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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東國寺)/군산(群山)-3

케인스 2019. 4. 6. 17:16



                  동국사(東國寺) / 군산(群山)-3

 


전라북도(全羅北) 군산(群山) 동국사(東國寺)



군산시 위치 <google참고사진>



동국사(東國寺)


                                

                                       동국사(月明山 東國寺) 위성사진 <google 참고사진>


동국사(東國寺) 대웅전은 서쪽으로 월명산(月明山) 자락을 배경으로 동향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으로 요사채가 연결되어 있고 남쪽으로 종각이 있습니다. 동국사 주변으로는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근대건축관에 전시된 동국사 모형





 월명산 동국사(月明山 東國寺) 제1정문


동국사 입구는 우리 전통사찰에서 볼 수 있는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해탈문 같은 가람배치가 없습니다.  


동국사(東國寺) 제2정문


동국사는 일제 강점기때 우리나라에 세워진 500여 개의 일본식 사찰중 유일하게 남은 사찰입니다. 왼쪽 돌기둥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동국사', 오른쪽 돌기둥에는 '차문불문(此門不門)'이라는 글씨가 붙어 있습니다. 차문불문(此門不門)이란 '이 문은 문이 아니므로 누구나 드나들수 있는 문'이란 뜻으로 이 글씨가 언제 새겨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참고사진>


사찰 입구 왼쪽 기둥에는 '昭和九年六月吉祥日(소화9년6월길상일)'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으나 누가 왜 썼는지 알지 못하며 일본 천왕 연호인 '昭和' 글씨는 지워져 있습니다. 소화9년은 1934년입니다.


  

   曺洞宗 錦江寺(조동종 금강사)


사찰 입구 오른쪽 기둥에 붙어있는 차문불문(此門不門)이란 팻말  밑에는 曺洞宗 錦江寺(조동종 금강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팻말 안쪽 기둥에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지정 표지 밑으로 盧熙潤(노희윤)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1952년 그의 쾌유를 기원하기 위해 새긴 이름이라고 합니다.



동국사(東國寺)


동국사일본 승려 '우치다 붓깐(內田佛觀,내전불관)'이 한일병합 1년전인1909년 8월 군산 외국인 거주지에 포교소인 금강선사(錦江禪寺)/[일명, 금강사]를 세운 것이 시발점입니다. 우치다는 1913년 군산 지역 대농장주 구마모토[熊本利平]와 미야자키[宮岐佳太郞] 등 29명의 신도에게 시주를 받아 지금의 자리에 사찰을 세웠으며 대웅전(大雄殿) 건물은 1932년에 지어졌습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군정에 몰수됐다가 해방 직후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되었습니다. 1955년에는 '불교 전북 종무원'에서 인수하여, 남곡스님께서 동국사[동국은 "해동대한민국"의 준말로 우리의 절이란 뜻]로 개명하고, 1970년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禪雲寺)의 말사가 되었습니다. 2003년 7월15일 국가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대웅전(大雄殿: 등록문화재 제64호)


지금의 대웅전은 1935년 개축한 건물로 법당을 지을 당시 대다수 목재는 일본에서 쓰기목[삼나무]을 들여 왔으며, 대들보는 백두산 금강송(金剛松)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사찰과 달리 승려들의 거처인 요사와 복도로 연결된 것과 한국 전통사찰과 달리 단청도 풍경(風磬)도 없는 것도 특징입니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정방형 단층 팔작 지붕 홑처마 형식의 대웅전은 일본 에도 시대 건축 양식으로 외관이 단조롭고 목재의 부식을 막기 위해서 까만 염료를 칠하였습니다. 지붕 물매는 75도의 급경사를 이루고, 고온다습한 일본의 건축적 특성을 담아 환기가 잘 되도록 사방에 창문을 두었으며, 용마루는 일직선으로 한옥과 대조를 이룹니다.


                                         대웅전 현판 [송암(松菴) 신봉식(申鳳湜: 1900-1979)선생 글씨, 현대의 서도가



  

                                 대웅전 주련(柱聯) <카페: 현문수다원 자료에서 모셔옴>



                            阿彌陀佛眞金色 (아미타불진금색): 아미타 부처님의 참된 금빛 몸이여,            
                            相好端嚴無等倫 (상호단엄무등륜): 상호가 단정하고 엄숙함은 비할 바 없네.

                            白毫宛轉五須彌 (백호완전오수미): 백호는 완전하여 다섯 수미산을 합한 것 같고,          
                            紺目澄淸四大海 (감목징청사대해): 푸른 눈의 맑기는 큰 바다와 같네.

                            光中化佛無數億 (광중화불무수억): 원광 속에는 또 수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고,            
                            化菩薩衆亦無邊 (화보살중역무변): 화현한 보살들의 모습도 끝없이 많구나.


                           

                      1934년 금강사(동국사) 모습 <불교신문사진자료>


일제강점기에는 ‘月明山(월명산)’이란 편액이 대웅전에 걸려 있었는데, 월명산 자락에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당시 절 이름은 금강사(錦江寺)였습니다.


                                              <참고사진>


대웅전 출입 공간인 정면 앞칸 바닥이 시멘트로 마감된 것은 법당에서 신발을 벗지 않고 선 채로 예배를 드리는 일본 불교 전통에 맞춘 것이라고 합니다.


   대웅전 창호<문화재청사진자료>


  정면에는 정(井)자살 4짝 미서기 문(sliding door)을 설치하였고 좌우 협칸과 퇴칸, 측면에도 미서기 창을 설치하였습니다.





   대웅전 내부<문화재청사진자료>


내부에는 전면 쪽에 2개의 원주가 있는데, 기둥 사이에 걸쳐진 보 위에는 소나무나 화초 등을 투각한 란마(欄間)가 장식되어 있으며, 후면 쪽에는 4개의 원주가 있는데, 그 중앙의 후벽쪽에 불단이 설치되어 소조석가여래삼존상(塑造釋迦如來三尊像)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대웅전 바닥과 요사 선방 등에도 원래 다다미[일본 전통식 바닥재]가 깔렸었으나 모두 걷어냈다고 합니다.



 대웅전 삼존불(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13호) <참고사진>


대웅전에는 진흙으로 조성한 석가여래삼존상이 모셔져 있는데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아난존자, 오른쪽에 가섭존자가 시립(侍立)하고 있습니다. 조선 효종1년(1650) 응매스님이 조성한 삼존불상은 시주자와 시주물목, 발원문 등이 복장에서 나와 조선 후기 불상연구는 물론 복장 의식과 사원경제를 짐작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동국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東國寺 塑造釋迦如來三尊像 및 腹藏遺物): 보물1718호


소조석가여래삼존상(塑造釋迦如來三尊像) <참고사진>


복장유물(腹藏遺物) <참고사진>


소조석가여래삼존상(塑造釋迦如來三尊像)은 석가여래(釋迦如來)와 2대 제자인 가섭(迦葉)과 아난존자(阿難尊者)로 구성된 삼존상이며 조선시대 불상양식이 형식적으로 흐르기 전 단계의 소조불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150cm가 넘는 대형상으로는 유일한 아난과 가섭을 협시로 한 석가여래삼존이며, 이 불상 들에서 나온 전적물(典籍物)이나 복장물의 기록에서 이 삼존상이 전라도 지역에서 활약하였던 이름이 알려진 조각승 응매(應梅)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석가삼존상 및 복장유물은 1650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시기, 분명한 조성주체, 불상 조성에 소요된 시주물목과 수많은 시주자 등이 조성발원문에 기록되어 있어 복장의식 및 사원경제사, 조선후기 불상연구에 기준이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사찰의 전승에 의하면 이 불상은 원래 금산사에 모셔졌으나 동국사 주지였던 김남곡 스님(1913~1983)이 금산사(金山寺)에서 동국사로 모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문화재청, 군산시청 자료>



                  1945년 해방 후 동국사 대웅전에서 열린 결혼식 모습 <불교신문사진자료>


군산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금강사를 중심으로 신행활동은 물론 불교식 혼례, 장례 등을 치렀으며 소위 대동아전쟁에 참전해 사망한 일본 군인 가운데 군산과 연고 있는 자들의 위패와 유골을 동국사에 봉안했습니다. 대웅전 뒷벽에 있던 봉안당은 해방 후에 철거했으며, 유골은 절차를 거쳐 서해 앞바다에 수장(水葬)했습니다. 지금은 대웅전 뒤쪽에 시멘트 기단만 남아 있습니다.


  대웅전 뒷면과 대숲 <참고사진>


 대웅전과 요사(寮舍)


 대웅전을 중심으로 우측에 있는 요사채가 복도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935년금강사(동국사) 모습 <사진: 종걸 스님>


 

 

이 문을 들어서면 긴 복도를 통해서 왼쪽으로 대웅전, 오른쪽으로 요사채 건물로 갈 수 있습니다. 문 위에는 국가등록문화재 표지가 붙어있습니다.


                                                    등록문화재 표지 <참고사진>


                                                              

                                                              대웅전 법당과 요사채를 연결하는 복도 <참고사진>


요사채



 항적원(香積院): 한옥 양식의 요사채



천불전(千佛殿)


천불전 내부, 천불 조성 준비중 <참고사진>


종각(鐘閣)


대웅전을 바라보며 왼쪽 마당에는 일본풍의 종각(鐘閣)이 있습니다. 국내 유일의 일본 전통 양식의 종각으로, 1919년 일본 교토(京都)에서 제작한 범종(梵鐘)이 달려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까지 군산 시민들에게 매일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전합니다. 본래 종각이 있던 자리는 대웅전 앞마당보다 높은 언덕이었는데, 텃밭을 조성하면서 턱을 낮추었으며 1932년 대웅전 옆에 있는 야산을 허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범종(梵鐘): 1919년 일본 교토(京都)에서 제작 <참고사진>


조선종과 달리 일본 동종인 동국사 종은 상부에 잡음을 없애 주는 음관이 없고, 종 머리에 고정하는 용뉴는 일체 쌍두용을 구부려서 배치하였으며, 종신에는 하늘을 날아가는 비천상 대신 종복에 보상연화문 당좌 2개와 가로 세로 띠 모양을 한 문양을 양각으로 장식했습니다. 이 공간에 범종 제작에 시주한 시주자 명단, 금강사의 창건 내력, 일본 천황을 칭송하는 축원문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또, 유곽 없이 유두만 108개를 배치하여 백팔번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면과 거의 맞닿아 있는 한국의 범종과 달리 종각 위쪽에 높게 매달려 있는 것도 특이합니다.



                       


<참고사진>


범종각 주변에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다양한 모양의 석조33관세음보살상(石造33觀世音菩薩像)과 석조8수본존상(石造8守本尊像)이 놓여있습니다. 1919년에 만들어진 보살상에는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해방 이후 철거되어 민가의 주춧돌로 사용한 이력이 있어 그을림 자욱을 보이고 있습니다.



 평화소녀상(平和少女像)


일본 조동종(曺洞宗)이 과거사를 참회하며 건립한 참사문비(懺謝文碑) 앞에는 제국주의 재발 방지와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한복을 입은 단발머리 차림의 ‘평화의 소녀상(平和少女像)’이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해 불교계를 비롯한 여러 시민단체가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광복 70주년인 2015년 8월12일 건립했습니다.




                        


소녀상 앞에는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77장의 검은색 타일로 조성한 연못이 있습니다. 소녀상은 일본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며 소녀상 앞의 연못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대한해협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소녀상 뒤에 위치한 참사비(懺謝碑) <참고사진>



범종각 옆에는 가로 3m, 높이 2.3m 크기의 검정 오석 돌에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만행을 참회하는 참회문(懺悔文)을 새긴 참사비(懺謝碑)가 있습니다. 1992년 세운 참사비에는 비석을 보며 오른쪽에 일본어 원문을, 왼쪽에는 한글 번역문을 각각 새겼는데, 이 참사비는 일본에서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인 동지회 회장인 이치노혜 쇼고(一戶彰晃·64) 아오모리 운상사 주지 스님의 주도로 일본 불교계에서 비용을 부담하여 세운 것입니다.  참사비에는 "일본 불교는 국가권력에 영합해 태평양전쟁에 가담하고 수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인권침해, 문화멸시, 일본문화 강요 등 커다란 상처를 남긴 점을 참회하면서 사죄드린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불교신문자료>



                        참사문(懺謝文) <참고사진>


각 옆 비석: 木川孺人尙綠香靈駕碑(목천유인상록향영가비)


종각 옆 비석은 1980년 세운 비석으로 앞면에 '木川孺人尙綠香靈駕碑'(목천유인상록향영가비)라 새겨져 있는데, 상록향(1911~1980)은 일제강점기 경남 진주에서 소문난 기생이었으며 군산에 거주할 때는 불심이 깊은 동국사 신도였다고 합니다. 군산에서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이 분은 전각이든 학교든 유치원이든 건물을 시주하고 싶다고 하였으나 결국 지금의 향적원 자리에 자신 사후에 사용할 제각(祭閣)을 지었고, 비석도 제각 근처에 세웠는데 건물이 헐리면서 종각 옆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분의 영정 사진은 대웅전 위패실에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방공호(防空壕)


동국사 경내에는 방공호(防空壕)가 있었습니다. 연합국 비행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웅전 뒤편 대나무 숲에 2개의 방공호를 조성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무너져 내려 폐쇄했고 나머지 하나는 토굴식 창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환수문화재 전시회 <참고사진>


                      

                     쌍림열반상도(雙林涅槃相圖) <참고사진>


동국사 종걸스님이 일본 운상사 주지 이치노헤스님의 도움으로 경매를 통해 환수한 가로 세로 224.5×87.0cm인 쌍림열반도의 조성시기는 임진왜란 이전인 1500년대 후반의 16세기 불화로 평가하고있습니다. 이 쌍림열반도는 회화상으로 특이한 장면이 묘사 되어있는데 관이 불에 휩싸인 즉 다비의 장면과 사리가 쏟아지고, 그 사리를 주워 담아 나누고(分舍利) 이를 집섶에 넣어 묶고 운반하는 모습의 장면은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에서도 전무후무한 특이한 모습입니다.


 

          금오계첩(金吾契帖) <참고사진>

금오계첩(金吾契帖)은 의금부 금부도사들의 모임을 그림으로 표현한 기록문화재로 1734년 당시 현직 금부도사 10명과 전, 현직 금부도사 이력과 계첩을 만든연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국사(東國寺) / 군산(群山)-3

(201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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