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지/한국명산

설악산 1 (07.07.12)

케인스 2008. 5. 28. 14:30

 

 

                        설악산 1 (2007.07.12)

 

         

 

산행코스: 주능선 종주 코스 (2박3일)

 

 

용대리 → 백담사 → 수렴동대피소 → 봉정암 → 소청대피소 → 소청봉 → 중청대피소 → 대청봉 → 중청대피소 → 소청봉 → 희운각대피소 → 양폭대피소 → 비선대 → 소공원 [31km]

 

 

          

 

            

 

 

 

            백담사입구 용대삼거리 - 점심(사계절 식당) / (13시15분경 백담사 입구 도착)

 

                   14시10분경 출발 - 용대리 이름에 걸맞게 용조각으로 치장한 광고판

  

                       

                                용대리 ↔ 백담사 셔틀버스(용대리 정류장) 

 해마다 3월말부터 11월말까지 용대2리 매표소 앞에서 백담사행 셔틀버스가 수시로 다닌다. 

  

        

                                               매표소 - 백담사  <참고자료>

 

                       

                                          백담사 가는 길     <참고사진>

 

용대리 매표소를 지나 계곡을 따라 백담사까지는 약 8km(20리)의 거리로서 2시간 가량 걸어야 하며, 1987년에 포장된 왕복 2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다.

 

 

                                        내설악(內雪嶽) 백담계곡(百潭溪谷)

 

백담골이라고도 부르는 내설악의 대표적인 계곡이다. 이름은 백()개의 담()이 있다고 해서  백담이라 불리는 이곳은 전국에서 제일 높은 절인 백담사와 두태소, 청룡담, 은성도,영산담 등 크고 작은 소와 담이 곳곳에 있으며 그 풍치 또한 빼어나다. 계곡이 깊고 수량이 풍부해 여름철에는 우렁차게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더위를 식혀준다. 특히 가을철에는 단풍이 빼어난 절경을 이룬다.

  

                                                           백담골짜기

  

                  백담계곡의 자그마한 담(潭: 계곡이 깊이 파여 맑은 물이 깊게 모인 곳)

 

 

  

                                                             백담계곡

 

                                     용대리 ↔ 백담사 셔틀버스(백담사 정류장)

                                  셔틀버스 종점에서 3km 쯤 걸으면 백담사에 닿는다.

 

                                 내설악백담사(內雪嶽百潭寺) 일주문(一柱門)

 

일주문(一柱門)이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로서 이는 일심()을 상징한다.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다.

  

                                                          백담사 전경

 

백담사의 유래


백담사는 신라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자장율사가 창간하였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 절 이름은 한계사(寒溪寺)라 했으며, 위치도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한계령 중턱 장수대 근방이었다. 이 한계사는 불터고 없어지고 지금은 석탑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불탄 자리에 43년 후에 다시 절을 중건했으나 이나마도 불타 버렸다. 


그러다가 신라 원성왕 6년(790년) 이곳을 떠나 북쪽 30리 지점에 사찰을 세우고 이름을 운흥사(雲興寺)로 바꾸었다. 그러나 운흥사터도 어느새 폐허가 되고 세월이 흘러 고려 성종 3년(984년)에 변란으로 없어졌다가 성종 6년(987년)에 옛터의 북쪽 60리 지점에 다시 옮겨서 심원사(深源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에 절이 수차례 불타 절터를 계속 바꾸어 이름도 바꾸었다. 백담사라는 이름은 세종 20년에 지어 불렀으나 다시 심원사로 바뀌었다가 정조 7년에 다시 백담사(百潭寺)로 바꾸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사찰이 계속 화재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므로 이름을 고쳐보려고 애를 쓰던 중 어느날 주지스님의 꿈에 신령스러운 백발노인이 나타나 청봉에서 지금의 절까지 담(潭)을 세어 1백개가 되는 장소에 사찰을 건립하면 삼재(水,火,風)를 면하리라고 현몽하기에 현재의 위치에 건립했으며, 담(潭)자는 불의 기운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백담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백담사는 많은 화재와 사연을 지닌 채 1천3백년을 존속해왔다. 최근에는 1915년 1백60여칸의 백담사는 불타버리고, 4년후에 중건했으나 6.25 동란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중심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산령각, 화엄실, 법화실, 정문, 요사채 등이 있으며, 뜰에는 삼층석탑 1기가 있고 옛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부속암자로는 봉정암, 오세암, 원명암 등이 있다.

 

또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사가 1905년 이곳 백담사에서 머리를 깎고 입산수도하여 깨달음을 얻고, <조선불교유신론>과 <십현담주해>를 집필하고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발표하는 등 불교유신과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일제의 민족 침탈에 항거하여 민족독립운동을 구상하였던 독립운동의 유적지로도 유명하다.

 

 

              수심교(修心橋) - 계곡 너머 백담사 들어가는 길 / (16시 05분경 백담사 도착)

  

                                                        금강문(金剛門)

 

수심교를 건너면 바로 금강문. 금강문 안에는 금강역사가 자리잡고 불법을 수호하고 있으며, 사찰에 따라 사천왕문 대신에 금강문이 있는 경우도 있고, 금강문과 사천왕문이 같이 있는 경우도 있다.

 

                                                          금강문 내부

 

불법을 수호하는 신인 금강역사가 지키고 서 있다. 왼편에는 청색사자를 타고있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상이 있다.

 

                                                           금강문 내부

 

불법을 수호하는 신인 금강역사와 오른편에는 흰코끼리를 타고 있는 실천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상이 있다.

 

 

안내판에는 사천왕문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사천왕상이 없다. 그저 하나의 산문인가보다. 백담사의 현판과 안쪽의 설악산 현판이 돋보인다.

 

                                           극락보전(極樂寶殿)과 삼층석탑

 

                                                    극락보전(極樂寶殿)

 

죽음을 물리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법당이다. 

 

                                   극락보전(極樂寶殿)의 목조아미타불좌상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불은 영조 24년(1748)에 조성된 아미타불좌상으로18세기 전반기의 불상 가운데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 보물 제1182호(1993.11.1)로 지정된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유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복장유물로는 불상신조성회향발원문 1매, 다라니서입회향발원문 1매, 황참의 다리연화방거 한글발원문 1매, 자식점지 한글발원문 1매, 만자소화문황단삼회장저고리 1점, 유리와 수정 등의 파편 수 백점을 보자기에 싼 복장물 1괄이 보관되고 있어 당대의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화엄실(華嚴室)

 

백담사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전대통령이 1988년 11월 23일부터 2년동안 은둔생활을 했다는 것으로 세간에 많이 알려져 있다. 이 곳 화엄실이 바로 전두환, 이순자 전직대통령 부부가 머물던 처소이다. 그들의 이 곳에서의 생활을 담은 사진들이 마루에 놓여있다. 한편 바로 이곳은 만해가 님의 침묵을 탈고했던 곳이기도 하다. 

            

                                        

                                                 화엄실 내부  <참고사진>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8년 11월부터 1990년 말까지 기거하던 방으로, 평소 그들이 쓰던 물건들을 비치해 두었다.

 

                       

                                            3층석탑과 뒤로 화엄실(華嚴室)

 

                                                        법화실(法華室)

 

   

                                          산령각과 산령각의 탱화  <참고사진>

                                                       범종루(梵鐘樓)

 

  

                                    범종루의 목어와 운판, 범종, 법고  <참고사진>

  

                                                     범종루 뒤로 나한전

 

      

                          나한전(羅漢殿)의 삼존불과 나한상(羅漢像  <참고사진>

 

나한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건물이다. 부처님에게는 열여섯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으로 그 뜻은 성자를 의미한다. 영산전(靈山殿) 또는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만해당(卍海堂)과 백담사 의상, 만해 연구원(오른쪽 끝)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흉상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

 

승려·시인·독립운동가.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홍성(洪城) 출생으로, 6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자 피신하여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5년 인제(麟蹄)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 법을 받았다.

1910년 한·일합병의 국치(國恥)를 참지 못하여 중국으로 망명, 독립군군관학교를 방문한 뒤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여 불교학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같은 해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과 불교정신을 널리 펴는 데 힘썼다. 1918년 월간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간행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고 문학활동을 전개하였다.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이라는 詩가 새겨진 바위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어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만해기념관(卍海紀念館)

 

기념관 내부에는 만해 생전의 유묵과 [님의침묵] 초간본과 백여종의 판본이 함께 전시되 있다. 3·1독립운동시, 옥중에서 거침없이 쏟아내던 독립은 민족의 자존심, 맹열한 독립론을 전개한 만해의 옥중 투쟁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다. 1962년 정부가 추서한 대한민국 건국공로 최고훈장인 대한민국장이(훈기번호 제25호)전시되어 있고, 한용운 관련 석.박사 논문을 비롯하여 일반자료들이 정리되어 있다.

 

                                           

                                           만해 한용운의 영정  <참고자료>
   

1939년 회갑을 맞아 찍은 사진 자료를 기본으로 하여 옥문성 화백께서 1991년에 완성한 영정이다.

 

                         

                                 백담사전경(16시 40분경 백담사 출발)    <참고사진>

                                    

                                               수렴동계곡(水簾洞溪谷)

 

영시동(永矢洞)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폭포가 있는데 그 모양이 발[簾/렴]을 쳐 놓은 것 같다고 하여 수렴동이라 하였다 한다. 영시동백담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6.25때 폐동되었다. 조선 인조26(1648)에 삼연 김창흡이 이 곳에 영시암(永矢庵)을 짓고 살았는데 6년 되는 해에 찬모가 호랑이에게 물려가 호식동(虎食洞)이라고 하기도 한다.

  

                                                영시암(永矢庵) / 18시경

 

영시암은 1648년(인조26)에 창건되었다. 조선 숙종15년 나라에 큰 혼란이 있었는데, 바로 장희빈 사건이었다.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 민씨는 왕자가 없었고, 숙빈장씨가 숙종14년 9월에 왕자를 낳았다. 숙종은 장씨를 몹시 총애하여 서인들이 간청을 듣지 않고, 숙종15년에 장희빈의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자 영의정 김수흥은 『세자를 가르치는 문제가 급하지, 세자책봉이 급하지 않다 』라며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분보한 숙종은 김수흥, 동생 김수항, 송시열을 귀향 보냈고 같은해 3월에 김수흥의 관직을 박탈하고 윤3월에 사약을 내렸다. 이때 송시열도 제주도에 귀양갔다가 6월에 사약을 받았다. 

 

1689년(숙종15) 삼연(三淵) 김창흡은 그의 아버지 김수항이 기사환국으로 죽음을 당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설악산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곳에 정사를 짓고 영원히 맹세한다는 뜻으로 영시(永矢)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삼연(三淵) 선생께서 설악산에 들어가 백연정사(白淵精舍) 영시암(永矢庵)을 구 축하고 십여 년 간 학문을 닦던 중 시자(侍者)가 호환(虎患)을 만나 부득이 필생 영시암에 칩거하겠다는 결심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선생의 출산(出山)으로 영시암은 선방(禪房)이 되어 근년까지 불사(佛寺)가 되었으나 광복 후 회진(灰塵)되어 주초(柱礎)만 남고 '삼연 선생 영시암유허비(三淵 先生 永矢庵遺墟碑)'마저 화재로 파편만 수습하였고, 소실되어 빈 터만 덩그렇게 남아있던 것을 1988년 도운스님이 중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시암(永矢庵) 삼존불

 

                                                   영시암(永矢庵) 범종각

 

                                                    영시암(永矢庵) 샘물

 

                                            영시암(永矢庵)의 삼성전(三聖殿)

 

                             수렴동(水簾洞)대피소 / 해발580m (18시40분경 도착)

 

                                                            산장내부

 

                                        

                                          수렴동대피소 주인장 이경수씨

 

수렴동 산장의 이경수씨. 60대 중반으로 40년 가깝게 설악산에서 살아 왔다. 수렴동 산장은 설악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알려진 가야동 계곡물과, 봉정암에서 내려간 구곡담 물이 합수(合水)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합수되는 곳의 장점은 양쪽 계곡의 물소리가 번뇌를 없애주는 효과를 준다는 점이다. 설악산을 오르다가 다리가 부러진 사람, 눈에 조난당한 사람들을 수도 없이 구조하는 공덕을 쌓았다. <참고자료: 조용헌 살롱>

 

 

 

설악산 1 (07.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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