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미황사)
달마산(達磨山) / 미황사(美黃寺)
미황사 가는 길
일행과 떨어져 나홀로 답사 첫번째 발길입니다. 얼마만의 홀로 여행인지...허전함과 함께 묘한 설레임이 일어납니다. 어제 제대로 수면을 취하질 못하였는데도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미황사 가는길이 너무도 고요합니다. 간간히 한 두대의 차가 지나가지만 인적이 없습니다. 맑은 공기에 몸과 마음이 상쾌합니다. 모든 것을 잊게합니다. 자유를 느낍니다.
미황사 가는 길 입구의 서정마을 이정표와 땅끝마을 달마산 미황사 안내 현수막이 보입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주위에서는 글자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반가움이 일어남을 알았습니다.
달마산(達磨山)
멀리 달마산이 보입니다. 왼쪽의 길을 따라가면 달마산의 품속에서 미황사가 나타납니다. 달마산은 멀리서 보면 마치 큰 돌을 조각하여 세워 놓은 듯, 그 능선과 풍경이 그대로 하나의 산수화입니다. 489m 높이의 남도금강이라고 불리며, 능선의 길이는 약 12km로 암봉을 하나하나 넘는 묘미가 있고 다도해의 경관을 보면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코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정리의 봄
미황사 가는 길 옆 저수지에도 봄은 와 있었습니다. 저수지 옆 동산의 나무들도 봄의 색으로 곱게곱게 치장하고 있습니다. 손때 묻지않은 저수지 주변의 모습이 참 좋습니다. 언제까지나 그대로 그렇게 있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미황사 그리고 멀리 다도해 <사진자료:다음여행동호회>
서정마을 입구(연두색표시)에서 한 30여분 걸었나요. 달마산의 바위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사진 앞쪽의 미황사가 나타납니다. 미황사로 가는길 저수지의 푸른물도 저기 보입니다.
달마산 기슭의 미황사
우리나라 육지의 사찰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8년(749)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조선 숙종년간에 우의정을 지낸 민암(閔黯)이 숙종18년(1692)에 지은 '미황사 사적기' 에는 미황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라 경덕왕 때인 749년 어느날 돌로 만든 배가 달마산 아래 포구에 닿았다. 배 안에서 범패 소리가 들려 어부가 살피러 다가갔지만 배는 번번히 멀어져갔다. 이 말을 들은 의조화상이 정갈하게 목욕을 하고 스님들과 동네사람 100여명을 이끌고 포구에 나갔다. 그러자 배가 바닷가에 다다랐는데 금인(金人)이 노를 젓고 있었다. 배 안에는 [화엄경]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聖重), 16나한, 그리고 탱화, 금환(金環), 검은 돌들이 실려있었다.
사람들이 불상과 경전을 모실곳에 대해 의논하는데 검은 돌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왔다. 소는 순식간에 커다란 소로 변했다. 그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金人)이 "나는 본래 우전국(優塡國:인도) 왕인데 여러나라를 다니며 부처님 모실곳을 구하였소.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꼭대기를 바라보니 1만불이 나타남으로 여기에 부처님을 모시려 하오.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웠다가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모시도록 하시오."하는 것이었다.
의조화상이 소를 앞세우고 가는데 소가 한번 땅바닦에 눕더니 일어났다. 그러더니 산꼴짜기에 이르러 이내 쓰러져 일어나지 아니했다. 의조화사은 처음 소가 누웠던 자리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머문 자리에는 미황사(美黃寺)를 창건했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울음소리가 하도 아름다워서 따온 것이고, '황'은 금인(金人)의 황홀한 색에서 따와 붙인 것이다."
동백꽃의 꽃말이 '자랑'이라 했던가요. 미황사 앞에서 그 모습을 뽐내고 있는 동백꽃의 붉은색이 너무도 강렬합니다.
미황사 주변의 동백숲
미황사는 창건에 얽힌 이야기로 인하여 우리나라 불교 해로유입설을 뒷받침하는 고찰로서 불교가 한창 번창할 때는 스님이 많았고 주위에 12암자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조선전기까지 이러한 미황사의 사세는 꾸준히 유지되어 왔다고 합니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절이 소실되자 1598년에 만선스님이 중건하였고, 현종1년(1660) 성간스님이 중창하였으며 영조30년(1754)에는 덕수스님이 중창하였다고 합니다. 미황사는 조선시대 중,후기에 걸쳐 이같은 융성을 거듭하다 약 100년전 주지 혼허(渾墟) 스님이 중창을 위해 모금차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완도와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을 당한 뒤에 점차 퇴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퇴락한지 100여년이 흐른 후 현재의 미황사 주지스님등이 1989년 주인없이 비어있던 미황사를 찾아 흔적만 남아 있던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부도암, 세심당 등을 복원하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합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인 미황사의 경내에는 대웅보전(보물947호), 응진당(보물1183호), 명부전, 삼성각, 달마전(승방), 칠성각, 만하당(선원), 세심당(수련원), 요사체(후원), 향적전(객실), 안심료(후원), 자하루(누각), 감로다실(종무소) 등이 자리 하고있습니다.
자하루(紫霞樓)
미황사의 누각(樓閣)이 대웅보전과 마주하는 곳에 자하루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누각은 사찰에 대중이 많이 운집하는 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중문이 누각의 형태로 변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자하루(紫霞樓) 밑을 지나야 대웅보전을 만나게 됩니다.
대웅보전 쪽에서 바라본 자하루의 반대편 만세루(萬歲樓) 현판
대웅보전을 중심으로하는 미황사 경내입니다. 대웅보전이 소박한듯 중후한듯 그저 아름다울 뿐입니다. 왼쪽 앞에 명부전, 왼쪽 뒷편으로는 삼성각, 오른쪽에 응진당이 보입니다.
아름다운 미황사에 아름다운 달마산입니다. 잠간 달마대사와 달마산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동국여지승람]에 고려의 무외스님의 글을 인용한 미황사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달마산에 미황사와 도솔암 등 12개의 암자가 있었다. 지원(1264) 신사년 겨울에 중국 남송의 배 한 척이 달마산 동쪽 바다에 도착했는데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고 하던데 이 산이 그 산인가" 하며 한 고관이 주민에게 물었다. 그렇다고하자 그는 달마산을 향해 예를 표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 명성만 듣고 동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리보니 여기서 나고자란 그대들이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항상 머무를만 하구려." 하며 참배하고 화폭에 담아갔다."
고려 후기에 미황사가 있는 달마산이 중국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달마대사는 남 인도 향지국의 셋째왕자로 태어나서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27대의 법을 이은 반야다라존자의 제자가 되었다. 스승의 부탁으로 중국에 건너가 양나라 무제를 마난다. 양나라 무제와의 문답을 통해 아직은 법을 펼때가 아니라 생각하고 숭산의 소림굴에서 9년간이나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면벽한다. 이때 찾아온 선종(禪宗)의 2대조사인 혜가대사를 만나 선법을 전해주고는 중국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중국과 베트남, 한국, 일본이 달마대사를 선종(禪宗)의 초조(初祖)로 모시고 선 수행을 이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달마대사의 행적이나 지명을 가지고 있는 곳은 없다.
그때의 중국인들은 달마대사가 해동으로 건너가 안주한 곳이 이곳 달마산이라며 찾아오고 부러워했던 모양이다. 미황사의 옛기록을 보면 모두가 한결같이 달마대사의 법신이 항상 계시는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미황사 홈페이지에서>
대웅보전(大雄寶殿)
크고 작은 자연석으로 석축(石築)을 쌓은 기단위에 긴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말끔히 지워져버린 단청으로 오히려 부드러운 속살을 보여주는 대웅보전이 두 팔 벌려 춤을 추듯 눈 앞으로 스르르 다가옵니다.
보물 제947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1982년에 보수 공사 중 발견된 "대법당중수상량문"(1754년 작성)에 의하면 응진전과 함께 1751년에 중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多包式) 건물로 배흘림 기둥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갖추고 있습니다. 대웅보전의 문살도 다른 사찰의 꽃살무늬가 아니라, 빗살(교살)로 하여 오히려 중후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른 절에는 대부분 대웅전 전면에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놓여져 있는데, 미황사는 측면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법당이란 뜻으로 석가모니 불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대웅(大雄)’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큰 영웅, 즉 대웅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으며, ‘위대한 영웅인 석가모니부처님이 사는 집’ 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웅보전은 미황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배(인도에서 경전과 부처님상을 싣고온 배)를 상징하기도 하고, 반야용선(般若龍船), 곧 지혜(智慧)의 배를 탄 부처님이 번뇌(煩惱)와 우매(愚昧)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을 구제하여 부처님의 세계인 극락세계로 향하는 듯한 모습이 장엄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미황사에는 서산대사와 그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 내려옵니다. 조선 중기 서산대사의 제자들이 대흥사와 미황사로 내려오면서 조선시대 중, 후기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고 합니다.
묘향사 원적암에서 열반에 드신 서산대사의 유지를 받들어 직계 싱좌인 소요대사와 법을이은 손상좌 편양선사가 서산대사의 의발을 모시고 대둔사(대흥사)에 내려온다. 소요대사는 서산대사의 의발을 대둔사에 모시고 편양선사로 하여금 법을 펼 수 있도록 도량을 만들어주고, 함께 내려온 서산대사의 직계상좌들과 함께 미황사에 모여 살게된다. 이러한 사실은 대둔사(대흥사)의 부도전에 모셔진 대부분의 스님들은 편양선사의 법맥을 이으신 분들이고, 미황사의 부도전에 모셔진 대부분의 분들이 소요대사와 법맥을 잇고 있는 분들임으로 알 수 있다. <미황사 홈페이지에서>
명부전(冥府殿) 정면 <사진자료:바닷가님>
명부전(冥府殿) 측면
미황사의 명부전은 대웅보전 옆에 자리 하고 있습니다. 명부전 안에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지옥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에는 지장신앙이 크게 유행해서 어느 사찰에나 이 전각이 있었습니다.
지옥의 중생까지 구제하겠다는 원력을 세우시고 자신의 성불을 미루신 분이 바로 지장보살님 이십니다. 저승의 염라대왕 앞에는 업경대가 놓여 있는데 이는 저승에 당도한 망자가 평생에 있었던 사소한 사건까지 업경에 영상으로 비치며 그에 따라 서기가 옆에서 죄목을 일일이 두루마리 문서에 받아 기록하게됩니다. 이 문서를 저울에 달 때 무게가 나가는데 죄가 무겁다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장면들이 시왕 탱화에 묘사되어 있고 지장보살님은 업경대 옆에서 죄를 가볍게 처리하도록 변호하여 주는 것입니다.
명부전의 시왕 <사진자료:법산님>
명부전 안에 있는 10대 시왕을 조각해 모신 사람은 '자화상'이 국보로 지정되어 유명한 공재 윤두서님 입니다. 그가 명부전에 10대 시왕을 모신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어 절 근처에 있던 은행나무를 베어 10대 시왕을 조성했는데 그 후 신기하게도 10명의 아들을 보았다 합니다. 더욱 믿지 못할 일은 시왕 중 네 번째 시왕의 두 눈 크기가 실수로 서로 다르게 조각되었는데 그의 넷째 아들도 눈 크기가 달랐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괘불대
대웅보전 전면 좌우에는 괘불을 거는 지주(支柱)인 괘불대가 놓여져 있습니다.
미황사의 괘불(掛佛) <사진자료>
괘불은 야외에서 법회할 때 법당 앞의 괘불대에 거는 그림을 말하는데, 국가의 천재지변이나 기우제(祈雨祭), 영산재(靈山齋) 등과 같이 많은 신도들이 야외에서 법회할 때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불화와는 크기에서 차이가 납니다.
괘불은 행하고자 하는 법회나 재(齋)의 성격에 따라 사용하는 괘불이 다릅니다. 장수와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영산재에는 영산회상도를, 살아 생전에 사후의 불사를 미리 지내는 예수재(豫修齋)나 외로운 모든 영혼을 달래고 천도하는 수륙재(水陸齋)에는 지장회상도나 미륵불을 그리고 관음재(觀音齋)일 경우에는 관음보살을 모십니다.
보물 1342호인 미황사의 괘불은 조선 영조3년(1727)에 제작된 것으로 그림의 내용은 가사를 걸친 여래상이 우뚝 서있는 독존도 형식입니다. 양 옆에 합장한 부처가 세 분 앉아있고 무릎 좌우에 향로를 든 작은 보살상과 금함을 든 사자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미황사의 창건설화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 괘불은 가뭄에 내걸고 제사를 지내면 비를 내린다는 속설이 전해 내려오는 영험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요즘에도 가뭄이 심하면 미황사의 기우제는 빼놓을 수 없는 행사라고 합니다. 몇 년전에는 괘불을 내걸고 기우제를 지냈는데, 도중에 빗줄기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1993년에는 손상된 괘불을 수리하였습니다.
대웅보전 측면
팔작지붕과 배흘림 기둥이 잘 드러나 보입니다.
대웅보전과 응진당 사이의 계단 위에서 바라본 대웅보전. 다른 대웅전과는 달리 후면에도 각 칸마다 문을 달아 놓았습니다.
대웅보전의 귓기둥(우주)과 주초석인데, 자세히 보면 자라 한마리가 부처님을 향해 기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옆에 게도 있습니다. 대웅보전을 바다위에 떠있는 배로 묘사한 것이겠지요.
믿을 수 있는 이야기 인지는 모르지만 대웅전에 단청만 하면 불이난다고 전해오며, 3번의 화재끝에 더 이상 단청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웅전 공포부분
다포식 팔작지붕건물로 서까래를 받치는 도리가 기둥 바깥으로 3개, 안으로 4개이기에 외3출목, 내4출목의 복잡하고 화려한 형식을 갖추었습니다. 공포 살미의 끝은 위로 한껏 치올라갔고 중앙의 두 기둥 위에는 들보를 끌어내고 그 끝에 용을 조각해두었습니다.
법당 안에는 목조삼존불(석가모니불, 아미타불,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불상 앞에 불패를 두어 부처님의 명호를 써 놓았습니다. 삼존불 위로는 닫집이 화려하고 장엄하게 설치되어 있으며, 법당안에는 소종과 법고, 법고대, 괘불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닫집 천장의 범어 글자와 일천불의 벽화
밑의 검은색 궤가 괘불함 <사진자료:바닷가님>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천장에는 범어(인도 싼스크리스트어)로 쓰여진 글자와 일천불의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천장 곳곳에 그려진 천불의 부처님 때문에 미황사 대웅전에서 세 번만 절을 올리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천 분이시니 세 번이면 삼천 배가 되는 셈이지요.
대웅보전 주변에서 흐르는 빗물을 내려 보내는 수구인 석루조(石漏槽)가 앞에 보입니다.
응진당(應眞堂)
대웅보전에서 석축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규모의 응진당이 자리잡고 있다. 미황사의 부불전(副佛殿)인 응진당(보물 1183호)의 건축연대는 1982년 대웅전 보수공사 때 대들보에서 나온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대웅전과 같은 해인 1751년 상량(上樑)된 것으로서 18세기 중엽의 건물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대웅보전과 같은 건축 양식이므로 같은 시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993년 도지정 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되었고 2001년 보수공사를 마쳤습니다.
응진당 내부 <사진자료:돌고래님>
응진당 안에는 석가모니부처님, 좌우에 아난, 가섭존자가 모셔져 있고 16나한상, 인왕상, 시자상, 동자상 및 불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특히 응진당 내부 벽면에 수묵(水墨)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는 선필(禪筆)의 경지를 보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부처는 아니지만 부처님의 제자나 고된 수행을 거쳐 진리를 깨달은 역대의 고매한 존재를 모신 집이 응진전 또는 나한전으로 불립니다.
사찰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응진전의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일품이며, 특히 해질 녘 진도와 그 밖의 뭇섬들이 붉은 바닷물 위로 떠 있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응진당 옆의 석불
응진당(應眞堂)과 만하당
만하당(선원)
삼성각의 독성탱화 중 일부 <사진자료:법산님>
미황사의 삼성각은 산신(山神)·칠성(七星)·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전각이며 산신탱화, 독성탱화, 칠성탱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산신(山神)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산신으로 미황사 삼성각에 모셔놓은 산신탱화(삼성각 정면 좌측)는 화면 왼쪽에 호랑이를 걸터앉은 산신과 그 좌우에 동자와 여인이 자리한 구도입니다. 동자와 여인은 독성탱화의 것과 모습이 흡사합니다. 크기는 가로 112cm 이고 세로 97cm 입니다.
독성은 천태산(天泰山)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獨聖)·독수성(獨修聖)이라 불린 나반존자(那畔尊子)를 일컫습니다. 독성탱화(獨聖幀畵) 그림은 천태산과 소나무·구름 등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스님이 왼손에 염주를 들고 앉아 있고 차를 달이는 동자와 여인이 등장합니다. 크기는 가로 112cm이고 세로 97cm 입니다.
칠성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북두칠성을 뜻하며, 본래 중국의 도교사상과 불교가 융합되어 생긴 신앙입니다. 미황사의 칠성탱화(삼성각 정면)는 화면 중앙에 가득하게 치성광여래를, 그 좌우에 일광 월광보살을 그렸습니다. 1943년에 제작되었습니다.
돌확
뒤의 달마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달마전(승방)의 담을 감상하며 부도전으로 향합니다. 달마산의 모양이 수정 원석같은 느낌을 줍니다. 절에서 달마산 정상 까지는 약 1시간 거리라고 합니다.
소나무와 동백나무의 숲속 길을 따라가면 곧 부도밭을 만나는데, 멋진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부도전이 가까이 눈에 들어옵니다.
거북, 새, 게, 연꽃, 도깨비 얼굴 등이 새겨진 여러 형태의 부도가 반깁니다.
미황사의 부도는 그 수가 많고, 특이한 모습들을 하고 있습니다. 부도의 대부분은 18~1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부도가 특이한 것은 이 지역이 바닷가와 인접해서인지 부도의 기단부 또는 전면에 물고기, 게, 거북, 문어 등의 무늬가 조각되어 있는 점입니다. 사찰의 부도문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서 불교와 민중신앙이 어우러져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몸돌에 윤해당(玧海堂)이라 적혀있습니다. 이곳의 부도와 비석들은 벽하당, 송암당, 영월당, 송월당, 죽암당, 설봉당 등 선사들의 명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지붕돌에 용머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여의주를 문 용의 머리를 가진 귀부(龜趺)
모두 24기의 부도와 부도비가 늘어서 있습니다. 둥글거나 네모진 몸돌에 지붕돌을 얹은 이곳의 부도들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 진 것이지만 18세기 중반을 넘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부도전의 담장과 부도밭
달마산 미황사 부도전에 가보면
깊이깊이 감추어진 미황사의 역사가 아직 꺼지지 않은 모닥불처럼 남아있다.
대웅보전 마당에서 도솔봉 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2km쯤 가면
믿기지 않을 만큼 눈부신 부도전이 나온다.
울창한 숲에 쌓여 30여기의 돌무덤들이 하늘을 향해 나래를 펴고 있다.
푸른 이끼와 함께 정갈하게 풍화된 색조는 가슴 벅찬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산중에서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의연하여
절로 머리가 수그러 질 뿐이다.
이 부도전은
그 옛날 융성했던 달마산과 미황사의 역사를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 사찰의 부도전 중 최고일 성싶다.
산 너머 대둔사의 부도전이 유명하지만, 어수선하여
이 고독한 듯 웅혼한 기운은 흉내내지 못한다.
연담당, 벽하당, 설봉당, 완해당, 창암당, 송암당, 영월당, 송월당, 백호당, 죽암당.....
수많은 절집을 찾아가 보았어도 이만한 선승들의 역사를 가진 사찰은 보지 못했다.
이들 부도의 양식이 대부분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어서
미황사가 임진왜란 이후 수많은 고승들이 주석하여 선풍을 펼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각들도 용, 두꺼비, 거북, 물고기, 게, 도룡뇽, 학, 연꽃 등
소박하고 재미있는 문양들이다.
특히 대웅보전 기둥의 초석에서처럼 거북이나 게등
바다 동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창건 설화와 함께 바다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부도전이 위치한 곳은
소가 처음 멈추어 섰던 통교사 터이고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남암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잡목 숲이 터를 매웠고
하반신이 땅에 묻힌 사적비가 서 있으며
옛 절터 석조에는 무상한 세월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약수가 넘치고 있다.
*이형권 지음 '山寺'중에서*
달마산과 부도밭
부도암과 부도밭
부도암(浮屠庵)
옛 동교사 터에 세워진 부도암. 주위의 공사가 완전히 끝나보이지 않습니다.
부도암 앞의 돌확. 물 없이 덜렁 돌확만 놓여있습니다.
미황사 사적비
숙종18년(1692)에 세워진 미황사 사적비. 미황사 창건설화를 소개한 민암의 사적기가 여기에 적혀있습니다.
미황사의 봄
동백꽃의 꽃말은 자랑, 겸손한 아름다움.
2007.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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