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경기도

신륵사(神勒寺)/여주(驪州)-3

케인스 2019. 3. 25. 15:16




                 신륵사(神勒寺) / 여주(驪州)-3

 


경기도(京畿道) 여주(驪州市) 신륵사(神勒寺)


   

 신륵사 위치 <google 참고사진>


관광순환버스 이용

                   

                     관광순환버스 노선도


        ★ 천서리 버스정류장에서 '나'노선 관광순환버스를 이용하여 신륵사로 이동합니다. (22분 소요) 


                   천서리 출발(14:23) ---('나'노선 관광순환버스 이용)--- 신륵사 도착(14:45)



 탐방 계획표






파사성(婆娑城) → 신륵사(神勒寺)



천서리[막국수촌] 버스정류장


천서리[막국수촌] 버스정류장에서 '나'노선 14시23분 발 관광순환버스를 이용 신륵사(神勒寺)로 이동합니다. 

    (약22분 소요) 


       신륵사 입구 여주도자세상 주차장


14:45 / 신륵사 관광순환버스 정류장 도착



신륵사(神勒寺)



14:48


신륵사관광지 전도 <google 참고사진>


신륵사(神勒寺) 전경  <참고사진>


14:50 / 황포돛배 선착장 가는 길

     

     

     

      조선시대 주요 운송수단이었던 황포돛배를 재현한 황포돛배유람선 <여주시 참고사진>


황포돛배는 황포를 돛에 달고 그 바람의 힘으로 물자를 수송하였던 배입니다. 여주는 국토의 대동맥을 연결하는 한강의 상류지류인 남한강을 끼고 있는 고장으로서 조선시대 4대 나루중 이포나루와 조포나루 2곳이 있었을 정도로 서울과 중부권을 연결하여 주는 중요한 수상교통 중심지였던 곳입니다.



14:53 / 원호장군 전승비




 여강길(5일 장터길) 안내판



일주문(一株門)



14:54 / 봉미산 신륵사(鳳尾山神勒寺) 일주문(一柱門)


본래 일주문(一柱門)이라는 말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으로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일주문(一柱門) 현판



불이문(不二門)



불이문(不二門)


불이문(不二門) 은 해탈문이라고도 하며 ‘불이(不二)’는 진리 그 자체를 달리 표현한 말로서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합니다. 이 문을 들어서면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전개됨을 의미합니다.


                                                 불이문(不二門) 현판



비석군(碑石群)



14:59 / 여주신륵사사적비(驪州神勒寺事蹟碑),  인류화합공생기원비(人類和合共生祈願碑), 및 공적비(功績碑)


2009년 5월 한일불교 문화교류대회에 참석한 일본 불교계가 일본이 한국민에게 고통을 끼친 과거사를 반성하고 참회하는 내용을 새긴 '인류화합공생기원비(人類和合共生祈願碑)'를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 세웠습니다. <연합뉴스 참조> 



신륵사 개요 및 전각 배치도



        

         

        신륵사 전경 <참고사진>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며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확실치 않습니다. 1379년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으며, 1382년 대장각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습니다. 조선시대 때 억불정책으로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 영릉의 원찰이 되었고, 1472년 절이 확장되고 다음 해에 보은사로 개칭되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 1792, 1858년에 각각 중수되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륵사(神勒寺)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동쪽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신륵사(神勒寺)라는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岩)이라는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며, 또 하나는 고려 고종(高宗)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사나워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 하여 신력의 신(神)과 제압의 뜻인 륵(勒)을 합쳐 신륵사(神勒寺)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현존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여주 신륵사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보물 제180호)·명부전·심검당·적묵당·노전(爐殿)·칠성각·종각·구룡루(九龍樓)·시왕전 등이 있습니다. 또한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보제존자석종(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호)·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등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습니다.


     전각 배치도



15:00 / 여주 신륵사(驪州神勒寺)



강월헌(江月軒)



강월헌(江月軒)


남한강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강월헌은 6각형의 정자로 주위 경치와도 훌륭한 조화를 이루는 건물입니다. 강월헌이 세워진 곳은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다비장소(화장터)였으며, 나옹의 문도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나옹 생전의 당호(當號)인 강월헌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이색은 <보제존자석종비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보제의 몸은 이제 화장을 하였건만 강물과 달은 지난날과 다름이 없구나. 이제 신극이 긴 강가에 있고 석종이 거기에 우뚝 솟아 있으니 달이 뜨면 그림자가 강에 거꾸로 걸려있고 물빛은 등불빛 같고, 무럭무럭 타오르는 향기만 그 속에 엉켰으니 이른바 강월헌이로다. 비록 한 없는 세월이 흐른다해도 마치 보제가 살아있는것만 같구나."


본래 이 누각은 나옹화상의 다비를 기념하여 세운 삼층석탑과 거의 맞붙어 있었으나 1972년 홍수로 옛 건물이 떠내려간 이후 지금의 자리에 철근과 콘크리트로 1974년 재건축한 것입니다. <신륵사 자료>


                                          강월헌(江月軒) 현판 <참고사진>


강월헌(江月軒)과 삼층석탑(三層石塔)


강월헌(江月軒)과 남한강[여강(驪江)]


 돛을 내린 황포돛배[세종대왕호]



삼층석탑(三層石塔)



삼층석탑(三層石塔)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나옹화상을 화장을 한 자리에 세워진 삼층석탑


기록에는 고려 말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을 신륵사 경내 남한강 가에서 화장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바로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석탑은 대웅전 앞에 세우는데 이렇게 동떨어진 강가에 서 있기 때문에 기록에 보이는 화장을 한 장소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고려 후기의 석탑


화강암을 깎아 조성한 이 삼층석탑은 현재 3층의 몸돌은 멸실된 상태로 비바람에 심하게 마모되었습니다. 이 탑은 기단부를 한 장의 넓적한 돌로 조성을 하고, 그 밑으로는 자연 암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탑의 위에 조성한 상륜부는 사라졌으며 삼층 지붕돌 위에 구멍은 상륜부를 조정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옥개석은 마모가 심해 원래의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다층전탑(多層塼塔)



                        15:05 / 다층전탑(多層塼塔): 보물 제226호



         

탑 북쪽에 있는 이 탑의 수리비에 "崇禎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이라고 씌어 있어서 1726년(영조2)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전탑입니다.



각 층의 옥개는 옥신에 비해서 극히 간략화되어 있다. 상륜부는 전(塼)으로 된 노반 위에 화강석으로 된 복발, 앙화, 보륜, 보개 등이 얹혀 있습니다.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대장각기비각(大藏閣記碑閣)


                                  대장각기비각(大藏閣記碑閣) 현판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대장각기비의  비신(碑身)은 대리석으로 된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둘레에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이숭인(李崇仁)이 지은 비문은 당시 직제학 권주(權鑄)가 쓴 자경 2cm의 해서체로 탑신에 깨어진 부분이 많아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비를 세운 연대 역시 탈락이 되어 그 시기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으나 대체로 보제존자석종비 제작 4년 후인 홍무16년(1383)으로 추정됩니다. 본래 신륵사에는 경, 률, 논 삼장을 인출하여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 지급의 명부전 근처에 있었다고 전하나 아쉽게도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다층전탑 위쪽으로 이 비만 남아있습니다. <신륵사 자료>


 신륵사 대장각기(神勒寺大藏閣記)

 

                                             신륵사 대장각기(神勒寺大藏閣記) 내용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그의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대장경(大藏經)을 발간하여 부모의 명복을 빌기로 소원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가정의 아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아버지가 소원한대로 장경을 간행하려 하였으나 관직에 얽매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371년에 다시 어머니 김씨(金氏)를 여의고 1374년에는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이 승하하였다. 이색의 아버지 이곡은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모셨던 신하이며 이색도 공민왕조에 과거 급제하여 대신의 지위까지 올랐다. 이색은 임금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명복을 빌고 한편으로 그의 아버지의 못이룬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장경을 발간하기로 하였다. 이색은 나옹(懶翁)의 탑명(塔銘)을 지은바 있었다. 그는 장경을 발간하는 일이 자기의 능력으로는  그 방대한 경비를 조달할 수 없었으므로 나옹의 제자들의 힘을 빌리기로 생각하여 그들과 상의 하였다. 그 결과 승려인 무급(無及), 수봉(琇峯) 두 사람이 그의 문도인 종유(從臾)를 데리고 우왕(禑王)6년(1380) 2월부터 모금에 나서서 각참(覺참)은 순흥(順興)에서 각홍(覺洪)은 영해(寧海), 도혜(道惠)는 청주(淸州), 해주(海珠)는 충주(忠州), 각운(覺雲)은 평양(平壤), 범웅(梵雄)은 봉주(鳳州). 지보(志寶)응 아주(아州)에서 종이를 뜨고 석환(釋幻)은 먹을 제조하여 우왕7년(1381) 4월에 경,률,논(經,律,論)을 찍어내고 9월에 표지를 입히고, 10월에 각주(覺珠)가 제목을 쓰고, 각ㅁ(覺ㅁ)가 책보를 만들고 11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들었으며 국신리(國신里)에 거주하는 묘안(妙安)이라는 노파는 아침 저녁으로 식량을 얻어다가 모든 참가자의 음식을 꾸준히 공급하였다.

 

우왕8년(1382) 1월에 화엄영통사(華嚴靈通寺)에서 '경읽는모임'의 의식을 마치고 4월에 배에 싣고 여흥(驪興) 신륵사(神勒寺)에 운반하였다. 여기는 나옹이 최후를 마친 곳이다. 화산군(花山君) 권희(權憘)가 돌아가신 그의 부모와 그의 아내의 부모를 위하여 금으로 만든 접시를 기부하고 다시 여러 유지들의 기부에 의하여 이 절에 있는 순공(順公)의 감독하에 절 남쪽에다 2층 건물을 짓고 각수(覺修)에 의하여 단청을 올리고 장경 전부를 정리하여 넣었다. 5월, 9월, 금년 1월에 '경 읽는 모임'을 갖고 해마다 정례적으로 모임을 갖도록 규정하였다. 안에모신 비로자나(毘盧遮那)상은 화산군(花山君)이 기증하였고 보현보살(普賢菩薩)상은 당성군(唐城君) 홍의룡(洪義龍)이 그 부모를 위하여 기증하였고, 문수보살(文殊菩薩)상은 순성옹주(順誠翁主) 왕씨(王氏)와 강부인(姜夫人)이 공동으로 기증한 것이다.

 

이색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계획했던 소원이 30여년만에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이 사실을 돌에 새기기 위하여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에게 부탁하여 이 글을 짓게 하였다.

 

원비 고려 우왕(禑王) 9년(1383)

 

글 판도판서 예문관 제학(版圖版書 藝文館 提學) 이숭인(李崇仁)
글씨 진현관 제학(進賢館 提學) 권 주(權 鑄)

 

1981년 12월  일          임 창 순 요역


                           

                        여주봉미산 신륵사 구룡루 중수비(驪州鳳尾山神勒寺九龍樓重修碑)


    구룡루 중수비(九龍樓重修碑)가 구룡루(九龍樓) 옆에 있지 않고 왜 대장각기비각(大藏閣記碑閣) 앞에 있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여주봉미산 신륵사 구룡루 중수비(驪州鳳尾山神勒寺九龍樓重修碑) 내용


옛날부터 신륵사는 경치가 뛰어난 이름 있는 절이라고 칭하였다. 일찍이 나옹(懶翁)스님과 목은 이색(李穡)이 교유하던 곳으로 당시에 호계(虎溪)라고 일컬었다. 절의 남쪽에 구룡루가 있는데 누각 아래에 물이 모여 연못이 되었고 옛날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하여 누각의 이름이 된 것이다.


누각이 오래 되어 숙종15(1689)년에 수리를 했다가 60년이 지나 지금 영조25(1749)년에 서까래와 기와를 바꾸고 치장하여 옻칠과 색칠을 하여 환하게 면목을 일신하게 되었으니 누각이 흥하고 쇠하는 것도 또한 때가 있는 것인가? 스님들이 돌을 새겨 후대에 보이기 위하여 나에게 그 일을 기록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도은(陶隱) 이숭인이 지은 옛 비석에서 우리 선조 정간공(靖簡公 權僖)이 그 부인을 위해 금잔을 시주한 사실을 보았고 처마에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남긴 글이 있어 지금까지 사람들의 눈과 귀에 빛나고 있으니 이 일에 있어 내가 참여하는 것은 행운이다.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맹자는 “오백년 만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어진 사람이 나온다.”라고 하였는데 유학과 불교가 같은 도는 아니지만 드러나고 감추어지는 것은 진실로 같은 이치이다. 나는 불교는 나지도 죽지도 않고 윤회가 끝이 없다고 들었다. 조사(나옹)가 입적한지 거의 오백년인데 이제 누각에 글을 새기고 치장하는 것이 또한 오늘이니 바로 왕수인이 문을 열어보는 때인 것이다. 장차 불진을 세워 몽둥이로 때리며 이 누각에 앉아 가장 높은 경지의 대승을 설법하여 백가지 천가지의 기이한 광경을 나타내면 가릉(迦陵)의 훌륭한 소리가 온 세상에 두루 퍼질 것이다.


용이 신령이 된 것이 명백하여 혹은 뛰어 오르고 혹은 가라앉아 변화를 측량할 수는 없지만 깊은 연못에서 흰 옷 입은 아홉 노인이 은혜로운 구름과 빗속에서 참선하지 않는다고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목은선생의 남기신 덕행에 받들어 인사하고 눈을 씻고 먼저 보았다. 시에 “조사의 등불은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이에 누각은 오래 보존되어 훼손되지 않을 것이며 신령과 귀신이 보호하여 귀부(龜趺 : 비석 받침대)도 우뚝하게 서서 닳아 마멸되지 않으리라.


영조27(1751)년 5월 5일 통훈대부 전 행 사간원 헌납 권신(權賮)은 기록하고 진산 후손 강주팔(姜柱八)이 쓰다.



보호수(保護樹)



                         보호수: 600년된 은행나무[높이: 22m, 둘레: 3.1m, 2.7m]



구룡루(九龍樓)



 15:13 / 구룡루(九龍樓)


구룡루는 신륵사의 중심법당인 극락보전 앞에 서 있는 누각입니다. 대부분의 사찰에는 주불전을 보호하고 사세를 안정시키는 전위 누각이 주불전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구룡루(九龍樓) 현판 <참고사진>


구룡루라는 이름은 석가모니 탄생 때 9마리용이 물을 뿌려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경전내용과 신륵사가 창건될 때 커다란 연못을 메우고 그곳에 살던 9마리 용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과 연관되는 것으로 추측되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습니다.


구룡루(九龍樓) 뒷면, 봉미산 신륵사(鳳尾山神勒寺) 현판


1858년 김병기에 의해 중창된 정면3칸, 측면2칸의 2층 누각건물입니다.  흔히 다른 사찰의 누각건축물에서는 누대 밑으로 사람이 통과할 수 있도록 아래 공간이 어느정도 여유있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구룡루는 별도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으나 누대 밑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이는 구룡루의 용도가 통로의 기능보다는 누각으로서의 역할이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륵사 자료>


                                       봉미산 신륵사(鳳尾山神勒寺) 현판 <참고사진>


조선 영조 때 동대(東臺)의 전탑[다층전탑]을 중수하고 난 뒤 구룡루를 중수하였고, 또한 1858년(철종 9) 김병기(金炳冀)에 의해 신륵사가 중창될 때 구룡루도 중수되었습니다. 전면에 “구룡루(九龍樓)”라는 현판이 있고 극락보전과 마주보고 있는 뒷면에는 서예가 오세창의 제자인 여주출신 동창(東倉) 원충희(元忠喜: 1912~1976)가 쓴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구룡루 내부 <참고사진>


구룡루 안에는 김병기의 「신륵사중수기(神勒寺重修記)」를 비롯하여, 1919년 용주사 주지 강대련(姜大蓮)과 1932년 봉은사 주지 나청호(羅晴湖)의 제영시, 이천 부발면 매곡 하일당 이회명(李會明)의 「등청심루우시(登淸心樓偶詩)」, 그리고 1954년 원주 문막 김택영(金澤榮)의 제영시가 걸려 있습니다. 이회명의 시판(詩板)은 청심루가 소실될 때 옮겨 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역정보포털자료>



김병기 송덕비(金炳冀頌德碑)



 김병기(金炳冀) 송덕비(頌德碑)


이 송덕비는 1860년(철종11)에 건립되었으며, 김병기(金炳冀: 1818-1875)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이조판서, 예조판서, 좌찬성 등을 거쳤습니다. 본관은 안동이며, 철종 때 여주지방에 큰 홍수가 나자 사재을 털어 양곡1000석을 제공하였다고 합니다. 이 송덕비(頌德碑)는 신륵사에 시주하여 법당 및 구룡루(九龍樓) 등을 보수하였다 하여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입니다. 비(碑) 전면에는 판돈령 김공병기송덕비(判敦寧金公炳箕頌德碑)라 음각되어 있으며, 전면 좌측 아래에는 간역오위장연안김지택(看域五衛將延安金智澤)이라 음각되어있습니다. 비(碑)의 후면에는 김병기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병기(金炳冀) 송덕비(頌德碑) 앞뒷면  <참고사진>




극락보전(極樂寶殿)




15:15 / 극락보전(極樂寶殿)


극락보전(極樂寶殿)은 아미타불을 주존(主尊)으로 모신 사찰의 중심 전각입니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으로 죽은 이의 극락왕생과 함께 중생들의 수명장수와 안락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극락보전은 정면3칸, 측면2칸의 다포계 건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기록에 의하면 고려 우왕5년(1379) 나옹선사의 입적 후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의 스님이 주전각을 중창하였고 세종22년(1440)에 중수를 거쳐 영릉의 원찰이 된 후 극락보전이라 명명하고 성종4년(1473)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고 합니다. 경내의 중심에 위치하고 정남향을 한 현재의 극락보전은 정조21년(1797)에 건축을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것입니다. 지금의 극락보전이 그 이전의 불전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겠는가에 대하여는 근거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위치와 규모, 그리고 건축형 시에 있어서는 그 이전의 건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륵사 자료> 


극락보전 닫집 <참고사진>


법당의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불단 위에는 정교하게 짜여진 닫집이 있고 불단을 받치는 수미단의 단청은 안상 형식의 창속에 학, 연꽃, 코끼리 등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내부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입니다.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나옹화상 찬필로 알려진 '천추만세' 현판 <참고사진>


               극락보전 내부 대들보에 나옹화상의 필적이라 구전되어오는 '천추만세(千秋萬歲)'라는 현판이 걸려져 있습니다. 



극락보전 목조 아미타삼존불() <참고사진>


보물 제1791호인 신륵사 극락보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불상 내부에서 복장원문이 발견되어 1610년에 조각승 인일(仁日)과 수천(守天)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정확한 조성시기와 새로운 17세기 초 조각승의 발견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1977년에 다시 금칠하였습니다.


 극락보전 목조 아미타삼존불() <참고사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이 서 있습니다. 이들 삼존상은 장방형 얼굴과 세장한 신체비례, 금엄하면서도 단정한 인상, 협시보살상의 각각 다른 착의 형식 등이 특징입니다.


       극락보전 후불탱화 <참고사진>


불화로는 1900년에 조성된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의 지장탱화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또한 1773년에 주조한 범종에는 조성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극락보전 활주(活柱)


무거운 겹처마 지붕을 받치기 위해 사용된 4개의 긴 활주(活柱)가 처마의 하중을 기단부로 전달하고있습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다층석탑(多層石塔)



                         15:15 / 다층석탑(多層石塔): 보물 제225호,  높이 약3m

 

                기단부


                상층기단 면석(面石)


상층기단 면석에는 화형(花形)과 연주문(連珠文)으로 장식한 우주(隅柱)형의 모각이 있고 각 면에는 용문양을 조각하였는데 수법이 능숙하다. 따라서 용 주위의 구름 문양도 우아하여 구름과 용이 잘 어울린다.


                         다층석탑(多層石塔)



 극락보전 앞마당의 아름다운 향나무



심검당(尋劍堂)



 심검당(尋劍堂)


                                              <참고사진>


심검당(尋劍堂)이라는 이름은 "칼을 찾는 집"이라는 의미로 칼은 무명을 끊는 지혜의 칼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심검당은 지혜의 칼을 찾아 마음 속 무명(無明)의 풀을 벤다는 뜻의 당우명을 지닌 건물입니다.


 심검당(尋劍堂) <참고사진>


극락보전(極樂寶殿) 왼쪽에 위치한 면 5칸의 건물로 1987년 증.개축되었으며 예전에는 경학을 공부하던 강원(講院) 건물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요사채 및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적묵당(寂默堂)



적묵당(寂默堂)


                                     현판은 적묵실(寂默室) <참고사진>


극락보전(極樂寶殿) 오른쪽에 위치한 전면 6칸의 건물로, 조선 후기에 처음 건축되었고, 몇 차례 중수하였습니다. 극락보전 앞 좌우에 심검당(尋劍堂)과 마주보고 서서 극락보전, 구룡루와 함께 중심마당을 이룹니다.

 

                                     적묵당(寂默堂) <참고사진>


            조선시대의 가람 배치에서 선원(禪院)에 해당하는 건물로, 북쪽 벽면에 부서진 기와로 둥글게 쌓은 굴뚝이 있습니다.


 적묵당(寂默堂)


적묵당을 통하여 고려시대 이래 선객(禪客)과 승경(勝景)을 찾는 시인묵객들이 묵어가면서 교유하던 선방의 격식을 엿볼 수 있으며 당대의 종교 및 문화의 수준을 높히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화콘텐츠닷컴 자료>



봉향각(寂默堂)



봉향각(奉香閣)


정조 20년(1796)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고 1년후 봉향각 12칸 측면 10칸이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모두 유실되고 현재는 정면 3칸의 건물만 남아 있습니다.  현재는 요사(寮舍)로 사용되고 있으며 현판은 죽로지실(竹爐止室)로 되어 있습니다.


                                       죽로지실(竹爐止室) 현판 <참고사진>


추사체로 죽로지실(竹爐止室)이라 쓰여진 현판은 선미(線美)가 넘치는 글씨입니다.  죽로지실이란 차를 달여 마시는 차향이 그윽한 집이란 뜻으로 죽로(竹爐)란 차를 달일 때 솨아~ 하는 소리가 대밭의 댓바람소리와 같다고 해서 운치있게 부르는 말입니다.


삼성각(三星閣)


  

삼성각(三星閣) <참고사진>   



                                                    삼성각 내부에 모셔진 독성, 산신, 칠성탱화 (시계방향) <참고사진>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앞 석등(石燈)/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앞 석등(石燈) /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앞 석등(石燈)/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와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8호


이 석종은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난 고려말기의 승려 나옹(懶翁, 1320-1376)의 사리를 모신 종모양의 부도(浮屠)입니다. 공민왕의 왕사였던 승려 나옹이 고려 우왕2년(1376)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경상남도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이 절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 제자들이 우왕5년(1379) 절을 크게 다시 짓고 절 뒤의 좋은 자리를 택해 부도를 마련하였습니다. 부도의 기단 위에 돌을 깔고 기단의 앞면과 양쪽면에 2단의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계단에 문양을 새겨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그 위에 모셔진 이 석종의 모양은 완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부분에서 수정이 되었으며 맨 꼭대기에는 보주(寶珠:연꽃 봉오리 모양의 장식)를 조각하였는데, 이 석종의 크기는 높이 160cm, 지름110cm입니다. 부도 뒤편에 있는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의 내용에 의해 이 석종이 만들어진 시기를 고려 우왕5년(1379)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륵사 자료>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앞 석등(石燈)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앞 석등(石燈): 보물 제231호


이 석등은 보제존자 나옹의 부도를 밝히기 위해 서있습니다. 정면 팔각형의 구도를 지닌 이 석등은 일반적인 석등과 마찬가지로 화강석을 사용하고 있으나 등불을 앉히는 화사석은 납석[곱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높다란 팔각형의 지대석 위에 놓인 기단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있고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석등은 나옹이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난 뒤 부도를 세웠던 고려 우왕5년(1379)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려 후기 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무덤 앞에 놓이는 장명등(長明燈)의 선구적인 예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신륵사자료>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앞 석등(石燈)


화사석의 높이는 67cm, 전체의 높이는 193cm이며 팔각형인 지붕돌의 추녀 끝은 살짝 들어 올려졌고 지붕돌 위에는 복발(覆鉢)과 보주를 놓아 상륜부를 구성하고 있고  납석으로 된 화사석은 높게 만들어졌습니다.


                간주석(竿柱石)


간주석(竿柱石)에는 연주문(連珠紋)으로 구획을 나눈 후 그 안에 亞자형의 안상(眼象)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상대석에도 하대석과 마찬가지로 연꽃을 새겼습니다.


                팔각 화사석(火舍石)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팔각 화사석은 조각이 쉬운 납석(蠟石)으로 기둥에는 용을 새기고  화창위에는 비천상을 두툼하게 조각하여 화려합니다.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이 비는 고려 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비입니다. 나옹이 말년에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절 북쪽 언덕에 종 모양의 부도를 세워 그의 사리를 안치하고 이를 계기로 그의 초상을 모실 진당을 짓는 등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습니다. 뒷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제자와 시주자의 명단, 중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있습니다. <신륵사 자료>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신륵사 보제존자석종기(普濟尊者石鐘記) 내용


선각왕사(禪覺王師)인 보제존자(普濟尊者)가 여흥(驪興)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스님이 입적할 때 혁혁한 영험(靈驗)과 이서(異瑞)에 대하여 한 때 의심하였던 각신(覺信)스님이 더욱 분발하여 천년 후에까지 모든 불자(佛子)들에게 신심을 일으키게 하고자 진영당(眞影堂)을 짓고 영정을 모시는 한편, 석종탑(石鐘塔)을 만들어 사리(舍利)를 조장(厝藏)하였으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난 셈이다.


각신(覺信)스님은 석종(石鐘) 불사(佛事)를 맡아 주선하고 각주(覺珠)스님은 비석에 사용할 돌을 구하는 한편 장차 스님의 행적(行跡) 사실을 비석에 새기고자 비문을 이색(李穡)에게 청탁하기로 하였다.


이 때 염(廉) 정당(政堂)이 천녕(川寧)에 있으면서 자주 신륵사에 왕래하였다. 각주(覺珠)스님이 염(廉) 정당(政堂)에게 이를 부탁하였더니 공(公)이 기꺼워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곧 개경(開京)으로 가서 마땅히 스님을 대신하여 한 말씀을 한산자(韓山子)에게 청(請)하겠습니다. 그러면 한산자는 반드시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염(廉) 정당(政堂)이 나에게 진당기(眞堂記)를 청원(請願)하므로,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강월헌(江月軒)은 나옹스님의 주석(住錫)하던 당호(堂號)인 것이다. 보제(普濟)의 육신은 이미 불에 타서 없어졌으나, 여천강(驪川江)과 달은 전일(前日)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지금도 신륵사(神勒寺)는 장강(長江)을 굽어보고 있으며, 석종탑(石鐘塔)은 강변 언덕에 우뚝 서 있다. 달이 뜨면 달 그림자가 강물 속에 거꾸로 비치어서 천광(天光)과 수색(水色)과 등불 그림자와 향불 연기가 그 가운데 서로 교잡(交襍)하니, 이른바 강월헌(江月軒)은 비록 진묵겁(塵墨劫)이 지나가더라도 보제선사(普濟禪師)의 생존시(生存時)와 조금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제 보제(普濟)의 사리(舍利)는 사방으로 흩어져서 혹은 하늘 높이 올라가 운무(雲霧)중에 있고, 혹은 여염(閭閻)의 연진(烟塵) 속에 있으며,혹은 사리함에 모시고 목에 걸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기도 하고, 혹은 그 사리를 잠잘 때에도 항상 팔 곁에 모시고 자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극진히 사리(舍利)를 봉지(奉持)하는 것을 생전에 스님을 존경하던 것과 비교하면, 백배 이상으로도 견줄 수 없다. 하물며 신륵사는 나옹이 입적(入寂)한 곳이므로, 마땅히 각주(覺珠)스님이 사리(舍利)에 대하여 온 정성을 다하였다. 


신륵사는 보제(普濟)스님으로 말미암아 그 이름과 규모가 높고 넓어졌다. 그러므로 장차 그 이름이 영원히 빛나며, 석종탑비(石鐘塔碑)도 견고하여 신륵사와 더불어 시종(始終)을 같이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여천강(驪川江)과 이 달과 더불어 무궁할 것이다. 


오호라! 허공에서 보이는 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눈병 때문이며, 진묵겁(塵墨劫)도 또한 인간의 분별이지 결코 긴 시간이 아닌 것이다. 세계에는 성(成)·주(住)·괴(壞)·공(空)의 변천이 있어 세계가 비록 성(成)·주 (住)·괴(壞)·공(空)에 따라 변천하지만 우리들의 인성(人性)은 영원히 불변자약(不變自若)한 것이다. 


보제(普濟)의 사리(舍利)가 장차 세계와 더불어 성괴(成壞)함이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인성(人性)과 같이 자약(自若)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비록 우부(愚夫)와 우부(愚婦)일 지라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후세에 이 사리에 예경(禮敬)하는 사람들은 보제(普濟)스님의 고상한 도풍(道風)을 흠모하고 귀의하여 그의 마음을 구(求)하는 것이어야 비로소 가히 보제(普濟)가 끼친 큰 은혜에 보답함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보제의 도덕은 보제에게만 필요한 것이지 결코 우리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에 대해 보제의 사리석종기(舍利石鐘記)를 기록하는 바이다.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지대석(地臺石) <참고사진>

 

비(碑)는 2단의 지대석 위에 연꽃 무늬를 새긴 비좌를 얹어 비몸을 세웠으며 비몸 양옆에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지붕 모양으로 된 개석<蓋石>을 얹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말기에 유행한 석비형식으로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도 같은 형식입니다.



조사당(祖師堂)



 15:28 /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180호





조사당(祖師堂) 내부



 삼화상진영(三和尙眞影): 나옹화상, 지공화상, 무학대사 (왼쪽부터)







석조승탑(石造僧塔)




 석조승탑(石造僧塔)


                                                   원구형석조승탑(圓球形石造僧塔) <참고사진>



 팔각원당형석조승탑(八角圓堂形石造僧塔)



탑신석(塔身石)에는 사각 형태로 문(門)을 새기고 범(梵)자를 돋을 새김 하였습니다.



보호수(保護樹)



 조사당 앞 수령 600년 향나무: 높이 5m, 둘레 1.3m



명부전(冥府殿)

           


 명부전(冥府殿)


                                     현판



명부전 불단(佛壇): 무독귀왕, 지장보살, 도명존자 (시계방향)  <참고사진>


명부전(冥府殿)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해서 시왕(十王)을 모시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합니다. 전각 내 중앙에는 저승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모두 구원하기 전에는 성불을 하지 않겠다고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하여 그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모셔놓았습니다.


 

신륵사 명부전에 모셔진 조상(像)들은 모두 목각으로 그 각법이 사실적이며 생동감이 넘쳐 조선 중기 조각의 극치를 보는 듯하며 특히 해학적인 모습의 신장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짓게 합니다. 조각의 기볍으로 보아 이 목각상들은 현종 감수항이 신륵사를 중수했던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륵사 자료>


 시왕상(十王像)


좌우로 명부(冥府)의 10명의 시왕(十王)들이 차례로 안치되어 있고 이밖에 판관(判官), 녹사(綠事), 장군(將軍) 등의 존상(尊像)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봉송각(奉送閣)



봉송각(奉送閣)



봉송각(奉送閣)과 소대(燒臺)



관음전(觀音殿)



관음전(觀音殿)


중생구제를 위한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전각으로 최근에 건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비전(大悲殿), 보타전(菩陀殿)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주불전일 때는 원통전(圓通殿) 또는 원통보전(圓通寶殿) 이라 부르며, 부속 전각일 때는 관음전(觀音殿)이라 부릅니다.



관음전(觀音殿) 내부


관음전 내부에는 가운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그리고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행상용왕을 협시로 모시고 있습니다. 



범종각(梵鍾閣)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은 범종, 법고, 운판, 목어 즉 불교에서 말하는 사물(四物)을 조성하여 둔 곳입니다. 범종(梵鍾)은 그 소리로 인하여 일체 중생이 번뇌로 부터 벗어나 지헤를 증장하고 깨달음을 얻게하는데 그 의미가 있으며, 법고(法鼓)는 축생의 무리에게, 목어(木魚)는 수중의 생명에게, 운판(雲版)은 하늘을 나는 생명에게 부처님이 진리를 전해 해탈 성불을 염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침, 저녁 예불 때 법고, 목어, 운판, 범종 순서로 치게됩니다. <신륵사 자료>


범종각(梵鍾閣)


종을 매달아 놓은 곳이라 하여 종루(鍾樓)라 부르기도 하며, 북을 매단 곳을 고루(鼓樓) 또는 고각(鼓閣)이라 하지만 대개 절의 사물(四物)이 함께 안치되어 있어 통칭하여 종각(鐘閣)이라 부릅니다.


 범종(梵鍾)



 법고(法鼓)와 목어(木魚)



운판(雲版): 범종과 법고 사이 <참고사진>



기타




청자(靑磁亭): 우물


15:38


 입구에 위치한 누각


 템플스테이 건물


  15:45 / 일주문을 나섭니다.


 15:57 / 여주 신접리 고인돌




여주 신접리 고인돌


16:01 / 신륵시 관광순환버스 정류장 도착


  신륵시 관광순환버스정류장에서 '가'노선 16시03분 발 관광순환버스를 환승하여 명성황후생가(明成皇后生家)로

      이동합니다. (21분 소요) 




                              신륵사(神勒寺) / 여주(驪州)-3

                          (2019.03.24)

================================================================================================================================