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전라남도

대흥사(大興寺)/해남(海南)-1

케인스 2019. 4. 25. 21:36



              대흥사(大興寺) / 해남(海南)-1

 


☞ 전라남도(全羅南道) 해남군(海南郡) 대흥사(大興寺)




 해남 위치도 <google 참고사진>

▣ 4월21일(2019),일요일



 4월21일, 시간표: 유선관(아침)~대흥사(답사)~해남~미황사(답사)~땅끝~(점심)~땅끝(답사)~해남~서울


1) 유선관[06:00 기상]

2) 아침[07:00 - 유선관/아침백반]

3) 유선관 출발[08:00 출발]---(도보: 약 5분 이내)---대흥사 일주문도착[08:05 도착]

4) 대흥사 답사[08:05 ~ 09:30]

5) 대흥사 입구 출발[09:30 ]---(도보: 약 35~45분 소요)---대흥사 버스정류장 도착[10:13]

6) 대흥사 정류장 출발[10:20]---(군내버스: 약 20~25분 소요)---해남터미널 도착[10:45]

7) 해남터미널 출발[11:10]---(군내버스: 약 40~50분 소요)---미황사 도착 [11:58]

8) 미황사 답사 [11:58 ~12:40]  

             * 점심을 공양간에서 하려 하였으나 사전 예약 필요하여 땅끝에서 점심을 하기로 함

             * 이 시간대에 땅끝 행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워 택시를 이용함

             * 미황사 답사 끝난 후 택시회사에 전화하여 땅끝행 택시 요청[택시 도착까지 약7~10분 기다림]

9) 미황사 출발[12:48]---(택시이용: 약 15~20분 소요)---땅끝마을 도착[13:05]

             * 땅끝 도착 후 해남행 직행버스 예매함

10) 점심[바다동산(송지면 땅끝마을) /해물칼국수]

11) 땅끝 답사[14:00 ~ 16:15]

12) 땅끝정류장 출발[16:15 ]---(직행버스: 약45분 소요)---해남터미널 도착[16:57]

13) 해남터미널 출발[17:30]---(고속버스: 약 4시간30분 소요)---서울도착[22:20]

             * 서울에서 미리 티켓 구입하였음


      ★ 주의: 버스시간표(고속, 시외, 군내버스)는 항상 부정기적으로 변동될 수 있으므로 사전 확인은 꼭 필요합니다.



 대흥사 위치도 <google 참고사진>



▶  유선관(遊仙館): 1박()



 06:45 / 유선관(遊仙館)


유선관(遊仙館)은 100년 전통의 남도 한옥집입니다. 대흥사를 찾는 수도승이나 신도들의 객사(客舍)로 쓰이다가 40여년 전 여관으로 운영되기 시작했습니다.



유선(遊仙), 신선이 노니는 곳. 하룻 밤 신선이 된듯한 감정으로 머물렀습니다. 속세를 떠나 선계에 온 것을 몸과 마음이 느낍니다. 

 06:45 / 유선관(遊仙館)


마당 가운데 ‘ㅁ 자’ 형태의 아담한 정원을 두고 기와집이 빙 둘러 있습니다. 정원 가운데 키 큰 굴뚝이 한옥의 멋을 더합니다.



방 앞에 툇마루가 있는 4인실 '소나무방'에서 일박(一泊)하였습니다. 이곳은 대흥사에서 일반인에게 대여를 해 관리하고 있으며 2~3인실, 4~5인실, 8~10인실 의 전통 방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TV프로 ‘1박2일’에 소개되면서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적어도 1~2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인기라고 합니다.


 心淸佛應(심청불응): 마음이 맑으면 부처가 응한다


 소나무방 안에 있는 병풍이 한옥 방의 격을 한층 끌어올립니다.



유선관(遊仙館)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 촬영지이며, ‘천년학’ 등 10여 편의 영화가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됐습니다.


 대흥사천(大興寺川)


두륜산에서 내려오는 여러 계곡이 대흥사에서 만나 큰 내를 이루는데 이를 이곳 사람들은 '너부네'라고 부른답니다. <유흥준답사기>


 유선관을 빙둘러 내려가는 대흥사천


 

세월이 지나 유선관의 '노랑이'가 '검둥이'로 바뀌었습니다. '단쭝이'라는 이름의 검둥이 집 앞에는 동백꽃이 떨어져 있습니다.


 

 장독대가 고택의 멋을 한층 더 물씬 풍기게 합니다.



 07:00 / 정갈한 아침 밥상



▶  유선관(遊仙館) 대흥사(大興寺) 



 08:00 / 피안교(彼岸橋)


 유선관(遊仙館)에서 피안교를 건너면 곧 대흥사(大興寺) 입구 입니다.



▶  대흥사(大興寺) 




  대흥사 전각 위치도 1  <google 참고사진>

  

  대흥사 전각 위치도 2  <google 참고사진>


                                <참고사진>


                    규장각 소장 해남읍지(1899년)에 수록된 해남 지도 상의 두륜봉(頭輪峰) 일대와 대둔사(大芚寺=대흥사)


 대흥사(大興寺) 전경


대흥사(大興寺)는 전라남도 해남군에 위치한 두륜산 도립공원 내의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입니다. 사적 508호로 지정되었으며 대둔사(大芚寺)라고도 불립니다.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수되면서 17~18세기 서산종의 종찰로 선·교 양종의 대도량역할을 한 사찰입니다. 풍담(風潭)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스님에 이르기까지 13대종사(大宗師)를 배출했고 또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스님까지 열세분의 대강사(大講師)를 낳았습니다.



대흥사(大興寺)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산지 승원, 산사.'로 2018년 6월3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건물의 전체배치 설정은 일정한 축의 설정 없이 각 전각들을 자유롭게 배치하였습니다.



일주문(一柱門)



 일주문(一柱門): 1975년에 세움


                        일주문 현판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


현판의 글씨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선생의 글씨입니다. 그의 형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으로 우리나라 현대 서예를 대표하는 서예가입니다.


 일주문(一柱門)  뒷면, 「선림교해만화도장(禪林敎海滿華道場)」


현판의 글은 '선종이 숲을 이루고 교종이 바다를 메우니 모두가 어우러진 도량'이라는 뜻으로 호남의 서예가 운암(雲菴) 조용민(趙鏞敏) 선생의 글씨입니다.



부도전(浮屠殿)



부도전(浮屠殿)


          



부도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입니다. 부도와 탑비의 주인공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 대흥사를 중흥시키고 크게 빛낸 스님들로서,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풍담(楓潭)ㆍ취여(醉如)ㆍ월저(月渚)ㆍ설암(雪巖)ㆍ환성(喚惺)ㆍ호암(虎巖)ㆍ설봉(雪峯)ㆍ연담(蓮潭)ㆍ초의(草衣) 등의 대종사와, 만화(萬化)ㆍ연해(燕海)ㆍ영파(影波)ㆍ운담(雲潭)ㆍ벽담(碧潭)ㆍ완호(琓虎) 등의 대강사, 그밖에 고승대덕들의 부도입니다.


                                              진화문(眞化門): 부도전 정문 <참고사진>




                                                    

 청허당(淸虛堂) 서산대사(西山大師: 1519-1604) 부도(보물 제1347호)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 부도 <참고사진>



                                                               서산대사 부도(西山大師浮屠)의 문양
 

옥개석 전각에 표현된 용두(龍頭)                                                 거북과 연꽃


 

<참고사진>                                                                              조개와 국화꽃 <참고사진>


팔각원당형의 서산대사 부도(西山大師浮屠)는 기단부와 상륜부의 독특한 장식과 옥개의 낙수면, 처마의 목조건물 모각은 이 시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수법으로 고려시대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서산휴정 부도   2) 풍담의심 부도   3)환성지안 부도   4) 상원새봉 부도   5) 연담유일 부도   6) 완호윤우 부도   7) 초의의수 부도


                                  대흥사사적비(大興寺事蹟碑)

 
대흥사 부도전 안에는 우뚝 솟아있는 대흥사사적비가 있습니다. 대흥사사적비(大興寺事蹟碑)의 비문은 조선 후기의 문신 희암(希菴) 채팽윤(蔡彭胤:1669∼1731)님이 짓고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반야교(般若橋)


부도전(浮屠殿)을 지나 대흥사천(大興寺川) 반야교(般若橋)를 건너 대흥사 경내로 오릅니다.


  PHOTO ZONE



 대흥사천(大興寺川)



대흥사의 영역 구분



   

   대흥사 영역 구분


대흥사는 크게 세 곳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침계루 앞 계곡인 금당천(金塘川)을 경계로 삼아 그 북쪽을 북원(北院)이라 하며 그 반대편은 남원(南院)으로 구분 합니다. 그리고 서산대사의 사당과 유물관이 있는 표충사 일원과 대명광전, 성보박물관 등을 별원(別院)으로 구분합니다.





해탈문(解脫門)

해탈문(解脫門)


부도전(浮屠殿)을 지나 대흥사에 들어서면 천왕문 대신 해탈문이 나타납니다. 대흥사에는 사천왕상이 없는데 그 이유는 북(北)으로는 영암(靈巖) 월출산(月出山), 남(南)으로는 송지(松旨) 달마산(達磨山), 동(東)으로는 장흥(長興) 천관산(天冠山), 서(西)로는 화산(花山) 선은산(仙隱山)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어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해탈문은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하며 즉 속계를 벗어나 법계에 들어가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해탈문[解脫門] <참고사진>


2002년에 건립된 해탈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외부에는 3면에 도륜(道倫) 박태석(朴泰錫)이 그린 ‘부모은중(父母恩重)’ㆍ‘염화신중(拈花神衆)’ㆍ‘점성가제도(占星家濟度)’ 등이 주제별로 그려져 있으며, 2002년 해탈문 건립 당시 단청과 함께 조성되었습니다.


현판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와 ‘해탈문(解脫門)’의 글씨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1835~1919)이 쓴 것입니다. 


 해탈문 내부에 흰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상(普賢童子像)


 해탈문 내부에 청색사자를 타고있는 문수동자상(文殊童子像)


해탈문을 들어서면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보살 상이 있습니다. 사자는 지혜를, 코끼리는 실천을 각각 상징합니다. 사자는 대흥사 경내방향이고, 코끼리는 절 반대방향, 즉 속세를 바라보고 있다. 부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 경내로 들어서고, 속세에 가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두륜산(頭輪山) 와불상(臥佛像)


두륜산(頭輪山) 비로자나 와불상(臥佛像)


해탈문을 들어서면 넓은 공간이 펼쳐지면서 멀리 두륜산의 비로자나 와불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대흥사 해탈문에서 바라보는 두륜산은 영락없이 누워있는 부처(臥佛)의 모습입니다. 두륜봉은 부처의 머리, 가련봉은 가슴, 노승봉은 손, 고계봉은 발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두륜산(頭輪山) 와불상(臥佛像)  <참고사진>



종무소(宗務所)



대흥사의 사무를 보는 종무소(宗務所) 입니다.



동다실(東茶室)



 차(茶),기념품, 다구, 법복 등을 판매하고 있는 동다실(東茶室) <참고사진>


                                               동다실(東茶室) 현판



범종루(梵鐘樓)



 범종루(梵鐘樓): 정면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건물로 정면에서는 1층으로 보입니다.


범종루(梵鐘樓) 측면


      범종루(梵鐘樓) <참고사진>


                                                    범종루(梵鐘樓) 현판


                                       범종(梵鐘) <참고사진>



북원구역(北院區域)




 북원구역(北院區域) <google 참고사진>




금당천(金塘川) 북쪽의 북원(北院)구역



심진교(尋眞橋)


 

 심진교(尋眞橋)


대흥사의 북원(北院)과 남원(南院)을 가로지르는 금당천(金塘川)에 놓여있는 다리가 심진교(尋眞橋)입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침계루(枕溪樓) 입니다.

                                               심진교(尋眞橋)


심진교(尋眞橋)


심진교(尋眞橋)는 원래 나무로 만들어졌었으며, 현재의 다리는 일제강점기 때 세운것으로 전해집니다.



침계루(枕溪)



 침계루(枕溪樓) 


침계루(枕溪樓)는 맞배지붕의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식 건물이며 북원(北院)의 출입문으로 남, 북원을 가로지르는 계류 금당천(金塘川)에 면하여 자리한 2층 누각(樓閣)건물입니다. 심진교를 지나 누() 아래의 어칸 통로를 통해 중정(中庭)으로 출입하며, 대웅전(大雄殿)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침계루(枕溪樓) 현판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 현판


침계루 어칸에는 용틀임을 하고있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동국진체(東國眞體) 글씨 ‘침계루(枕溪樓)’ 현판과 그 배면에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라 쓴 두 기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침계루(枕溪樓)


침계루(枕溪樓)는 2층 누각 건물로 아래층은 돌담과 판장문으로 마감한 광[곳간]입니다. 위층은 널마루를 깔고 그 위에  법고(法鼓)와 1587년명(銘) 범종(梵鐘)ㆍ목어(木魚)ㆍ운판(雲版) 등 사물(四物)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좌우 측벽으로 감실형 틀 속에 금어 현암(玄菴)이 조성한 사천왕탱(四天王幀)이 걸려 있습니다. 이외 대흥사의 사적(事蹟)과 내력을 알 수 있는 ‘대웅전중창상량문(大雄殿重創上樑文)’과 ‘중조성천불기(重造成天佛記)’ 등 24기의 현판(懸板)과 시액(詩額)이 사면(四面)에 걸려 있습니다.



  대웅전중창상량문(大雄殿重創上樑文) <참고사진>

   


시액(詩額) <참고사진>


 

침계루 측면 벽 그림 <참고사진>


“침계루에는 나무에 매달린 호랑이와 가재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노승께서 호랑이에게 짐승을 잡아먹지 말라는 계시를 내렸어요. 그런데 물속에 있는 가재를 잡아먹기 위해 호랑이가 꼬리를 물속에 늘어뜨렸답니다. 호랑이는 가재가 꼬리의 털을 물면 슬그머니 꼬리를 올려 가재를 잡아먹었지요. 노승이 노하여 칡넝쿨로 소나무에 호랑이를 매달았다는 설화가 전해옵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大雄寶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6호


대웅보전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불로서 중생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전각입니다. 내부에 모셔진 삼존불은 조선후기에 조성된 목조불이며 부처님 뒤에 있는 탱화는 1901년(대한제국 광무5년)에 조성한 것입니다. 이 건물은 1667년(조선 헌종8년)에 중건된 적이 있지만 1899년(대한제국 광무3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새로 복원한 것입니다. 조선후기 다포계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정면의 화려한 용두 장식이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계단섯 소맷돌 양쪽에 조각된 사자머리 한쌍은 전각 수호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현판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썼습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1840년 제주도로 귀양가다가 대흥사에 들러 대웅보전 현판을 새로 써서 이광사의 현판 대신 걸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후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자신이 썼던 편액을 떼어내고 이광사의 편액을 다시 걸게하였습니다. <안내판참조>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은 대흥사의 중심법전으로 대흥사 북원(北院)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대웅보전의 앞뜰 좌측에 대향각(大香閣)과 우측에 백설당(白雪堂)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참고사진>


 건물 외부 귀기둥을 제외한 전면 기둥 상부에는 용두(龍頭)를 새기고 쇠서[牛舌]에도 연꽃을 새겨 조선후기적 특징을 보입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측면


건물 전면은 모든 칸이 2분합의 두툼한 빗살문을 달았고 측면과 배면에는 상부에 팔상도와 법당을 수호하는 사천왕도를 벽화로 장엄하였습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


이 현판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서화가인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인근 신지도에서 귀양살던 때의 글씨입니다. 대흥사에는 대웅보전 외에도 침계루, 원종대가람, 천불전 현판의 글씨가 그의 작품입니다.



대흥사 대웅보전의 현판에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와 추사(秋史) 김정희( 金正喜: 1786~1856)와의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추사(秋史) 김정희( 金正喜) 자화상          <참고사진>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초상화


헌종6년(1840) 제주도로 귀양가던 길에 초의선사(草衣先師)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렀던 김정희는 이광사 글시의 '촌스러움'을 타박하며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8년 뒤 김정희는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오다가 다시 대흥사에 들렀습니다. 이때 햇수로 9년에 걸친 춥고 서글픈 귀양살이 속에서 인생관이 바뀐 김정희는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찾아 걸도록 했다고 합니다. <답사길잡이 발췌>




 대웅보전(大雄寶殿) 불단(佛壇)


건물 안 불단에는 목조삼존불(木造三尊佛)이 봉안돼 있습니다. 삼존불은 중앙의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약사여래, 아미타여래를 모셨는데 목조상은 조성 시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 양식도 서로 다릅니다. 약사, 아미타상 복장(伏藏)에서 발견된 <법당당주석가약사미타삼존소성복장기(法堂堂主釋迦藥師彌陀三尊塑成腹藏記)>에 따르면 약사와 아미타불은 1612년에 9명의 조각승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석가모니불은 그로부터 십 수 년 뒤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삼불회도(三佛會圖) <참고사진>


불단 상부 후불벽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봉안한 그림 삼불회도(三佛會圖)가 걸려있습니다.


 

대웅보전 내부 불화 <참고사진>


대웅보전 내부 좌우로 20세기 초 대흥사 불화 조성에 참여한 명응환감(明應幻鑑), 예운상규(禮芸尙奎)와 그의 권속들이 그린 아래의 삼장탱ㆍ신중탱ㆍ칠성탱ㆍ감로탱 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신중탱화(神衆幀畵) <참고사진>


                              불교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들을 묘사한 불화.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참고사진>


삼장보살은 천장보살(天藏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 지지보살(持地菩薩)을 일컫는 것으로 세 보살의 회상(會上)을 그린 불화입니다.


                          칠성탱화(七星幀畵) <참고사진>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여래와 좌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모신 탱화 


                           감로탱화(甘露幀畵) <참고사진>


영혼(靈魂)을 천도(薦度)하는 불교의식(佛敎儀式)에 사용된 조선시대 불화로 중생들에게 교화를 주고자 지옥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대웅보전 내부의 기둥  휘어진채 사용하여 부처님의 전당에 자연스러움을 더하였습니다.



대웅보전 내부는 이단층의 우물천장을 가설하고 그 내부에 반자와 운궁형 닫집을 조성한 화려한 불전으로 장엄함을 나타내었습니다.



 천장 상부에 서수(瑞獸)를 탄 동자들이 비천(飛天)하는 목조각이 장엄되어 있습니다.


 돌사자


계단 소맷돌에 두 눈을 부릅뜬 돌사자머리 한 쌍이 노려보고 있습니다. 나쁜 기운들의 접근을 막아주기 위해 설치된 돌사자머리는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한 것으로 귀신상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돌사자머리                                                               돌짐승 <참고사진>


   대웅보전 기단 모서리에는 잘 알볼 수 없는 돌짐승이 쇠고리를 입에 물고 있습니다. 용도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주련(柱聯)


   


         佛葉難鳴樹摩能(불섭난명수마능): 부처님, 가섭, 아난, 마명, 용수, 달마, 혜능 조사님이시여
         威光徧照十方中(위광변조시방중): 위엄의 빛이 시방을 두루 비추니,
         月印千江一體同(월인천강일체동): 일천 강에 달이 비치어도 모두가 하나이다.
         四智圓明諸聖士(사지원명제성사): 사지에 밝으신 모든 성현들이
         賁臨法會利群生(분림법회리군생): 분연히 법회에 임하여 군생을 이롭게 하시네.
         華阿方般法涅呪(화아방반법열주): 화엄경, 아함경, 반야경, 방등경, 법화경, 열반경과 주문이라



대웅보전 앞 석등(石燈)



백설당(白雪堂)



백설당(白雪堂), 무량수각(無量壽閣)


대웅보전 중정(中庭)의 우측에 자리잡은 승방으로 대흥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요사채입니다. 대흥사 스님들이 모여 공양과 정진수행을 하는 대중법요의 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대중방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백설당은 ‘트인 ㅁ자’형 건물로 6칸의 큰방과 큰 부엌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립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대웅보전보다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1899년(광무3) 10월 서상실(西上室)의 화재로 2년 뒤인 1901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백설당(白雪堂), 무량수각(無量壽閣)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조선말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며 구한말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로 일제에 적극 협력해 1910년 일제로부터 자작직위를 받았습니다.



신해당(信解堂)



 신해당(信解堂)


 백설당(白雪堂) 및 정행당(正行堂)과 맞닿아 있는 건물로 믿음으로 닦는다는 뜻을 가진 재가불자들과 대중들의 요사채입니다.




정행당(正行堂)



정행당(正行堂)


백설당 옆에 있는 건물로 올바른 행을 닦는다는 뜻을 가진 재가불자들과 대중들의 요사채입니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冥府殿)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지장보살은 부처가 될 수 있음에도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보살로 남아있는 보살입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열왕을 모시고 있어서 시왕(十王)전, 지장전, 쌍세전이라고도 불립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식 맞배지붕 건물은 1899년 북원 일곽의 화재 뒤 20세기 다시 건립된 것으로, 1901년 지장탱의 봉안과 함께 시왕과 명부권속들이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명부전(冥府殿) 현판


명부전(冥府殿) 현판은 구한말 서예가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의 글씨로,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일 때 대흥사와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명부전(冥府殿) 내부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으로 처리하고,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의 삼존을 중앙 불단에 봉안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 뒷면에는 1901년 금어 경선응석(慶船應釋)이 그린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명부전(冥府殿) 내부


건물 내부에는 ‘ㄷ’자형의 불단을 만들어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과 판관, 녹사, 사자 등 여러 명부의 권속들을 정렬하게 배치하고 있습니다.



대향각(大香閣)



 대향각(大香閣) 동쪽면: 침계루를 지나 대웅보전의 중정에 들어서면 우측에 있는 전각입니다


                                              대향각(大香閣) 현판


현판 글씨는  취묵헌(醉墨軒) 인영선(印永宣, 1947~)선생이 썼습니다. 선생은 천안을 기반으로 활동 중이며 일중 김중현(1921~2006)선생으로부터 작품을 인정받은 전국을 대표하는 서예가 중 한사람입니다.


 대향각(大香閣), 서쪽면



윤장대(輪藏臺)




                             윤장대(輪藏臺) <참고사진>

대웅보전 옆에는 소승불교와 관련된 유물인 윤장대(輪藏臺)가 있습니다. 소승불교 국가의 옛날 사람들 상당수는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경전을 보기도 어려웠거니와 경전이 있다 하더라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련해 놓은 것이 윤장대입니다. 이 윤장대를 한 바퀴 돌리면 경전 한 면을 읽은 것과 똑같은 공덕을 쌓은 것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응진당(應眞堂)과 산신각(山神閣)



응진당(應眞堂)과 산신각(山神閣)


대웅보전 좌측에 자리한 이 건물은 왼쪽으로부터 응진당, 산신각을 한 채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합니다. 전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응진당(應眞堂)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획되고, 산신각(山神閣)은 정면 2칸, 측면 3칸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사이 판장으로 담을 쌓고 출입에 용이하도록 쪽문을 달아 놓았습니다.




 응진당(應眞堂)과 산신각(山神閣) 현판: 건물에는 응진당(應眞堂)과 산신각(山神閣) 두 기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응진당(應眞堂): 현판은 명부전과 백설당의 현판을 쓴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응진당(應眞堂)


정면 3칸, 측면 3칸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 상부에 연등천장을 가설하고 불단을 설치한 모습으로, 천장 상부에는 구름 위를 비천하는 청룡과 황룡도가 장엄되어 있습니다. 응진당에는 목조석가삼존[석가부처님을 중심으로 문수, 보현보살]과 16나한, 판관, 사자, 인왕을 권속으로 모시고, 그 후면에 석가모니후불탱과 16나한탱, 사자탱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에게는 16제자인 16나한(羅漢)이 있는데 '모든 중생들의 은공에 응할 수 있다'고 해서 응진당(應眞堂)이라 이름 지어졌습니다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은 불교가 전파되면서 각 지역에 있었던 신(神)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건물입니다. 우리나라의 향토신(鄕土神)은 산신령(山神靈)으로 산신령은 호랑이를 부린다 해서 호랑이와 함께 그려집니다. 중국의 향토신은 칠성신(七星神)입니다.



산신각(山神閣)의 현판은 초의선사(草衣先師)의 글씨입니다.


 산신각(山神閣)


정면 2칸, 측면 3칸 건물 내부는 연등천장 상부에 황룡과 청룡도를 단청하고, 불단 위에 1901년 조성된 산신탱화(山神幀畵)와 독성탱화(獨聖幀畵)를 봉안하였습니다. 독성(獨聖)이란 불교계에서는 홀로 진리를 깨치고 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는 나반존자(那畔尊者)를 지칭합니다.



응진전앞 삼층석탑(應眞殿前 三層石塔): 보물 제320호



응진전앞 삼층석탑(應眞殿前 三層石塔) 보물 제320호


대흥사내 유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통일신라 9세기 후반기의 석탑으로 추정됩니다. 이 탑의 규모는 좀 작으나 세련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으며 마치 몇 년 전에 만들어진 것처럼 돌의 색깔이 무척 밝습니다. 1967년 1월 보수공사 때 기단 안에서 높이 12cm의 동조여래좌상(銅造如來坐像) 1구(軀)가 발견된 바 있습니다.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입니다. 아래, 위층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습니다. 지붕돌은 처마가 두껍고 윗면은 경쾌한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습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으로 몸돌로 보일만큼 큰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등이 올려져 있습니다.



청운당(靑雲堂)



 청운당(靑雲堂)


산신각(山神閣) 좌측에 자리한 청운당(靑雲堂)은 스님 및 재가 종무원들의 대중방으로, 현재 요사채 및 스님들 후원(後院)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전후에 툇마루를 놓았습니다.


                                              청운당(靑雲堂) 현판


건물 외부에는 ‘청운당(靑雲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글씨는 호남의 대표적 서예가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이 썼습니다. 서예가 이돈흥 선생은 담양 출신으로 약관의 나이에 입문하여 한국서예의 전통을 계승한 서예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건물 내부에는 감실형 불단 위에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석가모니후불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선방(禪房)으로서 내부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 남원구역(南院區域)



 

남원구역(南院區域) <google 참고사진>





보호수 느티나무와 연리근(連理根)



                        보호수 느티나무




 보호수의 연리근(連理根)




가허루(駕虛樓)



  가허루(駕虛樓)



가허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정면 중앙 통로를 제외하고는 좌우측에는 돌벽을 쌓았습니다.


가허루(駕虛樓) 뒷면


건물의 중앙은 통로로, 나머지 공간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으며, 뒷면 창고의 문은 판장문으로 단장하였습니다.


 가허루(駕虛樓)


가허루는 사찰의 중심에 있는 천불전(千佛殿)의 출입문입니다. 휘어진 자연목으로 만든 문지방을 넘어 짧은 통로를 지나가면 천불전(보물 제1807호)을 비롯해 용화당, 봉향각, 승방 등이 나옵니다.


                                                 

                                                  가허루(駕虛樓) 현판


‘가허루(駕虛樓)’라는 글씨는 조선 후기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썼습니다. 젊어서 다른 사람들의 글씨를 폄하하던 추사의 만용은 자기보다 16살이나 나이가 많은 창암에게도 씌워졌습니다. 추사는 창암의 글씨를 보고 ‘밥은 먹고 살만한 서생의 글씨’라고 무시했습니다.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추사는 그 일을 후회했습니다. 창암의 글씨에도 나름대로의 혼과 뛰어남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제주 귀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추사는 사과 하기위해 창암을 찾았지만 창암은 이미 죽은 뒤였습니다.



누각(樓閣) 건물은 2층에 빈 공간이 있는 건물을 말하는데, 2층 공간이 없는 단층 건물을 가허루(駕虛樓)라 이름 지어진 것이 특이합니다. 그것은 휘어진 나무를 이용해 문지방을 땅으로부터 떠있게 만들어 휘어진 문지방을 1층으로 보고 그 위의 건물을 2층으로 여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천불전(千佛殿)




천불전(千佛殿): 보물 제1807호


천불전은 보물 제1807호이며 조선 순조11년(1811)에 불탄 것을 완호(玩虎)스님이 순조13년(1813)에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정면3칸, 측면3칸 규모의 팔작(八作)지붕, 다포(多包) 계통의 목조건물로서 높이 쌓인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졌습니다.


                  



천불전(千佛殿)


건물 앞면의 창살문에는 정교(精巧)한 국화무늬(菊花紋), 연화무늬(蓮華紋)의 꽃살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는데 중앙칸은 3짝, 좌우협칸(左右夾間)은 2짝입니다.
 

                                        천불전(千佛殿) 현판(懸板)

 

                           ‘천불전(千佛殿)’이라는 글씨는 조선 후기의 명필 원교(圓嶠)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썼습니다


  천불전(千佛殿)

 

천불전이란 과거에도 천불, 현재에도 천불, 미래에도 천불이 삼세(三世)에 거쳐 이 세상에 출현한다는 것으로 어느 때나 무한한 부처님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세워진 건물입니다. 즉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나타낸 것이 천불인 셈입니다.


                                        천불전(千佛殿) 주련(柱聯): 1917年 오인당 안규동 친필




                                    世尊坐道場(세존좌도량): 세존께서 도량에 앉아계시니

                                    淸淨大光明(청정대광명): 청정한 대광명을 놓으시네

                                    比如千日出(비여천일출): 비교하건대 마치 천 개의 해가 뜨는 것같이
                                    照耀大千界(조요대천계): 대천세계 밝게 비추시네



 석조천불상(石造千佛像)


천불상(千佛像)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이며, 법당 중앙에는 목조 석가모니 부처님과 좌우로는 문수, 보현보살이 모셔져있고, 그 주위에 옥석으로 조각한 천개의 작은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이 천불은 순조13년(1813) 천불전을 중건한 완호(玩湖)스님이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대사(楓溪大師)에게 의뢰해 경주 불석산에서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6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석조천불상(石造千佛像)에 얽힌 일화(逸話)


경주에서 조성된 천불(千佛)을 2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순조 17년(1817년) 정축(丁丑) 11월 18일 경주 장진포를 출발하여 울산을 거쳐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항해 도중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의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에 표착하였습니다. 이 배에는 768여구의 옥불을 싣고 있었습니다.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불상들이 대도포(大島浦) 현감 꿈에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 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현몽하자 현감은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확인한 후 그 다음 해 7월14일 대둔사(대흥사)로 돌려보내게 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옥불을 돌려보내기 아쉬워 불상 밑면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1821년에 풍계현정 스님이 저술한『일본표해록』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천불전에 안장된 옥불상들은 경상도지역 신도들의 꿈에 나타나 '가사(袈裟: 부처님과 스님들께서 입는 옷을 칭함)를 입혀달라'고 하여, 불자들은 서둘러 가사를 만들어 4년마다 새것으로 입혀 드리게 되었습니다. 천불(千佛)께서 입으셨던 가사를 신도들 가정에 소장하게 되면 온갖 근심과 걱정 장애가 없어지고 지극 정성으로 염원하는 마음속의 소원이 꼭 성취되는 영험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석조천불상(石造千佛像)


천불은 19세기 불상으로 모두 불신(佛身)에 회칠로 장엄되어 있으며, 일률적인 자세로 신체에 비해 상호가 큼직한 모습입니다. 상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아한 모습이며, 귀를 특히 크게 표현하였습니다. 나발에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모두 표현된 25cm정도의 소형불상과 중앙계주(中央髻珠)가 큼직히 솟은 중형불상으로 구분됩니다.


 천불전(千佛殿) 꽃창살 연화문


건물 앞쪽 문에는 정교한 국화무늬, 연화무늬의 꽃살분합문을 달아 화려하게 보이도록 치장하였습니다.


천불전(千佛殿) 뒷면 벽화

 

겉 벽면 3면에 걸쳐 심우도(尋牛圖 : 소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소를 찾을 수 있다)와 대행보현보살(大行普賢菩薩), 대지문수보살(大智文殊菩薩)등 15개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봉향각(奉香閣)



 봉향각(奉香閣)



                                              

                                     봉향각(奉香閣) 현판



용화당(龍華堂)



 용화당(龍華堂)


용화당(龍華堂)은 대흥사 천불전 서쪽에 있는 요사(寮舍)로 정면 8칸, 측면 3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이며 익공양식으로 매우 단조로운 건물입니다. 승려의 교육학당인 강당 겸 선방(禪房)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가 1811년(순조 11)에서 1813년에 준공하였으며, 그 뒤 이용에 편리하도록 증축된 부분이 있습니다.



                                     용화당(龍華堂) 현판


용화당(龍華堂) 현판 글씨는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가 썼습니다. 그는 서화협회회장,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안진경(顔眞卿). 황정견(黃庭堅)의 서법을 익혀 예서, 해서에 특히 뛰어났습니다.



적묵당(寂默堂)



적묵당(寂黙堂)


남원(南院)공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관음전(觀音殿)과 용화당(龍華堂) 사이로 진입하여 계단을 오르면 적묵당(寂黙堂)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google 참고사진>


적묵당(寂黙堂)


적묵당(寂黙堂)을 중심으로 정진당(精進堂)과 세심당(洗心堂)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으며. 좌측으로 일로향실(一爐香室)이 있습니다. 원래 서산대사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적묵당(寂黙堂) <참고사진>


적묵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주심포 건물입니다. 정면에는 3칸 모두 2짝의 분합문(分閤門)을 달았습니다.


                                            적묵당(寂黙堂) 현판 <참고사진>


                                  적묵당(寂黙堂)의 현판 글씨는 현대 서예가 죽암(竹菴) 정무남(鄭茂南) 선생이 썼습니다.


 적묵당(寂黙堂) 계단 옆 떨어진 동백꽃



정진당(精進堂)



정진당(精進堂) <참고사진>


정진당은 대흥사 남원 영역의 세심당 맞은편에 위치하며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진당(精進堂) 현판 <참고사진>


                                                 정진당(精進堂) 현판 글씨는 서예가 김용운(金容云) 선생이 썼습니다.





세심당(洗心堂)


세심당(洗心堂) <참고사진>


세심당(洗心堂)은 정면 5칸 맞배지붕 건물로 사찰을 방문한 재가불자(在家佛者)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심당(洗心堂) 현판 <참고사진>


세심당(洗心堂)의 현판 글씨는 금초(金艸) 정광주(鄭侊柱)선생이 썼습니다. 속세에 찌든 마음을 씻어내기에 좋은 곳이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일로향실(一爐香室)




일로향실(一爐香室) <참고사진>


천불전(千佛殿) 뒤쪽 축대 언덕에 자리한 일로향실(一爐香室)은 현재 주지스님의 요사채로 막돌과 힌줄눈 담장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일로향실(一爐香室)은 차를 끓이는 다로(茶爐)의 향이 향기롭다는 의미입니다.

                 

일로향실(一爐香室) <참고사진>


                    




                일로향실(一爐香室) 현판 <참고사진>


조선 제일의 명필인 추사(秋史)의  ‘일로향실(一爐香室)’이라는 현판은 초의선사와 인연이 있는 추사가 대흥사에 들러 써준 글씨로, 예서(隸書)로 쓴 힘찬 필획과 자유로운 짜임새를 통해 추사체의 특징을 살필 수 있습니다. 특히 ‘일로향실’이라는 현판은 양산 통도사를 비롯하여 구례 천은사 등 많은 대찰에 그 모각본이 전해집니다.


 

관음전(觀音殿)



 관음전(觀音殿)/관음33응신전(觀音三三應身殿)


관음전(觀音殿)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관음전(觀音殿) 대신 ‘관음 33응신전(觀音三三應身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관음전에는 33응신(三三應身)을 관세음보살님 후불탱화 4폭에 담아 봉안하였습니다. 사찰에 따라 조각상으로 봉안 한 경우도 있습니다.


 관음전(觀音殿)/관음33응신전(觀音三三應身殿)


‘관음 33응신전(觀音三三應身殿)’이란 고통과 고난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은 때와 장소, 까닭을 막론하고 중생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몸을 바꾸어 나타나 중생을 구해주신다고 합니다. 이를 응신(應身)이라 하며 응신의 수는 경전에 따라 32신 또는 33신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관음전(觀音殿)/관음33응신전(觀音三三應身殿) 내부


내부에는 중앙 어칸에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을 모셨으며 그 좌우로는 33응신을 4폭의 관세음보살 후불탱화로 봉안하였습니다.


관음전(觀音殿)


                                                                          관음33응신도(觀音三三應身圖) <참고사진>



무염지(無染池)



무염지(無染池)


초의선사가 조성한 무염지(無染池)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 이라는 이름의 연못입니다. 실용면에서는 '향로봉의 화기를 막는다'는 풍수에 근거하고 있으며 실제로 화재시 물 공급지의 역할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특히 무염지의 전체적인 배치는 굴곡모양 연못과 중심에 위치하지 않은 작은 섬을 만들어 놓아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보이며, 특히 절에서 바라보면  마음 '심 (心)자 모양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사리탑(舍利塔)



사리탑(舍利塔): 안내판이 없어 누구의 사리탑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대흥사 남원에 위치한 사리탑



만월당(滿月堂)



 만월당(滿月堂): 강당, 회의실, 공양간 등의 용도로 사용



                                                    만월당(滿月堂) 현판 <참고사진>



심검당(尋劍堂)




  심검당(尋劍堂): 요사채로 사용 <참고사진>



문수전(文殊殿)




문수전(文殊殿) <참고사진>


대흥사의 남원(南院) 쪽, 사찰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 불전인 문수전입니다. 가까이에 보현전(普賢殿)이 있습니다.



                               문수전(文殊殿) 현판


                                             문수전(文殊殿) 현판 글씨는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선생이 썼습니다.



보현전(普賢殿)



보현전(普賢殿) <참고사진>


대흥사의 남원(南院) 쪽, 사찰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 보현전.  정면 7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조성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가까이에 또 다른 신생불전인 문수전이 있습니다. 안에는 석가모니 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보현전과 그 앞마당에서는 학술강연, 산중총회, 연수교육, 작은 음악회, 녹차관련 행사, 수련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보현전(普賢殿) 현판


                                             보현전(普賢殿)현판 글씨는 운암(雲庵) 조용민(趙鏞敏)선생이 썼습니다.




▣ 별원구역(別院區域): [표충사구역 + 대광명전구역 + 성보박물관]




 별원구역(別院區域) <google 참고사진>


 [별원 구역] = [표충사] + [대광명전구역] + [성보박물관]





초의선사상(草衣禪師像)



 초의선사상(草衣禪師像)


 초의대선사상(草衣大禪師像)


초의선사는 오른손에 주장자(柱杖子)를 들고 왼손에는 염주를 잡은 채 앉아 있습니다. 스님 앞에는 찻사발이 놓여 있습니다.




                                                            초의선사의 발자취


지금 우리는 우리에게 선(禪)과 차(茶)를 통하여 민족정신문화의 향기를 심어준 초의 스님(1786-1866)과 만나고 있습니다.

초의의순(草衣意洵)스님이 태어나신 조선 정조 때는 독자적인 민족문화를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시기로,  스님은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함께 새로운 정신문화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사회사상가로서 초의스님은 우리 민족문화의 독자성을 추구했던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하며 1천 4백여 년의 역사속에 남긴 심오한 불교사상과 실학사상의 만남을 주선했습니다. 불교와 실학사상의 만남은, 조선시대의 가장 활발한 민족문화의 표출이자 사회변혁 운동이었던 실학사상이 꽃을 피울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다음은 한 사람의 차인(茶人)으로서 조선의 유교문화와 중국 차에 밀려 그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한국차를 오늘까지 이어지게 한 다도의 중흥조라는 점입니다. 초의스님은 대둔사와 그 부속암자인 일지암에 머무시면서 한국차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동다송'을 편찬하여 우리 차문화의 역사와 우수성을 복원해 내셨습니다. 초의스님은 또 단순한 역사의 복원뿐만 아니라 차를 손수 만들어 당대 사상가들에게 한국차의 정신과 맛을 알게 했습니다. 선과차의 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스님의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과 맛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걸출한 예술인으로서 초의스님은 글(詩), 글씨(書), 그림(畵)에도 탁월한 경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세속의 티를 벗어난 시문은 군더더기 없이 심오한 세계를 맑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글씨에도 탁월하여 초의스님은 범서(범서, 인도의 산스크리스트어 문자)는 모든 서예가들 사이에서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선필(禪筆)을 간직했습니다. 또한 스님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소치 허유(小痴許維)는 초의스님 문하에서 시와 그림을 배워 오늘날 남도(南道) 남종화(南宗畵)의 큰 맥을 이루어냈습니다.

초의스님은 또 숭유억불의 가혹한 탄압으로 쇠락해 가는 조선불교계의 맥을 오늘에 되살린 불교계의 큰 스승이셨습니다. 특히 백파선사의 선사상(禪思想)을 논박한 '선문사변만어'는 19세기 선사상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저술로서 당시대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스님은 자신의 사상을 담은 몇 권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현존하는 저술을 살펴보면 여러 문사들과 교류하며 주고받은 시를 묶어놓은 '일지암시고'와 스님이 지은 소(疏), 기(記), 서(序), 발(跋), 문(文)이 함께 수록된 '일지암 문집' 을 비롯하여, '동다송', 다신전(茶神傳), '문자반야집', '초의시고', '초의선과', '선문사변만어', '진묵조사유적고', '대둔사지' 등이 있습니다. 이같은 저술들은 하나같이 당시대 불교사상과 사회사상의 핵심을 담고있는 중요한 저서들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쌓아올린 아름다운 정신의 향기는 이렇게 천리와 만리를 가고 시공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지금 서있는 대둔사와 일지암은 그 분의 정신이 오롯이 담긴 곳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분이 남긴 향기와 멋을 느껴보십시오.


                    불기 2543년 10월 29일.     대둔사 주지 보선  글짓고, 한국제다 대표 서양원 세움




동다송비(東茶頌碑)



 동다송비(東茶頌碑)


대흥사 성보박물관 뜰에 있는 동다송(東茶頌)이 새겨진 동다송비(東茶頌碑)입니다. 초의선사(草衣禪師)가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에서 40여년 동안 머물며 정리한 한국 다도의 고전으로 중국차와 한국차의 특징, 차 끊이기, 차 마시기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동다송비(東茶頌碑)


동다송비는 길이 8m 높이 3m 너비 1.3m로 바탕돌과 지붕돌을 화강석으로 올리고, 검은 몸돌에는 동다송 31송의 원문과 비석 건립의 의의를 새겼습니다.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성보박물관은 서산대사 휴정의 유물(보물 1357호)을 전시하기 위하여 1978년에 문을 연 공간입니다. 유물관 안에는 서산대사가 쓰던 바루, 칠보염주, 신발 등을 비롯하여 승병을 이끌며 사용했던 승군단 표지, 소리나팔, 호패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 서산대사에게 내려진 선조의 교지와 친서, 금병풍 등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고려 후기 양식의 탑산사 동종(보물 88호)과 조선시대 양식의 태극무늬 동종 등도 있습니다.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현판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현판 글씨는 목도인(木道人) 전종주(全鍾柱)선생이 썼습니다.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박물관 입구로 들어서면 초의선사 화맥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초의선사 화맥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의 축소본

















 왼쪽부터 천불전 천왕도(1794년), 천불전 신중탱(1819년), 대광명전 칠성탱(1845년)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1547호)


             탑산사 동종(보물88호)


선조(宣祖)가 서산대사에게 하사한 목발우 및 수저


                  괘불탱(영산회상도)


 괘불함



표충사구역(表忠祠區域)  



                표충사 구역



표충사구역(表忠祠區域)




호국문(護國門)



호국문(護國門)


서산대사를 모시는 사당인 표충사(表忠詞)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으로 가운데 문을 좌우의 문보다 한 단 높게 세운 솟을삼문으로 지어졌습니다. 가운데 정문은 혼령이 다니는 문이라 하여 제사 지낼 때만 열어두고 사람들은 양쪽 협문으로 다닙니다. 서산대사의 호국 의식을 기리기 위해 호국문(護國門)이라 하였습니다.


                                  

                                  호국문 현판   

   

                               표충사 호국문(表忠祠 護國門)현판 글씨는 심거(心居) 임병근(林秉根)선생이 썼습니다.


장군샘


표충사 호국문 앞에는 장군샘이라 불리는 작은 샘이 있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합니다. 이 우물은 해마다 한번씩 솟구쳐 올랐는데, 자정무렵 물이 소용돌이치며 솟구쳐 오를 때 어떤 스님이 이 물을 마시고 모든 병을 고쳤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약을 다리고 차를 끓이는데 이 물을 최고로 여겼고, 장군샘이라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윤선도가 이곳 승려들의 지혜와 기력을 보고 능히 장군을 낳을 샘이라 하여 매일 길어다 마신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장군샘 <참고사진>





의중당(義重堂)



 의중당(義重堂)


표충사 일곽의 삼문인 호국문을 지나 맨 먼저 마주치는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건물입니다. 의중당은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당시 6군의 군수가 봄, 가을로 표충사에 제사지낼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차리던 곳입니다.


                                              의중당(義重堂) 현판



의중당(義重堂) 뒷면


호국문을 지나면 바로 보이는, 의중당(義重堂)의 뒤편 모습입니다.



보련각(寶蓮閣)




 보련각(普蓮閣)


고승들의 영정이 봉안된 정면 9칸 맞배지붕 건물의 누각 형태로 세워진 보련각(普蓮閣)입니다.


보련각(寶蓮閣)


                                              보련각(寶蓮閣) 현판


                               보련각(寶蓮閣) 현판은 일설에 따르면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선생이 섰다고 전합니다.



명의재(明義齋)



명의재(明義齋)


명의재는 스님들의 요사채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건물 외부는 자연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전후 툇마루를 가설하고 있으며, 배면 어칸에는 송파(松坡)가 흑지에 백서로 쓴 ‘명의재(明義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명의재(明義齋) 뒷면 <참고사진>


                                  명의재(明義齋) 현판은 송파(松坡) 이희풍(李喜豊, 1813-1886)선생이 섰다고 전합니다.




강례재(講禮齋)


강례재(講禮齋)


강례재는 현재 대흥사 삼직 스님[총무, 재무, 교무 등 세 스님]들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으며,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었습니다. 전면에는 양각된 ‘강례재(講禮齋)’, ‘화장법해(華藏法海)’라는 두 기의 현판이 흑지에 백서로 단장되어 있습니다.


 ‘강례재(講禮齋)’, ‘화장법해(華藏法海)’ 두 기의 현판


                                       강례재(講禮齋) 현판


                         화장법해(華藏法海) 현판


'불법(佛法)으로 충만한 곳'이라는 뜻의 현판 '화장법해(華藏法海)'는 일본 자작 작위를 받고 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낸 을사오적 경농(經農) 권재형(權在衡, 1854-1934)이 썼습니다.



강례재(講禮齋)  <참고사진>



예재문(禮齊門)



예재문(禮齊門)


서산대사를 모시는 사당인 표충사(表忠詞)에 들어가는 두 번째 문으로 가운데 문을 좌우의 문보다 한 단 높게 세운 솟을삼문으로 지어졌습니다. 가운데 정문은 혼령이 다니는 문이라 하여 제사 지낼 때만 열어두고 사람들은 양쪽 협문으로 다닙니다. 예재문(禮齊門)은 예의와 삼가함을 지켜야 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제문(禮齊門) 현판


외삼문(外三門)인 호국문과 내삼문(內三門)인 예제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표충사(表忠祠)와 표충비각(表忠碑閣)이 나옵니다.



표충사(表忠祠)



표충사(表忠祠)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으로서  유정, 처영스님과 함께 왜적 퇴치에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를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 현종 10년(1669년)에 건립되었으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입니다. 이곳에는 정조13년(1789)에 정조대왕이 직접 쓰고 하사한 '表忠祠(표충사)'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표충사 현판 옆에는 '임금의 글씨가 있는 집'이라는 뜻에서 별도로 '御書閣(어서각)' 현판을 하나 더 걸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세금을 면제하는 특혜를 주었습니다. 이후 관아의 보호를 받으면서 선암사(仙巖寺), 송광사(松廣寺)와 견줄만한 지위로 향상되었습니다.


                              

                                表忠祠(표충사): 정조(正祖)의 글씨


표충사(表忠祠)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건물로 장대석 기단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836년에 다른 곳으로 이건되었다가 1860년 10월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고, 상량문은 초의선사(草衣先師)가 썼습니다. 건물 외부는 자연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전면에 2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하고 측면과 배면은 판벽으로 마감하였는데  단조로운 채색의 단청으로 사당의 위엄을 갖추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처영스님, 서산대사, 휴정스님



표충사 건물 내부 중앙에는 서산대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고, 양쪽으로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란 때 많은 업적을 쌓은 사명당 유정(泗溟堂 惟政) 스님과 뇌묵당 처영(雷默堂 處英 ) 스님의 진영을 모셨습니다. 유가(儒家) 형식의 사당을 꾸며 매년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례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표충비각(表忠碑閣)




표충비각(表忠碑閣)


御書閣(어서각) 현판 오른쪽에는 오래된 비석 둘과, 그 두 비석을 보호하는 표충비각(表忠碑閣)이 서 있습니다. 두 비석에는 서유린(徐有隣, 1738∼1802)이 정조15년(1791)에 지은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명(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銘)'과,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 스님이 정조16년(1792)에 지은 '건사 사적비명(建祠事蹟碑銘)'이 각각 새겨져 있습니다. 비각 건물은 1860년 표충사를 이건할 때 세운 것입니다.


표충비각(表忠碑閣)



                                                   표충비각(表忠碑閣) 현판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 <참고사진>


서산대사 입적 후 187년이 지난 시점인 1791년에 대사를 기리는 표충사를 건립하고 세운 비석입니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서산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이고, 호가 서산(西山)이며, 혹 청허자(淸虛子)라고도 합니다. 속성(俗姓)은 최씨이고 안주(安州) 사람인데, 10에 부모를 여의고서 출가하여 20세에 수계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 임명하자 제자인 유정(惟政), 처영(處英) 등과 함께 승병 5천여 명을 규합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대사의 행적에 관해서는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와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비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604(선조 37)에 세수 85, 법랍 65세로 입적하였는데, 임종 시 제자들에게 사후에 의발(衣鉢)을 반드시 해남으로 보내달라고 유언하였습니다. 대사가 입적한지 185년이 지난 1788(정조 12)7세 법손인 천묵(天黙) 등이 해남 대둔사 남쪽에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편액을 써 줄 것을 조정에 청하자 정조가 표충(表忠)’이라고 사액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영남에는 서산의 제자인 유정을 기리는 표충이라는 사당이 먼저 있었으니, 이제 비로소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영남과 호남 천리 안에서 서로 성대하게 사당에 향사되게 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문화재청자료>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




'건사 사적(建祠事蹟碑)'



                                        건사 사적비(建祠事蹟碑) <참고사진>


이 비는 1792년(정조 16)에 세워진 것으로, 서산대사를 배향하는 표충사가 세워지기까지의 내력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서산의 6세 법손인 연담 유일(蓮潭有一)이 글을 짓고, 응운 등오(應雲登旿)가 글씨를 썼습니다. 비문에 의하면 1788년(정조 12년)에 대둔사의 승려 천묵(天黙)과 계홍(戒洪) 등이 한양에 올라와서, 서산대사가 승병을 가장 먼저 주장하였으면서도 배향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상언(上言)하였습니다. 이에 조사를 맡은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사실을 조사하여 정조에게 아뢰자 정조가 사당을 지을 것을 윤허하고 ‘표충(表忠)’이라고 사액(賜額)하는 한편,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고 합니다.


 

                                                                              건사 사적비(建祠事蹟碑)




조사전(祖師殿)




조사전(祖師殿)


표충사당 좌측편에 조사전(祖師殿)이 있습니다. 조사전은 3단의 바른층쌓기 방식의 장대한 기단 위에 단촐하게 세워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심포계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건물 외부는 다듬어진 2단의 원형 초석 상부에 두리기둥을 세워 전면 1ㆍ2분합의 격자창호로 장엄하고 있으며, 건물 내부는 3폭의 조사진영(祖師眞影)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조사전(祖師殿) 현판


                                  현판 글씨는 대흥사 현판 중에서 유일하게 한글서체이며, 봄샘 박정자선생이 썼습니다.



건물 내부의 진영(眞影)은 창건주 아도조사(阿度祖師)를 비롯하여 대흥사 13 대종사와 13 대강사의 진영을 모신 3폭으로 구분되는데, 6명(1폭)ㆍ5명(2폭)으로 2단 구성 아래 진영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 대광명전구역(大光明殿區域)




대광명전(大光明殿) 구역


표충사 뒤편으로 300미터쯤 들어간 곳에 호젓하게 자리한 대광명전(大光明殿)은 현재 선원(禪院)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수심당(修心堂)



 수심당(修心堂): 선방스님들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입니다.




대광명전(大光明殿)



대광명전(大光明殿)




대광명전(大光明殿)


대광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갖는 익공양식의 매우 단아한 건물입니다. 건물 정면의 창호는 어간에는 3짝, 양 협간에는 2짝의 빗살창을 달았습니다. 천장은 종량 위로만 우물천장을 가설하였고 그 외에는 판자를 댄 빗천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법당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천장의 반자 단청문양과 공포 사이에 예스러운 벽화들이 은은한 고풍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수과정중 1841년초에 초의스님이 짓고 단청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대광명전(大光明殿) 현판


                       대광명전(大光明殿)현판 글씨는 추사의 제자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 1811-1884)선생이 썼습니다.





동국선원(東國禪院)



동국선원(東國禪院) <참고사진>


동국선원(東國禪院)은 정면5칸, 측면3칸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동국선원(東國禪院) 현판


동국선원(東國禪院)은 선방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곳으로서, 조선 제일의 명필인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이 쓴 ‘동국선원(東國禪院)’이라는 현판은 현재 주지스님 처소인 일로향실(一爐香室)에 걸려 있으며, 동국선원(東國禪院)에 걸려 있는 것은 복제품입니다.



벽안당(碧眼堂)



벽안당(碧眼堂): 스님들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입니다.


                                                   벽안당(碧眼堂) 현판



요사채(寮舍-)



요사채: 선방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곳


                                               




기타



09:30 / 대흥사 입구



 

                                                                13대종사도장(十三大宗師道場) 석비(石碑)



▶  대흥사(大興寺) 유선관(遊仙館) → 대흥사 버스정류장


09:37 / 피안교(彼岸橋)


09:38 / 유선관(遊仙館)


 09:39 / 백화암(白華庵)


백화암은 대흥사 소속 산내암자(山內庵子)로서 유선여관 건너편에 세워진 암자입니다. 이 암자는 본래 응송 박영희 스님의 집터였는데, 현재는 비구니 스님들이 거주하는 암자입니다.


09:41


09:45


09:45



09:46



09:47




09:48



09:54



09:56


10:05


10:07


10:07


10:09



10:10 / 두륜산대흥사 관광시설지(頭輪山大興寺 觀光施設地) 입구


10:13 / 도립공원관리사무소[대흥사버스정류장 건너편]


 10:13 / 대흥사버스정류장(두륜승강장) 도착


참고자료


 


▶  참고자료


대중교통 시간표


대흥사 → 해남(군내버스/약20~25분소요): 08:00 / 09:10 / 09:50 / 10:20 / 11:20 / 11:50 / 12:40 / 이하시간 생략

해남 → 미황사(군내버스/약40~50분소요): 06:15 / 11:10 / 14:05 / 17:00

미황사 → 땅끝마을(택시/약15~20분소요): \20,000.(송지땅끝택시 이용/ 12:45~13:05)

땅끝마을 → 해남(직행버스/약45분소요): 이전시간 생략 / 14:15 / 15:15 / 16:15 / 16:45 / 17:15 / 18:40

해남 → 서울(고속버스/약4시간30분소요): 08:00 / 09:30 / 11:00  / 14:00 / 15:30 / 17:30 (막차)


● 전화번호


해남터미널: 061-534-0881, 1666-0884

해남교통: 061-533-8825~6

해남금호고속: 061-534-0881~2

미황사종무소: 061-533-3521

송지땅끝택시: 061-533-2228, 2055

송지개인택시: 061-533-8150, 2159,  010-3624-8150

땅끝개인택시: 061-537-6100,  010-7149-6100

땅끝해남터미널: 061-535-4268

땅끝정류소: 061-533-4291







                                       대흥사(大興寺) / 해남(海南)-1

                          (2019.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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