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녕궁(坤寧宮)
중국 북경(北京)/자금성, 내정(內廷)의 후삼궁(後三宮) 지역
☞ 곤녕궁(坤寧宮)
곤녕궁(坤寧宮) 위치 <참고사진>
곤녕궁(坤寧宮) 위치 <google참고사진>
곤녕궁(坤寧宮)은 후삼궁(後三宮)의 하나이며 교태전(交泰殿) 뒤 북쪽에 위치합니다.
곤녕궁(坤寧宮) <참고사진>
곤녕궁(坤寧宮)은 명(明) 영락(永樂)18년(1420) 축조하였으며 두 차례의 화재를 거쳐 만력(萬歷)33년(1605) 중건하였습니다. 그리고 청(淸) 순치(順治)12년(1655) 요녕성(遼寧省) 성경(盛京)* 심양(沈陽)의 청녕궁(淸寧宮)을 모방하여 만주족의 특징있는 口형 형태의 방으로 크게 수리하였으며, 가경(嘉慶)3년(1798) 다시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 성경(盛京) : 요녕성 심양(深陽)의 청나라 초기 이름으로 베이징[北京]으로 천도 후에는
봉천(奉天)이라 불렀음.
奉天(深陽) <참고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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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녕궁(坤寧宮)의 곤(坤)은 땅이므로 음(陰)을 대표하고, 건청궁(乾淸宮)의 건(乾)은 하늘이므로 양(陽)을 대표합니다. 이것은 음양의 결합을 의미하며 천지를 통합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건청(乾淸), 곤녕(坤寧)은 "천청지녕(天淸地寧), 통치영구(統治永久)"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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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녕궁(坤寧宮)은 명대(明代)에는 황후(皇后)의 침궁(寢宮)이었으며 중궁(中宮)이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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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明代) 황제의 비빈들은 이곳 곤녕궁(坤寧宮)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 양옆으로 분포된 동육궁(東六宮)과 서육궁(西六宮)에 기거하였습니다. '삼궁육원(三宮六院)'이란 말은 여기서 기원한 것입니다.
삼궁육원(三宮六院) <참고사진>
삼궁육원(三宮六院)이란 건축적인 면에서 유래된 말로, 자금성 내의 내정(內庭)지역 즉 황제(皇帝)와 황후(皇后), 비빈(妃嬪)들이 기거하며 생활하던 곳을 이르는 말입니다.
삼궁(三宮)은 '후삼궁(後三宮)'을 말하며 황제가 거주하는 건청궁(乾淸宮), 황후가 거주하는 곤녕궁(坤寧宮), 그리고 건청궁과 곤녕궁 사이의 교태전(交泰殿)을 이릅니다. 육원(六院)은 삼궁(三宮)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각각 6곳의 궁(宮) 즉 동육궁(東六宮)인 종수궁(鐘粹宮), 승건궁(承乾宮), 경인궁(景仁宮), 경양궁(景陽宮), 영화궁(永和宮)과 연희궁(延禧宮), 서육궁(西六宮) 인 함복궁(咸福宮), 장춘궁(長春宮), 태극전(太極殿), 저수궁(儲秀宮), 익곤궁(翊坤宮)과 영수궁(永壽宮)을 합해 실제로는12궁(宮)이지만 각 궁이 뜰이 있는 구조이기에 원(院)으로도 불립니다. 일반적으로 동육원(東六院), 서육원(西六院) 이라 하기에 약칭 "삼궁육원(三宮六院)"으로 칭하게 되었습니다.
숭정황후(崇禎皇后) 주(周)씨 상(像) <참고사진>
한편 명(明) 숭정(崇禎)17년(1644) 이자성의 난 때 농민군이 자금성으로 밀려 들어오자 이곳에 머물던 숭정제(崇禎帝)의 황후 주(周)씨가 목을 매 자살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심양(深陽)의 청녕궁(淸寧宮) <참고사진>
청(淸) 순치(順治)12년(1655) 곤녕궁(坤寧宮)은 만주족의 풍습에따라 요녕성(遼寧省) 성경(盛京)의 청녕궁(淸寧宮)의 전각을 본떠 크게 고쳐지었습니다.
살만교(薩滿敎) 의식용 북 <참고사진>
그 후로는 황후의 침실이 아닌 만주족의 전통종교인 살만교(薩滿敎, Shamanism)의 제신(祭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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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에 와서 황제의 공식 국정 수행 장소가 외조(外朝)에서 내정(內廷)의 건청궁(乾淸宮)으로 바뀜에 따라 황제의 침궁이 서쪽의 양심전(養心殿)으로 옮겼고, 황후도 곤녕궁에서 체순당(體順堂)으로 옮겨 곤녕궁 역시 중궁(中宮)으로서의 지위를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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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곤녕궁은 제신(祭神)을 위한 제례의식(祭禮儀式)의 장소로만 이용되었으나, 다만 황제의 대혼(大婚) 후에는 곤녕궁의 동방(洞房)에서 3일간 황제와 황후가 신방을 차리게 됩니다.
황제 대혼시 사용하는 희교(喜轎) <참고사진>
혼례외에 청조 역대 황후는 원단, 동지, 그녀의 생일[천추절(千秋節)]에 귀비 등을 인솔하여 태후와 황제를 알현하는 예를 마친 후 곤녕궁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교태전에 이르러 자리에 올라 비빈들의 조하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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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향의 곤녕궁은 정면9칸, 측면 3칸의 이중의 처마에 황유리기와를 얹은 무전정형[중국식 분류방법] 건물입니다.
무전정(廡殿頂)형 지붕[우리나라에서는 우진각지붕이라고 합니다] <참고사진>
현판 밑이 중앙칸 <참고사진>
명대(明代)에는 지금과 달리 정면 중앙칸에 드나드는 문이 있었으며 실내에는 동난각(東暖閣)과 서난각(西暖閣)이 있었습니다. 순치12년 만주족의 풍습에따라 개조될 때 중앙 칸 동쪽의 옆칸으로 드나들도록 정문의 위치를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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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년간에는 실내 동쪽의 2칸을 황제의 대혼(大婚) 시 동방(洞房)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곤녕궁의 분합문(分閤門) <참고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