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龍門寺)
[용문산(龍門山) / 용문사(龍門寺)]
용문사 전경
용문사(龍門寺)는 신라 신덕왕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도 한다. 고려 우왕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30년(1893)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이후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등을 중건하였으며,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보물 제531호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30호 은행나무가 있다.
▶ 용문사 가는 길
중앙선 전철을 이용 용문역까지 간 후, 용문시외버스터미날로 이동하여 용문사행 버스를 이용한다.
용문역(龍門驛)
용문역(龍門驛)은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한국철도공사 중앙선의 철도역으로, 2009년 말 수도권 전철 중앙선이 이 역까지 연장 개통되면서 새 역사(驛舍)가 완공되었다.
용문역 ---> 용문시외버스터미날
용문역 1 번 출구를 나와 용문역사 앞 도로를 보며 직진 후 2차선도로 만나 왼쪽으로 조금 가면 오른쪽으로 2층에 삼화다방 간판이 있는 건물 1층과 뒷쪽 공터가 용문시외버스터미날이다. 용문역에서약 7~8분 소요.
용문시외버스터미날
수도권 전철이 다니고 관광객이 늘어났음에도 용문시외버스터날의 모습은 40~50년 전을 연상하게 한다. 이곳에서 용문사까지 약15분 정도 버스로 이동하여야 한다.
버스시간표(용문시외버스터미날 --> 용문사): 2010년 5월21일 현재
신점리(용문사) 버스 정류장
용문사 방향
매표소 입구(입장료 2,000원. 부처님오신날은 무료)
용문산관광지 전도
용문사(龍門寺)에 가려면 위 지도의 12번 매표소를 들어서서 용문산관광지를 통과하여 3번 일주문을 거쳐 경내로 들어서야 한다. 매표소에서 용문사까지는 약 20분 소요.
▶ 참고사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매표소 안쪽에서 용문사까지 운행하는 용문사 승합차를 기다리는 신도들.
용문산국민관광지
1971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이 곳에는 잔디광장, 소공연장, 야외공연장, 야영장, 조각공원, 친환경농업박물관 등이 들어서 있다. 또한 놀이공원인 용문산랜드가 있고 안쪽으로 용문사 일주문이 있으며 이를 지나면 용문사까지 산책로가 이어진다.
용문사 오르는 길
절골계곡 옆으로..
보현교를 건너고..
일주문 옆 용문사 은행나무를 위한 祭壇
우측부터 靈木祭壇記文, 護國靈木銀杏樹祭壇 , 護國靈木銀杏樹頌碑, 頌碑建立記
2007.11.16 호국영목은행수제단(護國靈木銀杏樹祭壇) 제막식(除幕式)행사 <참고사진>
2009년 10월19일 은행나무 영목제 <참고사진>
호국영목은행수송비(護國靈木銀杏樹頌碑)
양평문화원에서는 1992년부터 '호국영목은행수송비'를 세우고 해마다 은행제(銀杏祭)를 지내고있다.
영목제단기문(靈木祭壇記文)
기호(畿湖) 제1의 명산 용문산 가섭봉(加葉峰) 아래 가람(伽藍)의 터에 고고(孤高)하게 우뚝 솟은 신기(神氣)의 은행나무는 정토(淨土)의 땅에 서 있어 세계적으로 놀랄만한 신보목(神寶木)이다. 1천2백여년의 수령을 간직한 거목이요, 유실수(有實樹)로는 동양 제1의 영목(靈木)이요 신목(神木)이다.
영국(英國)왕실에서 우리나라를 방문 하였을 때 한국 최고의 자랑거리가 무엇이냐고 묻자 우리나라에서는 용문산 가람 언덕의 신비(神秘)한 은행나무의 신괴(神怪)함을 전하였던 바 영국 욍실에서는 은행나무를 보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용문에서는 1993년 4월8일에 은행나무를 칭송(稱頌)하는 송비(頌碑)를 세우고 은행나무의 불고장생(不枯長生)을 위하는 헌주제(獻酒祭)를 올리고무병장생을 위하여, 탁주(濁酒) 10여통을 나무 뿌리에 주하(注下)하는 예를 올리고 영목의 영을 빌어 양평 군민의 뜻에 쫓아 석물(石物)로 제단과 상석(床石)을 설치하고 예를 갖추어 기원제를 봉례(奉禮)함으로서 민속문화 제례로서 자리매김을 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장을 이루고저 경건한 마음으로 군민의 합장(合掌)으로 단(壇)을 싸었노라.
2007년 10월 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성균관전인 : 홍 정 표 근찬
주최 : 양 평 군
주관 : 양평문화원, 용문 향사회
후원 : 양평문화원, 용문면
협찬 : 용 문 사
송비건립기(頌碑建立記)
숲속의 산책로 (일주문을 지나지 않고 숲속 길을 통해 용문사로 갈 수도 있다.)
일주문(一柱門) / 1986년 중건
일반적으로 사찰에는 일주문과 천왕문, 불이문 등 세개의 문이 있다. 용문사에는 일주문 밖에 없으며 경내로 들어가는 첫번째의 문이며, 단 하나의 문이다. 측면에서 바라보면 두 기둥이 한 줄로 보여, 일주문이라 부르며, 이 문을 경계로 문 밖은 속세이고 문 안은 부처님의 세계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용을 전면과 후면 양쪽에 모두 4구를 조각해 붙였다. 용문사의 관문은 일주문인데 이 일주문은 용문(龍門)으로 특이한 점은 용을 전면의 양쪽과 뒷면의 양쪽, 모두 4구를 조각해 붙여 용문산의 상징을 나타내었다.
용문사 가는 소나무 숲길
2009년 4월 용문사 일주문에서부터 해탈교까지 황토와 마사토가 섞인 진입로와 그 옆으로 시원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수로를 조성하였다.
조성된 수로(水路)
도랑물이 흐르는 숲 속 '볼랫길'
황톳길과 수로가 어우러지도록 조성된 숲속 볼랫길. 볼랫길이란 아름다운 길로 가꾸어 누구나 가서 보고 싶어 하는 길을 의미한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 300m 가면 정지국사부도(正智國師浮屠) 및 비(碑)를 만날 수 있다.
이 다리를 건너..
계단을 조금 오르면..
정지국사(正智國師) 비(碑) / 보물 제531호
용문사에서 약 300 m 떨어진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碑)는 부도에 딸린 탑비로 1398년(태조7년)에 건립되었으며, 정지국사 (1324∼1395)의 행적 등을 기록한 석비다.
높이 1.10m, 너비60cm, 두께 20cm이며 비신의 윗부분을 모서리 양쪽 모두를 접듯이 깍아 내린 형태로서 신라와 고려, 조선 초기와 병합된 조각 형식으로 조성 당시의 찬조자 명단과 정지국사의 행적에 대한 내용이 당시 학자였던 권근의 글로 새겨져 있다.
조선 태조4년에 입적하였는데 찬연한 사리가 많이 나와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 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정지국사 지천 [智泉, 1301~1362]
고려말 고승 정지국사(正智國師)는 속명이 김지천으로 1324년(고려 충숙왕 11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습니다. 19세에 장수산 현암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30세 때인 1353년(공민왕 2년) 무학대사(1327~
1405)와 함께 중국 연경에 들어가 지공(인도승)을 만나 그의 법을 이어 받은 나옹선사(혜근 1320~1376)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지천대사는 개풍군 경천사에서 용문사로 옮겨와 대장전을 짓고 개풍 경천사에 보관되었던 구씨원각대장경 한질을 옮겨 보관하였으나 1907년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다. 1356년(공민왕 5년) 귀국하여 벼슬이 싫어 자취를 감추고 자신의 수양에만 힘쓰다가 천마산 적멸암에서 입적하셨다.
이 비는 원래 부도에서 약 20m 아래쪽에 건립되어 있었으나 파괴되어 1970년경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이 비(碑)에서 80m 정도 더 오르면 정지국사부도(正智國師浮屠)가 있다.
정지국사부도(正智國師浮屠) / 보물 제531호
이 용문사 정지국사(正智國師) 부도(浮屠) 역시 정지국사 비(碑)와 같이 보물 제531호로써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부도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무덤으로 경배 대상이 아니므로 보통 절의 외곽에 세우는데, 정지국사의 입적 후 제자 중 조안대사가 사리를 수습하여 이곳에 모셔 세운 것으로사리가 무척 많이 나와 이를 전해들은 태조가 국사 호칭을 추증하고 부도를 세우도록 하였다고 한다.
부도의 형태
용문사 정지국사 부도의 높이는 2.15m이며 상륜부가 거의 상실된 것만 제외하면 기단, 탑신, 옥개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전체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팔각원당형(하부 사각, 가운데 원형, 상부 팔각)의 부도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단아한 기품을 지닌 조선 초기 부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래쪽의 기단부는 하대, 중대, 상대로 구성되었으며 기단부중에서 아래쪽의 하대석은 사각형으로 1면에 5개, 모서리에 1개, 26개의 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모양이 장식되어 있고, 가운데의 중석은 원형으로 중앙의 배가 부른 형상이며 상대석은 팔각으로 16개의 연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위의 팔각의 탑신을 얹었는데 퇴화되어 잘 안 보이지만 손끝으로 만져보면 새겨진 문비(門扉)가 만져집니다. 그 위의 옥개석은 팔각으로 끝부분에 귀꽃을 장식하였으며 기와를 드리운 형상을 연상케 합니다. 옥개석 정상에 위치한 상륜부는 반구형으로 역시 연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정지국사(正智國師)
정지국사는 고려말 고승으로 속명은 김지천, 1324년(고려 충숙왕11년)에 황해도 재령에서 사재부정(司宰副正)을 지낸 아버지 김연과 어머니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장수산 현암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30세 때인 1353년(공민왕 2년) 무학대사(1327~1405)와 함께 중국 연경에 들어가 지공(인도승)을 만나 그의 법을 이어 받은 나옹선사(혜근 1320~1376)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1356년(공민왕 5년) 귀국하여 벼슬이 싫어 자취를 감추고 자신의 수양에만 힘쓰다가 1395년(태조4년)에 천마산 적멸암에서 나이 62세 법랍 43세로 입적하였다. 법호는 축원(竺源)이다.
깨달음을 얻어 도를 이루라는 해탈교(解脫橋)
용문사 입구의 전통찻집 (소나무와 황토 흙으로 지었으며, 너와지붕 형태의 건물로 1998년 세웠다.)
부도전(浮屠殿)
1995년 중건되었으며, 부도전 안에는 1998년 조성된 용문사사적비(龍門寺事跡碑)도 있다. 부도는 고승들의 사리를 모신 곳인데, 고승의 죽음은 부처의 죽음과 같다고 해서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하여 부도를 만들었다.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다양한 모양의 부도들 이 있는데 종을 엎어놓은 모양, 탑의 일부처럼 생긴 모양, 둥그런 항아리에 작은 지붕을 얹은 모양 등으로 그 크기와 조각 수법이 다양하다.
용문사사적비(龍門寺事跡碑)
이수(螭首)
귀두(龜頭)
용문사 은행나무
1962년 12월3일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6-1에 위치하는 이 은행나무는 용문사 소유로서 추정수령이 1100년이다. 안내판에는 높이 41m, 둘레가 11m 로 되어있다.
용문사 은행나무 안내판에서..
호국영목(護國靈木)
이 은행나무는 나라의 큰 변란이 있을 때나 경사가 있을 때마다 “윙~ 윙~ ” 소리를 내며 길흉을 예고했다는데, 실제로 조선말 고종황제가 승하할 때도 나무 한 가지가 부러졌다 하며, 8.15 해방과 6.25 전쟁 때도 “윙~ 윙~ ” 소리내어 우는 소리를 인근 주민들 모두가 들었다 한다. 또한 나뭇꾼이 이 은행나무를 베어 없애려고 톱을 대고 자르려고 하자 나무에서 피가 나오고 갑자기 날이 캄캄해지면서 천둥번개가 일고 소낙비가 쏟아져 기겁을 하고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양평은 일제강점기 때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1907 일본군이 의병의 은거지였던 이곳 용문사를 비롯하여 상원사, 사나사에 불을 지르고 다시 와 보니 용문사는 불에 타고 없었으나 은행나무는 그대로 살아 있어 이 은행나무를 잘라 없애려고 하자 역시 천둥번개가 치며 소나기가 내려 자르지 못했다고 전해지면서 호국영목으로 부르고 있다.
용문사 경내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이며, 줄기 아랫부분에 큰혹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의 나무 중 가장 키가 크며, 우람하고 당당한 위엄을 풍기는 대표적인 명목이라 할 수 있다.
은행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1983년에 설치한 90m 높이의 피뢰침용 철탑
(피뢰침 높이에서 45도 각도 이내에 나무가 있어야 낙뢰를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은행나무를 위하여 보호책을 설치하여 뿌리를 밟고 지나가지 않도록 하였고 가지의 흔들림을 적게하기 위하여 연결고리를 이용 서로 붙잡아 매 놓았다.
은행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암수가 서로 마주보아야 한다는 속설이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데, 은행나무의 수꽃가루는 100리(40㎞) 이상을 날아다니며 은행나무의 암꽃은 10리(4㎞) 이내의 수꽃가루를 흡입할 수 있다고 한다.
나무의 혹 수분저장고
은행나무가 천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은행나무 옆에 위치한 해우소의 인분 때문이기도 하다는데,
은행나무의 뿌리가 해우소로 향해있어, 인분에서 영양분을 섭취하여 오랜 삶을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은행나무는 봄에 잎을 피우고 꽃을 피워 열매가 맺는 동안 1일 수분이 10드럼(2,000리터)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수분공급은 옆 계곡의 물로 충분하고 영양공급은 용문사 내의 재래식 화장실에서 공급받았던 셈이다. 또한, 50년이나 100년만에 한번이라도 극심한 한해가 있을 것을 대비하여 수분저장고(나무옆의 혹이 콜크 형식임)을 두고 있다고 한다.
용문사에는 사천왕문이 없다. 보통 사찰이나 일주문을 들어서면 사천왕문을 두어 동서남북에서 침입하는 잡신을 막고 불법을 지키도록 수호신을 두고 있으나 용문사에는 사찰 앞 은행나무가 사천왕을 대신하여 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은행나무 밑 금낭화(錦囊花)
금낭화는 현호색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세뱃돈을 받아 넣던 비단 복주머니 모양과 비슷하고, 금낭화의 꽃 속에 황금빛 꽃가루가 들어 있어 금주머니꽃이라는 뜻인 금낭화라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금낭화(錦囊花)
금낭화의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이다.
은행나무대제 <참고사진>
해마다 봄, 가을에 이곳에서 은행나무를 위해 큰 제사를 지낸다. 봄에는 삼월삼짓날 용문사에서 은행나무대제를 지내고 있으며, 가을에는 양평문화원에서 영목제를 지낸다. 이밖에도 용문면 신점리 주민들이 용문산 입구에서 행하는 산신제와 9월20일 백운문화제 행사의 일환으로 용문산령제를 행한다.
은행나무의 가치
2005.10.29(토) KBS-1 TV 『대한민국 가치 대발견』프로그램 에서 용문사 은행나무의 가치를 각계의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구하고 측정하였는데, 은행나무의 수명을 앞으로 200년으로 보고 약 1조 6,884억원의 가치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바 있다.
용문사 안내판(1995조성) <참고사진>
용문사안내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대웅전 앞뜰이 붐빈다.
자비무적(慈悲無敵)
부처님께서 빠와에 도착하여 대장장이의 아들 쭌다(춘다)에게 마지막 공양을 받으시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보시한 사람은 복을 얻고
마음이 자비로운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으며
선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악이 사라지고
욕심을 버리는 사람은 괴로움이 없어지나니
만약 이것을 받들어 실천하는 사람은
머지 않아 열반을 얻으리라."
대웅전 뜰에 오르는 계단 소맷돌의 법수석에 조각된 태극무늬가 용문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대웅전(大雄殿) / 1984년 중건
대웅전은 용문사의 주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판인 ‘대웅전’이란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글씨체를 모방해서 쓴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사진/용문사>
대웅전 앞 좌우에는 석등이 하나씩 있다. 대웅전 주련(柱聯)에 쓰여진 글은 『화엄경(華嚴經)』권6 「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에 나오는 내용이다.
佛身充滿於法界(불신충만어법계) / 부처님은 온 세상에 가득해서
普現一切衆生前(보현일체중생전) / 널리 모든 중생들 앞에 나타난다네
隨緣赴感靡不周(수연부감미부주) / 연따라 두루 나아가 감응하지만
而恒處此菩提座(이항처차보리좌) / 항상 깨달음의 자리를 떠난 적이 없구나
대웅전(大雄殿) 내부
내부를 보면 중앙에 석가모니부처님이 모셔져 있으며,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보살로 봉안되어 있다. 뒤에는 탱화가 놓여 있고, 삼존불 위에는 닫집이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다. 나머지 3면 벽에는 천불과 신중탱화와 천수천인탱화가 모셔졌으며, 범종이 있다.
<참고사진/용문사>
<참고사진/용문사>
<참고사진/용문사>
<참고사진/용문사>
대웅전 뒤로 보이는 용문산 정상
3층석탑 / 1989년 조성
대웅전의 전면에는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불사리탑인 삼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1989년 대대적인 중창을 할 때 조성된 것이다.
삼층석탑
탑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리의 양에 한계가 있기에 대신 불경이나 작은 불상 등을 넣어둔다. 탑을 해체하면 안에서 불경 등이 발견되는 것이 이러한 이유다.
지장전(地藏殿) / 1993년 중건
대웅전 우측에는 지장전이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로 팔작지붕이다.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하는 전각으로 사찰에서는 저승세계인 유명계(幽冥界)를 상징하는 당우(堂宇)로서 흔히 명부전(冥府殿)이라고도 한다. 명부란 염마왕이 다스리는 유명계 또는 명토(冥土)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또한 지옥의 심판관 시왕을 모시 곳이므로 시왕전[十王殿],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전각이므로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한다.
<참고사진/용문사>
지장전 주련(柱聯)의 글은 지장보살도량의 발원문으로 일중거사(一中居士) 김충현 선생의 글씨다.
地藏大聖威神力(지장대성위신력) / 지장보살의 위신력이여!
恒河沙劫說難盡(항하사겁설난진) / 항하 모래수(인도 갠지스강의 모래)의
겁세월 동안 설해도 다 할수 없네
見聞瞻禮一念間(견문첨례일념간) / 보고 들으며 예 올리는 일념 사이에도
利益人天無量事(이익인천무량사) / 人天(하늘에 사는 사람)에 이익됨이 끌이 없도다!
지장전(地藏殿) 내부
지장전에는 지장삼존 즉 지장보살과 함께 무독귀왕(우)과 도명존자(좌)가 협시불로 모셔져 있다. 그 뒤로는 지장탱화를 모셨다. 일반적인 지장탱화의 구성을 보면 지장보살과 좌우보처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중심으로 명부시왕, 판관, 녹사, 사자, 장군, 졸사, 사방을 지키는 사천왕을 나타낸다. 지장보살은 도리천에 살며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고, 시왕은 128개 지옥을 나누어 다스리는 명계의 왕이다.
시왕탱화(좌측)
시왕탱화(우측)
본래는 지장전과 시왕전이 각각 독립된 전각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불설예수시왕생칠경(佛說豫修十王生七經)》이 편찬된 이후 종래의 현세 기복신앙이 내세 구원신앙으로 바뀌면서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고려말 이후 지장전과 시왕전이 명부전으로 결합되었다고 한다.
지장전 내부 좌우벽에는 시왕탱화와 신중탱화를 모셨다.
범종각(梵鐘閣) / 1986년 중건
범종을 달아 놓은 전각을 말한다. 절에 따라 범종루,종각,종루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단층일 경우 각(閣)이라 하고 중층일 경우 루(樓)라고 한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중층으로 세워 법전사물(法殿四物)을 함께 두기도 한다. 이곳의 범종각은 좌우 1칸씩으로 아담한 정자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물(四物)이란 범종(梵鐘), 목어(木魚), 운판(雲版), 법고(法鼓) 네 가지를 말하며, 보통 아침에 28번, 저녁에 33번을 친다. 치는 순서는 아침(운판→목어→북→범종28회), 저녁(범종33회→북→목어→운판)의 순으로 친다. 치는 횟수에 따라 의미가 다른데 28번은 부처로부터 6조 혜능(慧能:638∼713)까지 이어진 법맥이 28명이란 뜻이고, 33번은 불교의 세계, 곧 33천을 의미한다.
<참고사진/용문사>
범종(梵鐘)은 지옥의 모든 중생들에게까지 들리도록 하여 고통을 덜어주고 하늘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더 해 주기 위해 친다.
법고(法鼓)는 세간의 모든 중생들이 번뇌를 끊고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목어(木魚)는 나무를 물고기 모양으로 하여 배부분을 파내고 안쪽의 양벽을 나무채로 두들겨 소리를 내는 법구인데 물속의 사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친다. 한편 목어는 물고기가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처럼 수행에 힘쓰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운판(雲版)은 청동이나 철로 만든 구름 모양의 법구로써 허공에 날아다니는 새들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관음전(觀音殿) / 2007년 신축
단청이 칠해지지 않은 관음전에는 얼마전까지만해도 미륵불상이 세워져 있던 자리였는데 8각지붕의 관음전으로 변했다. 관음전은 관음보살을 주존으로 봉안한 법당이며, 관음보살은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이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즉시 중생의 고통과 소원을 모두 듣고 막힘없이 해결해 준다고 한다. 형상은 머리에 쓰는 보관에 따라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고, 손에 수병이나 연꽃 등 다양한 지물을 들고 있다.
금동관음보살좌상 / 경기유형문화재 제172호
관음전 내부에는 모셔진 금동관음보살좌상과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청동으로 만든 귀 개금하였다. 관음보살은 현실세계에서 자비로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머리에는 나무로 된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리본처럼 묶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있다. 원만한 얼굴에는 눈ㆍ코ㆍ입이 작게 표현되었으며, 상체는 뒤로 약간 젖혀져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어, 당당하면서도 화려한 귀족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보살상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목 부분에서 한번 접혀 양 팔로 자연스럽게 내려오고 있으며, 오른쪽의 소매자락은 배 부분의 옷자락 사이에 끼워져 곡선을 형성하고 있다. 발목 부분에서는 부드럽게 접힌 八자형의 옷주름을 만들면서 양 무릎을 덮고 있다. 가슴과 양 무릎 사이의 구슬장식, 왼쪽 가슴에 있는 금으로 된 삼각형의 장식 등에서 전형적인 14세기의 보살상 양식을 볼수 있다.
삼성각(三聖閣) / 1986년 중건
삼성각(三聖閣)은 사찰에서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당우이다. 이곳의 삼성각은 정면3칸, 측면1칸 목조건물로 팔작지붕이며, 안에는 칠성탱화,독성탱화, 산신탱화를 모셨다.
삼성각 [三聖閣]
삼성 신앙은 불교가 한국 사회에 토착화하면서 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와 합쳐져 생긴 신앙 형태이다. 전각은 보통 사찰 뒤쪽에 자리하며, 각 신앙의 존상과 탱화를 모신다. 삼성을 따로 모실 경우에는 산신각·독성각·칠성각 등의 전각 명칭을 붙인다. 삼성을 함께 모실 때는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을 짓고 따로 모실 때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을 짓는다.
산신탱화 <참고사진/용문사>
산신(山神)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으로 산신이라는 인격신과 화신인 호랑이로 나타난다. 인격신으로서의 산신은 나이 든 도사의 모습이고, 호랑이는 대부분 산에 위치한 사찰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산신탱화 <참고사진/용문사>
독성(獨聖)은 천태산(天泰山)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獨聖)·독수성(獨修聖)이라 불린 나반존자(那畔尊子)를 일컫는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수독성탱(修獨聖幀)·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는 독성탱화(獨聖幀畵)를 모신다. 그림은 천태산과 소나무·구름 등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비구가 오른손에는 석장(錫杖),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 위에 정좌한 모습이다. 때로는 독성 외에 차를 달이는 동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동자와 문신(文臣)이 양쪽 협시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칠성탱화 <참고사진/용문사>
칠성(七星)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북두칠성을 뜻하며, 본래 중국의 도교사상과 불교가 융합되어 생긴 신앙이다. 대개는 손에 금륜을 든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주존으로 하여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에 협시로 둔다.
요사(寮舍) / (1990중건)
경내 가장 서쪽에 주변이 얕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는 건물이 요사채이다.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며,스님들이 생활하는 곳이자 수행 공간이다.
승려들이 식사를 마련하는 부엌과 식당, 잠자고 쉬는 공간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기도하러온 신도들이 잠깐 쉬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 공간이며, 창고, 우물, 장독, 세탁시설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한데 모여 있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식사와 빨래, 혹은 다른 일을 위한 공간이 별도로 있기도 하다.
요사 / 1912년 중건, 1994년 증축. <참고사진>
경내 서쪽의 이 전각은 예전에는 관음전이었으나 2007년부터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관음전 바로 앞에는 시원한 약수터와 작은 연못이 있다.
약수터
소멸장(消滅場)
▶ 부처님 오신날 풍경
2010.05.21 용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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