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신륵사)
여주(驪州) 봉미산(鳳尾山)/ 신륵사(神勒寺)
나옹화상 열반 성지 천년고찰 신륵사 <자료사진>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정확한 문헌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확실히 알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신륵사 홈에서..>
전각배치도 <자료사진>
일주문(一柱門) <자료사진>
사찰을 방문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일주문은 여기에서 부터 사찰의 경내(境內)가 시작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알림의 문이다. 일주(一柱)라는 것은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 하나라는 것이 아니라 두 기둥을 일직선 상에 세웠다는 표면적인 의미가 있으며 불법을 향한 진리의 길이 오직 하나라는 내면적인 의미를 가진다. <신륵사 홈에서..>
신륵사의 규모에 비해 일주문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너무 큰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아담하고 소박한 일주문이 신륵사에는 훨씬 어울릴 것 같습니다.
구룡루(九龍樓) <자료사진>
거의 대부분의 사찰에는 주불전을 보호하고 사세를 안정시키는 전위 누각이 주불전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 누각은 사찰에서 행하는 모든 제반 의식의 집전 장소로서 기능적 역할을 하는 곳으로 신륵사에서는 구룡루가 여기에 해당된다.
구룡루라는 명칭은 석가모니 부처님 탄생시 물을 뿌려 부처님을 목욕 시켰다는 아홉마리 용에 대한 경전의 내용과 혹은 창건설화에 나타나는 승천한 아홉마리의 용에서 따왔을 것이라 추측되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1858년 김병기에 의해 중창된 정면3칸, 측면2칸의 이 건물은 원래 아래부분이 트여있는 구조였으나 지금은 벽을 쌓아 이층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흔히 다른 사찰의 누각건축물에서는 누대 밑으로 사람이 통과할 수 있도록 아래 공간이 어느정도 여유있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구룡루는 별도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으나 누대 밑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다. 이는 신륵사 중심 권역으로의 진입이 강가 쪽 전면이 아니고, 범종루와 극락보전 우측통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구룡루의 용도가 통로의 기능보다는 누각으로서의 역할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신륵사 홈에서..>
구룡루 뒷면
극락보전(極樂寶殿) <자료사진>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주존(主尊)으로 모신 사찰의 중심 전각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으로 죽은 이의 극락왕생과 함께 중생들의 수명장수와 안락을 도와주시는 분이다.
극락보전 정면3칸, 측면2칸의 다포계 건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법당의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불단 위에는 정교하게 짜여진 닫집이 있고 불단을 받치는 수미단의 단청은 안상 형식의 창속에 학, 연꽃, 코끼리 등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극락보전 내부 대들보에 나옹화상의 필적이라 구전되어오는 '천추만세(千秋萬歲)'라는 현판이 걸려져 있다.
각주(覺珠) 등의 스님이 주전각을 중창하였고 세종22년(1440)에 중수를 거쳐 영릉의 원찰이 된 후 극락보전이라 명명하고 성종4년(1473)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고 한다. 경내의 중심에 위치하고 정남향을 한 현재의 극락보전은 정조21년(1797)에 건축을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한 것이다.
지금의 극락보전이 그 이전의 불전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겠는가에 대하여는 근거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위치와 규모, 그리고 건축형 시에 있어서는 그 이전의 건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 홈에서..>
극락보전 <자료사진>
무거운 겹처마 지붕을 받치기 위해 사용된 4개의 긴 활주가 처마의 하중을 기단부로 전달하고있습니다.
극락보전 측면의 벽화
극락보전 현판
중앙의 아미타불과 좌우로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 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 까지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 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돌의 재질, 조각 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3년(13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홈에서..>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놓인 대리석으로 만든 다층석탑
다층석탑 기단
기단의 면석에는 물결무늬가 있고, 우주는 다른 석탑과는 달리 다른 돌로 구성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조각이 되어 있습니다. 하대괴임에 윗면에는 복련이, 하대갑석 아래 부분에는 앙련이 새겨져 있습니다.
상층의 기단도 하층기단과 마찬가지로 하대(下臺) 갑석 윗면에는 복련이, 상대(上臺) 갑석 아래 부분에는 앙련이 새겨져 있습니다. 면석(面石)에는 비룡문(飛龍紋)과 구름무늬등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탑에 비룡을 조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예라고 합니다. 아마도 신륵사의 창건설화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상층기단 면석의 용무늬
신륵사의 극락보전으로 진입하는 범종루와 관음전 사잇길 <자료사진>
범종각(梵鐘閣) <자료사진>
종을 매달아 놓은 곳이라 하여 종루(鍾樓)라 부르기도 하며, 북을 매단 곳을 고루(鼓樓) 또는 고각(鼓閣)이라 하지만 대개 절의 사물(四物)이 함께 안치되어 있어 통칭하여 종각(鐘閣)이라 부릅니다.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범종, 법고, 운판, 목어 즉 불교에서 말하는 사물(四物)을 조성하여 둔 곳이다. 범종은 그 소리로 인하여 일체 중생이 번뇌로 부터 벗어나 지헤를 증장하고 깨달음을얻게하는데 그 의미가 있으며, 법고는 축생의 무리에게, 목어는 수중의 생명에게, 운판은 하늘을 나는 생명에게 부처님이 진리를 전해 해탈 성불을 염원하는 의미가 있다. 아침, 저녁 예불 때 법고, 목어, 운판, 범종 순서로 치게된다. <신륵사 홈에서..>
목어 <자료사진> 범종<자료사진>
관음전(觀音殿) <자료사진>
중생구제를 위한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전각으로 최근에 건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비전(大悲殿), 보타전(菩陀殿)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주불전일 때는 원통전(圓通殿) 또는 원통보전(圓通寶殿) 이라 부르며, 부속 전각일 때는 관음전(觀音殿)이라 부릅니다.
관음전 현판 <자료사진>
관음전 내부 <자료사진>
관음전 내부에는 가운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그리고 남순동자와 행상용왕을 협시로 모시고 있습니다.
심검당(尋劍堂) <자료사진>
심검당은 지혜의 칼을 찾아 마음 속 무명(無明)의 풀을 벤다는 뜻의 당우명을 지닌 건물로 정면 6칸의 건물이다. 1987년 증.개축된 것으로 예전에는 경학을 공부하던 강원 건물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신륵사 홈에서..>
심검당 현판 <자료사진>
적묵당(寂默堂) <자료사진>
조선시대 가람배치는 대웅전 앞에 누각(강당)을 세우고, 그 좌.우로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배치하는 것이 정형인데, 신륵사에서는 적묵당(寂默堂)과 심검당(尋劍堂)이 여기에 해당된다.
적묵당(寂默堂)은 극락보전 우측에 있는 정면 6칸의 건물이다. 이 건물은 선원에 해당되는 건물로 적묵(寂默)이란 선수행에 있어 고요한 마음 자세로 자신 내면의 세계로 돌아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에 건축되었고, 몇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적묵당을 통하여 고려시대 이래 선객(禪客)과 승경(勝景)을 찾는 시인묵객들이 묵어가면서 교유하던 선방의 격식을 엿볼 수 있으며 당대의 종교 및 문화의 수준을 높이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신륵사 홈에서..>
적묵당 현판 <자료사진>
적묵당 측면 <자료사진>
적묵당 담에 붙은 굴뚝
봉향각 <자료사진>
이 건물은 정조20년(1796) 대규모 중창 불사가 시작된지 1년만인 정조21년에 봉중각 12칸, 좌우 식칸 10칸이 건립되었다고 전하나 모두 유실되고 현재는 정면3칸의 건물만 남아 있다.
현재는 요사(療舍)로 사용하고 있다. 추사체로 죽로지실(竹爐止室)이라 쓰여진 현판은 선미가 넘치는 글씨이며 차를 다려 마시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신륵사 홈에서..>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중생의 사후 세계를 주관하는 지장보살과 십대왕을 모셔놓고 죽은 자의 왕생극락과 이고득락을 기원하는 의식을 하는 전각이다.
신륵사 명부전은 최초로 고려 광종 때 도원대사가 신축한 것으로 전해져 오지만 지금의 건물은 조선후기에 지어진 것이다. 맞배지붕에 정면 3칸의 구조를 가진 건물이다. <신륵사 홈에서..>
명부전(冥府殿) <자료사진>
명부전(冥府殿)은 중생구제의 큰 원력을 세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 전각입니다. 그러나 지장보살이 지옥중생의 구세주이기 때문에 협시인 도명존자 및 무독귀왕 이외에도 염라대왕을 위시한 지옥의 시왕상(十王像)을 봉안하고 있어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합니다.
지옥시왕(地獄十王)은 인도 고대신화에 나오는 사후세계의 지배자인 야마왕이 불교에 들어와 지옥을 다스리는 염라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중국의 도교 영향을 받아 10가지 지옥과 그곳의 왕을 설하는 시왕사상으로 발전하면서 오히려 시왕 중에 한 분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시왕의 각 명호는 진광대왕, 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산태왕, 평등대왕, 도시대왕, 전륜대왕 등 입니다.
명부전 현판
명부전에 모셔진 지장보살
전각 내 중앙에는 저승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모두 구원하기 전에는 성불을 하지 않겠다고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하여 그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모셔놓았습니다.
시왕상(十王像)
이 명부전의 내부에는 목조의 지장삼존상을 위시하여 시왕, 판관, 명사등 도합 21구의 조상이 봉안되어 있다. 과거에는 7구의 동자상과 시왕불화가 함께 봉안되었었으나 현재 별도의 장소에 보관되어 있다.
신륵사 명부전에 모셔진 조상들은 모두 목각으로 그 각법이 사실적이며 생동감이 넘쳐 조선 중기 조각의 극치를 보는 듯하며 특히 해학적인 모습의 신장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짓게 한다. 조각의 기볍으로 보아 이 목각상들은 현종 감수항이 신륵사를 중수했던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홈에서..>
조사당(祖師堂)/보물 제180호
신륵사의 서북편에 위치한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3화상의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셔놓은 곳이다. 세 사람은 서로간에 관계가 돈독했던 스승과 제자로 고려말 기울어 가는 불교계에 한 가닥 빛이 되었던 스님들이다.
1963년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지금의 건물은 조선 예종1년(1469)에 제4대 세종과 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의 능인 영릉(英陵)이 여주로 옮겨진 후 영릉의 원찰(願刹)이 되어 성종3년(1472)부터 대규모로 다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많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륵사 조사당은 낮은 돌기단 위에 세운 정면1칸, 측면 2칸의 특이한 구조를 지닌 건물이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전면을 제외한 3면이 벽으로 마감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정방형에 가깝고 건물내부에 기둥없이 천정을 모두 우물천정으로 짜서 조선초기 다포집 계통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신륵사 홈에서 발췌..>
조사당 내부
조사당 내부에는 중앙에 나옹, 그리고 좌우에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봉안해두고 있으며, 중앙 나옹화상의 영정 앞에는 목조로 된 나옹스님의 독존(獨尊)을 안치하고 있습니다.
조사당(祖師堂)
1963년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지금의 건물은 조선 초기에 다시 지어진 후 많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목은 이색이 지은 <보제존자진당시병서>에 의하면 고려 우왕5년(1397)에 진영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조사당이 신륵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사당앞 향나무 <자료사진>
무학대사가 나옹화상을 추모하면 심었다고 하는 수령 500년된 조사당앞의 보호수인 향나무입니다.
칠성각(七星閣) <자료사진>
치성 광여래는 해와 달, 별들을 다스리고 통솔하는 하늘의 주신으로 천재지변과 재앙에서 중생을 구원하며 자녀 생산을 관장하는 부처님이다. 칠성각은 칠성(치성광여래)에 대한 토속신앙이 불교와 융합되면서 사찰 내에 조성하게 된 전각이다. 신륵사 칠성각은 금당인 극락보전을 지나 적묵당 뒤켠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정면 3칸 건물이다. 내부에는 치성광여래와 일광보살, 월광보살로 구성된 칠성탱화을 위시하여 산신, 독성탱화를 봉안하였다. <신륵사 홈에서..>
‘칠성’이란 북두칠성을 일컫는 것으로, 사찰에 칠성을 모시게 된 것은 중국의 도교사상이 불교와 융합되어 나타난 현상입니다. 칠성을 부처님들로 화한 경우가 보통인데, 치성광여래를 주존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손에 금륜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좌우에 협시로 배치됩니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
이 석종은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난 고려말기의 승려 나옹(懶翁, 1320-1376)의 사리를 모신 종모양의 부도(浮屠)이다. 공민왕의 왕사였던 승려 나옹이 고려 우왕2년(1376)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경상남도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이 절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 제자들이 우왕5년 절을 크게 다시 짓고 절 뒤의 좋은 자리를 택해 부도를 마련하였다.
부도의 기단 위에 돌을 깔고 기단의 앞면과 양쪽면에 2단의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계단에 문양을 새겨 변화를 주고 있다. 그 위에 모셔진 이 석종의 모양은 완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부분에서 수정이 되었으며 맨 꼭대기에는 보주(寶珠:연꽃 봉오리 모양의 장식)를 조각하였는데, 이 석종의 크기는 높이 160cm, 지름110cm이다. 부도 뒤편에 있는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의 내용에 의해 이 석종이 만들어진 시기를 고려 우왕5년(1379)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내판에서....>
보제존자 석종
보제존자 석종과 멀리 보제존자 석종비
계단
보제존자 석종비와 보제존자 석종비 <자료사진>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이 비는 고려 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비다. 나옹이 말년에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절 북쪽 언덕에 종 모양의 부도를 세워 그의 사리를 안치하고 이를 계기로 그의 초상을 모실 진당을 짓는 등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다. 뒷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제자와 시주자의 명단, 중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있다. <신륵사 홈에서..>
보제존자 석종비 <자료사진>
비는 2단의 지대석 위에 연꽃 무늬를 새긴 비좌를 얹어 비몸을 세웠으며 비몸 양옆에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지붕 모양으로 된 개석을 얹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말기에 새로이 유행한 석비형식으로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도 같은 형식입니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보물 제231호)
이 석등은 보제존자 나옹의 부도를 밝히기 의해 서있다. 정면 팔각형의 구도를 지닌 이 석등은 일반적인 석등과 마찬가지로 화강석을 사용하고 있으나 등불을 앉히는 화사석은 납석(곱돌)을 사용하고 있다. 높다란 팔각형의 지대석 위에 놓인 기단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있고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간주석(竿柱石)에는 연주문(連珠紋)으로 구획을 나눈 후 그 안에 亞자형의 안상(眼象)을 배치하고 있다. 상대석에도 하대석과 마찬가지로 연꽃을 새겼다. 납석으로 된 화사석은 높게 만들어졌는데, 반룡문(蟠龍紋)을 새긴 원형 기둥과 화창(火窓), 비천(飛天), 창방(昌枋), 평방(平枋) 등을 가득 조각하였다. 화사석의 높이는 67cm, 전체의 높이는 193cm이다. 팔각형인 지붕돌의 추녀 끝은 살짝 들어 올려졌고 지붕돌 위에는 복발(覆鉢)과 보주를 놓아 상륜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 석등은 나옹이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난 뒤 부도를 세웠던 고려 우왕5년(1379)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후기 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무덤 앞에 놓이는 장명등(長明燈)의 선구적인 예로 평가되고 있다. <안내판에서..>
화사석에 새겨진 비천상(飛天像)
간주석(竿柱石)의 연주문(連珠紋)
대장각기비각(大藏閣記碑閣)/보물 제230호
대장각기비는 고려말 목은(穆隱) 이색(李穡)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비신(碑身)은 대리석으로 된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보제존자석종비와 동일한 수법으로 둘레에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비의 형태는 조형면에서 보제존자석종비 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다.
이숭인(李崇仁)이 지은 비문은 당시 직제학 권주(權鑄)가 쓴 자경 2cm의 해서체로 탑신에 깨어진 부분이 많아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아쉽게도 비를 세운 연대 역시 탈락이 되어 그 시기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으나 대체로 보제존자석종비 제작 4년 후인 홍무16년(1383)으로 추정된다. 본래 신륵사에는 경, 률, 논 삼장을 인출하여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 지급의 명부전 근처에 있었다고 전하나 아쉽게도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다층전탑 위쪽으로 이 비만 남아있다. <신륵사 홈에서..>
대장각기비각의 현판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이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9년(1383)으로,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으며,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 되는데, 이 비가 그러한 예 입니다.
신륵사 대장각기(神勒寺 大藏閣記)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그의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대장경(大藏經)을 발간하여 부모의 명복을 빌기로 소원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가정의 아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아버지가 소원한대로 장경을 간행하려 하였으나 관직에 얽매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371년에 다시 어머니 김씨(金氏)를 여의고 1374년에는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이 승하하였다. 이색의 아버지 이곡은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모셨던 신하이며 이색도 공민왕조에 과거 급제하여 대신의 지위까지 올랐다. 이색은 임금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명복을 빌고 한편으로 그의 아버지의 못이룬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장경을 발간하기로 하였다. 이색은 나옹(懶翁)의 탑명(塔銘)을 지은바 있었다. 그는 장경을 발간하는 일이 자기의 능력으로는 그 방대한 경비를 조달할 수 없었으므로 나옹의 제자들의 힘을 빌리기로 생각하여 그들과 상의 하였다. 그 결과 승려인 무급(無及), 수봉(琇峯) 두 사람이 그의 문도인 종유(從臾)를 데리고 우왕(禑王)6년(1380) 2월부터 모금에 나서서 각참(覺참)은 순흥(順興)에서 각홍(覺洪)은 영해(寧海), 도혜(道惠)는 청주(淸州), 해주(海珠)는 충주(忠州), 각운(覺雲)은 평양(平壤), 범웅(梵雄)은 봉주(鳳州). 지보(志寶)응 아주(아州)에서 종이를 뜨고 석환(釋幻)은 먹을 제조하여 우왕7년(1381) 4월에 경,률,논(經,律,論)을 찍어내고 9월에 표지를 입히고, 10월에 각주(覺珠)가 제목을 쓰고, 각ㅁ(覺ㅁ)가 책보를 만들고 11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들었으며 국신리(國신里)에 거주하는 묘안(妙安)이라는 노파는 아침 저녁으로 식량을 얻어다가 모든 참가자의 음식을 꾸준히 공급하였다.
우왕8년(1382) 1월에 화엄영통사(華嚴靈通寺)에서 '경읽는모임'의 의식을 마치고 4월에 배에 싣고 여흥(驪興) 신륵사(神勒寺)에 운반하였다.여기는 나옹이 최후를 마친 곳이다. 화산군(花山君) 권희(權憘)가 돌아가신 그의 부모와 그의 아내의 부모를 위하여 금으로 만든 접시를 기부하고 다시 여러 유지들의 기부에 의하여 이 절에 있는 순공(順公)의 감독하에 절 남쪽에다 2층 건물을 짓고 각수(覺修)에 의하여 단청을 올리고 장경 전부를 정리하여 넣었다. 5월, 9월, 금년 1월에 '경 읽는 모임'을 갖고 해마다 정례적으로 모임을 갖도록 규정하였다. 안에모신 비로자나(毘盧遮那)상은 화산군(花山君)이 기증하였고 보현보살(普賢菩薩)상은 당성군(唐城君) 홍의룡(洪義龍)이 그 부모를 위하여 기증하였고, 문수보살(文殊菩薩)상은 순성옹주(順誠翁主) 왕씨(王氏)와 강부인(姜夫人)이 공동으로 기증한 것이다.
이색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계획했던 소원이 30여년만에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이 사실을 돌에 새기기 위하여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에게 부탁하여 이 글을 짓게 하였다.
원비 고려 우왕(禑王) 9년(1383)
글 판도판서 예문관 제학(版圖版書 藝文館 提學) 이숭인(李崇仁)
글씨 진현관 제학(進賢館 提學) 권 주(權 鑄)
1981년 12월 일 임 창 순 요역
다층전탑(多層塼塔)/(보물 제226호)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일컫는데, 신륵사 다층전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 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자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지만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 상태가 어지렵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신륵사 홈에서..>
전(塼:벽돌)의 문양
다층전탑(多層塼塔) <자료사진>
다층전탑(多層塼塔)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유일한 전탑으로, 높이는 9.4m이다. 신라시대의 전탑이 거의 간격을 두지않고 벽돌을 쌓은대 비해 이 전탑은 벽돌 사이를 띄어 그 사이에 면토(面土)를 발랐다. 상륜부는 전으로 만든 노반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복발, 보개, 보주 등이 얹혀있다. <안내판에서...>
전탑의 기단
강월헌(江月軒) <자료사진>
남한강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강월헌은 6각형의 정자로 주위 경치와도 훌륭한 조화를 이루는 건물이다. 강월헌이 세워진 곳은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다비장소(화장터)였으며, 나옹의 문도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나옹 생전의 당호(當號)인 강월헌이라 이름하였다. 이에 대해 이색은 <보제존자석종비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보제의 몸은 이제 화장을 하였건만 강물과 달은 지난날과 다름이 없구나. 이제 신극이 긴 강가에 있고 석종이 거기에 우뚝 솟아 있으니 달이 뜨면 그림자가 강에 거꾸로 걸려있고 물빛은 등불빛 같고, 무럭무럭 타오르는 향기만 그 속에 엉켰으니 이른바 강월헌이로다. 비록 한 없는 세월이 흐른다해도 마치 보제가 살아있는것만 같구나."
본래 이 누각은 나옹화상의 다비를 기념하여 세운 삼층석탑과 거의 맞붙어 있었으나 1972년 홍수로 옛 건물이 떠내려간 이후 지금의 자리에 철근과 콘크리트로 1974년 재건축한 것이다. <신륵사 홈에서..>
강월헌 현판 <자료사진>
강월헌 옆의 삼층석탑 <자료사진>
나옹화상의 다비를 기념하여 세운 삼층석탑
비석군(碑石群)
신륵사 사적비 <자료사진>
여주신륵사팔각원당형석조부도(驪州神勒寺八角圓堂形石造浮屠)/시도유형문화재 제195호(경기) 등의 부도군(浮屠群) <자료사진>
판돈령김공병익송덕비(判敦寧金公炳翼頌德碑) <자료사진>
높이 2.4m, 비신 1.37m의 판돈령 김병익의 송덕비로서 조선 철종9년 순원왕후의 발원에 의해 당시 호조판서 김병기가 신륵사를 중수한 뒤 세운 공덕비입니다.
감로수통 <자료사진>
원호장군 전승비(元豪將軍 戰勝碑) <자료사진>
원호장군(1533~1592)은 원주 원씨로 여주에서 태어난 조선중기의 무신이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고 있던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분연히 일어나 패주하는 관병과 민병 등 300여명을 규합하여 신륵사의 팔대숲 일대에서 도강을 기도하는 왜병을 섬멸하고, 구미포(龜尾浦0에 집결한 왜적을 새벽에 기습하여 몰살시키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이같은 여강 일대에서의 전투는 무인지경으로 북진하던 왜적을 육전(陸戰)에서 격파한 최초의 대승이었으며 국위를 선양하고 실추된 국민의 사기를 진작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 그는 여주목사겸 경기, 강원 양도 방어사로 임명되었고 강원도로 전임하여 금화에서 분전하다 전사하였다. 후에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이다. <안내판에서...>
2007.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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