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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고분군·나성·국립부여박물관/부여(扶餘)-3

케인스 2019. 5. 26. 19:13



능산리고분군·나성·국립부여박물관 / 부여(扶餘)-3

 


☞ 총청남도(忠淸南道) 부여군(扶餘郡) 능산리고분군(陵山里古墳群)·나성(羅城)·국립부여박물관(扶餘博物館)

         


부여군(扶餘郡) 위치도 <google참고사진>



국립부여박물관(國立扶餘博物館)


                      

부여군 국립부여박물관 위치도 <google참고사진>


 14:30분경 궁남지를 출발하여 14:33분경 국립부여박물관(國立扶餘博物館)에 도착하였습니다.



14:33 / 국립부여박물관(國立扶餘博物館)



부여 동사리 석탑(扶餘 東寺里 石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부여 동사리 석탑(扶餘 東寺里 石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부여 동사리 석탑은 국립부여박물관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탑이 있었던 원래의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터에는 비석을 세워 그 자리를 밝혀두었습니다.




                                              <참고사진>


위로 올라갈수록 탑신의 몸돌 높이가 심하게 낮아지고 있어, 전체적으로 길쭉하고 가느다란 인상을 줍니다.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석탑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탑의 상륜부 머리장식은 훗날 새로 만들어 복원해 놓은 것입니다.



●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6호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얼굴은 살이 올라 풍만하며 눈은 반쯤 감겨있습니다.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으며, 양 어깨에 걸친 옷은 아무런 무늬없이 발 밑까지 내려져 있습니다. 오른손은 위로 올려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고, 왼손은 아래로 늘어뜨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였습니다.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게 표현되어 전체의 균형을 잃고 비례가 맞지 않는 조각수법으로 보아 충청도 일원에서 유행했던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으로 추정됩니다.

 

연꽃무늬석등받침


  연꽃무늬석등받침


비석받침


비석머리




● 부여 석조 (扶餘 石槽): 보물 제194호



부여 석조 (扶餘 石槽): 보물 제194호


국립부여박물관 정문을 들어서면 로비 중앙에 설치되어 있는 석조(石槽)입니다.



                              훼손상태


부여현의 동헌건물 앞에 있었던 것을 일제시대에 옛 박물관 뜰로 옮겼다가 현재의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습니다. 부여석조는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있는 백제시대의 화강암제(花崗岩製) 유물로, ‘工’자형의 받침대 위에 둥근 꽃망울 형태로 올려져 있습니다. 받침대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간결한 모양입니다. 그 위에 놓인 석조는 입구가 약간 오므라들면서 밖으로 둥글게 원호를 그리며, 바닥은 평평한 듯 하나 완만한 곡선입니다.



표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8개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고,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의 1층 탑몸돌에 새겨진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과 같은 글을 새기려던 흔적이 보인다고 하지만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 석조에는 연꽃무늬 장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사찰과 관계된 유물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본래 이 석조가 있었던 장소가 백제시대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왕궁에서 쓰이던 석련지(石蓮池)가 아니었나 짐작됩니다. 형태가 풍만하면서도 깔끔한 곡선으로 처리된 석조로, 백제인의 간결하고 소박한 미적 감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상설전시관: 제1전시실 [부여의 선사와 고대문화]



 제1전시실 [부여의 선사와 고대문화] <참고사진>


제1전시실 내부 <참고사진>


<참고사진>


부여지역을 중심으로 한 충청남도의 선사와 고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중국 랴오닝(遼寧, Liaoning)지역과 한강유역의 문화를 받아들인 부여 송국리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확인 할 수 있으며 백제 성립의 기반이 되었던 마한의 문화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송국리식 토기




                                 독널[甕棺]<참고사진>

독널[甕棺]: 높이 46.8 입지름 21.8


‘송국리식 토기’라 불리는 청동기시대의 민무늬 토기는 아가리가 밖으로 약간 벌어졌으며, 배부른 몸통에 비해 바닥면이 매우 좁은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송국리식 토기는 생활용기뿐만 아니라 독널무덤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독널무덤으로 사용된 송국리식 토기는 바닥에 구멍이 뚫린 예가 많으며, 독널 안에는 주로 대롱옥이 부장되었습니다. 독널은 유아를 묻거나, 성인이 죽은 이후에 살을 썩힌 후 뼈만 추려서 매장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돌칼, 간돌검, 간돌화살촉, 대롱옥[管玉]



대롱옥[管玉]

대롱옥[管玉]


대롱옥은 옥을 원통형으로 만든 다음, 길이 방향으로 구멍을 뚫은 것입니다.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으며, 주인공의 권위와 위세를 상징하는 장식품 중 하나입니다.


                          유리대롱옥[琉璃製管玉] <참고사진>

유리대롱옥[琉璃製管玉]


유리대롱옥은 금속 막대기에 나중에 떼어내기 쉽도록 내화 점토를 바르고 유리 원액을 말아 붙여 만들었습니다. 성분 분석 결과 납-바륨 계통의 유리로 밝혀졌는데, 납-바륨계 유리는 주로 초기철기시대 유적에서 주조 쇠도끼와 함께 발견됩니다. 이로 보아 유리를 가공하는 것은 철기 제작 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바퀴날도끼


       

   나팔모양동기 <참고사진>


곧은목단지, 덩이쇠, 쇠도끼, 손칼, 따비, 쇠낫, 쇠화살촉, 받침모루, 토제구슬과 석기


                         새모양토기[鳥形土器]와 나무로 만든 새


고대인들에게 있어 새는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인식되었습니다. 특히 마한 사람들은 새를 숭배하여 여러 가지 모양의 새를 만들어 신에게 바치는 공헌물로 사용하거나 솟대로 만들어 경계의 표시로 삼았습니다. 새모양토기는 이러한 고대인들의 신앙이 반영된 것으로, 의례에 사용된 토기로 생각됩니다. 또한 부여 궁남지에서 출토된 나무로 만든 새는 머리와 몸통만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발토기, 말방울, 쇠끌, 살포, 쇠낫,쇠도끼, 손칼, 재갈, 말허리띠꾸미개


  청동거울(多鈕粗文鏡)과 대쪽모양 동기(銅器)



                                  청동거울[多鈕粗文鏡]

청동거울[多鈕粗文鏡]


부여 구봉리 유적은 한국식 동검 문화 발전기의 초기 유적입니다. 확인된 돌널무덤 1기에서는 한국식 동검 11점을 비롯하여 도끼, 꺽창, 투겁창 등 다양한 청동기와 돌도끼, 숫돌, 검은간토기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청동거울은 2점이 출토되었는데, 거친무늬거울과 잔무늬거울이 모두 확인되었습니다. 거친무늬거울은 내부에 별모양의 무늬로 구획되었고, 중앙에 꼭지가 달려있다. 잔무늬거울은 내부에 삼각집선무늬가 세밀하게 남아 있고, 그 위에 반원 고리 형태의 꼭지가 달려있습니다.



 

                         대쪽모양 동기(銅器)


대쪽모양 동기(銅器)          


대나무를 세로로 쪼갠 것과 같은 형태의 대쪽모양동기는 앞면에 마디가 있고, 위 아래의 양 끝으로 갈수록 폭이 넓어지게 제작되었습니다. 앞면 전체에는 윤곽을 따라 짧은 사선과 점열무늬를 띠 모양으로 두 줄씩 배치하였고, 위 아래의 가운데에는 새끼줄을 꼬아 만든 둥근 고리를 달 수 있도록 꼭지를 붙였습니다.
독특한 형태의 이 동기가 무엇이며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대쪽모양동기의 넓은 쪽 가운데 공간에 사람의 손 모양이 새겨져 있어서, 이를 통해 제사장과 관련된 유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상설전시관: 제2전시실 [사비백제와 백제금동대향로]



제2전시실 [사비백제와 백제금동대향로] <참고사진>



제2전시실 내부 <참고사진>


<참고사진>


백제 사비시기의 생활문화를 중심으로 '사비천도와 왕경문화', '능산리사찰과 백제금동대향로', '돌과 나무에 새겨진 백제문화'의 세 가지 주제로 전시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사비도성에 살았던 백제인의 일상과 정치행정, 종교의례에 관한 다양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비천도와 왕경문화


백제가 사비(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옮길 것을 결정하고 이전계획부터 왕경문화까지 우아하고 세련된 백제문화를 피웠음을 당시 출토유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은제관꾸미개[銀製冠飾]


능산리 36호 분에서 출토된 은제관모장식으로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금속질은 은제이고 제작법은 얇은 은판을 겹쳐 원하는 모양을 만들기 위해 밑그림을 그린 후 금속칼 등으로 오려 양면이 대칭이 되게하여 인동, 당초문과 꽃봉우리를 제작하였습니다.



호자(虎子)와 변기 모양 토기



                                  호자(虎子)<참고사진>

호자(虎子)


호자는 모양이 호랑이를 닮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으며 남자용 변기로 추정됩니다. 형태는 중국의 도자기에서 비롯되었으며, 사비 시기에 이르러 토기로 제작되었습니다. 형태가 당당하고 안정감 있으며 실용적입니다. 입구가 넓적하고 양쪽에 손잡이가 있는 변기 모양 토기 또한 이동할 수 있는 변기 또는 여성용 변기로 추정됩니다.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비 도성에서 제한된 계층의 사람들이 사용했던 용기로 보여집니다.


                      부여 구아리 출토유물[도깨비 얼굴모양 꾸미개, 연꽃모양 불상 받침, 자루솥, 곰]


벼루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보물 제1845호, 1948년 발견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백제 귀족 사택지적이 세운 비석으로 관북리에서 발견되었으며, 비석의 오른쪽에서 네번째 행까지 한 행에 14자씩 모두 56자만이 남아 있습니다. 비문 첫머리의 글자는 갑인甲寅으로 추정되는데 654년에 해당합니다. 비문에서는 세월의 덧없음에 대한 탄식과 불교에 의지하려는 정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사택지적비의 오른쪽 측면 상단에는 둥근 원 안에 봉황이 조각되어 있는데 머리를 들고 날개를 활짝 편 당당한 모습입니다.



                   


甲寅年正月九日 奈祗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 慨體月之難還 穿金以建珍堂 鑿玉以立寶塔 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 峩峩悲貌 合聖明以


갑인년 정월 9일 내지성의 사택지적은 날이 갈수록 몸이 쉽게 노쇠해지고 달이 갈수록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퍼하여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짓고 옥을 다듬어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높이 솟은 늠름한 모습은 신령한 빛을 뿜어 구름을 보내는 듯 하고 위엄 있고 비장한 용모는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명문(銘文)내용



정림사지 출토유물[암키와, 수막새]



정림사지 출토유물


                                 정림사지 출토유물[벼루, 벼루다리]



능산리사찰과 백제금동대향로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위해 능산리에 세운 사찰이야기와 능산리사찰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 특히 백제금동대향로에 숨겨진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능산리사지 위치 <참고사진>


능산리 사지(寺址)는 능산리 고분군과 동나성 사이에 자리한 절터입니다. 동나성은 사비 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羅城)의 동쪽 부분이고,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왕들이 잠들어 있는 왕릉으로 추정됩니다. 능산리 절터에는 목탑과 금당(金堂)을 중심으로 중문(中門), 강당(講堂), 회랑(回廊), 공방(工房)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능산리 절터는 왕릉인 능산리 고분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습니다. 창왕의 누이인 공주가 공양한 사리감이 절터에서 발견됨에 따라 이 절의 성격이 왕실의 원찰(願刹), 특히 신라와의 전쟁에서 비참하게 전사한 성왕을 추모하고 왕릉을 관리하던 절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부여 능산리절터의 출토 유물<참고사진>




부여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陵山里寺址石造舍利龕): 국보 288호 



  부여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陵山里寺址石造舍利龕)

부여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陵山里寺址石造舍利龕)


백제 창왕명 사리감은 능산리 절터의 목탑 심초석(心礎石) 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명문[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이 감실 전면 좌우에 새겨져 있는데, 백제 창왕 13년(567)에 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한다는 내용입니다. 창왕은 사비로 천도한 성왕의 아들로서 554년 왕위에 올랐습니다. 명문의 정해년은 서기 567년에 해당하며, 이때 목탑 심주(心柱)를 설치하기 위해 심초석을 세우고 사리감을 함께 묻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리감은 높이 74.0cm 직육면체 화강석의 윗면 좌우 모서리를 깎아 둥글게 만들고 앞면에 사리공을 마련하였습니다. 사리공 입구 역시 윗쪽을 둥글게 다듬었고, 테두리를 따라 턱을 두었습니다. 사리공 안에서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부여 능산리절터 공방터 출토유물[연통모양토기연가(煙筒形土器煙家)]


백제 사람들은 부뚜막이나 상하수도관 등 주거 생활과 밀접한 시설에도 흙을 구워 만든 토제품을 이용하였습니다.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긴 원통 모양의 토기는 아궁이에서 불을 땔 때 연기를 바깥으로 빼 주기 위해 설치한 연통입니다. 연통 끝에 얹어진 보주 모양의 토제품은 연가(煙家)라고 하는데 장식적인 효과를 위한 것입니다. 연가(煙家)는 사비 도읍기에 상류층의 주택 장식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부여와 익산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건물에 사용되었던 고급 부재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부여 능산리절터 출토[금동광배(金銅光背)], 1993년 발굴

                        

                       부여 능산리절터 출토[연꽃무늬기와(蓮花紋瓦當)]


부여 능산리절터 공방터 출토유물[금속꾸미개, 구슬, 구슬틀, 쇠뿔모양 꾸미개]




 능산리고분 출토유물[(금박) 관 목재편, 귀걸이, 관못],  부여 동나성 출토유물[그릇받침, 세발토기, 굽다리접시, 항아리]


능산리고분 출토유물[관꾸미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국보 제 287호]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참고사진>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향로(香爐)는 향을 피워 부정한 것을 깨끗이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는 한 마리 봉황이 향로 꼭대기에 앉아 있는 신령스러운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뚜껑은 부드러운 능선이 겹겹이 쌓인 산 모양으로서 신선들의 세계를 표현하였으며 산악 사이사이로 구멍이 있어 향연(香煙)이 피어오르도록 하였습니다. 산 모양으로 향로를 형상화한 것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나라 때까지 중국에서 많이 만들어진 박산향로(博山香爐)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박산은 신선들의 이상세계인 삼신산(三神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박산향로에는 산수를 배경으로 불로장생의 신선과 다양한 동식물이 등장합니다. 백제금동대향로에는 완함(阮咸), 종적(縱笛), 배소(排簫), 거문고(玄琴), 북(鼓)을 연주하는 다섯 악사를 비롯하여 신선, 새와 짐승들, 신기한 상상의 동식물들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나무와 바위, 물 등 오묘한 산수 경치와 함께 나타나 향로의 세계를 더욱 신비하고 생동감 있는 변화무쌍한 공간으로 만듭니다.



⊙ 발굴 과정



                                        발굴당시 진흙 속에 묻혀있던 백제금동대향로 <참고사진>

 

백제금동대향로는 원래 능산리 고분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을 건설하던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주차장 공사가 임박한 시점에 물웅덩이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발견 당시 백제금동대향로는 진흙 속에 있었고, 바닥에서는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섬유 조각이 발굴되었는데, 발굴단은 이 섬유 조각이 백제금동대향로를 감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 대향로가 오랜 세월에도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로 진흙에 잠긴 진공 상태에서 보관되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 구성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국보 제 287호

                        

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 <참고사진>


1993년 12월 12일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하여 백제 나성(羅城)과 능산리고분군 사이 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 제3건물지 중앙칸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출토[부분]된 이 향로는 금동광배편 등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수습되었습니다.


         <참고사진및 자료>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는 높이 61.8㎝, 무게 11.8㎏의 대형 향로로, 머리부분인 봉황(鳳凰) 장식, 뚜껑부분인 신산(神山)모양과 몸체부분인 연꽃장식 그리고 받침대부분인 용(龍)모양 장식을 포함하여 크게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 머리부분 <참고사진>


뚜껑 꼭대기 머리부분에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봉황 앞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뚜껑부분 <참고사진>


                       뚜껑에는 봉우리가 세 개 있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물상 <참고사진>


악사상 및 동물상 <참고사진>


완함(阮咸: 현악기], 종적(縱笛: 피리), 북(鼓: 타악기), 거문고(玄琴: 현악기)와 배소(排簫:관악기)를 연주하는 5인의 악사가 있으며 그 주위의 다섯 봉우리에는 각각 기러기로 보이는 새가 봉황과 함께 춤추는 형상이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으며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또한 곳곳에 폭포, 나무, 불꽃 무늬, 귀면상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몸체부분 <참고사진>


향로 몸체의 가운데 테두리의 구름 문양 아래에는 연꽃이 핀 연못이 있고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키는 몸체부분의 연잎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받침대부분 <참고사진>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치고 있는 한 마리의 용(龍)으로 되어 있습니다.



                             <참고사진>

경이적인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이 향로는 중국 한대(漢代)에 유행한 박산로(博山爐)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는 달리 산들이 독립적, 입체적이며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아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세부표현에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이 향로는 제조기법 또한 뛰어나며,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인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파악케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문화재청참고자료>



⊙ 금동대향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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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제작방법]

 




















● 돌과 나무에 새겨진 백제문화



구구단 목간(九九段木簡)


 목간(木簡)


 목간(木簡)



상설전시관: 제3전시실 [백제의 불교문화]



제3전시실 [백제의 불교문화] <참고사진>


제3전시실 내부 <참고사진>



백제인의 우수한 공예 제작 기술을 보여주는 '불상'과 세계적인 건축 감각을 자랑했던 '사찰'을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금동불, 석불, 소조불 등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불상들을 전시하여 백제 장인의 예술혼으로 완성된 백제의 뛰어난 공예 기술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 백제의 불교문화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1950 입수


 나한상 얼굴(塑造羅漢像頭), 부여구아리, 1943 발견


 활석삼존불입상(滑石三尊佛立像), 부여정림사지, 1988 발굴


인물상(塑造人物像), 부여정림사지, 1981 발굴





금동관음보살입상(金銅觀音菩薩立像): 국보 293호,  부여 규암면



          금동관음보살입상(金銅觀音菩薩立像): 국보 293호

금동관음보살입상(金銅觀音菩薩立像): 국보 293호 

백제시대, 부여출토, 재질 금동, 높이 21.1cm


부여군 규암면 절터에서 발견된 보살상으로 머리에 작은 부처가 새겨진 관(冠)을 쓴 관음보살입니다.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올려 작은 보주(寶珠)를 잡고 있는 독특한 자세가 눈에 뜁니다. 둥글고 통통한 앳된 얼굴에 눈을 지그시 감았고 꼭 다문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가늘고 날씬한 신체는 비례와 균형이 잘 잡혀 자연스러우며, 어깨에서 팔을 타고 천의 자락이 부드럽게 흘러 유연한 곡선미가 엿보입니다. 길게 드리워진 구슬 장식과 옷자락을 뒷면까지 표현하였으며, 팔과 몸체의 둥근 맛이 느껴지도록 공간을 주어 몸의 입체감이 느껴집니다. 전체적으로 우아하며 세련된 조형성으로 백제 불교조각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지원이 새겨진 금동삼존불입상 (「鄭智遠銘金銅三尊佛立像): 보물196호, 부여 부소산


금동광배(金銅光背), 부여 부소산성, 1998 발굴


치미(鴟尾)



       

           

                                   치미(鴟尾) <참고사진>

치미(鴟尾), 백제시대, 부소산 서복사지 출토, 토제

높이 91.5cm


치미는 고대 건축에서 용마루 양쪽 끝에 올라가는 큰 장식기와를 말하는데, 길상과 벽사의 상징으로 봉황의 형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백제에서는 사비 시기에 많이 제작되었고, 일본 아스카 문화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부여 능산리 절터 중문지와 금당지에서 치미 편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6세기 중엽 이전부터 사용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몸통에는 깊은 침선을 넣었고 새깃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했습니다. 몸통과 깃 부분은 굵은 돌대를 두 줄 넣어 구획하였고 뒷면을 연꽃 무늬로 장식했습니다. 밑 부분에는 용마루에 얹어 고정할 수 있도록 반원형의 홈이 있습니다.



                                           <참고사진>


부여 정림사지 출토유물[연꽃무늬 수막새, 서까래기와]


부여 부소산사지 출토유물[연꽃무늬 수막새]


부여 군수리사지 출토유물[연꽃무늬 수막새, 누른무늬 암키와]



 부여 전 천왕사지 출토유물[청동소탑 편(靑銅小塔片)]




                         청동소탑 편(靑銅小塔片)

청동소탑 편[靑銅小塔片], 백제시대, 부여출토,

너비 12,8cm


청동제 탑 일부로 추정되며, 지붕 상부에 난간이 있어 위층과 연결되었던 것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붕은 기와골이 패이고 네 모서리의 내림마루에 장식 기와가 얹혀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조각하였습니다. 내림마루 끝에도 기와가 달려 있고 기와 끝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풍탁 등을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벽면은 세 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격자형의 창호를 표현하였습니다.




부여 왕흥사 목탑터 발굴유물[왕흥사 사리기(王興寺 舍利器): 보물 제1767호]




 

 

  부여 금강사지 출토유물[연꽃무늬수막새, 암막새, 인물상 편]


부소산성 출토유물[바람개비 무늬 수막새]


                                


 부소산성 출토유물[무늬없는 수막새]


                         부여 부소산사지 출토유물[청동육각뚜껑, 금동허리띠꾸미개]


 

산수봉황무늬 전돌[山水鳳凰文塼], 연꽃구름무늬 전돌, 부여외리 출토



                      산수무늬 전돌[山水山景文塼]

산수무늬 전돌[山水山景文塼]: 보물 343호 

백제시대, 부여출토, 길이 29cm


산수 무늬 벽돌은 하늘에는 상서로운 구름을 표현하고 부드러운 3단의 산봉우리와 바위가 어우러진 산악, 흘러가는 물 등 자연의 경치를 형상화하였다. 서정적인 분위기와 함께 그림을 보는 듯한 회화미가 돋보인다. 산수 봉황 무늬 벽돌은 자연의 경관과 함께 구름과 상서로운 기운으로 둘러 싸인 봉황을 형상화하였다. 산악 위에 봉황이 앉아 있는 백제금동대향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상설전시관: 제4전시실 [기증으로 빛난 문화재 사랑]



제4전시실 [기증으로 빛난 문화재 사랑] <참고사진>


제4전시실 내부<참고사진>



박만식 교수를 비롯한 50여 명의 뜻있는 기증자들의 아름다운 선택으로 백제 토기 등 350여 점의 기증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기증품 전시를 통하여 기증자들의 좋은 뜻과 우리 문화재에 대한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16:05 / 큰항아리(大壺), 독널(甕棺), 삼국시대, 기증품


인동무늬 수막새[忍冬紋瓦當, 통일신라시대, 기증품], 연곷무늬 수막새[蓮花紋瓦當, 백제시대, 기증품], 연곷무늬 수막새[蓮花紋瓦當, 고려시대, 기증품], 초화무늬 암막새[草花紋瓦當, 고려시대, 기증품]




금 귀걸이[金製耳飾]<참고사진>


금 귀걸이[金製耳飾], 백제시대, 원주시 출토

길이 7.4cm


귀걸이는 금으로 만들어거나 은ㆍ동에 도금(鍍金)하여 제작합니다. 이 귀걸이는 중심고리(主環), 샛장식, 드리개(垂下附)로 구분되는데, 중심고리는 금동제이고 나머지는 금제입니다. 주환에는 작은 연결고리인 유환(遊環)이 달려있고 중간의 샛장식은 정교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아래에는 긴 버들잎 모양 위에 못(釘) 모양의 드리개가 함께 달려 있습니다. 사비시기에 이르면 백제의 금속공예 문화는 발달하였으나 시신과 함께 넣는 부장품(副葬品)은 간소하게 하는 경향이 있어 귀걸이 역시 단순한 형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분청사기 연꽃 물고기무늬 병[粉靑沙器鐵畵蓮魚文甁]

분청사기 연꽃 물고기무늬 병[粉靑沙器鐵畵蓮魚文甁],

조선시대, 부여출토

높이 28.0cm 


산화철 안료를 사용하여 물고기와 연꽃을 그린 철화분청사기 병입니다. 연꽃 사이에서 막 뛰어오를 듯 한 물고기는 지느러미가 활짝 펴진 모습입니다. 철화분청사기는 대부분 충남 공주 계룡산 학봉리 가마터에서 제작되어 ‘계룡산 분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철화분청사기에 등장하는 물고기는 이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는 쏘가리일 가능성이 크다. 쏘가리는 鱖魚라고 하는데, ‘궐鱖’자가 대궐의 ‘궐闕’자와 음이 같아 잉어와 마찬가지로 출세 또는 고귀한 신분에 대한 염원을 상징합니다.


                                그릇받침[器臺]<참고사진>

그릇받침[器臺], 백제시대, 논산출토

높이 26cm


그릇받침은 밑바닥이 둥근 항아리 등의 그릇을 올려놓기 위하여 받침용으로 만들어진 토기로 삼각형, 원형투공, 간단한 물결무늬와 복잡한 장식적 요소는 신라, 가야지역 토기와 비슷합니다. 그릇받침은 크게 원통형, 굽다리바리형, 굽다리접시형, 장고형으로 나뉩니다.


                              세발토기[三足土器]

세발토기[三足土器], 백제시대, 논산출토

높이 10.8cm


이름 그대로 접시에 세 개의 다리가 달린 토기로, 백제 특유의 기종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강한 지역성을 띠고 있는 이 유물은 뚜껑접시의 유무에 따라 시기적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굽꼭지가 달린 것은 백제 후기인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의 것으로 여겨지며, 세발토기는 백제초기가 되면 접시의 높이가 얕아지고, 세발이 몸통의 바깥부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능산리고분군(陵山里古墳群)과 나성(羅城)



부여군 능산리고분군, 나성 위치도 <google참고사진>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능산리고분군, 나성]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되었습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부여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나성 등 4개지구와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익산의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등 8개의 유적입니다.




능산리고분군(陵山里古墳群): 사적 제14호



     능산리고분군 <참고사진>


16:21 / 국립부여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16시10분경 출발하여 약 10분 후 능산리고분군 주차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세계유산기념비



능산리고분군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분군은 해발 121m의 능산리 산의 남사면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른바 풍수지리사상에 의해 정해진 전형적인 묘지로서의 지형을 갖추었습니다. 뒷산을 주산으로 하고, 동쪽에 청룡, 서쪽에 백호, 앞산인 염창리 산을 남쪽의 주작으로 삼았고, 묘지의 전방 약 200m 거리에 능산리 천이 흐르는 남향의 왕실의 공동묘지입니다.



능산리고분군[백제왕릉원] 1~7호분 위치 <참고사진>


고분은 전열 3기, 후열 3기, 그리고 맨 뒤 제일 높은 곳에서 1기, 모두 7기로 이루어진 고분군으로 모두 원형봉토분이며, 크기는 대형, 중형, 소형의 세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대형인 전열의 3기는 분구의 직경이 약 25~30m이고, 중형인 후열의 분구는 직경이 약 20~25m이며, 최후의 1기는 분구의 직경이 20m 내외입니다. 고분 축조 연대순으로 보면 중하총, 동하총, 서하총 순으로 축조되었습니다.





능산리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때인 1915년에 고분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일제에 의하여 6기가 발굴조사되었고, 뒤편의 1기는 1971년 보수공사시 발견되어 추가되었습니다. 1915년에 2호(중하총(中下塚)), 3호(서하총(西下塚)), 5호(중상총(中上塚))가, 1917년에 1호(동하총(東下塚)), 4호(서상총(西上塚)), 6호(동상총(東上塚))가 각각 조사되어 내부구조를 알게 되었습니다.


 1호분[동하총(東下塚)]


능산리고분군은 시신을 묻기 위하여 연도(羨道)를 통해 무덤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돌로 쌓아 만든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1호분인 동하총은 장방형 현실(玄室)과 연도(羨道)로 이루어진 단실묘(單室墓)입니다. 현실과 길이 연도는 사면벽을 화강암과 편마암(片麻巖)의 거대한 1매 판석을 사용하였습니다. 석실 바닥의 중앙부에 모전석(模塼石)을 사용하여 관대(棺臺)를 만들었는데, 당초에는 1인용 관대였으나 뒤에 양측으로 확장하여 2인용 관대로 만들었습니다.



석실과 연도 사이는 통로를 만들고, 그 곳에 거대한 석문[문비석(門扉石)]을 닫도록 하였습니다.



                                                 

                                                   1호분 석실 입구<참고사진>



    실내부[네 벽의 사신도(四神圖)와 천장벽화] <참고사진>


현실의 네 벽과 천정에는 벽화를 그렸는데, 1매로 된 거대한 판석의 표면을 물갈이[수마(水磨)]하여 반질반질하게 하고, 그 표면에 바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네 벽에는 4방위를 맡은 신(神)인 사신도(四神圖)를 그렸는데, 동벽의 청룡(靑龍), 서벽의 백호(白虎), 남벽의 주작(朱雀), 북벽의 현무(玄武) 등의 방위신(方位神)을 그렸고 천정에 연화문과 유운문(流雲紋)이 그려져 있는 벽화분(壁畵墳)입니다.


   

     <참고사진>



2호분인 중하총(中下塚)은 장방형의 석실과 비교적 긴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입니다. 천정형식은 터널형이며, 벽체는 긴 장대석으로 축조하였는데 마치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의 형식을 재료만 벽돌에서 장대석으로 바꾸어 놓은 형식입니다.



3호분인 서하총(西下塚)은 장방형석실과 비교적 짧은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로서 벽체는 거대한 판석 1매로 구성하였습니다.



4호분인 서상총(西上塚), 5호분인 중상총(中上塚), 6호분인 동상총(東上塚) 등은 판석조의 단실묘입니다.



7호분은 장방형석실과 짧은 연도로 된 단실묘이며, 벽체와 천정은 각면 4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습니다.



능산리 고분군은 일찍이 도굴되어 조사시에는 약간의 유물이 수습되었을 뿐입니다. 2호분에서 칠기편 금동원두정(金銅圓頭釘), 5호분에서 두개골파편 도칠목관편(塗漆木棺片), 금동투조식금구(金銅透彫飾金具), 금동화형좌금구(金銅花形座金具) 등만이 발견되었고, 그 외에 토기기대(土器器臺), 호(壺) 등이 수습되었습니다.





● 서고분군(西古墳群)



서고분군(西古墳群) 발굴 소개안내판


서고분군(西古墳群)




                   서고분군(西古墳群)



능산리 벽화고분 모형( 陵山里壁畵古墳模型)



 능산리 벽화고분[壁畵古墳, 東下塚, 1號] 모형


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 옆에는 고분군의 벽화고분(동하총, 1호분)을 실물 크기 모형을 만들어 당시의 모습을 복원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능산리 동하총 모형( 陵山里東下塚模型) <참고사진>




능산리 벽화고분 모형


능산리 벽화고분 모형



 능산리 벽화고분 모형



● 부여 신암리 고분(扶餘莘巖里古墳) 실물




 부여 신암리 고분(扶餘莘巖里古墳)


 능산리 벽화고분 모형 남쪽에는 부여 신암리 고분(扶餘莘巖里古墳) 실물이 있습니다.



 부여 신암리 고분(扶餘莘巖里古墳) 실물(實物)  <참고사진>


백제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신암리 고분[횡혈식 석실분]의 실물입니다. 부여 신암리에는 100여기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는데 이곳 능산리고분군에서 동쪽 지역에 위치해 있는 것을 이전해 온 것이라고 합니다.



 부여 신암리 고분(扶餘莘巖里古墳) 내부  <참고사진>



● 부여능산리사지(扶餘陵山里寺址): 사적 제434호



능산리사지[절터]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안내판




부여 능산리 사지 (扶餘 陵山里 寺址): 사적 제434호


능산리 절터는 부여능산리고분군(사적 제14호)과 부여나성(사적 제58호) 사이에 위치한 백제시대 절터유적으로, 1992년부터 2000년까지 6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이른바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전형적인 백제 가람형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사역 서쪽에서 경내로 진입하는 도로유구와 다양한 재료와 형식으로 설치된 수로, 집수조, 우물 등 다수의 치수시설도 확인되었다.


                 능산리사지가람배치도 <참고사진>


능산리사지 전경 <참고사진>


목탑지는 이중기단으로 남쪽과 북쪽에 계단시설이 있습니다. 중심부의 심초석 위에서 명문이 있는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이 출토되어 축조 연대와 발원자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금당지는 목탑터와 마찬가지로 이중기단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였습니다. 강당지는 길이가 37m나 되는 거대한 규모입니다. 특히 1993년 이 절터 내의 공방(工房)으로 생각되는 건물터[사진 지점]에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출토되어 백제의 높은 금속공예기술 수준과 예술 역량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능산리사지 공방터 <참고사진>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참고사진>           백제창왕명사리감(국보 제288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함께 출토된 「백제창왕명사리감(국보 제288호)」에는 사리를 모신 때와 공양자 및 절이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됩니다. 사리감에 새겨진 기록으로 보아 이 절은 왕실에서 지은 국가 사찰로서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에 축원을 빌기 위한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문화재청자료>


부여 능산리 사지 (扶餘陵山里寺址): 사적 제434호 <참고사진>  


부여 능산리사지는 잔존상태가 양호하고 출토유물에 있어서도 명확한 시대편년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의 역사학과 건축공학, 고고학, 미술사학, 동북아시아 건축사의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됩니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금동대향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을 비롯하여 와전류, 토기류, 금속류, 목제류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30여 점의 목간이 출토되었는데, 목간은 현재까지 백제유적에서 가장 많은 수량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하여 백제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능산리사지 발굴조사 전경<참고사진>




능산리사지 복원도 <참고사진>


능산리사지 모형도 <참고사진>



● 부여 나성(扶餘羅城): 사적 제58호



부여 나성(扶餘羅城)


한반도 고대 삼국 중 최초로 축조된 부여 나성(扶餘羅城)은 중요한 외곽방어시설로서 부여군 부여읍 일원에 있는 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8km의 성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평양의 나성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성의 하나입니다.



 부여 나성 세계유산 기념비



부여 나성 배치도 <참고사진>


나성은 도시의 북단에 위치한 부소산성에서 시작하여 도시의 북쪽과 동쪽을 감싸고 있는데, 부여의 서쪽과 남쪽은 금강이 자연지형적인 방어벽 기능을 하였고 강의 범람을 통하여 형성된 자연 제방이 성벽의 역할을 대신하였습니다.




사비는 5부(部)와 5항(巷)으로 구획된 정연한 도시 체계를 갖춘 수도를 방어하면서 그 안팎을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성을 쌓았습니다. 나성 안에는 백제시대 왕궁을 비롯, 관아,민가,사찰,상가 및 수도 수비를 위한 방위 시설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나성 바깥에는 청마산성, 석성산성, 가림성, 증산성 등의 산성(山城)들이 수도의 동서남북을 외곽에서 방어하는 수도방어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 즉 이들 산성이 사비의 1차 방어선을 형성하였고, 나성이 2차 방어선, 부소산성이 최후의 보루로 고안된 방어체계를 구비한 것입니다.


<참고사진>


나성은 산지와 평지를 연결하여 수도의 외곽을 둘러싸는 새로운 형태의 성곽으로 지형에 따라 특이한 축성 방식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즉 구릉 구간은 성벽 중심 부분은 흙을 다져 쌓아 올린 후, 성벽 바깥쪽은 돌을 쌓아 마감함으로써 성벽의 내구력을 강화했고 저습한 평지를 통과하는 구간은 지엽부설(枝葉敷設)공법과 나무 말뚝을 박아 지반을 보강하는 등 독특한 축조 공법이 적용되었습니다.


 <참고사진>


나성의 축성연대는 성왕대(523~554)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긴 538년경에 흙으로 쌓아만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곽을 처음 건설한 지 1,500여 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성곽의 대부분이 남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나성은 1991년부터 현재까지 계속하여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동쪽 나성의 성벽은 부소산성의 동문터 부근을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약 500m 지점에 있는 청산성(靑山城)을 거쳐 남쪽으로 석목리 필서봉(筆書峰) 상봉을 지나, 염창리 뒷산의 봉우리를 거쳐 금강변까지 토축이 있었던 것으로 전합니다.  서쪽 나성은 부소산성 서문 바깥 지점을 기점으로 하여 성말리로 연결되어 있고, 남쪽 나성은 동리,중리,당리의 뒷산에 연결하여 축조하였습니다.


 <참고사진>


성에는 사방에 문지(門址)가 있으며 성의 바깥쪽 벽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안쪽 벽은 완만하여, 성위에서 말을 달릴 만한 길이 있고 곳곳에 초소가 있습니다. 표고 121m의 가장 높은 필서봉에는 횃불을 올리던 봉수터와 건물터가 남아있습니다.



의자왕단(義慈王檀)




 의자왕단(義慈王壇) 및 부여융단(扶餘隆)


백제 멸망 후 백제 의자왕과 태자융을 비롯 백성 12,000여명이 660년 9월 당나라로 끌려간 후 4개월 만에 병사한 후 당나라 북망산에 묻혔습니다. 1995년 2월 현지 조사를 통해 중국 하남의 낙양시에서 의자왕 묘역으로 추정되는지역을 확인하고, 2000년 4월 의자왕 추정 묘역의 흙을 가져와 부여 고란사에 봉안하였다가 9월 이곳 부여 능산리 선왕(先王)의 능원에 의자왕 및 부여융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가묘(假墓)와 비석이 설치된 단(壇)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백제의자왕(百濟義慈王) 및 부여융(扶餘隆) 설단사적기(設壇事蹟記)와 의자왕(義慈王)의 생애(生涯)


百濟義慈王 및 扶餘隆 設壇事蹟記 (백제의자왕 및 부여융 설단사적기)


백제국의자대왕단(百濟國義慈大王壇) 및 단비(壇碑)


의자왕단(義慈王壇)에는 목관에 북망산의 추정 묘역의 흙과 지석(誌石), 매지권(買地券) 등을 봉안하였습니다.



백제국의자대왕단비(百濟國義慈大王壇碑) 및 백제국부여융단비(百濟國義慈大王壇碑)


백제국부여융단(百濟國義慈大王壇) 및 단비(壇碑)


부여융단(扶餘隆壇)에는 의자왕단과 같이 목관에 북망산의 추정 묘역의 흙 등을 봉안하였으며, 낙양시에서 기증받은 묘지석(墓誌石) 복각품을 함께 매설하였습니다.





          



17:00시경 능산리고분군과 나성 답사를 마치고 약 10분 후 시티투어버스로 출발지점이었던 부소산성 관광주차장으로 돌아왔습니다.  



17:13 / 부여 성왕로터리의 성왕상(聖王像)



       

        서초남부터미널행 출발시간까지 남은 시간을 이용해 부여시외버스터미널 부근에 위치한 이색창조거리를 돌아 보았습니다. 


 17:19



부여전통시장


 18:00 / 18:10분발 서초남부터미널행 버스를 탑승하였습니다.






   능산리고분군·나성·국립부여박물관 / 부여(扶餘)-3

                          (2019.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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