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경상북도

봉정사(鳳停寺)/안동(安東)-3

케인스 2019. 5. 16. 15:02



                 봉정사(鳳停寺) / 안동(安東)-3

 


☞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시(安東市) 봉정사(鳳停寺)



안동시 봉정사 위치 <google참고사진>



● 세계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 안동 봉정사


봉정사(鳳停寺: 경북 안동)는 2018년 6월30일  대한민국의 산사(山寺) 7곳과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山寺, 韓國의 山地 僧院·僧園)’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되었습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산사(山寺) 7곳의 사찰은 경남 양산 통도사, 경북 영주 부석사, 충북 보은 법주사, 전남 해남 대흥사, 경북 안동 봉정사, 충남 공주 마곡사, 전남 순천 선암사입니다.


                  <참고사진>



봉정사(鳳停寺)

  


                봉정사 가는길 <google참고사진>


16:10 / 봉정사 매표소.주차장 <참고사진> 


안동 시내 임청각을 출발하여 이곳 봉정사 입구 매표소에 도착하였습니다. 매표소에서 봉정사까지는 도보 약15분 정도 소요됩니다.


봉정사(鳳停寺)는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촬영장소입니다.




天燈山鳳停寺(천등산 봉정사) 표지석


천등산(天燈山)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봉정사(鳳停寺)입니다. 672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이 절은 목조건물의 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오래된 목조건물이 많습니다. 특히 극락전은 고려시대 공민왕 12년인 1363년에 중수한 것으로 밝혀져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로 인정받았습니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 때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명옥대(鳴玉臺)



16:13 / 명옥대(鳴玉臺) 표지석


봉정사 매표소에서 봉정사를 향해 조금 오르다 보면 곧 왼쪽 길 가에 명옥대(鳴玉臺) 표지석이 나타나고, 화살표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면 커다란 바위 밑으로 명옥대가 보입니다.


16:14 / 명옥대(鳴玉臺)와 폭포바위


명옥대(鳴玉臺)는 봉정사(鳳停寺) 어귀의 왼쪽 석간수(石間水)가 흐르는 계곡의 건너편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명옥대가 있는 태장리는 공민왕 시절 궁중에서 이곳에 태를 묻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에는 태무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명옥대(鳴玉臺):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4호


명옥대(鳴玉臺)는 현종6년(1665)에 사림(士林)에서 옛날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이 후학들에게 강학(講學)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누각형(樓閣形) 정자(亭子)입니다. 퇴계 선생은 16살 때 숙부이며 스승인 이우(李瑀)의 주선으로 봉정사(鳳停寺)에서 사촌인 이수령, 권민의, 강한과 함께 3개월 정도 독서를 했다고 합니다. 이황은 50년이 지난 1566년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강학을 했습니다.

 명옥대(鳴玉臺) <참고사진>


명옥대(鳴玉臺)는 원래 수십명이 앉을 수 있는 옆의 큰 바위에서 쏟아져내리는 폭포수를  바라보는 정자였기에 낙수대(落水臺)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황이 중국 서진(西晉) 시대의 시인 육사형(陸士衡: 이름은 기,機)가 쓴 초은시(招隱詩)에 "솟구쳐 나는 샘물이 명옥을 씻어 내리네(飛泉漱鳴玉)"라는 글귀를 다라 명옥대(鳴玉臺)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두 개의 현판: 창암정사(倉巖精舍)와 명옥대(鳴玉臺) <참고사진>


정자에는 명옥대 편액 외에 ‘창암정사(倉巖精舍)라는 현판도 나란히 걸려 있는데 아래의 퇴계 이황의 시 '명옥대(鳴玉臺)'에 나오는 창암(倉巖)을 딴 것이라 합니다.



명옥대 안에는 이 정자의 이름이 본래 낙수대(落水臺)였으나 육사형의 시구에서 글을 따 명옥대로 개칭했다는 내용과 퇴계 선생이 50년이 지나 죽기 3년전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 66살 때 이곳을 다시 찾아 지은 시가 적혀있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此地經遊五十年(이곳에서 노닌 지 오십 년)

                       韶顔春醉百花前(젊었을 적 봄날에는 온갖 꽃 앞에서 취했었지)

                       只今攜手人何處(함께 한 사람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

                       依舊蒼巖白水懸(푸른 바위, 맑은 폭포는 예전 그대로인데)

                       白水蒼巖境益奇(맑은 물, 푸른 바위 경치는 더욱 기이한데)

                       無人來賞澗林悲(완상하러 오는 사람 없어 계곡과 숲은 슬퍼하네)

                       他年好事如相問(훗날 호사가가 묻는다면)

                       爲報溪翁坐詠時(퇴계 늙은이 앉아 시 읊던 때라 대답해주오)


나이들어 어린시절 놀던 곳을 돌아보니 맑은 물, 푸른바위 그대로 인데 친구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으니 함께 했던 친구들 생각에 시 한수 남기지 않고 떠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명옥대사적비(鳴玉臺史蹟碑)


                                         명옥대 사적비는 퇴계 이황이 이곳에서 강학을 했다는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명옥대(鳴玉臺) 폭포바위 <참고사진>


명옥대(鳴玉臺) 폭포바위 <참고사진>


명옥대(鳴玉臺)의 폭포바위 중턱에 큰 글씨로 ‘명옥대(鳴玉臺)’라 새기고 4행의 해서체 글씨를 새겼습니다.



          「鳴玉臺,  辛乃沃李宰文緯世尹剛中欽中端中隆慶元年夏同遊開林築臺題詩以追退溪先生之志 <참고사진>


‘辛乃沃, 李宰, 文緯世, 尹剛中, 尹欽中, 尹端中이 융경(隆慶) 원년(1567) 여름에 함께 유람하면서 숲을 열고 대를 쌓고 시를 지어 퇴계선생의 뜻을 추모한다' 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명옥대(鳴玉臺)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 서서히 일주문 지붕이 보이고 조금 더 오르면 일주문은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일주문(一柱門)




16:19 / 일주문(一柱門)


일주문(一柱門)은 1900년 현 위치에 신축하였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측면에 풍판을 설치한 다포양식의 구조입니다. 처마 밑에는 '天燈山鳳停寺' 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일주문 앞 유네스코 세계유산 표지판 <참고사진>


일주문 현판: 天燈山鳳停寺 (천등산 봉정사)


천등산 봉정사(天燈山 鳳停寺) 현판은  은초 정명수(隱樵 鄭命壽 1909~1999) 선생의 글씨입니다. 선생은 진주 태생으로 진주에서 활동한 서예가로 합천 해인사「해탈문(解脫門)」 진주 촉석루「남장대(南將臺)」,「서장대(西將臺)」등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을 이곳에 세운 까닭은 봉정사로 오르는 길이 급한 경사를 이루다가 이곳에서 평지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은 봉정사 오르는 도보길에 쉬어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봉정사안내판 <참고사진>






 16:21 / 지조암(知照菴) 갈림길



16:22


16:23 / 보호수[소나무]




 봉정사 전각 배치도




 천등산 봉정사(天燈山鳳停寺) 전경 <참고사진>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이 창건한 사찰입니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습니다. 그 뒤 더욱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봉황이 머물렀다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鳳停寺)라 명명하였습니다. 그 뒤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인 극락전과 대웅전, 보물인 화엄강당과 고금당 등이 있으며 특히, 고려 공민왕, 최근에는 영국의 여왕이 다녀가기도한 아름다운 사찰입니다.



만세루(萬歲樓)




16:24 / 만세루(萬歲樓)로 오르는 계단입니다.


만세루(萬歲樓): 경상북도유형문화재 325호


만세루(萬歲樓)는 조선 숙종 6년(1680)에 건립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으며, 봉정사 대웅전 앞에 있는 2층의 누각형태를 한 입구에 해당하는 누문(樓門)입니다. 일반적으로 누문은 대부분 이층으로 건축되며 아래층은 사찰의 중정(中庭)으로 통하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하며, 윗층은 산사의 전망을 감상하거나 종루(鐘樓)나 고루(鼓樓)의 기능을 겸하기도 합니다.

 

만세루(萬歲樓) <참고사진>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을 달아 가구의 노출을 방지하고 비나 바람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하였으며, 앞면에서 보면 2층이나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뒷면은 단층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아래층 가운데 칸에 출입문을 두었습니다.



만세루 2층의 천등산 봉정사(天燈山 鳳停寺) 현판은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1846~1922) 선생이 1913년에 쓴 글씨입니다. 동농노환(東農老渙)은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선생을 말하며, 선생은 독립운동에 매진하였고 한학, 서예, 시에 능했다고 합니다.


 만세루(萬歲樓) 2층 누마루


만세루(萬歲樓) 1층 문(門)


조금 숨차게 계단을 오르면 봉정사의 강당인 만세루(萬歲樓) 밑으로 통과하도록 난 문을 지나게 됩니다.


만세루(萬歲樓) 뒷면


 만세루(萬歲樓) 2층 누마루


2층은 연등천장에 네모난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으며, 법고(法鼓)와 목어(木魚)가 비치되어 예불을 알리는 고루(鼓樓)로서의 기능을 합니다. 또한 만세루(萬歲樓)의 현판 및 봉정사의 역사가 적힌 편액들도 걸려 있습니다.



                              

                               만세루(萬歲樓) 현판


2층 중앙칸 내부에는 만세루(萬歲樓)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만세루(萬歲樓) 현판의 글씨는 석능(石能) 김두한(金斗漢)의 글씨라 하는데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덕휘루(德煇樓) 현판 <참고사진>


누각에는 대웅전 쪽에 ‘덕휘루(德輝樓)’라는 큰 현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1846~1922) 선생이 1913년에 쓴 글씨입니다. 원래 덕휘루(德煇樓)로 불리었던 누각의 이름이 언제 만세루(萬歲樓)로 바뀌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대웅전에서 만세루 밑을 내려가는 문



대웅전(大雄殿)



 대웅전(大雄殿):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와 대웅전 앞마당에 연등으로 장엄되어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 국보 제311호 <참고사진>


대웅전은 현재 봉정사의 주불전으로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건물의 일부를 해체하여 수리할 때 일부분의 묵서명이 발견되어 조선 초기에 지어진 건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1363년 극락전을 중수할 때 새로 대웅전을 지어 봉정사의 구획을 이렇게 다시 잡지 않았나 하고 보기도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대웅전은 고려말 건물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다포계 목조건물이 됩니다. 1625년과 1809년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습니다.



대웅전(大雄殿) <참고사진>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에 다포양식을 한 단층건물입니다. 전면 3칸은 전부 개방하고 문짝이 네개로 이루어진 띠살무늬의 사분합(四分閤)을 달았습니다. 이 문짝은 앞의 쪽마루와 함께 후대의 구조물입니다.



                                        대웅전(大雄殿) 현판


대웅전(大雄殿) 불단(佛壇) <참고사진>


대웅전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고, 바닥은 널마루를 전면에 깔고 내부 고주(高柱)를 이용하여 후불벽(後佛壁)을 만들었고 고주(高柱) 앞에는 불단(佛壇)을 짜서 불상을 모셨습니다.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 보물 제1614호 <참고사진>


본존상(本尊像) 뒷벽에는 불벽(佛壁)이 조성되어 있으며 불벽에는 후불벽화 (後佛壁畵 : 불상뒤 벽체에 그린 그림)인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미륵하생도(微勒下生圖)가 보전되어 있습니다. 1997년 1월 후불탱화 보수 과정에서 처음 발견된 이 벽화는 대웅전 불상 뒤 3겹의 석분을 곱게 바른 흙벽에 직접 그린 가로 3.87m, 세로 3.8m 크기의 대형 그림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가는 붓으로 유려하게 묘사한 영산회상도입니다. 특히 본존 왼쪽 상의의 금구장식과 왼쪽 팔꿈치의 옷주름, 대의에 세필로 그린 그림의 세련된 둥근 꽃무늬, 옷깃의 보상당초무늬 등 고려시대 불화의 대표적인 특징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로 인한 박락현상(剝落現象)이 심해 현재는 그 위에 후불탱화인 아미타설법도(阿彌陀說法圖)를 걸고 봉안하고 있습니다.


대웅전 삼존불(三尊佛) <참고사진>


불단 위에 연화좌를 놓고 주불인 석가모니불과 좌 우 협시불인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봉안하였습니다. 후불벽화는 아미타설법도(阿彌陀說法圖)입니다.



아미타설법도(阿彌陀說法圖): 보물 제1643호 <참고사진>


봉정사 대웅전에 후불탱화로 봉안된 아미타불도로서, 비단바탕에 채색한 1713년 작품입니다. 도익(道益), 여청(麗淸), 완심(完心) 등이 조성하였으며 본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보살과 범천, 제석천, 10대제자, 타방불, 사천왕, 팔금강 등을 배치하여 대웅전의 후불탱화로 조성한 불화입니다.


보개천장(寶蓋天障) <참고사진>


천장은 우물 정(井)자를 이룬 우물천장을 하고있으며, 우물 정자 하나하나마다 그 안에 화려한 꽃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불단(佛壇) 위쪽 부분인 보개의 천장에는 구름이 둥실 떠 있는 하늘을 다섯개의 발톱을 가진 두 마리의 황룡과 백룡이 날아가는 모습을 그려 하늘의 신비함과 권능을 표현하였습니다.

                                              

                            동종(銅鐘): 문화재자료 제404호 <참고사진>


대웅전 한켠에 놓여있는 작은 동종(銅鐘)은 조선 순조13년(1813)에 만들어진 것으로 크기는 높이 67㎝, 음통 높이 22㎝, 종입구 지름 55㎝입니다. 이 종은 약식화되고 형식화되었으나 신라시대, 고려시대의 양식을 갖추고 있어 19세기에 만들어진 종으로서 신라, 고려시대의 종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대웅전 전면 툇마루


대웅전은 건물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사랑채에서나 볼 수 있지만, 일반적인 법당 건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경우입니다.


 괘불지주(掛佛支柱)


대웅전 계단 좌, 우에 있는 석조물로 사찰의 행사나 법회 때 법당의 부처님을 대신하여 괘불(탱화)을 걸어두기 위한 지주입니다.


     

    괘불지주[좌, 우]:   많이 손상된 듯 합니다. <참고사진>


 

   괘불지주(掛佛支柱)의 예                                                봉정사 영산회괘불(靈山會掛佛) <참고사진>


탱화의 일종으로 의식용 불화인 괘불의 사용은 법당의 크기에 비해 많은 대중이 참여하는 방생재(放生齋)나 수륙재(水陸齋)와 같이 법당이 아닌 어떤 특정 목적을 가지고 특수한 장소에서 법회를 열어야 할 경우 괘불지주를 세우고 괘불을 걸어 사용합니다. 괘불의 보관은 말아서 대웅전 내에있는 함에 넣어 보관 하고 있습니다. 봉정사 영산회괘불(靈山會掛佛)은 1710년 조성되었으며, 비단에 채색하여 제작된 것으로 크기는 가로 576cm, 세로 731cm 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의 모임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와 하단에 팔대보살이 시립하였으며 상단에 십대제자를 등장시킨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대웅전 측면



화엄강당(華嚴講堂)



 화엄강당(華嚴講堂) 위치 <참고사진>


대웅전 앞 경내에 들어서면 왼쪽에 화엄강당이 동향으로 세워졌으며 앞면은 대웅전 앞마당을 향하고 있고 그 후면은 극락전의 앞쪽이 됩니다.


화엄강당(華嚴講堂): 보물 제448호 <참고사진>


화엄강당(華嚴講堂)은 스님들이 교학(敎學)을 공부하는 장소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온돌방 구조를 갖춘 강당 건물입니다. 극락전과 대웅전이 17세기에 중수되었는데 스님들의 강학공간인 화엄강당도 함께 중수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1969년에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1588년(선조 21)에 손질하여 고쳤다고 합니다.


 <참고사진>


건물 내부는 남쪽 2칸이 부엌이며, 북쪽 4칸이 온돌방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부엌과 방 사이에 벽장이 설치되어있습니다. 1930년대에 『동양미술』에 발표된 『천등산봉정사』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 이 건물이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현재의 온돌방 뒤쪽으로 4칸의 마루가 깔려 있으며 부엌이 지금보다 넓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평면 구성이 언제 오늘날처럼 바뀌었는지는 모르며 1930년대 이후로만 짐작될 뿐입니다.


  화엄강당(華嚴講堂) 뒷면과 남쪽측면 <참고사진>


 강당으로 사용한 건물이므로 대웅전 등의 불당에 비교하여 매우 낮은 기둥을 사용하였습니다.


화엄강당(華嚴講堂) 북쪽측면



현재는 강당(講堂)으로 사용되지 않고 주로 종무소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남측에 있는 1칸의 부엌도 폐쇄되어 창고로 쓰고 있습니다.


                                      

                               화엄강당(華嚴講堂) 현판: 1910년에 쓴 석능(石能) 김두한(金斗漢) 선생 글씨



무량해회(無量海會)



 무량해회(無量海會)  <참고사진>


무량해회(無量海會)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겹처마 집에 전면 1칸과 남쪽에 마루를 놓고 양쪽의 중앙에 칸벽을 설치하여 몇 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부전승(焚修僧: 염불과 기도를 담당하는 승려)과 객승(客僧)의 방, 종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요사(寮舍)채 입니다.


                             

                        무량해회(無量海會) 현판


바다와 같이 한없이 많은 신자가 모인다는 뜻을 가진 무량해회(無量海會)는 1910년에 쓴 석능(石能) 김두한(金斗漢) 선생 글씨입니다.


무량해회(無量海會): 뒤의 건물은 공덕당(功德堂) <참고사진>


중정(中庭)에 면한 무량해회(無量海會) 건물은 비교적 높고 당당한 건물이나 뒷면의 요사(寮舍) 부분은 홑집으로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입니다. 



무량해회(無量海會)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柱聯)은 '입지게(立志偈)'라고 하는 수계를 받을 때 맹서하는 내용입니다. 


                                                                 

                                                                                        <참고사진>


                           自從今身至佛身 (자종금신지불신):  지금부터 이 몸이 불신에 이르도록
                           堅持禁戒不毁犯 (견지금계불훼범):  금계를 굳게 지녀 헐어 범치 않으리니
                           唯願諸佛作證明 (유원제불작증명):  바라건대 제불님네 증명하여 주옵소서.
                          寧捨身命終不退 (영사신명종불퇴):  목숨을 버릴망정 물러나지 않으리다.

                                                            



무량해회(無量海會) <참고사진>


남쪽 면에는 축대 밖으로 튀어나온 열주(烈柱)로 받쳐진 누(樓)와 후면 마당 쪽의 쪽마루가 서로 연결되어 통로는 북쪽을 제외한 3면에 걸쳐 이어져 있습니다.



무량해회(無量海會) <참고사진>


무량해회(無量海會)는 요사채인데 요사(寮舍)란 절에서 스님들이나 신도들이 거처하는 집을 말한다. 불사를 관리하고 강당, 선당에서 수행하는 모든 수행자들의 의식주를 뒷받침해 주는 생활공간이며 휴식공간입니다.

공덕당(功德堂)




공덕당(功德堂) <참고사진>


무량해회(無量海會)와 거의 붙어있는 공덕당(功德堂)은 1992년 건립되었으며, 현재 공양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공덕당(功德堂) 현판


공덕당(功德堂) <참고사진>


무량해회 전각에서 약 2 미터 가량 떨어져 공덕당이 조성되어 무량해회와 공덕당 건물은 전체적으로 '트인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공덕당(功德堂) <참고사진>


2칸 방과 작은 대청 그리고 단칸방 둘이 꺾여 북동쪽을 막아 섰고, 4칸의 넓은 부엌은 동남 모서리에 돌출된 남쪽으로 3칸통의 큰 방을 만들어 시중과 대중방으로 활용하고 있다.


 <참고사진>

 <참고사진>



극락전(極樂殿)



16:30 / 극락전(極樂殿): 국보 제15호


봉정사(鳳停寺)는 672년(신라 문무왕 12) 능인대사(能仁大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극락전 중수상량문>등 발견된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보면 7세기 후반 능인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극락전(極樂殿) 현판: 고려 우왕(禑王) 12년에 송파(松坡) 권인(權靷) 선생이 쓴 글씨입니다. <참고사진>


극락전(極樂殿)


1972년 보수공사때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내용에 의하면 건립후 첫 수리는 1363년(恭愍王 12)에 2차에 걸친 수리가 있었고 그 후 1625년(仁祖 3)에 중수하였습니다. 원래는 대장전이라 불렀으나 뒤에 극락전이라 개칭한 것 같습니다.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로 추정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습니다.


극락전(極樂殿) <참고사진>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배흘림기둥, 주심포(柱心包) 양식의 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극락전 앞에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3층 석탑이 있습니다.


불당의 내부


봉정사 극락전의 경우에는 아미타불을 전각의 가운데에 높이 1m 정도의 이동식 불단을 설치하여 그 위에 봉안하고 있고 좌우 협시보살은 모셔져 있지 않습니다. 불단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불단(佛壇)과 닫집 <참고사진>


불당의 내부는 바닥에 방전을 깔고[최근에는 마루로 바뀜] 뒤쪽에만 두 개의 기둥을 세워 불단벽을 만들고 그 앞에 불단을 마련하여 불단 위에는 불상과 불화를 봉안하였는데, 그 주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몸을 짜맞춘 뒤 다포식 구성을 지닌 보개를 설치하였습니다.


불단(佛壇)과 후불탱화 <참고사진>


고종(高宗)37년인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는 가로 195cm, 세로176cm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5cm폭의 흰 테두리를 두르고 중앙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그려 전체적으로는 아미타불의 관배를 감싸듯이 배치된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탱화 하단 중앙에는 한덩이 구름을 그려서 아미타여래가 극락세계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부가구 <참고사진>


 정면공포 <참고사진>



극락전 동쪽측면 <참고사진>


         



삼층석탑(三層石塔)



                   삼층석탑(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


극락전 앞뜰에 있는 삼층석탑(三層石塔)은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3.18m입니다.  탑의 무게로 인하여 기단부의 일부가 약간 파손되었으며 상륜부 일부가 남아 있지 않으나 거의 완전한 삼층석탑입니다. 2층 기단(基壇)을 쌓아 탑의 토대를 마련하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이 탑은 극락전의 건립과 연대가 같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대의 다른 석탑과 비교하여 특이한 점이나 미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전체적으로 고려 중엽의 석탑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기단부(基壇部)는 한 변이 237cm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하대저석(下臺底石) 없이 하대중석(下臺中石)이 올려져 있습니다. 중석(中石)에는 네 귀에 우주가 있고 각 면에 탱주가 2주(柱)씩 있습니다.



하대갑석(下臺甲石)의 상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바로 상대중석이 올려졌습니다. 상대중석은 각 면마다 1주(柱)씩의 탱주가 있고 상대갑석의 상면에는 2중의 옥신받침이 새겨져 있습니다.


 문비(門扉) <참고사진>


1층옥신(屋身)의 남쪽면에 문비(門扉)가 조각되어 있고 문비는 자물쇠가 새겨져 있습니다.


                              <참고사진>


초층에서 3층까지의 옥신에는 탱주 없이 우주만 있습니다. 기단부에 비해서 탑신부의 폭이 작으며 각 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의 체감율이 적고 옥개석(屋蓋石)도 높이에 비해 폭이 작아 처마의 반전(反轉)도 약하므로 탑은 약간 둔한 느낌을 줍니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가 순서대로 있으며 그 위로 보륜(寶輪)으로 보이는 것이 하나 있으며, 그 위로 찰주(擦柱)가 솟아 있습니다.


                           

                             탑의 세부명칭 <참고자료>




안정사 석조여래좌상(安定寺 石造如來坐像)



안정사 석조여래좌상 (安定寺石造如來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 <참고사진>


대웅전과 극락전 사이에 자리잡은 이 불상은 통일신라 하대의 것과 유사하여 제작시기를 9세기 경으로 추정합니다. 안동군 월곡면 미질동에서 발굴된 것으로 그 곳에 있던 안정사(安定寺)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본래는 연화좌대(蓮花座臺)에 안치된 석불상인데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는 없어지고, 안정사 주지가 방에 안치하면서 금분을 칠해 원형이 다소 손상되었습니다. 그 뒤 안동댐 건설로 안정사가 폐사 되면서 1973년 부터 봉정사(鳳停寺)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안정사 석조여래좌상 (安定寺石造如來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 <참고사진>


신체에 배해 작은 불두(佛頭)에는 나선형 머리카락(螺髮)이 표현되고, 당당하고 둥근 어깨에서 느껴지는 양감에 비해 가슴은 대체로 평평하며, 결가부좌를 튼 하반신을 높게 표현하여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이 아래로 향한 모습으로 땅속의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닌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습니다.



고금당(古金堂)



 고금당(古金堂): 보물 제449호 <참고사진>


이 건물은 극락전 앞 서쪽에 동향(東向)으로 서 있으며 원래 불상을 모시는 부속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은 승려가 기거하는 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969년 해체·복원공사 당시 발견한 기록에 광해군 8년(1616)에 고쳐 지은 것을 알 수 있을 뿐 확실하게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지만, 동쪽에 있는 화엄강당과 같은 시기에 지은 것으로 조선시대 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금당(古金堂) 현판 <참고사진>



고금당(古金堂) <참고사진>


고금당은 정면 3칸, 측면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주심포 양식의 건물입니다. 복원 전에는 방 앞쪽에 쪽마루가 있었으며 칸마다 외짝문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앞면 3칸에 2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옆면과 뒷면은 벽으로 막아 놓았습니다.


극락전영 <참고사진>


고금당(古今堂)은 집이름으로 보아 원래는 불상을 모시는 전각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요사(寮舍)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금당의 남쪽에는 지금 영산암으로 이건된 우화루(雨花樓)가 있었지만 1969년 고금당과 화엄강당을 해체하면서 우화루도 철거되었습니다. 1930년대에 『동양미술』에 발표된 봉정사 배치도에 의하면 우화루는 정면 7칸, 측변 1칸 규모로써 대웅전 영역과 구별되는 극락전 영역의 문루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고금당 주련[순치 황제 출가시(順治皇帝出家詩)] <참고사진>

 

                                  未生之前誰是我(미생지전수시아): 이 몸이 나기 전 그 무엇이 나이며

                                  我生之後我爲誰(아생지후아위수): 세상에 태어난 뒤 나는 과연 누구런가?

                                  長大成人是我(장대성인재시아): 자라나 성인 된 후 잠간동안 나라더니

                                  合眼朦朧又是誰(합안몽롱우시수): 눈감으면 몽롱한데 또한 이는 누구런가?



삼성각(三聖閣)



삼성각(三聖閣)


삼성각(三聖閣)은 산신(山神), 칠성(七聖), 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당우(堂宇)입니다. 삼성(三聖)은 모두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神)들로서 우리의 토착신앙인 삼신신앙(三神信仰)을 불교와 습합함으로서 일반 중생 구도(求道)의 목적을 띠고 있습니다. 따라서 건물의 이름을 전(殿)이라 하지 않고 한 단계 격을 낮추어 각(閣)이라 부릅니다.



왼쪽부터 산신탱화, 칠성탱화, 독성탱화


성(三聖)은 각각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산신(山神)은 가람수호신으로서의 산속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으로 받들어지며 자식과 재물을 관장하는 신입니다. 칠성(七聖)은 북두칠성을 가리키는데 별나라의 주군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관장하는 신입니다. 독성(獨聖)은 나반존자(那般尊者)라고도 불리며 홀로 깨달음에 이르러 성인의 위치에 올라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합니다.

 


범종각(犯鐘閣)



범종각(梵鐘閣)


종을 걸어두는 누각(樓閣)으로 종루(鐘樓)라고도 불리우며, 사물(四物)을 걸어놓고 각종 불교의식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곳으로 봉정사는 범종(梵鐘)만 달아놓았습니다. 1992년 세웠습니다.


                                           봉정사(鳳停寺) 범종(梵鐘) <참고사진>



영산암(靈山庵)




영산암(靈山庵) 위치 <참고사진>


영산암은 봉정사 동쪽 약 100m 떨어진 곳에 있는 부속암자로 응진전, 염화실, 송암당, 삼성각, 우화루, 관심당 등 5개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건물의 구체적인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사료로 볼 때 19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 사대부 집안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을 보여줍니다. 영산암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의 촬영무대가 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영산암(靈山庵) 오르는 계단 <참고사진>


영산암의 '영산(靈山)'이란 원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設)하시던, 인도 왕사성 근방에 있는 영축산(靈鷲山)을 말합니다.






16:47 / 우화루(雨花樓)


우화루(雨花樓)라는 이름은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득도한 후 법화경을 처음 설법하셨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영산암의 입구에 해당되는 우화루는 원래 극락전 앞에 있었다고 전합니다.


                                    우화루(雨花樓) 현판


우화루(雨花樓)


영산암의 출입문인 우화루 밑을 지나 암자의 안마당에 닿으면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과 마당의 멋스러움에 놀라게 됩니다. 


                                   우화루를 지나는 출입문 <참고사진>



영산암(靈山庵) 안마당


건물이 전체적으로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지형의 높이를 이용한 마당 구성, 송암당의 건물 구조와 삼성각 앞의 조경 등에서 매우 뛰어난 공간처리 수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당의 가장자리에 자그마한 동산을 만들어 기암괴석을 옮겨놓고 그 위에 멋스럽게 휘어진 고목인 향나무와 계절을 다투며 다양하게 피어나는 꽃나무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1999년 4월 방한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곳을 찾기도 했습니다.


우화루 뒷면


또한 각 건물에는 툇마루와 누마루 등이 설치되어 서로 끊어질 듯 이어져 있습니다. 내부 정원에는 봉선화와 옥잠화처럼 푸근한 매력을 선사하는 수수한 꽃들이 주를 이루며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심당(觀心堂) <참고사진>


관심당(觀心堂)은 ‘마음을 바라보는 집’을 뜻하며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관심당(觀心堂) 현판 <참고사진>


  응진전(應眞殿) <참고사진>


 영산암 마당에서 바라보는 정면의 전각이 영산암의 본당(本堂)인 응진전(應眞殿)입니다.


응진전(應眞殿)


응진전(應眞殿)은 16나한을 모시는 전각이므로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합니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응진전(應眞殿) 현판 <참고사진>


        응진전 내부 삼존불(三尊佛) <참고사진>


 

응진전 내부 16나한상(羅漢像) <참고사진>


삼성각(三聖閣)

           

삼성각 내부: 왼쪽부터 산신탱화, 칠성탱화, 독성탱화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송암당(松岩堂):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염화실(拈華室): 요사채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우화루 2층 차향당(茶香堂) 현판


16:57 / 영산암 답사후 만세루 옆을 지납니다.



성보관(聖寶館)


 

성보관(聖寶館) <참고사진>


                                             

                                              <참고사진>


봉정사 내에 위치한 성보관은 유물전시관으로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한식기와 건물로 건립되었으며 일반유물 수장고와 후불벽화 수장고 및 전시실을 갖추고 있습니다. 봉정사 소유유물 25종 174점과 봉정사 극락전, 대웅전 해체 보수 시 보존가치가 높아 보관해 온 포벽화와 후불벽화 등이 수장고에 보관되며 이중 일부 유물과 포벽화 및 후불벽화가 전시됩니다. 하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문을 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  안동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 (安東 鳳停寺 木造觀音菩薩坐像): 보물 제1620호


                                        

                                          목조관음보살좌상 (木造觀音菩薩坐像): 고려시대 <참고사진>


안동 봉정사 목조관세음보살좌상은 여러 개의 나무들을 접합한 접목조기법(接木造技法)으로 이루어졌으며 눈은 수정을 감입하였습니다. 이 상은 <대웅전관음중수현판기>에 기록된 대로 1199년(高麗 神宗 2) 무렵에는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고려후기 새롭게 대두하는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양식 불상의 시원적 형태를 간직한 상으로 평가 됩니다.


부도(浮屠)




   부도(浮屠): 영산암 해후소 뒤쪽에는 조선시대 고승의 부도가 3기 있습니다.  <참고사진>




17:30 / 안동 답사를 마치고 서울로 출발합니다.




★ 위에 기재된 사진 해설 내용은 상당부분 '봉정사홈페이지'에서 참조하였습니다.



              봉정사(鳳停寺) / 안동(安東)-3

                                                                      (2019.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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