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묘(太廟)
중국 북경(北京) / 태묘(太廟)의 경관(景觀)
☞ 건축물(建築物) 계속
▣ 삼대전(三大殿)
삼대전(三大殿)의 위치 <google자료사진>
극문(戟門) 안 중축선(中軸線) 상에는 전전(前殿), 중전(中殿), 후전(後殿)의 3좌(座) 대전(大殿)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삼대전(三大殿)은 3층의 기단(基壇)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넓은 뜰에 주위의 회랑들이 감싸고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줍니다.
▶ 전전(前殿)/향전(享殿)
전전(前殿)의 위치 <google자료사진>
전전(前殿) <참고사진>
전전(前殿)은 삼대전(三大殿) 중의 주전(主殿)으로 태묘(太廟) 건축군(建築群)의 중심이며, 명청(明淸) 양대(兩代)의 황제가 제조대전(祭祖大典: 조상에 지내는 제향의례)인 대사(大祀: 큰 제사)를 거행하던 곳입니다. 그래서 향전(享殿)으로 불립니다.
<참고사진>
전전(前殿)은 명(明) 영락18년(1420)에 건설하였으며, 명말(明末) 청초(淸初)에 훼손되는 피해를 입어 순치(順治)년간 중수하였는데, 명대(明代) 때의 기본 골격과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전전(前殿)의 평면도 <google자료사진>
<참고사진>
전전(前殿)은 정면11칸[68.2m], 측면6칸[30.2m], 건축면적 2240㎡, 황유리기와, 이중처마 건물로 전(殿)의 높이는 32.46m입니다.
<참고사진>
전전(前殿)은 3중[3.46m]의 한백옥(漢白玉) 수미좌(須彌座)식 기단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전전(前殿) 사면의 주위에 있는 석난간(石欄干) <참고사진>
전전(前殿)의 잡상(雜像) <참고사진>
<참고사진>
전전(前殿)은 원래 9칸에서 후에11칸으로 고쳐지었는데 이는 건륭제가 자기 사후에 신주가 태묘에 들어가 제사를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집니다.
태묘(太廟) 현판 <참고사진>
전전(前殿)의 처마 밑에 9룡(九龍)이 조각된 액자에 한만문(漢滿文)으로 "太廟"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태묘(太廟) 전전(前殿) 단폐(丹陛)/답도(踏道) <참고사진>
태묘(太廟) 전전(前殿)의 단폐(丹陛)/답도(踏道)에는 용문석(龍文石), 사문석(獅紋石)과 해수석(海獸石)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참고사진>
전내(殿內)의 보, 도리 등의 주요 구조부재는 침향목(沈香木)을 사용하였고, 황색(黃色)의 향목(香木)안료를 사용하여 칠하고 단장하여 마치 꽃이 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색조가 담백하고 우아합니다.
<참고사진>
전내(殿內) 68개의 큰 기둥과 주요 부재는 최상급 남목(楠木: 녹나무과)인 금사남(金絲楠)이 사용되어 중국 내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금사남(金絲楠) 나무 궁전(宮殿)으로 불립니다.
태묘(太廟) 전전(前殿) 중심 기둥 주춧돌 <참고사진>
<참고사진>
바닥에는 금전(金磚)이 깔려있고 천화판(天花板)은 붉은색과 금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붕, 천청 및 기둥에는 채색장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전(前殿)의 신좌(神座) <참고사진>
또한 전내(殿內)에는 목제(木製)의 금칠된 신좌(神座)를 모셨으며 황제의 신좌(神座)에는 용(龍)이 조각되어 있고, 황후의 신좌(神座)에는 봉황(鳳凰)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청(淸)나라가 망할 때까지 전전(前殿)에는 35좌(座)의 신좌(神座)가 있었고 신좌(神座)의 앞에는 크고 작은 탁자들, 향안(香案)과 동로(銅爐), 동등(銅燈), 동제기(銅祭器) 등의 공품(供品)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태묘(太廟) 협제(祫祭) 위차도(位次圖) <참고사진>
신좌(神座)의 수(數)와 중전(中殿)과 후전(後殿)에 모셔진 위패(位牌)의 수가 일치하였고, 협제(祫祭) 등 큰 규모의 제사(祭祀)를 거행할 때 중전(中殿)과 후전(後殿)의 신감(神龕) 내의 제후(帝后)의 위패(位牌)를 전전(前殿)으로 옮겨 신좌(神座) 위에 안치시킵니다.
태묘(太廟) 시향(時饗) 진설도(陳設圖) <참고사진>
제사는 매년 4계절 첫달[음력1월, 4월, 7월, 10월]에 모시는 시향(時享), 연말에 모시는 협제(祫祭), 그리고 혼인을 하거나, 상(喪)을 당하거나, 황제로 등극(登極)하거나, 친정(親政), 책립(冊立), 출정(出征) 등 국가의 대사(大事)를 고하는 고제(告祭) 그리고 황제의 생일, 청명절, 7월15일, 선황의 기일 등 중요한 날 이곳에서 제사를 모시게 됩니다.
<참고사진>
성대하고 엄숙하게 모셔질 제사 전 먼저 중전(中殿)과 후전(後殿)에 보관되어있는 조상의 신주(神主)를 옮겨 전전(前殿)의 신좌(神座)에 소목(昭穆)의 순서로 안치합니다. 소목(昭穆)이란 신주를 사당에 위치시키는 차례를 일컫는데, 왼쪽줄은 소(昭), 오른쪽 줄은 목(穆)이라 합니다. 시조(始祖)의 1세를 가운데 모시고, 2,4,6세를 소(昭)에, 3,5,7세를 목(穆)에 모시는 것이 관례입니다.
신주(神主)에는 묘호(廟號)、휘호(徽號)、시호(諡号)、존호(尊號)의 4호(四號)가 쓰여있다.
명(明) 태조(太祖)의 신주(神主):“太祖 开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人文義武俊德成功 高 皇帝”
명(明) 성조(成祖)의 신주(神主):“成祖 启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 文 皇帝”
청(淸) 자희(慈禧)의 신주(神主):“孝钦 慈禧端佑康颐昭豫庄诚寿恭钦献崇熙配天兴圣 显 皇后”
존호(尊號)는 봉건시대 황제, 황후, 황태후 등이 생전에 부여받은 칭호로 일반적으로 외교(外交), 의례(儀禮), 제사(祭祀) 등에 사용된다. 또한 황제의 존호를 위로는 왕공귀족(王公贵族)으로 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누구를 막론하고 그 글자를 사용할 수 없고 이름에서도 피해야한다.
휘호(徽號)는 존호(尊號)의 별칭으로 즉 황제와 황후, 비빈의 생전에 공(功)과 덕(德), 공경(恭敬)과 아름다움을 기리는 표시로 부여하는 칭호로 자안(慈安)、자희(慈禧)와 같이 대개 두 글자로 정하는데, 한사람이 일생동안 여러 휘호를 가질 수 있어 모두 합하면 일반적으로 매우 길다.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휘호(徽號): “开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人文義武俊德成功” 20자(字)
시호(諡号)는 중국 고대 군주, 제후, 대신, 후비 등 일정한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 죽으면 그들의 일생을 평가하고 공덕을 기리기 위해 부여하는 칭호임.
청대 제도는 황태후 사후의 諡號는 12자로 하며 첫 글자는 반드시 "孝"로 시작하고 10번째 글자는 반드시 "天"자를 쓰며, 12번째 글자는 반드시 "聖"자를 쓰며, 나머지 9자는 생전의 徽號에서 4글자를 선택하고 새로 5글자를 덧붙인다고 규정하였다.
묘호(廟號)는 황제의 사후 신주(神主)가 태묘(太廟)에 안치되고 제사를 받게 될 때 그 황제의 치세와 업적을 담아 부여하는 호칭.
예) 太祖、高祖、世祖、熙祖、太宗、高宗、顯宗、肅宗等
원래의 모습이 아닌 현재 태묘(太廟)의 전전(前殿) 내부 모습 <참고사진>
제향(祭享)이 거행될 때는 의장(儀仗)이 정숙하게 갖추어지고, 음악이 연주되고 일무(佾舞)가 춤을 추는데 이것은 중국의 황실 제사문화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현재 내부는 원래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중화화종(中華和鐘)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전(前殿)의 평면도 <google자료사진>
전전(前殿)의 뒷면 <참고사진>
▶ 전배전(前配殿)
전배전(前配殿)의 위치 <google자료사진>
전전(前殿) 뜰앞 동, 서 양쪽에는 배전(配殿)이 있고 동배전(東配殿)에는 공을 세운 황족(皇族)들의 신위가, 서배전(西配殿)에는 황족 이외의 공을 세운 공신(功臣)들의 위패(位牌)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전전동배전(前殿東配殿) <참고사진>
공(功)이 있는 친왕(親王:황족) 들의 위패(位牌)를 봉안하는 곳입니다. 명대(明代)에 건설되었으며 황유리기와 단처마 건물로 정면 15칸이며, 앞쪽에 퇴칸이 있고 명대(明代) 관청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전전동배전(前殿東配殿) <참고사진>
청대(淸代) 전내(殿內)에는 공(功)이 있는 만몽(滿蒙) 친왕(親王:황족) 들인 대선(代善), 다이곤(多爾袞), 다탁(多鐸), 윤상(允祥), 혁흔(奕訢) 등 13명의 위패(位牌)가 봉안되어 있었으며, 명대(明代)에는 17명의 위패(位牌)가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전전동배전(前殿東配殿)의 열주(列柱) <참고사진>
전전동배전(前殿東配殿) 매칸에는 하나의 감실[龕]이 설치되어 있으며 목제(木製) 홍칠(紅漆)이 되어있고 금색으로 쓴 만한문(滿漢文) 위패(位牌)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전전서배전(前殿西配殿) <참고사진>
공(功)이 있는 대신(大臣)들의 위패(位牌)를 봉안하는 곳입니다. 명대(明代)에 건설되었으며 황유리기와 홑처마 건물로 정면 15칸이며, 앞쪽에 퇴칸이 있고 명대(明代) 관청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전전서배전(前殿西配殿) <참고사진>
청대(淸代) 전내(殿內)에는 만몽한(滿蒙漢) 문무공신(文武功臣) 들인 악이태(䣞爾泰), 장정옥(張廷玉), 부항(傅恒), 승격임심(僧格林沁) 등 13명의 위패(位牌)가 배향(配享)되어 있었으며, 명대(明代)에는 15명의 중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내부의 배치는 태묘향전동배전(太廟享殿東配殿)과 같이 매칸에는 하나의 감실[龕]이 설치되어 있으며, 목제(木製) 홍칠(紅漆)이 되어있고 금색으로 쓴 만한문(滿漢文) 위패(位牌)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 중전(中殿)/침전(寢殿)
중전(中殿)의 위치 <google자료사진>
중전(中殿)과 전전(前殿) <참고사진>
중전(中殿) <참고사진>
중전(中殿)은 역대 제후의 신위(神位)를 봉안하던 곳이며, 돌아가신 황제들이 잠자는 곳이라 하여 침전(寢殿) 또는 침궁(寢宮)이라고 불립니다.
중전(中殿) <참고사진>
명(明) 영락18년(1420)에 건설 되었으며 황유리기와,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9칸[62.31m], 측면4칸[20.54m], 높이 21.95m의 건물입니다.
중전(中殿) <참고사진>
한백옥(漢白玉) 수미좌(須彌座) 기단 위에 자리잡고 주위에 석난간(石欄干)을 둘렀습니다. 망주에는 용(龍)과 봉(鳳)을 교대로 조각하였습니다. 중앙계단에는 답도(踏道)를 장식해 두었습니다. 평시에는 역대황제와 황후의 위패를 모시는 곳입니다.
<참고사진>
전전(前殿)과는 노대(露臺)로 서로 연결되어 통하고 있으며 전 밖의 돌계단 밑 좌우에는 각각 석등(石燈)이 2개가 있습니다.
석조용두(石雕龍頭), 이수(螭首) <참고사진>
<참고사진>
중전(中殿)과 후전(後殿) 사이에는 담장과 5개의 문이 있습니다.
<참고사진>
청대(淸代)에는 내부가 17개의 감실(龕室)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를 동당이실(同堂異室)이라고 하며, 매 감실(龕室)에는 일대(一代)의 제후(帝后)의 신주(神主)를 모셨습니다. 전내(殿內) 정 중앙실에는 태조(太祖)의 신주(神主)를 모셨으며, 나머지 선조들의 신위는 동, 서쪽 협실(夾室)에 나누어 모셨습니다. 나무로 만든 신주(神主)에는 돌아가신 황제의 묘호(廟號), 휘호(徽號), 시호(諡號)와 존호(尊號)를 새겼습니다.
<참고사진>
청말(淸末)에는 청태조(淸太祖) 누르하치, 태종(太宗) 홍타이지, 세조(世祖) 순치제, 성조(聖祖) 강희제, 세종(世宗) 옹정제, 고종(高宗) 건륭제 등 11대 제후의 신주(神主)가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청(淸)나라가 멸망할 때 중전(中殿) 내 6개의 감실(龕室)은 미사용으로 있었습니다.
중전(中殿) 내부 <참고사진>
매 감실(龕室) 내에는 신감(神龕)이 설치되어 신의(神椅), 향안(香案), 상탑(床榻), 욕침(褥枕) 등이 진설되어 있으며, 신감(神龕) 내에는 제후(帝后)의 신주(神主)가 편히 기거 하도록 요(褥) 위에 놓여 있습니다. 좌측에는 제후(帝后)의 옥책(玉冊), 우측에는 제후(帝后)의 옥보(玉寶)가 진설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감실(龕室) 밖에는 보좌(寶座)가 있고 그 수는 신감(神龕) 내의 신주(神主)의 수와 같습니다.
중전행례위차도(中殿行禮位次圖) <참고자료>
매번 제사가 있기 하루 전 신주(神主)를 전전(前殿)인 향전(香殿)으로 옮겨 신좌(神座)에 안치하였으며, 제사가 끝난 후 신주(神主)는 다시 중전(中殿)으로 돌아와 감실(龕室)에 봉안하게 됩니다.
▶ 중배전(中配殿)
중배전(中配殿)의 위치 <google자료사진>
중전동배전(中殿東配殿) <참고사진>
중전(中殿) 동서 양쪽에는 각각 5칸의 배전(配殿)이 있는데, 그곳에는 제기(祭器)를 보관하였습니다.
두(豆) 보(簠)
제기(祭器) <참고사진>
중전서배전(中殿西配殿) <참고사진>
▶ 후전(後殿)/조묘(祧廟)
후전(後殿)의 위치 <google자료사진>
후전(後殿)의 유리문(琉璃門) <참고사진>
중전(中殿)과 후전(後殿) 사이에는 담장이 있고 담장에는 유리문(琉璃門)이 있습니다. 그리고 후전(後殿)의 사방 주위에는 붉은 담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후전(後殿)의 유리문(琉璃門) 안쪽 <참고사진>
중전(中殿)을 나와 후전(後殿)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5개의 문이 있는 유리문(琉璃門)을 지나야 합니다.
후전(後殿) 유리문(琉璃門)의 각문(角門)
초도(椒圖) <참고사진>
붉은 대문에는 도깨비 얼굴 모양의 초도(椒圖)가 장식되어 있는데, 초도(椒圖)’란 용의 아홉째 아들을 이르는 말로서 초도는 남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사용됩니다. 얼굴이 마치 ‘후추나무’와 같이 맵고 흉하게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정척용문(正脊龍吻) <참고사진>
유리문(琉璃門)의 지붕에는 황색 유리기와(琉璃瓦)를 얹었으며 용마루[정척(正脊)]의 양쪽 끝에 용(龍) 모양의 유리기와 장식물이 있어 용문(龍吻)이라 칭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형태에 따라 치미(鴟尾) 또는 취두(鷲頭)라고 합니다.
유리문(琉璃門) 담장 너머 후전(後殿) <참고사진>
후전(後殿) <참고사진>
후전(後殿)은 조묘(祧廟) 또는 조전(祧殿)이라고도 하며, 청(淸)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선조(先祖)들의 신위(神位)를 봉안하던 곳입니다.
후전(後殿) <참고사진>
후전(後殿)은 명(明) 홍치4년(1491)에 건설되었으며 정면9칸[61.99m], 측면4칸[20.33m], 홑처마의 황유리기와 팔작지붕 건물로 건축의 형식은 중전(中殿)과 기본적으로 동일합니다.
후전(後殿) 단폐(丹陛)/답도(踏道)의 용문석(龍文石) <참고사진>
후전(後殿)의 내부 <참고사진>
전내(殿內)에는 침전(寢殿)과 같이 조성하였으며, 청대(淸代)에는 후전(後殿)의 내부가 9개의 구획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정 중앙에 조조(肇祖)의 신위(神位)를, 좌측에는 흥조(興祖), 그 옆 좌측에는 현조(顯祖) 그리고 우측에는 경조(景祖)의 신위(神位)를 봉안하였습니다. 그리고 옥책(玉冊), 옥보(玉寶), 보좌(寶座) 등이 진설되어 있었습니다.
여진족의 세 분파 중 하나인 건주여진(建洲女眞)의 우두머리였던 누르하치는 여진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을 만주족으로 개칭한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데, 이는 후금(後金)과 중국을 점령한 후의 청나라(淸)의 기반이 된다.
조조(肇祖) <참고사진>
조조(肇祖):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의 6대조로 애신각라맹특목(愛新覺羅孟特穆), 오도리만호부(斡朶里萬戶府)의 만호이자 제1대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재위: 1405년~1433년)
흥조(興祖): 청(淸) 태조 누르하치의 증조부로 애신각라복만(愛新覺羅福滿, 재위: 1522년~1542년)였다
경조(景祖): 청(淸) 태조 누르하치의 조부로 애신각라각창안(愛新覺羅覺昌安, 재위: 1542년~1571년)
현조(顯祖): 청(淸) 태조 누르하치의 아버지로 애신각라탑극세(愛新覺羅 塔克世, 재위: 1542년~1571년)
<참고사진>
매 계절의 첫째달[음력 1, 4, 7, 10월] 관원(官員)이 대행(代行)하는 시향(時享)과 년말(年末)에 지내는 협제(祫祭)에는 선조의 위페를 향전(享殿)으로 옮겨 모시게 됩니다.
<참고사진>
전(殿) 밖 월대(月臺)로 오르는 돌계단 중앙 계단에는 용문양이 조각된 답도(踏道)가 있습니다. 그리고 후전(後殿)의 동남쪽 모퉁이에는 축폐(祝帛:축문과 폐백)을 불사르는 철료로(鐵燎爐) 1좌(座)가 있었으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후전(後殿)의 이수(螭首) <참고사진>
후전(後殿) <참고사진>
건국(建國) 후 태묘(太廟)는 노동인민문화궁(勞動人民文化宮)으로 바뀌어 청대(淸代) 때 내부에서 사용하던 것들은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재 후전(後殿)에는 제사용품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 후배전(後配殿)
후배전(後配殿)의 위치 <google자료사진>
후전동배전(後殿東配殿) <참고사진>
후전서배전(後殿西配殿) <참고사진>
후전(後殿)의 동,서배전(東西配殿)은 조묘(祧廟)에서 사용하는 제기들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명대(明代)에 건설하였으며 정면5칸, 홑처마, 황유리기와 지붕 건물입니다.
▶ 태묘(太廟) 후문(後門)
태묘(太廟) 후문(後門)의 위치 <google자료사진>
조묘(祧廟)의 후문(後門) / 태묘(太廟)의 후문(後門) <참고사진>
중국 북경(北京) / 태묘(太廟)의 경관(景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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