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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北京) - 북경성(北京城)의 역사(歷史)

케인스 2011. 9. 14. 11:00

 

 

                             북경성(北京城)의 역사(歷史)

 

 

                         중국 북경(北京) / 내성(內城)과 외성(外城)

       

☞  북경성(北京城)의 역사 개요  

 

 

명대(明代)의 북경성(北京城) <참고사진>

 

북경성(北京城)의 역사는 곧 북경(北京)의 역사이기에 북경을 "천년(千年)의 왕성(王城)"이라고 표현하는가 봅니다. 

 

북경(北京) 3d지도 <참고사진> 

 

북경에는 기원전 1600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전하며, 춘추전국시대 연(燕)나라 수도였던 "계(薊)"가 가장 오랜 북경의 명칭입니다.

 

 요(遼)나라 남경성문도(南京城門圖) <참고사진>

 

북경이 처음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0세기 무렵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가 이곳을 남경(南京)이라 칭하고 사실상의 수도를 정했던 것이 처음인데 후에 연경(燕京)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당시 연경성(燕京城)의 둘레는 23km, 높이 10m의 네모난 성으로 8개의 성문(城門)이 있었고, 중앙의 황궁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금(金)나라 중도성문도(中都城門圖) <참고사진>

 

후에 요(遼)나라는 송(宋)나라와 연합한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의해 멸망하게되며 연경(燕京)은 중도(中都)라는 이름의 금(金)나라의 도읍지로 재건되었습니다. 이때 중도성(中都城)에는 정사각형 형태의 성벽에 13개의 성문이 있었습니다.

 

 

         

 

                                          

원(元)나라 대도성문도(大都城門圖) <참고사진>

 

1211~1215년 칭기츠칸이 이끄는 몽골족이 중도(中都)를 빼앗고,1275년에는 칭기츠칸의 후계자 쿠빌라이 칸이 원(元)나라를 세운 뒤 이전의 중도(中都) 위치에서 약간 북동쪽에 새 도읍지인 대도(大都)를 건설하였습니다.

 

원(元)나라 대도성도(大都城圖) <참고사진>

 

대도(大都) 외성의 길이는 약 30km정도였으며 52㎢가 넘는 지역을 에워싸고 있었는데 곱게 간 흙으로 성벽을 조성하였고, 4각형의 성곽(城郭)과 11개의 성문(城門)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성곽 안에 황성(皇城)과 궁성(宮城)을 세웠으며, 황성(皇城)은 남쪽의 중심지구에 있었습니다.

       

명(明),청(清) 북경성문도(北京城門圖) <참고사진>

 

1368년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몽골제국을 몰아내고 명(明)나라를 세워 수도를 남경(南京)으로 옮겼습니다. 1368년 대도(大都)를 점령한 서달(徐達: 원을 무너뜨린 명의 장군)은 성벽이 너무커 방어하기 어렵다고 느끼고, 북쪽의 광희문(光熙門), 숙청문(肅淸門)을 없애고 성벽을 축소 시킨 후 남쪽으로 새 성벽을 구축하였습니다.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참고사진>  성조(成祖) 연왕(燕王) 주체(朱棣)

 

북경(北京)은 주원장의 넷째아들인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다스렸습니다. 후에 연왕이 황제[성조(成祖)] 자리에 오르며 1403년에 대도(大都)에서 북경(北京)으로 명칭을 바꾸고 명(明)나라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참고사진>

1406년 크게 파괴된 대도(大都)로부터 남쪽으로 약간 옮겨 대도(大都)의 기초 위에 북경성(北京城)을 조성하게 되었으며, 이 때 토성(土城)에 벽돌을 덧대어 쌓았습니다.

 

             

                                                                                                                   <참고사진>

명대 중엽에는 몽골 기병이 자주 공격을 해왔고, 북경성 인구가 대량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이에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가정32년(1553) 외성(外城)을 증축하였고, 가정43년(1564) 북경의 외성을 완성하였습니다. 원래는 120리에 걸쳐 내성(內城)을 둘러싸려고 하였는데, 돈이 부족하여서 남쪽만 보강하게 되었으며 외성의 전체 길이는 28리, 7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외성을 건축하자 정양문에서 영정문으로 이어지는 직선도로가 생겼습니다.

 

청대(淸代) 북경성(北京城) <참고사진>

 

    

                   이자성(李自成)                          <참고사진>                     청(淸) 태조(太祖)

 

1644년 농민봉기를 이끈 이자성(李自成)이 명(明)을 무너뜨리고 북경을 점령했으나 만주족은 40여 일 만에 빼앗은 후 청(淸)나라를 세우고 청나라 3대황제 순치제는 이 곳을 도읍으로 정하였습니다.

 

청말북경도(淸末北京圖) <참고사진> 

  

                           북경(北京)은 청대(淸代) 내내 같은 모습을 유지하게 됩니다.   

 

민국북평시도(民國北平市圖) <참고사진>

 

중화민국(中華民國) 시기(1911∼1949년)에는 북경의 성벽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먼저 교통 문제때문에 성벽에 더 많은 성문(城門)이 생겼고, 원래 성문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1913년 대청문(大淸門)[중화문(中華門)] 안쪽에 동서로 놓여있던 궁성(宮城)을 없애고 큰 길을 냈습니다. 천안문대가 북쪽의 자금성(紫禁城)과 경산(景山) 사이에도 통행을 허락하였습니다. 

 

                                                                                                                   <참고사진>

원래있던 성문에도 개보수가 이루어졌습니다. 정양문(正陽門) 옹성(瓮城)은 1914년에 철거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양문 동서쪽에 문을 각각 내고 차와 말이 지나다니게 하였습니다.

 

 

                                                                                                                          <참고사진>

1926년 정양문(正陽門)과 선무문(宣武門) 사이에 화평문(和平門)을 내었습니다. 처음에는 신화문(新華門)이라고 부르다가, 중남해의 신화문과 이름이 중복되어 화평문으로 바꾸었습니다. 1927년 장작림(張作霖: 중국 만주지역의 군벌정치가)이 북경에 들어와 그 문을 흥화문(興華門)이라고 고쳤는데 1928년 북벌군이 북경에 들어와 그 문을 다시 화평문(和平門)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참고사진>

              화평문(和平門)은 북신화가(北新華街)와 남신화가(南新華街)를 연결하였습니다.

 

선무문(宣武門) 옹성(瓮城) <참고사진>

 

                              1931년에는 선무문(宣武門) 옹성(瓮城)이 철거되었습니다.

 

건국문(建國門) <참고사진>

 

일본이 북경을 점령할 당시 1939년 동서쪽으로 두개의 문을 만들고 이름을 장안문(長安門)과 계명문(啓明門)이라 하였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전 한 후 국민당 북평시[북경]정부는 당시 유행하던 "부흥(復興)"과 "건국(建國)"의 정치 구호를 사용하여 장안문을 부흥문(復興門)으로, 계명문을 건국문(建國門)으로 바꿨습니다. 이 문은 별도의 성루를 만든 것은 아니고, 단지 드나들 수 있게 간이로 성벽에 길을 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두 문은 성곽을 없애며 사라졌습니다.    

 

                                           복원된 영정문(永定門) <참고사진>

 

점차 개발에 따라 북경의 성문(城門)들이 철거되면서 현재는 황성의 천안문(天安門)과 내성의 정양문(正陽門), 덕승문(德勝門) 전루(箭樓)만 남았다. 외성(外城)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2005년 영정문(永定門)이 복원되어 있을 뿐입니다.

 

 

 

 

                               북경성(北京城)의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