽에 있게 됐다. 경과 의를 양쪽에 끼고 내면과 외면을 수양하게 되면 군자의 도가 이즈음에서 크게 완성되니, 이것이 ‘직방대(直方大: 그 행하는 바를 의심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직방대가 된 뒤에 편안한 집에 넓게 거처하면서 천하에 교화를 밝힐 수 있기 때문에 명륜당(明倫堂)이 직방재 앞에 있는 것이다. 입문(入門)의 순서와 승당입실(升堂入室: 학문이 높은 경지로 진보함을 이르는 말)의 차례와 공부가 편액의 글씨에 나열되어 있으니, 이 재실(齋室)에 들어가는 자가 그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하고서 위로 향하여 진보하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이와같이 유생숙소 건축물 단의 높이는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합니다.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합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학당인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습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 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습니다.



강학당(講學堂): 보물 제1403호



강학당(講學堂) <참고사진>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기능 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을 듣던 곳입니다.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周世鵬)이 중종38년(1543) 군학사(郡學舍)를 옮겨온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큰 대청을 형성하고 방은 한쪽에만 있습니다. 대청 북쪽에는 조선 명종(明宗)의 친필인 ‘紹修書院(소수서원)’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강학당(講學堂) 남쪽면


소수서원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강학당(講學堂) 남쪽면이 보이며 백운동(白雲洞)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한편 서원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습니다.



강학당(講學堂) 남쪽면 백운동(白雲洞) 현판 

강학당(講學堂) 정면(동쪽면) <참고사진>


강학당의 정면은 동향(東向)이며 정면 4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활주(活柱)로 추녀를 받치고 있습니다. 장대석 높은 기단위에 주초를 놓고 배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강당 사방 둘레엔 반칸폭의 툇마루를 놓았습니다.



강학당 내부: 정면 3칸 측면 3칸 크기의 대청은 우물 바루바닥에 연등 천장을 이루었습니다. <참고사진>


강학당 내부 북쪽면



강학당 내부 대청의 북쪽에는 조선 제 13대 왕 명종(明宗)의 친필인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란 현판이 높이 걸려있습니다.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을 2개 설치하였습니다.



소수서원(紹修書院) 현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된 후  명종임금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습니다. 이는 곧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립 고등교육기관(私立高等敎育機關)으로 인정받게 된것입니다. 이 현판의 원판은 소수서원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건물 내부에 걸려있는 현판은 모조품입니다.


강학당 내부 천장가구


   강학당의 옛모습[조선고적도보:1915~35년]



지락재(至樂齋)


지락재(至樂齋)


「재향지(梓鄕誌)/순흥지(順興誌)/학교(學校)」편에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풍기군수(豊基郡守: 광해5년(1613년 부임, 이듬해 이임)]로 있을 때, 소수서원(紹修書院) 뜰 동쪽 언덕에 작은 서재(書齋)를 세우고, 서재 아래에 대를 쌓고, 대(臺) 아래 못을 파고, 못을 탁청지(濯淸池), 대를 앙고대(仰高臺), 서재를 ‘지락재(至樂齋)라 하였다."고 쓰여있습니다.


지락재(至樂齋)


지락재(至樂齋)는 학구재(學求齋)와 같이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 역할을 한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오른쪽 두 칸은 사방이 트인 마루, 왼쪽 한 칸은 방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락재(至樂齋)란 명심보감(明心寶鑑)의 「至樂은 莫如讀書요, 至要는 莫如敎子」'지극한 즐거움은 책을 읽는 것과 같은 것이 없고, 지극한 삶의 요채는 자식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 없다.'에서 따온 말입니다.


 

정면에 至樂齋(지락재)라는 현판 외에 마루 천장에는 많은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참고사진>


지락재(至樂齋)는 학구재(學求齋)의 동쪽에 위치합니다.


 지락재(至樂齋)는 학구재(學求齋) <참고사진>


1단의 지락재(至樂齋) 기단과 3단의 학구재(學求齋) 기단을 보면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하는 하학상달(下學上達)형 건물배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학상달(下學上達)이란 밑에서부터 배워 올라가 위에 도달함을 뜻하며 낮고 쉬운 것을 배워 깊고 어려운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지락재(至樂齋) 북쪽의 협문(夾門)



학구재(學求齋)



 학구재(學求齋)


학구재(學求齋)는 지락재(至樂齋)와같이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의 일부건물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선생의 제자 송간(松澗) 황응규(黃應奎:1518년∼1598년)선생이 세웠다고 합니다.


                                     학구재(學求齋) 현판


학구재(學求齋)는 주자(朱子)의「학구성현(學求聖賢)」에서 따온 말로 학문을 하여 성현의 길을 따르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학구재(學求齋)


학구재(學求齋)는 동서재(東,西齋)인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의 동쪽 조금 뒷편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낮은 기단(基壇)의 건물입니다. 가운데 칸은 개방된 마루를 깔고 좌우에는 온돌방을 설치하였습니다.


 


학구재(學求齋) 마루칸과 온돌방


학구재(學求齋) 뒷면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는 정면6칸, 측면 1칸반 건물로 잘 다듬은 장대석 기단 위에 팔작지붕의 일자(一字)형 한 건물에 나란히 붙여 지어졌습니다. 좌,우 각 2칸의 앞에는 툇마루에 난간을 설치하였습니다.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이곳은 소수서원의 원장과 교수, 제임(諸任: 행정요원) 등이 함께 기거하던 집무실겸 숙소입니다.


 일신재(日新齋)


 일신재는 서원 원장 성언근이 1799년(정조23)에 직방재(直方齋) 옆 신방(新房)을 늘려지었습니다.


                                   


대학(大學)에서 나오는 구절인「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진실로 하루를 새롭게 하고,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한다” 라는 뜻에서 '일신(日新)'을 따왔습니다.



직방재(直方齋)


학문을 통해 인격과 행동거지를 올바르게 잘 닦는 것이 선비의 자세이다. 행실이 올바르면 인품도 올바르다. 직방(直方)으로 겉[행동거지]과 속(마음,인격]을 잘 닦은 자를 참선비, 선생, 선각자, 선지자로 부른다. 


                                     직방재(直方齋) 현판: 퇴계 이황선생의 글씨


직방(直方)이란『주역』「곤괘(坤卦)」문언(文言)에 “군자는 경(敬)으로써 안[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바깥[일]을 바르게 하니, 경(敬)과 의(義)가 확립되어 덕(德)이 외롭지 않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에서 인용했습니다.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의 굴뚝 <참고사진>


                건물의 굴뚝은 높을수록 방이 따뜻하다고 하는데 이곳의 굴뚝은 낮은 위치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장서각(藏書閣)                



 장서각(藏書閣)


장서각은 오늘날의 도서관으로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어제 내사본」을 비롯, 3천 여권의 장서 및 목판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참고사진>


서책(書冊)은 좌우지선(座右之先)의 예에 따라 으뜸자리에 둔다고 장서각(藏書閣)은 스승의 숙소인 직방재(直方齋) 우측에 세워져 있습니다.



정료대(庭燎臺)와 관세대(盥洗臺)  


 

                        정료대(庭燎臺)


「시경」「소아편」의 '정료(庭燎)'조에 보면 "조정에서 큰일이 있을 때마다 밤중에라도 입궐하게 되니 관솔불을 피워 뜰을 밝혔다"

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장서각(藏書閣) 앞 뜰에 자리한 정료대(庭燎臺)는 어둠속에서 행하는 제향(祭享)  때나 스승과 제자들이 밤나들이 할때 이용하도록 관솔불을 밝혔습니다.


정료대(庭燎臺)와 관세대(盥洗臺)


관세대(盥洗臺)는 제향(祭享) 때 제관(祭官)들이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를 올려놓았던 받침돌입니다.





■ 제향영역(祭享領域)




                      

                               




문성공묘(文成公廟): 보물 제1402호 



 문성공묘(文成公廟): 보물 제1402호


문성공묘(文成公廟)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의 경내에 있는 제향(祭享)기능의 사당으로 조선 중종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선생이 세운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을 주향(主享)으로 하는 사우(祠宇)입니다. 중종39년(1544) 추가 배향된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 그리고 인조11년(1633) 추향(追享)된 문민공(文敏公) 주세붕(周世鵬)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있습니다. 명종 원년(1545년) 안향 선생의 후손 안현(安玹)이 경상 감사가 되어 서원의 사당을 참배하고 각종 경비를 지원하였습니다.


                                                 

                                                  문성공묘(文成公廟) 현판


                             문성공묘(文成公廟) 현판의 글씨는 명나라 사신(史臣) 주지번(朱之蕃: ?~1624)의 글씨입니다.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 영정 <참고사진>


주향(主享)인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선생(1243~1306)은 고려 원종1년(1260)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충렬왕12년(1286) 왕과 공주를 호종(扈從)하여 중국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주자학을 연구했습니다. 섬학전(贍學田)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하였고, 국학 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孔子)의 영정을 모셨으며, 제기(祭器), 악기와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史) 등의 서적을 사들이는 등 주자학의 도입과 정착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일컬어집니다.



문성공묘(文成公廟) <참고사진>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지붕 양끝에 풍판을 달았으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基壇) 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좌(柱座)를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습니다. 건물의 좌측과 뒷면에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습니다.



 문성공묘(文成公廟)


사방에 돌담을 두르고, 정면에 외단문(外單門)을 설치하고 우측에 협문(夾門)을 두었습니다. 담장 앞 마당 가운데에는 수수서원이 세워지기 전에 이곳에 있었던 숙수사(宿水寺)의 목탑(木塔) 주초(柱礎)가 남아있습니다.



 문성공묘(文成公廟) <참고사진>

                    

           

               

            진설(陳設) <참고사진>


지금도 매년 3월, 9월 초정일(初丁日)날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주세붕(周世鵬)이 초안하고 이황(李滉)이 보완한 제향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홀기(笏記)에 의해 제향을 진행합니다.


                       

                        제향 의식 <참고사진>


제향때는 반드시 주세붕이 창작한 「도동곡(道東曲)」이라는 별곡체(別曲體) 형태의 시가(詩歌)인 경기체가(景幾體歌)를 부르는데, 그 뜻은 중국 공자(孔子)의 도(道)가 회헌(晦軒) 안향(安珦)에 의해 우리나라로 옮겨진 것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배향]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                          [주향]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                     [배향]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

                                                                                                                                           [추향] 문민공(文敏公) 주세붕(周世鵬)

 문성공묘 내부 위패 봉안 위치 <참고사진>


    문성공묘의 옛모습[조선고적도보:1915~35년]


<참고사진:영주시민신문>




전사청(典祀廳)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봉향집기[제사용 그릇: 제기] 등을 보관해 두던곳이며, 춘.추 제향(祭享) 때마다 집사(執事)들이 제물(祭物)을 마련하던 곳입니다. 정면 3칸, 측면 1칸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중종37년(1542) 소수서원이 창건 때 세워진 건물입니다.


전사청(典祀廳) 현판  <참고사진>


전사청 뒤뜰



영정각(影幀閣)


 

 영정각(影幀閣)


영정각은 원래 소수서원에 없었던 건물로 1975년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향(安珦)선생의 초상을 모시기 위해 별도로 세운 건물입니다. 안향선생 초상(肖像)의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모셔져 있습니다.


 

영정각(影幀閣)


영정각(影幀閣)에는 모두 6폭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는데, 정면에 주자(朱子)인 주문공(朱文公) 회암(晦菴) 주희(朱熹) 선생과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향(安珦)선생이, 오른쪽에 문민공(文敏公)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선생과 문익공(文翼公)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선생이, 왼쪽에 문충공(文忠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선생과 문정공(文正公) 미수(眉叟) 허목(許穆)선생의 초상이 각각 자리잡고 있습니다. 원래 봉안되어 있던 공자와 제자 그림은 소수박물관에 이관 전시하고 있습니다.


                                               

                                                  두 그림 모두 원본이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 보물 제485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는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공자 앞에 길게 늘어서 앉아 있는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65㎝, 세로 170㎝이며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이 그림은 단상 중앙에 배치된 공자상을 다른 인물들보다 크게 그렸고, 단 아래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좌우로 배열된 제자들이 중앙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옆모습을 표현하였다. 이들은 머리에 사각관모를 쓰고 손에 홀(笏)을 든 차림으로 묘사되어 조례의식 광경을 연상케 한다. 이 그림은 중종 8년(1513)에 원래 있던 그림을 베껴 그린 것으로 회화성보다는 기록성이 강하고, 종렬 대칭구도와 위에서 아래를 보는 듯한 부감법, 원근법 등을 사용하여 조선시대 궁중행사의 기록화 형식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자료>


일제강점기 초 미(美) Harverd대 총장이 세계일주 영행길에 한국을 방문하여 성균관, 소수서원을 둘러보면서 소수서원 소장유물을 보던 중 이 그림을 노트에 그려가서 만든것이 오늘날 대학 졸업때 쓰는 '학사모'가 되었다고 합니다.(역학자 고 김진규 옹의 조부가 당시 수행하며 겪은 사실을 전함) <소수서원자료>



주자(朱子)인 주문공(朱文公) 회암(晦菴) 주희(朱熹) 선생과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향(安珦)선생의 초상


 

   

                  안향 초상 (安珦 肖像): 국보 제111호

고려 중기 문신인 회헌 안향(1243∼1306) 선생의 초상화로 가로 29㎝, 세로 37㎝의 반신상이다. 안향은 고려 원종 1년(1260)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의 화면은 상하로 2등분되어 위에는 글이 쓰여 있고 아래에는 선생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왼쪽을 바라보며 붉은 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었다. 옷주름은 선을 이용하여 명암없이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시선의 방향과 어깨선에서 선생의 강직한 인상이 보인다. 소수서원에 있는 이 초상화는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12년 후인 고려 충숙왕 5년(1318) 공자의 사당에 그의 초상화를 함께 모실 때, 1본을 더 옮겨 그려 향교에 모셨다가 조선 중기 백운동서원(후에 소수서원이 됨)을 건립하면서 이곳에 옮겨놓은 것이다. 선생의 초상화는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문화재청자료>


안향선생 사후에 고려 충숙왕이 교지를 내려 영정을 그려 그의 고향에 모시고 대대로 제사를 올리게 하여 1543년 8월 봉안 이후 조선 중종때 주신제가 회헌 영정을 묘당에 같이 모시고 제를 지내왔으며 1592년 4월 임진왜란시 초암사(草庵寺)로 잠시 옮겨 봉안하였습니다. 조선말 영정실인 도동각(道東閣)을 따로 지어 봉안했으나 78년 영정각으로 이건 봉안되었으며 지금은 소수서원박물관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소수서원자료>



                      

                       주자 초상(朱子 肖像)

남송(南宋)시대 대학자로 공자(孔子)의 학문을 집대성하여주자학(朱子學)으로 체계화시킨 장본인입니다.

<소수서원자료>



문민공(文敏公)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선생과 문익공(文翼公)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선생의 초상



       

      주세붕 초상 (周世鵬 肖像): 보물 제717호

주세붕 초상(周世鵬 肖像)은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주세붕의 상반신을 그린 초상화로 가로 62.5㎝, 세로 134㎝ 크기이다. 주세붕(1495∼1554)은 중종 38년(1543)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후의 소수서원)을 세워 학문진흥에 힘썼다. 이 초상화는 사모관대의 정장 관복을 차려입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얼굴은 간략한 선으로 묘사하고, 넉넉한 몸체에 목은 거의 표현하지 않아 권위적인 기품이 엿보인다. 옷의 깃을 낮게 표현한 것은 다른 초상화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양식으로 생각된다. 이 그림의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힘들지만 색이 바라고, 훼손된 상태, 복식, 필법 등으로 미루어 제작연대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16세기 초상화가 대부분 공신상인데 비해 학자의 기품이 드러난 학자상으로 매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청자료>


민족교육의 산실인 백운동 소수서원을 지어 민족의 자긍심과 가치를 선양시킨 청백리요, 후덕한 목민관이며 교육경세가입니다.

<소수서원자료>


                     이덕형(李德馨) 초상

선조때 명제상으로 임진왜란때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시킨 충절의 표상이 되는 분입니다. 1832년 5월9일 9대손인 이의익에 의해 이안(移安)시유림 1천여명이 운집했다고 합니다. 서원 유림들의 발의로 당시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있던 이인복에 의해 봉안되었습니다.

<소수서원자료>




 문충공(文忠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선생과 문정공(文正公) 미수(眉叟) 허목(許穆)선생의 초상



                     이원익(李元翼) 초상

우리나라(조선)가 배출한 125명의 청백리(淸白吏) 가운데 으뜸가는 분으로 세임금을 섬기며 다섯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이며 '내우외환(內憂外患)'의 국난극복에 힘썼습니다.

<소수서원자료>


                     허목(許穆) 초상

조선시대 문신이요 학자이며 전서체의 대가로서 필력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부인 이씨는 오리 이원익의 친손녀입니다. 퇴계 제자인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의 학맥을 이었고 그의 제자인 성호 이익(실학자)이 다시 미수의 학맥을 이었습니다. 1794년 9월15일 연천에 봉안된 영정을 왕이 친견후 모사시킨 뒤 나라, 서원, 본손의 결정으로 태안유생 정박이 이안해 왔습니다. 영정 머리에는 영의정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이 쓴 발문(跋文)이 있으며, 영정을 그릴 당시 미수선생은 82세 였다고 합니다.

<소수서원자료>




일영대(日影臺)



 일영대(日影臺)


일영대(日影臺)는 영정각(影幀閣) 앞, 직방재(直方齋)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의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재던 일종의 '해시계'로 그림자를 나타내고자 막대를 끼웠던 홈통이 중앙에 남아있고 넓고 둥근 아랫부분은 간지(干支)로 시간을 나타내던 빗금이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일영대(日影臺) <참고사진>



제향영역(祭享領域)에서 기타영역(其他領域)으로 나가는 협문



■ 기타영역(其他領域)



고직사(庫直舍)



 고직사(庫直舍)


고직사(庫直舍)는 서원 관리를 맡은 관리인이 거처하던 집입니다.


 고직사(庫直舍) 동쪽문



고직사(庫直舍)는 정문이 잠겨있어 문틈 사이로 본 고직사(庫直舍) 모습의 일부분입니다. 관리가...


 

  1970년대 지어진 고직사(庫直舍) <참고사진>


고직사(庫直舍) 북쪽문



사료관(史料館)



사료관(史料館)


사료관은 1993년 세웠으며, 소수서원에 관한 관련자료를 정리해 둔 곳으로 소수서원의 역사와 전통 및 주요 배출 인물들에 대해 패널과 키오스크로 설명해 놓고  목판, 고서 등 관련유물을 함께 전시하면서 서원의 기능 , 역할 등에 대해 '설명패널'과 함께 '팔도사액서원도'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사료관(史料館) 내부



 

사료관(史料館) 내부


사료관(史料館) 내부






 


충효교육관(忠孝敎育館)


 

충효교육관(忠孝敎育館)과 소수서원 관리사무소


충효교육관은 1993년 세웠으며, 현재 충효교육관 자리는 '소수중학교' 옛터입니다. 소수서원의 맥을 잇고자, 서원 유림들이 신교육이 들어오면서 사립 '소수중학교'를 이곳에 세워 인재를 길렀으나 6.25이후 학생수 증가로 1965년 읍소재지로 옮겨 그 자리에 충효교육관을 세우고 각종 세미나 및 인성(人性)교육의 도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소수서원 자료>





소수서원 중수기적비(紹修書院 重修紀跡碑)



 소수서원중수기적비(紹修書院重修紀跡碑): 1993년 6월 세움




숙수사지(宿水寺址) 출토유물(出土遺物)



 숙수사지(宿水寺址) 출토유물(出土遺物)



                                           금동불상 [소수박물관]  <참고사진>


숙수사(宿水寺)는 단종복위 실패로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가 세조3년(1457) 폐부(閉府)시 소실되어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절 이름은 “숙세선연 조계산수(宿世善緣 曹溪山水)” 즉 '세세토록 좋은 인연으로 가르침을 쌓는다'는 불교 용어에서 가져왔습니다.


숙수사지(宿水寺址) 출토석물(出土石物)



영귀천(靈龜泉): 샘물 <참고사진>



● 탁청지(濯淸池)



                       탁청지(濯淸池) 위치도


 탁청지(濯淸池)



탁청지(濯淸池)


탁청지(濯淸池)는 오래전 숙수사(宿水寺)의 못[池]이었으며, 주위의 숲과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하는 연못으로 경내의 작은 "죽계호(竹溪湖)"라고도 합니다.


                                                                 못 가의 거북이를 닮은 구암(龜岩)


죽계별곡(竹溪別曲) 석비



죽계별곡(竹溪別曲)은 전체 5장으로 『근재집(謹齋集)』 권2와 『죽계지(竹溪誌)』에 수록되어 있으며, 작품의 배경인 죽계는 지금의 경상북도 풍기에 있는 시내 이름이며, 풍기의 옛 지명인 순흥(順興)은 안축의 관향(貫鄕)인 동시에 고향입니다. 제1장은 죽계의 지역적 위치와 경관을, 제2장은 누·대·정자 위에서 유흥하는 모습을, 제3장은 향교에서 공자(孔子)를 따르는 무리들이 봄에는 경서를 외고 여름에는 현(絃)을 뜯는 모습을, 제4장은 천리 밖에서 그리워하는 모습을, 제5장은 성대(聖代)를 중흥하여 태평을 길이 즐기는 모습을 각각 노래함으로써, 고려 신흥사대부의 의욕에 넘치는 생활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선비촌(선비村)



 죽계교(竹溪橋): 소수서원 영역에서 죽계교를 지나면 선비촌 영역입니다.


                                                                             영주 선비촌 전경




영주 선비촌은 우리 민족의 생활 철학이 담긴 선비정신을 거양하고,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재조명하여, 윤리 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사회적 병폐 현상을 해소시켜 보고자 충효의 현장으로 재현하게 된 것으로 선비촌의 모든 건물은 재현된 건물입니다.



 선비촌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열부각(熱婦閣), 충복각(忠僕閣)


열부각(熱婦閣), 충복각(忠僕閣)




선비촌 촬영 드라마




선비촌전통생활체험장, 목공예방



김상진 가옥


 김상진 가옥


김상진 가옥은 1900년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며 'ㄷ'자형 기와집으로 본체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류주택의 전형으로 그에 맞는 소박한 멋과 절제가 담긴 가구배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선비촌 자료사진>


당나귀 타는 곳



김구영 가옥



김구영 가옥


김구영 가옥은 본체(우측)와 헛간(좌측)으로 이루어진 일자형의 초가집입니다. 안방, 사랑방, 부엌, 마루 붕당 등이 한 채에 딸려있고 앞뒤 양쪽으로 통하는 양통집으로 경상북도지역의 대표적인 서민주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비촌 자료사진>


김구영 가옥 장독대



● 가람댁 가옥


가람댁


가람댁 장독대



승운정(勝雲亭)



 승운정(勝雲亭)


竹溪寒瀉白雲層(죽계한사백운층) - 죽계골짜기는 한기를 쏟아내고 흰구름 층층이

小白南墟古順興(소백남허고순흥) - 소백산 남쪽터 옛 순흥(안향선생고향)이라




두암고택 담장 밑 사철채송화


사철채송화: 4월에 꽃이피며 9월에 열매가 익는다. 석류풀과



두암고택





우금촌 두암고택



두암고택 본체


두암고택 사랑채




인동장씨 종택







인동장씨 종택



기타



 풍경1


풍경2


 풍경3


 소수서원 입구에 위치한 제월교(霽月橋)


제월교(霽月橋)


'청다리'라고도 불리는 이 다리 제월교(霽月橋)는 정축지변(丁丑之變) 때 수백명의 선비와 가족들이 몰살당할 당시 사건에 연루된 희생자 중 살아남은 아이들을 관군들이 한양에 데려가 키우는데, 생부모도 모른 채 자란 아이들이 나중에 "내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했다고 합니다. 또한편 소수서원의 선비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그 선비들이 집에 데려다 키울때 집안에는 '청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고 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고도 전합니다. 흔히 장난처럼 던지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12:16 / 선비촌버스정류장 출발 [부석사행 27번 버스]


소수서원과 선비촌 답사를 마친 후 '영주여객차고지'에서 11:30분에 출발한 부석사행 27번 버스를 선비촌버스정류장에서 탑승하였습니다.






       소수서원(紹修書院), 선비촌 / 영주(榮州)-1

                                                                       (2019.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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