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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定林寺址)·궁남지(宮南池)/부여(扶餘)-2

케인스 2019. 5. 25. 23:39



정림사지(定林寺址)·궁남지(宮南池)/부여(扶餘)-2

 


☞ 총청남도(忠淸南道) 부여군(扶餘郡) 정림사지(定林寺址)와 궁남지(宮南池)

         


부여군 정림사지, 궁남지 위치 <google참고사진>



정림사지(定林寺址): 사적 제301호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부여 정림사지]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되었습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부여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나성 등 4개지구와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익산의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등 8개의 유적입니다.



부여군 정림사지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점심식사 후 13:00시에 정림사지(定林寺址) 답사를 위해 시티투어 버스는 이동하여 13:15분 경 정림사지 매표소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안내판



  백제역사유적지구 안내판


유네스코 세계유산 안내판



                        유네스코 세계유산 안내판


정림사지(定林寺址) 안내판



 정림사지(定林寺址) 안내판



                            정림사지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정림사지는 1942년 정림사지 인근지역을 공원화하기 위하여 발굴하였습니다. 당시 이 절터는 폐사지로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면서 행사를 치르는 마당이자 장터였습니다. 하지만 강당지에서「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사찰 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수습되어 정림사지(定林寺址)라는 정식 명칭이 부여되었습니다. 태평8년은 요(遼)의 연호(年號)이며 고려 현종19년(1028년)에 해당됩니다.


정림사지(定林寺址) <참고사진>


당시 발굴조사 결과 정림사지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였으며,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온 사찰 터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정림사지는 강당을 갖춘 백제식 1탑 1금당 양식으로, 이는 백제 사찰의 특징이며 강당을 배치하는 전통은 이후 고려시대까지 이어집니다.


<참고사진>


백제시대에 창건된 정림사의 존속기간에 대한 정확한 근거 자료는 없지만 백제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으로 보는데 이는 정림사지 발굴조사에서 금당터의 붉게 탄 흙 층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림사지(定林寺址) 조감도 <참고사진>


1980년의 정림사지 발굴조사를 통하여 금당지(金堂址), 중문지(中門址), 강당지(講堂址), 회랑지(廻廊址)등이 확인되었고 또한 석탑 기초의 판축기법(版築技法), 다량의 와당(瓦當)과 격목와(格木瓦)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정림사지 가람배치도 <참고사진>


가람배치형식(伽藍配置形式)을 보면 전형적인 일탑식배치(一塔式配置)로 남으로부터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순서로 남북 일직선상(一直線上)에 세워졌으며, 주위를 승방(僧房)과 회랑(廻廊)으로 구획하였습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습니다.


         

              


출토유물(出土遺物) <참고사진>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으며, 특히 정림사명(定林寺銘)이 들어 있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정림사지 전경 <참고사진>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 건물은 1933년에 지어졌습니다.



<참고사진>


현재 정림사지에는 백제 때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습니다.



                        





정림사지 복원 조감도


 정림사지 복원 조감도 <참고사진>


  측면도 <참고사진>


정림사지 복원 조감도 <참고사진>


정림사지(定林寺址)


<참고사진>

정림사지(定林寺址) 안내판



 연지(蓮池)



중문지(中門址)에서 본 연지(蓮池)



● 정림사지 5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 [국보 제9호]



 
정림사지5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


정림사지에 현존하는 백제시대 고유의 석탑인 5층석탑은 익산미륵사지석탑(益山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百濟時代)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백제시대(百濟時代)의 석탑은 목탑의 구조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백제의 석탑 건축 기술은 이후 신라에 이어져 한국이 석탑의 나라가 되는 교두보를 제공하였습니다. 다시말해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림사 절터 한가운데 자리한 정림사지5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은 높이가 8.33미터의 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입니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민흘림기법을 적용하여 상승감을 보여주는 등 장중하면서 부드럽고 육중하면서 단아한 세련된 백제의 멋을 느낄 수 있는 백제계 석탑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민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가구(架構)를 모방하고 있으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명쾌한 기풍을 풍겨줍니다.


  <참고사진>

                             

                            大唐平百濟國碑銘(대당평백제국비명)     <참고사진>           탁본: 국립중앙박물관


1층 탑신(塔身) 4면에는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百濟)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한 다음 “백제를 정벌하고 세운 기념탑”이란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었느데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었지만, 한때는 소정방이 세운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의 구조  <정림사지박물관자료> 



● 금당지(金堂址)




정림사지5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과 석불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보호각 사이에는 금당지(金堂址)가 있습니다.


 금당지(金堂址)


금당지(金堂址) 안내판



 금당지(金堂址)


 금당지(金堂址)



● 강당지(講堂址)와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호각(保護閣)



  강당지(講堂址)에 세워진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호각(保護閣)


강당지(講堂址) 안내판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호각(保護閣)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호각(保護閣)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호각(保護閣) 측면과 뒷면



정림사지석조여래좌상(定林寺址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08호]



                      

                  정림사지석조여래좌상(定林寺址石造如來坐像)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정림사지5층석탑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재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됩니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입니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줍니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 중대, 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합니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습니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습니다.





서편건물지(西便建物址)



 서편건물지(西便建物址) <참고사진>


              




회랑지(回廊址)



서회랑지(西回廊址)



                             회랑지(回廊址)


회랑지(回廊址)


 회랑지(回廊址)


 회랑지(回廊址)



동편건물지(東便建物址)



동편건물지(東便建物址) <참고사진>


동편건물지(東便建物址) 안내판



북승방지(北僧房址)



북승방지(北僧房址) <참고사진>


북승방지(北僧房址) <참고사진>


    <참고사진>





중문지(中門址)



 중문지(中門址)와 서쪽 남회랑(南回廊)  <참고사진>


중문지(中門址)와 동쪽 남회랑(南回廊)  <참고사진>



중문지(中門址) 안내판



동협문(東夾門)



 동협문(東夾門)



정림사지박물관(定林寺址博物館)   Rational



정림사지박물관 평면도 <참고사진>


정림사지 동쪽에는 정림사지 박물관이 있습니다. 백제시대의 불교 수용과정을 보여주는 백제불교문화관과 정림사가 갖는 의의와 가치를 역사적, 미술사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정림사지관을 비롯하여 뮤지엄샵, 중앙홀, 기획전시실, 수장고, 자료실, 야외전시장 등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정림사지박물관 홈페이지 사진자료>




정림사지박물관 야외전시장



정림사지박물관 야외전시장의 석비(石碑)와 석상(石像)


                                  부여 임천 대교비( 扶餘 林川 大橋碑)



                                 명혜공주태실비(明惠公主胎室碑)






궁남지(宮南池): 사적 제135호




부여 궁남지 위치도 <참고자료>


정림사지(定林寺址)를 답사한 후 14:00경 정림사지를 출발하여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 약  2~3분 후 백제시대 만들어진 인공연못 궁남지(宮南池)에 도착하였습니다.


              부여 궁남지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궁남지(宮南池)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별궁 연못으로, 백제 무왕 35년(634)에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릅니다. 연못의 크기나 어떤 모습으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연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 있어 가운데에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궁남지(宮南池: 사적 제135호) 안내도


궁남지는 674년 조성된 경주 안압지(雁鴨池)보다 40년 먼저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인공연못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궁남지(宮南池) 라는 이름은 후대에와서 붙여진 이름이며, 궁남지라고 불리기 이전에는 대지(大池), 남지(南池), 마래못, 마래방죽이라고도 불리는데, 마(馬)는 ‘크다’는 뜻으로 쓰여 ‘큰 못’을 의미하여 불리기도 하며, 또한 이 근처에 마 밭이 많아서 마래방죽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전합니다.


14:03 / 궁남지와 부여서동공원


               


궁남지(宮南池): 사적 제135호




궁남지(宮南池)


이 연못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무왕35년조(武王35年條)에 "3월에 궁성(宮城)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전 중국의 전설에 발해만 동쪽에 신선(神仙)이 사는 섬인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州山))의 삼신산(三神山)이 있다 하여, 그 중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따 신선정원(神仙庭苑)을 꾸며 불로장생을 바랐던 도교적 사상과 관념이 표현된 것이라고 합니다.



 <참고사진>


삼신산(三神山)에는 신선(神仙)과 불로초(不老草)가 있고, 황금(黃金)과 백은(白銀)으로 된 궁궐도 있는 일종의 이상향입니다. 따라서 기록대로 이 궁남지의 한가운데에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한 조산(造山)이 있었다면 이는 중국의 진-한대(秦-漢代)부터 신선사상에 근거하여 삼신산을 조성하였던 것이 백제의 왕궁 조원(造苑)에 처음 들어온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화재청 사진자료>


연못은 자연 지형의 곡선을 그대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연못의 가운데와 물가에는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 있고, 연못 주변에서는 토기와 기와 등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연못 속의 섬이 바로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는 섬으로 추정합니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훼손되어 연못 주변은 농지로 이용되었습니다.


 <google참고사진>


궁남지 동쪽의 화지산(花枝山) 서쪽 기슭에는 궁남지쪽으로 향한 완만한 경사지에 대리석으로 만든 8각형 우물이 남아 있고, 그 주변에는 백제 때의 기단석과 초석, 기와조각, 그릇조각 등이 출토되어 이곳이 사비정궁(泗沘正宮)의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별궁(別宮)터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궁남지는 별궁의 궁원지(宮苑池)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참고사진>


원래 궁남지의 전체 면적은 약 3만평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이었다고 추정하나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실시된 복원공사에서 그 1/3정도(13,000여평)의 연못 바닥을 준설하고, 가장자리의 언덕에 흙을 쌓고서, 수양버들을 심어 조성하였습니다.


 <google참고사진>


1990년 이후 궁남지에 대한 조사는 9차례에 걸쳐 수행되었지만, 궁남지에 대한 규모와 정확한 구조가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삼국사기』무왕 39년조(年條) "3월에 왕이 왕궁(王宮)의 처첩(妻妾)과 함께 대지(大池)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시대에는 대지(大池)라고 불렸을 만큼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궁남지의 사계 <참고사진>


궁남지 안에는 정자(亭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정자(亭子: 포룡정)와 목조다리<참고사진>


궁남지 안에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포룡정(抱龍亭)’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이 정자는 야경이 매우 예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자와 연못의 조화가 아름다워 좋은 사진을 찍기에도 적당한 곳입니다.


포룡정(抱龍亭) <참고사진>


아래글 중 [설화와 전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에 나와 있듯이 백제 무왕과 관련된 이야기로, 왕궁 남쪽 못 가에는 궁궐에서 나와 혼자 사는 여인이 궁남지의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내용인데, 즉, 용과 정을 통하였다는 의미에서 ‘포룡정(抱龍亭)’이라 이름지었다 합니다.








백제의 조원(造苑) 기술은 삼국 중 으뜸이었을 뿐만아니라  당대 동아시아 최고의 조경예술 기술을 소유한 국가로서  일본의 조원(造園)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백제의 조경기술은『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확인되듯이 7세기 초의 토목 기술자로 기술된 백제의 노자공(路子工)이 일본에 건너가 백제의 첨단 정원 조경 기술을 전하고 일본 왕궁의 정원을 꾸며 아즈카시대 정원사의 시조가 됐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설화와전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



무왕(武王)과 선화공주(善花公主)


백제시대 궁남지 일대에는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했던 무왕(武王)에 관한 전설이 아래와같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삼국유사』기이제2 무왕조에 “무왕의 이름은 장(璋)으로,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백제의)서울 남지(南池) 주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하여 장(璋)을 낳고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라고 한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


                                   

                                              <참고사진>


"사비시대에 왕궁 남쪽 못 가에는 궁궐에서 나와 혼자 사는 여인이 궁남지의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왕이거나 태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궁궐 밖의 생활이 궁핍하였으므로 생계유지를 위해 그는 마를 캐다 팔았다. 그래서 그의 아명이 서동이 되었던 것이다. 서동의 어머니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성으로 키웠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한 장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궁중에서 한 노신이 찾아와 왕의 밀명을 전하였는데 신라의 서라벌에 잠입하여 국정을 탐지하라는 것이었다. 서동은 기꺼이 받아들여 마를 파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신라에 잠입, 탐지활동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사랑이 싹텄다.


그러나 서로는 국적과 신분이 달라 맺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알았다. 그러나 헤어질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지혜를 짜내 서동요를 만들어 퍼트리기로 했다. 서동은 서라벌의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마를 나누어주며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 도련님을 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온 나라에 퍼져 나갔다. 결국 대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오해를 받게된 선화공주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서동이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랑이야기이다. <부여군 자료>


향가 '서동요'


善化主主隱 (선화공주주은)                    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타밀지가량치고)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薯童房乙 (서동방을)                              서동 도련님을
夜矣卯乙抱遣去如(야의묘을포견거여)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참고사진>



부여서동연꽃축제



 <참고사진>


 <참고사진>


    <참고사진>


궁남지와 부여서동공원 항공사진 <문화재청 사진자료>


궁남지는 서동공원과 함께 약 10만여평의 넓은 공원이며 연못도 무려 약 1만평에 가까운 규모로 조성돼 있습니다.


 <참고사진>


연꽃이 만발하는 여름철이면 궁남지와 부여서동공원은 장관을 이루는데 홍련, 백련, 수련, 오가하스연, 가시연, 빅토리아연 등 50여종의 연이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매년 7월아면 ‘부여 서동 연꽃축제’를 열려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서동과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14:30 / 궁남지 답사 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출발합니다.






정림사지(定林寺址)·궁남지(宮南池)/부여(扶餘)-2

(2019.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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