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충청남도

부소산성(扶蘇山城)/부여(扶餘)-1

케인스 2019. 5. 24. 22:53



               부소산성(扶蘇山城) / 부여(扶餘)-1

 


☞ 총청남도(忠淸南道) 부여군(扶餘郡) 관북리유적(官北里遺蹟)과 부소산성(扶蘇山城)

         


부여군 부소산성 위치 <google참고사진>



백제의 고도 부여(扶)를 답사하기 위해 부여시티투어 토요일 코스를 이용하였습니다. 당일은 행사측의 사정으로 국악단공연 대신 능산리고분군+나성으로 방문지가 변경되었습니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06시30분 출발 시외버스를 이용하여 08시25분경 부여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습니다. 10시에 시작하는 투어행사 전까지 도보로 이동하여 관북리유적(官北里遺蹟)과 관북리 조선시대관아(朝鮮時代官衙)를 답사하였습니다.


                    



충청남도(忠淸南道) 부여군(扶餘郡)




                    충청남도 행정구역 <참고자료>


                                                                                                                               <백제문화단지>


                                                                                          <부여군 홈페이지 참조>




관북리유적(官北里遺蹟)과 부소산성(扶蘇山城)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부여 관북리유적 부소산성]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되었습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부여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나성 등 4개지구와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익산의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등 8개의 유적입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안내판






관북리유적지과 부소산 전경 <참고사진>


백제 성왕16년(538) 웅진[공주]을 떠나 사비(泗沘)[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일컬으며, 사비도성(泗沘都城)을 축조하며 사비(泗沘)시기(538~660)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유적이 왕궁지(王宮址)인 관북리유적이며, 평시에는 왕궁의 후원으로 전란 시에는 마지막 방어 거점 역할을 하였던 중요한 유적입니다.​


관북리유적지과 부소산 <참고사진>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은 백제 사비(泗沘)시기(538~660) 왕궁 유적으로 부여 시가지의 북편에 위치합니다. 시가지를 휘감아 도는 백마강을 굽어 보는 위치에 표고106m인 부소산이 솟아 있습니다. 부소산(扶蘇山)의 능선과 계곡을 가로지르며 부소산성(扶蘇山城)이 위치하고, 그 남쪽 기슭엔 사비시대(泗沘時代)의 백제 왕궁터인 관북리유적지(官北里遺蹟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08:35 / 부여, 성왕로터리


08시25분경 부여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한 후 성왕로터리를 지나 구아리 백제유적을 보고 관북리유적지로 도보 이동하였습니다.


 

진행도                                                                                               성왕로터리, 성왕상(聖王像) <참고사진>



부여 구아리 백제유적(扶餘舊衙里百濟遺蹟)



 08:37 / 부여 구아리 백제유적(扶餘舊衙里百濟遺蹟)


1992년 발굴조사에서 건물지와 관련된 유구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우물터 내부와 주변에서 출토된 다량의 유물로 보아, 사찰이 아니라도 관부(官府)나 기타 그와 유관한 건물이 주변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유물은 북편 우물터 내에서 수막새, 방추차, 등잔, 토기, 완, 파수부호, 토제벼루, 납석제 용범, 납석제 전, 목기류 2개 체분, 씨앗류 등이, 남편 우물터 내에서는 수막새, 서끼래기와, 등잔, 토기완, 소호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발굴당시 모습 <참고사진>




● 관북리유적(官北里遺蹟): 사적 제428호




관북리유적지 전경 <참고사진>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은 1980년부터 본격적인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30년이 넘는 장기간의 계획적인 고고학적 조사 결과 대형 건물지 등의 왕궁의 주요 시설들과 정교 하게 판축된 토성이 확인되어 백제의 왕성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관북리유적지(官北里遺蹟址)


관북리유적지(官北里遺蹟址) 서쪽


관북리유적지(官北里遺蹟址) 동북쪽


관북리유적지(官北里遺蹟址) 동남쪽


관북리유적지(官北里遺蹟址) 동서쪽을 가로지르는 부소로(扶蘇路)





08:41





목곽창고(木槨倉庫)


 목곽창고(木槨倉庫)





▶ 4호 목곽창고(4 木槨倉庫)


 4호 목곽창고(4号 木槨倉庫)




2호 석곽창고(2槨倉庫)


 2호 석곽창고(2槨倉庫)




▶ 대형전각건물지(大形殿閣建物址)


 대형전각건물지(大形殿閣建物址):  건물지 주춧돌 위에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대형 모형물들이 올려져 있습니다.


대형전각건물지(大形殿閣建物址)



대형전각건물지(大形殿閣建物址) <참고사진>


대형전각건물지(大形殿閣建物址)와 남북방향으로 일직선 위에 위치한 서복사지(西覆寺址)에서는 금동제 허리띠가 출토되었는데,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왕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물품이므로 이 일대가 왕의 생활공간 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춧돌 배치도 <참고사진>

복원도<참고사진>



기와깐 시설(敷瓦施設,부와시설)



 기와깐 시설(敷瓦施設,부와시설)





2호 우물지(2 井址)


2호 우물지(2 井址)





각종 초석(礎石)및 유규(遺構)

 왼쪽부터 장대석 유구, 방형 초석, 원형 초석, 주공 초석




2호 목곽수조(2 木槨水槽)


2호 목곽수조(2 木槨水槽)





1호 목곽수조(1 木槨水槽)


 1호 목곽수조(1 木槨水槽)





 ▶ 3호 목곽수조(3 木槨水槽)


 3호 목곽수조(3 木槨水槽)






▶ 관북리유적(官北里遺蹟) 안내판


관북리유적(官北里遺蹟)



▶ 1호 석곽창고(1号 石槨倉庫)


 1호 석곽창고(1号 石槨倉庫)





 ▶ 지하창고(地下倉庫)


 지하창고




▶ 석축(石築)


석축(石築)





와적기단(瓦積基壇) 건물지


와적기단(瓦積基壇) 건물지





▶ 남북소로(南北小路)


 남북소로(南北小路)




   

  남북소로(南北小路)의 양쪽 배수구



▶ 건물지(建物址) 1


 건물지(建物址)






▶ 건물지(建物址) 2



건물지(建物址)





▶ 연지(蓮池)


 연지(蓮池)


연지



도로(道路)


 도로(道路)





▶ 와적기단건물지(瓦積基壇建物址)



 와적기단건물지(瓦積基壇建物址)





▶ 철기제작소(鐵器製作所)


 철기제작소(鐵器製作所)





▶ 공방시설(工房施設)


 공방시설(工房施設)



부여군 문화재사업소 건물


부여군 문화재사업소 건물


부여군 문화재사업소 건물은 한국근대건축의 거장 김수근(金壽根)씨의 설계로 1965년 9월 착공하여, 1971년 9월 1일 개관하였습니다. 건물 외관이 일본 신사건축의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건립 당시부터 왜색 시비의 논란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한국건축의 정통성을 표현한 근대건축물 중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건물입니다.


 부여군 문화재사업소 건물


이 건축물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이어 백제문화연구소, 부여군고도문화사업소를 거쳐 현재 부여군 문화재사업소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광복 이 후 국내 처음으로 현대시설을 갖추어 건립된 박물관이라는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건물에는 문화재사업소 사무실을 비롯해 백제3D영상관, 도예체험관, 목공체험관 등이 있습니다.



부여 관아[조선시대]



    부여 관아[조선시대] 위치 <google참고사진>


① 부여군문화재사업소, ② 사료관, ③ 정문, ④ 동헌, ⑤ 객사, ⑥ 사무동, ⑦ 도강영당, ⑧ 동헌내아, ⑨ 외삼문, ⑩ 화장실, ⑪ 후문매표소


부여 관아[조선시대] 전경


부여 관아[조선시대] 위치도 <참고사진>



부여객사(扶餘客舍)


부여객사(扶餘客舍)


동헌과 같이 1869년 지은 객사(客舍)는 왕명을 받들고 내려오는 관리를 접대하고 유숙시키던 곳으로, 정당(正堂)과 익실(翼室)을 두었습니다.



 부여객사(扶餘客舍)


중앙에 한층 높게 세운 정당(正堂)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의 맞배지붕건물이며, 그 좌우에 있는 동서익실(翼室)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입니다.


부여객사(扶餘客舍) 정당(正堂)


                                              부여객사(扶餘客舍) 현판: 부풍관(扶風館)


                  본래는 현재와 같이 부풍관(扶風館)이었는데 1932년 '백제관(百濟館)'이란 현판으로 바뀌어 걸려 있었습니다.


 부여객사(扶餘客舍)


정당(正堂)의 대청에는 궐패(闕牌)를 모셨고, 익실에는 온돌방을 들였습니다. 박물관 진열실 등으로 사용하면서 내부가 변형되었으나 기본 구조는 남아있습니다.

 


      전패(殿牌) 궐패(闕牌) <고궁박물관 사진자료>


전패(殿牌)는 조선시대 지방의 객사(客舍)에 봉안된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전(殿)자가 새겨진 나무 패(牌)로 지방의 객사(客舍)에 국왕을 상징하여 봉안했습니다. 지방에 출장간 관원이나 수령이 정조절(正朝節), 동지절(冬至節), 탄일(誕日), 하례의식 등이 있을 때 관원들과 함께 배례(拜禮)하였습니다. 궐패(闕牌)는 명나라 황제를 상징하는 궐(闕)자를 새긴 나무 패(牌)로 금박(金箔)을 하였고 대궐의 정전(正殿)의 중앙에 남향(南向)으로 두며 정조절(正朝節), 동지절(冬至節), 성절(聖節), 천추절(千秋節), 황제의 칙사를 맞이할 때에  배례(拜禮)하였습니다. 즉, 대궐의 정전에는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를 두고, 각 고을의 객사에는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두었는데, 1896년 8월 지방의 각 부(府), 목(牧), 군(郡)의 ‘전패(殿牌)’를 ‘궐패(闕牌)’로 고쳐 부르게 하였습니다.



동쪽 익실의 대청마루와 온돌방: 부여현감이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사용 <참고사진>


부여객사 측면



부여동헌(扶餘東軒)


 부여동헌(扶餘東軒):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


부여동헌(扶餘東軒)은 조선시대 당시 부여현(扶餘縣)의 정무를 집행하던 관아(官衙)건물로, 고종6년(1869)에 지었고 1985년에 크게 수리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지방관아는 중앙에 담과 정문을 내어 각종 집무실과 창고를 두고 주변에는 객사, 향교 등 부속건물을 둡니다. 정문 안에 다시 담을 둘러 수령이 직접 공무를 수행하는 외아(外衙)와 수령의 가족들이 거주하는 내아(內衙)를 두고 외, 내아는 다시 담이나 행랑으로 구분합니다. 동헌(東軒)이란 명칭은 외아(外衙)가 내아(內衙)의 동쪽에 있는 데서 연유했으나 나중에는 동헌이 그냥 관아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 외동헌, 내동헌이라고도 부르게 되었습니다.



부여동헌(扶餘東軒)


부여동헌(扶餘東軒)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왼쪽 3칸은 대청으로 판벽을 치고 문을 달았으며, 오른쪽 2칸은 온돌방으로 앞쪽에 툇마루를 놓았습니다.


부여동헌(扶餘東軒)


부여동헌(扶餘東軒) 건물의 중앙칸에는 ‘초연당(超然堂)’이라는 현판이 결려 있으며 한때 ‘제민헌(濟民軒)’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기도 했습니다,


부여동헌(扶餘東軒) 측면



 부여동헌(扶餘東軒) 옆 고목(古木)



외삼문(外三門)


동헌(東軒) 내아(內衙)의 외삼문(外三門)


 동헌내아(東軒內衙)


현감(縣監)의 처소인 내동헌(內東軒)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으로, 3칸의 대청과 그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들였습니다. 백제시대의 주춧돌과 기단석을 사용하여 건물을 지었으며, 정원에는 지금도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동헌내아(東軒內衙) 중앙칸 위에 걸려있는 도강영당기(道江影堂記) 편액


도강영당기(道江影堂記)






동헌내아(東軒內衙) 뒷면



도강영당(道江影堂):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6호


 도강영당(道江影堂):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6호


도강영당(道江影堂)은 조선 말 부여현(扶餘縣)의 내아건물(內衙建物)이던 것을 1971년 국가의 보조를 받아 9평의 영당(影堂)을 신축하고 홍가신(洪可臣), 허목(許穆), 채제공(菜濟恭) 3인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현재는 부여 유림(儒林)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습니다.




도강영당(道江影堂)


만전당(晩全堂) 홍가신(洪可臣)은 34살 때 부여현감으로 부임해 의열사(義烈祠)라는 백제의 삼충신(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는 사당을 지어 그들을 추모하였습니다. 사후에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공덕을 기려 후인들이 그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을 건립했고, 현재 그와 그를 존모(尊慕)했던 미수(眉叟) 허목(許穆)과 그리고 정조(正祖)를 도와 어진 재상으로서의 이름을 떨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등 세 분의 영정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홍가신(1541∼161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22년(1567) 문과에 급제하여 강화부사, 형조참판, 강화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선조 37년(1604)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 1등에 책록, 이듬해 영원군에 봉해졌다. 후에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습니다.


허목(1595∼168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벼슬이 이르렀고, 그림, 글씨, 문장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채제공(1720∼1799)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35년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영조의 세자폐위 문제를 죽음을 무릅쓰고 막았는데 이로인해 영조의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그 후 병조, 예조, 호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 좌의정으로 행정의 최고 책임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수원성 건설에도 참여하였습니다. 


도강영당(道江影堂)


도강영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 건물로 앞면 1칸을 개방하여 참배공간으로 하고 뒤쪽은 통칸으로 3인의 영정을 모셨습니다.


                                             도강영당(道江影堂) 현판 <참고사진>


영당(影堂)의 이름을 홍가신(洪可臣), 허목(許穆), 채제공(菜濟恭) 세 분 선현들이 희구했던 도(道)가 백마강(白馬江)처럼 길이 이어지기를 희망하며 도강(道江)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도강영당 창건약사(道江影堂創建略史) 비(碑)




● 부소산성(扶蘇山城): 사적 제5호



부소산 위치도 <google참고사진>


부소산성(扶蘇山城)은 부여의 부소산(扶蘇山)에 소재한 삼국시대 백제의 도성(都城)으로 대한민국 사적 제5호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沘城), 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릅니다. 해발 106m의 부소산(扶蘇山)은 부여의 진산(鎭山: 고을 뒤 지역을 보호하는 산)으로 평지에 돌출하였으며, 산의 남쪽은 산세가 완만하여 앞쪽에 시가지를 이루고 동쪽과 북쪽은 가파르며 백마강과 맞닿았습니다. 부소산의 산 이름은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처음 선보이며, ‘부소(扶蘇)’의 뜻은 백제시대 언어로 ‘소나무(松)’의 뜻이 있어, 부소산을 ‘솔뫼’라고 보는 학설이 유력합니다. 부소산(扶蘇山)은 평상시에는 백제왕실에 딸린 후원(後園) 구실을 하였으며, 전쟁때에는 사비도성의 최후를 지키는 장소였습니다.


부소산성[O] 개략도 <참고사진>


둘레 2,200m, 면적 약 102만㎡.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감으며 흐르는 백마강에 접해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1차로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입니다. 이곳은 성왕 16년(538) 성왕의 천도[공주→부여]를 전후해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09:39 / 부여 시티투어버스가 충남종합관광안내소 앞 부여관광주차장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부소산성 내 주요관광지


부소산성 입구



부소산문(扶蘇山門)



부소산문(扶蘇山門): 부소산성 입구 정문


 부소산문(扶蘇山門)



    부소산성안내판




  

참고: 산성의 종류(테뫼식, 포곡식, 복합식) <참고사진>


부소산문(扶蘇山門): 1986년 11월 건립된 70㎡규모의 목조건물로 정면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2층 누각 건물입니다.    


                          부소산문(扶蘇山門) 현판


              현판의 글씨는 부여 출신의 서예가로 한국서도협회 회장을 역임한 무림(霧林) 김영기(金榮基) 선생의 글씨입니다.


 부소산문(扶蘇山門) 뒷면: 사비문(泗沘門)이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사비문(泗沘門) 현판  <참고사진>


부소산성 축조시기





삼충사(三忠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10:28 / 의열문(義烈門): 삼충사(三忠祠)의 외삼문(外三門)


                                                   의열문(義烈門) 현판  <참고사진>



충의문(忠義門): 삼충사(三忠祠)의 내삼문(內三門)


충의문(忠義門)과 삼충사중건사적비(三忠祠 重建 事蹟碑)


 삼충사중건사적비(三忠祠 重建 事蹟碑)




 충의문(忠義門)


                                         충의문(忠義門) 현판 <참고사진>


삼충사(三忠祠)


삼충사는 위기로 치닫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백제의 세 충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내부에는 성충, 흥수, 계백 세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 사당은 1957년 세워졌으며 1981년 정면3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다시 지어졌습니다.


               


삼충사(三忠祠)  현판


       百濟忠臣(백제충신)                                           百濟忠臣(백제충신)                               百濟忠臣(백제충신) 
 佐平成忠公像(좌평성충공상)                       佐平興首公像(좌평흥수공상)                     階伯將軍像(계백장군상)


      

          佐平成忠公像(좌평성충공상) 

성충 (成忠 : ?~656)


백제 의자왕 때의 충신, 일명 정충(淨忠)이라고도 한다. 656년(의자왕 16)에 성충이 좌평(佐平)으로 있을 때 왕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승하여 자만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자 국운이 위태로워짐을 극간하니 왕이 노하여 성충을 옥에 가두었다. 성충은 몸이 쇠하여 죽게 되었는데 임종할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하오니 원컨대 한 말씀 더 드리고 죽고자 하나이다."하고 간언하기를 "신은 항상 시세의 변화를 관찰하옵는데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그 지리를 살펴 상류에 처하여 적세를 늦추어 놓은 연후에야 가히 온전할 수 있사오니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처오면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혹은 침현을 지나지 못하도록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 금강하류)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그 험난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한 연후에 치는 것이 옳겠나이다" 하였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660년(의자왕 20)에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쳐들어오고 당병은 백강으로 침입하여 도성이 무너지자 의자왕은 탄식하기를 "후회로다, 내가 성충의 충성된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하였다 한다.

     


         佐平興首公像(좌평흥수공상


흥수 (興首 : 생몰년 미상)


백제 의자왕때 충신, 좌평(佐平)으로 있다가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 : 전라남도 장흥)으로 귀양갔다. 660년(의자왕 20)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치려 하므로, 왕이 좌평 의직(義直),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의 신하를 모아 전쟁에 대비하려고 회의를 열었는데 의논이 구구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그러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흥수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그는 "당병은 수가 많고 군율이 엄하고 더구나 신라와 공모하여 앞뒤로 서로 호응하는 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넓은 들판에 진을 치고 싸우면 승패를 알 수가 없다. 백강(白江, 혹은 伎伐浦)과 탄현은 우리 나라의 요새지인 바 마땅히 용사를 가려 보내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대는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인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대왕께서는 굳게 성문을 닫아 지키고 있다가 적군의 양식이 떨어지고 또한 사졸들이 지칠 때를 기다려 이를 치게 한다면 반듯이 적병을 깨트릴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오랫동안 귀양가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들어 줄 수 없다. 당나라 병사들은 백강에 들어와서 흐름에 따라 배를 정렬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에 올라서 좁은 길을 따라 말을 정렬 할 수 없게 한 다음 이때에 군사를 놓아 치면 마치 새장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라고 하니 왕이 그럴싸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때에 당군이 이미 백강을 지나서 진격해 오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공격해온다는 말을 듣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리하여 계백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는 황산벌싸움에서 패하고 백강에서는 수군이 패하여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階伯將軍像(계백장군상)


계백 (階伯 : ?~660)

 
백제 말기의 장군. 계백이라고도 표기한다. 관등은 달솔(達率)이다. 660년에 김유신(金庾信)과 소정방(蘇定方)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인 탄현(炭峴)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천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黃山)벌에 나가 5만여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그는 전장에 나가기에 앞서 "한 나라의 힘으로 나당의 큰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고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였다. 또한 병사들에게도 "옛날 월왕 구천(越王 句踐)은 5천명으로 오왕 부차(吳王 夫差)의 70만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마땅히 각자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격려하였다. 그의 결사대는 험한 곳을 먼저 차지하여 세 진영으로 나뉘어 신라군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신라군과의 네 번에 걸친 싸움에서 모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반굴(盤屈)·관창(官昌) 등 어린 화랑의 전사로 사기가 오른 신라의 대군과 대적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나 적었다.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계백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계백의 이러한 생애는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는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부여의 삼충사·의열사, 논산의 충곡서원(忠谷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여군 자료>


 삼충제(三忠祭)  <참고사진>


삼충사(三忠祠)에서는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재 때 성충, 흥수, 계백 세명의 충신을 기리는 삼충제(三忠祭)를 지내고 있습니다. 



▶ 남문지(南門址)



 삼충사(三忠祠)에서 남문지(南門址) 가는 길



 10:51 / 남문지(南門址)



남문지(南門址) 유구(遺構)


 부소산성(扶蘇山城) 남문지(南門址)




 


                                    

                                     부소산성 토성벽 <참고사진>



 부소산성 축조시기




▶ 반월루(半月樓)



 10:58 / 반월루(半月樓)


         

           <참고자료>




반월루 현판


반월(半月)은 반달 모양이란 뜻으로 백제시대 사비도성이 둥글게 휘어진 반달 모양이라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반월루 현판은

1972년에 쓴 김종필(金鍾泌) 전 국무총리의 글씨입니다.


반월루기(半月樓記) 편액


반월루기(半月樓記) 편액


금란기(金蘭記) 편액



반월루 누각에서 본 부소산성


 부여 시가지와 멀리 궁남지


 부여 시가지와 멀리 부여대교 그리고 우측에 백마강





▶ 태자(太子)골 숲길



 태자(太子)골 숲길



        <참고자료>



 연리지(連理枝)




▶ 백화정(百花亭): 낙화암 정상부 위치



11:18 / 백화정(百花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8호



낙화암은『삼국유사』에 의하면 멸망 당시 이곳에서 궁녀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하며, 이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 부풍시사(扶風詩社)라는 시우회에서 낙화암 정상부에 백화정(百花亭)을 세웠습니다.


백화정(百花亭)


백화정(百花亭)은  6각형 평면에 겹처마 6각 지붕입니다. 화강석을 원형으로 다듬어 높이 45㎝~60㎝ 정도의 초석을 놓아 정자의 바닥을 지반에서 높이 뛰웠고 직경 30㎝의 둥근 기둥을 올렸습니다. 정자의 남쪽에 나무 계단 하나를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평난간을 설치하였고 천장에는 여러 가지 연꽃 문양(紋樣)을 그려 놓았습니다.


 

백화정(百花亭) 현판


백화정 현판은 각각 일제강점기 때의 서예가인 석정(石汀)  안종원(安鍾元, 1874~1951), 우하(又荷 ) 민형식(閔衡植, 1875-1947)선생의 글씨입니다.


백화정기(百花亭記) 현판


백화정 내부백화정(百花亭)을 지을 당시 부여군수였던 홍한표(洪漢杓)씨가 백화정기(百花亭記)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낙화암(落花巖) 정상부와  백화정(百花亭)



낙화암(落花巖)이라는 이름은 궁녀의 죽음을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한 후대의 표현이 굳어진 것으로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巖), 곧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로 기록돼 있습니다.


                                                     


백화정(百花亭)과 백마강(白馬江)




▶ 고란사(皐蘭寺):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



 고란사 가는 길


백화정(百花亭)에서 가파른 돌계단을 밟고 내려서면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고란사(皐蘭寺)가 나타납니다.


 고란사(皐蘭寺)


고란사는 고려시대 때에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여인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지어진 사찰로 전해지고 있으며 백제멸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하나 정확한 유적이나 유물은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불적(佛跡)보다는 고란초에 의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법당 뒤편에서 나오는 약수와 함께 이 사찰의 명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고란사(皐蘭寺) <참고사진>


부소산 북쪽기슭의 백마강 좌안(左岸)에 자리한 고란사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법당, 범종각과 요사(窯舍) 건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사찰로서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는데 현 법당건물은 1959년 은산(恩山) 승각사(乘角寺) 건물을 옮긴 것입니다. 백제시대에는 이곳에 절이 아닌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절 이름은 뒤쪽 바위에서 자라는 고란초에서 유래하였습니다.


11:33 / 고란사(皐蘭寺) <참고사진>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고란사는 연등으로 가득했습니다.


 고란사(皐蘭寺) 종무소 출입문 위에 일반적인 사찰의 현판과는 달라보이는 고란사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고란사(皐蘭寺) 현판  <참고사진>


고란사 현판의 글씨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때의 서예가겸 화가인 해강(海岡) 김규진(金奎鎭, 1868년~1933년) 선생이 썼으며, 그림은 일제 강점기 때 활동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 1871~1942) 선생이 그렸습니다.


고란사(皐蘭寺) 법당


고란사(皐蘭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마곡사(麻谷寺) 말사입니다. 고려 현종19년(1028)에 재창(再創)되어 인조7년(1629), 정조21년, 광무4년(1900)에 각각 중창, 중수를 거듭하다가 1931년에 다시 짓고 1960년에 보수단장했다고 합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극락보전(極樂寶殿) 현판


 극락보전(極樂寶殿) 내부: 중앙의 삼존불과 그 뒤로 수많은 나한상이 있습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삼존불상 [왼쪽부터 대세지보살, 아미타여래, 백의관세음보살]: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418호


관세음보살은 백의불상(白衣佛像)으로 백의보살은 자기 몸을 태워서 중생을 극락세계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백의보살은 국내에선 거의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근래에 만들어서 봉안한 것이라 합니다.



극락보전의 주춧돌


 

극락보전의 주춧돌 <참고사진>


고란사에 남아있는 연꽃 무늬가 새겨진 2개의 주춧돌은 대표적인 고려시대의 유물입니다. 이로보아 고란사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절로 보고 있습니다.


극락보전 옆 요사채 <참고사진>


극락보전 좌측의 2칸은 요사채 건물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현판과 회고루(懷古樓)라는 두 개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眞空妙有(진공묘유) 현판 <참고사진>


18세의 승려 신동호(申東浩)가 쓴 것으로 眞空妙有(진공묘유)란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을 말하는데, 텅비어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묘하고 무궁 무진한 진리가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꺼리낌이 없을 때 우리의 마음이 풍성해지고, 이 넉넉하고 풍성한 마음이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懷古樓(회고루) 현판


               회고루(懷古樓)란 '지나간 옛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누각'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데, 만송(晩松)이란 분이 썼습니다.

 

 법당에서 바라본 백마강


극락보전 측면 벽에 그린 불화 심우도(尋牛圖)


극락보전 뒷면 벽에 그린 삼천궁녀 이야기


영종각(靈鐘閣)


 다른 사찰의 범종각(梵鐘閣)에 해당합니다. 아마도 영혼들을 위로하는 소리가 나는 종이있어 영종각(靈鐘閣)이라 했나봅니다.


                         범종(梵鐘)


삼성각(三聖閣)


삼성각 내부


삼성각(三聖閣) 내부  왼쪽 벽면에 산신, 칠성, 독성탱화를 봉안 하였습니다. 삼성(三聖)은 각각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존재이며, 칠성(七星)은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인간의 복과 수명을 담당하고 있으며, 독성(獨聖)은 나반존자(那畔尊者)라고도 불리는데 홀로 깨달아서 성인의 위치에 올라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합니다.



                                              고란정(皐蘭井)


고란약수




 

고란초(皐蘭草) <참고사진>


고란초는 겨울에도 죽지 않는 상록초이며 잎의 크기는 1∼5㎝정도입니다. 잎은 단엽(한장)으로 계란처럼 완만하게 둥그스럽고 끝은 뾰족하며 특히 앞면의 양쪽에 좁쌀만한 돌기가 돋아있고, 뒷면에는 황색 포자주머니가 있는게 특징입니다. 습기가 적당하게 있고 그늘이 지는 암벽의 북쪽에서 자라고 대부분이 바위 틈새에서 발견되며 잎의 길이가 매우 작은데 비해 뿌리는 잔가지도 많고 깊숙이 들어가 있습니다. 고란사에 많이 자라던 고란초는 바위가 계속 무너져 내리는 까닭에 수분 공급이 제대로 안되어 거의 죽고, 지금은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고란초 관련 석비 <참고사진>





고란정 옆 동전 붙는 바위


                                          

   ★ 고란약수 전설 1   

                                               

 <참고사진>

                     


   ★ 고란약수 전설 2


         궁녀들이 백제왕에게 약수를 올리는 벽화  <참고사진>


백제시대에 임금님은 항상 고란사 뒤편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애용하여,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 약수를 떠오게 하였다. 하지만 매일 험한 부소산을 올라 고란사 뒤쪽 고란약수터에서부터 물동이를 가져오는 일이란 힘든일이었다. 그래서 다른곳에서 시간을 보내구 아무곳에서나 물을 떠다가 고란약수라 임금님께 올렸다. 하지만 고란약수의 물맛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님은 마침 고란 약수터 주변에서만 자라는 기이한 풀이 있어 이름을 고란초라 부르고 약수를 떠오는 사람이 잎을 하나씩 물동이에 띄워옴으로써 그것이 고란약수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 절의 이름을 고란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고란사선착장



유람선을 이용하면 조룡대, 낙화암 전경을 관광하면서 부여시내 정문 주차장으로 편리하게 갈 수 있습니다.



11:43 / 고란사 선착장[황포돛배 탑승]


11:51

고란사선착장


당겨본 고란사




조룡대(釣龍垈)



 백마강 황포돛배 수상관광


부여를 감싸돌며 비단결 강물이 흐른다 하여 지어진 금강(錦江)은 전라북도 장수에서 시작해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를 흘러 서해로 들어갑니다. 부여에 이르러 비로소 백마강(白馬江 16km: 호암리 천정대부터 세도 반조원리까지)으로 불립니다. 강을 따라 천정대, 낙화암, 왕흥사지, 구드래, 수북정, 자온대 등으로 이어집니다. 백마강에는 3개소의 선착장(구드래, 고란사, 수북정)에서 유람선을 운행하고 있으며 백제시대고증을 거쳐 건조한 황포돛배는 수상관광의 ‘멋’과 ‘흥’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낙화암(落花巖)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릅니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낙화암 절벽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岩)이란  글씨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이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사진>


                          <참고자료>



 구드래선착장


구드래선착장


황포돛배 항로 <참고사진>


부산(浮山: 107m)


대재각(大哉閣)은 부산(浮山) 기슭 백마강변에 있는 정자(亭子)입니다. 숙종26년(1700)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잡혀갔던 조선후기 문신 이경여(李敬輿)가 낙향하여 거처하던 곳에 그의 손자 이명(頤命)이 세웠습니다. 청룡사(靑龍寺)는 백마강 건너 부산(浮山) 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7년에 대웅전이 신축되었습니다. 원래 이곳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가 있었던 곳입니다.


취수탑: 부산(浮山) 기슭 백마강변에 있는데 문화재보호구역에 어울리게 고풍스럽게 건물을 단장하고 있습니다.


 11:59 / 구드래선착장


 황포돛배


황포돛배는 백마강의 고란사와 수북정간 3.5km 구간에 걸쳐 왕복 운항하고 있으며 길이 19.8m, 폭 4.5m 규모로 승선인원은 47명 정도이며 외형은 옛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내부는 편의시설과 안전설비를 갖춰 안전도를 높임은 물론 관광객이 소음으로 인한 불편이 없도록 무소음 전기 모터를 장착하고 있습니다.


 구드래선착장 <참고사진>


부소산 서쪽 끝자락에 있는 구드래는 백마강과 어울려 빼어난 경승을 이루고 있습니다. 구드래 나루는 백제시대에 도성인 사비성을 출입하는 항구와도 같은 큰 나루였으며 현재는 백마강을 오르내리는 유람선의 선착장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주변에는 조각공원이 잘 꾸며져 있어 부여 사람들의 휴식처이기도 합니다.


왜 ‘구드래’라고 부를까요?


백제시대 왕을 부를 때 지배족은 어라하(於羅瑕), 백성은 건길지(腱吉支)라 하였습니다. 구드래는 ‘구ㄷ으래’로 ‘구(大)’가 왕칭어인 어라하에 접두하고 두말사이에 지격촉음인 ‘ㄷ’이 끼어들어 ‘구ㄷ어라하’가 되고 다시 줄어들어 ‘구ㄷ으래(구드래)’로 변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구드래’는 ‘大王’의 의미로 『일본서기』(서기 720년 편찬)에 백제를 ‘구다라’로 부른 대목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 ‘구다라’도 대왕국(大王國)이란 뜻으로 백제(百済)를 높여 부른 것입니다. 또 한편 구드래란 백제 왕이 강 건너 왕흥사(王興寺)를 왕래할 때 망배드리기 위해 올라갔던 구들돌이 있던 마을이라 생겼다고 하기도 하며, 옛날 이곳에서 방바닥에 깔던 구들돌이 많이 나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습니다.


12:04 / 구드래선착장에서 탑승하여 점심 식사를 위해 '굿뜨래음식특화거리'까지 이동하였습니다. 점심을 위한 식당은 자유선택.


        

      '구드래돌쌈밥'식당 [주물력백반]


       13:00시 점심식사 후 정림사지(定林寺址) 답사를 위해 이동하였습니다.






부소산성(扶蘇山城)/부여(扶餘)-1

(2019.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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