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내소사)
전라북도 부안(扶安) / 능가산 내소사(楞伽山 來蘇寺)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大雄寶殿)
능가산 관음봉 기슭에 위치하는 내소사(來蘇寺)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惠丘頭陀) 스님이 이 곳에 절을 세워 소래사라 하였는데 창건 당시에는 대소래사, 소소래사가 있었으나 대소래사는 소실되었고 지금의 내소사는 소소래사가 남아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현존 사찰은 조선조 인조 11년(1633)에 청민선사(淸旻禪師)에 의하여 중건 되었으며 고종 2년(1865)에 관해선사(觀海禪師)에 의하여 중수 되었고, 그 후 만허선사(萬虛禪師)가 보수하였다. 당초의 소래사를 내소사로 부르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임진 왜란을 전후해서 내소사로 불러 온것으로 추정된다. 본 사찰에는 보물 제291호 대웅보전, 보물 제277호 고려동종이 있고 보물 제 278호 법화경절본사본은 전주시립박물관에 위탁 보관되어 있다. 부속 암자로는 청련암과 지장암이 있다. <내소사 안내판에서..>
~~~~~~~~~~~~~~~~~~~~~~~~~~~
내소사 전경 <자료사진>
일주문과 할머니 당산나무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할머니 당산나무 앞에서 내소사 스님들과 입암마을 사람들이 함께 당산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할머니 당산나무는 절 안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나무와 짝을 이룹니다.
내소사(來蘇寺) 일주문(一柱門) 현판
전나무 숲 길
일주문에 들어서면 150년 정도된 전나무 약 500여 그루가 600m 정도 길 가를 따라 쭉 이어집니다. 전나무 아래에는 산죽이 자라고 있어 그 청량함을 더하고 있습니다.
지장암(地藏庵) 가는길 지장암(地藏庵) <자료사진>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숲길을 따라 가다 오른쪽 조그마한 샛길로 약 200m 정도 들어가면 지장바위 아래 조용히 자리한 지장암(地藏庵)이 있습니다. 지장암 위에 지장바위가 있다고 해서 지장암으로 불렀습니다.
지장암은 통일신라 초기부터 있던 절로 신라 고승 진표율사가 창건하였으며, 그 때의 암자는 현존하지 않고 흔적만 남은 은적암 옛터에 1941년 해안선사가 복원하여 지장암이라고 현판을 달았습니다. 그 뒤 해안선사의 뒤를 이어 제자 우암 혜산선사에 의해 중창되었고, 1987년부터 일지스님이 지장암을 지켜오다가 지난 1990년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선실(禪室)을 건립했고 나한전과 요사등을 중건하였습니다.
연지(蓮池)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숲길이 끝나는 지점의 왼편에는 TV 드라마 '대장금' 의 촬영 장소 중 하나였던 연지(蓮池)가 나타납니다.
부도전(浮屠殿)
연지(蓮池) 뒤쪽으로는 부도전(浮屠殿)이 보입니다. 9기의 부도 가운데 앞줄 4기는 명문(銘文)이 있어 부도의 주인을 알 수 있으나, 뒷줄 5기는 미상(未詳)입니다. 앞줄은 왼쪽부터 능파당, 만허당, 관해당, 해안당으로 근대의 부도이며, 뒷줄은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도비(浮屠碑)
해안스님의 부도비에는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 라고 새겨져 있는데, 당대의 명필 탄허스님의 글씨입니다.
부도전(浮屠殿) 담장
왼쪽의 비석은 능가산 내소사 사적비(楞伽山來蘇寺事蹟碑)이며, 오른쪽은 해안당 대종사 행적비(海眼堂大宗師行跡碑)입니다. 전나무 숲길이 끝나는 지점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내소사 일원(來蘇寺一圓) <자료사진>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위치하며, 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인 내소사(來蘇寺)는 백제 무왕34년(633) 혜구두타(惠丘頭陀) 스님이 처음 지었으며 조선 인조11년(1633)과 고종6년(1869)에 고쳐 지은 것이다. 절의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내소사라고 바뀌었다. 조선 인조 때 청민(靑民) 스님이 지은 대웅보전은 빼어난 단청 솜씨와 문살의 아름다움이 일품이다. 조선 태종15년 어느 이씨 부인이 사별한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묘법연화경을 필사하여 만든 법화경 묘법연화경도 내소사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경내에 있는 고려시대 종은 청림사지에 있던 것을 옮긴 것으로 문양이 세련된 작품이다. 절 부근에 지장암과 청연암이 있으며, 천연암의 종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부처님의 자비가 온 천하에 널리 퍼지는 듯하다. <안내판에서..>
천왕문(天王門)
사천왕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서 사찰 경내 출입문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며, 팔작지붕 형태의 목조건물로 1986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신축하였습니다. 능가산 봉우리가 천왕문 지붕에 얹힌듯 멋진 조화를 이룹니다.
천왕문 현판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서예가) 거사의 글씨이고, 주련의 글귀는 해안선사(海眼先師)의 오도송(悟道頌: 선승이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시(禪詩)를 이르는 말)입니다.
鐸鳴鍾落又竹覓 목탁소리 종소리 또한 죽비소리에
鳳飛銀山鐵壁外 봉황은 은산철벽을 넘어 날으네.
若人問我喜消息 내게 기쁜 소식을 누가 묻는가.
會僧堂裏滿鉢供 회승당안의 만발공이라 하노라.
관음봉 밑의 천왕문(天王門)
천왕문 좌우의 흙 돌담은 절집을 참배하러 가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듯합니다.
천왕문 밖에서 본 내소사 일원
네 방위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 왼쪽은 비파를 든 북방 다문천왕, 오른쪽은 칼을 든 동방 지국천왕입니다.
네 방위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 왼쪽은 용과 여의주를 든 남방 증장천왕, 오른쪽은 삼지창을 든 서방 광목천왕입니다.
안쪽에서 본 천왕문
할아버지 당산나무(느티나무)
천왕문을 들어서면 만나게되는 수령 950년의 할아버지 당산나무(느티나무)는 절 입구의
할아버지 당산나무
해우소(解憂所)
주위가 대숲으로 둘러진 해우소는 1640년 청민선사가 건립한 8평의 맞배지붕으로 된 재래식 화장실로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전면 일부를 흙으로 쌓아 지면과 평평하게 하여 출입구를 내었습니다. 전체를 목재만을 이용해서 만들었는데 윗층을 타원형으로 뚫어 용변을 보게 만들었습니다. 목재가 부식되어 우암혜산선사가 1984년 해체 복원하였습니다.
수각(水閣)
정자(亭子)가 없는데도 수각(水閣)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범종각(梵鐘閣)
범종각 안에는 부처님의 진리를 중생들에게 전해 깨달음과 해탈을 염원하는 중생구제의 의미로 예불 때 이용되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 이렇게 네 가지 타악기가 있습니다. 이를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 하는데, 범종(梵鐘)은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법고(法鼓)는 육지를 걸어다니는 길짐승을 제도하기 위해, 목어(木魚)는 물 속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운판(雲版)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제도하고 허공을 떠도는 영혼을 천도하기 위해 울리는 의미를 갖고있습니다.
범종각(梵鐘閣)
13평의 팔작 한와지붕으로 1995년 당시 주지였던 철산스님이 대범종, 대법고, 목어, 운판등 4물(四物)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범종각(梵鐘閣)
13평의 팔작 한와지붕으로 1995년 당시 주지였던 철산스님이 대범종, 대법고, 목어, 운판등 4물(四物)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하였습니다. 목어(木魚)와 운판(雲版)이 보입니다
보종각(寶鐘閣)
보물 제 277호인 고려동종(高麗銅鐘)을 달아 놓은 종각으로, 이 건물은 현 위치에 있기까지 몇곳을 거쳤습니다.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본래 이 건물은 1880년경 태인에 세웠는데 여러차례 옮겨지다가 1965년 내소사 주지 원경스님께서 법당 앞마당 서남향에 옮겨 설치하였는데 우암혜산선사가 주지 재임시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하였습니다.
보종각 현판
고려동종(高麗銅鐘)
보물 제 277호인 이 종은 1222년(고려 고종9년)에 만들어져 원래 청림사(靑林寺)에 있었던 것을 1853년 (조선 철종4년)에 내소사로 옮긴 것입니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종으로 맨 위에 한국종 특유의 음통과 여의주를 희롱하는 용의 모습을 한 종고리가 있고 그 아래 종신에는 상대와 하대 사이에 4개의 유곽(乳廓)과 삼존상이 주조되어 있습니다. 유곽 아래쪽에는 고려시대 특유의 해바라기처럼 뾰쪽한 끝을 가진 복판 연화문이 있는 당좌(撞座: 종을 때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봉래루(蓬萊樓)
봉래루는 대웅보전 앞에 위치하며 누각과 문의 역할을 하는 건물로서, 조선 태종12년(1414)에 건립한 정면 5칸, 측면 3칸, 2층 누각의 맞배지붕 건축물입니다.
봉래루에는 정지상의 시와 그 주위로 정지상의 원운을 차운한 시가 여러 수 있으며 중창기, 송덕기, 시주질 등 36개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봉래루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1821년에 기록된 “내소사 만세루 상량문”, 1823년에 걸어 놓은 “내소사 만세루 중건기”현판과 최남선의 <심춘순례>의 “변산의 사대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여기서부터 전나무 자욱한 축동으로 들어서서 그것이 다 하는 곳에 “만세루”라는 높은 다락이 앞에 나섬은 이미 내소사에 다다른 것이다 일변에는 봉래루라는 현판을 달았으니..... "
이상의 문헌들을 통해 1823년에 “만세루”란 이름으로 중건하였으며 이 후 “봉래루”란 명칭의 현판을 달았고. 1926년 이후에야 비로소 “봉래루”란 명칭으로 정착되어진 듯하다.
봉래루 주춧돌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였는데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아 2층 누각을 받치는 기둥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수평을 취하게 하였습니다.
봉래루 입구의 연등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은 높게쌓은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팔작지붕으로 지었습니다. 가운데 중앙칸이 상대적으로 더 넓으며, 기둥은 두껍고 낮으며 모서리 기둥은 배흘림으로, 안기둥은 민흘림으로 안정감이 있습니다.
대웅보전은 못을 쓰지 않고 나무토막을 깍아 끼워 맞춰 세운 것으로 전설에 따르면 , 청민선사가 절을 중건할 당시 대웅전을 지은 목수는 3년 동안이나 나무를 목침덩이만 하게 토막내어 다듬기만 하였다고 합니다. 장난기가 발동한 사미승이 그중 한 개를 감추자, 나무깍기를 마치고 토막 수를 헤아려 본 목수는 자신의 실력이 법당을 짓기에 부족하다면서 일을 포기하려 하였습니다. 사미승이 감추었던 나무토막을 내놓았지만 목수는 부정탄 재목을 쓸 수 없다하여 끝내 그 토막을 빼 놓고 법당을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대웅보전 오른쪽 앞 천장만 왼쪽에 비해 나무 한개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3층석탑(三層石塔)
대웅보전 앞에 위치한 3층석탑은 2중기단으로서 화강암질로 되어있습니다. 하층기단은 높이 3.46m, 폭 1.43m이며 1장의 석재에 지대석, 면석, 갑석을 조각하여 나타내었고, 면석에 우주와 장주를 조각하였습니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삼존불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백의관음보살좌상
후불벽 뒷부분에는 유명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있는데, 이 그림은 바위에 앉아있는 백의를 입은 관음을 묘사한 것으로 조선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백색의 천의(天衣)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의 특징을 잘 잡아낸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입니다.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며, 관음보살님의 눈을 보면서 좌 우로 왔다 갔다 해보면 관음보살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데(물론 사람에 따라 안보일 수도 있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영산후불탱화와 대웅보전의 천장
우물 반자를 댄 천장에 가득한 꽃무늬 단청과 연꽃봉오리 모양의 조각은 법당 안을 넓고 장엄하게 꾸미고 있습니다.
대웅보전의 기단과 주춧돌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낮은 기단과 다듬지 않은 주�돌을 놓고 대웅전을 세웠습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조선후기 유명한 서화가)가 쓴 글씨입니다.
산사의 추녀
대웅보전의 꽃살문
정면 여덟 짝의 문살에는 정교하게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섬세하고 아름다워 전설속의 목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으며, 현존하는 사찰의 꽃살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원래는 채색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비바람에 씻기고 나뭇결만 남아있지만 고색창연한 멋을 더하고 있습니다.
무설당(無設堂)
정면 7칸, 측면4칸의 45평의 팔작지붕 한와지붕에 ㄱ자형의 목조 건축물로 1990년 우암 혜산선사가 무설당을 복원 건립하여 주지실과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소사 설선당 요사(來蘇寺 設禪堂 寮舍)
내소사의 대중 요사로서 강설과 참선을 함께 하는 곳으로 승려들의 수학 정진과 일상생활을 위한 공간입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자형의 폐쇄적인 평면을 하고 있으며, 지면의 높이 차를 이용하여 건물의 일부를 2층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넓은 대방과 승방, 부엌 등이 배치되고, 2층의 고루(高樓: 높은 다락집)는 각종 곡물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벽면에 여러 개의 환기창을 설치하였습니다. 건물의 지붕선이 뒤쪽에 보이는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이 건물은 인조18년(1640)에 내소사를 중건할 때 같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벽안당 (碧眼堂)과 자비문(慈悲門)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동편에 있으며, 1911년 관해선사가 벽안당이란 선실로 건립하였습니다. 2002년 다시 진원 주지스님이 신축하여 회주실(會主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삼성각(三聖閣)
독성(獨聖), 칠성(七星), 산신(山神)을 봉안하기 위하여 6평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1941년 능파스님이 건립하였으며, 86년과 93년 두 차례 우암혜산선사가 보수, 해체 복원하였습니다. 원래는 법당을 바라보고 동향(東向)으로 건립되었으나 법당과 같은 방향인 남향(南向)으로 바꾸어 세웠습니다.
구당의 글씨인 삼성각의 현판
삼성각(三聖閣) 내부
진화사 (眞華舍) <자료사진>
정면 3칸, 측면2칸의 목조 팔작지붕 건물로서 1988년 옛터에 우암 혜산선사가 건립하여 한주실 (閑主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삼성각(三聖閣) 좌측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답사할 때는 수리 중이었습니다.
청련암 <자료사진>
내소사에서 뒤편 산정(山頂)을 올라 가다보면 좌쳔으로 사자암축대, 벽송도인 토굴지 등을 지나서 약1km쯤 올라가면 푸른 대나무숲과 함께 남으로 툭 터진 해안이 보이며 아담한 청련암이 있습니다. 이절은 해발 50m 정도의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이곳에서 보는 조망이 일품이며, 또한 겨울철의 설경이 빼어난 곳입니다.
이 절은 백제 성왕 31년 (553)에 초의 선사가 창건하고 중간의 중건중수는 알 길이 없으며, 근세에 들어서는 능파선사의 중수만 알 뿐이고, 최근 1984년에 우암혜산선사가 해체 복원, 중수하였습니다.
이절은 한때 송진우, 김성수, 여운영 등 독립지사가 일제의 피검을 피하기 위해 은거지로 머물기도 했습니다.
봉래선원(禪院)과 부속건물
봉래선원(왼쪽 위)은 1998년 우암 혜산선사가 스님들의 참선정진을 위해 건립한 선원으로 이 선원은 내소사를 중창시킨 해안선사의 뜻을 계승하고, 혜산선사가 호남선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원력으로 건립하였으며, 부속 건물로는 요요당, 본연당, 적적당 등이 있습니다.
참고자료
▶ 해안스님
해안(海眼)은 호, 법명은 봉수(鳳秀)입니다. 1901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다가 1914년 내소사 만허 경화(滿虛 慶華) 스님에게 출가했습니다. 1917년 백양사에서 만암 종헌(曼庵 宗憲)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백양사 지방학림에 입학했습니다. 이듬해 12월8일 성도절을 앞두고 선원의 7일 용맹정진에 참석해 ‘은산철벽(銀山鐵壁)’이라는 화두를 참구, 7일째 되는 날 죽비소리에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스님은 1932년 계명학원을 설립해 청소년 교화 및 문맹퇴치운동에 헌신하는 한편, 백양사와 동래사 순회포교사가 돼 교화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45년 금산사 주지가 된 스님은 서래선림을 개설, 참선지도에 전념했으며, 1950년 변산 지장암 서래선림으로 거처를 옮긴 후, 불교전등회의 대종사로 추대하자 이 회를 육성하는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스님은 1974년 4월 내소사 서래선림에서 불교전등회 창립 5주년을 기념하는 7일 정진대회를 마친 다음, 세수 74세, 법랍 57년으로 입적하였습니다.
▶ 내소사 '법화경절본사본'
<자료사진>
보물 제278호로 지정된 법화경절본사본은 조선 태종 15년(1415) 이씨 부인이 그의 남편 유근의 명복을 빌기 위해 글 한자 쓰고 절 한 번 하는 1자1배(一字一拜)의 지극한 정성으로 묘법연화경을 써서 공양한 7권으로 엮은 필사본으로, 지금은 전주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 내소사영산회괘불탱(來蘇寺靈山會掛佛幀)
<자료사진>
보물 제1268호인 이 괘불탱화는 조선 숙종26년(1700)에 제작하였으며, 장수와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영산재(靈山齋)에서 사용하던 석가칠존도(釋迦七尊圖) 형식의 영산회상도입니다.
영산회상이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와 제자들을 그린 불화를 말하는데, 중앙에는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두른 거대한 석가모니불이 붉은 법의를 걸치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배부근으로 올리고 서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 앞쪽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뒤쪽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및 다보여래, 아미타여래 등이 모두 석가모니를 향하여 시립하고 있습니다.
괘불(掛佛)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불교 행사를 할 때 걸어두는 그림으로 법회의 성격, 의식의 종류 등에 따라 그에 맞는 것을 봉안하게 됩니다.
'답사와 여행(국내) > 전라북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주(茂朱)/백련사(白蓮寺) (0) | 2012.07.02 |
---|---|
무주(赤裳山 史庫) (0) | 2007.12.25 |
무주(안국사) (0) | 2007.12.25 |
부안(채석강.적벽강) (0) | 2007.12.24 |
남원(광한루) (0) | 2007.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