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강원도

구룡사(龜龍寺)/원주(原州)

케인스 2018. 4. 1. 22:52


 

                    구룡사(龜龍寺)/원주(原州

 

 


구룡사(龜龍寺) 가는 길


 

         <google 참고사진>



구룡사 자료



구룡사(龜龍寺) 답사



구룡지구 안내도


구룡사 입구 '신흥주차장'  [이곳에서 구룡사까지는 걸어서 약20~25분 소요됩니다.]


구룡사 매표소 [주차장을 지나면 곧 보입니다.]


구룡사 매표소 앞 <참고사진>


문화재구역 입장료 징수안내판

0금강소나무 숲길[금송길]


구룡사 매표소를 지나 구룡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황장금표(黃腸禁標)와 굽이굽이 금송길이 펼쳐집니다. 금송길을 조금 오르면 원통문(圓通門)과 사리를 모신 부도군(浮屠群)이 나타나고 금방 0.9km의 숲 길을 지나 구룡사(龜龍寺)에 도착합니다.


 <안내판>


장금표(黃腸禁標) 위치도




학곡리 황장금표 (鶴谷里黃腸禁標): 강원도 기념물 제30호


강원도 지정기념물 제30호인 황장금표(黃腸禁標)는 학곡리 구룡사로 들어가는 입구 매표소의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구룡사 입구에서 100여m 정도 내려가면 도로가의 흙속에 일부가 묻혀 있는 1기의 금표가 추가로 발견된 것이 있습니다. 황장금표(黃腸禁標)는 작은 바위의 한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황장금표(黃腸禁標)’라는 글귀를 새긴 모습인데 왕실에서 사용하던 소나무 관곽재(棺槨材)인 황장목(黃腸木)을 왕실에 공급하기 위하여 일반인들의 사용과 벌채를 금지한 황장봉산(黃腸封山)의 경계 표지입니다. 황장목(黃腸木)은 나무의 안쪽 색깔이 누렇고 몸이 단단한 질이 좋은 소나무로서 조선 왕실에서 임금의 관(棺)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치악산은 질이 좋은 소나무가 많을 뿐 아니라 관아가 가까이 있어 관리도 유리하고, 한강의 상류에 자리하여 뗏목으로 한양까지의 운송이 편리하여 전국에 있는 60여 개소의 황장목 보호림 가운데에도 이름난 곳의 하나였습니다. <구룡사 및 문화재청 자료> 


장금표(黃腸禁標)


이 표석은 조선시대에 설치된 것으로, 보호림 구역을 만들어 표시를 해놓는 제도는 조선시대 전기부터 생겨난 것으로 강원도에는 이곳 외에도 인제, 영월, 양양 삼척 등에 있습니다.


황장금표(黃腸禁標)


구룡사 입구의 황장금표는 폭 110cm, 높이 47cm, 둘레 270cm 크기의 자연석에 새겨져 있는데, 각자(刻字)의 크기는 대략 가로 11cm, 세로 25cm의 공간에 "黃腸禁標"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로써 표석이 위치한 일대가 황장목 보호구역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금송길


구룡탐방지원센터, 문화관광해설사의 집 [구룡사 0.8km 지점]


             <탐방로 안내판>


구룡교(龜龍橋) [구룡탐방지원센터 바로 앞에 있습니다.]


구룡교를 지키는 용두상(龍頭像)


          

         

         치악산 구룡사(雉岳山龜龍寺) 안내판 <참고사진>



 <구룡사 안내판>



 <구룡사 안내판>


구룡사의 일주문(一柱門)인 원통문(圓通門)


원통문(圓通門)


구룡사의 경우 원통문(圓通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았으나 다른 사찰에서 일주문(一柱門)이라 칭하는 건물입니다.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어 유래된 말입니다. 사찰에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관문으로 한 줄로 기둥을 세운 까닭은 일심(一心)을 상징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주문을 통과함으로  일심으로 진리를 추구하라는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참고자료>



원통문(圓通門) 뒷면


부도군(浮屠群)


구룡사 경내에 있는 승려(僧侶)들의 묘탑(墓塔)을 모아 놓은 곳으로 비교적 넓은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보존도 양호합니다. 원통문(圓通門)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넓은 대지가 있는데 이곳에 9기의 석조부도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모두 조선 후기의 것으로 보이며 석종형(石鐘形)과 석비형(石碑形)의 부도(浮屠)입니다. 9기 가운데 주인공이 명시된 것은 6기이고 건립연대가 명시된 것은 2기[건륭(乾隆)10년 을축(乙丑)/조선 영조21년(1745), 숭정후삼계사(嵩禎後三癸巳)/조선 영조49년(1773)] 뿐입니다. <구룡사 자료>


부도군(浮屠群)


         <참고자료>


부도군(浮屠群)


                                 09:48 / 금강소나무



 구룡사계곡


국사단(局司壇)


국사(局司)란 절터를 칭하는 것으로 가람을 수호하는 국사대신(局司大神)을 모신 사당입니다.


국사단 주련(局司檀 柱聯) <참고자료: 월간해인>


局司大神振玄風(국사대신진현풍): 경내를 맡은 국사대신은 현묘한 바람을 떨치시며,

消災降福願皆從(소재강복원개종): 재앙 없애고 복을 내리시니 모든 소원 이루어지네,

洞察人間如反掌(통찰인간여반장): 인간 세상 꿰뚫어 보기를 손바닥 뒤집듯 하시며,
敎化群生一切同(교화군생일체동): 뭇 생명 교화함에 모두를 똑같이 하나로 여기시네


거북바위 <참고사진>


거북바위 전설[구룡사 한자 표기에 관한 전설]


조선왕조에 들어서면서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 대부분은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이 공납의 책임자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좋거나 나쁘거나 구룡사 스님의 검사 하나로 통과되는지라 인근 사람들은 나물 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별도로 스님에게 뇌물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기는 하였으나 정신도장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럴 즈음 한 스님 이 찾아와 몰락한 이 절을 보고 개탄하면서 이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절에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거북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어 거북바위를 쪼개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 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도 더욱 적어지고 거찰로서의 명성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급기야는 절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을 즈음 어느 날 도승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이 절이 왜 이렇게 몰락하는가 하면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주지스님은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고 묻자 "본시 이 절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두동강으로 잘라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지 스님은 재차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도승은 거북을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구룡사(九龍寺)의 아홉구(九)에서 거북구(龜)자로 바꿀것을 권하여 구룡사(龜龍寺)로 쓰기로 했다고 전합니다. <구룡사 자료>


구룡사 전경


보호수 은행나무(수령 200년)


                                              





 구룡사  전경 <google 참고사진>


14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구룡사는 풍수지리적으로 "천 년이 지난 신령스러운 거북이 연꽃을 토하고 있고, 영험한 아홉 바다의 구룡을 풀어 놓는 형상을 한 천하의 승지"라고 하여 서기 668년(신라 문무왕 8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구룡사는 치악산 능선 밑의 급경사지에 동향(東向)의 배치를 하고 있으며, 조선중기이후 산지(山地)에 건립된 사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룡사(龜龍寺) 유래(由來)


치악산의 으뜸 봉우리인 비로봉에서 학곡리 쪽으로 약 6km 떨어져 있는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 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원래 대웅전 자리에는 연못이 있었고 그곳에 아홉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합니다. 의상대사는 연못 자리가 좋아 그곳에 절을 지으려고 용들과 도술시합을 하여 용들을 물리치고 절을 지었고, 아홉마리의 용이 살았다하여 구룡사(九龍寺)라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들어 사찰이 퇴락하게 되었는데, 어느날 한 노인이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약해진 것이라 하여 혈을 끊었는데[거북바위를 쪼개었음] 이후 절이 더욱 쇠약해져 갔습니다. 절이 더이상 운영되기 어려워 폐사가 되려할때에 이번에는 한 도승이 나타나 절이 더욱 쇠약해진 것은 혈맥을 끊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거북바위를 살리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龜龍寺)로 바꾸었다 합니다. <구룡사안내판>




구룡사 전각 안내도 <참고자료>


구룡사(龜龍寺)는 신라 문무왕 8년(668)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사찰로 대웅전 자리에 9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을 메우고 사찰을 창건하여 구룡사(九龍寺)라 하였으나, 조선 중기에 거북바위 설화와 관련하여 현재의 명칭인 구룡사(龜龍寺)로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치악산구룡사사적(雉岳山龜龍寺事蹟)』에 의하면 신라말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구룡사의 역사는 유일한 자료인 사중(寺中)기록에 의지할 수 있으며, ‘강희(康熙)45년’ 명(銘)의 와당이 출토되어 숙종32년(1706)에 구룡사가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룡사의 모든 건물은 숙종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밖에 참고할 자료는 없으며 근래에 이루어진 중수(重修)에 대해서는 태허당(太虛堂) 종영사(宗泳師)의 공적을 들 수 있습니다. 종영사는 황폐되었던 사찰 전모를 중신(重新)하여 1966년에 보광루(普光樓)를 해체 복원하여 단청을 마쳤고, 1968년에는 심검당(尋劍堂) 및 요사(寮舍)를 보수하였습니다. 1971년에는 삼성각(三聖閣)을 보수 단청하였으며, 1986년에 사찰이 말끔히 단장되었습니다. <구룡사, 문화재청 자료>

 

 구룡사(龜龍寺)



구룡사(龜龍寺)


미륵석불/거북과 약사여래[사천왕문 좌측]


 보광공덕탑(普光功德塔) /삼층석탑[사천왕문 우측]


사천왕문(四天王門)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의 사천왕문(四天王門)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네 명의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상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사천왕상(四天王像): 왼쪽은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 오른쪽은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사천왕상(四天王像): 왼쪽은 남방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 오른쪽은 서쪽을 방어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


사천왕문(四天王門) 후면



 보광루(普光樓)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지나면 보광루(普光樓)의 모습이 보입니다. 보광루는 구룡사의 누문(樓門) 역할을 하는 건물로 사천왕문 뒤쪽의 높은 축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누하(樓下)인 1층의 계단을 오르면 바로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 앞마당에 이릅니다.


 보광루(普光樓) 


보광루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후기 건물로 탑정진입부에 세워진 강당을 겸한 구룡사의 불이문(不二門) 역할을 하는 정면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형태의 2층누각 건물입니다. 기단은 자연석이며 배흘림이 있는 둥근 기둥을 세운 뒤에 그 위로 누각형 건물을 올렸습니다. 누각층은 대웅전 앞 마당을 향해 개방시킨 형태이며, 기둥은 1층보다 빈약한 배흘림이 없는 원형기둥을 사용하였습니다. 천장은 우물반자이며 누마루는 우물마루인데 한때 마루에는 짚으로 만든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멍석이 깔려있었다고 합니다.  <문화재청> 



치악산구룡사(雉岳山龜龍寺)


입구의 추녀 밑에 ‘치악산구룡사(雉岳山龜龍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안내판>


보광루(普光樓) 2층누각


구룡사의 출입은 사천왕문(四天王門)을 통과하여 보광루 아래 부분의 트여 있는 가운데 칸을 통로로 삼아 대웅전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누하진입방식(樓下進入方式)인데, 이러한 방식은 경사진 지형에 조성된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구룡사 중심 경내로 들어가는 정문으로 6・25전쟁 때도 소실되지 않고 잘 남아 있는 조선후기의 건물입니다. 2008년 보광루 해제보수 공사 중 발견된 상랑문에 의해 정해년(1707) 이거나 그 이전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원주시 자료>



보광루 아래 부분의 트여 있는 가운데 칸을 통로로 삼아 대웅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



                대웅전(大雄殿) 현판


대웅(大雄)이란 위대한 영웅이란 뜻으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표현한 말입니다. 즉, 큰 힘으로 사마(四魔)를 항복시킨다는 뜻에서 붙여진 부처님의 덕호(德號)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대웅전(大雄殿):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사찰의 중심 건물입니다.

대웅전(大雄殿)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정면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다포식(多包式) 단층 건물입니다. 내부 불상 위에 있는 보개(寶蓋)는 중층으로 되어 있으며 천장의 중앙부는 우물천장을, 둘레에는 빗천장을 가설하였으며 연꽃과 봉황, 운문, 비천상 등을 채화하여 금단청과 함께 매우 화려하고 장엄합니다. 창호는 정자(井字)살창을 짜 각각 사분합의 문을 달았으며 내부의 바닥은 마루를 깔았습니다. 내부에는 삼존불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천불상을 봉안하고 있으며, 불단의 오른쪽 벽면에는 감로탱화와 신중탱화가 걸려있습니다. 대웅전은 내, 외부의 장식적인 조각 솜씨 및 구조 수법 등으로 보아 1900년대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76년 보수 단청하였습니다.  <구룡사 자료>



대웅전(大雄殿) 주련(柱聯)


달마하사답강래 (達摩何事踏江來) : 달마는 무슨 일로 강을 밟고 왔는가

동토산하춘초록 (東土山野春草綠) : 동토의 산과 들이 봄빛에 푸르기 때문이다

세존인하도솔래 (世尊因何兜率來) : 세존은 어인 일로 도솔천에서 왔는가

녹원원중백화향 (鹿園苑中百花香) : 녹야원 가운데 백화의 향이 만발하기 때문이다.


룡사(龜龍寺) 창건에 관한 전설


먼 옛날 1,300년전 무착대사라고도 하고 의상조사라고도 하나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절자리를 고르던 중 원주 치악산 구룡골에서 절을 세울 자리를 골랐습니다. 그런데 대웅전을 세울 자리에 연못이 있어 메워야겠다 생각했지만 그 연못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습니다. "연못을 메우자니 모처럼 용이 사는 것을 쫓아야겠고 난감한 일이구나.." 라고 대사가 말하는 것을 용들이 들었습니다. 용들은 "대사가 우리를 쫓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안놓여 살 수가 없오. 대사와 우리가 내기를 해서 우리가 이기면 이곳에 다 절을 지을 수 없고, 지면 선뜻 자리를 내어드리리다."고 하였습니다. 대사가 "너희들은 무슨 재주를 부리려고 하느냐?"고 하자 용들은 연못에서 날아 하늘로 치솟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우박같은 비를 쏟아 놓았습니다. 이 바람에 근처의 산들은 삽시간에 물에 잠기고 대사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하였지만 대사는 태연하게 비로봉과 천지봉 사에에 배를 매어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참 비를 퍼부은 용들은 대사가 물귀신이 되었겠다 생각하고 비를 거두고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대사는 배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아홉 마리의 용들이 내려오자 일어난 대사는 "너희들 재주가 고작 그 정도냐며 내가 조화를 부려볼테니 눈을 크게뜨고 잘 지켜보라."고 하며, 부적 한 장을 그려 연못 속에 넣었습니다. 얼마 안있어 연못에서는 더운 김이 무럭무럭 오르며 큰 연못의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였습니다. 물 속에서 뜨거움을 참지못한 용들은 뛰쳐나와 한다름에 동해바다로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아홉마리의 용들 중 한 마리의 용은 눈이 멀어 미쳐 달아나지 못하고 근처의 조그만 연못에옮겨 앉았습니다. 용들이 달아나자 대사는 못을 메우고 지금의 구룡사 대웅전을 지었다고 합니다. 뜨거운 물에 쫓겨 달아나던 용들은 다급한 나머지 구룡사 앞산에 여덟개의 골을 만들었으며도망 못한 눈먼 한 마리의 용은 구룡사 옆에 있는 용소에서 살다가 일제강점기 어느 여름 장마 때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합니다. <구룡사 자료>




    대웅전불단(大雄殿佛壇) <참고사진>


삼세불(三世佛)을 모시고 있는 불단으로 중심에는 현재불을 상징하는 석가불좌상, 오른쪽에는 미래불인 아미타불좌상, 왼쪽에는 과거불을 상징하는 약사불좌상입니다. 삼존불 위의 닫집은 못 하나쓰지 않고 세워져 목공예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구룡사 자료>



         대웅전삼존불(大雄殿三尊佛) <참고사진>



대웅전 신중탱화(神衆幀畵) <참고사진>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여러 선신(善神)을 도상화한 그림을 신중탱화라고 합니다. 많은 신들을 배치하여 그러므로 다양하고 복잡한 구도를 보이는 신중탱화는 일반적으로 제석(帝釋)과 하늘의 군사인 천룡(天龍)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무장을 한 신중들을 배치합니다. 그리고 이 신중탱화의 역할은 그 범위를 넓혀 참배자의 심성에 내재한 온갖 잡신을 음으로써 인간심성에 청정함을 갖게하여 이것이 곧 또다릉 호법과 호신의 길임을 깨닫게 합니다. <구룡사 자료>



대웅전 감로탱화(甘露幀畵) <참고사진>


감로탱화는 조상숭배 신앙이나 영혼 숭배의 신앙이 그림으로 펼쳐진 것입니다. 이것은 '우란분경변상도'라고도 부르며, 혹은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신 영가(靈駕)가 놓인 영가단에 걸기 때문에 '영단탱화' 또는 '감로왕탱화'라고 부릅니다. <구룡사 자료>


괘불석주(掛佛石柱)


특별한 행사 때 의식용불화(儀式用佛畵)인 괘불을 내걸기 위해 법당 앞에 세운 돌기둥입니다.



  

     삼층석탑 <참고사진>


                         삼층석탑


불음각(佛音閣)


불음각(佛音閣)은 불전사물(佛前四物)인 범종(梵鐘), 운판(雲板), 목어(木魚), 법고(法鼓)를 모신 전각인 ​ 범종각(梵鐘閣)입니다. 법고는 땅을, 목어는 물을, 범종은 불을, 그리고 운판은 바람을 각각 상징하고, 또 법고는 육지 중생, 목어는 어류 중생, 범종은 지옥 중생, 운판은 허공 중생을 제도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불음각(佛音閣)



불음각(佛音閣)


설선당(說禪堂)


승려들과 일반 신도들의 수학 정진하는 장소이며 종무소로도 이용합니다.


설선당(說禪堂)의 기도접수실 위 현판 '간연란야(看然蘭若)'  


간연(看然)은 자연을 보다는 뜻이고, 난야(蘭若)는 아란야(阿蘭若)의 준 말로 조용한 곳 즉 절을 의미합니다.


   

    설선당(說禪堂)과 심검당(尋劍堂) 그리고 동락당[적묵당] <참고사진>


심검당(尋劍堂)


사찰에서 선실(禪室) 또는 강원(講院)으로 사용되는 건물에 많이 붙이는 이름이며,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 하여 심검당(尋劍堂)이라고 합니다.


   심검당(尋劍堂) <참고사진>



       조사전(祖師殿), 동락원(同樂院)/적묵당(寂默堂) 그리고 심검당(尋劍堂) <참고사진>



                 동락원(同樂院)/적묵당(寂默堂): 스님들의 수행 공간  <참고사진>



  조사전(祖師殿)  <참고사진>


조사(祖師)에 대한 신앙을 기리기 위한 건물로 조사란 후세 사람들에게 경의를 받을 만한 승려이거나, 불교 종파를 개창했던 사람을 말합니다. 광의적인 개념에서는 큰 사찰을 창건한 승려까지 포함합니다. 


   조사전(祖師殿) 현판 <참고사진>


관음전(觀音殿)과 응진전(應眞殿)


관음전(觀音殿):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건물


       관음전 내부의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 <참고사진>


       중앙에 불단을 조성했고 불단 위에 관세음보살상을 모셨습니다. 관세음보살 뒤쪽에는 후불탱화가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 <참고사진>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나한전'이라고도 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존불로 가섭존자(迦葉尊者)와 아난존자(阿難尊者)를 협시불로 조성하고 그 좌우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16 나한(羅漢)을 모신 건물입니다.



응진전 내부 <참고사진>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셨고, 석가모니불 좌우측에는 가섭과 아난존자의 모습을 입상으로 조성해 봉안하였으며 불단 좌우측에는 각각 8분의 나한상을 모셨습니다.


       

       중앙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그리고 아난존자(阿難尊者: 왼쪽)와 가섭존자(迦葉尊者: 오른쪽)  <참고사진>


지장전(地藏殿)


지장전(地藏殿)은 지옥중생을 모두 구제하기 전에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지옥으로 내려간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 건물입니다.



지장전(地藏殿) 내부의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 <참고사진>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 <참고사진>


 삼성각(三聖閣) <참고사진>


삼성각(三聖閣)


삼성각(三聖閣)은 보통 사찰의 주불전 뒤편에 위치하는데 칠성(七星), 독성(獨聖), 산신(山神)을 함께 모십니다.


   삼성각 내부의 칠성(七星), 독성(獨聖), 산신(山神)탱화 <참고사진>



서상원(瑞像院) : 스님들의 공간인 요사(寮舍)로 사용합니다.



서상원(瑞像院)


연화정(蓮花亭): 누각 2층은 찻집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연화정(蓮花亭)


        

         육화당(六和堂)  <참고사진>


육화당은 구룡사 경내의 체험 전용관으로 숙소 및 문화체험 공간 11개 실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주제로 템플스테이[사찰체험]도 진행 하고 있습니다.


육화()


부처님은 공동생활에서 모든 사람이 염두에 두어야 할 여섯 가지의 중요한 윤리덕목()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육화()라 합니다.

첫째는 같은 계율을 가짐으로써 서로 화동()하고 애경()하라().
둘째는 의견을 같이 하라(). 오직 정법()에 의한 정견()만을 같이 해야 한다.
셋째는 이익을 균등하게 나누어 가지라().
넷째는 부드럽게 행동하라()
다섯째는 자비롭게 말하라()
여섯째는 남의 뜻을 존중하라()


 구룡소(龜龍沼)


예전에는 폭포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소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구룡사를 창건 할 당시 이 절 연못에 9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이를 물리치고자 부적을 한장 그려 연못에 던졌더니 연못물이 부글부글 끓고 이중 8마리의 용이 뛰어나와 동해바다로 달아나고 나머지 한 마리의 용이 눈이 멀어 이곳에 살고 있다가 후에 승천하였다는 전설로 이곳을 구룡소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



● 원주 구룡사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 (原州龜龍寺木造觀音菩薩坐像과腹藏遺物)

      시도유형문화재 제174호 (지정: 2015.11.06), 조선시대



       

     목조관음보살좌상   (정면)                         <참고사진>                      (측면)


2014년 8월 개복한 조성발원문에 “康熙二十七年丙寅四月日”이라는 조성연대가 적혀있습니다. 1686년 4월에 현 횡성군 봉복사(鳳腹寺) 반야암(般若庵)에서 화원(畵員) 금문(金文)ㆍ대웅(大雄)ㆍ법휘(法輝)가 관음보살로 조성하였습니다. 봉복사 반야암은 670년(문무왕 10)에 창건되어 1748년(영조 24)에 천진암(天眞庵)과 같이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이외 1911년 발견된 개금발원문 내용으로 보살상은 1715년, 1767년, 1887년, 1911년까지 총 네 차례 개금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야암이 폐사된 후 1911년 이전 구룡사에 불상이 옮겨 봉안되어 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룡사 ,문화재청자료>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 (개금발원문)             <참고사진>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 (원문)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 (묘법연화경) <참고사진>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후령통] <참고사진>



●  원주 구룡사 아미타설법도 (原州龜龍寺阿彌陀說法圖) 

       문화재자료 제160호, 지정(등록)일: 2014.03.07  시대: 조선시대



 원주 구룡사 아미타설법도 (原州龜龍寺阿彌陀說法圖) <참고사진>


구룡사 아미타설법도는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입상을 포함하여 4구의 보살상이 협시하고, 그 바깥쪽에 사천왕이 각각 2구씩 배치되어 있으며 화면의 위쪽에는 가섭과 아난존자를 포함하여 여덟 제자상이 배치되어 총 17존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미타불의 팔대보살을 4대보살로 줄이고, 여래의 십대제자를 여덟 존자로 줄였지만 형태의 표현이나 배채기법이 안정적이고 금니도 풍부하게 사용되어 그림의 격을 높여줍니다. 불화의 전체적인 구도와 배치가 안정적이고 화기(畵記)를 통해 제작자와 제작시기(1887년)를 알 수 있는 작품으로 조선후기 강원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승려 화사(畵師)들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지정 보존가치가 있습니다. <구룡사 ,문화재청자료>



●  원주 구룡사 금고 (原州龜龍寺金鼓)

       문화재자료 제161호 지정(등록)일: 2014.03.07,  시대: 조선시대


           원주 구룡사 금고(原州龜龍寺金鼓) <참고사진>


구룡사 금고는 중앙의 당좌구(撞座區)를 중심으로 6개의 동심원을 두르고 있는데, 동심원 사이의 간격을 다양하게 하여 단조로움을 피했습니다. 중앙 당좌구에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는 고려시대 금고와 달리 조선시대의 금고는 중앙 당좌구에 문양이 표현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대신 동심원의 간격이 가장 넓은 구획에 범자문(梵字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범자는 둥근 원 안에 새겨져 있는데, 6개의 범자문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금고의 측면에는 금고를 매달기 위한 3개의 반원형 고리가 마련되어 있으며, 두 줄의 양각된 선으로 측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통상 측면이나 후면 구연부에는 금고를 만든 시기, 사명(寺名), 발원문, 제작자, 무게 등 금고의 제작과 관련된 명문을 기록한 경우가 많지만, 구룡사 금고의 경우 아쉽게도 명문은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뒷면은 넓게 뚫려 있으며, 여러 줄의 동심원 자국은 금고의 제작기법과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줍니다. 이처럼 당좌구역에 문양이 전혀 없고, 가장자리의 넓은 구획면에 6개의 범자문을 새겨 넣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조선 후기 금고의 일반적인 형식입니다. <구룡사 ,문화재청자료>



●   원주 구룡사 삼장보살도(原州龜龍寺三藏菩薩圖) 

        보물 제1855호,  지정(등록)일: 2015.03.04 ,  시대: 조선시대


 원주 구룡사 삼장보살도(原州龜龍寺三藏菩薩圖) <참고사진>



원주 구룡사 삼장보살도는 1727년에 화승 白基와 英輝가 조성하여 치악산 구룡사에 봉안했던 삼장보살도로서, 「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 「五種梵音集」 등 수륙재의식집에 의거하여 天藏菩薩, 持地菩薩, 地藏菩薩 등 세 보살의 會上을 묘사하였습니다. 가로와 세로로 접힌 자욱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안료가 박락되기는 했지만, 밝은 녹색과 적색을 중심으로 노란색과 파란색 등 중간색이 어우러진 화사한 색감, 균형잡힌 신체에 둥근 얼굴, 살짝 치켜 올라간 눈, 가늘고 긴 코, 작고 꽉 다문 입술 등 18세기 전반 불화의 특징이 잘 표현된 수작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전반 靈駕薦度 및 追善供養을 위한 수륙재의식 때 봉안되었던 작품입니다. <구룡사 ,문화재청자료>



●   구룡사삼장탱화및복장유물(龜龍寺三藏幀畵및腹藏遺物)  

     시도유형문화재 제136호, 지정일: 2001.12.29, 시대: 조선시대

 

 구룡사 삼장탱화(龜龍寺三藏幀畵) <참고사진>


 구룡사 복장유물(龜龍寺腹藏遺物) <참고사진>






                                               구룡사(龜龍寺)/원주(原州)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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