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경상북도

병산서원·임청각/안동(安東)-2

케인스 2019. 5. 15. 22:52

 

 

                 병산서원·임청각

/ 안동(安東)-2

 

 

☞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시(安東市) 병산서원(屛山書院)

 

 

 

 

안동시 병산서원 위치 <google참고사진>

 

 

병산서원(屛山書院)

  

 

 

 

 

 

 

 ● 세계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 안동 병산서원

 

병산서원(屛山書院): 경북 안동)은 2019년 7월6일 16∼17세기에 건립된 국내 9개 서원과 함께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되었습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국내 9개 서원은 소수서원(경북 영주), 도산서원(경북 안동), 병산서원(경북 안동),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필암서원(전남 장성),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 입니다.

 

 

 

 

 

 

 

 

       병산서원 위치 <google참고사진>

 

낙동강의 물돌이가 크게 S자를 그리며 하회를 감싸안아 흐르는데 그 물길이 감싸는 중심에 있는 화산(花山) 자락의 양쪽 끝에 하회(河回)마을과 병산서원(屛山書院)이 각각 자리하고 있습니다.

 

 

병산서원 전경 <참고사진>

 

 

             병산서원 배치도 <google참고사진>

 

병산서원의 배치나 구성은 서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원건축은 교학(敎學)을 위한 강학 건물과 제향(祭享) 공간인 사당, 부속시설 이렇게 세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병산서원의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병산서원 평면도 <참고사진>
                                              1) 강학건물군 : 복례문, 만대루, 동서재, 입교당, 장판각
                                              2) 제향건물군 : 내삼문(신문), 존덕사(사당), 전사청
                                              3) 부속시설군 : 고직사(주소), 달팽이 뒷간, 광영지, 기타

13:30 / 병산서원 주차장

 

주차장에서 내려 병산서원으로 향합니다. 사진의 건물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준비를 위해 신축 한 화장실 건물입니다. 주위의 빈터에도 무언가 조성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병산서원 가는 길 우측에는 과수원이나 콩밭이 있었다고 합니다.

 

병산서원 가는 길 좌측에는 낙동강와 풍산들이 조화롭게 이어집니다.

 

 

오른쪽으로 아늑하게 자리집은 병산서원이 보입니다.

 

 

왼쪽으로는 조용히 흐르고 있는 낙동강과 강가의 모래밭 그리고 잘 가꾸어 놓은 진입로 양쪽의 조경공간이 눈에 들어옵니다.

 

 

13:40 /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제260호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柳成龍)과 그의 아들 류진(柳袗)을 배향한 서원입니다. 모태는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 고장에 왔을 때 면학하는 유생들을 가상히 여겨 내려준 토지 8백 두락(斗落)을 받기도 했습니다. 서애 류성룡이 선조대에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온 후 임진왜란 때 불타고 광해군2년(1610) 류성룡의 제자들이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여 사당(祠堂)인 존덕사(尊德祠)를 짓고,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습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복례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 등이 있습니다. 

병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으로,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입니다.   

13:40 / 병산서원 종합안내판

 

 

 

 

 

 

병산서원의 배산(背山)은 화산(花山)이며 서원 앞에 보이는 산은 병산(屛山)으로 병풍산이라는 의미입니다.

 

 

 

● 복례문(復禮門)

 

 

 

13:41 /

복례문(復禮門)
외삼문(外三門)인 복례문입니다. 서원(書院)의 정문은 삼문(三門)형식이 일반적인데 병산서원(屛山書院)의 솟을삼문은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좌우로는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례문 안쪽은 바깥쪽과는 그 모습이 다릅니다.

 

 

 

 

복례문(復禮門)의 외부와 내부 모습


복례문(復禮門) 앞 풍경
복례문(復禮門) 바깥 쪽 휘돌아가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 병산(屛山)은, 「영가지」의 지도에 '청천절벽(晴川絶壁)' 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있는데 맑은 물에 우뚝 솟은 절벽이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원(書院)과 병산이 마주보고 있는 셈입니다.

병산(屛山)의 험한 벼랑 <참고사진>
복례문(復禮門)은 1921년 현재의 위치에 이건(移建)된 것인데 원래는 병산(屛山)의 험한 형세를 피하고자 풍수원리를 담아 만대루(晩對樓) 동편에 있었습니다. 경내에서 앞에있는 병산의 벼랑을 보면 하회마을 부용대와 같이 절벽의 험한 바위가 보입니다. 이런 경우 풍수에서는 산에 살기가 있다하여 기피하게 됩니다. 하회마을에서는 이러한 나쁜 기운을 막기위해 소나무를 심어서 물리치려 했지만, 병산서원에서는 만대루(晩對樓)라는 건물을 지어 그 기운을 막아서고 있었다고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쪽에 문을 내어 나쁜 기운을 맞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복례문(復禮門) 현판

 

 ‘복례(復禮)’라는 이름은 논어 <克己復禮爲仁>에서 유래합니다. 이는 공자의 가르침을 함축한 경구(警句)로서,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는 유학(儒學)의 자기절제의 정신을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복례문(復禮門)

돌담 오른쪽 모서리에는 뒷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복례문 안쪽에서 본 양반들이 사용하는 2인용 뒷간 모습입니다.

 

 

                                              일어서면 서로 마주볼 수 있는 뒷간 내부 모습

 

 

복례문(復禮門)의 내부 모습

 

복례문 안쪽 좌우칸은 물건을 둘 수 있도록 가운데 층칸을 두었습니다. 주로 향사(享祀) 때 제수(祭需)를 운반하는 의례용 가마를 보관해 두고 있습니다.

 

 

동쪽 칸에 있는 제수 운반용 가마

 

 

 쪽 칸에 있는 제수 운반용 가마

 

 

광영지(光影池): 연못[복례문 옆]

                      

 

 

 

13:44 / 광영지(光影池)

 

 

만대루(晩對樓)

 

 

 

13:42 / 만대루(晩對樓)

 

복례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의 길게 서있는 만대루가 보입니다. 만대루 아래는 가파른 계단이 조성되어 있으며, 계단 양 옆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만대루(晩對樓)

 

만대루는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입니다. 팔작지붕 기와집에 홑처마로 된 이 건물은 인공적인 서원건축과 자연사이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데 한국 서원건축의 백미로 꼽힙니다.  만대루는 건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병산서원을 대표하는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입니다.

 

 

만대루(晩對樓) 현판

 

‘만대(晩對)’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인 '취병의만대 백곡회심유(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에서 따온 것으로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만 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히 즐기기 좋구나’. 로 풀이 합니다.


7칸 기둥사이로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은 마치 7폭 병풍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합니다. <참고사진>

 

 

만대루(晩對樓) <참고사진>

 

난간도 없이 만대루로 오르는 깍아만든 두개의 통나무 계단이 어울리는듯 어울리지 않는듯 참 묘한 모습입니다. 계단을 오를 때 어린이와 노약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만대루(晩對樓) 누마루 <참고사진>

 

200명을 수용하고도 남음이 있는 만대루 누마루는 낙동강과 병산의 풍광을 건축적으로 끌어안는 구실을 합니다. 유홍준 작가는 '만대루에서의 조망, 그것이 병산서원 자리잡음의 핵심인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머리 위로 휘어진 통나무 대들보가 눈에 뜁니다.

 

 

                 휘어진 모습 그대로의 만대루 아래층 나무 기둥과 자연 그대로의 주춧돌 <참고사진>

 

 

입교당(立敎堂)

 

 

입교당(立敎堂) <참고사진>
만대루(晩對樓) 누마루 아래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이 보입니다. 입교(立敎)는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입교당 양쪽에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 건물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습니다. 

 

 

 13:46 / 입교당(立敎堂)

 

병산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건물로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는 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입니다. 원래 명칭은 숭교당(崇敎堂)이었고 명륜당(明倫堂)이라고도 불렸습니다.  3칸의 대청으로 개방된 강학당(講學堂)을 가운데로, 동쪽 1칸 온돌방의 명성재(明誠齋)와 서쪽 1칸 온돌방의 경의재(敬義齋),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툇마루가 마련된 명성재에는 서원의 원장(院長)이 기거했으며, 서쪽의 경의재는 유사(儒士)들이 기거하며 이른바 교무실에 해당하는 기능을 담당하였습니다.

 

 

 

 

 

 

 

 

                               병산서원(屛山書院), 입교당(立敎堂) 현판 <참고사진>

 

3칸의 대청으로 개방된 강학당(講學堂)  <참고사진>
  명성재(明誠齋): 동쪽 1칸 온돌방  <참고사진>
  경의재(敬義齋): 서쪽 1칸 온돌방

 

 

입교당에서 내려다 본 전경

 

길게 펼쳐진 만대루 지붕 위쪽으로 병산이 보이고 누각의 기둥 사이로 낙동강 강물과 백사장이 펼쳐져 보입니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13:49 / 동재(東齋)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하고 있습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두 건물은 똑같이 크고 작은 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강당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입니다. 2칸 규모의 큰 방은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입니다. 좌고우저(左高右低)의 원리를 쫓아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하였습니다.

 

 

 

 동재(東齋)/동직재(動直齋)                                            서재(西齋)/정허재(靜虛齋)


                             <안동mbc 참고자료>

 

 

13:49 / 서재(西齋)

 

      

                                                        서재(西齋) 작은방 현판 장서실(藏書室) <참고사진>

 

서재(西齋)의 작은방에는 장서실(藏書室)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으며 책을 보관하기위해 온돌을 놓지않고 마루를 깔았습니다.

 

입교당 정료대(庭燎臺)

 

 

 

정료대(庭燎臺)

 

마당에서 입교당을 오르는 양쪽계단 사이에는 정료대(庭燎臺)가 있습니다. 최근에 조성한 것 같습니다. 정료대(庭燎臺)란 원래 사찰, 서원 등에서의 야간 행사 때 관솔이나 송진을 태워 경내를 밝히던 것으로 '노주석(露柱石)', '불우리', '노반지주(露盤之柱)', '광명대(光明臺)', '화사석(火舍石)', '소대(燒臺)' 등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료대는 대부분 높이 1~1.5m 정도의 4각角내지 6각 또는 8각 기둥(柱) 형태로 되어 있고 상부석은 보통 원형의 사발 모양이나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관솔이란 소나무의 가지가 부러지면 옹이가 되고 옹이 주변에는 많은 송진이 모여 형성된 된 것입니다. 이것을 쪼개어 한 쪽 끝에 불을 붙이면 송진이 계속 빨려 올라오면서 아주 오래 불이 붙어 있게 됩니다.

 

입교당 뒷면

 

 

장판각(藏板閣)

 

 

 

장판각(藏板閣)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木版)과 유물을 보관하던 곳이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습기를 피하기 위해 정면에 모두 판문(板門)을 달았습니다.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서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서원의 명문도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 가운데 하나는 바로 판본의 소장량이기 때문에 책을 발간하는 목판은 서원의 소중한 재산이었습니다.

 

 

 

                                            장판각(藏板閣) 현판

 

 

내삼문(內三門)

 

 

 

내삼문(內三門)

 

신문(神門)이라고도 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사당인 존덕사(尊德祀)로 진입하는 문입니다.  정면 3칸의 솟을삼문으로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습니다. 향사례에서 신문 앞의 마당은 중요한 장소입니다. 의식을 행하는 제관들은 신문(神門)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서원의 학생들은 앞마당에서 참관하여야 합니다.

 

 

 

 

 

 

내삼문(內三門)/신문(神門) 오르는 계단 왼쪽에 수령 380년(2008년 기준)된 배롱나무

 

 

 

 

존덕사(尊德祠)



 

존덕사(尊德祠) <참고사진>

 

서애 류성룡(柳成龍)선생과 그의 아들 수암 류진(柳袗)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祠堂)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이며 풍판이 설치된 맞배지붕건물로 변형된 익공(翼工)양식의 겹처마로 단청이 되어 있습니다. 서원에서 가장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당 전면 좌우에 계단과 정료대(庭燎臺)를 두고 있고, 동쪽 계단 옆에는 관세대(盥洗臺)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존덕사(尊德祠) 현판
사당 전면 좌우에 있는 정료대(庭燎臺) <참고사진>
                                                   동쪽 계단 옆 관세대(盥洗臺)와 정료대(庭燎臺)
정료대(庭燎臺)는 밤에 서원을 밝히는 조명시설로 석재 위에 관솔을 피워 정원을 밝혔으며, 관세대(盥洗臺)는 제향(祭享) 때 제관들이 손을 씻을 수 있는 대야를 올려놓는 받침대입니다.

춘추향사(春秋享祀)

 

 

 

춘추향사(春秋享祀) <참고사진>

 

향사

 

(享祀)

 

는 서애(西厓)선생과 수암(修巖)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는 행사입니다. 병산서원의 가장 큰 행사로 매년 봄, 가을 두 번 치러지며, 향사일은 각각 음력 3월 첫째 정일(丁日)과 9월 첫째 정일(丁日)입니다.

 

 

 

전사청(典祀廳)

 

 

 

  내삼문 계단 우측에 있는 전사청(典祀廳)으로 향하는 협문(夾門) <참고사진>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존덕사의 우측에 자리하고 있으며, 향사(享祀) 때 올릴 제수(祭需)를 준비하는 곳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당과 한 울타리 안에 두지만 병산서원의 경우에는 전사청과 사당이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래쪽에 있는 고직사(庫直舍) 건물과 중심축을 맞춤으로써 전사청으로 올라오는 제수를 마련하는 고직사의 작업을 충실히 지휘 감독하기 위함일 것으로 보입니다.

 

 

                                               전사청(典祀廳) 현판

 

전사청(典祀廳) 뒤뜰

 

 

전사청(典祀廳) 뒷모습

 

 

고직사(庫直舍)

 

 

 

고직사(庫直舍)

 

고직사(庫直舍)는 안동지방 고유의 뜰 집 형식인 ‘ㅁ’자형 건물군입니다. 3칸 대청이 마당의 전면과 맞닿아 있고 양쪽으로 방을 들였습니다. 서원의 관리와 식사 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묘지기, 장무, 정지지기들이 거주하였고, 향사제 기간에는 참가자들을 위한 숙소로도 이용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용도의 건물을 주소(廚所) 또는 교직사(校直舍)라고도 합니다.

 

 

13:56 / 고직사 옆 협문

 

병산서원 정문 외에 서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협문으로 고직사에서 전사청, 존덕사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전사청에서 내려다 보는 고직사(庫直舍) 뒷면

 

 

달팽이 뒷간

 

 

 

13:57 / 달팽이 뒷간

 

서원 밖 고직사(庫直舍) 앞에 있는 화장실입니다.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그 모양새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입니다. 지붕이 따로 없는 이 하늘 열린 '달팽이 뒷간'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것입니다. 400여년 전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도 전해집니다. 병산서원의 부속건물에 포함되어 2003년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고 사적 제 206호(1977년)로 지정되었습니다.

 

 

 

 

 

 

달팽이 뒷간


복례문 돌담 모서리에 있는 양반용 뒷간과는 달리 서원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사용하였다 하여 ‘머슴뒷간’이라고도 부릅니다.

 

 

13:58 / 병산서원 답사를 마치고 다음 일정을 위해 이동합니다.

 

 

 미국 41대 조지 부쉬 대통령 부인 바바라 부쉬 여사의 병산서원 방문 기념 식수(2005.11.13)

 

 

14:00 / 병산서원 주차장으로 이동합니다.

 

 

☞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시(安東市) 임청각(臨淸閣), 법흥사지 칠층전탑(法興寺址 七層塼塔)

 

 

 

안동시 임청각, 법흥사지 칠층전탑 위치 <google참고사진>

 

 

 안동시 임청각, 법흥사지 칠층전탑 위치 <google참고사진>

 

안동역 앞에서 진보·영양으로 난 34번 국도를 따라 약 1㎞ 가면 법흥교 앞 법흥육거리에 닿습니다. 이곳에서 왼쪽 안동댐으로 난 길을 따라 300m 가면 길 왼쪽으로 중앙선 철도 밑을 지나는 터널이 나오며 터널을 지나면 왼쪽에 칠층전탑이 서 있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임청각이 있습니다.

 

 

법흥사지 칠층전탑(法興寺址 七層塼塔): 국보 제16호

 

 

 

15:09 /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安東 法興寺址 七層塼塔):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국내에서 가장 키가 크고 오래된 통일신라시대 칠층전탑으로 높이는 16.8m, 기단 폭은 7.75m로 1487년(성종 18)에 개축된 바 있습니다.  이 일대의 지명을 법흥리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법흥사(法興寺)에 세워진 전탑으로 추정됩니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安東 法興寺址 七層塼塔)

 

판석 조각의 수법은 시대가 동일하지 않고 탑신부는 무늬 없는 회색 벽돌로 축조되었고, 옥개 상면에는 곳곳에 기와를 입혔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는데 원래는 금동제(金銅製) 상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없습니다.

 

기단부(基壇部)

 

기단(基壇)은 단층에 평면은 방형(方形)이고 현재는 지표에 팔부중상(八部衆像) 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양각한 화강석 판석을 동·남·북 3면에 각 6장씩 세우고 초층 옥신 밑면의 공간은 원분(圓墳) 모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팔부중상(八部衆像)이나 사천왕상(四天王像)들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서로 제작연대에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배치순서도 무질서하며, 단층기단 측면에 이렇게 많은 조상(彫像)을 배치한 예가 없다고 합니다.

 

 

 탑신부(塔身部)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을 길이 약 28cm, 너비 약 14cm, 두께 약 6cm의 진회색의 무늬없는 전돌로 어긋나게 쌓았습니다.

 

 

 

1층옥신은 매우 높고 남면 중앙 하반부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계단은 단층기단 형식이고 8개의 계단 위에는 화강석으로 테를 두른 높이 90cm, 너비 54cm의 작은 감실(龕室)이 있습니다. 기단상면은 비스듬히 둥글게 시멘트를 칠하여 어느 정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지 의문입니다.

 

 

                       찰주공 <참고사진>

 

             내부는 위를 방추형으로 줄여 1면 48cm의 방형 구멍이 정상에 나 있어 찰주공(擦柱孔: 탑의 중심기둥)으로 보입니다.

 

                        

 

 

2층 옥신은 초층옥신의 높이에 비하여 약 4분의 1로 높이가 급격히 줄었을 뿐 3층 이상의 체감률은 심하지 않아 7층이라는 높이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습니다. 옥개석(屋蓋石)은 전탑 특유의 형태로서 처마 상하에 층단이 나타나며 처마는 수평이고 각 층 옥개의 너비는 석탑에 비하여 현저히 감축되었습니다.

 

 

 

낙수면에는 극히 일부에 기와를 입혔을 것으로 보이며 전탑에 앞서 목탑이 존재하였고 전탑은 목탑을 모방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상륜부(相輪部)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으나 영가지(永嘉誌)>에 기록된 “부동오리(府東五里)”에 있다는 ‘법흥사전탑(法興寺塼塔)’이 이 전탑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법흥사전탑에 관하여 “상유금동지식이고철면납관주성객사소용집물(上有金銅之飾 李股撤面納官鑄成客舍所用什物)”이라는 기록이 있어 원래는 금동 상륜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安東 固城李氏 塔洞派 宗宅)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安東 法興寺址 七層塼塔) 옆에는 고성 이씨 탑동파 종택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집터는 신라시대 고찰인 법흥사가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固城李氏 塔洞派 宗宅)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을 뒤로하고 임청각으로 향합니다.

 

 

임청각(臨淸閣)

 

 

 

15:12 / 임청각(臨淸閣)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安東 法興寺址 七層塼塔)에서 안동 시내방향으로 약1분 걸어 오면 임청각(臨淸閣)이 있습니다.

 

 

 

임청각(臨淸閣) 전경 <참고사진>
임청각(臨淸閣)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살림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안동 고성이씨의 법흥파 종택입니다.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1368~1429)의 여섯째 아들인 영산현감 이증(李增)이 이곳에 자리잡음으로써 입향조(入鄕祖)가 되었고 이증의 셋째 아들로 중종10년(1515)에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지은 별당형 정자(亭子)입니다.

 

 

임청각 평면도 <참고사진>

 

임청각은 크게 별당(군자정), 사당, 살림채로 구분되어 있고 , 살림채는 다시 안채, 사랑채, 중채, 안행랑채, 바깥행랑채로 나누어져 있으며 또한 크고 작은 다섯개의 마당 즉, 안마당(중정), 사랑채마당, 안행랑마당, 바깥행랑마당, 대문진입마당이 있습니다. 살림채는 용(用)자가 옆으로 누운 형으로 되어 있고, 별당인 군자정(君子亭)은 ‘丁’자 형으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임청각(臨淸閣) 전경 <참고사진>

임청각은 영남산(映南山) 동쪽 기슭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형 명당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영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지어진 전통한옥입니다. 99칸 기와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 별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 군자정(君子亭)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었으나 일제가 임청각의 맥을 끊겠다며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도를 놓는 바람에 50여칸이 강제로 철거되었습니다.

 

 

  임청각(臨淸閣) <참고사진>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국무령(初代國務領: 임시정부 2차 개헌 때의 국가 수반)을 지내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독립투쟁의 토대를 마련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1858∼19332)선생의 생가입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종손으로서의 권위를 보장받은 사람이었으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고난의 길을 자처하며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은 물론이고 99칸 짜리 임청각까지 처분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무장독립투쟁의 중심에 서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행동하는 분이었습니다.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선생 <참고사진>
국무령(國務領)은 임시정부가 1926년에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채택한 지도체제인 국무령제(國務領制)의 우두머리이며 국가 수반입니다.


임시정부는 모두 5번의 개헌을 통해 지도체제를 자주 바꾸었습니다. 처음에는 국무총리제(國務總理制: 1919. 4~9)였다가 대통령제(大統領制: 1919. 9~1925. 4)를 거쳐, 국무령제(國務領制: 1925. 3~1927. 4)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국무위원제(國務委員: 1927. 3~1940. 10)가 시행되다가 주석제(主席制: 1940. 10~1944. 10)로 되었으며, 다시 주석·부주석제(主席·副主席制1944. 10~1945. 8)로 바뀌었습니다.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선생의 임기는1925년 9월~1926년 2월 18일이었습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가 9명이 임청각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임청각의 사위들 또한 독립유공자들입니다.

 

 

 

 

15:12 / 안동 임청각 (安東 臨淸閣): 보물 제182호

 

원래는 중층 누각형 대문이었는데 일제가 철길을 명분으로 철거하여 현재는 임청각 건물 규모에 비해 초라한 대문으로 보입니다.

 

 

 

 

 

군자정(君子亭)

 

 

 

군자정(君子亭) <참고사진>

 

군자정(君子亭) 오르는 계단 옆 표지석: 寶物 第182號, 安東 臨淸閣

 

 

임청각(臨淸閣): 국가 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임청각(보물 제 182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32)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또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그의 동생 이상동(李相東), 이봉희(李鳳羲), 아들 이준형(李濬衡), 손자 이병화(李炳華), 조카 이형국(李衡國), 이운형(李運衡), 이광민(李光民), 종숙 이승화(李承和) 등도 모두 이집에서 태어났다.

 이상용 일가는 의병항쟁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발을 내딛고, 1909년에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만들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면서 다른 곳과는 다르게 군사조직과 군사력 향상에 앞장섰다.

 1910년 나라가 멸망하자 일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이상룡은 국내에서 계획하던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서로군정서를 이끌며, 서간도지역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에 올라 민족운동계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1932년 서란현 소과전자촌에서 서거할 때까지,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시키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가족과 후손들은 그 뜻을 받들어 광복을 맞을 때까지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며 끈질기게 항일운동을 펼쳤다.

 광복 45년이 지난 1990년 이상룡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 대전 현충원에 모셨다가 국립 서울현충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묘역으로 옮겨졌다.

 나라에서는 2009년 5월25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아홉 분의 우뚝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 분들이 태어나신 임청각을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안동 임청각 정침 군자정[安東 臨淸閣 正枕 君子亭]: 보물 제182호

<참고사진>

 

군자정(君子亭)은 목조건물로는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임진왜란을 겪어 온 오래된 건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평면이 고무래정(丁)자 형태로 되어 있으며 구조는 서쪽에 1칸 크기의 마루방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2칸 크기의 온돌방과 1칸 크기의 온돌방을 배치시켰으며, 일렬로 늘어선 이들 방과 접하여 동쪽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을 꾸몄습니다. 온돌방은 각주를 세운 간단한 구조의 홑처마, 대청은 원주를 사용한 겹처마로 구성하였고, 벽은 회벽을 치고 대청 주위에는 판문을, 온돌방에는 빗살문을 달아 놓았습니다. 

 

 

 

군자정(君子亭)

 

출입은 두 군데에 마련해 놓은 돌층계를 이용하게 되어 있으며 방과 대청 주위에는 서쪽 뒷방의 좌측과 뒷면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 툇마루를 두고 계자 난간을 둘렀습니다.

 

 

                                              군자정(君子亭) 현판

 

 

                       계단 옆 안동 임청각 정침 군자정[보물 제182호]의 표지석과 물확

 

                       드나드는 사람들이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돌확에 물을 채워두었습니다.

 

 

 

서쪽 4칸 구조 및 돌층계

 

 

군자정 서쪽면

 

 

대청내부 천장 구조 <참고사진>


 

 

 

 

 

  대청과 서쪽 방 <참고사진>

 

 

                                     임청각(臨淸閣) 현판

 

대청에 걸려있는 임청각의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이며, "임청각(臨淸閣)"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라는 싯구에서 ‘임(臨)자’와 ‘청(淸)자’를 취한 것입니다.

 

 

  서쪽 방 내부 <참고사진>

 

 

 

많은 훈장증 등이 걸려있는 대청 동쪽면 <참고사진>

 

 

   각종 현판 <참고사진>

 

 군자정 대청에는 퇴계 이황의 친필인 임청각 현판 외에 농암 이현보, 제봉 고경명, 백사 윤훤, 송강 조사수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대청 서쪽 벽면에 걸려있는 각종 훈장, 왼쪽부터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애국장(愛國章), 독립장(獨立章)

 

 

군자정 북쪽

 

 

 연지(蓮池)

 

군자정은 별당형 정자건축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는 건물로 정자 옆에 연지(蓮池)를 조성하여 군자를 표상하는 연꽃을 심었습니다. 연지 너머로 사당이 보입니다.

 

 

군자정(君子亭)연지(蓮池): 네모난 연못이라하여 방지(方池)라고도 합니다.

 

 

사당(祠堂)

 

 

 

사당(祠堂)

 

정자 옆 방지(方池)를 지나면 정면 3칸, 측면 3칸의 크기의 사당이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당에는 원래 불천위와 더불어 4대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였으나 석주 이상룡 선생이 한일합방이 되자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만주로 떠날 때 신주를 모두 장주(藏主: 신주를 땅에 묻음)하여 현재 봉안된 신위가 없습니다.

 

 

사당 출입문

 

사당(祠堂) <참고사진>
사당(祠堂):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참고사진>

 

● 살림채

임청각 살림채 평면도

<건축사무소아라가야 자료>


군자정 서쪽에 위치한 살림채는 양지바른 산기슭에 자리잡았는데 전체 50여 칸 규모로 지은 용(用)자형이며 어느 방에서도 햇빛이 잘드는 집입니다. 따라서 건물 가운데 몇개위 작은 마당이 있습니다. 이런 모양을 풍수적으로는 길하다고 합니다.

입구로 들어서 왼쪽에 길게 뻗어있는 바깥행랑채의 동쪽 끝부분에는 「명품고택(名品古宅)」인증 표지판이 걸려있습니다.


★ 사랑

 

 사랑채: 석주 이상룡 선생이 출생한 곳입니다. 대청을 통해 안채와 연결됩니다.

 

마당 가운데 우물이 있습니다. 방 3칸과 마루 2칸을 사랑채용으로 사용하는것 같습니다. 
                  아직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물입니다. <참고사진>

 

 

   <참고사진>

 

사랑채와 중채가 우물을 중심으로 마주하고 있으며 안채를 출입할 수 있는 쪽문이 있습니다. 쪽문을 들어서면 안채 마당에 이릅니다.

 

 

사랑채 동쪽 협문(夾門)을 나서면 별당(別堂) 군자정(君子亭)이 있습니다.

 

 

살림채 뒷면: 건물 기단과 뒤뜰 축대 사이에 배수로를 깊이 조성하였습니다.

 

 

★ 안

안채마당: 계속 들어가면 안행랑채 마당이 나옵니다. <참고사진>

 

안채 <참고사진>

임청각의 안채는 현재 후손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건물 중앙에 4칸 대청을 두었으며 그 좌우에는 앞 뒤 채를 연결하는 방이 있습니다.

★ 안행랑채

 


   안채마당에서 안행랑채마당으로 통하는길 <참고사진>

안행랑채: 여자 노비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서쪽 끝부분은 다락방으로 남북을 연결하였으며 이들은 곳간으로 사용되고 부엌도 이쪽 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안행랑채: 이 마당에서 남쪽으로 난 쪽문은 바깥행랑마당으로 이어집니다. <참고사진>

 

 

★ 중

사랑채와 마주하고 있는 3칸 중채입니다.
중채: 현재는 한옥체험관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 바깥행랑채

 

 

 

바깥행랑채: 13칸이나 되는 헛간으로 이루어진 긴 건물로 밖에서 보면 임청각 전체의 얼굴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바깥행랑채 동쪽 끝부분: 안에 있는 쪽문을 들어서면 바깥행랑마당이 나옵니다. 쪽문 위에는 '임청각 작은 전시관'이란 팻말이 걸려 있습니다. <참고사진>

 

 

   

     

 

    쪽문 속으로 보이는 바깥행랑마당 <참고사진>

 

 

바깥행랑마당으로 안행랑채와 바깥행랑채 사이의 공간입니다.

 

안행랑채에서 바깥행랑채로 출입할 수 있는 쪽문입니다. 

 

바깥행랑마당 안쪽에서 '임청각 작은 전시관' 팻말이 붙어있는 쪽문 방향

 

다락방

 

 

15:31 / 바깥행랑채

 

 

 바깥행랑채: 담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모습의 행랑채가 이 집이 99칸 집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

 

 

15:36 / 버스를 타기위해 중앙선 철길 밑 터널 지점으로 돌아가 봉정사로 향합니다.

 

 

 

위에 기재된 사진 해설 내용은 상당부분 '병산서원과 임청각홈페이지'에서 참조하였습니다.

 

 

              병산서원·임청각 / 안동(安東)-2

                                                                      (2019.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