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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北京) - 태묘(太廟)/경관(景觀) 1

케인스 2013. 9. 17. 00:12

 

 

                                                                태묘(太廟)

 

                                         중국 북경(北京) / 태묘(太廟)의 경관(景觀) 1

 

 

 

건축물(建築物)의 배치(配置)

 

 

                                  북경(北京)의 태묘(太廟)지역 <google자료사진>

 

태묘(太廟)의 건축은 기본적으로 명(明) 가정(嘉靖)년간 중건(重建) 때의 규모로 명대(明代) 건축군(建築群)의 전형(典型)입니다. 

 

      <참고사진>

     

태묘(太廟)는 북쪽에 자리잡고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약165,000㎡ 면적에, 약9m의 높은 담장으로 둘러 싸여있습니다. 세 겹의 담장으로 둘러 싸여있는데, 제일 바깥 담에 있는 태묘가문(太廟街門)이 원래 태묘(太廟)의 정문(正門)이었으나, 현재는 남문(南門)을 정문으로 여깁니다. 남문(南門)을 들어서면 고백(古柏)이 무성하게 늘어서 있고 항상 푸르러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남문의 동쪽에는 재생정(宰牲亭), 치생방(治牲房)과 정정(井亭) 등이 있는 희생소(牺牲所)가 있으며, 서쪽에는 봉사서(奉祀署) 옛터가 있습니다.

 

               

             북경(北京) 태묘(太廟) 평면도 <참고자료>

 

남문을 지나 북쪽으로 진행하면 중간 담의 정면에 있는 수미좌(首彌座) 기단의 유리문(琉璃門)을 만나게 되며, 유리문을 지나면 옥대하(玉帶河)와 금수교(金水橋)가 보입니다. 금수교 북쪽의 동, 서에 각 하나의 육각(六角) 정정(井亭), 금수교 남쪽에는 동, 서로 신주(神廚)와 신고(神庫)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제일 안쪽 담의 정문인 극문(戟門)을 만나게 됩니다. 태묘(太廟)의 극문(戟門)을 들어서면 넓은 뜰이 담장 밖의 울창한 숲지역과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에 태묘(太廟)의 주 건물인 삼대전(三大殿)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먼저 태묘(太廟)의 정전(正殿)인 전전(前殿) 즉 향전(享殿)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뒤에는 중전(中殿)인 침전(寢殿)이, 그 북쪽으로 후전(後殿)인 조묘(祧廟)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건축물(建築物)

 

 

태묘(太廟)의 대문(大門)

 

 

                       <google자료사진>

 

천안문(天安門) 내 어로(御路) 동쪽에 있는 태묘가문(太廟街門)이 원래 태묘(太廟)의 정문입니다. 태묘(太廟)를 개방한 후에는 천안문(天安門) 앞 장안가(長安街)에 노동인민문화궁(勞動人民文化宮)의 정문(正門)인 남문(南門)을 새로 만들어 태묘의 입구문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태묘가문(太廟街門)과 천안문(天安門) 내 어로(御路) 서쪽에 있는 사직단(社稷壇)의 문(門)과는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 태묘가문(太廟街門)

 

  태묘가문(太廟街門) <참고사진>

 

태묘가문(太廟街門)은 원래 태묘(太廟)의 정문(正門)으로 천안문(天安門)과 단문(端門) 사이의 동쪽에 위치하며, 정면5칸의 궁전식 대문(大門)입니다. 이 문은 황제가 태묘에 제사를 지낼 때 출입하는 문입니다. 제사 때 황제는 정중앙에 있는 문을 이용하였고, 제사에 참여하는 관원들은 양측의 문을 이용하였습니다.

 

 태묘가문(太廟街門) 안쪽 <참고사진>

 

태묘가문(太廟街門)은 명대(明代)에 처음 세워졌고, 청대(淸代)에 다시 고쳐 지었습니다.

 

     태묘가문(太廟街門) 안쪽 <참고사진>

 

● 태묘우문(太廟右門)

 

 태묘우문(太廟右門) <참고사진>

 

태묘우문(太廟右門)을 신주문(神廚門)이라고도 하며 그 이름에서 보듯 제사(祭祀)용품을 운반할 때 사용하던 문으로, 3칸의 궁전식 대문(大門)입니다. 단문(端門)의 후면 동쪽에 위치하며, 사직단좌문(社稷壇左門)과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태묘우문(太廟右門) 안쪽 <참고사진>

 

태묘우문(太廟右門)은 명대(明代)에 처음 세워졌고, 청대(淸代)에 다시 고쳐 지었습니다.

 

   태묘우문(太廟右門) 안쪽 <참고사진>

 

● 서북문(西北門)/각문(角門)

 

                     

                      서북문 위치 사진 <자료사진> 

 

          

           서북문 위치 위성사진 <google자료사진>  

 

 

 

 

      

     서북문(西北門) <참고사진>

 

서북문(西北門) 또는 서문(西門), 각문(角門) 이라 하며, 태묘의 서북쪽 모퉁이에 위치하고 오문(午門) 앞 궐좌문(闕左門) 안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서북문(西北門) <참고사진>

 

서북문(西北門)은 명대(明代)에 처음 건설하였으며, 청대(淸代)에 개건(改建)하였습니다. 궐우문(闕右門) 뒤의 사직단 동북문(東北門)과 서로 대칭하고 있습니다.

 

 궐좌문(闕左門) 안쪽의 서북문(西北門) <참고사진>

 

청대(淸代) 옹정(雍正) 황제의 안전을 위한 문이라는 설이 있는데 제사를 위해 태묘(太廟)에 이르면 태묘가문(太廟街門) 대신에 이문으로 진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원(官員)이 아닌 잡역인(雜役人)들이 출입하는 문으로 보입니다.

 

  <참고사진>

 

예전에는 화갑문(花甲門)으로 불렀으며 원래의 문과 담은 현재 존재하지 않고 황유리기와 단처마 형태로 근대(近代)에 다시 지었습니다.

 

● 동문(東門)

 

           동문 위치 위성사진 <google자료사진> 

 

          동문(東門)  <참고사진>

 

         동문을 나서면 남지자가로(南池子街路)를 만나게 됩니다

 

● 문화궁 남문(文化宮南門)

 

노동인민문화궁(勞動人民文化宮)의 정문(正門)인 남문(南門)  <참고사진>

 

현재 남문(南門)은 태묘(太廟)의 입구로서 원래 이곳에는 문(門)이 없었습니다. 천안문 뒤쪽으로 서북쪽문이 있었으나 보통 때는 이곳에 출입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매우 폐쇄적인 구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국13년(1924) 화평공원(和平公園)으로 탈바꿈하면서, 장안가 쪽에서 입장이 가능하도록 인위적으로 입구를 만들었으며, 1914년 중산공원(中山公園) 남문과 동시에 세워졌습니다.

 

 <참고사진>

 

1924년 중국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溥儀)가 이 문으로 출궁하였습니다.

 

남문(南門)  <참고사진>

 

현재 북경시(北京市) 노동인민문화궁(勞動人民文化宮) 정문(正門)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 삼좌문(三座門)

       

                     삼좌문 위치 사진 <자료사진>

 

남문(南門)의 동쪽에는 원래 삼좌문(三座門)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만 현재는 없습니다.

 

 

희생소(牺牲所)

 

                

                  희생소(牺牲所) 위치 사진 <google자료사진> 

 

희생소(牺牲所)는 노동인민문화궁(勞動人民文化宮)의 정문(正門)인 남문(南門)을 들어서서 동쪽에 위치하며 황유리기와 건물로 서향(西向)입니다.

 

      

       희생소(牺牲所) 입구  <참고사진>

 

 

희생소(牺牲所)  <참고사진>

 

희생소(牺牲所)는 명대(明代)에 세워졌으며, 황제(皇帝)들이 그들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소, 양, 돼지 등을 이곳에서 죽이어 잡는 곳입니다.

 

                                     <google자료사진>

 

        희생소(牺牲所)  <참고사진>

 

정문 곁에 북전(北殿: 희생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관원들이 머무는 곳)이 있고, 정문 안쪽에 치생방(治牲房: 잡은 희생을 조리하는 곳)과 이웃해 재생정(宰牲亭: 희생을 잡는 곳)이 있으며, 또한 육각정(六角亭)인 정정(井亭)이 있는데 희생을 세척하기 위한 물을 이 우물에서 공급합니다.

 

                      희생소(牺牲所) 대문 안의 치생방(治牲房)  <참고사진>

 

            동과(銅鍋)  <참고사진>


희생소(牺牲所)에는 동과(銅鍋)가 있는데 이것은 명대의 유물로 청동(靑銅)으로 만들었으며 입구와 밑부분은  원형으로 되어 있고, 희생소(牺牲所)에서 희생(牺牲)을 가공할 때나 신주(神廚)에서 제사용 음식을 끓이거나 삶을 때 사용하는 취사(炊事) 도구입니다.   

     

                       희생소(牺牲所) 대문 앞의 정정(井亭)  <참고사진>

 

 

봉사서(奉祀署) 구지(舊址)

 

 

                     

                      봉사서(奉祀署) 구지(舊址) 위치도  <참고자료>

 

     봉사서(奉祀署) 구지(舊址)  <참고사진>

 

봉사서(奉祀署)에서는 평소에 태묘의 건물 및 집기를 관리하였습니다. 원래 담으로 에워싸여 독립적인공간에 있었으며 대문(大門)은 북향이었고, 좌우에 각각 3칸의 방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근대에 설치하여 타 용도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원상회복이 되어야 할 부분 입니다.

 

           <참고사진>

 

명대(明代)에는 봉사서(奉祀署)에 태감(太監) 1명, 기타 관리인원 10여명이 있었고, 청대(淸代)에는 태상시(太常寺) 소속으로 7품 관리가 수령(首領)이었고, 8품 부수령(副首領) 2명, 태감(太監) 20명이 있었습니다.

 

유리문(琉璃門): 제전(祭殿)의 정문(正門)

 

 

유리문(琉璃門)의 위치 <google자료사진>

 

유리문(琉璃門)  <참고사진>

 

태묘(太廟) 대문(大門)을 진입한 후 수령 백년이 넘는 측백나무 숲을 지나면 높고 큰 붉은 담과 뜰을 만나게 됩니다. 담 남쪽 정 중앙에는 황색과 푸른색의 유리기와로 어우러진 화려한 유리문(琉璃門)이 있습니다.

 

유리문(琉璃門)  <참고사진>

 

이 유리문(琉璃門)이 제전(祭殿)의 정문(正門)인 오채유리문(五彩琉璃門)이며 오색문(五色門)이라고도 불리며 전문(前門)이라고도 표기합니다.

 

패방(牌坊)식 아취형 유리문(琉璃門)  <참고사진>

 

유리문(琉璃門)은 명대(明代)에 건설하였고, 패방(牌坊)식의 아취형인 3개의 문이 있습니다. 3개의 문 양쪽에는 사각형의 방문(方門)이 하나씩 자리잡고 있어 모두 5개의 문이 있습니다.

 

  <참고사진>

 

문 위에는 황녹유리기와로 장식되어 있고, 문 좌우 붉은 담장 밑에는 한백옥(漢白玉) 수미좌(須彌座)로 단장되어 있습니다.

 

                        홍문동정(紅門銅釘)  <참고사진>

 

자금성의 문과 마찬가지로 붉은색의 성문(城門)에는 양(陽)을 대표하는 길한 숫자 9로 이루어진 상하좌우 9개의 금장식 못[동정(銅釘)]이 박혀 있고, 도깨비 얼굴 모양의 초도(椒圖)가 장식되어 있는데, 초도(椒圖)란 용의 아홉째 아들을 이르는 말로서, 남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사용된다고 전합니다.

 

            사각형의 방문(方門)  <참고사진>

 

유리문은 5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간의 3개 문은 아취형이며 그 양쪽에 각각 1개씩의 방형(方形)의 문이 있습니다.

 

유리문(琉璃門) 안쪽  <참고사진>

 

문 안쪽에는 옥대하(玉帶河)와 금수교(金水橋)가 있는데 이 곳의 금수교와 자금성 내의 금수교는 서로 이름이 같습니다.

 

 

신주(神廚)와 신고(神庫)

 

 

신주(神廚)와 신고(神庫)의 위치 <google자료사진>

 

신주(神廚)  <참고사진>

 

신주(神廚)는 제사 때 황제(皇帝)의 조상에게 희생(犧牲: 소, 양, 돼지)을 올리기 위해 희생을 삶는 등 조리를 하는 곳입니다.

 

  

   신고(神庫)  <참고사진>

 

 

    신고(神庫)  <참고사진>

 

신고(神庫)는 명대(明代)에 건설하였으며 제사 때 사용하는 변(籩)、두(豆)、조(俎)、비(篚) 등의 제기(祭器)와 각색의 융단(絨緞), 수(繡), 장막(帳幕) 등 의식에 사용하는 의장(儀仗) 등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극문교(戟門橋)

 

 

극문교(戟門橋)의 위치 <google자료사진>

 

     

     극문(戟門)과 극문교(戟門橋)  <참고사진>

 

      유리문(琉璃門)을 들어서면 극문(戟門) 앞에 극문교(戟門橋)가 나타납니다.

 

어하수(御河水)  <참고사진>

 

극문교(戟門橋)는 명대(明代)에 처음 건설하였으며 건륭(乾隆)년간[1735~1796] 자금성(紫禁城)의 어하수(御河水)를 이곳으로 끌여들였고 아울러 원래의 다리를 다시 고쳐 세웠습니다. 극문교(戟門橋)는 그 형태가 옥대(玉帶)의 모양과 같다하여 예전에는 옥대교(玉帶橋)라고도 불렀습니다.

 

                      

                       단공석교(單孔石橋)  <참고사진>

 

극문교(戟門橋)는 그 길이가 8m로 7좌(座)의 한백옥(漢白玉) 단공석교(單孔石橋)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7개의 다리는 천안문(天安門) 앞의 금수교(金水橋)의 수와 같습니다.

 

극문교(戟門橋)  <참고사진>

 

다리 양쪽에는 한백옥(漢白玉) 난간이 있고 용(龍)과 봉(鳳)이 조각된 망주(望柱)가 번갈아 배열되어 있습니다.

 

극문교(戟門橋) 위성사진 <google자료사진>

 

어하수(御河水) 위의 7개의 다리 중에서 가운데 3개의 다리는 유리문(琉璃門)과 극문(戟門) 앞의 태계(太階)와 곧바로 연결되며,  바깥쪽 2개의 다리는 극문(戟門)의 각문(角門)과 서로 연결되고, 동쪽과 서쪽의 제일 바깥쪽  2개의 다리는 유리문(琉璃門)의 방형문(方形門)과 서로 연결되어 집니다.

 

 

 

어하수(御河水)는 활의 모양이며, 극문교(戟門橋) 7개의 다리는 활시위 멘 화살의 형상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로교(御路橋)  <참고사진>

 

7개의 다리 중 가운데 다리는 오직 황제(皇帝)만이 이용하는 "어로교(御路橋)"입니다.

 

왕공교(王公橋)  <참고사진>

 

어로교(御路橋) 양쪽의 다리는 "왕공교(王公橋)"로 황제의 친척들인 종친(宗親)과 아들들인 친왕(親王)만이 다닐 수 있습니다.

 

품관교(品官橋)  <참고사진>

 

왕공교(王公橋)의 좌우에는 "품관교(品官橋)"가 있어 3품 이상의 문무대신(文武大臣)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유리문(琉璃門)과 극문교(戟門橋)  <참고사진>

 

7개의 다리 중 양쪽 가장자리 다리는 4품이하 관원들, 병사들, 인부들이 드나드는 다리로 봉건사회(封建社會)의 등급제도(等級制度)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동항(銅缸)  <참고사진>

 

극문교(戟門橋) 앞에는 동항(銅缸)이 있는데 동항(銅缸)은 명대(明代)의 유물로 입구는 원형이며 바닥은 평평하게 되어있습니다. 방화수(防火水)용으로 청동(靑銅)재질로 주조하였습니다. 겨울이면 담겨있는 방화수가 얼어붙어 동항(銅缸) 밑에서 불을 가열하여 보온을 하였습니다. 이를 태평항(太平缸)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정정(井亭)

 

 

 

  정정(井亭)의 위치 <google자료사진>

 

극문교(戟門橋) 북쪽 동서 양쪽에는 각 1개씩의 정정(井亭)이 있습니다.

 

      동쪽의 정정(井亭)  <참고사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전에 신주(神廚: 제수 용품을 장만하는 부엌)에서 제수용품을 세척할 때 사용할 물을 이곳에서 공급하였습니다.

 

       정정(東井亭)  내부의 조정(藻井)  <참고사진>

 

서쪽의 정정(井亭)  <참고사진>

 

명대(明代)에 세웠으며 6각형의 정자 건물로 황유리기와 홑처마 건물이며 정정 안에는 1구(口)의 우물이 있습니다.

 

정권(井圈)  <참고사진>

 

우물 위에는 6각의 한백옥(漢白玉) 정권(井圈: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에워싼 둘레석)이 있습니다.

 

   

   정정(井亭) 뒤쪽 정원에 딸린 문  <참고사진>

 

동서(東西) 양(兩) 정정(井亭) 북쪽에는 1개씩의 정원에 딸린 문(門)이 있습니다. 문 밖에는 원래의 태묘의 모습이 아닌 다른 기관들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극문(戟門)

 

 

극문(戟門)의 위치 <google자료사진>

 

극문(戟門)   <참고사진>

 

명(明) 영락18년(1420)에 세웠으며  문 안팎으로 극가(戟架:창을 꼽아두는 시렁)가 있어 극문(戟門)이라 불리는 태묘(太廟)의 남문(南門)입니다.

 

  <참고사진>

 

극문(戟門)은 황유리기와 단처마 건물로 한백옥(漢白玉)의 수미좌(須彌座)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면 5칸 건물로 가운데 3개의 문 앞뒤로 3개의 계단이 있고, 가운데 계단은 9칸이며, 좌우의 계단은 7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참고사진>

 

이 건축물은 태묘(太廟)가 세워진 후 유일하게 개축되지 않은 중요한 유물로 명초(明初)의 대표적인 관식건축(官式建築)입니다.

 

                     

                        <참고자료>

 

극문(戟門)의 동쪽 칸에는 원래 황제가 제사에 임하기 전 옷을 고쳐입고 손을 씻는 곳이었던 나무로 만든 소금전(小金殿)이 1좌(座) 있었습니다.

 

                             

                             <참고자료>

 

                           극문(戟門)의 중앙 계단에는 단폐(丹陛)/답도(踏道)가 있습니다.

 

 

                        용(龍)과 호랑이가 조각되어 있는 단폐(丹陛)/답도(踏道) <참고자료>

                    

   극문(戟門)의 동쪽 곁문 <참고자료> 

 

   극문(戟門)의 동, 서 양쪽에는 곁문이 하나씩 있습니다.

 

극문(戟門)의 동쪽 곁문 <참고자료> 

 

      

       극문(戟門)의 서쪽 곁문 <참고자료>

 

<참고자료>

 

최고 등급의 의례와 제도에 맞게 문 안팎으로 8좌(座)의 극가(戟架)가 있었으며, 매 극가(戟架)마다 15개의 창이 꼽혀 있어 모두 120자루에 달하는 붉은 색에 금용(金龍)이 장식된 창자루에 은색의 창이 꼽혀있었습니다. 이것들은 1900년 북경(北京)에 진입한 8국연합군에 의해 모두 탈취되었습니다.

 

  극문(戟門)의 뒷면 <참고자료>

 

 

▶ 요로(燎爐)

 

 

                      요로(燎爐)의 원래 위치 <google자료사진>   

 

극문(戟門) 내 전전(前殿)의 동쪽 뜰 끝부분과 서남쪽에 각각 황색 벽돌 요로(燎爐)가 1좌(座)씩 있었습니다.

 

전전(前殿)의 서남쪽 요로(燎爐) <참고자료>

 

 전전(前殿)의 서남쪽 요로(燎爐) <참고자료>

 

요로(燎爐) <참고자료>

 

전전(前殿)의 서남쪽 요로(燎爐)는 전전(前殿)의 서배전(西配殿)에 제사용으로 올린 폐백(弊帛: 비단 예물)을 불태우기 위해 광택이 없는 벽돌로 만든 구조물입니다.          

 

<참고자료>

 

요로(燎爐)의 외형은 목조 건물의 단처마 팔작지붕 황유리기와 형태를 따랐으며, 몸체는 수미좌(須彌座) 위에 사각형으로 원기둥을 세웠습니다.

 

<참고자료>

 

요로(燎爐)는 소백유리(素白琉璃) 벽돌을 겹쳐 지었으며, 조각이 세밀하고 아름다워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전전(前殿)의 동쪽 뜰에 있었던 요로(燎爐)의 옛 사진 <참고자료>

 

전전(前殿)의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요로(燎爐)와 함께 원래 전전(前殿)의 동쪽 뜰에 황유리기와지붕의 요로(燎爐) 1좌(座)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전전(前殿)과 전전(前殿)의 동배전(東配殿)에 제사용으로 올린 축문(祝文: 종이에 쓴 축문)과 폐백(弊帛)을 제사 후에 불사르기 위해 설치하였습니다.

 

 요로(燎爐)의 현재 위치 <google자료사진>

 

 전전(前殿)의 동쪽 뜰에 있었던 요로(燎爐)는 아쉽게도 근대에 와서 철폐되어 현재는 없습니다.

 

 

 

 

                           중국 북경(北京) / 태묘(太廟)의 경관(景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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