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해외)/중국(북경-자금성)

中國(北京) - 건청궁(乾淸宮)주위/자금성 내정(內廷)

케인스 2012. 3. 31. 01:25

 

 

                         건청궁(乾淸宮)주위

 

 

    중국 북경(北京)/자금성, 내정(內廷)의 후삼궁(後三宮) 지

 

   

☞  건청궁(乾淸宮) 주위 회랑(回廊)                  

  

                                                 

 

                                       건청궁(乾淸宮) 주위 회랑(回廊) 위치 <참고사진>

                                                           

                                 건청궁(乾淸宮) 주위 회랑(回廊) 위치  <google참고사진>

 

                   건청궁(乾淸宮) 주위에는 40여칸의 회랑(回廊)이 둘러져 있었습니다.  

 

                          

 

                                              건청궁(乾淸宮) 주위 회랑(回廊)

 

서쪽 회랑에는 황제가 책을 읽고 상소문을 열람하는 무근전(懋勤殿)이 있습니다. 남쪽 회랑 동쪽 끝부분에는 한림원(翰林院)의 책임자가 황제에게 자문하는 상서방(上書房)이 있고 그 서쪽 끝에는 황태자의 독서실인 남서방(南書房)이있습니다. 북쪽 끝 부분에는총감(總監), 대감(太監) 등 대신들의 방과 창고가 있었습니다.

  

 

☞  무근전(懋勤殿)과 서응전(端凝殿)

 

 

                            

 

  

 

무근전(懋勤殿)

 

금전(金殿) 뒤쪽의 무근전(懋勤殿) <참고사진>

 

무근전(懋勤殿)은 건청궁 서쪽 회랑에 위치하며 황제가 글을 읽고, 쓰기도 하고 서화(書畵)를 감상하였으며, 역대의 귀한 책들을 모아 놓은 서재의 하나였습니다. 무근(懋勤)이란 이름은 무학근정(懋學勤政 : 학문에 힘쓰고 열심히 일함)의 의미에서 따왔습니다.

 

 

                                         어제시(御製詩) 문방사사(文房四事) 중 한수 <참고사진>

 

무근전에는 건륭제가 친필로 쓴 '基命有密'(기명유밀 : 모든 일을 함에 있어 빈틈없이 애쓴다) 넉자의 편액이 걸려있으며, 황제가 쓰던 문방4보(文房四寶)와 문방사사(文房四事) 등 많은 서화를  수장하였습니다.

 

      

                                        “懋勤殿” 이 새겨진 용문인합(龍紋印盒)  <참고사진>

 

청(清) 가경(嘉庆)년간 만들어진 오조룡이 그려진 인합(印盒)으로 뚜껑 중앙에 무근전(懋勤殿)이라 새겨진 것으로 보아 당시 사용하던 어용문구(御用文具)의 하나였으며, 아직도 속에는 사용하였던 인주가 남아 있습니다.  

 

 

서응전(端凝殿)

 

 

                                 

                                                 서응전(端凝殿)  <참고사진>

 

건청궁 서쪽회랑에 위치하며 동쪽 회랑의 무근전(懋勤殿)과 대칭하여 있습니다. 서응전의 이름은 '단면응류(端冕凝旒)'에서 취하였습니다.

  

 

                                              

                                                               <참고사진>

              이곳은 황제의 의복, 면류관, 기타 관대(冠帶) 등의 의물(衣物)을 보관 하던 곳입니다.

 

 

 

☞  상서방(上書房)과 남서방(南書房)

 

 

                                    

                                      

상서방(上書房)은 건청궁의 동쪽[左] 남쪽 회랑에 위치하고 5칸으로 북향으로 문이 나있으며, 남서방(南書房)은 건청궁의 서쪽[右]의 남쪽 회랑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상서방(上書房)

  

 

                                                  상서방(上書房)  <참고사진>

 

상서방(上書房)은 건청궁의 동쪽[左]의 남쪽 회랑에 위치하고 5칸을 사용하였으며 북향으로 문이 나있습니다.

 

상서방(上書房) 현판 / 강희제(康熙帝) 어필  <참고사진> 

 

  

                                                영화 "상서방(上書房)" 의 한 장면  <참고사진>

 

상서방(上書房)은 황자의 나이가 6살이 되면 입학하여 공부하던 곳으로 1~3명의 총사부(總師傅 : 사부의 우두머리)와 약간 명의 한문사부(漢文師傅) 그리고 일명 암달(諳達)이라 부리는 약간 명의 만몽사부(满蒙師傅)에게서 안으로는 한문과 만몽문자를 배우며, 밖으로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배웁니다. 

 

 

                                              영화 "상서방(上書房)" 의 한 장면  <참고사진>

 

황자(皇子)들은 매일 인시(寅時 : 오전 3~5시)에 상서방에 도착하여 책을 읽으며, 묘시(卯時 : 오전5~7시)에 수업을 시작하여 오시(午時 : 11시~13시)에 공부를 마칩니다. 명절에는 하루를 쉬고, 날씨가 더운 기간에는 수업 시간을 반으로 줄입니다.

 

황자들의 학업서  <참고사진>

 

학업 중 사용된 문구류  <참고사진>

  

 

남서방(南書房)

 

 

                                                              남서방(南書房)  <참고사진>

 

남서방(南書房)은 건청궁의 서쪽[右]의 남쪽 회랑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 강희제(康熙帝)가 어렸을 때 책 읽고 공부하던 곳으로 속칭 '남재(南齋)'라고 하였습니다. 

 

               

                             강희제(康熙帝)               <참고사진>   남서방(南書房)의 강희제(康熙帝)

 

강희16년(1677) 남서방을 설치하고 학식이 뛰어나고 훌륭한 두 신하 장영(張英)과 고사기(高士奇)에게 자신을 보좌토록 하면서  그곳에 주재토록 하였는데, 이것이 한림문인(翰林文人)들이 남서방에 주재하게된 시초였습니다. 

 

                   

                                 남서방(南書房) 소유의 문방4보(文房四寶)  <참고사진>  

 

남서방(南書房)에 주재하게 된 한림문인(翰林文人)들을 남서방행주(南書房行走)라고 하였는데,  황제의 일상사를 거들어 처리하고, 칙서를 기초하며, 신하와 백성들에게 내리는 글을 대필하는 등 황제의 비서실과 같은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청대(淸代) 황제의 문학적 보좌 역할을 한 남서방행주(南書房行走)는 황제가 궁 바깥을 순행할때도 항상 수행하는 등 황제의 좌우에서 고문 역할을 하였기에 청대 선비들에게 있어서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영예로운 자리였습니다. 이 제도는 광서24년(1898)에 없어졌습니다.

 

                                  

                                                                                             <참고사진>

남서방이란 서실(書室)에는 지위는 낮지만 우수한 학자들을 발탁하였고, 그들을 모아 학문토론방 겸 비서실 격인 이곳에서 학문을 수련케 하였습니다. 이곳의 학자들은 경서와 사서, 문학, 서법, 회화와 자연과학 방면에서 뽑힌 뛰어난 학자가 균등하게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  경사방(敬事房)과 내주사처(內奏事處)

 

 

 

 

 

경사방(敬事房)

                                                             경사방(敬事房)  <참고사진>

 

경사방(敬事房)은 강희16년(1677)에 설치된 내무부(內務府) 소속의 청대 관서명으로 건청궁의 동쪽편 남쪽 회랑의 건청문 바로 옆에 위치하였습니다. 경사방은 궁내의 태감(太監 : 환관)을 관리하는 기구로 총관(總管 : 4품)과 부총관(副總管 :6품)을 두었으며, 명대(明代)에 많았던 태감의 수를 청(淸) 강희제 때 3,300여 명으로 줄인바 있습니다. 한편 경사방에서는 궁내 사무 및 의례를 주관하며, 태감의 심사 선발 및 충원과 상벌업무를 관장하였고, 궁내를 순찰하고 각 문들을 열고 닫는 등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광서제(光绪帝)의 진비(珍妃)와 태감(太監/환관)들  <참고사진>

 

경사방(敬事房)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황제의 밤일을 도우는 일입니다. 황후 이외의 여인들과 잠자리를 주선하기 위해 태감은 매일 저녁 식사 때가 되면 준비된 비빈들의 이름이 적힌, 선패(膳牌)라고 부르는 녹색 명찰을 커다란 은 쟁반에 담아 황제에게 올립니다. 황제가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고르면 선택된 비빈은 목욕과 화장을 한 다음 모피로 알몸을 가린 채 여관(女官)들에 의해 황제의 침소로 옮겨집니다. 환관은 묘시(卯時 : 오전 5시~7시)까지 밤새 문밖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황제의 밤일에 대해서는 경사방태감만큼 권력이 강한 사람이 없었으며, 황제라고 해도 그 일을 핑계로 벌을 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내주사처(內奏事處)

 

 

                                                         내주사처(內奏事處)  <참고사진> 


주사처(奏事處)는 옹정(雍正)년간에 설치된 청(淸)의 관서 이름으로 내주사처와(內奏事處)와 외주사처(外奏事處)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내,외 주사는 모두 33명이었습니다. 내주사처에는 주사태감(奏事太監: 아뢰는 환관), 수시태감(随侍太監: 수행하는 환관), 기당태감(記檔太監: 기록하는 환관), 사령태감(使令太監: 명령 받고 전달하는 환관)이 있었고, 외주사처에는 주사관(奏事官) 등이 있었습니다. 내주사처는 건청궁의 월화문(月華門) 남쪽 편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황제가 신하와 백성들에게 내리는 명령을 전달하고, 황제가 부르는 신하를 데려오며, 어전에서 어명을 대기하는 일 등을 맡았습니다.

 

                                                         서태후와 태감(太監)들  <참고사진>

 

내주사처의 태감들은 황제와 가까이에서 일하는 위치를 이용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등의 일들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후에는 내주사처의 태감들에 대한 관리 감독을 엄하게 하였습니다.

 

 

☞  비본처(批本處), 사공처(祀孔處), 어약방(御藥房), 어차방(御茶房)과

    자명종처(自鳴鐘處) 

 

 

 

 

비본처(批本處)

          

 

                                                  비본처(批本處)  <참고사진> 

 

내각(內閣)에서 황제의 어람(御覽)을 위해 올리는 업무관련문서를 접수하고 천거하여 황제의 비답(批答)을 받아 처리하는 업무를 담당합니다.

 

 

사공처(祀孔處) 

 

 

                                                 사공처(祀孔處<참고사진>

 

사공처(祀)는 건청궁 동쪽 회랑 남단에 위치하며 1칸 면적이다. 그래서인지 사공처를 남일실(南一室)이라고도 부릅니다. 안에는 공자 및 선현유신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건륭제의 어필 “与天地参”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여천지삼(与天地参)이란 "하늘, 땅과 함께 세번째가 된다." 즉, 바로 사람이 하늘, 땅과 서로 병렬적으로 제3의 지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묘(孔廟) 대성전(大成殿)의 건륭제(乾隆帝)어필 편액  <참고사진>

 

청대(淸代)에는 매해 원단(元旦)에 황제가 이곳에서 직접 제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황자, 황손이 6세가 되어 사공처(祀孔处) 서쪽에 있는 상서방(上書房)에 입학하기 전 먼저 사공처의 공자(孔子)신위(神位)앞에 와서 의식을 행합니다. 또한 공자와 선현유신들께 공경함을 보이기 위해 상서방의 노 스승, 황자들은 수업을 시작할 때와 끝나면 공자신위에 나아가 의식을 행합니다.

  

 

어약방(御藥房) 

 

 

어약방(御藥房)  <참고사진> 

 

어약방(御藥房)은 건청궁 동쪽 회랑의 남쪽에 위치하며 내무부 대신이 주관하는 관서로서 궁중에서 사용하는 약재를 거두고 검사하며, 환산고단(丸散膏丹)으로 통칭하는 모든 약의 제조를 감독하는 곳입니다. 

 

 

                명대(明代) 어약방(御药房)에서 사용하던 금용문(金龍紋) 약장(藥欌)  <참고사진>   

 

   

                  

                          명대(明代) 어약방(御药房)에서 사용하던 약탕기(藥湯器)  <참고사진> 

 

 

어차방(御茶房)

                                          

어차방(御茶房)  <참고사진>

 

어차방(御茶房)은 청(淸) 내무부(內務府) 소속으로 건청궁의 서쪽 회랑의 북쪽 끝에 위치하며 3칸의 공간을 사용하였으며, 1명의 대신이 사무를 총괄하고, 상차정(尙茶正) 1명, 상차부(尙茶副) 1명, 상차(尙茶) 11명이 있었습니다. 어차방외에도 궁내에는 황후차방, 수강궁황태후차방, 황자.황손의 차방(茶房) 역시 있었는데 전문적인 요원이 각 차방을 관리하였습니다.

 

                                    

                                                       청대(淸代) 사용 차구(茶具)  <참고사진>

 

어차방, 황후, 황비차방 등 매일 제공되는 차를 마시기 위해 필요한 금,은, 자기그릇등의 차구(茶具)는 일정한 규격이 있었습니다.

 

                       

  청대(清代)의 공품(貢品), 금과공차(金瓜貢茶) 와  고약형 보이차, 보이차고(普洱茶膏)  <참고사진>

 

어차방에 하루 제공되는 차의 양은 1,700근이었으며, 어용차(御用茶)는 매일 14근, 74포분(分)이었습니다. 고대 1근은 16량이며 매포 3량 이상이므로, 1년간 필요한 어용차는 5천근 이상에 달합니다.  

 

 

자명종처(自鳴鐘處) 

 

 

                                                         자명종처(自鳴鐘處)  <참고사진> 

 

자명종처(自鳴鐘處)는 건청궁 동쪽 회랑의 서응전(瑞應殿) 남쪽에 방 3칸을 사용하였으며, 방 안에는 강희제(康熙帝)의 친필을 모사한 "경천(敬天)" 이란 편액이 걸려있고,  양 옆으로 어필 주련["帘萦香篆斋心久(염영향전재심구),座殷钟声问夜遥(좌은종성문야요)"] 이 또한 걸려있습니다.

 

                             

                                                                                                       <참고사진>

자명종처(自鳴鐘處)는 청대(淸代)에 자명종(自鳴鐘)의 수요가 늘어나자 자명종의 설치, 청소 수선, 보관 등의 일을 맡아하도록 강희(康熙)년간에 설치되었습니다. 7품의 관리가 우두머리이며, 그 아래 태감 10명이 있었습니다.

 

 건륭(乾隆)시기 제작, 자금성 10대 보물 중의 하나 <참고사진>

<높이 1.85m, 가로1.02m, 세로 0.7m>

 

           

               <높이 1m, 가로 45cm, 세로 45cm>                   <높이 46cm, 가로 27cm, 세로 10cm>

                                     동(銅)에 금(金) 도금, 건륭시기(18세기) 제작  <참고사진>

 

청(淸) 순치(順治)년간부터 천주교의 전파와 함께 서양의 자명종이 함께 들어왔으며, 나중에는 그것을 모방하여 제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자명종처(自鳴鐘處)와는 별도로 주종처(做鐘處)도 설치되어 시계의 제작을 맡았습니다.

 

 

 용광문(龍光門)과 봉채문(鳳采門)

 

 

용광문(龍光門)과 봉채문(鳳采門) <google참고사진> 

 

이 두문은 명대(明代)에 이미 있었으며, 문의 규모로 보아 정궁(正宮)에서 동쪽이나 서쪽으로 드나들 수 있는 빠르고 안전한 출구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한편 건청궁앞 회랑에 있던 여러 관서들의 하급 관리들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문으로 보입니다.

 

 

용광문(龍光門) 

 

                                        <참고사진>

용광문(龍光門)은 소인전(昭仁殿) 서쪽에 있는 작은 문으로부터 그 앞 경사면의 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 내동로(內東路)로 통하는 소규모의 문(門)으로 정궁(正宮)에서 내동로(內東路)로의 출입구입니다.

 

 

봉채문(鳳采門) 

 

               

                                                                                                 <참고사진>

봉채문(鳳采門)은 홍덕전(弘德殿) 동쪽에 있는 작은 문으로부터 그 앞 경사면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 내서로(內西路)로 통하는 소규모의 문(門)으로 정궁(正宮)에서 내서로(內西路)로의 출입구입니다.

 

 

 일정문(日精門)과 월화문(月華門)

 

 

                                      

                                              일정문과 월화문 위치  <google참고사진>

 

건청궁(乾淸宮)의 좌우에는 일정문(日精門)과 월화문(月華門)이 있습니다. "건곤일월명(乾坤日月明), 사해개승평(四海皆升平)"의 의미로, 건청궁(乾淸宮)이 하늘을 나타내고 곤녕궁(坤寧宮)은 땅을 나타내므로, '하늘과 땅에 해와 달이 밝듯이 온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루리라'는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일정문(日精門)

 

 

                                                 일정문(日精門)  <참고사진>

 

‘일정(日精)’이란 해의 정기(精氣)를 뜻합니다. 해[日]는 음양의 이치에서 양(陽)의 성격을 띠므로 동쪽 문(門)의 이름으로 택했습니다.

 

 

                                                         일정문 현판  <참고사진>

 

 

월화문(月華門)

 

                                                             월화문(月華門)  <참고사진>

 

‘월화(月華)’란 달의 정화(精華: 정수/精粹가 될 만한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부분)를 뜻합니다. 달[月]은 음양의 이치에서 음(陰)의 성격을 띠므로 서쪽 문(門)의 이름으로 택했습니다.

 

월화문(月華門) 현판  <참고사진>

 

 

 

 

 

                                          건청궁(乾淸宮)주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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