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북도(全羅南道) 전주(全州)
● 전주에서의 점심 (22.05.29)
전주육회비빔밥
음심점 한국집 안마당
● 전주한옥마을
1) 오목대(梧木臺)와 이목대(梨木臺)
[오목대(梧木臺)]
오목대(梧木臺)는 고려 말 우왕 6년(1380년)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조상인 목조(穆祖)가 살았던 이 곳에 들러 승전을 자축한 곳입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제국 광무(光武) 4년(1900)에 비석을 건립했는데,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는 비문은 고종황제가 직접 쓴 친필을 새긴 것입니다.
오목대 누각은 원래 없었던 건물이었으나 늘어나는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1988년 7월 새로 지어 준공하였습니다.
근대 서예가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2) 선생의 글씨입니다.
梧 木 臺 樓 閣 建 立 記 梧木臺는 小白山脈의 德裕山 雲長山 줄기가 萬德山에 이어져 僧巖山에서 뻗어 내린 鉢山 기슭에 자리한 아담한 墩臺다. 後百濟의 哀歡이 서려있고 또 穆祖 李安社에 얽힌 說話를 周邊에서 찾게 된다.麗末의 將軍 李成桂가 雲峰에서 倭寇를 무찌르고 王都 開城으로 凱旋하던 途中 全州府城에 들르게 되자 先祖가 살았던 故鄕에 대한 감회를 이기지 못하여 墩臺위에 宗親을 모아놓고 露宴을 베푼 곳이다. 意氣沖天한 그는 醉興에 大豊歌를 부르게 되자 從事官으로 따랐던 圃隱 鄭夢周는 이를 마땅치 못하게 여겼던지 자리를 박차고 나와 萬景臺에 올라가서 北天을 바라보고 悲憤慷慨한 마음으로 詩를 읊어 오늘에 專한다. 墩臺 南쪽에는 全州八景 가운데 三景인 寒碧晴煙, 南周莫鍾, 坤止望月과 더불어 完山七峰이 멀지아니한 곳에 마주 보이고 東北쪽에는 麒麟吐月과 乾止山 너머로 푸르른 沃野가 雲曖속에 아물거린다. 西쪽으로는 全州川을 따라 多佳山과 黃鶴臺등 여러 連峰이 念珠처럼 둘러있고 可連山과 黃尨山을 西北멀리 바라보게 된다. 아름다운 眺望을 보기 위하여 옛날부터 詩人 墨客이 끊이지 않고 오늘에도 觀光客이 불어나는 추세에 있으나 따가운 햇볕과 소나기를 洔避할 建物이 없는지라 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시민의 뜻을 뱓들어 墩臺 北麓에 樓閣을 일으키니 墩臺이름을 따라 梧木臺라 한다 1988년 7월 일, 全州市長 |
[이목대(梨木臺)]
이목대(梨木臺)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李安社)의 유허(遺墟)로서 시조 이한(李翰) 때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입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용비어천가》에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목대에도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가 새겨진 비가 오목대와 동시에 세워졌습니다.
목조의 첫 번째 이주 [전주 ⇒ 삼척]
목조(穆祖)는 태어나고 살았던 전주를 떠나 삼척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목조가 전주에 살 때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와서 목조가 사랑하는 기생과 관계하자 둘은 싸움이 벌어졌고, 전주의 지주(知州;주의 장관)가 산성별감과 한편이 되어 싸우게 되었다. 지주가 조정에 보고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목조를 해치려 한다는 정보를 목조는 미리 알고 삼척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 때 목조를 따르던 170여 호가 함께 이주했다. 삼척은 목조 이안사의 외가(外家) 지역이기 때문이다. <삼척문화원> |
목조의 두 번째 이주 [삼척 ⇒ 덕원]
목조가 삼척에서 수년 후에 다시 함경도로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앞서 전주에서 싸웠던 산성별감이 안렴사 벼슬에 올라 삼척고을로 순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조는 그 와의 싸움을 피하기 위해 전주에서 따라왔던 170여 호와 함께 지금의 원산 지역인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옮겨 갑니다. 이때는 원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근 100년간 지배하게 되는 쌍성총관부가 영흥에 설치될 무렵입니다. |
2) 한옥마을 풍경
전주한옥마을은 전주 풍남동 일대에 700여 채의 한옥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전통 한옥촌이며, 전국 유일의 도심 한옥군입니다. 1910년 조성되기 시작한 우리나라 근대 주거문화 발달과정의 중요한 공간으로, 경기전, 오목대, 향교 등 중요 문화재와 20여개의 문화시설이 산재되어 있습니다. <전주시자료>
3) 경기전(慶基殿)
[하마비(下馬碑)]
경기전(慶基殿) 정문 앞에 자리하고 있는 하마비(下馬碑)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으로 이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한 것입니다.
뒷면에는 "萬歷四十二年四月"이라 음각되어 있는데, 만력(萬歷)은 중국 명대(明代) 신종(神宗)의 연호(年號)(1573~1620)로 광해군6년(1614) 4월에 세웠다는 기록입니다.
위 사진 반대쪽 측면에는 "咸豊丙辰至月日重刻" 이라 새겨져 있는데, 함풍(咸豊)은 중국 청대(淸代) 문종(文宗)의 연호(1851~1861)로 철종7년(1856) 11월에 다시 고쳐서 세웠다는 기록입니다.
[경기전(慶基殿)]
경기전(慶基殿)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 제사하는 전각으로 태종 10년(1410)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태조 어진을 모신 곳을 어용전(御容殿), 태조진전(眞殿) 등으로 부르다가 세종24년(1442) 왕조의 발상지라 여기는 전주에 세운 전각이기에 경기전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후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6년(1614년) 11월에 중건되었습니다.
경기전(慶基殿) 정문을 들어서서 경기전 경역으로 들어서면 마주하는 홍살문입니다. 홍살문은 능·원·묘·궁전 또는 관아 등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나무 문으로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합니다. 홍살문은 왜 세웠는지 문헌상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세워진 장소로 보아 경의(敬意)를 표하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정전(正殿: 보물 1578)은 경기전의 본전(本殿)으로 1410년(태종 10)에 지었으며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 제사하기 위하여 지은 전각입니다. 정유재란 때 불에 타 1614년(광해군6)에 중건하였고, 1872년 태조 어진을 새로 모사하여 봉안하면서 크게 보수하였습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 및 갑석(甲石)을 갖춘 기단 위에 세운 맞배지붕의 건물로, 그 전면 가운데에는 1칸 규모의 기단을 돌출시켜 쌓고 그 위에 첨각(添閣)을 세워 배례청(拜禮廳)을 시설했습니다. 마치 능침(陵寢)의 정자각(丁字閣)과 같은 형상입니다. 이 첨각 기단의 3면에는 제사의식 때 사용하는 검은색 전돌을 깐 보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자각 배례청 정면 풍판 중앙에는 거북이 암수 한 쌍을 조각하여 붙여 두었는데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을 통하여 목조건물인 정전이 화마를 피하고 조선왕조가 영원하기를 기원하였습니다.
정전 앞뜰 양 옆에는 화재를 대비해 물을 담아두는 '드므'가 놓여 있습니다.
경기전 정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를 그린 초상화인 어진(御眞)은 조상추모의 의미뿐 아니라 왕실의 영구한 존속을 도모하는 의미도 있었으며, 특히 태조는 나라를 연 개국시조로서 더욱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습니다.
[경기전(慶基殿) 부속건물]
전주에 있는 전주 이씨 시조 이한(李翰)과 부인 경주 김씨 위패를 모신 사당인 조경묘와 태조 이성계의 초상을 모신 사당인 경기전을 그린 그림이다. 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 정전의 뒤쪽에 조경묘가 그려져 있다. 각각 좌우에 제사를 준비할 수 있는 제기고[제기 보관 창고]와 재실[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숙식과 제사음식을 장만하고 음복례(飮福禮) · 망제(望祭)를 지내는 곳] 등의 부속 공간들이 마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① 수복청(守僕廳)
② 수문장청(守門將廳) / 경덕헌(慶德軒)
③ 마청(馬廳)
④ 서재(西齋)
⑤ 동재(東齋)
⑥ 제기고(祭器庫)
⑦ 어정(御井)
⑧ 용실(舂室)
⑨ 전사청(典祀廳)
⑩ 조병청(造餠廳)
[전주사고(全州史庫)]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 실록각을 1991년 복원한 건물입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오늘에 보전된 피어린 사적(史蹟)을 새겨 기리기위해 1987년 12월25일 조선왕조실록보전기적비 건립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보전기적비(朝鮮王朝實錄保全紀績碑)를 경기전 내 전주사고(실록각) 앞에 세웠습니다.
전주사고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은 왜군에게 전주가 함락되기 직전에 내장산으로 옮겨져 보관되었고, 이후 왜란중에도 불구하고 정읍을 출발하여 태인, 익산, 용인, 임화, 부여, 정산, 아산, 해주, 강화를 경유하여 묘향산사고에 안치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왜란 후에 이 전주본을 저본으로 교정본을 1부를 만들고 총 3부를 새로 인쇄하여 확보된 5부를 서울 춘추관사고와 지방에 새로이 건립한 오대산, 태백산, 마니산, 적상산사고에 1부씩을 보관하였습니다. 이 때 묘향산사고에 있던 전주본은 마니산사고로 이전되었습니다.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 「사고의 변천사」, 「전주 사고 연표」, 「조선왕조실록의 과학적 보관 방법」, 「실록 제작의 전 과정을 기록한 책, 실록청의궤와 실록형지안」 , 「사관과사초」 등의 게시자료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全州史庫 寶錄閣 (전주사고 실록각) 전주에 사고를 설치한 것은 이곳이 조선 왕실의 본관지이며, 이미 1410년(태종 10)에 태조의 어용(御容)이 경기전에 봉안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또 실록각(實錄閣)이 처음부터 마련되지 않아 실록들을 여러 차례 옮겨 보관하였다. 1445년(세종 27) 처음 전주에 실록들을 봉안할 때, 부(府)의 성안 승의사(僧義寺)에 두었다가 1464년(세조 10) 가을에 진남루(鎭南樓)로 이안(移安)하였다. 당시 세조는 전라도에 명해 실록각을 건립하도록 했으나, 연이은 흉년으로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미루었다. 1472년(성종 3) 봄, 세조·예종 양조의 실록이 만들어지자 성종은 양성지(梁誠之)를 봉안사(奉安使)로 삼아 이를 전주사고에 봉안하게 하였다. 이때 춘추관의 구신(舊臣)이었던 김지경(金之慶)이 이곳 관찰사로 나와 있으면서 애써 실록각을 건립하고자, 양성지와 더불어 경기전의 동편에 자리를 잡고 계(啓)를 올렸다. 이에 이웃 여러 포(浦)의 선군(船軍) 300명을 역군(役軍)으로, 전주부윤 조근(趙瑾)을 공역(工役) 책임자로, 순창군수 김극련(金克鍊)은 공사를 감독하도록 하여 1473년 5월을 지나 공사를 마쳤다. 실록각이 완성되자 그해 6월 진남루에 봉안하고 있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그 뒤 120년간 실록과 기타 서적이 잘 보관되어 내려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화에 소실될 위험이 있었다. 전주사고의 실록을 1592년(선조 25) 6월 22일에 정읍현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겼다. 이 때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과 유신(柳訊), 수직유생(守直儒生)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의 공로가 컸다. 9월 28일에는 다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겼다. 전주사고본 실록과 태조 어용은 정읍의 내장산에서 1년 18일을 숨겨 보존하다가 뒤에 해로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別殿)으로 옮겨 난을 피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 보현사의 전주사고본 실록을 다시 영변의 객사로 옮겨두었고, 1603년 5월에는 등서(謄書)와 재인(再印)의 편의를 위해 다시 강화도로 옮겼다. 임란 후, 전주사고본 실록과 이를 바탕으로 재 인쇄된 4질을 합한 5질의 실록을 봉안하기 위한 5사고가 정비되나 전주사고는 계승 복구되지 못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선왕조실록의 표지, 크기가 다른 이유 조선 전기에 제작된 실록은 모두 감색 비단을 이용하여 표지를 제작하였으며, 크기는 왕대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가장 큰 크기는 중종실록이다. 현존하는 실록을 보면 동일한 크기인데 표지의 재질이 다른 것은 조선후기에 표지만 다시 제작해 묶었기 때문이며, 내지는 조선 전기의 전주사고본 실록이다. |
[조경묘(肇慶廟)]
조경묘 (肇慶廟)는 경기전과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상징하는 곳으로 경기전 정전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태조의 22대조이며 전주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과 부인 경주 김씨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1771년(영조 47) 전국 유생의 상소에 의하여 지은 것입니다. 조경묘 (肇慶廟)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조경묘 경기전 도형의 그림을 보면 지금은 없어진 전사청(典祀廳) ·동재 ·서재 ·수복방 ·제기고 등 부속건물들과 별전이 따로 있는 광범위한 성역이었습니다. 1854년(철종 5) 개수되었고 외신문(外神門), 내신문(內神門), 정묘(正廟)와 그 좌우에 동익랑(東翼廊)ㆍ서익랑(西翼廊)이 있으며 내신문 양쪽에는 제기고(祭器庫)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 외신문은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정묘(正廟)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전면에는 툇간을 마련하여 돌을 깔았고, 내부에는 북쪽벽에 감실을 설치하여 위패를 봉안하였습니다. 관원은 영(令, 종5품)과 별검(別檢, 종8품) 각 1인을 두었으며, 묘관은 조정에서 선출하였습니다.
봉안된 위패 ‘시조고신라사공신위(始祖古新羅司空神位)’와 ‘시조비경주김씨신위(始祖妣慶州金氏神位)’는 영조의 명을 받아 쓴 정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진박물관(御眞博物館)]
어진박물관(御眞博物館)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태조어진(太祖御眞)을 봉안한 국내 유일의 어진박물관으로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경기전(慶基殿) 내에 있습니다. 전주(全州)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本鄕)으로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 10) 태조 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습니다. 조선은 건국 후 한양을 비롯하여 평양, 경주, 개경, 영흥, 전주 등 여섯 곳에 태조어진을 봉안하였으나 현재는 전주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태조어진을 영구보존하기 위해 경기전 뒤편에 어진박물관을 건립하여, 태조어진 전주봉안 600주년이 되던 2010년 11월에 개관하였습니다.
어진박물관(御眞博物館)은 지상 1층, 지하 1층의 한옥으로 건축되었습니다. 경기전(慶基殿)의 경관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전시실이 주로 지하에 배치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입니다.
지상에는 어진실( 御眞室)만 있는데, 태조(太祖)어진 진본(眞本)을 비롯하여 영조(英祖)ㆍ철종(哲宗)ㆍ고종(高宗)ㆍ순종(純宗)어진 모사본(模寫本)과 세종과 정조 표준영정(標準影幀)을 모시고 있습니다.
지하는 상설전시실(역사실, 가마실)과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역사실에는 어진이안통, 용두, 『조선왕조실록』(복제본)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가마실에는 어진을 이안하는데 쓰였던 신연, 향정자, 채여, 가교 등을 비롯한 가마류와 용선, 홍개 등의 의식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조선왕실과 관련한 특별전이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예종대왕태실과 비(睿宗大王胎室─碑)]
태실은 왕이나 왕실의 자손이 태어났을 때 그 탯줄을 명산에 안치하는 것으로 그 안에 태를 넣은 항아리를 묻었는데 그 형태는 승려의 사리탑과 비슷합니다. 예종대왕 태실 및 비는 1578년(선조 11)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태실마을 뒷산에 세웠던 것을 1970년에 경기전으로 옮겼습니다. 경기전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이 태실(胎室)은 옆에 태실비(胎室碑)가 함께 놓여 있습니다.
태실(胎室)은 부도와 같은 형태로, 태를 넣은 항아리를 석실에 묻었습니다. 전체 높이 2.43m이며 옥신(屋身)의 둘레 255cm, 난간 둘레 1,540cm, 난간주 높이 108cm입니다. 사각의 두툼한 하대석 위에 항아리 모양의 몸돌을 놓고 그 위에 평면 팔각의 살찐 지붕돌을 얹은 모습입니다. 주위로는 여덟 개의 각기둥을 모지게 세우고, 그 사이마다 아래위로 연잎을 돋을 새김한 동자주를 놓고 그 위에 팔모의 난간석을 연결하여 장식과 보호를 겸한 난간을 돌렸습니다.
태실 옆에 있는 태실비(胎室碑)는 목과 다리를 한껏 웅크린 화강암 거북받침 위에 통돌 하나로 이수와 몸돌을 깎은 대리석 비를 올려놓은 모습입니다. 태실비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龜趺) 위에 비몸[비신(碑身)]을 세우고, 용무늬를 둔 머릿돌을 얹은 모습의 이수(螭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몸 앞면에는 ‘예종대왕태실(睿宗大王胎室)’이라 새겨져 있고, 비석 뒷면의 기록에는 조선 선조 11년(1578)에 처음 비를 세운 후, 156년이 지난 영조 10년(1734)에 다시 세워두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전주전동성당(全州殿洞聖堂)]
전주전동성당(全州殿洞聖堂)은 전주시 완산구 전동에 있는 사적 제288호 천주교 성당으로 1891년 프랑스인 신부 보두네가 대지를 매입하고, 1908년 푸아넬 신부의 설계로 착공하여 1914년에 준공했습니다. 회색과 적색의 이형 벽돌을 사용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서, 내부 열주는 8각 석주로 되어 있으며, 석주 사이는 반원의 아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동성당은 처음에 천주교 순교지인 풍남문 밖에 세웠었는데 추후에 현재의 자리에 확장해서 지었습니다. 조선시대 전주는 전라감영이 있는 곳으로 천주교회사에서 많은 순교자를 낸 곳으로 꼽히는데 전동성당은 자연스럽게 순교지의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전주 풍남문(全州 豊南門)]
‘풍남문’ 글씨는 헌종 8년(1842))에 전라도관찰사 서기순(徐箕淳, 1791∼1854)이 쓴 것이라고 전합니다.
<전라북도(全羅北道) 전주(全州) 답사여행>
'답사와 여행(국내) > 전라북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륵사지(彌勒寺址)·보석박물관/익산(益山)-2 (0) | 2019.05.29 |
---|---|
익산쌍릉(雙陵)·왕궁리(王宮里)유적/익산(益山)-1 (0) | 2019.05.28 |
동국사(東國寺)/군산(群山)-3 (0) | 2019.04.06 |
근대사명소(近代史名所)/군산(群山)-2 (0) | 2019.04.06 |
선유도(仙遊島)/군산(群山)-1 (0) | 2019.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